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23화 (39/203)

23화

* * *

“1황녀님.”

잠깐 다른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문득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내리자 검은 머리카락과 금색 눈을 가진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유디트.”

레이스 가득한 분홍 드레스를 입어 한결 나이답게 귀여워진 유디트가 옆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직전까지 유디트의 기사를 생각하고 있었던 탓인지, 그녀의 순진무구한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괜히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곳에는 훗날 유디트와 맺어질 남주인공 킬리안도 와 있었다.

킬리안과 유디트의 나이 차이가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이던가.

지금에야 아직 유디트가 어리니 나이 차이가 상당히 크게 느껴지지만, 앞으로 몇 년 더 지나면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소설 여주인공의 정석상 유디트는 나중에 누구보다 훌륭하게 성장할 테니까.

그때가 되면 킬리안과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지.

유디트와 비슷한 나이인 다른 황녀 중에도 킬리안에게 선망 어린 눈길을 보내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래도 유디트는 아직 킬리안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대신 유디트의 반짝이는 눈빛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까 축사 정말 멋졌어요.”

“고마워.”

“지난번에는 깜빡하고 말씀을 못 드렸는데, 이번에 새로 바꾸신 짧은 머리도 정말 잘 어울리세요!”

“으음, 그것도 고맙구나.”

“네! 저기, 그리고 1황녀님도 사냥 대회에 참석하시죠?”

“맞아.”

유디트가 잠깐 우물쭈물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의 그림자를 주시했다.

라미엘의 그림자가 여전히 유디트에게 붙어 있었다.

“저, 1황녀님.”

그때 유디트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나를 불렀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곧 그녀가 내게 내민 것을 보고 나는 한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받아 주실 수 없을까요?”

유디트의 하얀 손에 들린 것은 손수건이었다.

거기에는 내 이름의 첫머리글자와 탄생화인 아카시아꽃이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이번 사냥 대회에서 꼭 우승하셨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이걸 나한테 주려고 더러운 몰골로나마 사냥제에 남아 있고 싶어 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게 정답이라고 내 감이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힐끔 눈길을 미끄러뜨려 확인해 본 결과, 내게 내민 유디트의 손에는 바늘에 수없이 공격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묘한 기분을 안고 유디트를 내려다봤다.

지난번에도 혹시 하는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유디트는 내게 생각보다 큰 호의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지? 다른 황족들과 달리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다른 황족들보다 더욱 잔인한 경멸이었다.

아예 유디트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어디에 있건 내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니까.

사실 유디트는 나를 방관자, 혹은 위선자라 비난할 자격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동안 동생들이 그녀를 괴롭히는 걸 알아도 신경 한 번 쓴 적 없었다.

오히려 솔직히 말해, 나는 유디트가 싫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갖고 싶었던 모든 것을 쟁취하는 것이 결국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아이라는 것에 별수 없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유디트가 이야기 속의 빛나는 여주인공이 아닌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보호는커녕 혼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 왔다는 것이 미약하게나마 내게도 있는 연민의 정을 자극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며 나도 모르게 실소할 뻔했다.

‘어리석은 아이네.’

자신을 향한 호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도 못 하고.

내가 사실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이처럼 무방비하게 나한테 다가오는지.

“과분한 욕심을 부리지는 않아요. 저도 제 주제를 알고 있고…….”

내가 조용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유디트가 아래로 내리깐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엽게 흔들며 말했다.

“불쾌하시다면 뒤돌아서서 바로 버리셔도 돼요.”

“…….”

“그래도 받아만 주시면…… 기쁠 것 같아서…….”

그런 유디트의 모습은 정말이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일부러 천천히 눈앞에 있는 손수건에 손을 뻗었다.

마침내 내 손이 부드러운 천에 닿았을 때, 유디트가 아래로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꼭 우승할게.”

단지 예의상의 짤막한 인사였을 뿐인데도, 창백한 하얀 뺨이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처럼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나를 향해 기쁘게 반짝이는 눈을 마주한 순간, 기묘한 우월감이 발뒤꿈치를 기어올랐다.

“네! 꼭 우승하실 거예요.”

곧이어 피어난 유디트의 웃음이 흰 눈송이처럼 맑고 고왔다.

한순간 그것을 내 발자국으로 더럽혀 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누나!”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나와 유디트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 몸을 연기처럼 휘감았던 낯선 감정도 그 목소리에 흩어져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내게 다가오는 사람을 확인했다. 별로 반갑지 않은 밀리엄이었다.

그는 시녀에게 안겨 빠른 속도로 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런 그들의 곁에는 내 어머니인 황후와 밀리엄의 유모인 맥노아 백작 부인도 함께 있었다.

유디트가 황후와 밀리엄을 보고 고개를 숙인 채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황제에게 황족으로 인정받았다 해도 사실 노예 소생인 유디트와 다른 황족들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유디트는 손위 형제들을 언니나 오빠라고 부르지도 못했다.

무늬만 황족인 그녀에게는 그럴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디트가 나를 ‘1황녀님’이라고 칭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유디트를 멸시하는 것과 별개로, 이런 부분은 나도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발정이 나서 씨를 뿌린 사람이 당연히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닌가.

잠시 후 어머니와 밀리엄이 내 앞에 당도했다.

“제국의 빛이신 황후 전하와 3황자님을 뵙습니다.”

“1황녀님을 뵙습니다.”

내 뒤에 있던 시녀들과 황후와 밀리엄을 따르던 시녀들이 가장 먼저 황족에 대한 예를 차렸다.

그다음으로 어머니와 내가 서로에게 인사했다.

“좋은 오후구나, 1황녀.”

“예. 좋은 오후입니다, 어마마마.”

그러나 짧게 주고받은 형식상의 인사는 빈말로도 친근한 느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번에 나는 착각하지 않았다.

우리 모녀 사이에는 몇 년 전부터 차근히 쌓아 온 벽이 여전히 두껍게 세워져 있었다.

지금 그녀가 날 보러 온 것도,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일 뿐일 것이다.

“누나, 이거!”

아니면 밀리엄이 떼를 썼거나.

나는 내 앞에 불쑥 내밀어진 고사리 같은 손을 내려다봤다.

“어머나……. 나한테 주는 거니?”

“내가 누나 주려고 특별히 만든 거야!”

밀리엄이 젠체하며 말했다.

그가 내게 내민 것은 작은 장식품이었다. 내 의상과 색을 맞춘 것 같은 짙푸른 보석에 은술이 장식되어 있었다.

밀리엄이 만들었다고 했지만 이 솜씨는 다섯 살 아이의 수준이 아니었다.

뻔하지. 유모나 다른 시녀들이 대신 만들어 준 것이 분명하다.

“누나는 무기가 없다며? 그래서 머리 장식으로 만들었어.”

나한테 무기가 따로 없는 건 그만큼 내가 뛰어난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마법사들은 위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에 마력을 싣는 형식으로 사냥을 했다.

그래서 나는 선물을 받으면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무기 대신 옷이나 머리 등에 장식하곤 했다.

그것을 알고 일부러 머리 장식으로 준비하다니. 게다가 내 옷과 색깔까지 맞췄다. 애답지 않은 주도면밀함이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밀리엄의 유모가 쓸데없이 일을 너무 열심히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근데 누나 머리가 너무 짧아졌어! 긴 게 더 예뻤는데!”

그래? 자르길 잘했네. 딱히 네 눈에 예뻐 보이고 싶진 않거든.

“후응, 그래도 할 수 없지. 내가 직접 누나 머리에 해 줄…… 어?”

그때, 밀리엄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손수건에 닿았다.

그 순간 아이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건 뭐야? 벌써 다른 사람한테 받은 거야?”

밀리엄이 늦게 왔기 때문에 받은 건 이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밀리엄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뺨을 잔뜩 부풀리며 사납게 외쳤다.

“내가 첫 번째 할 거야!”

파앗!

다음 순간 밀리엄의 앙칼진 손길이 내 손에 들린 손수건을 확 내려쳤다.

그 바람에 나는 유디트에게 받은 것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황자님!”

설마 밀리엄이 내 앞에서 이런 행동까지 보일 줄은 몰랐는지, 유모가 당황했다.

아직 떠나지 않고 있던 유디트도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손수건을 보고 움찔 몸을 떨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