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6. 델피니움의 꽃말
“아앗!”
나는 갑자기 탄성을 내지르며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을 응시했다.
보란 듯이 내 궁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사람은 유디트였다.
그녀는 긴 까만색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껴 헝클어지고, 치맛자락이 마구 나풀거려 발목이 보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로 내게 다급히 뛰어왔다.
지금까지의 나였다면 그 품위 없음에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른 의미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저……! 1황녀님을 뵙…….”
쿠당!
내게 급히 다가오던 유디트가 발목을 삐끗해 넘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촤아악!
심지어 그냥 넘어진 것이 아니라, 옷자락을 바닥에 끌며 내 앞까지 미끄러져 오기까지 했다.
“…….”
“…….”
잠깐 유디트와 나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굳은 듯이 움직임이 없던 아이가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아, 그…….”
떨리는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여실히 깃들어 있었다.
내 앞에 볼썽사납게 넘어진 것이 창피한지 하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1, 1황녀님을 뵙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쥐구멍에라도 기어들어 갈 것 같은 작은 인사말이 내 귓가에 울렸다.
나는 느닷없이 튀어나온 유디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먼저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유디트에게 일단 예의상 괜찮냐고 물을 생각이었다.
“풉.”
그때, 유디트의 뒤를 따라온 두 명의 시녀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그들이 무엇을 보고 이런 반응을 내보였는지는 궁금해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뻔했다.
그 순간 나는 이맛살을 구겼고, 유디트는 빨갛게 물든 얼굴을 굳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
조금 전의 어리숙한 모습은 당혹감에 의한 것이었던 듯, 유디트가 이번에는 반듯하게 예를 갖추며 똑 부러지게 말했다.
하지만 의연한 태도와 달리 까만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는 아직도 붉었다.
나는 유디트의 시녀들을 한 차례 눈으로 훑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이 얼른 내게 인사했다.
“1황녀님을 뵙습니다. 카뮬리타의 축복과 가호가 함께 하시어 제국의 광영을 무구히 빛낼 이 시대의 첫 번째 창과 방패가 되시기를. 지성에서 태어난 지고하고도 유일한 태양의 딸로서 최고의 홍복을 누리소서.”
그래도 어쩐 일로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 시녀들을 데리고 있군.
‘물론 없느니만 못한 것들이긴 하지만.’
내가 인사를 받아 주지 않으면 그들은 계속 무릎을 굽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들을 일부러 무시한 채 유디트에게 다시 시선을 움직였다.
“유디트.”
내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을 듣고 아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황궁 안에서는 예법을 잘 지켜야지. 급하게 뛰니까 이렇게 넘어졌잖아.”
지금까지의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무시로 답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유디트와는 접점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할 일 자체가 생기지 않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엔 유디트에게서 눈에 띈 것 때문에 약간의 변덕이 생겼다.
‘라미엘……. 어지간히 할 짓이 없나 보네.’
아까도 언뜻 보고 수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역시 유디트에게 라미엘의 그림자가 붙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갑자기 유디트에게 흥미라도 생겼나?
‘아니면…… 혹시 나 때문인가? 내가 유디트에게 관심을 가져서.’
그때 문득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는 유디트의 손에 시선이 갔다.
“그런데 손등이 왜 그렇지?”
지난번까지만 해도 하얗던 아이의 손에 붉은 줄이 여러 개 나 있는 게 보였다.
“아, 이건…… 그게.”
유디트가 머뭇거렸다.
“말하기 싫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나도 그렇게까지 궁금했던 건 아니라 냉큼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심코 질문해 놓고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화들짝 놀라서 얼른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이건, 그러니까 수업을 받다가요.”
“수업?”
영문 모를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유디트한테는 그녀를 가르치는 교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사실은 요즘, 3황녀님께서 같이 수업을 들을 기회를 주셔서…….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3황녀궁에 가고 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유디트가 요즘 3황녀 리리아나의 궁에 가끔 불려간다고 마리나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온실에서 본 소년에게 관심이 쏠려 크게 신경 쓰지 않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유디트랑 같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고?
‘뭐야, 리리아나가 갑자기 유디트랑 친하게 지낼 마음이라도 들었나?’
클로에가 악녀의 하수인 느낌이라면, 리리아나는 악녀의 하수인의 하수인 같은 느낌이었다.
즉, 클로에와 어울리며 그녀에게 붙어 바람잡이 역할을 주로 하는 개미 악역 느낌이었다.
들을수록 알쏭달쏭해지는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수업이랑 네 손등이 그렇게 된 게 무슨 상관……. 설마 네가 진도를 못 따라서 리리아나의 선생이 너를 때린 거야?”
“아뇨, 선생님은 저한테 질문 안 하세요.”
“그럼?”
“3황녀님이 대답을 못 하시면 제가 대신 맞아요.”
아니, 잠깐.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만. 유디트, 얘야? 그러니까 그거, 매 맞는 시동이잖아?
기상천외한 짓을 벌인 리리아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뒷골이 저리기 시작했다.
‘아니, 씨. 세상에 어떤 황녀가 매 맞는 시동 노릇을 해?!’
이것들이 진짜 돌아가면서 난리야!
‘아무리 반쪽짜리라 해도 그렇지, 리리아나 이 상식 없는 게!’
리리아나의 교사 중 누가 그 수업에 들어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 맞는 시동이라면서 4황녀가 왔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겠어!
‘아니, 아니지…….’
이 경우에는 때리라고 데려온 사람도 그렇지만, 진짜 때린 사람도 문제지?
‘아무리 이름뿐이라고는 해도 명색이 황녀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데, 감히 같은 피를 나눈 황족도 아니고 귀족 따위가 회초리질을 해?’
“유디트, 그 선생 이름이 뭐지?”
속으로 서늘한 분노를 삭이다 보니 오히려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유디트는 내가 왜 물어보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을 향한 관심에 들뜬 듯이 말갛게 웃었다.
“토르센 자작님이라고 들었어요!”
“토르센 자작이구나.”
나는 곧 유디트가 영영 볼 수 없게 될 남자의 이름을 되새겼다.
손을 내밀어 유디트의 손등에 밀착시켰다.
화아앗. 내가 내보낸 마력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잠시 후 피부가 벗겨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던 유디트의 손과 무릎이 완벽하게 치료되었다.
피가 배어난 상태로 구겨져 있던 옷도 새것처럼 깔끔해졌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왜 그렇게 뛰어온 거야? 날 보려고 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유디트는 어쩐지 조금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게.”
유디트는 내가 치료해 준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더듬거리는 음성을 흘려보냈다.
“늦장을 부리면 금방 가 버리실 것 같아서…… 그러니까, 저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꼴이 답답했지만 그래도 유디트를 기다려 주었다.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요.”
역시 날 보려고 일부러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던 거였나.
클로에에게 봉변을 당하면서도 계속 1황녀궁 앞을 얼쩡거리기에 머리가 나쁜 줄로만 알았더니.
“감사받을 일을 한 적은 없는데.”
“아니에요.”
내 말에 유디트가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에 마법 정원에서도 구해 주셨고…… 또 2황녀님한테 벌을 받을 뻔했을 때도 도와주셨잖아요. 저한테…… 과자도 주셨고요.”
딱히 자기를 위해 한 행동은 아닌데 그걸 도와줬다고 생각하는군.
원래의 내 성격대로라면 ‘내가 네까짓 걸 도와주다니, 그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착각이냐’고 일침을 놓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디트가 너무 순한 얼굴로 정말 기쁘다는 듯이 배시시 웃고 있는 걸 보니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소리 해 줄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래?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그래서 결국 그 책은 이렇게 멍청할 정도로 착하게 살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뭐야?’
유디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차라리 유디트가 경계했다면 내 기분이 좀 나아졌을까?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맑은 눈으로 말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유디트의 목에 손가락 끝이 닿았다. 충동적으로 손에 힘을 주려다가 멈췄다.
‘미쳤나. 진짜 괴물이라도 되려고?’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유디트의 옷깃 밖으로 삐져나온 체인을 완전히 밖으로 빼냈다.
“……네가 매일 하고 다니는 이 목걸이, 체인이 헐거워져서 빠질 것 같은데.”
내 말이 의외였는지, 유디트가 번쩍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아……. 제가, 이걸 매일 하고 다니는 걸…… 알고 계셨어요?”
내 말의 어디에 그렇게 큰 놀라움을 느꼈는지, 유디트의 눈이 당장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동그랗게 떠져 있었다.
“내가 잠깐 봐도 될까? 혹시 망가졌으면 고쳐 주고 싶어서.”
유디트는 경계심도 없이 바로 목걸이를 풀어서 내게 주었다.
그동안 교류도 없던 내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데 의심 한 톨 없이 선뜻 제 물건을 내주다니? 열두 살이나 먹어서는 뭐 이렇게 맹탕인가 싶었다.
속으로 혀를 차면서 유디트의 목걸이를 확인했다.
그냥 봐서는 낡아 빠진 고물에 불과했지만 역시 목걸이의 뒷면 이음새 부분에 아주 작게 새겨진 깃털과 초승달 모양의 문장이 있었다.
얼마 전, 황실 서고를 뒤져 확인해 본 멸망한 마법 왕국의 문양과 일치했다.
이미 그럴 걸 알고 있었지만, 꿈에서 봤던 내용이 사실임을 이렇게 다시금 내 눈으로 확인하자 왠지 머리꼭지로 피가 쓸려나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