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56화 (72/203)

56화

* * *

“언니, 저기……. 미안. 내가 라미엘 오빠를 말리지 못해서…….”

다시 만난 클로에는 기가 팍 죽어 있었다.

그녀는 지난 일주일 동안 1황녀궁에 거의 50통에 달하는 편지를 보냈다.

전부 다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구구절절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이 정도면 그냥 무시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됐어, 네가 한 것도 아니고. 라미엘하고 내 일이야.”

별로 특별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클로에는 감동한 얼굴로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내 옆에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선 클로에가 조금 전보다는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크흠. 저기, 언니는 황궁 연회 때 누구랑 파트너 할 거야? 역시 베른하르트 소공작이지?”

“클로에, 그때 내가 거절한 걸 너도 봤을 텐데?”

“그 후로 소공작이 다시 연락 안 했어?”

“안 했어.”

“어우, 뭐야!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뭐 그렇게 싱겁대! 한번 거절당했다고 겁먹은 거야, 뭐야?”

클로에가 눈을 빛내고 있다가 분개했다.

괜히 혼자 설레발을 치다가 화를 내는 클로에의 모습이 실소를 불렀다.

‘어차피 킬리안도 그냥 한번 찔러 본 것 같던데 뭘 혼자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람.’

“그럼 누구랑 가려고?”

“아직 결정 안 했어.”

시큰둥한 내 반응에 클로에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산책로를 걷다가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마주친 건 잠시 후였다.

“이런, 1황녀님과 2황녀님을 여기에서 뵙는군요.”

“앗……! 외, 외숙부님.”

시야에 들어온 건 얼마 전에도 봤던 쥬논 그레이엄 후작이었다. 클로에와 같은 푸른 머리카락이 꽃덤불 사이에서 나부꼈다.

아까와 달리 어색한 웃음을 단 클로에의 얼굴은 약간 희게 질려 있었다.

나는 그런 클로에를 슬쩍 살폈다.

‘또 이러네.’

예전부터 클로에와 라미엘은 제 외숙부인 그레이엄 후작을 보면 얼굴이 굳고, 지금처럼 꼭 긴장한 듯이 몰래 주먹을 그러쥐곤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저들의 가족 문제고, 바깥에는 이야기가 새지 않아 나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내가 본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도 그레이엄 후작은 악녀 하수인이던 클로에만큼이나 비중이 애매해서,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잘 나오지 않았었다.

나는 클로에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척 다가온 남자를 향해 마주 짧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 그레이엄 후작. 2황비님을 뵙고 가는 길인가?”

“예, 화원의 운치가 아주 좋더군요.”

그레이엄 후작도 내게 인사했지만 그의 눈빛은 탐탁지 않은 빛을 띠고 있었다.

지난번에 내 속을 긁으려 시도했으나 킬리안 때문에 실패해 기분이 언짢은 기색이었다.

‘그게 벌써 며칠 전의 일인데, 속 좁은 인간 같으니.’

하지만 오늘은 나를 상대할 마음이 없는 듯, 뱀처럼 싸늘한 눈이 금방 나를 떠나 클로에에게 향했다.

“그보다 이렇게 만난 김에 오랜만에 조카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레이엄 후작의 말이 떨어진 순간 클로에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지, 지금요?”

“예, 지금 말입니다.”

평소에 누구의 앞에서든 쉽게 제멋대로 굴던 클로에는 그레이엄 후작의 갑작스러운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곁눈질해 그 모습을 힐끔 본 뒤, 그레이엄 후작에게 말했다.

“그건 어렵겠어, 후작. 클로에와 나는 지금부터 다른 일정이 있어서.”

“그러십니까?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일정을 조금만 뒤로 미룰 수는 없을지요?”

“바로 그 급한 용무라서 말이지. 그럼 살펴 가시길. 가자, 클로에.”

나는 그레이엄 후작의 말을 싹둑 자르고 클로에의 손을 잡았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아까와 달리 클로에는 조용히 나를 따라왔다.

“클로에.”

그때, 햇빛 밝은 한낮임에도 왠지 스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네 어릴 때 친구인 사브리엘이 요즘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구나.”

그 순간 클로에가 멈춰 섰다.

“내게 네 안부를 물어봐 달라고 하던데 전해 주고 싶은 말이 없니?”

가만히 서서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내쉬던 클로에가 이내 나를 향해 웃었다.

“언니, 나……. 오랜만에 숙부님을 만나니 반가워서, 잠깐 이야기 좀 나눠야겠어. 미안.”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사브리엘이라니, 내가 모르는 친구가 너한테 있었나 보구나.”

“으응, 어릴 때 그레이엄 후작가에 놀러 가서 사귄 친구라.”

수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클로에의 얼굴을 보니 이미 마음을 결정해 번복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도움을 청하면 응해 줄 텐데, 클로에는 한 번도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어쨌든 클로에가 직접 선택한 일이라면 나한테 더 끼어들 명분은 없었다.

나는 웃음기 없는 눈으로 클로에를 보다가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래, 그럼. 그레이엄 후작에게 가 보렴.”

그러자 꼭 깊은 물가에서 움켜쥐고 있던 지푸라기를 놓친 것처럼 클로에가 입술을 움찔 떨었다.

나는 클로에를 두고 냉정하게 바로 가 버리는 대신, 손을 들어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만졌다.

“하지만 클로에, 너도 알다시피 급한 일정이라 시간을 많이 미룰 수는 없어. 알지?”

그래도 유사시에 핑계를 댈 이유를 하나 만들어 주자 클로에가 눈망울을 흔들다가 그래도 눈치 있게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그래도 이럴 땐 눈치가 제대로 작동해서.’

“그레이엄 후작. 조카와 오랜만에 마음 편히 담소를 나눌 수 있게 돕고 싶지만, 이쪽도 예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정이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 클로에를 되도록 빨리 보내 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길게 시간 빼앗지 않지요.”

백년 묵은 여우 같은 인간이 나처럼 웃음기 없는 눈을 한 채 입꼬리만 살짝 들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클로에가 내게서 돌아서 그레이엄 후작을 향해 걸어갔다.

나도 그들을 등지고 반대쪽으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

뒤돌아설 때 내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싸늘한 것을 봤는지, 시녀들은 찍소리 하나 내지 않고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나를 쫓아왔다.

아주 오랜만에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지금까지도 저들을 볼 때마다 그랬지만, 오늘은 특히나.

‘다른 건 봐줄 수 있지만, 적어도 이 황궁 안에서 내가 모르는 짓거리를 해서는 안 되지.’

그동안 뒤에서 수작질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닌 데다, 설령 나한테 어떤 불리한 일이 터져도 모두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라미엘처럼 그림자 같은 걸 따로 만든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내 손가락 끝에서 떨어져 나간 조그만 마력 덩어리가 민들레 홀씨가 되어 흩날리는 꽃잎과 나뭇잎 사이에 섞여 쓸려 갔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길을 걸었다.

* * *

클로에는 식은땀이 배어난 손을 옷에 문질렀다.

그녀의 외숙부인 쥬논 그레이엄이 돌아간 지도 시간이 꽤 지났고, 방금은 아르벨라와 다시 만나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도 그레이엄 후작을 만난 날이면 늘 그렇듯이 괜히 몸이 시리고 속이 체할 것처럼 메스꺼워졌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은 가볍게 꾸중만 듣고 끝났어.’

1황녀 아르벨라는 클로에가 아까 이상한 모습을 보였는데도, 다시 만났을 때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런 그녀를 냉정하다고 말할지도 몰랐지만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레이엄 후작이 가끔 황궁에 와서 인사를 핑계로 라미엘과 클로에를 찾을 때마다 일부러 이런저런 이유를 대서 그를 방해해 주던 게 바로 아르벨라였다.

언젠가 지나가듯이 아르벨라에게 고맙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그냥 그레이엄 후작이 볼 때마다 재수 없고 고깝게 굴어서 뜻하는 대로 해 주고 싶지 않아 그런 건데.”

하지만 라미엘과 클로에 모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오늘도 아르벨라는 클로에를 위해 있지도 않은 그녀와의 약속을 핑곗거리로 삼을 수 있게 돌파구를 만들어 주었다.

그게 아르벨라 방식의 다정함이었다.

물론 가끔은 동생들에게도 엄격하게 굴 때가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1황녀로서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유디트, 그깟 계집애에게도 금보다 귀한 동정을 베풀어 주고, 또 백야의 전당에서 비루먹던 놈까지 꺼내 와서 종속 기사로 삼은 게 아니겠는가?

클로에는 아르벨라에게 빌붙은 벌레들을 떠올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의 성질을 긁는 얼굴들을 떠올리자 몸에 서서히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머니 지금 방에 계시지?”

클로에는 모친인 2황비를 찾아갔다.

좀 전에 곧 다가올 황궁 연회 때 아르벨라가 어떤 옷을 입을지 알아낸 것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어머니에게 부탁해 클로에도 의상을 바꿀 생각이었다.

“2황녀님, 잠시 기다려 주시면 2황비님께 방문 소식을…….”

“아, 됐어, 됐어. 먼 사이도 아니고. 나 급해서 먼저 가 볼게!”

“2황녀님, 잠깐……!”

시녀들이 클로에를 말렸으나 그녀는 듣지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어찌 된 일인지 2황비 카타리나의 방이 있는 3층에는 시녀들조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마음이 급해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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