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난 몹시 탐탁지 않은 기분으로 킬리안에게 예의상의 안부를 물었다.
“좋은 오후네. 그런데 오늘 어쩐 일로 황궁에?”
“잠깐 아버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 황성에서 일하고 있는 베른하르트 공작을 보러 온 거였군.
그의 대답에 나는 몹시 유감스러워졌다.
‘쓸데없이. 자기 아버지는 퇴궁하면 집에 가서 보면 되잖아.’
“저런. 클로에가 바쁜 사람을 붙잡았구나. 그럼 어서 가서 볼일 보도록 해.”
킬리안을 그냥 얼른 보내 버리려 했으나 그는 내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았다.
킬리안의 얼굴에 청량음료 광고를 맡으면 딱 어울릴 것처럼 싱그럽고 깨끗해 보이는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습니다, 1황녀님. 다행히도 이미 용무를 끝마치고 나오던 길입니다.”
“…….”
클로에는 킬리안의 미소에 이미 완전히 넘어간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를 보며 왠지 나는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사냥 대회가 끝난 날 이후 이렇게 킬리안과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날 유디트에게 가기 전에 굳은 얼굴의 킬리안과 눈이 마주친 게 마지막이었다.
조금 전에 클로에가 말했듯이, 어머니와 내 부끄러운 모습을 본 사람 중에 그가 있다는 게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내가 괜히 의식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어쩐지 킬리안이 오늘따라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킬리안은 다행히 그때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보다 1황녀님. 이번 사냥 대회는 아쉽게 되었습니다.”
대신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내가 피하고 싶던 다른 화제였다.
“대회가 일찍 마무리되지만 않았어도 1황녀님께서 월계관의 영광을 차지하셨을 텐데요.”
킬리안의 말을 듣고 나는 예의상의 미소를 지은 상태 그대로 굳어졌다.
마법 생물이 방어막을 뚫고 나와 사람들을 위협한 일로 결국 사냥 대회는 일찍 파투가 났다.
그리고 그때까지 잡은 사냥감의 총점으로 대회 참가자의 순위가 정해졌다.
억울하고 원통하게도 그 중간 결산 때의 1등은 내가 아니라 킬리안 베른하르트였다.
“맞아, 언니! 그건 소공작 말이 맞아!”
그래도 킬리안에게 아주 눈이 멀지는 않았는지, 클로에가 그의 말에 열렬히 동조했다.
“중간에 그런 사건이 있어서 조기 폐막되지만 않았어도 당연히 언니가 1등을 했을 텐데!”
물론 나도 그들의 말에 백번 동의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사냥 대회가 정상적으로 치러지기만 했으면 마지막에 웃는 건 킬리안이 아닌 나였을 테니까.
하지만 패자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해봤자 궁색하게 들릴 뿐이다.
게다가 막상 승자인 킬리안의 입에서 저런 소리를 들으니, 날 놀리나 싶은 기분이 들어서 짜증만 더해졌다.
“겸손하군, 소공작.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으니 어쨌거나 축하해야 할 일이지.”
역시 난 이 남자주인공하고 안 맞는다.
그래도 승패에 연연하는 속 좁은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아서 대수롭지 않은 양 말했다.
물론 ‘네가 이긴 건 어디까지나 운빨이다’라는 의미를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에 가시처럼 심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황녀님이야말로 겸손하십니다.”
킬리안이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데 1황녀님.”
그런데 다음 순간 그가 예고 없이 폭탄을 던졌다.
“그날 제 사냥감을 1황녀님께 헌상하겠노라 약조드렸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헉!”
“황녀님께서도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요.”
“허어억!”
클로에가 킬리안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숨넘어갈 듯한 소리를 냈다.
도대체 뭘 상상하는지, 클로에의 얼굴이 점점 붉게 상기되어 가는 게 보였다.
그녀는 손으로 입까지 틀어막고 진짜냐는 듯이 나를 홱 돌아보았다.
“한데 사냥 대회가 갑작스럽게 조기 중단된 탓에 약속을 미처 지키지 못해 얼마나 아쉬웠는지…….”
하지만 내가 뭐라고 답할 새도 없이 킬리안이 계속 말을 이었다.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1황녀 전하.”
급기야 내게 에스코트를 청하듯이 눈앞에서 예를 갖추는 킬리안을 보고는 다른 의미로 할 말을 잃었다.
“혹시 다가오는 황궁 연회 때 감히 파트너를 청하는 것으로 그 약조를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내 앞에 그림같이 선 소년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킬리안은 내 앞에 숙인 정수리까지 동그랗게 예뻤다.
하지만 나는 그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교류도 없던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갑자기 나한테 연회의 파트너를 청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수상쩍은 전개지?
* * *
당연히 거절했다.
클로에는 자기가 더 아까운 듯이 날 붙잡고 왜 그랬냐고 원통함을 토해 냈다.
정작 킬리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물러나 오히려 내 기분을 더 구리게 만들었는데 왜 자기가 더 야단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킬리안은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따위 제안을 한 걸까? 역시 지난 사냥 대회 때부터 영 이상하단 말이야.
그날 저녁, 유디트의 궁에 다시 찾아갈 때까지도 내 마음에는 의문이 그득했다.
“유디트?”
하지만 그런 의구심은 궁의 로비에서 유디트를 발견한 뒤, 의아함에 짓눌려 금방 사라졌다.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거지?”
내가 냉궁에 도착했을 때, 기가 막히게도 유디트는 1층 로비 구석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그러다 막 문 안으로 들어와 시녀에게 유디트의 안부를 묻는 내 목소리를 들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 저, 그게……. 또 오신다고 했는데 언제 오실지 몰라서요…….”
자기 스스로도 부끄러운 꼴을 보였다는 자각이 있는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선 유디트의 뺨이 서서히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내가 언제 또 올지 몰라서 이렇게 현관에 나와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인가?
“오면 온다고 먼저 기별을 할 텐데.”
“그래도…… 갑자기 오실지도 모르니까.”
유디트가 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는 내가 연락 없이 왔었지.
그때는 꾸밈없는 시녀들의 상태를 보려고 기습적으로 찾아왔던 건데, 설마 그게 이런 결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물론 오늘도 연락 없이 온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난 유디트를 보러 온 게 아니라 그녀의 궁을 살피러 온 거였다.
그래서 일부러 조용히 다녀갈 생각으로 시녀장에게만 언질을 준 참이었다.
유디트의 궁을 총괄하는 시녀가 아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1황녀님. 4황녀님께서 방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유디트가 너무 작아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걸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게다가 머리카락도 검은색이라 그림자에 가려져 있을 때는 더 눈에 띄지 않았을 테고.
“앞으로는 오기 전에 미리 연락을 줄 테니 이렇게 밖에 나와 있을 필요 없어.”
“네…….”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시녀를 전부 교체해 생활이 전보다 확실히 편해졌을 테지만, 당연히 겨우 일주일 만에 눈에 띄는 큰 변화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혈색이 있어 보여서 그런지 전보다는 얼굴이 나아 보였다.
여전히 하는 행동이 바보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왠지 내가 오기를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리 와, 유디트.”
내 말에 유디트가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졸면서 헝클어진 탓인지, 얼굴을 약간 가린 검은 머리칼 사이로 노란 눈이 비쳤다.
유디트는 꼭 이리 오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들어 본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날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느릿하게 걸음을 뗐다. 그 모습이 꼭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새끼 오리 같았다.
그걸 보다가 무심코 손끝을 움츠렸다.
나도 모르게 다가오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 뻔했다.
“바뀐 환경은 어떻지? 불편한 점은 없어?”
하지만 결국 유디트에게 손을 뻗는 대신 먼저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물었다.
유디트의 궁에는 현재 대대적인 보수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그렇다 해서 궁을 아예 비울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한미한 궁이라도 건물 자체의 빈방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으니, 보수하는 곳을 피해 다른 방을 사용하면 됐다.
“좋아요.”
내 물음에 등 뒤에서 유디트가 대답했다.
“정말요. 다 꿈같아요…….”
정말 그 말처럼 꿈결 속을 걷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어떤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고 있을지 조금 궁금했다. 하지만 돌아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