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9화 (35/203)

19화

촤악!

별안간 시녀가 가져온 유리잔을 들어 올린 클로에가 그 안의 내용물을 유디트의 치마에 쏟아 버렸다.

“어머, 빈자리인 줄 알았는데 누가 있었잖아?”

실수인 듯이 말했지만 클로에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전혀 없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연을 가장한 고의였다. 역시 괴롭히려고 유디트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던 모양이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 참. 그래도 나름대로 양심적이라고 해야 할지.’

뜨거운 걸 부었으면 분명 살갗을 뎄을 텐데, 일부러 차가운 음료를 준비한 정성이 갸륵했다.

게다가 음료의 농도까지 신경 쓰다니…….

지금은 어려서 그런지, 아직 소설에서 본 것 같은 악독한 악녀 하수인으로는 진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렸다.

사실 클로에가 아무리 악독하다고 한들, 그녀의 수준이면 귀엽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의 최고 악역이던 내가 유디트를 괴롭힌 강도는 클로에와 비교도 못 하게 심했다.

‘하긴 지금의 내 성격만 생각해 봐도 누구를 작정하고 괴롭히려면 이렇게 자잘한 짓거리를 하지는 않겠지.’

미래의 나도 상당히 큰 스케일로 놀았던 기억이 났다.

최소한 화염 마법이 내재된 물건을 유디트의 생일날 선물해 궁을 연소시킨다든가, 무도회에서 유디트의 머리 위에 있는 샹들리에를 폭파시켜서 주변을 초토화시킨다든가…….

그러다 갑자기 움찔했다.

‘흠……. 생각해 보니 어째 전부 다 살인 미수로군.’

이러니 혹시 금단술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권선징악의 결말로 파멸 엔딩을 맞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어 기분이 좀 언짢아졌다.

“너, 설마 이런 더러운 몰골로 사냥제에 참석할 생각은 아니겠지?”

클로에가 유디트를 향해 얄밉게도 말했다.

그녀의 목적은 단순히 유디트의 옷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녀를 사냥제에 참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인 듯했다.

“애초에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있는 거야?”

클로에의 말을 듣고 무릎 위에 얹어진 유디트의 손이 꽉 쥐어졌다.

그러나 잇따른 그녀의 음성은 담담했다.

“폐하께서 이번 사냥제에는 반드시 황족 모두가 참석해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그러니까 그 ‘황족 모두’에 왜 네가 끼냐 이 말이지.”

그러고 보니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클로에의 최후는 어땠을까?

아르벨라가 죽었으니, 악녀 하수인도 같이 망했을까?

들고 있던 부채로 테이블을 툭툭 치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클로에.”

내가 이름을 부르자 클로에가 멈칫했다.

그녀는 유디트를 달달 볶는 것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네 궁이 아니야.”

나는 주위에 있는 귀족들이 돌아볼 정도로 언성을 높이고 있는 클로에를 향해 냉엄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황족의 품위를 직접 깎아내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자중하도록 해.”

속으로는 다른 황자와 황녀들을 깔아 볼지언정 겉으로는 나름대로의 상냥함을 보여 왔던 나였다.

그런 내가 그들에게 한기를 내비칠 때는 주로 궁 밖에서 황족의 위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할 때였다.

그나마 궁 안에서는 못마땅함을 느껴도 굳이 형제들의 일에 끼어들 정도의 관심이 없어 그냥 넘어갈 때가 많았으나 밖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다른 귀족들이나 제국민들 앞에서 고귀한 황족의 이미지에 손상을 줄 법한 일을 하는 것을 지금까지의 나는 용납하지 못했다.

“조심할게.”

그것을 알기 때문에 클로에는 날카로운 기운을 한 풀 꺾고 얌전히 대답했다.

내게 경고받은 클로에가 유디트를 한번 흘겨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로에가 떠난 자리에 5황녀 비비안이 주춤거리며 착석했다.

유디트를 두고 수군거리던 다른 남매들도 조용해졌다.

아까부터 상황을 관망하던 1황자 라미엘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날 보고 있었다.

뒤이어 유디트와 짧게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무어라 말할 듯이 작게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유디트.”

나는 그런 유디트를 향해 말했다.

“클로에 때문에 옷이 많이 더러워졌구나. 그 상태로 사냥제에 참석하기는 힘들겠어.”

그러자 유디트가 흠칫했다. 다른 황자와 황녀들의 얼굴에는 비린 미소가 피어났다.

내가 유디트를 이 자리에서 치우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만 황성에 돌아가고 싶니, 아니면 그래도 사냥제에 참석하고 싶니?”

“저는…….”

유디트는 머뭇거렸다.

나는 독촉하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일순간 유디트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

내가 그녀에게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순전히 의견을 물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사냥제에 참석하고 싶어요.”

유디트가 이내 대답했다.

“여벌로 준비한 의상은 있고?”

“아니요.”

조금은 의외였다. 더러운 드레스 차림을 하고서도 구태여 사냥제에 참석하고 싶다니.

“그래. 내 옷을 빌려주고 싶지만 크기가 맞지 않을 것 같고.”

나는 들고 있는 부채로 반대쪽 손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클로에에게 여벌 드레스가 있을 거야. 원한다면 그걸 빌리도록 해. 클로에도 자신의 실수 때문에 생긴 일이니 기꺼이 너를 도와주고 싶다고 하는구나.”

“언니!”

본래 자리로 돌아가 착석해 있던 클로에가 화들짝 놀라 나를 불렀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

클로에가 나를 잘 따르는 걸 아는 만큼, 나도 그녀가 가끔 귀찮을지언정 진심으로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정말, 유디트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쉴 새 없이 파멸을 부르고 있었다.

물론 나도 유디트가 좋은 건 아니지만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클로에도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게 좋았다.

“유디트. 물론 네가 원하지 않으면 거절해도 된단다.”

유디트는 또 놀란 것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흔들리던 그녀의 눈이 이내 밑으로 내리깔렸다. 곧 유디트가 차분하게 답했다.

“1황녀님과 2황녀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클로에에게 시선을 돌렸다.

클로에는 억울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말만큼은 잘 듣는 클로에라, 마침내 그녀는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시녀에게 명령했다.

“유디트에게 드레스를 내줘.”

클로에에 비하면 유디트의 키가 작지만 사냥터에서 입는 드레스는 발목까지 덮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나 종아리 부근에서 잘리는 형식이었으니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

시녀와 함께 이동하는 유디트를 보고 나도 내 뒤에 선 시녀에게 고갯짓했다.

“가서 유디트를 도와주도록 해.”

그러고 나서 나는 동생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클로에를 본받는 게 좋겠다. 이렇게 솔선수범해 실수를 책임지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아?”

클로에에게도 잘했다는 듯이 부채로 팔을 툭툭 토닥여 줬다.

클로에는 처음에 속이 상한 얼굴이었지만 단순한 성격답게 내 손짓을 받고 표정을 풀었다.

그 후로는 제법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더 이상 귀에 듣기 싫은 잡음이 흘러들지도 않았고, 거슬리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지도 않았다.

“앗, 저기 좀 봐.”

그러다 문득 황녀들 사이에서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터져 나왔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내 동생들에게는 체통이 부족했다.

“우와, 베른하르트 소공작이잖아. 언제 왔지?”

그러나 귀에 익은 이름이 들어온 순간, 그들의 반응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무심결에 황녀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잠시 후 눈에 들어온 것은 수려한 외모를 가진 소년이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청아한 은빛 머리칼이 부서지는 햇빛에 섞여 시야를 파고들었다.

마찬가지로 희게 반짝이는 속눈썹 아래로 보석처럼 박힌 눈동자는 신비로운 보랏빛이었다.

황녀들이 야단을 떠는 것이 단번에 납득이 갈 정도로 눈에 띄는 소년이었다. 그러니까…….

‘남주인공 등장이로군.’

나는 얼마 전 공립 도서관에서도 봤던 지독히도 잘생긴 소년을 시야에 담으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새삼스럽지만 잘생기긴 참 잘생겼다. 물론 나는 다른 황녀나 영애들에 비하면 그의 외모에 무감한 편이었지만 말이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여주인공인 유디트와 악역인 나는 적대 관계이되, 연적은 아니었다.

내가 다른 누군가와 치정으로 얽히는 건 상상만 해도 별로라 그래도 그건 좀 마음에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에 나온 나는 자기애가 너무 강해서 남자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남주인공인 킬리안을 의식한 것도 유디트를 짓밟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로써였다.

참으로 일관성 있는 악역이 아닌가?

현실의 나도 앞으로 유디트와 킬리안이 어떤 로맨스를 찍든지 거기에 관여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배다른 자매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치정극이라니.’

온갖 이야기 속에 질릴 정도로 등장하는 흔하디흔한 소재.

그만큼 꾸준히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내용이기도 했지만, 어디를 봐도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황녀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킬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괜히 사람의 속을 간지럽게 만드는 보라색 눈동자가 황족들이 앉은 자리로 미끄러졌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촥 펼쳐 들었다. 처음부터 그를 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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