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 *
“321호! 해가 중천에 떴다, 빨리 나와!”
동이 틀 무렵.
오늘도 거칠게 문을 발로 차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제라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적때기 같은 천 조각을 이불 대신 덮고 있던 붉은 머리 소년이 딱딱한 나무 침상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원래는 제라드란 이름을 가졌던 소년은 백야의 전당에 들어와 이름을 잃고 ‘321호’가 되었다.
그의 부친이 금단술을 사용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닥을 딛고 일어서자, 어제도 밤늦게까지 고된 일을 하며 혹사당한 몸이 여기저기 삐걱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제라드는 무거운 몸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빨리 나가지 않고 늦장을 부리면 더 혹독한 체벌이 돌아올 것이다.
며칠 전에도 탈출을 시도했던 일로, 제라드는 일부 마법사들에게 보복성 폭행을 당해야 했다.
혹여나 그가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면, 제라드의 감시를 맡은 자신들이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게 이유였다.
특히 탈출 과정에서 제라드에게 급소를 맞아 기절한 견습 마법사는 다른 때보다 더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다른 마법사들은 대체로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냥 적당히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었다.
“이 굼벵이 같은 놈! 오늘도 할 일이 많으니까 빨리빨리 움직여!”
오늘도 밖으로 나가자마자 욕설이 날아왔다.
물론 그래봤자 백야의 전당 소속 마법사들은 고상한 귀족 출신이 대부분이라, 이 정도는 제라드에게 욕설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순종적인 척 아래로 내리깔린 그의 눈은 채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 이번 달에 나온 영상 마력석 봤어?”
“봤지!”
제라드는 노역형에 처해진 노예처럼 마법사들의 시중을 들며 일했다.
“특히 1황녀님 게 대단하지? 최단기간에 100만 개 추가 제작 들어갔잖아.”
그러다가 그는 마법사들의 대화를 듣고 문득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래. 원하지 않는 곳에 억지로 있을 필요 없어.”
“그냥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며칠 전 탈출을 시도했을 때 만났던 소녀.
백야의 전당에서는 제라드에게 족쇄를 채우거나 묶어 두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 그랬을 뿐, 실상은 마법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번에 그가 잡힌 이유는 그래서였다.
어쨌든 방심한 마법사를 기절시키고 백야의 전당 밖으로 나갔을 때, 그 앞에는 더 넓은 황성이 펼쳐져 있었다.
제라드는 그저 다시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 일단 되는 대로 몸을 숨기기로 했다.
하여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하다가 도착한 곳이 바로 온실이었다.
푸드덕!
그곳에는 온갖 다양한 새들이 관상용으로 길러지고 있었다.
어느 고귀하신 황족님의 취미인가.
하지만 주변을 좀 더 살펴볼 시간은 없었다. 곧 누군가가 온실 안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혹시 벌써 추적자가 온 건가 싶어, 제라드는 숨소리를 죽인 채 무성한 풀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타박타박, 가벼운 발소리가 온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안녕, 얘들아. 오랜만에 보네.”
잠시 후 아직은 앳된 미성의 목소리가 귀에 작게 흘러들었다.
초록빛 식물 사이로 언뜻 모습이 비친 것은 금발의 소녀였다.
소녀는 새들과 무어라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온실의 천장이 개방되며 머리 위에서 바람이 불어닥쳤다.
퍼드득!
새 떼들이 일시에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바람에 쓸려 나부끼는 깃털과 그 틈새로 부서지는 햇빛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반짝이며 흩날리는 금색 머리칼과 색색의 깃털들 사이에서 연푸른 눈동자가 쓸쓸함을 머금은 채 아릿하게 빛났다.
제라드는 저도 모르게 소녀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넌 뭐지?”
외로워 보이던 소녀는 순식간에 위엄 있는 모습으로 변해 제라드의 정체를 물었다.
“왜 여기 있어? 이곳은 허가 없이 출입해도 되는 곳이 아닌데.”
제라드는 그 소녀의 얼굴과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끼풀 황녀.
얼마 전 숲에서 사냥감이 되어 늑대와 사람들에게 쫓길 때 만났던 소녀가 분명했다.
그때, 달려드는 늑대를 기절시킨 뒤 초록빛 숲속에 서 있는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천사가 나타난 줄 알았다.
하지만 곧 햇빛에 희게 물든 얼굴이 까닭을 알 수 없게도 제라드의 기억 한 곳에 묻혀 있던 묘한 그리움을 자극했다.
꼭 뇌 속의 어느 버튼을 눈앞의 소녀가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기억에 박힌 사랑스러운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머리를 스쳐지나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깨달았다.
제라드의 앞에 있는 이 소녀가 바로 그의 유년 시절 때 보았던 영상 마력석 속의 천사라는 것을.
물론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의미가 바래진 사람이었으나, 처음으로 영상이 아닌 현실에서 실재하는 소녀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만큼은 제라드 스스로조차 놀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오래 얼굴을 마주할 새도 없이 결국 제라드는 다시 백야의 전당으로 끌려왔고, 이후 그는 이곳에서 갇힌 생활을 하느라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라드는 백야의 전당에서 탈출하려 한 죄로. 며칠간 골방에 갇혀 혹독한 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리 심한 구타를 당해도, 또 반성을 이유로 배를 곯아도 전처럼 힘겹지는 않았다.
가끔 분노와 울분이 치밀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전부 다 때려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을 때도 참았다.
제라드는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온실에서 보았던 소녀의 모습을 몇 번이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력석의 영상에서보다 좀 더 나이가 든 소녀는 더 이상 그때처럼 행복하게 웃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 얼굴이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데…….’
그날,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었다지만 온실에서 무례하게 굴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마음대로 더러운 손을 대고 나쁜 말을 해 무섭게 해서 미안하다고도 말해야 했다.
변명 한마디 들어 주지 않고 아버지와 그를 무참히 끌고 온 황실과 백야의 전당 마법사들 모두 싫었지만 그날 만난 소녀에게는 사과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유년 시절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그를 숨 쉬게 만들었던 소녀를 갈망하던 마음과 아주 조금 닮아 있었다.
소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그의 소원이 바로 얼마 후에 이루어질 것이란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9. 악역이 악역일 수밖에 없는 이유
다음 날에도 여지없이 사냥 대회가 시작되었다.
대회가 진행될 동안 직접 사냥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황족과 귀족들은 숲 밖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내가 그때 노르테어 자작에게 뭐라고 말했냐면…….”
“아하하! 클로에 언니 너무 재밌다!”
원래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고, 1황녀가 사라진 곳에서 무리를 대표하는 건 2황녀 클로에였다.
사냥제에 참가할 나이가 되는 건 1황녀 아르벨라와 1황자 라미엘, 그리고 2황녀 클로에가 유일했다.
하지만 2황녀 클로에는 사냥 실력이 떨어져 오히려 마법 생물에게 당할 판이었고, 1황자 라미엘은 피만 보면 질색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현재 숲에 들어간 건 1황녀 아르벨라뿐이었다.
1황자 라미엘도 사냥 대회에 흥미를 잃고 오늘은 사냥터에 오지 않은 참이었고 말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 모여 있는 황족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클로에였다.
“그나저나 아르벨라 누나 말이야. 볼 때마다 깜짝 놀란다니까. 갑자기 그 짧은 머리는 도대체 뭐래?”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분위기를 살피던 2황자 로이드가 기회를 틈타 아르벨라를 흉봤다.
그는 어릴 때 아르벨라의 성격을 잘 모르고 버릇없이 까불다가 마법으로 날아가 다리가 부러졌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2황자는 마음속에 아르벨라에 대한 두려움과 은근한 앙심을 품고 종종 이런 식으로 그녀를 몰래 헐뜯곤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하고 몸을 사린다는 점에서 로이드는 다른 이복 남매들에게서도 지질한 소인배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2황자 로이드가 아르벨라의 흉을 본 순간, 찻잔을 들고 있던 클로에의 손이 작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