58화
이렇게까지 유디트의 장단에 맞춰 줄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변덕이었다.
원래 나는 기분에 따라 행동할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네……?”
유디트는 말귀를 바로 알아먹지 못한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나를 쳐다보았다.
먼저 옆쪽의 빈 공간에 선 내가 재촉하듯이 손을 내밀고 나서야 그녀는 당황해서 후다닥 달려왔다.
“고개 들고, 허리 펴고. 다리 위치는 반대.”
바닥에 잔디가 깔려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 우리 둘 다 연회용 높은 구두를 신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음악 대신 산들바람이 정원을 휘감았지만 스텝과 박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몸에 익은 상태라 상관없었다.
내가 리드해 춤을 추기 시작하자 유디트의 몸이 굳어졌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으니 처음부터 완벽하게 하려고 생각하지 마.”
생각대로 유디트는 서툴렀다. 그래서 내 발등을 밟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유디트는 지뢰를 밟은 사람처럼 소스라쳤다.
“괜찮으니까 계속 움직여. 연회장에서도 마찬가지야. 실수는 해도 돼. 다만 티를 내지는 마.”
하지만 중간부터는 유디트도 많이 안정되어 곧잘 나를 따라왔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던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있었다.
“몇 번만 더 연습하면 되겠네. 너도 배우는 속도가 빠르구나.”
“‘너도’요?”
“아, 있어. 그런 사람.”
제라드를 잠깐 떠올렸다가 머릿속에서 지웠다. 유디트는 나한테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눈치 있게 입을 다물었다.
우리 둘의 치맛자락이 튤립처럼 둥글게 펼쳐졌다.
내가 이끄는 대로 한 바퀴 몸을 돌린 유디트가 대신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제가 연회에서…… 다른 사람하고 춤을 출 일이 있을까요?”
이럴 때 보면 유디트는 정말 황궁 사람들 누구보다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배워 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겠지.”
무심하게 툭 던진 말에 유디트가 나와 맞잡은 손을 움찔거렸다.
“저는…….”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중얼거렸다.
“1황녀님하고 또 춤추고 싶어요.”
실바람에도 쓸려 갈 듯이 아주 자그마하고 여린 음성이었다.
유디트의 말을 듣고 연회장에서 그녀와 내가 지금처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광경을 문득 상상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 특히 우리 부모님을 포함한 황족들이 얼마나 경악할지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났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나는 꼭 못된 장난을 떠올린 진짜 열네 살의 악동처럼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 호응에 놀란 듯이 유디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는 내 입가에 그려진 미소를 보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나를 따라서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마침내 대망의 황궁 연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계절마다 황실 주관으로 열리는 황궁 연회는 늘 저녁 시간에 시작되었다.
올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입장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오후 7시.
지금 시간이면 귀족들은 이미 대부분 연회장에 들어가 있거나 이미 근처까지 와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황족들과 귀족들이 입장하는 문은 달라서,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복도에는 내 뒤를 따르는 시녀들 말고 다른 사람이 없었다.
“유디트, 긴장되니?”
그러다 귀에 울리는 발소리가 아까부터 부자연스럽게 삐걱대는 것을 느끼고 시선을 내렸다.
내 옆에는 오늘 처음 둥지 밖으로 나온 새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여자애 한 명이 있었다.
“아니요……. 아니, 네, 조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연회에 어울리게 처음으로 제대로 단장한 유디트는 그래도 오늘 좀 황녀다워 보였다.
내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던 보라색 드레스가 유디트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민들레처럼 샛노란 눈, 그리고 흰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오늘의 자신이 낯설고 어색한 눈치였다.
나는 자꾸만 치마의 레이스를 잡아 뜯는 유디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네 옆에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
그러자 유디트가 손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봤다. 복도에 있는 조명에 비친 금색 눈이 반짝였다.
나는 유디트를 보며 미소를 지어 줬다. 그러자 유디트도 곧 나를 따라 웃었다.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긴장이 풀린 듯한 얼굴이었다.
“허? 지금 내 눈이 삐었나?”
그때 맞은편 복도에서 놀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시선을 들자 라미엘과 클로에가 보였다. 공교롭게도 입장 시간이 겹친 모양이다.
그들도 오늘의 연회를 위해 정성껏 꾸민 모습이었다.
특히 라미엘의 몰골은 장신구를 몇 개를 달았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지난번의 일 때문인지, 라미엘은 처음에 약간 서먹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참기 어려운 듯이 나를 보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르벨라, 너…… 와, 진짜.”
더 정확히 말하면, 옆에 유디트를 데리고 있는 나를 보고 진심으로 놀란 듯했다.
“베, 벨라 언니, 왜 여기를 쟤랑 같이…….”
클로에도 라미엘 못지않게 나와 유디트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클로에는 거기에서 입을 다물었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부채를 쥔 손을 파르르 떨면서도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일전에 제라드를 건드린 일로 라미엘이 호되게 곤욕을 치른 걸 봐서 그런 듯했다.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했네. 아무튼 진짜 대단해, 우리 누이는?”
“알면 됐어. 그런데 난 그런 꼴로 연회에 참석하려는 네가 더 대단한 것 같은데.”
“뭐? 내 모습이 뭐 어때서? 질투는 추해, 아르벨라.”
그래도 어쨌거나 라미엘과 나는 거의 평소처럼 대화를 나눴다.
사실은 나도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이 남매에게 무른 면이 있었다.
라미엘의 뒤에서 조용히 분위기를 살피던 클로에가 살짝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내 옆에 있던 유디트도 클로에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라미엘과 내가 화해해서 잘됐다는 듯이 헤헤 웃기까지 했다.
물론 라미엘을 처음 보자마자는 몸을 움찔 떨긴 했지만 그건 잠깐뿐이었다.
나는 그게 살짝 황당하고 이해가 안 됐다.
사실 유디트의 입장에서는 라미엘의 얼굴도 보기 싫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얘는 진짜 착한 거야, 바보 같은 거야?’
그래도 오늘은 구박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서 등을 토닥여 줬다.
그러자 클로에가 부채를 쥔 손에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세게 힘을 줬다.
클로에가 노려보는 것이 무서웠는지, 유디트가 움찔거렸다.
그러다가 결국 유디트는 살금살금 뒷걸음질 쳐 내 뒤로 숨었다.
“하!”
클로에의 입에서 기가 막히다는 듯한 날카로운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클로에는 유디트를 잡아먹을 것처럼 보면서도 속이 터진다는 듯이 손으로 가슴을 퍽퍽 칠 뿐, 다른 시비를 더 걸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유디트에게 시선을 두었다.
“유디트, 아까 연회장 복도에 있는 벽 장식을 구경하고 싶댔지? 어차피 우린 조금 있다 입장할 거니까 지금 잠깐 보고 올래?”
“연회장에 지금 들어가지 않아요?”
내 말에 유디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에게 알려 주듯이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유디트.”
“네?”
“난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입장해 본 적이 없단다.”
원래 연회의 주인공일수록 늦게 등장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보다 서열이 높은 황족 어른들보다 늦을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같은 항렬인 황녀, 황자들 사이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연회장을 밟을 자격과 권리가 내게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 처음 와 보는 유디트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러다 그녀가 뒤늦게 깨달은 듯, 손뼉을 짝 치면서 외쳤다.
“아! 다른 황녀, 황자님들이 무사히 연회장 안으로 다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면서 기다려 주시는 거군요! 역시 1황녀님은 배려심이 넘치세요!”
당연히 헛발질이었지만, 유디트는 진심으로 내게 감복했다는 듯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무슨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을 인솔하는 교사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니, 유디트…….’
라미엘과 클로에도 어이없다는 듯이 유디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렇지. 내가 좀 배려심도 많고 친절하지.”
정말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유디트가 잠깐 나와 다른 두 녀석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또 한 번 눈짓하고 나서야 그녀는 안심한 얼굴로 웃으며 벽 쪽에 있는 갑옷 장식으로 다가갔다.
아까 처음 복도를 걸을 때 일렬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녀가 흥미를 가졌던 갑옷 장식이었다.
어차피 이 복도에는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 말고 다른 외부인도 없었다.
또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에 유디트에게 우리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거리도 떨어져 있었다.
유디트가 다른 곳으로 가자마자 라미엘이 소리를 낮추어 내게 속닥거렸다.
“아르벨라, 난 가끔 정말 네가 제정신이 맞나 싶어.”
황족들뿐만이 아니라 귀족들까지 참석하는 연회에 황실의 치부라 불리는 유디트를 떡 하니 데려왔으니 반응이 이럴 만도 하지.
“도대체 오늘 여기에 쟤를 왜 데려온 거야?”
라미엘은 여전히 유디트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래도 지난번에 나한테 경고받은 게 있어서 그런지, 서늘한 눈으로 멀리 있는 유디트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오늘 날씨가 어떻니, 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가볍게 답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라미엘은 내 답변에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비식거리는 웃음을 재차 내뱉었다.
“벨라 언니, 쟤랑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클로에가 내 팔을 붙잡고 속닥였다.
그녀는 경계심 어린 눈빛을 유디트에게 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질투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유디트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클로에의 손을 한번 잡으며 웃어 주었다.
“오늘 귀엽게 꾸몄구나, 클로에. 이따 연회장 안에서 보자.”
눈치 있는 라미엘이 미련 어린 눈빛을 보내는 클로에를 데리고 먼저 연회장의 문 안으로 들어섰다.
“가자, 유디트.”
잠시 후 나와 유디트도 문 앞에 섰다.
“네, 1황녀님!”
내 눈짓을 받은 시종이 정말이냐는 듯이 동공을 흔들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큰소리로 외쳤다.
“아, 아르벨라 레온 카뮬리타 1황녀 전하와 유디트 카뮬리타 4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렇게 나는 유디트의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