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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31화 (47/203)

31화 [S공금]

유디트는 내 말에 생각 이상으로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자 또 며칠 전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 살짝 표면 위로 올라오려고 했다.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우월감이었다. 동시에 왠지 이 순진한 아이를 괴롭혀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또 내 안 좋은 성격이 도지기 전에 유디트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런데…… 시녀들은 어디에 있지?”

내 물음에 유디트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듯, 퍼드득 몸을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저, 죄송해요. 실은 손님이 이렇게 머물다 가시는 게 처음이라……. 지금 제가 차라도 내올게요!”

“…….”

지금 황녀가 제 손으로 직접 차를 내오겠다는 소리를 한 건가…….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황궁에서 12년을 살았는데 지금까지 시녀들이 차를 내올 일이 한 번도 없었다니 심각했다.

“그냥 앉아 있어.”

이 정도면 상황 파악은 얼추 되었다.

나는 문가에 서 있는 마리나를 불렀다.

“마리나. 가서 시녀를 찾아 데려와.”

“예, 황녀님.”

마리나가 냉궁의 시녀를 찾으러 떠나고, 유디트는 내가 시킨 대로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 내 입으로 ‘너를 보러 왔다’고 말했을 때부터 그녀는 좀 멍해 보였다.

그사이에 나는 유디트의 방을 대충 훑어봤다.

‘꼬라지가 참…….’

관리가 잘 안 되어 보이는 궁의 외관에서부터 알아봤지만, 안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가관이었다.

나름대로 정리 정돈과 청소는 열심히 한 듯하나 새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후줄근한 방.

손님이 왔는데도 코빼기 하나 안 비추고 도대체 어딜 가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를 시녀.

거기다 그 모든 문제점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주인이라.

이런 총체적 난국이 또 어디에 있을까.

“황녀님, 데려왔습니다.”

잠시 후 유디트의 시녀가 내 앞에 대령되었다.

“1, 1황녀님!”

시녀는 내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듯이 사색이 되어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조금 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몸을 낮추고 내게 인사했다.

“1황녀님을 뵙습니다! 카뮬리타의 축복과 가호가 함께 하시어 제국의 광영을 무구히 빛낼 이 시대의 첫 번째 창과 방패가 되시기를. 지성에서 태어난 지고하고도 유일한 태양의 딸로서 최고의 홍복을 누리소서!”

언제 들어도 참 쓸데없이 긴 인사다.

“그래. 차만 놓고 나가 봐.”

시녀는 내가 호되게 야단을 칠까 봐 긴장하다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예상 밖으로 나한테 별말을 듣지 않아 오히려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옳다구나 싶었는지, 서둘러 다과상을 차린 뒤 도망치듯이 유디트의 방을 떠났다.

다시 조용해진 방 안에서 시녀가 내온 차를 맛봤다.

유디트는 침대 위에서 그런 나를 조마조마한 눈으로 지켜봤다. 차가 내 입에 안 맞을까 봐 걱정되는 듯했다.

‘형편없군.’

딱 한 번 입에 댄 찻잔을 바로 다시 내려놨다.

유디트가 나를 지켜보고 있어 예의상 좀 더 먹는 척해 줄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 정말 멍청한 시녀구나. 이 방에 있는 사람이 둘인데 나한테만 차를 주고 가다니.’

주인인 유디트를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알 만한 대목이었다.

역시 유디트의 궁에 있는 시녀들은 교육이 하나도 안 되어 있었다.

유디트는 내가 찻잔을 그냥 내려놓고 다시 손대지 않자 또 아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방 안에는 또 침묵만이 맴돌았다.

유디트의 입이 움찔거리는 것으로 봤을 때, 그녀는 나한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나는 게 없는 건지, 아니면 용기가 나지 않는 건지, 아무튼 유디트는 내 앞에서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손에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저, 저어, 1황녀님.”

내 시선을 못 이긴 듯이 유디트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사냥터에서 치료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때 제대로 된 인사를 못 드린 것 같아서…….”

“그래.”

“그때 일로 사냥 대회가 중단되었다지요? 아쉽네요…….”

“그러네.”

애써 이야깃거리를 짜내 내게 말을 붙이던 유디트가 울상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화제로 삼을 만한 내용이 떨어졌나 보다.

내가 단답식으로 짧게 대답해서 대화를 이어가기 더 어려웠던 걸 수도 있었다.

그러다 유디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3황자님은 괜찮으신가요? 그때 많이 우시던데, 혹시 다치신 곳은 없는지…….”

순간적으로 실소를 내뱉을 뻔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지?

밀리엄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그날 죽은 마법 생물을 걱정해 주는 게 더 생산적일 것이다.

어떻게 유디트가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그 책에서도 유디트는 착하고 정의로운 여주인공이었지.

하지만 이 정도면 착하다기보다 그냥 멍청한 것 아닌가?

‘이 정도로 선한 게 여주인공의 조건이라면, 난 죽을 때까지 여주인공 못 하겠군.’

역시 그 망할 책에 나온 주인공들과 나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렇게 울상인 얼굴은 좀 마음에 드는지도.’

내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대답 없이 가만히 있자 유디트는 또 긴장한 듯이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 애는 괜찮아.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내가 대답하자 유디트가 고개를 들고 배시시 웃었다.

“다행이네요. 1황녀님의 동생이 다치지 않아서.”

왜 이 아이가 이 세계의 여주인공인지 단숨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어여쁜 웃음이었다.

그걸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 봐야겠다. 배웅은 따로 하지 않아도 돼.”

그러자 유디트가 나를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가, 가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를 쳐다보는 눈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벌써 가시는 건가요……?”

어떻게든 나를 잡고 싶어 하는 게 눈에 환히 보였다.

하지만 역시 유디트는 체념하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답게, 금방 두 눈을 조용히 내리깔고 나한테 인사했다.

“네, 와 주셔서 영광이었어요. 조심히…… 살펴 가세요, 1황녀님.”

“그래, 유디트.”

지난번 사냥터에서처럼 유디트에게 웃어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일 없이 그녀를 지나쳐 문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애처로운 유디트의 시선이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아, 유디트.”

문을 나서기 전, 그래도 유디트를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의자는 방에 하나 더 두는 게 좋겠구나.”

“네?”

“다음에 왔을 때도 네가 앉을 자리가 없으면 곤란하니까.”

날 향한 민들레 색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잠시 후 내 말뜻을 알아들은 유디트의 얼굴이 서서히 환해졌다.

“네, 네……! 다음엔 의자를 하나 더 준비해 둘게요!”

조금 전보다 확연히 밝아진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뒤돌아 방에서 빠져나왔다.

* * *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1황녀님!”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유디트의 시녀들이 막 방에서 나온 나를 향해 인사했다.

시녀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냉궁에 설마 이렇게 갑자기 다른 황족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내가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시녀들의 긴장감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그저 싸늘히 내려다본 뒤 아무 말 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뒤에서 안도의 한숨이 작게 터져 나오는 게 들렸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반응이었다.

냉궁을 빠져나오는 길에 마리나에게 명령했다.

“마리나. 저 시녀들, 다시 내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해.”

“네, 황녀님. 냉궁의 시녀들을 전부 교체하도록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사죄하지는 못할망정 다들 눈치만 살살 보고 있는 꼴을 보니, 이건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녹슨 정문을 빠져나오기 전,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는 냉궁을 마지막으로 훑어봤다.

“유디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은 우리 궁에 있는 시녀들로 보내도록 해.”

그러면서 덧붙인 말에 마리나가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주인이 유디트를 그 정도로 챙긴다는 것에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마리나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든, 그것은 지금 내 진짜 속내와 많이 다를 터였다.

‘내 것이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건 질색이니까.’

원래 오늘은 상태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이렇게 된 김에 유디트의 궁을 내 시녀들로 채워 넣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입술 한쪽을 미세하게 끌어올려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미소를 지은 채, 그렇게 1황녀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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