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55화 (71/203)

55화

* * *

제라드의 방에서 나온 나는 이번에는 유디트를 찾아가 달래 주었다.

“정말 무서웠어요. 제가 말실수한 건 맞지만, 1황자님이 그렇게 진심으로 화내시는 건 처음 봐서…….”

유디트는 진짜 많이 놀랐는지 아직도 울먹울먹했다.

나는 그녀를 적당히 위로해 준 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유디트. 라미엘의 환영 공간에 갇힌 제라드를 어떻게 찾아낸 거야? 그리고 그 안으로 어떻게 들어갔지?”

원래대로라면 결계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유디트는 나처럼 라미엘의 환영을 깨부순 것도 아니면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게 의아해서 묻자, 유디트도 어리둥절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지나가는 길에 묘한 느낌이 들어서 가까이 갔더니 이상한 곳에 들어가게 되어서……. 그런데 왠지 공격당하고 있는 사람이 소문으로 들은 1황녀님의 기사인 것 같길래 도와주려고 한 거예요.”

혹시 이것도 유디트의 어머니에게서 이어진 고대 마법 왕국의 혈통 탓일까?

갑자기 또 나도 모르게 살짝 비틀린 마음이 들려고 했지만, 유디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들썩이는 속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아까 네가 라미엘에게 말실수를 했다고 그랬지?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게…….”

유디트는 내 물음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을 한참 꼼지락거렸다.

“저를 죽이면 1황녀님이 1황자님을 미워하실 거라고…….”

“라미엘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유디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과연 라미엘이 날뛸 만하긴 했군.’

“죄송해요. 제가 건방진 소리를 했어요.”

“사실인데 뭘.”

“……진짜요?”

“그럼. 방금 가서 화내고 온 참인데.”

유디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보다가 이내 행복하게 웃었다.

그걸 보니 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그녀의 머리를 또 쓰다듬어 줬다.

그날 라미엘과 클로에에게 서신이 왔지만 확인은 하지 않았다.

* * *

내가 자선 행사에서 암살당할 뻔했다는 소문이 황궁 안에 쫙 퍼졌다.

내가 말한 대로 발푸르기스 마법 기관 소속의 마법사들을 이 잡듯이 뒤진 결과,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잡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죽어 있었다.

아쉽게도 다른 연결점이 더 나오지 않고 단서 하나 없이 주변이 아주 깨끗했던 탓에, 그 사건의 다른 관계자는 더 찾아낼 수 없었다.

황제는 격노했지만, 결국 사건 조사는 거기에서 더 진척되지 않고 벽에 막혔다.

화이트 백작가는 이후로 6개월 동안 줄줄이 계획되어 있던 자선 행사를 전부 취소했다.

그들은 이번 일로 트라우마라도 생긴 것 같았다.

1황비를 포함한 화이트 가문의 모두가 핼쑥해진 얼굴로 내게 몇 번이나 미안함을 표했다.

정작 나는 이번 일에 손톱 끄트머리 하나 부러진 것 말고 다른 타격을 입은 것도 없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놀란 기색이었다.

제라드는 라미엘과 부딪쳤던 사건 이후로 얌전해졌다.

사건 이후 며칠 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걸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놔두었더니 알아서 마음의 정리를 했나 보다.

이번에는 나를 방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자신의 상황을 납득하고 현시점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한 것 같았다.

심지어 마리나가 다시 가르치기 시작한 황실 고용인들의 올바른 마음가짐과 충성심에 대한 교육까지 군소리 없이 받고 있다고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하긴, 백야의 전당 마법사들에 이어 이번에는 라미엘에게 탈출 시도를 저지당했으니 기가 꺾일 만도 한가?

“1황녀님.”

그러나 내가 제라드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요즘 공부하는 기초 교육 수업이 거의 끝나가는데 혹시 이후에는 다른 걸 배워도 될까요?”

늦은 저녁, 복도를 걷고 있는 내 앞에 제라드가 나타났다.

그는 노을 지는 창문 앞에 서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무언가를 요구했다.

“다른 거라니, 뭘 말하는 거지? 따로 하고 싶은 게 있어?”

“몸을 단련하고 싶습니다.”

입을 다물고 제라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고요한 눈이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식은?”

“마법이든, 검이든, 뭐든.”

“생각해 보지.”

짤막하게 답한 뒤 제라드를 스쳐 지나갔다.

“황녀님, 저 건방진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실 건가요?”

“그러게, 성가시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왜 목소리에 웃음이 담겨 있는 건데요…….”

“마리나가 잘못 들었겠지.”

마리나의 말대로 나는 살짝 웃고 있었다.

사실 일전에 밤 산책을 나갔을 때, 제라드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한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제라드는 확실히 얌전해졌지만, 조금 전에 본 그의 눈은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품고 맥동하는 듯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굴종시키는 맛이 있을 것 같아서.

이후로 한동안 제라드를 조금 더 방치했다.

사실 훗날 제라드를 제물로 사용하는 게 목적인 만큼, 그의 정신을 망가뜨려 방에 가둔 다음 성장할 때를 기다리는 편이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러지 않는 것은, 역시 내 귀한 제물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갈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원래 건강한 육신과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마력이 깃들 확률이 높은 법 아니겠는가.

게다가 제라드에게는 어차피 종속 각인에 의한 추적 마법과 또 내가 따로 걸어 둔 보호 마법 등등이 붙어 있어서, 그가 밖을 돌아다녀도 별다른 위험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제라드의 청을 바로 들어주지 않은 건, 역시 나는 좀 못된 성격이라 제라드가 원하는 걸 냉큼 들어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황녀님, 종속 기사의 기초 교육이 끝났는데 이제부터 뭘 가르칠까요?”

“벌써? 빠르네.”

“아예 기본적인 상식 자체가 없어서 그런지, 습득이 빠르더라고요.”

한참 보고를 받던 중에 마리나의 말투가 약간 석연찮은 걸 깨닫고 그녀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역시 마리나는 제라드가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제라드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표정이나 목소리가 살짝 차가워지는 걸 보면 말이다.

처음부터 그녀는 도대체 내가 왜 저런 이단자 따위를 데려왔는지 이해가 안 되는 눈치였다.

그런데 더군다나 이번에는 내 허락도 없이 1황녀궁을 혼자 빠져나갔다는 사실까지 알았으니.

“마침 시간이 났으니 지금 한번 가 보지.”

슬슬 제라드를 한번 보러 갈 때가 된 것 같아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후.

“……이게 뭐야?”

나는 눈앞에 송출되는 영상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제라드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내 눈에 보인 광경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황녀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기본 교육 과정입니다.”

반면 마리나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듯이 당당한 태도였다.

아니, 그러니까 그 기본 교육 과정으로 왜…….

-아르벨라 황녀님, 오늘은 물방울 띄우기 마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 주시겠어요?

-으음, 그건 말이죠. 이렇게 마력을 조금 떼서 물방울을 감싼 다음 위로 들어 올리면 돼요! 참 쉽죠?

“왜…… 내 영상 마력석을 보고 있지?”

하얀 벽에 커다랗게 떠오른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예쁜 소녀는 분명 나였다.

제라드는 마리나의 감독하에 마력석에서 나오는 내 영상을 보고 있었다.

왠지 이 상황이 익숙한 듯이 그의 표정이 담담해서 더 민망하게 느껴졌다.

“황녀님에 대한 존경심와 경애를 키우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지요.”

마리나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반응했다. 정말 자신의 말이 맞는다고 철석같이 믿는 얼굴이었다.

아니, 마리나. 물론 나도 심심할 때 자아도취에 빠져서 내 영상을 보는 게 취미긴 했는데…….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니?’

“그동안 이걸 다 봤어?”

“어머, 황녀님. 다 합해서 49시간 14분 56초밖에 안 되는걸요. 진작 다 보고 지금은 네 번째로 복습하고 있었지요.”

“…….”

“아! 특별히 외부에 유출되지 않은 미공개 영상도 보여 주었답니다. 1황녀궁에서 일하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라 할 수 있지요.”

마리나의 얼굴에 아주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동안 1황녀궁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을 교육시키는 건 모두 마리나에게 일임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그럼 설마 지금까지도 이런 과정을 거쳤던 걸까?

나는 테이블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마력석을 들어 라벨을 확인했다. 그나마 그중 절반 정도는 정상적이라 조금 안심했다.

이 중 반만 내 영상을 담은 마력석이고, 나머지 반은 평범하게 교육적인 내용을 담은 마력석이었다.

이것은 황궁 예법을 포함해 황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와 태도를 알려 주는 영상을 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영상을 송출 중인 마력석을 조용히 멈췄다.

“그동안 수고했어. 이제부터는 다른 걸 가르쳐도 될 것 같아.”

“다른 것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요?”

“오늘부터 제라드를 롬벨 경에게 맡기려고.”

내 말을 듣고 마리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라드도 귀가 쫑긋한 듯이 시선을 움직여 나를 쳐다봤다.

롬벨 경은 아주 가끔 내가 공식적인 일정을 소화할 때 내 뒤에 서는 호위 기사였다.

물론 나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마법사였기 때문에 호위가 따로 필요 없었다.

하지만 황족이 덜렁 혼자 다니는 것도 멋없어 보인다는 게 황제의 의견이라, 외부 활동을 할 때는 꼭 호위를 데리고 가야 했다.

게다가 나 같은 경우는 언제 마법사의 열병이 와서 무력해질지 모른다는 이유까지 더해졌다.

그러니 더욱이 호위를 꼭 데리고 다니라며 황제가 직접 내게 붙여 준 것이 롬벨 경이었다.

“간만에 롬벨 경이 녹봉 값을 할 기회가 왔군요.”

평소에 뺀질거리는 롬벨 경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마리나가 말했다.

아무튼 제라드는 그렇게 해서 원하던 대로 롬벨 경에게 체력 단련부터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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