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마리나를 돌려보낸 뒤, 아르벨라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열병에 시달리며 워낙 오랫동안 잠을 잤던 탓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눈이 또랑또랑해졌다.
‘좀 답답한데. 오랜만에 바람이나 쐴까?’
결국 아르벨라는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벨라의 궁 안은 침입자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안전한 요새와 같았다.
그래서 이런 한밤중에도 호위하는 이 한 명 없이 산책을 하러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 아르벨라는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기둥 옆에 그림자처럼 서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꼭 가을 단풍처럼 흔들리고 있는 붉은 머리칼이 그림자에 먹혀 지금은 한결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만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모습은 꼭 사냥을 하러 인가에 내려온 위험한 야생 동물 같았다.
“안녕, 좋은 밤이네.”
아르벨라는 놀라지도 않고 조용히 인사했다.
종속 각인의 영향인지, 그녀에게 다가오는 소년의 존재를 저절로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도 혼자 산책이라도 하러 나왔니?”
오랜만에 보는 소년은 얼마 전보다 조금 나아진 행색을 하고 있었다.
옷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은 상태였고, 무엇보다도 상처가 많이 호전된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쪽으로 와서 같이 걸을래?”
아르벨라의 권유에도 제라드는 사람을 경계하는 살쾡이처럼 그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며칠 동안…….”
그의 입이 열린 건, 다행히 아르벨라의 인내심이 다하기 전이었다.
“왜 한 번도 보러 안 왔어?”
뜻밖이라면 뜻밖인 물음이었다.
아르벨라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역시 반말이 너무 자연스럽네.’
전부터 느꼈지만 이 아이에게는 역시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할 것 같았다.
우선은 황족을 대하는 몸가짐부터 가르쳐야겠지.
지금처럼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질문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란 걸 알려 줘야겠고.
하지만 지금 당장 소년에게 주인을 모시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 훈계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당근 대신 채찍을 줄 단계가 아니라 생각하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아르벨라는 자신의 것이 된 소년에게 마음이 너그러워진 상태였다.
“내가 그 후로 찾아가지 않아서 기다렸나 보네.”
그래서 아직도 어둠 속에 서 있는 소년에게 제법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바빴거든. 네 생각보다 난 할 일이 많아.”
아르벨라의 대답에 지금 밤하늘에 뜬 보름달 같은 은회색 눈이 또다시 그녀를 조용히 응시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아르벨라는 멈칫했다.
“걱정했어.”
“…….”
“많이 아픈 걸까 봐.”
마음 한구석에 이렇게 기이한 기분이 드는 건, 그런 말을 이런 낯선 타인에게 들어 보는 게 처음이라 그럴 것이다.
평소에 아르벨라가 드러내는 강한 황녀님의 모습만 지켜봐 온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제라드는 지난번에 그의 앞에서 쓰러진 아르벨라를 봤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괜한 걱정을 했네. 말했듯이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한 것뿐이야. 그때 내가 갑자기 네 앞에서 정신을 잃었던 건…….”
아르벨라는 흠, 하고 잠깐 대답을 고민하다가 이내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글쎄, 나도 몰랐는데 종속 각인이라는 게 의외로 기력을 많이 잡아먹는 건가 보지?”
은근슬쩍 소년에게 부채감을 지우고자 하는 수작이었다.
그건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제라드가 곤혹스러운 듯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지 않아도 아르벨라가 침실에 틀어박혀 있던 동안 지금 제라드의 대우가 얼마나 파격적인지 입술이 닳도록 말했노라고 마리나에게 전해 들었다.
마리나는 아르벨라가 진심으로 제라드를 위해 숭고한 희생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이야기를 틈틈이 주입시켰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제라드가 다시 아르벨라의 눈을 정면에서 마주한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왜 날 여기 데려왔지? 뭘 원해서 그런 거야?”
소년은 여전히 강렬한 광채가 박힌 눈으로 아르벨라를 보았다.
이미 제라드의 성장 배경에 대한 뒷조사를 시키긴 했지만 아직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기 전이었다.
때문에 아르벨라는 이 소년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르던 놈이기에 이렇게까지 겁 없이 구는 건지 조금 궁금해졌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제라드를 방치한 시간이 길었나 보다.
충동적으로 아르벨라의 손을 잡고 백야의 전당을 뛰쳐나오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현실감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르벨라는 제라드를 잠깐 말없이 응시하다가, 모르는 척 반문했다.
“글쎄, 너한테 원하는 거라니. 그런 게 꼭 있어야만 하나?”
물론 제라드에게서 순진한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어진 그의 대답은 냉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했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으니까.”
‘이것 봐라.’
또 이단자 주제에 제법 시건방진 눈빛이었다.
‘아무리 귀족이었다고는 하나, 그래 봤자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르벨라는 눈가를 찡그리며 생각했다.
적어도 유디트는 주제 파악 하나는 잘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아이도 벌써 일주일은 못 봤구나.’
아르벨라는 소설에서 유디트가 처음 제라드를 기사로 선택해 지금과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때 뭐라고 말했었는지 떠올렸다.
“왜 저를 선택하셨습니까?”
“나와 비슷해서요.”
소설의 유디트는 제라드에게서 자신을 투영해 보았다.
“가장 밑바닥에서 아등바등 위로 올라가려 애쓰는 모습이 나와 비슷해 보였거든요.”
제라드도 유디트가 씁쓸하게 웃으며 건넨 그 말을 시작으로 그녀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된 것처럼 나와 있었지만…….
당연히 아르벨라와 유디트의 상황은 달랐으니, 지금의 그녀가 써먹지는 못할 대사였다.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황녀가 저런 말을 해 봤자 빈정만 상할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애초에 아르벨라가 굳이 남의 흉내를 낼 필요는 없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정답은 단순하니까.”
아르벨라는 여전히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마음에 들었거든.”
그 순간, 제라드의 손끝이 움찔했다.
“난 쉽게 꺾이지 않는 게 좋아.”
밤하늘에서 빛나는 달조차 모르게, 아르벨라의 마력이 은밀히 움직였다.
“약해도 나약하게 굴지 않는 사람, 또 패배해도 굴욕적이지 않은 사람을 좋아하지.”
그것이 실바람처럼 제라드를 스쳐 지나간 순간, 긴장된 것처럼 경직되어 있던 그의 몸이 약간 이완되었다.
“그래서 널 데려와 옆에 두고 싶었어.”
“내가…… 다들 비난하고 기피하는 이단자인데도?”
아르벨라는 조용히 웃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역시 아직은 어린아이라서 그런지, 제라드는 대답을 고민할 필요도 없는 굉장히 쉬운 질문을 했다.
그리고 제라드는, 달빛 아래에서 울리는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였다.
“가령 내가 지금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 들고 이제부터 이건 내게 하나뿐인 귀한 보석이니 모두 소중히 대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때부터 그건 실제로 다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될 거야.”
자신의 가치를, 또 자신의 말이 가진 힘을 아는 자의 당당함이 소녀의 푸른 눈에 담겨 있었다.
제라드의 귀에 흘러든 음성도 허세를 부리거나 무리해서 억지를 쓰는 게 아니라, 정말 그가 모르는 현실을 담담히 알려 주듯이 상냥하고 평온한 어조였다.
“물건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지.”
오만하다고 할 수도 있는 내용이었으나, 그 말을 입 밖에 낸 사람이 아르벨라이기에 그것은 비현실적인 진실성을 입었다.
“그런 내가 널 선택했으니, 적어도 내 옆에 있는 동안 넌 스스로의 가치를 의심할 이유가 없어.”
제라드는 시간이 그에게서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미동 없이 선 채 달빛에 감싸인 아르벨라를 두 눈에 담았다.
아르벨라의 얼굴에 달빛보다 더 감미롭게 느껴지는 미소가 떠올랐다.
“하물며 나한테 고작 돌멩이를 줍는 취미는 없거든.”
제라드는 태어나서 이런 사람을 처음 보았다.
이런 자신만만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처음 보았고, 더군다나 그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제라드. 네가 온실에서 그랬지. 어디든 너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가고 싶다고.”
아르벨라는 지난번에 온실에서 봤을 때 제라드가 한 말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 그녀가 뒤이어 부드럽게 건넨 말은, 사실 제라드가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구에게든 듣기를 남몰래 원하고 있던 말이었다.
“그러니 갈 곳이 없다면 내 옆에 있어. 너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얼마 전 아르벨라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아르벨라와 함께 있을 때, 제라드는 꼭 자신이 바보가 되는 것만 같았다.
이내 아르벨라가 시간을 가늠하려는 것처럼 달이 뜬 하늘을 한번 올려다봤다.
“밤이 늦었구나. 같이 산책할 마음이 없으면 그만 들어가서 자.”
이후 그녀는 제라드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먼저 뒤돌아섰다.
희게 물든 짧은 금빛 머리칼이 시야에 작게 나부꼈다.
분명 제라드보다 작은 소녀인데, 이상하게 그가 감히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제라드는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아르벨라를 따라갔다.
아르벨라는 제라드가 자신의 뒤를 쫓는 것을 알았지만 그를 돌아보지 않고 앞서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제라드가 아직 망설임을 품은 채로도 충분히 쫓아올 수 있을 정도로 느렸다.
기묘하게 고요하고 평온하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