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8. 이달의 황녀님
“황녀님, 저녁 일정 전에 식사부터 하시겠어요?”
“아니, 다녀와서 먹겠어.”
오늘도 사냥 대회를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해가 거의 다 진 뒤였다.
사냥 대회는 오전부터 저녁 전까지만 열려서, 그 이후에는 개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는 게 가능했다.
오늘 내 일정에는 백야의 전당에 방문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황실 마법사들이 진리를 탐구하며 새로운 연구와 발명에 몰두하는 백야의 전당에는 나와 교류하는 마법사도 있었다.
그래서 종종 학문적 궁금증이 생기면 방문할 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쪽에서 내게 부탁할 게 있다고 먼저 연락이 왔다.
마침 나도 백야의 전당에 들어온 이단자 소년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오늘 그곳에 찾아갈 예정이었다.
‘가능하면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 이름이 제라드가 맞는지도 확인하고.’
하지만 역시 교화 대상으로 들어온 이단자니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어려울 듯했다.
“이 느려터진 녀석, 빨리빨리 걸어!”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나는 백야의 전당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익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붉은 머리.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황실 서고에 가는 길과 내 개인 온실에서 만났던 그때의 그 소년이 분명했다.
그는 백야의 전당에서 연구에 쓰는 마력석을 옮기고 있었는데, 척 봐도 무리가 되어 보이는 양이었다.
그래도 소년은 용케 물건을 떨어뜨리지 않고 걸었다.
하지만 고약하게도 소년의 앞에 있던 마법사가 심술궂은 얼굴로 그를 돌아보더니 대뜸 발을 걸었다.
와르르!
거기에 걸려 결국 소년은 넘어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발을 건 마법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무섭게 소리를 질렀다.
“이 쓸모없는 놈! 이것 하나 제대로 못 들어서 이 사달을 내? 이게 다 얼마짜리인 줄이나 아는 거냐?”
“…….”
“뭘 하고 있어! 어서 빨리 주워 담지 못하고!”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소년의 눈이 한 차례 차갑게 번뜩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낮추고 바닥에 떨어진 마력석들을 줍기 시작했다.
“좀 더 빨리빨리 해!”
그것이 성에 차지 않는지, 급기야 마법사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소년의 어깨를 내려쳤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간 건 두 번째로 휘두른 지팡이가 소년의 몸에 닿기 직전이었다.
“때리지 마.”
내 마력에 가로막힌 지팡이가 멈췄다.
“1황녀님?”
마법사는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듯했다.
바닥에 넘어진 채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소년도 예상 밖의 상황에 놀랐는지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로 기묘한 광채를 내는 은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 안에 번뜩이는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온실에서 마주쳤던 나를 알아본 눈치였다.
‘그런데 왜 저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지난번의 인질극을 비밀로 해 준 걸 고맙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숲에서 사슴이라도 발견한 사냥개처럼 집요하게 나를 응시하는 강렬한 눈빛에 괜히 목덜미가 간지러워졌다.
아무튼 나도 이렇게 다시 한번 그를 가까이에서 보니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듯했다.
‘역시 이 아이구나. 나중에 유디트의 기사이자 내 제물이 될 제라드.’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뭐였을까?
왠지 가슴속에 낯설면서도 묘한 감각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1황녀님을 뵙습니다.”
마법사가 정신을 차리고 내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나는 붉은 머리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고 내 앞에 고개 숙인 남자를 응시했다.
“백야의 전당에서 이단자를 폭력으로 교화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설마 나한테 이런 부분을 지적당할지는 몰랐는지, 마법사가 흠칫했다.
하지만 그는 곧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폭력이라니, 오해십니다. 떨어진 물건이 있는 방향을 알려 주려고 손에 든 지팡이로 가리켰을 뿐인 것을요.”
“그래?”
“그렇습니다. 백야의 전당에서는 이단자의 교화에 늘 진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인 게 뻔했지만 확실히 지금 내가 나서긴 어려웠다.
아무리 나라 해도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럴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특히 마법사들의 영역인 백야의 전당에 황족인 내가 간섭하는 것은 지나친 월권이었다.
시선을 움직여 붉은 머리 소년을 힐끗 내려다봤다. 어느새 그는 무덤덤한 몸짓으로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다시 줍고 있었다.
고개를 수그린 모습이 지극히 순종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래로 내리깔린 눈에는 여전히 맹렬한 빛이 박혀 있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온순한 척 연기를 하고 있지만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이 이런 외압에 쉽게 길들여질 리 없었다.
그때 소년의 손이 내 발 바로 앞에 있는 마력석으로 뻗어졌다.
충동적으로 발을 움직여 마력석을 밟았다. 그러자 막 마력석에 닿을 뻔했던 소년의 손이 멈췄다.
다시 번쩍 고개를 든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앗.’
나도 모르게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무심코 심술 맞은 성격이 나와 버렸네.
“네가 직접 주울 필요 없어. 그렇지?”
나는 다른 좋은 의도가 있었던 척 밟고 있던 마력석을 마법사의 쪽으로 밀었다.
“크흠, 맞습니다. 그렇게 줍다가는 한오백년은 거뜬히 걸리겠구나.”
내 말뜻을 알아들은 마법사가 눈치 빠르게 마법으로 흩어진 마력석을 띄워 상자 안에 채워 넣었다.
“어서 일어나라. 가서 할 일이 많다.”
그는 아까처럼 소년에게 상자를 들게 하지 않고 허공에 띄웠다.
그런 뒤 마법사가 내게 인사했다.
“하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바닥에 발이 붙은 것처럼 미동 없이 서 있는 소년을 마법사가 거의 강제로 끌고 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드디어 만난 소년이었으나 그를 내 시야에 둘 수 있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조금 전에 마지막에 마주쳤던 소년의 눈을 떠올렸다.
왠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 반짝이는 은회색 눈이 뇌리에 강렬하게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또다시 아까의 기묘한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피어올랐다.
내가 그 자리를 떠난 건 붉은 머리 소년이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 * *
-아르벨라, 꽃 구경을 한다더니 거기서 혼자 뭐 하고 있니?
-토끼풀을 찾아요.
제라드는 그 마력석의 영상을 처음 보았던 날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풀잎 위를 걸어가는 사랑스러운 여자아이.
달콤한 허니 블론드 머리카락이 어떤 보석보다도 더 아름답게 반짝이고, 수정 같은 연청색 눈은 요정의 눈물처럼 투명하고 맑게 빛났다.
-토끼풀은 왜?
-우응, 비밀인데……. 실은 어제 유모가 토끼풀로 왕관 만드는 걸 알려줘서 오늘 어머니한테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요!
-어머, 나한테? 세상에. 고맙구나, 아가.
사탕처럼 달콤하게 미소 지은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가 다정히 웃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안겨드는 모습이 제라드에게는 꼭 꿈결처럼 느껴졌다.
그 영상 마력석은 제라드의 유모가 라스너 백작가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그에게 선물로 주고 간 것이었다.
마지막 동정이었는지 뭐였는지, 평소에 제라드의 기본적인 의식주만 돌봐 주던 유모는 저택을 나가기 전에 처음으로 사비를 들여 그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좋던 장난감을 사 주었다.
그것이 바로 1황녀의 영상 마력석이었다.
황족의 영상 마력석은 카뮬리타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제라드가 그것을 손에 넣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래전 어머니가 죽고, 그의 아버지는 깊은 실의에 잠겨 있다가 이내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주인이 돌보지 않는 저택은 금방 유령의 성처럼 변했다.
고용인들은 저택을 떠난 지 오래였고, 대대로 라스너 가문을 섬겨 온 노집사와 제라드를 가엾게 여긴 유모만이 그곳에 남아 주었다.
하지만 그 노집사마저 노환으로 죽은 뒤, 제라드의 유모도 더 견디지 못해 저택을 떠났다.
이후 라스너 저택에는 여덟 살이 된 제라드와 그의 존재를 잊은 듯한 글렌 백작만이 남았다.
어느 날 제라드는 너무 배가 고파 시가지에 나가서 빵을 훔쳤다.
어린아이의 풋내 나는 시도는 당연히 바로 들통났다.
제라드는 그가 훔친 빵의 주인에게 뒷덜미를 잡혀 라스너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방 밖으로 나온 아버지, 글렌 백작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긴가민가하며 제라드를 데려온 남자에게 빵값을 치른 다음 다시 사람을 고용했다.
그러고는 제라드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또다시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그런 일은 제라드가 혼자 생활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어린 제라드는 유모가 떠날 때 주고 간 작은 마력석 하나를 베개 밑에 숨겨 놓고 밤마다 몰래 보고 또 봤다.
그렇게 하면 그날 밤에는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둠 속에서 낡아 빠진 이불을 덮고 누워 매일 밤 잔디밭에서 토끼풀을 찾던 그 아이를 생각했다.
그래야만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