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 *
잠시 후 새로 옮긴 유디트의 방에 도착해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금방 다과상을 차리겠습니다.”
“그래.”
개중에는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내 궁에서 차출해 보낸 시녀들이었다. 고로 그들은 유디트가 아닌 내 사람들이었다.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유디트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게 상세하게 알려 줄 수 있고, 내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내 사람들.
유디트는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시녀들이 그녀에게 상냥하게 대해 줘서 좋아하는 것 같았다.
“1황녀님.”
그래도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는 나와 마주 보고 있는 게 적응되었는지, 유디트가 오늘은 꽤 침착한 모습으로 날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오늘은 제가 차를 직접 준비해도 될까요?”
물론 그녀가 한 말의 내용 자체는 지난번과 비슷했지만.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유디트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동안 매번 혼자 해 먹어서 할 줄 알아요. 물론 1황녀님 입에는 안 맞으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제 궁에 와 주셨으니까 제가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꼭 다람쥐가 손님에게 도토리를 주는 것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한테 이런 말을 하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던 듯, 유디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옷자락을 꽉 붙들고 있었다.
“그래, 그럼.”
그걸 보고 그냥 수락하자 유디트가 얼굴을 활짝 폈다.
잠시 후 시녀들이 다과를 들고 왔다.
유디트가 차 통의 뚜껑을 열고 손을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혼자 작은 두 손을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꼭 어린아이의 소꿉놀이를 지켜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다, 다 됐어요.”
그렇게 유디트가 손을 달달 떨며 내준 차는 맛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유디트의 솜씨가 정말 뛰어나다 해도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배운 시녀들보다 특출할 리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내 혀는 황궁에서 이미 온갖 산해진미를 맛봐 고급화된 혀였다.
“나쁘지 않네. 솜씨가 괜찮구나.”
그래도 노력상 정도는 줄 만했다.
지금이 늦은 저녁이라 그런지 몸이 적당한 피로감에 젖어 노곤해진 참이라, 평소처럼 깐깐하게 굴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아, 다행이에요.”
내 말에 유디트가 기쁜 듯이 이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환하게 웃었다.
내가 본 미래에서 서로 피를 튀기며 생사를 걸고 싸우던 이복 자매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다는 게 어쩐지 기묘하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 * *
“1황녀님, 백야의 전당 소속 레반테온 마법사님에게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며칠이 더 지나, 드디어 레반테온에게 연락이 왔다. 기다리던 소식이니만큼 뜸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러 곧장 백야의 전당으로 찾아갔다.
“무리입니다.”
얼굴을 보자마자 레반테온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이단자의 교화 기간은 최소 5년으로 땅땅! 못 박혀 있다고요.”
역시 그가 나를 보고자 한 이유는 지난번에 내가 요구한 이단자 소년 때문이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노력하긴 했는지, 레반테온의 얼굴은 일주일간 밤샘하며 연구에 몰두했을 때처럼 핼쑥해져 있었다.
눈 밑도 거뭇해서 꼭 판다 같았다.
확실히 이 일은 레반테온 혼자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관련자들과 논쟁하느라 고생을 좀 했을 것이다.
“그래서? 몇 년으로 줄었는데?”
하지만 내가 아는 레반테온이라면 실패했을 리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득의만만하게 날 부르지도 않았겠지.
레반테온이 책상 위에 올린 두 손을 깍지 끼며 여전히 진중한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일단 절반 정도는 줄였습니다.”
딱 예상했던 정도군.
“더 단축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번에 월계수 잎 여섯 장의 꼬장꼬장한 선임들을 상대하느라 얼마나 지쳤는지 아십니까?”
나도 의자에 등을 기대며 레반테온과 비슷한 자세로 손을 깍지 끼고 말했다.
“답지 않게 서론이 기네.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래서 제 생각에는…….”
꼭 기다렸던 말이란 듯이, 이번에는 레반테온도 뜸을 들이지 않았다.
“황녀님이 오늘 제 의욕을 좀 북돋아 주시면 좋을 듯한데요.”
날 보며 가늘게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이 꼭 포도를 따 먹기 직전의 여우 같았다.
레반테온과 나는 서로를 가늠하듯이 응시했다.
그래도 이것 역시 예상치 못했던 요구는 아니라 오래 고민하진 않았다.
“5초.”
“5초가 뭡니까? 10초.”
“5초.”
“10초!”
“5초.”
레반테온이 열을 올렸지만 난 흔들리지 않았다.
원래 교섭을 할 때는 아쉬운 티를 내는 사람이 지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반테온은 등쳐먹기 아주 좋은 교섭자였다.
내가 싫으면 관두란 식으로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자, 레반테온은 분한 듯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결국 지금 더 몸이 달아 있는 티를 낸 레반테온이 졌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준비되었을 때 시작할 겁니다.”
그는 나잇값도 못 하고 삐친 듯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부시럭거렸다.
사실 레반테온이 말한 준비란, 어디까지나 마음의 준비를 의미했다.
기억을 공유하는 데 필요한 마법식도 레반테온이 미리 그려 온 데다, 거기에 사용할 보조 마력석도 이미 그가 준비해 온 뒤였다.
원래 모든 마법을 쓸 때마다 이렇게 번거로운 작업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정신에 관여하는 마법은 위험성이 높아 이런 섬세한 과정이 필요했다.
책상 위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배치한 레반테온이 경건한 자세로 등을 바로 세우고 앉아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황녀님, 제 손을 잡아 주십시오.”
그런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법에는 진심인 남자였다.
나도 팔을 뻗어 레반테온의 손을 잡았다.
그 상태로 그가 몇 번인가 느리게 심호흡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후 레반테온의 마력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파앗!
책상 위의 마력석들이 빛났다. 곧 마법식의 문양과 글자들도 허공에 떠올라 빛으로 부서졌다.
다음 순간, 눈앞에 보라색 밤하늘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새장이 주렁주렁 매달린 신비로운 장소였다.
내가 마법사의 열병을 앓는 동안 보았던 세계의 이면이었다.
아마 레반테온도 지금 이곳을 본 순간, 내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으리라.
그 맹목적인 믿음에 다른 논리적인 근거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이건 진짜 그냥 내 자만심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도 세계의 이면에 대해 자각한 뒤 몸소 느낀 사실이지만, 그저 마법사의 피에 각인된 본능으로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5초의 시간은 그 믿음을 갖기엔 충분했으나 호기심을 충족하기엔 당연히 매우 짧았다.
하여 약속된 시간이 되어 내가 손을 놓으려 했을 때, 레반테온은 오히려 맞잡은 손아귀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한술 더 떠, 그는 마력의 사슬로 내 손을 속박하기까지 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실소한 뒤 결국 나도 마력을 끌어올렸다. 공유하고 있던 기억의 문도 강제로 매몰차게 닫아 버렸다.
그래도 레반테온은 포기하지 않고 억지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시도했다.
콰앙!
하지만 누누이 말했다시피, 나도 그렇게 만만한 마법사는 아니었다. 특히 마력량으로 나를 이길 사람은 없었다.
“으억……!”
두 개의 마력이 부딪치면서 강한 폭풍이 일어났다.
쨍그랑!
창문이 깨지고 벽이 부서졌다.
마침내 내 손을 놓치고 날아간 레반테온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약속 위반이야, 레반테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넋이 나가 보이는 레반테온을 내려다봤다.
외알 안경이 깨져 콧잔등 밑으로 흘러내린 데다 머리도 산발이 된 레반테온이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부서진 벽 밖으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방에서 일어난 마력의 폭발에 놀라서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나는 빛 가루가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방 안에서 환하게 트인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이곳을 올려다보고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년도 있었다.
그는 건물 뒤쪽에 견습 마법사의 로브를 두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얼굴에는 맞은 흔적이 선명했다.
“역시 안 되겠네.”
“예에……?”
“저 아이, 지금 내가 데려가야겠어. 폐하는 내가 맡을 테니 레반테온은 백야의 전당 쪽을 맡아.”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약속을 위반했으니 그 대가라고 쳐.”
여전히 넋이 빠진 레반테온이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부서진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괜히 세계의 이면을 걸고 거래했다 싶기도 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곧 마력의 바람이 내 발을 폭신하게 감쌌다.
오늘도 험한 취급을 받고 있었던 듯한 소년이 자신의 앞에 떨어져 내린 나를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은 채로 올려다봤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를 둘러싼 마법사들의 얼굴에도 맞은 흔적이 있어서 나는 조금 웃음이 났다.
“안녕, 우리 구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