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57화 (73/203)

57화

* * *

클로에의 생각대로 2황비는 방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1황녀가…… 볼 때마다 건방진…….”

실수로 살짝 열어 놓은 듯한 문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클로에는 숨을 들이켰다.

그것이 아까 만난 쥬논 그레이엄 후작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내 기분을 나쁘게 하면 곤란하단다, 클로에.”

기억에 남은 속삭임을 떠올리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나 라미엘이나 1황녀한테 아주 나쁜 버릇이 들었어. 이제는 나이가 좀 들었다고 잔머리를 굴리면서 이 외숙부를 피하기나 하고 말이다.”

“또 후작저에 있는 사브리엘을 보러 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내가 없는 시간을 내서 또 너희들을 직접 교육시키지 않을 수 있게 해 다오.”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다행히 2황비 카타리나와 그레이엄 후작은 대화에 집중하느라 클로에의 발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더 늦기 전에 다른 수를 써야…….”

‘그런데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열린 문틈으로 카타리나의 얼굴이 껄끄러운 듯이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궁금한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클로에는 그레이엄 후작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문에서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후작. 그런 노골적인 방법을 쓰는 건 너무 이른 게 아닌가? 혹시 배후를 들키기라도 하면 위험…….”

“2황비님.”

하지만 클로에가 막 돌아서려던 찰나, 얼음장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독초로 자랄 게 뻔한 이상 미리 싹을 뽑아 두는 게 좋습니다. 1황녀는 분명 우리에게 지금보다 더 큰 해가 될 겁니다. 2황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클로에의 입에서 조금 전보다 더 큰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스스로도 깜짝 놀라 급히 입을 막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늦은 듯했다.

“잠깐…….”

“갑자기 왜 그러지?”

“문 쪽에서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그 직후 문으로 발소리가 다가와서, 클로에는 일단 급한 대로 구두를 벗어 들고 복도를 달렸다.

그러고는 복도 구석에 있는 장식장 옆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몸을 전부 숨기기에는 장식장이 작아, 아무래도 들킬 것 같았다.

클로에는 황족치고 마법에 재능이 없었고, 특히 은신 마법이나 이동 마법 같은 건 쥐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식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다른 숨을 곳을 찾아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때, 돌연 벽에 그려진 그녀의 그림자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문을 열고 나온 그레이엄 후작이 복도를 확인했다.

황궁 내에서 황족이 아닌 자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제약이 걸려 있어, 그레이엄 후작은 수색 마법을 펼치지 못하고 직접 복도 끝에 있는 장식장 뒤편까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아무도 없군.”

그를 뒤따라 나온 카타리나 황비가 괜한 의심을 한다는 듯이 흥, 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나. 내 방이 있는 3층에는 지금 다른 사람들이 허락 없이 올라오지 못하게 결계 마법이 둘러져 있다고.”

하지만 막상 그 말을 하는 동안 2황비 카타리나는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멈칫했다.

분명 시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3층에 올라오지 못하지만 자신과 같은 혈연을 가진 이들은 제외였다.

그러니 카타리나의 쌍둥이 남매인 쥬논 그레이엄을 포함해, 그녀의 아이들은 얼마든지 이곳을 드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곧 표정을 펴고 아무렇지 않게 그레이엄 후작에게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방금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지.”

“……알겠습니다. 제 말 흘려듣지 마시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카타리나 2황비와 그레이엄 후작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잠시 후, 아무도 없던 복도의 장식장 뒤에서 분홍색 드레스 자락이 쏟아졌다.

“와, 간 떨어질 뻔했네. 야, 클로에. 넌 왜 갑자기 튀어나와서 사람 깜짝 놀라게 만드냐?”

그림자에서 나온 라미엘도 구겨진 옷을 탁탁 털면서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클로에는 다른 생각에 정신을 빼앗겨 라미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방금 어머니와 외숙부가 무슨 얘기를 한 거지?’

독초?

싹을 뽑아 둔다고?

언젠가 방해가 될 거라서?

1황녀 아르벨라가 그들에게……?

가슴이 쿵쿵거리면서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클로에는 왠지 들어선 안 될 소리를 들은 것 같은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혔다.

쥬논 그레이엄 후작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만큼, 쉽게 떨칠 수 없는 불길한 생각이었다.

“야, 클로에.”

그때, 굳어 있는 클로에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라미엘이 허리를 숙였다. 차가운 손이 클로에의 얼굴을 붙잡아 올렸다.

“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어머니한테 변명이나 잘해. 여기서 나 봤단 소리는 하지도 말고. 그래도 방금 내가 너 도와준 보답은 해야지?”

그는 초점이 돌아온 녹색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아마 어머니도 껄끄러운 게 있으니까 너한테 자세히 캐내려고는 안 할 거야. 내 말 알아들었어?”

클로에는 아르벨라와 똑같은 라미엘의 연푸른 눈을 마주하며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 보니 라미엘은 너무 태연했다. 갑자기 2황비 궁에 때마침 나타나서 그녀를 도와준 것도 그렇고, 또 지금 그가 한 말을 미루어 짐작해 봐도…….

“오빠는…… 알고 있었어? 어머니랑 외숙부가 언니를…….”

많은 것을 생략한 말이었지만 의미를 알아차리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

라미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라미엘이 그랬듯이, 클로에도 그것만으로 그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 그럼…… 그럼 어떡하지?”

“뭘 어떡해?”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클로에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걸 잠깐 말없이 보던 라미엘이 이내 피식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가만히 안 있으면 뭐 어쩔 건데?”

꼭 비웃는 것 같은 말에 클로에가 발끈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라미엘의 말에는 그녀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야, 클로에. 뭘 알든 모르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어차피 우리 지금은 아무것도 못해. 너도 알잖아?”

그 말이 맞았다. 상대가 그레이엄 후작인 이상, 클로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라미엘과 클로에는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이 좀 심했다 싶었는지, 라미엘이 한 박자 늦게 클로에를 안심시키듯이 덧붙였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래도 우리 어머니가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너도 괜히 위험한 짓 하지 마.”

클로에는 가까스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빠 말이 맞아.”

“그래. 그럼 일단 시간 없으니까 난 먼저 간다.”

그레이엄 후작을 배웅 나간 카타리나가 곧 돌아올 때였다.

그래서 라미엘은 일단 여기서 대화를 마무리 짓고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클로에는 장식장 뒤에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조금 전에 들은 라미엘의 말을 상기했다.

‘그래,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어머니도 동의하지 않으셨잖아. 게다가 뭘 한다는 건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고…….

‘그냥 기분이 나빠서 한번 해 본 말일 수도 있어. 외숙부는 벨라 언니를 싫어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뇌어 생각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돌멩이를 강제로 하나 파묻은 마음은 여전히 좀 불편했다.

15. 황궁 연회

“1황녀님……. 저,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잠깐 다른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시야에 불쑥 나타난 얼굴에 정신을 차렸다.

어디선가 꽃을 한 아름 꺾어 들고 돌아온 유디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정원에서 유디트와 함께 다과를 들고 있었지.’

그러다가 유디트가 내게 뭐라고 말하며 허락을 구한 뒤에 잠깐 한쪽 구석으로 사라졌던 것 같은데…….

이미 그때부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이유가 뭐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니. 정원에 햇빛이 비친 모습이 보기 좋아서 잠깐 감상하고 있었어.”

“아, 그렇죠? 저도 좋아해요.”

그냥 적당히 이유를 가져다 붙인 것뿐인데 유디트는 얼굴이 밝아져서 열렬히 호응했다.

“1황녀님, 그리고 이거 조금 전에 말한 선물이에요.”

이어서 약간 쭈뼛거리던 유디트가 내게 안겨 준 것에, 나는 눈매를 작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정원에서 제일 예쁘게 핀 것들만 골랐어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려 풍성한 꽃잎을 매만졌다.

“1황녀님이 만들어 주신 정원이잖아요. 그래서 꽃이 다 피면 선물로 드리고 싶었어요.”

기억은 안 나지만 조금 전에 나한테 선물을 주겠다면서 자리를 비웠던 건가?

“그리고…… 지금 제가 1황녀님이 드실 차를 직접 만들어 드려도 될까요?”

오늘따라 유디트가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며칠 동안 또 마법사의 열병 때문에 앓고 난 뒤라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게 티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허브티를 마시면 마음이 안정되고 불면증에도 좋대요.”

“아, 지금 내가 정서 불안처럼 보인다고?”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냥 제가요! 저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요.”

일부러 심술궂게 꺼낸 말에 유디트가 질겁했다.

전전긍긍하면서 내 기분을 살피는 모습에 단단하게 뭉쳐 있던 속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 허브티도 괜찮지.”

선선히 수락하자 유디트가 시녀를 불렀다.

전에는 뭐만 하면 직접 움직이려고 해서 몇 번 주의를 줘야 할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걸 가져다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꽤 자연스러웠다.

잠시 후 유디트가 직접 우려 준 허브티를 한 잔 마시고 나서 그녀에게 지나가듯이 물었다.

“그런데 유디트. 요즘 공부 중인 건 어떻게 되어 가지?”

요즘 유디트는 황궁 연회 때의 예법과 사교댄스를 배우고 있었다.

“저…… 열심히 배우고는 있는데 잘하는지는 모르겠어요. 가끔 순서를 헷갈릴 때도 있어서…….”

유디트가 내 질문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자신감 없이 말했다.

‘저 버릇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군.’

나는 눈썹이 축 처진 유순한 얼굴을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찻잔을 툭툭 쳤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가 남자 역을 할 테니까 한번 춰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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