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밀리엄의 목소리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세상에, 밀리엄!”
그 때, 어머니가 밀리엄을 부르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가, 손을 다치지 않았나 보자꾸나.”
그러나 그녀가 밀리엄에게 건넨 것은 꾸중이 아니라 다정한 염려였다.
“손톱에 긁히거나 하지 않았니? 그렇게 잘 보지도 않고 위험하게 손을 휘두르면 못 써.”
시녀에게서 밀리엄을 직접 안아 든 어머니가 칭얼거리는 아이를 품에 넣고 얼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입술을 뗐다.
“마리나.”
“예, 황녀님.”
내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마리나가 신속하게 움직여 떨어진 손수건을 주워들었다.
밀리엄은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애다. 게다가 그는 내 유일한 동복동생이었다.
지금 보인 그의 행동은 버릇이 없기는 하나 어린아이의 철없는 투정이라 받아 줄 만한 수준이다.
게다가 지난번에 황후궁에서의 일도 그렇고, 밀리엄의 행동이 버릇없기는 하나 그의 훈육은 내 몫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내 옆에는 영상 마력석이 있었다. 어머니와 밀리엄이 올 때 함께 딸려 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보여야 할 모습은 정해져 있었다.
“밀리엄. 내가 네 선물을 가장 처음 받지 않아서 속상했구나.”
나는 부루퉁한 얼굴의 밀리엄을 향해 부드러운 말씨로 말했다.
“하지만 봐. 난 아직 누구의 선물도 몸에 장식하지 않았어.”
그러자 삐쳐서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나를 외면하고 있던 아이의 눈길이 힐끗 움직였다.
“마침 네가 준 머리 장식이 나한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누나한테 직접 해 주지 않을래?”
그러자 밀리엄이 금세 혹한 듯, 시녀에게 바짝 안겨 있던 몸을 슬그머니 내게 틀며 입을 우물거렸다.
“……내가 제일 처음이야?”
“그래.”
“내 것만 할 거야?”
마지막까지 욕심을 부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엎어 놓고 엉덩이를 때려 주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갑자기 사냥 대회에서 모든 선물을 거부하는 킬리안 베른하르트의 마음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러지 뭐.”
밀리엄이 언제 성질을 부렸냐는 듯이 헤헤거리며 머리 장식을 든 손을 내게 뻗었다.
그의 손길은 역시 어린애답게 어딘가 엉성했기 때문에 이후에 시녀가 다시 내 머리를 만져 주었다.
“예뻐!”
밀리엄이 나를 보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역시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누나가 이기면 내가 토끼 받아 줄게!”
“황자님, 사냥제 때는 토끼를 잡지 않아요.”
“왜? 난 토끼가 좋아!”
사냥 대회는 이기고 지고의 개념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밀리엄의 말은 내 의욕을 꺾는 데 충분했다.
우승자만이 자격을 갖는 사냥감의 헌정 시간에 친히 주인공이 되어 주시겠다니.
모처럼 킬리안에게 자극받아 이왕 사냥 대회에 참가한 김에 그를 꺾어 줄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또 맹렬하게 우승하고 싶지 않아졌다.
“아르벨라.”
그때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그녀의 입에서 오랜만에 나온 내 이름을 듣는 순간, 자존심도 없이 내 가슴이 작게 두근거렸다. 나는 그 사실이 짜증 났다.
“난 사냥제의 첫날과 마지막 날에만 참석할 예정이니, 내가 없는 동안은 네가 누이로서 밀리엄을 잘 돌보거라.”
그래도 다행히 이어진 어머니의 말은 내 가슴을 금방 싸늘히 식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언제까지 천한 것과 어울려 다니며 네 평판을 갉아 먹을 생각이지? 지난번에 몸가짐을 제대로 하라고 분명 알아듣게 이야기를 하였는데.”
냉랭한 시선이 내 얼굴을 떠나 뒤에 선 유디트에게 닿았다.
뒤에서 작게 바스락거린 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유디트도 자신을 지적하는 말인 것을 알고 몸을 작게 움직인 듯했다.
“이 어미를 부끄럽게 만들지 마라.”
나도 모르게 작게 실소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작동을 멈춘 듯, 어느새 영상 마력석의 불도 꺼져 있었다.
곧 나도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어머니의 눈을 마주했다.
그 상태로 어머니의 옆에 선 밀리엄의 유모를 불렀다.
“맥노아 백작 부인.”
“예, 1황녀님.”
“방금 어머니의 말씀을 들었겠지?”
아마 지금 어머니와 내 얼굴은 상당히 닮아 보일 것이다.
“내가 봤을 때 밀리엄의 행동거지가 어머니의 기준치에 한참 미달하는 듯한데.”
웃음 한 점 없는 차가운 얼굴에 서로에 대한 미약한 거부감을 담고 있는 것까지 비슷할 테니까.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나, 앞으로는 어머니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밀리엄에게 황족으로서의 소양을 제대로 가르치는 게 좋을 듯하군.”
내 말을 들은 어머니가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들으란 듯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처음이라 그런지, 밀리엄의 유모인 맥노아 백작 부인도 얼굴을 희게 질린 채 쉽게 반응을 내보이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내가 먼저 얼굴에 미소를 그려 보였다.
“사냥제 준비 때문에 가시는 길은 길게 배웅하지 못할 듯합니다. 조심히 살펴 돌아가세요, 어머니.”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던 어머니가 먼저 몸을 돌렸다.
“누나, 이따 또 봐!”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밀리엄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맥노아 백작 부인과 다른 시녀들도 내게 인사를 남긴 뒤 서둘러 어머니를 따라갔다.
“마리나. 유디트의 손수건을 이리 줘.”
그 후 나는 마리나가 들고 있던 유디트의 손수건을 내 왼쪽 손목에 묶었다.
“아.”
우울한 얼굴로 서 있던 유디트가 깜짝 놀란 듯이 소리 냈다.
이 정도면 밀리엄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하리라.
밀리엄이 준 것 외에 다른 머리 장식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아까 그에게 한 말이 거짓말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내 이번 행동의 절반 이상은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을 이유로 하고 있었다.
부우우우.
때맞춰 사냥 대회의 시작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가 봐야겠구나. 즐거운 시간 보내렴, 유디트.”
“무운을 빌어요, 1황녀님.”
내가 그녀의 손수건을 손목에 묶었다는 것이 기쁜 듯, 유디트가 아까보다 밝아진 얼굴로 인사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 * *
왠지 벌써 피곤하네.
숲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사냥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진을 뺀 기분이었다. 조금 전 어머니와의 일로 기분이 발밑까지 내려앉기도 했고…….
“1황녀님,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아, 깜짝이야.
갑자기 옆에서 사람이 나타나서 놀랐다.
새까만 말 위에 올라탄 킬리안이 옆으로 다가왔다.
은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검은 말을 타고 등장한 킬리안은 꼭 백마 탄 왕자…… 아니, 흑마 탄 왕자 같았다.
“서쪽으로.”
“그럼 저는 남쪽으로 가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지요.”
황녀에 대한 예우인지, 나와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인 듯했다.
작게 묵례해 보인 킬리안이 이내 말을 이끌고 방향을 틀었다.
돌아서기 전, 그의 시선이 내 머리와 손목을 잠깐 차례로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킬리안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 짧아진 머리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소리를 한 번도 안 하네.’
어쩌면 관심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그냥 군신 사이의 예의와 거리를 지키는 걸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저런 점은 좀 마음에 들었다.
‘나도 슬슬 가 봐야겠군.’
어쨌건 이왕 사냥을 하러 들어왔으니 나도 좋은 사냥감을 차지해야 했다. 남들에게 꿀리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하니까.
나는 말을 달려 서쪽을 향해 이동했다.
* * *
카뮬리타는 마법 강국답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특별한 국가 행사라 할 수 있는 사냥제 때에는 숲에 일반적인 동물이 아니라 마법 생물을 풀어놓았다.
오늘 내 수확물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 정도면 상당히 좋은 편이라 해도 되었다.
준영물급인 ‘판타눌라’를 사냥했기 때문이다.
판타눌라는 유니콘과 호랑이를 반씩 섞어 놓은 것 같은 생김새였고, 환각 능력을 가지고 있어 잡기가 까다로웠다.
그러니 사냥제의 첫날부터 판타놀라를 사냥한 것은 상당한 쾌거였다.
“판타눌라를 사냥하시다니, 역시 1황녀님이세요!”
“털이 정말 곱네요.”
“이대로 제단에 올려도 되겠어요.”
나는 감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으쓱해졌다.
아름다운 황녀님이 능력까지 출중해 혼자 이런 훌륭한 사냥감을 가져왔으니 그들이 탄복할 만도 했다.
“멋지십니다, 1황녀님! 역시 우리 카뮬리타의 보배십니다!”
몬테라 영식도 아까부터 내 옆에 붙어 나를 띄워 주기 바빴다.
그때, 지금 막 숲을 빠져나온 것처럼 보이는 킬리안이 내게 다가왔다.
몬테라 영식이 이번에도 남주인공의 존재감에 혼자 압도당한 듯,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판타눌라를 사냥하셨군요.”
“보시는 대로.”
나는 자신감에 차서 킬리안의 말에 여유롭게 대답했다.
“소공작은?”
킬리안은 그에게 되묻는 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세상에, 베른하르트 소공작님이 크로커스를 잡아왔네요!”
대답은 킬리안의 뒤에서 터져 나왔다. 내 사냥감을 볼 때보다 큰 감탄이었다.
크로커스도 준영물급 마법생물이었지만 내가 잡은 판타눌라보다 희귀했다.
킬리안이 웃는 얼굴 그대로 굳은 나를 보며 눈매를 곱게 휘어 선량한 미소를 그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황녀님께서 무운을 빌어 주신 덕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