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1황녀님이 옆에 계셔 주시면…… 가고 싶어요.”
마침내 유디트가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다가, 그 사이로 내가 기다렸던 대답을 내뱉었다.
“그래, 같이 가자.”
내 뜻대로 말하고 움직이는 아이가 마음에 들어서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유디트는 그걸 보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저…… 한 번만…… 해도 돼요?”
잠시 후 유디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자그마해서, 중간 중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음성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며시 기울인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허락했다.
“그래. 괜찮아.”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디트가 몸을 돌려 나를 끌어안았다.
꼭 강한 물살에 떠밀려 가는 와중에 유일하게 몸을 지지할 곳을 찾은 것처럼 마른 팔이 나를 절박할 정도로 꽉 붙들었다.
이런 과감한 짓을 해 놓고 뒤늦게 꼭 도망치듯이 유디트가 옷을 갈아입으러 뛰어갔을 때, 르벨린 백작이 내게 말했다.
“4황녀님이 1황녀님을 잘 따르시네요.”
“그렇게 보이지?”
아주 훈훈한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미소 짓는 그녀를 따라 나도 웃었다.
유디트는 내게 아주 빠르게 마음을 열어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내게 큰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가끔은 이렇게 쉬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나로서는 편한 일이었다.
유디트의 마음을 내게로 더 끌어오기 위해 굳이 내가 나서서 그녀를 곤경에 빠트릴 필요도 없었다.
여주인공답게 그녀에게는 성장을 위한 수많은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얼마 전 2황자 로이드와 있었던 일 같은 자잘한 괴롭힘도 포함되어 있었고 말이다.
이미 몇 번 내 도움을 받은 유디트는 전보다 나를 더 믿고 가깝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이 역시 내게는 기꺼운 일이었다.
이대로 유디트가 나한테 완전히 의지하고 기대게 되면 좋을 텐데.
그리고 내가 이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사실은 이 모든 것이 기만이었음을 알려 주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혹시 내가 결국 병을 막지 못해 죽게 된다면, 그때 이 아이의 마음에 내 이름을 낙인처럼 새기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조금 전까지 유디트가 서 있던 자리를 보는 동안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꿈에서 본 미래에서 내가 제물로 썼던 제라드를 손에 넣긴 했지만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하염없이 좋다가도, 여전히 불투명한 미래를 떠올릴 때면 가끔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곤 했다.
“1황녀님이 환복을 마치셨습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유디트가 내 앞으로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1황녀님이 골라 주신 옷으로 갈아입었어요. 어때요……?”
이런 것이 영 낯선 듯이 쭈뼛거리는 움직임이었다.
나는 아까보다 차가운 눈으로 유디트를 보다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응, 생각대로 잘 어울리네.”
유디트는 내가 웃어 주자 그제야 안심한 듯이 나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목 뒤에 리본이 풀렸어. 내가 묶어 줄 테니까 이리 와.”
나는 재단사와 시녀들을 물러가게 한 뒤, 유디트를 내 옆에 비스듬히 앉혔다.
나를 등지고 앉아 조금 긴장한 듯이 아이의 어깨와 목이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유디트의 목 뒤로 연결된 리본을 다시 묶었다.
“역시 너한테는 보라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넌 어때? 마음에 들어?”
내 물음에 유디트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
“저는…… 1황녀님이 골라 주시는 건 뭐든 다 좋아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이건 내 선물이야. 연회용 드레스는 따로 맞추고 오늘은 이대로 밖으로 나가 후원에서 차를 마시자.”
나는 유디트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너한테 어울릴 만한 구두도 골라 놨으니 한번 신어 볼래?”
유디트가 이대로 내가 만든 새장 속에서 나를 위해서만 노래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문득 그녀가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녀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 준 것임을.
그럼 유디트가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어 아무리 내가 끔찍하게 싫어져도, 결국은 평생 내 그림자 속에서 살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내 외로움도 조금은 덜어지겠지.
“자, 다 됐다. 그럼 나갈까, 유디트?”
“네, 1황녀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자 유디트는 경계심 하나 없이 활짝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오늘도 귀여운 검은 새는 내 손길 아래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 * *
“누나!”
저녁 무렵 유디트와 헤어져 1황녀궁으로 향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불러왔다.
“벨라 누나!”
첫음절에서부터 내 신경을 긁는 이 목소리는…….
“4황자님이시네요.”
마리나의 말대로, 밀리엄이었다.
오늘도 외모만큼은 아기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어린 소년이 나를 보고 환한 얼굴을 했다.
그는 자신을 안고 있는 시녀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며 빨리 나한테 가자고 재촉까지 하고 있었다.
“어디 다녀와, 누나?”
잠시 후 내 앞에 도착한 밀리엄과 그의 시녀들이 나를 보고 인사했다.
“1황녀님을 뵙습니다. 카뮬리타의 축복과 가호가 함께 하시어 제국의 광영을 무구히 빛낼 이 시대의 첫 번째 창과 방패가 되시기를. 지성에서 태어난 지고하고도 유일한 태양의 딸로서 최고의 홍복을 누리소서.”
내 시녀들도 같은 인사를 밀리엄에게 했다.
쓸데없이 긴 인사를 들을 동안 주위를 한번 힐끔 훑어봤다.
그런데 밀리엄의 유모인 맥노아 백작 부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밀리엄을 직접 안고 온 건, 그동안 그의 곁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여인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누구지?”
“하이어스 백작 가문의 미레이유입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얼마 전부터 4황자님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맥노아 백작 부인과 달리 아직 20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풀잎 같은 연한 녹색 머리에 주황색 눈. 주근깨가 박힌 얼굴은 특색 없이 평범했다.
아무래도 맥노아 백작 부인은 사냥터의 일로 우리 어머니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모양이다.
하기야, 금쪽같은 아들내미가 다칠 뻔한 일이었으니 오죽하련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머니가 아예 이렇게 새로운 인물을 밀리엄의 옆에 두다니, 왠지 의외였다.
새로운 시녀의 얼굴을 좀 더 살피려 했지만 밀리엄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누나, 왜 그동안 우리 궁에 나 보러 한 번도 안 왔어?”
밀리엄은 나한테 안아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누나는 나 안 보고 싶었어?”
그 모습이 객관적인 시각으로는 꽤 귀여워 보였는지, 시녀들이 웃으면서 ‘어머’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어린 게 영악하기는.’
하지만 나는 밀리엄의 이런 행동이 계산된 것임을 눈치채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밀리엄이 귀여운 척 칭얼거리기 전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이 재빠르게 눈을 굴리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도 어릴 때 저런 짓을 많이 해 봐서 모를 수가 없단 말이지.’
왠지 나 자신의 흑역사를 목격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부드럽게 녹아든 시녀들과 달리 그저 의례상의 미소만 얼굴에 그린 채 떨떠름한 마음으로 밀리엄을 안아 들었다.
“바빠서. 누나가 할 일이 좀 많았거든.”
“치, 그래도 그렇지, 내 얼굴 보러 올 시간도 없어?”
나와는 그렇게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면서 밀리엄은 나를 상당히 좋아했다.
어쩌면 유일한 동복 누나라 괜히 더 친밀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흥, 좋아. 이번만 봐줄게. 그 불쌍한 애 구해 주느라 그런 거지?”
계속 귀여운 척 칭얼거리던 밀리엄이 이내 특별히 넘어가 주겠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다 들었어. 누나가 백야의 전당에서 괴롭힘 당하던 애를 도와줬다며?”
꼭 재미있는 무용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밀리엄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그나저나 불쌍한 애라…….
제라드를 직접 보면 그런 생각은 안 들 텐데.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다.
제라드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4년 인생 동안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게 방치당한 일이 있었는데도 주눅이 들거나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악바리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1황녀님!”
그때 유디트의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다.
생각대로 유디트가 나한테 뛰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의아해졌다. 조금 전에 보고 헤어졌는데, 왜 또 저렇게 급하게 달려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