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47화 (63/203)

47화

* * *

‘왠지 나잇값도 못하고 있는 기분이 살짝 드는데.’

그날 밤, 혼자 정원에 있는 의자에 누워 밤하늘에 뜬 보름달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동그스름한 달이 휘영청 밝기도 했다.

보안이 철저한 1황녀궁이니만큼 밤이 깊어지면 사람들도 따로 경비를 서지 않고 모두 물러갔다.

그래서 혼자 방을 빠져 나온 지금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는 눈이 없는 만큼 내 행동도 자유로워졌다.

하여 나도 체면이고 품위고 신경 쓰지 않고, 정원의 한구석에 있는 긴 의자에 아무렇게나 몸을 누이고 있었다.

한밤중의 정원은 낮보다 고요하고 평온했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다가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꿈속의 책에서 본 미래의 나는 완벽주의자였고, 그건 현재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에 짜증이 났다.

이렇듯 나 자신의 미성숙한 모습을 또 발견하고 마는 것은 생각 이상의 불쾌감을 수반했다.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 대충 몸 위에 덮고 있던 담요가 조금씩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움직이는 게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뒀다.

그때 정원의 입구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내게 다가온 누군가가 의자 밑으로 완전히 흘러내리기 직전이던 담요 자락을 들어 올렸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그동안 다물려 있던 입술을 열고 물었다.

당연히 지금 날 찾아온 사람이 제라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는 일전에 밤 산책을 나왔을 때 그와 함께 왔던 곳이기도 했고, 또 다가오는 발소리가 마리나치고는 보폭이 컸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보지도 않고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 종속 각인 때문이었다.

마법적 계약을 맺어 내게 속하게 된 사람이라 그런지, 지난번처럼 지금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제라드라는 걸 그냥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너도 잠이 안 와서 나왔어?”

잠옷만 입고 있던 내 위로 다시 포근한 온기가 내려앉은 건 그때였다.

“그렇습니다, 1황녀님.”

곧이어 귀에 울린 낯설 정도로 공손한 소년의 목소리에, 한순간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휙 들어 내 앞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조금 전 내게 담요를 다시 덮어 준 제라드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의자 밑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라드라면 당연히 내 앞에 서서 또 건방지게 날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야……. 다른 사람인 줄 알았네.”

깜짝 놀라서 얼떨떨한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이기는 좀 그랬다.

그러다가 발등에 반쯤 걸쳐져 있던 신발이 떨어졌다.

제라드의 다리 위를 한번 치고 굴러떨어진 신발에 그와 내 시선이 따라붙었다.

“제가 줍겠습니다.”

조용히 움직인 제라드의 손이 아무렇지 않게 내 신발을 주워들었다.

거기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어낸 뒤 내 발에 다시 꿰어 주는 움직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또 한 번 소름이 돋을 뻔했다.

그러면서 제라드는 정작 자신의 다리에 묻은 흙은 털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다음 명령을 기다리듯이 가만히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게 순종적으로 보였다.

물론 흉내만 내는 것에 불과한 게 뻔히 보였지만, 어쨌든 보이는 겉모습만큼은 그럴듯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마리나가 제라드의 몸이 다 나을 때까지 말버릇부터 교정시키겠다고 의욕이 넘쳤었는데…….

와, 도대체 애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렇게 단기간에 말투랑 몸가짐이 달라지지?

그러다 문득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제라드. 그런데 말투가 변한 건 둘째 치고 너 갑자기 왜 이렇게 시중드는 게 자연스러워? 요즘 뭘 하고 있는 거야?”

“황녀님의 시녀에게 예절을 배우고 있습니다.”

“어떤 예절?”

반복된 내 물음에 제라드가 시선을 들고 나를 응시했다.

역시 정면에서 마주한 그의 눈에는 전과 비교해 조금도 흐려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광채가 여전히 박혀 있었다.

“그냥…… 이제는 황녀님께 소속되었으니 기본적으로 알아 둬야 할 예절이라고만 들었는데.”

그때서야 나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깨달았다.

‘마리나……. 제라드한테 시종 예법을 가르쳤구나.’

그러고 보니 제라드를 데려와서 어떻게 할 건지 마리나에게 말해 준 적이 없었지.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제라드는 촉망받는 기사였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거니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소년은 아직 단 한 번도 자신을 증명한 적이 없는 평범한 보통 소년이었다.

나는 내 앞에 여전히 무릎을 굽히고 있는 제라드를 내려다봤다.

‘시종이라…… 의외로 나쁘지 않은데?’

내 성격이 나빠서인지, 건방진 눈빛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정중히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는 제라드를 보자 기분이 괜찮았다.

하긴, 원래 유디트의 기사였던 제라드가 이번엔 날 위해 충성스러운 개처럼 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만큼 짜릿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나는 제라드의 모습을 더 감상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과 눈빛을 조용히 훑어봤다.

‘그런데…… 너무 얌전한 게 수상하군.’

제 부친을 구하러 가겠다며 백야의 전당에 들어가자마자 탈출을 시도했던 녀석이 이렇게 순종적으로 구는 게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방심시키려는 게 티 나잖아.’

싸늘히 가라앉은 눈으로 제라드를 보다가 다시 친절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아무튼 지금은 일어나.”

뭐, 상관없었다. 녀석이 머릿속에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든.

“잠깐 손 좀 줘 볼래?”

그렇게 제라드를 일으켜 세운 뒤 내 앞에 선 그에게 부드러운 말씨로 요구했다.

제라드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요구를 한 나를 잠깐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이유를 묻지 않고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제라드에게 내 마력을 흘려보냈다.

“……!”

그 순간 벌침에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제라드가 팔꿈치를 뒤로 확 잡아 뺐다.

어허, 또 종속 각인할 때처럼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할 생각인가?

‘하지만 두 번은 안 당하지.’

나는 지난번 온실에서처럼 아예 마법으로 힘을 더해 맞잡은 손을 확 끌어당겼다. 그래도 제라드는 용케 버텼다.

“갑자기, 이게 뭐 하는…….”

당황스러운 듯이 입을 여는 제라드를 보며 눈을 치켜떴다.

‘이걸 버틴다고? 이 녀석이 내 승부욕을 자극하는데?’

이번에는 마법의 강도를 다섯 배는 더해 다시 제라드를 확 끌어당겼다.

그러자 마침내 제라드의 상체가 무너지면서 그가 나한테 훅 끌려왔다.

제라드가 나한테 잡히지 않은 손으로 급히 내가 기댄 의자의 등받이를 짚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그에게 다시 마력을 불어넣었다.

제라드의 눈매가 움찔 튀었다.

급히 입술을 달싹이던 제라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가 이를 으득 악물었다.

맞잡은 손을 파르르 떨면서 눈가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제라드의 모습을 보니, 지금 이 상황이 그에게 어지간히 굴욕적인 모양이었다.

‘훗, 하지만 어쩔 것이냐? 내가 더 센데.’

나는 제라드의 반응을 무시하고 그의 마력을 살폈다.

처음엔 그냥 가볍게 해 볼 생각이었는데 별로 느낌이 오지 않아서 더 많은 마력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제라드의 속을 샅샅이 훑으면서 마력을 휘감아 나한테 감응하는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나도 다른 사람에게 이런 걸 해 본 게 처음이라 그런가? 내가 제대로 맞게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력에 반발 현상이 나타나지는 않았으니까 파장이 잘 맞긴 한 거겠지?’

지난번에 온실에 제라드가 침입했을 때 결계가 반응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인 것 같으니까.

결국 잠시 후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제라드에게서 마력을 거두었다.

“지금…….”

내가 손을 놔주자마자 제라드가 나한테 가까이 붙어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금, 이게 무슨…… 짓…….”

뭐긴, 내 마력 파장이 너랑 얼마나 잘 맞나 확인해 본 거지.

그런데 제라드의 반응이 좀 과했다.

그는 나한테 엄청난 봉변이라도 당한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화가 나서 그런지, 그의 얼굴에 발갛게 열이 오른 게 보였다.

아까 처음 손을 잡았을 때 제라드가 벌침에 맞은 듯이 놀랐다면, 지금은 꼭 독전갈의 꼬리에 쏘이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잠깐 실례 좀 했어.”

내 천연덕스러운 말에 제라드는 기가 막힌 듯이 하, 하고 날카로운 숨을 내뱉었다.

이 녀석 왠지 지금 욕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움직인 것 같은데.

평소라면 황녀님 앞에서 또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한마디 해 주고 싶었겠지만, 지금은 제라드를 보고 삐죽 웃었다.

“그런데 너, 몸이 너무 허약한 거 같은데. 잡아당기니까 자세가 너무 쉽게 무너지네.”

“……뭐라고?”

“보기엔 나름대로 균형이 잡힌 것 같았는데 방금 보니까 어깨랑 팔, 특히 허리를 더 단련하는 게 좋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남의 패배를 가련히 여겨 모른 척해 주는 게 아니라 즐겁게 비웃어 주는 성격이었다.

“하긴, 조금 전에 비틀거리던 걸 보면 하반신 단련도 필요할 것 같고……. 몸은 좀 쓰는 것 같긴 하지만 그동안 제대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가? 이참에 황궁 기사라도 한 명 소개시켜 줄까?”

이 자존심 강한 녀석이 나한테 힘으로 져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걸 보니 더 약을 올리고 싶어졌다.

게다가 백야의 전당에서 그랬듯이 내 앞에서도 온순한 척, 영악하게 나를 속이려 드는 꼴에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내가 허약…….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리…….”

제라드는 내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황녀님한테 헛소리라고? 이게 은근슬쩍 무엄한 소리 하네.

하지만 제라드는 오히려 내가 자신한테 엄청나게 파렴치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쳐다보며 재차 격양된 목소리를 토해냈다.

“애초에…… 지금 나한테 그런, 그런 짓을 해 놓고, 내가 이러는 게 누구 때문인데……!”

“아, 그래. 내가 살짝 마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진짜 살짝이었는데. 애초에 너랑 나는 기초 체력이나 근육량이 다르니 그 정도로 불공평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아니, 지금 그런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하, 진짜.”

뭐가 자꾸 그런 게 아니래?

아무튼 제라드는 몹시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다.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나를 노려보는 눈이 불덩이를 삼킨 듯이 강렬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차가운 눈으로 나를 마구 쏘아보다가 인사도 없이 홱 돌아서서 정원을 떠났다.

황녀님의 앞에서 보이기에 건방진 작태였지만 기분은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쟤 좀 봐라? 놀리는 맛이 있게 반응이 꽤 재미있네.’

나는 순식간에 멀어진 제라드의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킥킥 웃었다. 왠지 오늘 밤은 기분 좋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제라드가 1황녀궁을 정말 탈출한 건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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