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라미엘의 눈이 등골을 시리게 만들 정도로 싸늘해졌다.
“그보다 감히 네까짓 게 날 방해하려고 해? 아르벨라가 요즘 좀 상대해 준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 이 겁 없는 잡종이…….”
생각할수록 성질이 났는지, 그래도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유디트의 사정을 봐주고 있던 라미엘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네 머리칼, 볼 때마다 마음에 안 들었는데 말이야. 기분 나쁘게 나랑 똑같은 색이잖아. 그냥 이참에 전부 다 불태워 줄까? 어?”
유디트를 깔아보는 라미엘의 눈이 한순간 잔혹하게 반짝였다.
쌔액!
하지만 라미엘은 잠깐 잊고 있던 사이에 곧바로 자신에게 달려든 소년 때문에 유디트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몸을 피해야 했다.
“네가 이 마법 공간의 주인인가?”
그때까지도 제라드를 노리고 있던 그림자가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라미엘은 붉은 머리칼 사이에서 번뜩이는 은회색 눈을 마주하며 날카로운 웃음을 흘렸다.
“허, 아르벨라는 도대체 뭘 주운 거야.”
아르벨라가 종속 기사로 들였다는 제라드는 저택에서 곱게 자란 귀족 영식이 아니라 꼭 야생에서 살다 온 들짐승 같았다.
지금도 언제든 앞으로 튀어 나가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게 몸을 낮춘 채 전신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키고 있는 그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이것들이 쌍으로 건방을 떨고 있…… 앗!”
그리고 라미엘이 빈정거리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제라드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럴 조짐도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라미엘은 그림자를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급히 몸을 물렸다.
“당장 문을 열어.”
“야, 지금 내가 말하고 있잖아!”
“당장 문을 열라고.”
“아니, 좀 기다리라니까!”
제라드는 분명 무기 하나 없는 맨몸이었지만, 놀랍게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라미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주먹과 발차기를 바쁘게 피해냈다.
사실 제라드가 이렇게 용감하게 라미엘에게 달려든 것은, 그에게 자신을 죽일 마음까지는 없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라미엘이 뒤늦게 신경질적으로 그림자를 쏘아 보냈을 때, 제라드는 또 빠르게 어설픈 마법을 사용해 그를 막아냈다.
라미엘은 이 상황에 진심으로 불쾌감을 느꼈다.
“아, 진짜 다 죽여 버릴까. 짜증 나는데.”
그에게서 낮게 읊조려진 음산한 목소리에 유디트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라미엘의 음성에서는 조금 전보다 더 강한 한기가 느껴졌다.
유디트는 거기에 두려움을 느낀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잠시 후 고개를 든 유디트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 더 큰 결연함이 맺혀 있었다.
“아니요. 1황자님은 그러실 수 없을 거예요.”
“뭐?”
그리고 이어진 유디트의 말에, 라미엘의 얼굴에 어려 있던 날카로운 비웃음마저 깨끗이 사라졌다.
“1황녀님에게 미움받기 싫으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만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검은 그림자로 만들어진 공간 안에 소름 끼치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라드는 문득 뒷덜미를 스친 싸늘한 감각에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쿠구궁, 소리를 내며 마법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사방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검은 나무들이 기괴한 모양새로 꿈틀거렸다.
“이 미친 잡종이…….”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짙은 살기로 물든 목소리가 바닥을 긁으며 그 사이를 가로질렀다.
지금까지의 위협도 사실은 장난이었다는 듯이, 라미엘의 몸에서 이전과 비할 수 없는 위험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지금 널 죽이면 아르벨라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헛소리라도 하고 싶은 건가?”
유디트는 몸을 떨며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아주 멋진 자신감인데. 그래, 그렇게 확신하면 어디 한번 해볼까?”
라미엘은 더 큰 마법식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냥 아르벨라의 종속 기사 놈만 반병신으로 만들고 끝내려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그냥 둘 다 죽여야겠어.’
이번에는 정말 살상의 의지를 담은 마법이 라미엘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날카로운 마력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제라드와 유디트를 덮쳤다.
“헉……!”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어째서인지 라미엘이 허리를 접으면서 피를 토해냈다.
그의 푸른 눈은 경악에 젖은 채 한껏 부릅떠져 있었다.
‘아르벨라의 방어 마법……!’
제라드도 시야에 만개한 황금빛 마법진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쩌저적!
그때, 커다란 소리와 함께 라미엘의 환영 공간에 검은색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또 다른 마법진이 라미엘의 그림자를 지우며 깨진 하늘에 커다랗게 떠올랐다.
조금 전 라미엘에게서 느낀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거대한 마력의 해일이 머리 위에서 그들을 짓눌렀다.
라미엘이 서둘러 마력을 움직였다.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달려와 그의 몸을 덮었다.
바로 그 순간, 아름다운 황금빛 마법진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였다.
거기에 부딪친 그림자가 일시에 갈기갈기 찢겨 사라졌다.
동시에 하늘이 완전히 부서져 쏟아졌다. 눈부신 햇빛이 한순간 시야를 가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제라드는 폭죽처럼 피어난 마법진과 함께 허공에 떠 있는 익숙한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 이런 날은 햇빛 쬐기 싫은데 얼굴 다 타겠네.”
가볍게 투덜거린 아르벨라가 제라드를 내려다보며 시린 연하늘색 눈을 가볍게 접어 웃었다.
“제라드, 산책을 꽤 멀리까지 나왔구나?”
* * *
“뭐야, 혼자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어? 뭐, 뭐야!”
클로에는 갑자기 발코니로 떨어져 요란하게 나뒹구는 라미엘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닥에 널브러진 의자 뒤에서 그가 왈칵 피를 토했다.
“오, 오빠!”
라미엘은 클로에가 급히 시녀들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그림자를 통해 비친 장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다 무엇을 봤는지, 곧 라미엘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내뱉어졌다.
바로 다음 순간, 라미엘과 클로에가 있던 발코니에 익숙한 황금빛 마법진이 나타났다.
거기에서 내려와 발코니의 난간을 딛고 선 아르벨라가 푸른 눈을 싸늘하게 빛냈다.
“라미엘, 너 진짜 혼날래?”
* * *
이동 마법을 시전해 도착한 곳에서 나는 수상한 마력의 파동을 감지했다.
단단히 뭉쳐 있는 마력 덩어리를 깨부수자, 예상했던 대로 내가 찾던 사람이 그 안에서 나타났다.
“1황녀님?”
제라드는 하늘에서 나타난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제라드의 몸에는 그새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 있었다.
물론 그림자들은 내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나는 이미 그것들의 정체를 눈치챈 뒤였다. 그런데…….
“유디트, 너도 여기 있었구나.”
유디트는 그래도 제라드처럼 다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나를 보고 있던 유디트가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퐁퐁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으, 흑……. 1황녀님…….”
긴장이 풀린 듯이 훌쩍훌쩍 우는 모습이 얼마나 불쌍해 보였는지 모른다.
“무, 무서…… 무서웠어요…….”
나는 제라드를 보고 물었다.
“네가 괴롭혔니?”
“아니.”
제라드가 곧바로 대답했다.
사실 이 두 사람을 건드린 범인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제라드를 진짜 의심한 건 아니었다.
‘제라드만이 아니라 유디트까지 같이 해코지하려고 했나? 아니면 그냥 우연히 가까이에 있다가 같이 말려든 건가?’
내가 본 미래에서 유디트와 끈끈한 유대감으로 엮인 것처럼 보인 제라드이니만큼, 이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만난 건 나로서는 꽤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둘 다 나한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 서로에게 관심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어쨌든 나는 일단 마리나를 불러 그들을 둘 다 1황녀궁으로 보내고, 바로 라미엘을 찾아갔다.
“베, 벨라 언니!”
1황자궁에는 라미엘과 클로에가 같이 있었다.
“라미엘, 너 진짜 혼날래?”
발코니에 내려서서, 의자와 함께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라미엘을 싸늘히 내려다봤다.
그는 내 마법에 당해 피를 토한 듯이 입가와 옷을 붉게 적신 채였다.
그런 몰골을 하고 라미엘은 파들거리는 입매를 움직여 웃었다.
“왜 이래, 느닷없이 쳐들어와서.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데?”
“아하, 아무것도 안 하셨다? 그럼 지금 네 꼴은 왜 이런데?”
“내 이번 콘셉트가 병약 미소년이거든. 미리 연습 좀 해 봤지.”
“먹히지도 않을 헛소리 한다. 진짜 평생 병약한 몸으로 살게 해 줘?”
또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하는 게 같잖아서 냉랭하게 반응했다.
클로에가 신경전을 벌이는 우리 두 사람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피 묻은 입가를 태연한 척 손등으로 훔치던 라미엘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그는 잠깐 입술을 꾹 깨문 채 내 얼굴을 보다가, 조금 전보다 한결 낮게 가라앉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그딴 천한 것들을 건드렸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웃기게도 라미엘의 푸른 눈에 떠오른 건 배신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