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 *
“1황녀, 며칠 전 사냥 대회 때 황후와 언쟁이 있었다지?”
다음 날 아침, 조찬 시간 중에 황제 폐하가 먼저 지난 일을 화제에 올렸다.
현재 자리에는 다른 황비들과 황녀, 황자들도 일부 참석해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황후와 밀리엄은 없었다.
비들이 초대받은 자리에 황후만 제외당했을 리는 없으니, 오늘 조찬 자리에 불참한 건 온전한 그녀의 선택일 터였다.
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말했다.
“언쟁이라니요. 그저 모녀간에 사소한 오해가 있어 대화를 조금 나눈 것일 뿐인데요.”
어머니가 오늘 조찬 자리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나 때문일 터였다.
사냥 대회 때 어머니의 앞을 막아선 마리나를 두둔하고 그녀에게 맞선 일로 내게 크게 화가 나셨을 테니까.
그러니 내가 먼저 사죄라도 하면서 숙이고 들어오길 바라시는 거겠지.
“그래. 오해가 있다면 잘 풀어야지.”
역시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가 있는지, 아버지 황제 폐하가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말했다.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니 철없이 굴지 말거라, 1황녀.”
간접적으로 말했지만 결국은 나더러 어머니에게 먼저 져 주라는 소리였다.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요즘 어머니에게 시달려서 피곤했어도 그렇지, 저런 먹히지도 않을 소리를 하시다니.’
내 성격도 뻔히 아시면서.
“예, 아바마마 말씀대로 저도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니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물잔을 들며 대답했다.
어머니와 내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간접적인 말에, 아버지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폐하, 모녀간의 일이니 아무렴 1황녀가 알아서 잘하겠지요.”
그때 2황비 카타리나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보다 저희 1황자가 요즘…….”
그녀는 황제가 나하고만 대화를 나누는 게 불편했는지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그게 통했는지 아버지는 더 이상 내게 어머니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듣지 않은 것처럼 태연히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런데 아바마마.”
그러다 잠시 후, 이번에는 내가 먼저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유디트의 궁이 그간 방치된 지 오래되어 곳곳에 보수 작업이 필요하겠더군요.”
쨍그랑!
바로 그 순간 옆쪽에서 식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에! 품위 없이 무슨 짓이니?”
2황비 카타리나가 딸을 꾸중했다.
그 소리를 듣고 지금 식기를 떨어드린 게 클로에라는 걸 알았다.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무시하고 아버지에게 다시 말했다.
“아예 궁 전체를 새로 꾸미는 게 좋을 듯한데, 아시다시피 황궁 내에는 이런 일로 관심을 쏟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요.”
“유디트라면, 4황녀 말이냐?”
“예.”
아버지는 뭘 잘못 먹은 사람 보듯이 내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 냉궁의 황녀에게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던 건 나도 마찬가지면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유디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게 이상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건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1황녀로서 그 아이의 궁에 손을 대도 좋을지 여쭈어 보고 싶었습니다.”
약간 찌푸린 눈으로 날 주시하던 아버지가 잠시 후 내게서 시선을 뗐다.
“별 쓸데없는 걸 다 묻는구나.”
“그럼 제가 알아서 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라.”
예상대로 무관심한 아비인 황제의 승낙을 받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바마마.”
나는 그린 듯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예의상의 감사 인사를 건넸다.
* * *
“언니! 벨라 언니!”
조찬 자리가 파한 뒤, 먼저 식당을 나와 걷고 있는 나를 클로에가 뒤에서 급히 부르며 쫓아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힐끔 돌아봤다.
오늘 클로에는 내가 사냥 대회의 첫날 입었던 것과 비슷한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 장식은 어제 내가 했던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머리카락까지는 아직 날 따라서 자를 용기가 없었는지, 재주 좋게 안쪽으로 반쯤 접어 올려 나와 비슷한 단발머리의 흉내만 내고 있었다.
“아까 뭐야? 언니가 왜 유디트, 그 계집애를 신경 써?”
잠시 후 내 앞에 당도한 클로에가 다짜고짜 아까의 일을 따져 물었다.
“더군다나 궁 얘기는 또 뭐고! 어제 언니가 유디트 궁에 갔었다는 게 설마 진짜야?”
어쩐지 식사 시간 내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바쁘게 힐끔거리더니만, 이것 때문이었나?
나는 짤막하게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그런데?”
“지, 진짜라고? 그냥 헛소문이 아니고?”
클로에는 내가 부정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 엄청나게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왜? 언니가 거길 왜 갔는데?”
누가 들으면 집이 망했다는 소리라도 들은 줄 알겠다.
오늘은 클로에를 상대하는 게 좀 빨리 귀찮아져서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지을 생각으로 말했다.
“언니가 동생 궁에 찾아가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던가?”
“동……생?”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클로에가 눈을 세차게 흔들었다.
“클로에! 어서 이리 오지 못해?”
그때 2황비가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클로에를 불렀다.
그녀는 평소에도 딸인 클로에가 나한테 붙어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2황비의 옆에는 그녀의 아들인 1황자 라미엘이 서 있었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조찬 자리에 참석한 것이 피곤한지 하품을 하던 1황자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한동안 마력 반동의 부작용으로 고생했던 듯, 그의 얼굴은 다른 때보다 병약해 보였다.
라미엘이 나한테 보란 듯이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마력으로 머리 위에 글씨를 만들었다.
‘너무해. 내가 며칠 동안 너 때문에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알 게 뭐야. 그러게 누가 거슬리는 그림자를 내 눈에 띄게 하랬나?
하지만 라미엘의 헛소리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아. 난 네가 좋으니까, 아르벨라.’
그는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제 어머니의 뒤에서 나를 향해 윙크하며 씨익 웃었다.
하마터면 조금 전 먹은 아침 식사를 게워낼 뻔했다.
아, 눈 버렸네. 저 나르시시즘 환자가 내 발끝도 못 따라오는 미모로 어디서 끼를 부려?
나는 눈빛으로 라미엘에게 말했다.
‘한 번만 더 네 그림자가 내 눈에 띄면 그땐 완전히 찢어발겨 버릴 줄 알아.’
그래도 의미가 통했는지, 돌연 그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라미엘에게 입술을 비틀어 욕 대신 썩은 미소를 돌려준 뒤 아직도 굳어 있는 클로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2황비님이 부르시네. 그럼 클로에, 좋은 하루 보내.”
그렇게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클로에한테 인사해 준 뒤 먼저 뒤돌아 그 자리를 떠났다.
* * *
황궁 안에는 여기저기 심어진 눈과 귀들이 많았다.
황족의 개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궁에서도 그럴진대, 이런 탁 트인 황도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분명 어머니의 사람도 한둘 정도는 어딘가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황제의 충고를 받아들여 황후궁에 가는 대신, 백야의 전당으로 향했다.
“1황녀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나를 환대해 주었다. 지난번에도 만났던 마법사 레반테온이었다.
그는 이제 20대 초반임에도 백야의 전당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재능 있는 젊은 마법사였다.
구름처럼 복슬복슬한 긴 하늘색 머리를 하나로 대충 묶고 분홍색 눈에 외알 안경을 낀 레반테온은 꽤 잘생긴 청년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세간에서 젊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는 진성 마법 덕후였다.
“1황녀님이 말씀해 주신 대로 수식을 적용해 보았더니 정말 진척이 있더군요!”
“그래? 다행이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역시 황녀님께 의논하길 잘했습니다.”
어떻게 알긴, 내가 그걸 찾느라 며칠 동안 마법서를 얼마나 뒤졌는데.
사실 내가 천재인 건 맞지만 그렇다 해서 매일 빈둥거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남들 앞에서 이런 식으로 추켜세워지는 걸 좋아해 일부러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갈고닦는 데 많은 시간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오늘도 ‘내가 이만큼 열심히 노력했소!’ 하고 주장하는 건 멋없는 짓이었다.
“그냥 레반테온의 설명을 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했을 뿐이야.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었어.”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떼며 내 천재성을 과시했다.
“이야, 역시 1황녀님은 우리 카뮬리타의 보배십니다!”
나 때문에 막혀 있던 연구에 진척이 있는 게 기뻤는지, 레반테온도 아낌없이 나를 추켜세워 주었다.
우리는 하하 호호 웃으며 사이좋게 마법 수식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한데 1황녀님, 요즘 들어 백야의 전당에 자주 오십니다?”
그러다 레반테온이 지나가듯이 말했다.
그는 오늘도 머리를 너무 많이 써서 열량과 당분을 보충해 줘야 한다며 과자와 초콜릿을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었다.
며칠간 밤샘이라도 한 듯이 후줄근한 모습이라 더 허술하고 헐렁해 보였지만, 날 향한 눈빛만큼은 또렷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