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화, 황녀야? 너 설마 지금 우는 것이냐?”
그동안 자존심 빼면 시체였던 내가 구슬프게 우는 척하자 아버지가 당황했다.
얼마나 놀랐으면, 의자에 앉아 있던 그의 몸이 들썩였을 정도였다.
허둥지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어서 가뜩이나 말라 있던 눈물이 더 쏙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고로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을 번뜩 깨달았다.
“제가 눈물이 안 나오게 생겼나요? 아버지를 닮아 강대한 마력을 가지고 너무 잘나게 태어난 이유로, 이 좋은 시절도 다 못 누리고 일찍 죽게 생겼는데요.”
“어허, 죽다니. 아비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어쨌든…… 예상외로 잘 먹히는데?
평소 모습하고 차이가 커서 더 당황한 듯하니, 이참에 정신없이 밀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튼 아버지……, 제 병의 치료법을 찾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당연히 거기에 걸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무관심한 부친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어쨌든 나는 그의 첫째 딸이자 쓸모가 많은 1황녀였다.
그러니 그도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내가 죽도록 방치하는 것보다는 살리려 노력해 보고 싶을 게 분명했다.
“실제 금단술을 사용한 죄인도 아니고 그 피붙이인 어린 이단자 하나쯤, 미리 백야의 전당 밖으로 빼낸다 해서 큰 문제가 되진 않겠지요.”
“음…….”
아버지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버지를 구슬렸다.
“저도 교화가 덜 끝난 이단자를 밖으로 꺼내 오는 것이 규율에 위반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 아이를 앞으로 5년이나 더 백야의 전당에 두는 건 불안합니다. 오늘도 이단자 아이가 다른 마법사들에게 위협받는 것을 목격해 충동적으로 나서게 된 것인데…….”
“그 이단자가 마법사들에게 위협을 받았다고?”
“예. 평소에도 이단자에게 가한 지속적인 학대를 치유 마법으로 은폐하는 듯하더군요. 하지만 오늘은 제가 직접 현장을 목격해 아직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필요하다면 명분이 될 겁니다.”
“쯧. 월계수 잎을 달았다고 콧대가 높아져 뭐라도 된 양 고고하게 굴던 것들이 뒤에서는 그런 천박한 짓을 하다니.”
내 말을 듣고 황제가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반대로 그런 그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뭘 남 얘기하듯이 말하나. 댁이 유디트한테 하는 짓도 학대인데.’
하지만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한테도 남을 지적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 그 아이를 지금 바로 제 수중에 둘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혹여 교화 기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아이에게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다면, 저는…….”
나는 차마 그런 일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이 다시 소매로 눈가를 찍는 척했다.
아버지는 생각에 잠긴 듯이 미간을 좁힌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참나, 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아직도 이리저리 재고 따지면서 고민하고 있다니.
바로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게 못마땅했지만 어차피 이럴 걸 예상했다.
나는 기꺼이 마지막 카드를 꺼내 그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신다면 그 아이를 제게 종속 각인시키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죠?”
“종속 각인이라니, 진심이냐?”
내 말에 아버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 정도로 제가 절박하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머리 위에서 깊은 신음이 흘렀다.
“좋다. 허락하마.”
곧 황제의 공식적인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언제 가련한 모습을 보였냐는 양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일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그러고 나서 사기라도 당한 듯한 눈으로 나를 보는 황제를 두고, 곧바로 제라드가 있는 1황녀 궁으로 돌아갔다.
* * *
“내가 데려온 아이, 지금 어디 있어?”
1황녀 궁에 도착하자마자 제라드를 찾았다.
황제의 허가도 받았겠다, 이제 백야의 전당에서 제라드를 찾으러 오기 전에 그에게 완전히 내 것이라는 도장을 찍는 일만 남았다.
‘그래도 레반테온이 그쪽에서 나름대로 시간을 벌어 주고 있겠지.’
그로서도 이대로 거래를 완전히 무산시키고 싶지는 않을 테니, 되도록 최선을 다해 줄 게 분명했다.
애초에 그러라고 세계의 이면을 살짝 보여 준 것이니 그 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2층 서쪽 복도의 가장 끝 방에 있어요.”
마리나가 앞서 걷기 시작한 내 뒤를 따라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황녀님, 지금 밖에서 서신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황제에게 상소가 올라갔듯이, 백야의 전당에서 나한테도 부리나케 연락을 취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1황녀궁에 이단자를 잡으러 무작정 쳐들어올 수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백야의 전당의 위상이 높다 한들 난 황족이었다. 또한 강한 마법사이기에 1황녀궁 주위에 쳐진 결계는 아주 견고했다.
“미안, 지금 좀 급해서. 나중에 설명해 줄게.”
나는 불안해 보이는 마리나에게 일단 그렇게 말한 뒤 제라드가 있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나를 보자마자 제라드가 불편하게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아까와 달리 몸 여기저기에 붕대와 거즈를 달고 있었다.
이 난리통에 황궁의가 다녀갔을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시녀들이 임시방편으로 치료한 것 같았다.
다만 침대 옆에 새 옷이 고이 놓인 걸 보면, 저 걸레짝 같은 옷을 갈아입지 않은 건 소년의 의사인 듯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잠깐 이리 와서 나한테 손 좀 줘 봐.”
나는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가 바로 마법식 준비에 들어갔다.
다른 간단한 마법은 굳이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 쓸 마법에는 반드시 매개가 필요했다.
그래서 마법으로 손에 피를 내자 그걸 본 제라드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런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설명했다.
“지금부터 너랑 나는 종속 각인을 맺을 거야.”
말이 설명이지, 거의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제라드는 백야의 전당을 나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의 의견은 따로 물을 필요가 없었다.
아직 상황 파악을 완전히 끝내지 못한 듯한 제라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종속 각인……?”
“그래. 네가 백야의 전당 밖으로 완전히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다들 널 그곳으로 다시 돌려보내려고 지금도 밖에서 시끄럽게 굴고 있거든.”
설명하기 좀 귀찮았지만 꾹 참고 그에게 손을 달라는 의미로 다시 손짓했다.
“게다가 지금 네 몸에 마력 사슬이 걸려 있는 건 지난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지? 그게 있는 한 넌 아무 데도 못 가.”
내가 황제에게 제라드를 데려오는 조건으로 건 종속 각인은 다른 말로 주종 계약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원래 이것은 카뮬리타 황족의 고유 권한으로, 황실의 핏줄만 사용할 수 있는 제한적인 마법이었다.
반드시 쌍방 동의가 있어야만 맺을 수 있는 맹세이며, 이는 황족의 고귀한 권리이기에 제삼자는 간섭할 수 없었다.
설령 황족이 선택한 종속 대상이 사형수라 하더라도 이 맹세는 절대적으로 이행되었다.
즉, 종속 대상의 생사에 대한 우선권은 어떤 경우에도 그와 각인한 황족에게 주어졌다.
다만 각인 대상자의 신변을 수중에 넣는 대가로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절대적인 맹세이기에, 요즘에 와서는 황족들도 이 권리를 사용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이단자인 제라드가 만약 나와 종속 각인을 맺은 후에 밖에서 사고를 치면 거기에 대한 모든 책임과 대가를 내가 치러야 했다.
그러니 자칫 잘못했다가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억울하게 형벌도 대신 받고, 명예도 땅바닥에 떨어지고…….
뭐 그런 참담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이 마법 천재 황녀님이 고작 종자 하나 제어하지 못할 리 없었으니, 그 부분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종속 각인에는 나름대로의 장점도 있었다.
이 마법으로 묶일 경우, 서로의 몸에 심은 마법진 때문에 상대의 위치를 언제든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혹시 나중에 그가 내 손에서 벗어나 도망치려 해도 언제든 찾아낼 수 있으니 좋은 대비책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 말고도 서로 교감이 깊어지면 감정 같은 게 공유되기도 한다는데…….
이건 어차피 역대 사례 중에서도 아주 드문 일이라고 하니 나와는 상관없었다.
“그래서 새로 계약을 맺는 거야. 너를 백야의 전당이 아닌 내 소속으로 만드는 거지. 뭐, 대충 이제부터 내가 너를 책임지고 돌봐 준다는 뜻이야.”
하지만 지금 이런 설명을 굳이 제라드에게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대뜸 주종 계약이라고 하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에둘러 간접적인 표현을 썼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야.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나중에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네가 원하던 대로 때를 봐서 널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도 있어.”
이것도 당연히 거짓말이다.
제라드를 놓아줄 마음 따위는 나한테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제라드는 날 가만히 쳐다볼 뿐, 아까 백야의 전당에서와 달리 쉽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뒤늦게 경계심이라도 든 건가?’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성가시게 군다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굳이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원래 이 종속 각인은 모든 황족이 단 한 명의 권속만 선택해서 계약할 수 있어. 난 그 특별한 권리를 지금 널 위해 쓰려는 거고.”
다만 좀 더 그럴듯하게 포장해 그를 위해 희생이라도 한다는 양 덧붙였다.
그게 먹혔는지 제라드가 움찔거렸다.
“……딱 한 명하고만 할 수 있다고?”
“그래. 딱 한 명하고만 가능하고, 그걸 지금 너랑 내가 한다는 거야.”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그에게 채근하듯이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어서 내 손을 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