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 *
“1황녀님.”
아니, 그런데 왜 따라오고 난리야?
“송구하지만 방금 그 말씀은 무슨 의미신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할 일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 뜬금없는 소리에 정말 호기심이 든 건지. 아무튼 킬리안이 나를 따라오며 물었다.
“말 그대로인데 무슨 의미를 따로 물어봐?”
“1황녀님께서 제게 이런 방면의 말씀을 하시는 건 처음이라 몹시 신선하고 새로워서요. 혹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으신 건지 궁금하군요.”
심경의 변화가 있긴 하지만, 그런 얘기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하니.
‘그리고 지금까지는 안 그러다가 왜 오늘은 이렇게 쓸데없이 집요하게 구는 거야?’
그를 또 무시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킬리안도 나를 따라 멈춰 섰다.
하지만 내가 제자리에 선 건 킬리안과 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1황녀님, 저어…… 실례가 아니면 꽃을 드려도 될까요?”
양 갈래로 머리를 묶어 꽃 장식을 한 귀여운 여자아이가 나한테 총총 걸어와서 수줍게 꽃다발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으시군요.”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아르벨라 황녀인데.
나는 뻔한 소리를 하는 킬리안을 무시하고 허리를 숙여 아이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나한테 꽃을 준다니 고맙구나.”
그러고 나서 우아한 황녀님의 미소를 지으며 아이가 내미는 꽃을 받았다.
‘음? 그런데 이건 다른 꽃다발하고 달리 빨간 리본이 아니라 노란 리본이 묶여 있네.’
바로 그때였다.
파앗!
막 손끝이 닿은 순간, 꽃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거의 동시에 눈앞에 하얀 섬광이 번쩍였다.
“1황녀님……!”
킬리안이 황급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퍼엉!
곧 시끄러운 굉음이 자선 행사장 안을 거대하게 울렸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뭐가 폭발했나?”
잠시 후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손에 든 꽃다발을 경멸 어린 눈으로 내려다봤다.
“뭐야? 이 너절한 마법식은.”
꽃다발에서 또 한 번 폭발이 일어나며 펑,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내 마법 결계에 둘러싸여 외부로 피해가 번지지는 않았다.
누군가 실수로 꽃다발에 이런 장치를 해 놨을 리는 없으니 고의인 게 확실했다.
“1황녀님, 괜찮으십니까?!”
기사들과 일부 귀족들이 기겁해서 내게 달려왔다.
물론 제 목숨이 더 귀한 이들은 혼비백산해서 폭발음이 들린 곳을 피해 멀찍이 물러났다.
‘생각지 못한 순작용이네. 이런 식으로 충성심 확인이 다 되는군?’
나는 다가오는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내 팔에 들린 아이를 내려다봤다.
“괜찮니, 아가야?”
원래대로라면 이 정도 아이를 한 팔로 들어올리기 어려웠겠지만 마력으로 힘을 증가시켜서 거뜬했다.
“소공작, 방해되니까 팔 좀 치워 봐.”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킬리안이 내 말을 듣고 꽃과 나 사이를 가로막듯이 중간에 뻗고 있던 팔을 내렸다.
검술과 마법 모두에 능통한 소년답게, 그 역시 어느새 보호 마법을 앞에 펼치고 있었다.
“우, 흐으, 흐아앙……!”
내 팔에 안긴 채 놀란 듯이 멍하니 있던 아이가 곧 울음을 터트렸다.
실제로는 아무런 인명 피해가 없었음에도, 자선 행사장 안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화, 황족 시해 미수다!”
“누가 1황녀님을 노리고 이런 짓을……!”
“당장 황실 근위대를 불러와!”
“괘, 괜찮나요, 1황녀?”
특히 오늘 자선 행사를 준비한 화이트 가문의 사람들과 1황비 플로라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천재 마법사인 나한테는 폭발 사고고 뭐고 별로 위험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확실히 이건 죄질이 나쁘긴 했다.
내가 막아내지 않았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이 꽃다발을 내게 건넨 아이도 위험했을 테니까.
아이가 소속된 고아원의 원장이 금방 달려왔다.
아이를 달래서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그냥 오늘 자선 행사장에 준비된 꽃다발 중에 아무것이나 들고 온 것뿐이라고 했다.
폭발 직후 자선 행사장의 출입구를 폐쇄하고 인근까지 수색 범위를 넓혔으나 범인은 찾아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황실 기사단의 오귀스트 경이 부하들에게 사건을 보고 받고 광분했다.
“황족 시해 미수라니, 어떻게 카뮬리타에서 이런 일이! 당장 제도 전체의 출입을 통제해 반드시 범인을 색출하겠습니다!”
“오귀스트 경. 잠깐 이것 좀 봐 주지.”
만약을 위해 아직 결계 마법을 두르고 있던 꽃다발을 들어, 거기에 다른 마법식을 사용했다.
파앗!
그러자 꽃다발에 걸려 있던 출처 미상의 폭발 마법진이 주르륵 해체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다들 이런 걸 처음 봐서 그런지 입을 떡 벌린 채 허공에 그려진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번에 새로 개발한 마법 분해식인데 말이야. 마법진을 그릴 때 이렇게 중간에 아그리타식 기호와 세로 삐침을 사용하는 학파가 열두 곳 있거든.”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뿌리가 나뉘고 파가 갈려, 사용하는 마법식의 세밀한 부분은 무리마다 달랐다.
“그리고 마지막 기원식에서 메시아 고대어를 응용하는 건 다섯 개 학파고, 또 육망성 모양을 이렇게 그리는 건…….”
내가 말하는 동안 1황비와 3황녀, 그리고 오귀스트 경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멍한 얼굴을 했다.
나는 더 설명해도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리란 걸 깨닫고 간단히 줄여 말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런 마법식을 쓰는 건 발푸르기스 마법 사단밖에 없어. 가서 관련자 조사해.”
“예, 예! 알겠습니다, 1황녀님!”
일단 오귀스트 경이 그의 부하들에게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나는 증거물로 제출한 노란 리본이 묶인 꽃다발을 살짝 찌푸린 얼굴로 내려다봤다.
‘……혹시 그레이엄 후작인 건 아니겠지?’
내가 본 미래에서 이렇게 날 죽이려고 한 사람은 거의 그 아저씨밖에 없었는데.
내 미래가 적혀 있던 책은 아무래도 유디트의 관점에서 주로 전개되어서, 다른 세세한 부분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책에서 그레이엄 후작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또 실제로도 후작은 지금까지 말로 나를 긁는 것 말고 딱히 위협적인 행동을 취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오늘 일은 정말 다른 자의 소행일지도 몰랐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황녀님을 추앙해 발밑에 엎드리지는 못할망정 제 열등감과 시기심을 앞세워 자폭하는 인간도 어딘가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다 문득 나는 옆에서 킬리안의 시선을 느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아닙니다.”
킬리안은 왠지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그보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1황녀님?”
빨리도 물어본다.
일이 너무 경황없이 흘러가서 그런지, 킬리안도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다친 곳이 있을 리 없지. 고작 이깟 수작질에 내가 당할 것 같아?”
킬리안에게 콧방귀를 뀌어 준 뒤, 꽃다발을 들었던 손을 시큰둥하게 내려다봤다. 그리고 뒤늦게 내 손의 이상을 눈치챘다.
“앗……!”
“왜 그러십니까, 1황녀님? 역시 손에 상처라도…….”
“손톱 끝이 부러졌어!”
“…….”
조금 전 꽃다발의 폭발을 막을 때 내가 살짝 느렸나?
이깟 걸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하다니, 왠지 자존심이 좀 상했다.
“하…….”
그때, 킬리안이 또 지난번처럼 갑자기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느닷없이 왜 웃어?”
얘는 또 뭐가 웃겨서 이래? 내 손톱이 상한 게 재미있어?
“아니요……. 전에는 몰랐는데, 1황녀님은 상당히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그 말처럼 킬리안은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그를 보는 내 얼굴은 점점 떨떠름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기묘한 느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잠깐 멈칫했다. 그러다 곧 내 입에서 싸늘한 실소가 작게 흘러나왔다.
지금 막, 제라드에게 걸어 둔 마법이 작동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별로 좋지 않던 기분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기어이 탈출을 시도했다 이건가?’
혹시 일부러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를 노린 거라면 조금 화가 날 것 같기도 했다.
“난 먼저 가 봐야겠군.”
킬리안을 두고 자선 행사장의 입구로 빠르게 걸어갔다.
뒤에서 킬리안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내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붙잡기 전에 이동 마법을 사용해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