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 *
“황녀님, 백야의 전당에서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봐요.”
“글쎄.”
1황녀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리나의 물음을 듣고 의뭉스럽게 답했다. 하지만 확실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레반테온은 많은 연구 분야 중에서도 요즘 특히 ‘세계의 이면’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세계의 이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애초에 그 경험자도 극히 드문 데다, 그나마 남아 있는 문헌의 내용도 지극히 피상적이었으니.
그런데 내가 바로 그 세계의 이면을 직접 봤다고 했으니 레반테온으로서는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 없을 거다.
더군다나 기억까지 공유해 준다는 말에는 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겠지.
‘물론 내가 본 책의 내용은 제외하고 보여 줘야겠지만.’
그러니 레반테온은 최대한 빨리 서둘러 이단자 소년을 내게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지금 당장 그를 내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레반테온이 백야의 전당에서도 알아주는 마법사라 해도, 기본 절차라는 게 있었으니까.
‘그래도 최소한 5년의 절반 정도까지는 줄일 수 있겠지?’
물론 그것보다 빠르면 더 좋고.
“벨라 언니!”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저 앞쪽에서 낯익은 소녀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내게 뛰어왔다.
“언니! 나 알았어……!”
저렇게까지 반가워하며 나한테 달려올 만한 사람은 당연히 클로에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클로에. 도대체 뭘 알았단 거니?”
“유디트…… 헉, 일 말이야…….”
잠시 후 숨을 헐떡이며 뛰어온 클로에가 내 귀에 대고 속닥거린 말에 난 눈썹을 슬며시 추켜세웠다.
“황후 전하와의 일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지?”
“사냥터에서 황후 전하가 유디트 그 계집애의 일로 언니한테 한소리 하셨다며?”
나를 보는 클로에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골머리를 앓던 문제의 해답을 드디어 알아내 의기양양한 것 같기도 했고, 속이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
“언니가 아까 조찬 자리에서도 보란 듯이 냉궁 얘기를 꺼낸 일을 황후 전하도 아셨나 봐. 조금 전에 황후궁에서 찻잔이랑 화병 깨진 걸 시녀들이 치웠다고 하더라.”
아하…….
그러니까 클로에는 내가 어머니와 기 싸움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일부러 어머니의 속을 긁느라 유디트에게 더 관심 있는 척한다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과연 청개구리 심보를 가진 클로에가 생각할 법한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제 모친인 2황비의 속을 뒤집어 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나도 그런 이유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이 내가 클로에와 비슷한 생각을 하다니…….
“이런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구나. 그리고 클로에. 그런 식으로 넘겨짚는 건 안 좋은 습관이야.”
조금 전에 레반테온을 만나고 와서 좋던 기분이 갑자기 조금 저조해졌다.
그래서 클로에를 두고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미안, 확실히 이런 데서 할 얘기는 아니네.”
클로에가 그런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래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언니가 괜히 유디트한테 신경 쓸 리가 없잖아?”
아무래도 그녀는 이대로 제 갈 길을 갈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미 자신이 생각해 낸 이유가 정답이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엔 황후 전하가 너무하셨어. 언니가 유디트랑 어울리는 줄 알고 오해하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게 주제도 모르고 언니한테 손수건을 주려고 달라붙은 건데 말이야.”
클로에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내 대변자라도 되는 듯이 분통을 터트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리고 밀리엄 일도 그래. 아무리 늦게 얻은 아이라도 그렇지, 황후 전하는 밀리엄만 너무 싸고도시는 것 아냐?”
옆에서 종알거리던 클로에의 말이 결국 껄끄러운 화제로까지 넘어갔다.
“특히 사냥터에서 밀리엄이 다칠 뻔한 건 언니 탓도 아닌데.”
역시 클로에도 사냥터에서 밀리엄의 일로 어머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모양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 당연히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났을 거라 예상했다.
그때 당시의 장면이 귀족들의 마력석에 찍혀서 밖으로 유출될 뻔해 막은 것도 꽤 되니까.
하지만 막상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속이 좀 썼다.
클로에는 내가 마법사의 열병에 걸린 걸 몰랐다.
그래서 어머니가 밀리엄을 유독 싸고도는 이유가 그저 아직 어리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클로에의 입장에서는 나를 위한답시고 한 말이겠지만 내 귀에는 영 듣기에 불편했다.
게다가 어제부터 계속 유디트의 일을 걸고넘어지는데,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내 의견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한 번쯤 그녀를 타이르고 단속할 필요성도 느꼈고, 무엇보다도 나는 내 걸 남이 건드리는 게 정말 별로였다.
설령 가지고 놀다가 망가뜨려도 내가 망가뜨리고, 괴롭혀도 내가 괴롭히지, 한 번 내 것이 된 이상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찔러보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클로에.”
그래서 걸어가는 클로에의 어깨를 붙잡아 눈을 마주했다.
“유디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난 우리가 품위를 지키는 황녀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품위? 이미 넘치잖아? 우리만큼 우아한 황녀들이 또 어디에 있다고! 리리아나랑 비비안은 언니랑 나한테 비교할 것도 못 되지!”
설마 진심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로에가 품위 있다니, 그 말은 다른 품위 있는 사람들을 너무 모욕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얘가 돌려 말하니까 이렇게 또 못 알아듣네.
“클로에.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말이야…….”
나는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클로에가 유디트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며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앞으로 네가 오월제 무도회 날 유디트의 신발에 바늘을 넣으려 시도한다거나, 네 티 파티 때 새로운 꽃차를 시음한다는 핑계로 유디트를 불러서 화상을 입히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리야.”
“헉! 내, 내가 그런 무서운 짓을 왜 해? 그리고 뭔가…… 뭔가 예시가 굉장히 구체적인데?”
오호라, 그런데 뜻밖에도 클로에가 내 말에 기겁했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듯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을 더듬었다.
전부 다 미래의 그녀가 했다고 적혀 있던 짓인데,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이 정도 수위의 악행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하긴, 굳이 뜨거운 차를 차가운 음료로 바꿔서 옷에 들이부었을 때부터 알아봤어.’
나는 잘됐구나 싶었다.
“그래, 무섭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런 짓은 하면 안 돼. 나도 화염 마법이 내재된 물건을 유디트의 생일날 선물해서 궁을 연소시킨다든가, 무도회에서 유디트의 머리 위에 있는 샹들리에를 폭파시킨다든가 하지 않을 테니까. 알겠지?”
“헉! 어, 언니, 그런 끔찍한…… 아니, 그런 화통한 방법들은 언제 생각한 거야? 언니가 직접 하려고 떠올린 거야?”
“그럴 리가 있겠니? 우리는 품위 있고 우아한 황녀들이잖니, 동생아.”
내가 다른 때보다 친한 척 클로에의 뺨을 양손으로 조물락거리며 말하자 그녀는 금방 헤실거렸다.
“언니 말이 맞아! 우리가 황족 중에 제일 아름답고 품위 있지!”
이 다루기 쉬운 것.
내가 클로에를 싫어할 수 없는 이유였다.
* * *
나는 방실방실 웃는 클로에를 뒤에 달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 저기 베른하르트 소공작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클로에가 어딘가를 손가락질하며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반사적으로 그녀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과연 클로에의 말대로 회랑을 걷고 있는 킬리안 베르하르트가 보였다.
아니, 이건 별로 반갑지 않은 만남인데.
안타깝게도, 클로에의 우렁찬 목소리를 킬리안 베른하르트도 들은 것 같았다.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황녀님들을 뵙습니다.”
곧 다가온 킬리안이 나와 클로에에게 인사했다. 오늘도 여지없이 완벽하게 잘생긴 모습이었다.
사냥 대회의 첫날 보았던 것처럼 오늘은 정복 차림이었는데, 워낙 수려하게 잘생긴 소년이라 그런지 야외복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그를 돋보이게 했다.
“오랜만이군, 베른하르트 소공작.”
“크흠, 안녕하세요, 소공작.”
그래서인지 클로에는 기껏 요란하게 먼저 킬리안을 알은척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짐짓 새침한 모양새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클로에의 뺨은 약간 빨갰다.
난 그런 클로에를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흘겨봤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그렇게 쩌렁쩌렁하게 킬리안의 이름을 부른 거지?’
클로에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굳이 안 마주치고 그냥 지나갈 수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