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글쎄. 이유가 궁금해?”
간을 보듯이 손에 느슨히 턱을 괴고 웃었다.
“조금은요? 대부분의 경우 1황녀님은 그냥 움직이지 않으시잖습니까.”
내가 요즘 백야의 전당에 자주 오는 이유는 당연히 제라드 때문이었다.
특히 오늘 이곳에 들른 이유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에게 한 가지 거래를 제안하기 위해서였고 말이다.
“이 밥버러지 같으니! 좀 더 빨리 움직여라!”
하여 내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마침 창밖으로 익숙한 사람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붉은 머리 소년의 눈에는 오늘도 독기가 박혀 있었다.
옆을 보니, 오늘도 제라드의 옆에 붙어 있는 건 지난번에도 그를 노예처럼 부려 먹던 그 마법사였다.
“쯧. 시끄럽게 굴기는.”
레반테온이 못마땅한 듯이 혀를 찼다.
“저런 놈들은 정말 마법사의 수치 아닙니까?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들어왔다고 신이 나서 날뛰는 꼴이 웃기지도 않는다니까요.”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레반테온은 저런 마법사들의 행태에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창밖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지는 소년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아이, 내가 데려가고 싶은데.”
내 말에 레반테온이 의외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교화도 덜 끝난 이단자를요?”
흥미로운 시선이 제라드에게 향했다.
그의 무엇이 내 관심을 끌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설마 요즘 백야의 전당에 자주 오시던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습니까?”
하지만 호불호가 강한 마법사답게, 레반테온은 볼품없어 보이는 이단자 소년에게 금방 흥미를 잃었다.
“5년만 기다리시죠.”
“너무 길어.”
애초에 이단자의 교화에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기다림이 너무 길었다. 난 저 소년을 좀 더 일찍부터 옆에 두고 싶었다.
“흠, 순수한 의도는 아니신 것 같은데요. 이건 뭔가를 꾸미시는 얼굴인데.”
나를 꽤 잘 아는 레반테온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묘하게 웃었다.
나는 그를 따라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덧그렸다.
이번 사냥 대회 때의 일로 내가 한 가지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면, 역시 나는 선역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는 점이다.
유디트를 가까이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 결국 그동안의 망설임을 버리고 제라드를 옆에 둬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온전한 내 이기심과 탐욕 때문이었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제물이 되었던 제라드는 내 손에 쉽게 죽지 않았다.
그는 유디트를 지키던 기사답게 꽤 강했고, 무엇보다도 끈질겼다. 하여 내 덫에 걸린 상태에서도 지독하게 저항했다.
그러던 중에, 결국 나에게도 작지 않은 마법적 타격을 입혔다.
꿈속의 책에서는 내 실패 요인이 따로 서술되진 않았지만, 난 혹시 그 부상의 여파로 금단술의 부작용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일찍부터 유디트가 아닌 내가 그를 거두어서, 내게 복종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차근차근 그를 길들여,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날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유디트에게 그가 그랬듯이.
만약 그게 어렵다 해도, 최소한 내가 그를 죽이려 할 때 바로 반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신뢰를 쌓는 정도는 해야겠지.
방심하고 있으면 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난 정말 근본부터 글러 먹은 인간인 모양이야.’
결국 금단술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서, 만약의 경우 그 부작용을 줄일 방법부터 이렇게 찾고 있으니 말이다.
“그보다 애초에 저는 이단자의 교화를 담당한 마법사도 아닌데 뭘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안 어울리게 웬 엄살이지? 레반테온한테 그 정도는 별일도 아니잖아.”
능청을 떠는 레반테온을 보며 말했다.
“월계수 잎을 다섯 개나 단 마법사인데.”
백야의 전당에서 마법사의 등급은 월계수 잎의 개수로 판별할 수 있는데, 레반테온은 그중에서도 몇 안 되는 다섯 월계수 잎의 마법사였다.
타고난 마력량은 열병을 앓고 있는 나만큼 많지 않지만, 대신 그는 연구 분야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물론 난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대신 당신이 흥미롭게 여길 만한 이야기를 들고 왔지.”
“호오. 자신만만하시네요. 제가 그렇게 쉬운 사람은 아닌데요.”
그건 알고 있다. 늘 허술해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지만 레반테온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웬만한 소재로는 그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걱정하지 않았다.
“흥미로울 수밖에 없을 거야. 내가 다녀온 세계의 이면에 대한 이야기니까.”
손에 깍지를 낀 채 의자에 느긋이 등을 기대며 꺼낸 말에 과자를 우물거리던 레반테온의 입이 한순간 멈췄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보던 그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농담이시죠? 혹시 저를 놀리실 생각이라면…….”
“내가 언제 이런 농담하는 거 봤어?”
확실히 그동안 내가 마법에 대한 내용으로 헛소리를 한 적은 없는 만큼 레반테온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도 이해는 했다. 역시 쉽게 믿기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레반테온은 마법사답게 의심이 많은 성격이기도 했다.
“그래도 다른 것도 아니고 세계의 이면은…….”
“정 믿기지 않으면 진실의 보주라도 사용해 보든가. 마력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어.”
덜컹!
레반테온이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레반테온은 정말 쏜살같이 달려 나가 진실의 보주를 가져왔다.
난 그가 이렇게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지금 처음 알았다.
“나 아르벨라 레온 카뮬리타는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한다.”
레반테온이 가져온 보주에 맹세하고 거기에 손을 댄 뒤 몇 가지 질문에 답했다.
나는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가 본 게 세계의 이면이 맞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가 무슨 질문을 하든 망설이지 않고 척척 대답했다.
잠시 후 레반테온은 엄청나게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맙소사! 정말입니까?! 정말 1황녀님이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봤다고요?!”
얼굴까지 벌게져서 어린애처럼 신나 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오랜만에 우쭐한 마음이 샘솟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 세계의 이면에서 거지 같은 책을 보고, 동시에 내 암울한 미래를 알게 된 충격으로 한동안 내가 너무 우중충하게 지내긴 했다.
하지만 레반테온의 말마따나 어쨌거나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본 일 자체는 모든 마법사들의 경외를 살 만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가슴이 좀 뻥 뚫린 기분이 들며 어깨가 으쓱거렸다.
“어떻게 지금까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이렇게 감쪽같이 숨기실 수가 있습니까? 사실이라면 이건 엄청나게 경이로운 일 아닙니까!”
물론 여전히 ‘사실이라면’이라고 전제를 붙이는 걸 보면, 레반테온은 진실의 보주까지 사용하고도 내 말을 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최연소라고요! 약관도 넘지 못한 나이에 세계의 이면을 본 마법사는 어떤 기록에서도 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 그래. 열네 살에 세계의 이면에 갈 정도로 미친 천재인 황녀님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놀랍기도 하겠지.
“하지만…… 여전히 허점이 있긴 하지요. 진실의 보주까지 사용해서 확인하긴 했지만, 혹시 1황녀님이 어떤 착오로 세계의 이면을 보았다고 착각하고 계실 수도 있으니까요.”
레반테온은 실컷 흥분하다가 이제야 슬슬 이성이 돌아온 듯이 턱을 문지르며 또 다른 의심을 시작했다.
순간 자존심이 살짝 상했다.
‘뭐야, 지금 감히 나를 의심해?’
내 발끝도 못 따라오는 마법사 나부랭이 주제에, 누구더러 허점이니 착오니 떠들어 대는 거야?
하지만 레반테온에게서는 아직 얻어낼 게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오늘만큼은 그의 건방짐을 용서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여전히 빈정이 상하긴 해서, 일부러 보란 듯이 입꼬리를 삐뚤게 끌어올려 그를 비웃었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부터가 세계의 이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증거라 할 수 있는데.”
레반테온은 여유로운 내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는 여전히 의혹이 드는 모양이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한테 말로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쯧, 세상에는 우매한 인간이 너무 많다니까.’
하지만 난 모자란 인간들을 품어줄 줄 아는 그릇 넓은 황녀님이니 특별히 선심을 써주지.
나는 레반테온에게 떡밥을 던졌다.
“레반테온이 원한다면 일부 기억을 공유해 줄 수도 있어.”
“정말이십니까?!”
그는 먹잇감을 기다리던 물고기처럼 대번에 내가 던진 떡밥을 물었다.
“그럼 지금 당장……!”
“무슨 소리야? 지금 당장은 안 되지.”
내 말에 다시 흥분해서 바로 마법식을 준비하려 하던 레반테온이 하늘이 무너졌다는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 왜요? 왜 지금 당장은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레반테온. 아무리 백야의 전당에서만 틀어박혀 지냈어도 그렇지, 거래의 기본 조건도 몰라?”
난 유감스러운 눈으로 그를 지그시 쳐다봐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원하는 걸 당신이 저울추에 올릴 수 있게 될 때 다시 얘기해.”
레반테온을 향해 빙긋 웃어 준 뒤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화, 황녀님! 황녀님……!”
뒤에서 애처롭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백야의 전당을 빠져나오는 내 기분은 오랜만에 상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