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 *
쾅!
“젠장, 또 실패했단 말이냐!”
마차에 타고 있던 쥬논 그레이엄이 손에 든 지팡이를 바닥으로 거칠게 내려쳤다.
그의 앞에 있던 수하가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오늘 자선 행사에서 고아원의 아이를 이용해 1황녀 아르벨라를 제거하려 한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1황녀 아르벨라는 예전부터 그레이엄 후작의 노력을 번번이 수포로 만들기 일쑤였다.
심지어 아르벨라는 그레이엄 후작이 꾸민 대부분의 사고를 날벌레 잡듯이 너무나도 가볍게 해결해, 몇 번이나 그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우연을 가장한 사고를 내기 위해 위험한 물건을 그녀의 옆에 가져다 놔도…….
“응? 이 물건, 마법식이 좀 꼬인 것 같은데? 초보 마법사가 만들었나 봐? 마법식이 영 아름답지 못하고 허접하네.”
이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아르벨라가 손장난을 하듯이 가볍게 몇 번 마법식을 건드린 후에는, 그게 무엇이든 위험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정상적인 물건으로 되돌아갔다.
또, 아르벨라가 방문하는 건물에 조치를 취하려 해도…….
“여기 느낌이 왠지 이상하네. 탐지 마법 한 번만 써 보고 들어가지. 응? 뭐가 이상하냐고? 그냥, 말로는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내 마력이 좀 섬세하고 예민한 편이라서. 그래서 가끔 쎄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대부분은 그런 직감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편이야.”
하다못해 그녀가 먹는 음식물에 독을 넣으려 해도…….
“참, 제가 이번에 새로 개발한 마법식이 있는데, 체내에 들어오는 불순물은 그게 뭐든 자동으로 정화되는 마법이에요. 예전부터 우리 황족의 위대함을 시기한 우매한 자들이 있어 역사 속에서도 위험한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지요. 그래서 아바마마와 황실 가족들을 위해 만들어 봤습니다. 이제 언제 어디서든 즐겁고 편안하게 먹고 마시세요.”
이런 식으로 예전부터 이어진 쥬논 그레이엄의 모든 노력은 전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왜 하필이면 카뮬리타에서 가장 강대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1황녀 아르벨라란 말인가!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랗던 그 오만하고 건방진 얼굴을 떠올리자, 그레이엄 후작은 또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후작님. 방금 자선 행사장 안에서 1황녀님이 새로운 마법 해체식을 공개하셨다고 합니다.”
“뭐라고? 마법 해체식이라니, 그건 또 뭐란 말이냐?”
수하의 설명을 들은 그레이엄 후작이 또 지팡이로 바닥을 쾅 내려쳤다.
“이,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그 얘기를 왜 이제 해! 꼬리가 밟히지 않게 지금 당장 가서 처리해라!”
수하를 마차에서 내보낸 뒤, 쥬논 그레이엄은 식은땀이 배어난 머리를 싸매며 욕설을 읊조렸다.
마법을 건 당사자를 이전보다 훨씬 세밀하게 추적할 수 있게 되는 마법식이라니, 생각할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그가 직접 그 망할 꽃다발에 마법을 걸었다면 당장 용의선상에 올랐을 것이 아닌가!
“젠장, 젠장! 그 빌어먹을 것!”
처음에는 그레이엄의 피를 이은 1황자 라미엘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그저 아르벨라를 조금만 견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수록 위기감이 느껴졌다.
차라리 아르벨라의 성격이 조금만 유순했으면 그레이엄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건방진 어린 황녀는 어릴 때부터 사사건건 그의 신경을 긁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는 아르벨라가 그 글렌 라스너의 아들까지 거두어, 꼴 보기 싫은 얼굴이 둘로 늘어났다.
‘그놈도 제 아비와 함께 라스너 저택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레이엄 후작은 그가 저주하는 옛 친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면 그 숲에서라도, 글렌 라스너의 아들은 절대 살아 나가서는 안 되었다.
일부러 오래 고통받고 죽으라고 그 숲에 처박은 것인데, 설마 또 1황녀가 나타나 모든 것을 망쳐 놓을 줄이야.
그레이엄 후작의 눈에서 잔혹한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눈앞에서 없애 버리고 싶어도 이제 그는 1황녀의 것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야 아르벨라와 제라드를 둘 다 갈가리 찢어 없애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은 요원해 보였다.
“젠장……! 으악!”
그레이엄 후작은 분을 못 이겨 또 지팡이로 바닥을 후려치다가 그만 발등을 찍어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분노로 포효하는 그를 싣고 마차는 매끄럽게 도로를 달려갔다.
* * *
그 시각, 황궁.
사실 아르벨라의 생각과 달리 제라드는 도망칠 생각으로 1황녀궁을 나선 건 아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들으면 거짓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처음 의도는 그랬다.
오늘도 제라드의 일상은 다른 날과 비슷했다.
1황녀궁에서의 생활은 백야의 전당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하고 자유로웠다.
아침에 문을 거칠게 두드려 억지로 잠을 깨우는 사람도 없었고, 식사를 엎어 그를 굶기는 사람도 없었다.
굴욕적인 인사를 강요하거나 고된 노동을 강제하는 일도 없었다.
얼굴을 마주쳤을 때 그에게 욕을 하고 우연을 가장해 몸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는 일상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시녀 마리나가 두고 간 1황녀 아르벨라의 영상 마력석을 볼 때면 한가로운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잠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했지?’
그러다 문득 제라드는 방금 그가 떠올린 생각에 위화감을 느꼈다.
곧 뒷머리가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날카로운 경계심이 제라드의 뒷덜미를 스쳤다.
제라드는 백야의 전당을 나온 후 1황녀궁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태를 자유롭다고 느끼다니, 그새 갇혀 사는 생활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건가?
제라드는 굳은 얼굴로 마력석의 작동을 멈췄다.
허공에 물방울을 띄워 무지개를 만들고 있던 귀여운 어린 황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알고 보니 무서운 영상이었어.’
어쩌면 백야의 전당보다 마리나라는 시녀의 수법이 더 악랄하고 교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라드는 자꾸만 자신을 봐 달라는 듯이 반짝이는 마력석에서 어렵게 눈을 떼고 방을 나섰다.
이대로 마력석이 있는 장소에 머물면 저도 모르게 다시 그것을 작동시키고 말 것 같았다.
복도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오는 동안 황녀궁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과 마주쳤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제라드를 붙잡지 않았다. 주변의 기척을 살폈으나 그를 감시하는 듯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까 언뜻 듣기로 1황녀 아르벨라는 오늘 외부 일정이 있어 외출했다고 하는 것 같았다.
제라드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가 곧 정처 없이 이어졌다.
요즘은 지쳐 쓰러지듯이 잠드는 일이 없어져서인지, 라스너 저택에서의 마지막 날을 꿈에서 보는 날이 많아졌다.
가물가물한 시야를 비집고 들어오던 불길한 보라색 빛기둥.
늘 방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연구하는 데 여념이 없던 아버지가 그날만큼은 밖으로 나와 제라드의 방으로 찾아왔던 기억.
“미안하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유를 알 수 없던 그의 사과.
어째서인지 제라드는 그날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불길한 보라색 빛 속에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는 이미 이상한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어디론가 팔려가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숲에 사냥감으로 내던져진 채 굶주린 짐승들을 피해 달아나야 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라스너 저택에서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을 막았다.
그에게 당시의 상황을 캐내려 하던 백야의 전당 사람들은 금단술을 가까이에서 겪은 여파로 생긴 일시적인 기억 상실일 수 있다고 했다.
“미안하다, 제라드…….”
제라드는 그날 보라색 빛 사이로 흘러든 나지막한 사과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 떠올렸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눅눅하게 잠겨 있었다.
어머니가 죽은 이후 그에게 아버지다운 일을 해 준 적은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제라드에게 미안하다고 해 주었다.
‘혹시 금단술에 실패하면 이런 꼴이 될 걸 알았기 때문에 가진 죄책감이든 뭐든…….’
제라드는 살아오는 동안 부친이 자신에게 내뱉어 왔던 수많은 모진 말 대신, 그 마지막 진심 어린 사과만 마음에 담기로 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제라드는 누군가 그의 등을 살포시 떠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에게.
솨아아.
이윽고 제라드는 압도적일 정도로 큰 문 앞에 섰다.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붉은 머리칼이 문의 창살을 따라 핀 장미꽃과 함께 흔들렸다.
지금 제라드의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 해서 1황녀 아르벨라가 자리를 비운 틈에 도망가려는 생각으로 지금 이 앞에 선 건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백야의 전당에 있을 때보다 더한 망설임이 자라 있었다.
그가 1황녀궁에서 보낸 날들은 길지 않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지금껏 살아온 그 어느 날보다 안온했다.
살아 있는 생물은 어떻게든 더 편한 자리를 찾아 몸을 뻗으려는 본능이 있어, 제라드도 금세 이 낯선 편안함에 그대로 잠겨 들고 싶어졌다.
“지금 내 손 잡아.”
문득 그를 받아 주고, 그에게 머물 곳을 준 유일한 소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가 내 마음에 들었거든.”
“갈 곳이 없다면 내 옆에 있어. 너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제라드에게 그 속삭임은 지나치게 달콤해서, 한번 거기에 속절없이 빠져들면 두 번 다시는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라드는 한참이나 문 앞에 서서 창살 사이로 보이는 그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눈앞의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