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나는 발을 움직여 아직도 거슬리게 유디트에게 붙어 상황을 주시하는 라미엘의 그림자를 먼저 밟아 없앴다.
지금까지 그림자의 존재를 알면서 내가 묵인해 준 것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방심하고 있었는지, 검은 뱀은 뒤늦게 도망치려 하다가 꼬리를 잡혔다.
마력으로 짓이겨진 그림자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라미엘에게도 반동이 갔을 테지만 이 정도는 그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뒤 나는 유디트에게 손을 뻗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듯이 쓸자 유디트가 펄쩍 뛸 듯이 몸을 움직였다.
“화, 황녀님. 손이 더러워져요.”
내 손이 더러워질 걸 걱정해 주는 걸 보니, 자기 몰골이 어떤지는 대충 알고 있었나 보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유디트를 무시하고 피가 밴 그녀의 팔로 손을 내렸다.
팔꿈치를 타고 핏방울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꽤 깊게 찢어진 상처에 손을 올리자 유디트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하지만 신음 한번 안 내고 통증을 꾹 참는 모습이, 역시 어린애답지 않았다.
화아앗!
지난번에 1황녀궁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법으로 유디트의 상처를 치료해 줬다.
이 또한 나로서는 정말 별것 아닌 사소한 변덕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유디트의 두 눈망울은 풀잎 위에 떨어진 이슬처럼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1황녀님.”
치맛자락을 붙든 마른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저한테…… 이렇게 잘해 주시는 분은 1황녀님밖에 없어요.”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아, 이 아이는 어쩌면 이다지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걸까?
유디트에게서 손을 떼고 가여운 어린 양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다가올 미래에 누구보다 눈부시게 빛날 것이 약속된 여자아이는, 지금 이 순간 그녀를 돌봐 주는 이 하나 없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혼자 내 눈앞에 덩그러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한순간…… 정말 한순간.
그런 유디트의 모습이 왠지 지금의 엉망진창인 나와 아주 조금 닮아 보였다.
물론 나도 이런 내 생각이 기만적임을 알고 있었다.
나의 현재와 이 아이의 현재.
그리고 나의 미래와 이 아이의 미래.
아직 그 교차점에도 다다르지 못한 지금의 우리는 결코 대등하지 않았으니까.
“유디트, 넌 내가 좋니?”
불시에 던진 물음에 유디트의 뺨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한 번도 사랑받아 본 적 없는 아이가 꼭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날 응시했다.
그 모습이 정말 이 세계의 애정을 한 몸에 받는 여주인공답게 가련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또한 실소가 날 정도로 미련하면서도 멍청해 보였다.
비틀린 우월감과 허무한 욕망이 가슴에 똬리를 튼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내 머릿속에 이 세계의 악역다운 끔찍한 생각이 스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쩌면 내가 죽는 날까지 결코 진심으로 좋아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내 가엾고도 미운 여동생 유디트.
정해진 운명대로라면, 머지않은 훗날 결국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가질 너.
누구보다 빛나는 미래가 약속되어 있는 이 세계 최후의 승자.
그럼 반대로, 만약 그런 너를 내 손에 넣게 되면.
그래서 만약 내가 네 삶과 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 결국 네 인생의 주인과 다름없게 되어 버리면…….
그럼 결국 나는 이 세계의 승리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혹시 나중에 내가 어떤 노력으로도 이 저주받은 운명을 바꾸지 못해, 정말 원치 않는 이른 최후를 맞이한다 해도.
나는 분명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음에도 그날만큼은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가 된 기분이었고, 하필이면 그때 내 눈에 띈 사람이 이 아이였다.
그것이 유디트의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즐거운 기분이 들어서 다시 손을 뻗어 유디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날, 석양빛만큼이나 뺨을 붉게 물들인 순진한 여자아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역시 악녀는 악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라고.
나는 결국 이 아이에게 좋은 가족이 되어 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결국은 그것이 내가 그 아이의 언니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였다.
10. 괴물 황녀님의 먹잇감
“유디트가 그때 산책로가 있는 숲에 들어갔던 게, 클로에의 반지를 찾기 위해서라고?”
마리나의 보고를 듣고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클로에는 참 클로에다웠다.
‘그러다 다람쥐를 보러 간 밀리엄과 마주친 거로군.’
결국 사냥 대회는 도중에 중단되었다.
마법 생물이 사냥터의 보호막을 뚫고 나온 일로 안정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 가장 큰 목소리를 낸 건 우리 황후 전하셨다.
어찌나 밀리엄을 싸고도시는지, 고작 눈에 띄지도 않는 생채기 하나 난 아이를 앞세우고 황제 폐하의 앞에서 한바탕 소란을 떠셨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은 사냥 대회를 조기 종결하고, 보호 결계를 다시 대대적으로 점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마리나, 지금 외출할 테니 준비해.”
“예, 황녀님.”
어머니 때문에 다친 마리나의 얼굴은 결국 내가 마법으로 치료해 줬다.
사실은 자연 치유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의원이 흉터가 남을지도 모른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처음으로 유디트의 냉궁에 방문할 생각으로 움직였다.
* * *
“안녕, 유디트. 기별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하구나.”
정말 놀랍게도, 유디트의 궁에는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시녀들이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내가 갑자기 찾아온 건 맞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정도가 심했다.
결국 마리나가 직접 성안 어딘가에 있는 유디트를 찾아내 내 방문을 알린 뒤에야 나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유디트는 독서 중에 급하게 뛰어온 듯이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나를 본 유디트의 두 눈은 당장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엄청나게 크게 떠져 있었다.
그 상태로 얼어붙은 유디트를 보며 나는 고개를 옆으로 슬며시 기울였다.
“들어오라고 말해 주지 않을 거니?”
내가 다시 한번 말한 순간, 유디트의 손에서 떨어진 책이 그녀의 발등을 찍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듯이 유디트가 헛숨을 들이마셨다.
“어, 어, 어, 아…… 안녕, 안녕하세요, 1황녀님! 어, 어서 들어오세요!”
일전에 1황녀궁 앞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지금 이 상황이 어지간히 놀랍긴 한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이렇게 그녀를 직접 찾아온 건 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지만.
난 꼭 둥지에 침입자를 맞은 새끼 오소리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유디트를 따라 궁 안으로 들어섰다.
* * *
“저어, 응접실은 지금 깨끗하지가 않아서…… 괘, 괜찮으시면 제 방으로 모셔도 될까요?”
“그래.”
이렇게 빠르게 유디트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갈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궁 안 사정 때문에 뜻밖에도 첫날부터 그녀의 가장 내밀한 곳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가 네 방이라고?”
“예, 예. 이쪽에 의자가 있어요!”
유디트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본 광경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방의 위치를 보나, 방의 크기를 보나, 이곳이 궁의 주인인 황녀가 지낼 만한 곳이 아니란 걸 한눈에 알겠다.
게다가 그녀의 방은 다른 황녀가 아니라 귀족들의 방과도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소박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이제 고작 다섯 살인 밀리엄도 이상함을 느낄 만한 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얼굴이었다.
서둘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방에 딱 하나 있는 의자를 직접 제 손으로 잡아 빼 준 뒤 나를 쳐다보는 유디트의 눈이 참으로 맑고 순진했다.
일단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권한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넌 어디에 앉으려고?”
“저는 바닥에…….”
“침대에 앉아.”
“네!”
유디트가 내 말대로 그래도 의자와 가까이에 있던 침대로 후다닥 달려가서 착석했다.
난 하나뿐인 의자에 앉아 유디트를 지켜봤다.
유디트는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수그린 채 다리 위로 모아 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사냥 대회 때 본 것처럼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입술을 옴짝거리던 유디트가 잠시 후 침묵을 이기지 못한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1황녀님……. 저어, 그런데, 저기. 제 궁에는 무슨 일로 와 주셨는지…….”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못내 당황스럽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다.
나는 그런 유디트를 보다가 이내 느릿하게 입매를 당겨 웃었다.
“당연히 널 보러 왔지.”
그 순간 유디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를…… 보러요?”
“그래.”
연분홍빛을 띠고 있던 아이의 뺨이 더 빨갛게 물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너무 크게 흔들려서, 꼭 폭풍우를 맞은 민들레를 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