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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22화 (38/203)

22화

지금의 자리는 사냥터였기 때문에 내가 따로 명하지 않아도 인사는 약식이었다.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도 수없이 받아온 것인데, 킬리안에게는 그런 단순한 인사마저 대단히 근사해 보이게 만드는 특이한 재주가 있었다.

“헉! 베, 베른하르트 소공작님! 언제 오셨습니까?”

바비 몬테라도 깜짝 놀란 듯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나는 마침 잘됐다 싶어 킬리안 베른하르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베른하르트 소공작.”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덕분에.”

여상한 인사였다. 이 정도는 원래도 가끔 주고받곤 하던 것이기 때문에 그리 특별하다 할 것도 없었다.

“몬테라 영식, 1황녀님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 주지 않겠나?”

그런데 킬리안이 갑자기 평소 같지 않은 행동을 했다.

“예? 1황녀님과 다, 단둘이 말입니까?”

“그래.”

킬리안이 수려한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바비 몬테라는 엄청난 압박을 받기라도 한 듯이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아니, 물론 엑스트라에 비교하자면 남주인공의 존재감은 새우 옆의 고래, 혹은 상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그럼 노래는 다음에 들려 드리겠습니다, 1황녀 전하!”

결국 남주인공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혼자서 기에 눌린 바비 몬테라가 다음을 기약하며 서둘러 자리를 비켰다.

“베른하르트 소공작, 내게 긴히 할 이야기란 게 뭐지?”

나는 의구심을 품은 채 킬리안에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와 단둘이 나눌 이야기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다음 순간 킬리안이 내게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난처한 상황이신 듯하여 제가 마음대로 관여했습니다. 혹시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뭐야?

‘아니, 고작 이런 일에 킬리안이 나서다니……. 내가 그 정도로 난처해 보였나?’

오묘한 눈으로 킬리안을 보다가 말했다.

“괜한 참견이야. 하지만 마음은 고맙다고 해 두지.”

이제 사냥 대회에서의 무운을 비는 인사를 하고 헤어지면 킬리안과 다시 말을 섞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킬리안은 평소와 달리 거기에서 말을 끝맺지 않았다.

“한데 몬테라 영식과 아직도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분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바비 몬테라와 나눈 대화를 조금 들은 모양이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서 살며시 눈매를 찌푸렸다.

바비 몬테라와 서신을 주고받다니, 그건 오해였다.

그쪽에서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나한테 안부를 물어온 것뿐이니까. 내가 답장을 준 것도 이번이 몇 년 만에 처음이었고.

하지만 그런 걸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한순간 나를 내려다보는 킬리안의 눈에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미한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왜 그때 제게는…….”

그의 혼잣말은 너무 작아서 내 귀에 닿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저런 눈빛으로 날 보는 거지?

그런데 왜 저런 눈빛으로 날 보는 거지?

“베른하르트 소공작?”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묘한 낌새를 금방 갈무리하고 다시 평소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나를 향해 반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보다, 1황녀님께서 단상에 서신 모습은 그동안 많이 보았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특히 오늘의 축사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이는 걸 보니, 킬리안도 내 짧아진 축사가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다.

아까 단상에서 스치듯이 목격했던 게 착각이 아니었는지, 킬리안은 또 두 눈에 오묘한 이채를 얇게 덧씌운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어서 고막을 파고든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리아코 고대어는 사멸되어 해독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설마 오늘 사냥제에서 보게 될 줄은.”

내가 아까 축포와 함께 쏘아 보낸 글씨가 고대어 중에서도 리아코 언어라는 걸 알아차린 건 킬리안이 처음이었다.

“……혹시 리아코어를 해독할 줄 아나?”

갑자기 경계심이 들어서 물었다.

그러자 킬리안이 고개를 작게 기울이며 나를 응시했다.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짧은 공백 후에 킬리안의 예의 그 잘생긴 얼굴에 붓으로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럴 리가요. 그저 고대 언어에 관심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그렇군.”

나는 안심했다.

하긴.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똑똑한 남주인공이라 해도 오늘날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학자조차 전무하다시피 한 고리타분한 고대어에까지 재능이 있지는 않겠지.

그것보다도…….

‘얘 원래 이런 느낌이었나?’

나는 노을 지는 겨울밤의 색 같은 킬리안의 눈을 보며 의구심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그냥 성실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속을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이건.

지금 가까이에서 킬리안 베른하르트를 마주하니, 이제껏 속까지 투영할 것처럼 맑다고만 생각했던 그의 눈에 두꺼운 얼음 장막이 낀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는 몰랐던 기이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책에서도 킬리안은 생긴 것처럼 성격 또한 고결하고 청아한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1황녀 전하?”

아. 너무 오래 쳐다봤다.

나는 태연히 입을 열어 말했다.

“소공작도 오늘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무운을 빌어.”

“감사합니다.”

킬리안이 내 인사에 예를 차려 고개를 숙여 보였다.

행색을 보니 킬리안이 올해 사냥 대회에 참가할 것은 분명했고, 나도 첫날인 오늘과 마지막 날에 숲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참고로 사냥 대회는 총 닷새간 진행되고, 13세부터 참가할 수 있다.

킬리안도 내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올해에는 1황녀님께 월계관의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분명 예의 바른 인사였는데…… 왠지 나는 기분이 좀 나빠졌다.

‘그래. 작년 우승자에게 선사되는 월계관은 킬리안의 몫이었지.’

처음 참가했던 작년 사냥 대회에서 굴욕적이게도 난 2등을 차지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킬리안은 그가 사냥 대회에 처음 참석했던 이후로 단 한 번도 월계관을 놓친 적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무기력함에 젖어 있던 나를 찾아들었다.

‘맞아. 사실 나 얘 별로 안 좋아했어.’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별로 좋아하지를 않았어!

“고마워라……. 그럼 난 준비를 해야 해서 이만.”

나는 삐뚤어진 속내를 숨기고 웃으며 먼저 자리를 비켰다.

아까 단상 위에 오를 때만 해도 만사에 의욕이 없었는데 갑자기 뭔가를 해볼 마음이 좀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고, 상대가 남주인공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여주인공인 유디트에게 죽을 때까지 이기지 못할 팔자라 해도 남주인공에게마저 그러란 법은 없지.’

그렇게 입매를 비틀며 사냥 대회의 준비를 위해 내 전용 천막으로 향했다.

* * *

숲으로 들어가기 전.

사냥 대회의 꽃이라면 꽃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순서가 남아 있었다.

바로 무운을 기리고 싶은 상대에게 기원을 담은 물건을 전달해 주는 것이다.

직접 자수를 놓은 손수건이나 장식품 등을 선물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당연히 킬리안 베른하르트에게는 손수 준비한 선물을 주고자 하는 영애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르벨라가 알기로,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그것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번 사냥제 때도 예외는 없는지, 그는 다가온 영애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 그녀들을 돌려보냈다.

반면 아르벨라는 킬리안과 달리 선물 받은 것들을 거절하지 않는 편이었다.

수도승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호의로 주는 선물을 또 굳이 돌려보낼 건 뭐냐 이 말이다.

손수건 하나 받는다고 그게 청탁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킬리안은 지금까지 사냥 대회의 우승자에게만 자격이 있는 사냥감의 헌정도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놈의 병만 아니었으면 작년 사냥 대회의 우승자도 나였을 텐데.’

아르벨라는 작년 사냥 대회 때부터 벌써 몇 번이나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되새김질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물론 올해는 다른 데 신경이 팔려, 사냥 대회에도 작년만 한 흥미가 생기지 않긴 했다.

지금 그녀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백야의 전당에 있는 붉은 머리 소년이었다.

미래의 아르벨라가 금단술을 사용하는 데 꼭 필요했던 제물.

‘알아보니 백야의 전당에서 교화 판정을 받고 나오려면 최소 5년은 걸린다던데. 게다가 이단자의 관리는 백야의 전당에서 도맡는 게 전통이라 아무리 황족이라 해도 간섭하기가 어려워.’

지난번에 온실에서 또 본 적이 있는 그 소년의 얼굴이 때때로 생각나 아르벨라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그럼 어떻게 손에 넣는다지…….’

그리고 그런 아르벨라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 저 우수에 잠긴 눈빛 좀 봐…….”

“어떻게 저렇게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시지?”

“나도 볼수록 이쪽이 더 좋은 것 같아. 꼭 『별빛 폭풍의 기사』 같지 않아?”

“아앗! 맞아, 맞아!”

지금 아르벨라를 훔쳐보는 대부분은 사냥 대회에 참석한 영애들이었다.

물론 1황녀 아르벨라의 인기는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시도로 머리를 짧게 자른 직후라 그런지, 같은 소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 아르벨라는 단상에 올라갔을 때처럼 드레스 차림이 아니라 사냥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멀리서 언뜻 보면 꼭 아주 예쁘게 생긴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집중해서 하는지 몰라도, 아르벨라는 햇빛 아래에 혼자 서서 허공의 빈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짧은 금발과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이 모두 햇빛에 눈이 부시게 반짝여서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 와중에도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곧게 세우고 있는 몸은 가냘팠지만 결코 약해 보이지 않았고, 생각에 담긴 얼굴은 섬세한 굴곡을 그리고 있었다.

원래 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눈길을 끌기 마련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황실의 적극적인 홍보로 제국민들 사이에 ‘모두의 황녀님’으로 통하게 된 1황녀 아르벨라도 마찬가지였다.

보기만 해도 심장이 쑤실 정도로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기 황녀님이 자라 서서히 숙녀에 가까운 소녀가 되어 가는 과정을 제국민들 모두가 지켜보았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도 그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아르벨라에게 품고 있는 애정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국민들 모두가 사랑하는 황녀님은 살짝 오만해 보일 때조차도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르벨라에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녀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한 소녀가 용기 내어 다가갔다.

까마귀 같은 검은 머리칼과 민들레꽃을 닮은 금색 눈을 가진 어린 소녀. 유디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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