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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20화 (36/203)

20화

애초에 나는 킬리안과 아무런 친분도 없었다. 따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없다.

고작해야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났을 때 몇 마디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라고 할까.

‘지난번에 공립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걸 제외하면.’

약혼 이야기가 있던 것도 벌써 5년 전 일이었고, 이후로 우리 둘 다 그 같은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낸 일조차 없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이 없었듯이 그 역시 내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나는 어릴 때 잠깐이나마 그와 짧은 안부 편지를 주고받던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아는 킬리안은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제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답게 언제나 품위 있고 격조 높은 언행을 보였고, 그것은 내 까다로운 성미에도 책잡을 곳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슬쩍 부채를 내렸을 때, 착각인지 킬리안과 일순간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 순간 그가 자로 잰 듯이 반듯하게 묵례했다. 약식이지만 분명 황족을 향한 인사였다.

옆에 있던 황녀들이 꺅꺅거리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우아하지 못한 행태에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던 중 드디어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들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자와 황녀들, 그리고 우리보다 더 상석에 앉아 있던 황후와 황비도 황제를 맞아 몸을 일으켰다.

밀리엄은 아직 어리다는 것을 핑계로 어머니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유디트도 늦지 않게 돌아왔다.

클로에의 화려한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유디트는 아까보다 다섯 배 정도는 더 화사하고 예뻐 보였다.

클로에의 취향답게 프릴과 리본을 아낌없이 사용해 제 나이다운 발랄함과 귀여움이 돋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디트의 표정은 어쩐지 아까보다 밝지 못했다.

조금 떨떠름한 기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왠지 클로에와 취향이 달라 드레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카뮬리타의 지고한 태양께 축복과 가호를.”

그러나 황제가 마침내 단상 위에 올라가 서서 그에게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유디트의 얼굴을 더 관찰하지는 못했다.

“카뮬리타에 축복과 가호를.”

내 아버지인 황제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한 뒤에야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모두 환영하오. 오늘 사냥제를 맞아…….”

황제가 먼저 축사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냥제는 추수철을 맞아 제국의 번영을 기리는 의미로 시행되는 국가 행사였다.

그런 고로 오늘도 황제가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죄다 흘려들었다.

“1황녀.”

시간이 좀 더 지나 황제의 축사가 끝나고 이제 내 차례였다.

나는 그의 부름을 받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카뮬리타의 지고한 태양께 축복과 광영을.”

황제가 근엄하게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나는 황제의 허락을 받고 단상에 섰다.

나로서는 아주 익숙한 자리였다. 그것은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내가 단상에 서자 아까의 나처럼 영혼의 일부가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1황자 라미엘은 이미 하품을 찍찍 하기 바빴다.

다만 킬리안 베른하르트는 여전히 곧은 자세로 서서 표정 변화 없는 수려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단상에 오를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그는 상당히 좋은 청자였다.

연설 중 다른 사람들처럼 지루한 티 한 번 내지 않고 끝까지 담담한 낯으로 자리를 지키곤 했으니까.

과연 카뮬리타에서 누구보다 기사다운 성품과 강직함을 지녔다고 소문날 만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또 의외로…… 유디트가 지루함 대신 희미한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유디트는 지루한 연설을 좋아하는 걸까?

사실 나는 그동안 이런 자리에서마다 축사를 엄청나게 길게 읊어 왔다.

제국의 영광과 번영을 기원하는 말들로 매번 빼곡하게 채워 넣었던 내 축사는 지금 생각해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혈통주의자답게 나라 사랑 황족 사랑이 상당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실로 열과 성을 다해 황족의 위신을 드높이는 데 앞장서 왔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만사가 귀찮았다.

“제 축사는…….”

나는 음성 증폭 마법이 걸린 단상 앞에서 입술을 뗐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영혼 없는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축포로 대신하겠습니다.”

“?”

“??”

그 순간 사람들의 머리 위에 단체로 물음표가 떠오르는 것 같은 환영이 보였다.

평소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 열 장 정도 되는 분량의 축사를 좔좔 읊어댔던 나였으니 그런 반응을 보일 만도 했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마력을 담아 머리 위로 불꽃을 쏘아 보냈다.

퍼엉! 펑!

머리 위에서 사냥제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꽃처럼 만개해 번져 나갔다.

이 정도 마력을 쓴다고 병의 증세가 가속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온 하늘에 아낌없이 불꽃을 퍼트렸다.

……조금만 장난을 쳐 볼까?

잠시 후 봉오리가 꽃잎을 틔우듯이 푸른 하늘로 터져나간 불꽃 속에서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거대한 글씨들이 나열되었다.

제국의 지고한 태양은 사실 극심한 탈모를 앓고 있다.

시야 가득 적힌 것은 사멸된 고대어였으니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고대어는 오늘날에 해독할 수 있는 학자가 아예 없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말했다시피 나는 위대한 천재 황녀님이었다.

그래서 이 정도는 나한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지금 보이는 그의 머리는 부분 가발이다.

그의 정수리에는 직경 10cm 정도의 공터가 있으며 모발의 황폐화는 나날이 가속화되고 있다.

황제 폐하 귀는 당나귀 귀!

유치한 짓이었지만 속이 조금 시원했다.

멋모르는 사람들이 불꽃 속에서 반짝이는 글자를 보고 아름다운 문양이라며 감탄을 연발하고 있어서 상황이 더 우습게 느껴졌다.

지금 이게 황제 모독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까.

아마 황제가 안다면 당장에 부들거리며 나를 반역죄로 감옥에 처넣을지도 몰랐다.

다음 생에는 나무늘보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

숨 쉬는 것 말고는 아주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눈을 뜨세요, 용사여!

급기야 나중에는 아무 말 대잔치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 위에서 여전히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며 빛나는 글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거 좀 재미있는 것 같기도…….’

그러고 보니 아르벨라의 몸일 때 밖에서 이런 일탈을 하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모를 은근한 짜릿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큭…….”

그때, 문득 어디선가 실낱같이 낮은 웃음소리가 날아들었다.

탄성에 뒤섞여 아주 희미하게 밀려든 소리였지만 내 예민한 귀는 그것을 포착해 냈다.

고개를 돌리자 공교롭게도 눈이 마주친 것은…….

남주인공인 킬리안 베른하르트였다.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어 순간적으로 그가 웃은 건가 의심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막 마주친 눈동자에 당혹감과 그밖에 다른 오묘한 감정이 뒤섞인 뜻 모를 이채가 어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뒤이어 자연스럽게 손을 내려 드러난 킬리안의 태연한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청아한 낯에는 화사한 오후의 햇빛만이 유일한 장식으로 맺혀 있을 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하긴, 다시 생각해 보니 웃음소리가 아니라 재채기 소리 같기도 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이런 자리에서 점잖지 못하게 웃음을 흘리다니. 있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래도 흥이 깨졌다.

그러고 나자 곧 내가 지금 애처럼 뭘 하는 건가 싶은 회의감이 들어서 축포를 쏘아 보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 이 무슨 영양가 없이 유치한 짓이지?

천재인 내 정신 연령이 높긴 하지만 이 육체의 나이는 열네 살이다 보니, 사춘기라도 온 모양이다.

“그럼, 카뮬리타의 광영이 여러분께 내리기를.”

나는 마지막으로 기원한 뒤 다시 영혼 없는 얼굴로 단상 앞을 떠났다.

황제는 내가 고분고분하게 축사를 읊지 않고 축포로 때우려 하자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다가, 그래도 사람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 표정을 폈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인 사냥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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