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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4화 (30/203)

14화

나는 온실에는 다른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오히려 이 안에 숨어 있는 게 더 안전하다는 사실, 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소년의 몸에 있는 마력 사슬이 발동해 추격자들에게 바로 들킬 것이라는 사실을 굳이 그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너, 백야의 전당에서 어떻게 도망쳤어?”

“…….”

“이 온실에 들어올 때 아무 느낌 없었어?”

“…….”

“내 영상을 담은 마력석은 한두 개가 아닌데 왜 하필 토끼풀 황녀님이라고 그랬어? 그거 되게 오래전 건데.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어?”

뒷문으로 가는 동안 심심하기도 하고, 또 궁금하던 것도 있어서 소년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내 질문에 하나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협박범답지 않게 침묵을 지킬 뿐, 나한테 조용히 하라면서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예의 바른 인질범이었다.

“황궁에서 나가면 어디로 가려고?”

하지만 이번 물음에는 소년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어디든.”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갈 거야.”

왠지 그 말에서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느껴졌다.

이 소년이 살아온 삶이 한순간 궁금해졌지만 그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소년이 멈췄던 몸을 먼저 움직여 내 팔을 잡고 앞서 걸어갔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구하러 가야 돼.”

“아, 그래…….”

아주 원대한 꿈이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아버지를 구하러 간다는 걸 보니까 라스너 백작은 사형이 아니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나 보지?

하지만 어쩌나. 넌 황궁을 빠져나가지 못할 텐데.

“너 이 녀석……! 여기 있었구나!”

내 생각대로 온실의 뒷문을 열자마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소년이 굳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위협해 인질극을 벌일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봐줬다.’

나는 마력으로 근력을 증강시켜 그의 몸을 밀쳤다.

부릅떠진 은회색 눈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나를 놀란 듯이 쳐다봤다.

애초에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처럼 소년과 내 거리가 벌어졌다.

팟!

동시에 소년의 손목과 발목에서 검푸른 마력의 사슬이 번쩍였다.

꼭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이 바닥으로 패대기쳐졌다.

곧 상황을 파악한 그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크윽! 이거…… 놔!”

“이단자 주제에 감히 도망치려 하다니, 이 간 큰 자식!”

나는 옆에 서서 소년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헉, 1황녀님!”

“카뮬리타의 1황녀님을 뵙습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자들이 급히 예를 차려 인사했다.

“그래, 이단자가 탈출을 시도했나 보군.”

“예! 혹시…… 이놈이 황녀님께 무슨 실례를……?”

그러다 소년과 내 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마주한 얼굴에 긴장과 당혹감이 어렸다.

나는 제압당한 채 바닥에서 거칠게 몸부림치는 소년을 내려다봤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어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이내 나는 짤막하게 답했다.

“아니, 그냥 나도 마침 지금 온실에 왔다가 우연히 상황을 목격한 것뿐이야.”

“아, 네! 별일이 없으셨다니 천만다행입니다! 황녀님의 휴식 시간을 방해해 죄송합니다! 이 이단자는 저희가 속히 데려가겠습니다.”

“그래. 데려가라.”

백야의 전당의 마법사와 경비병들이 붉은 머리 소년을 둘러업고 서둘러 온실을 빠져나갔다.

내가 1황자에게 그랬듯이 마법으로 입을 막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듯, 소년은 아까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핏발 선 눈만큼은 아주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왠지 그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 * *

“황녀님, 냉궁의 황녀님이 오늘도 2황녀님 때문에 곤욕을 치르셨다고 해요.”

“그래?”

그리고 그날 저녁, 마리나의 보고를 들으며 태연히 읽고 있던 책의 책장을 넘겼다.

“또 둘이 1황녀궁 근처에서 마주쳤나 보지?”

“네……. 2황녀님이 노발대발하시면서 다시는 1황녀궁 앞에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냉궁의 황녀님을 또 혼내셨다나 봐요.”

“누가 들으면 내 궁이 클로에 것인 줄 알겠네.”

마리나에게 전해 들은 클로에의 작태가 웃겨서 코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황실 내의 모든 길을 자기가 세낸 것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저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런 식으로 클로에에게 당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면서 계속 같은 길을 이용하는 유디트도 바보 같았다.

‘생각보다 머리가 좀 나쁜 편인가?’

내가 유디트였다면 좀 빙 둘러 가더라도 클로에를 피해서 다른 길로 움직였을 텐데.

책에서 본 유디트는 제법 총명한 황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지금은 아직 어려서 상황 판단력이 떨어지는 걸 수도 있었다.

“황녀님이 명하신 대로 일단 지켜보고 있기는 한데……. 혹시 제가 따로 해야 할 일은 없을까요?”

마리나는 혹시 내가 유디트를 위해 나서려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 걸 알 텐데, 괜한 물음이었다.

‘요즘 나답지 않은 행동을 몇 번 해서 그런가.’

하지만 내가 마리나에게 유디트를 지켜보게 한 것은 딱히 그 애가 걱정된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건 오히려 감시에 가까웠다.

“없어. 계속 지금처럼 해.”

“네. 알겠습니다.”

마리나는 그래도 눈치가 빨라서 내게 두 번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마리나가 자리를 떠나고 난 뒤, 나는 마법서를 덮고 다른 책들 밑에 있던 금단술에 대한 책을 펼쳤다.

그래. 결국은 황실의 비밀 서고에서 꺼내 왔다. 물론 아직은 내 자격 요건이 부족해, 가장 엄중하게 보관된 금서들은 빌리지 못했다.

내가 황족이고 1황녀이긴 하지만 일단은 아직 미성년이라 나이에서부터 제한에 걸렸다.

또 황실에서 관리 중인 1급 금서를 열람하기 위해서는 마법사로서의 공식적인 직책도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지금은 겉핥기로만 금단술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게 전부였다.

아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실제로 금단술을 사용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다.

진짜 그냥 궁금해서. 진짜 그냥 알아만 두려고…….

‘아, 진짠데 되게 변명같이 들리네.’

아무튼…… 뭐, 이 정도는 괜찮잖아? 원래 무언가를 경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알아두는 것도 중요하니까.

또 마음속으로 누구에게인지 모를 변명을 읊조린 뒤 진지하게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성에 차는 내용은 없어 책장을 넘길수록 짜증만 가중되었다.

결국은 책을 덮어 버리고 종이와 펜을 꺼내 직접 몇 가지 마법식을 적어 내려갔다.

꿈속의 책에서는 미래의 내가 사용한 금단술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 마법식을 응용한 게 맞는 것 같은데.’

아니면 이거……. 아냐, 이것보다는 이쪽인가?

어느새 생각보다 심취해서 마법식을 그리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참 집중한 뒤 펜을 내렸을 때는 어느새 해가 저물어 창밖에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마리나가 불을 밝혀 주었겠지만 오늘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탓에 방이 어두웠다.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역시 어렵네.’

혹시 금단술을 응용해 마법사의 열병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을까 싶었는데 역시 쉽지 않았다.

애초에 이 방법에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한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제물로 삼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금단술을 시전하는 자와 제물의 마력 파장이 반드시 어느 정도 일치해야만 가능했으니까.

‘책에서 나하고 파장이 가장 잘 맞았던 제물은 단순한 소모성 엑스트라가 아니라, 유디트의 꽃길에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한 등장인물이었지.’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유디트는 마력 각성 후 비로소 진정한 황족으로 대우받게 되었다.

로맨스 소설에 빠질 수 없는 존재인 남주인공과 본격적으로 엮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건 남주인공만이 아니었는데, 그중에는 서브 남주였던 유디트의 충성스러운 기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 모든 것은 유디트 황녀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황녀님을 위해 살고 황녀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그가 유디트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유디트에게 위험이 닥치면 앞장서 그녀를 지키고, 늘 유디트의 옆에서 그녀를 격려해 주고, 또 유디트가 남주인공과 엇갈려 슬퍼할 때면 쓰라린 마음을 안고 오작교 역할을 자처하기도 하는…….

유디트의 기사는 그렇게 주인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순정남다운 면모가 있던 서브 남주였다.

그러나 주인인 유디트를 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나운 맹견 같았던 남자라, 책에서는 나도 그를 몹시 눈에 거슬려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유디트 괴롭히기에 열을 올리던 나한테 직접 경고를 날리며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던 남자였으니까.’

그래서 미래의 나도 유디트의 기사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차에, 그의 마력과 자신의 마력의 파장이 기적적인 확률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여 결국 그 기사는 내 덫에 걸려 금단술의 제물로 희생되어 죽었다.

잠깐 그 장면을 떠올렸다.

[“드디어 네가 죽는구나, 제라드. 버러지치고는 제법이었다고 인정해 주마.”]

미래의 나는 죽어가는 유디트의 기사를 앞에 두고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가엽게도. 너는 유디트에게 네 육신과 영혼을 모두 바치겠노라 맹세했지만 결국 네 피와 살은 전부 내게 속하게 될 테니. 그러니 주인을 잘못 선택해 내 눈에 띈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해라.”]

대사조차 정말 악녀 같지 않은가?

더군다나 비열하게 유디트에 대한 그의 감정을 이용해, 유디트가 위험한 것처럼 함정을 파서 기사를 죽여 버리는 전개였다.

‘아주 똑똑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말아야지.’

그런데 유디트의 충견이라는 이유 말고도, 책 속의 내가 그를 더 고까워했던 이유가 있었는데?

[“천한 것들끼리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도 비슷하군.”]

아,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유디트의 기사에게 백야의 전당 소속 이단자라는 설정 값이 있었지.’

그래서 성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똑같이 노예 취급받던 것들끼리 붙어 다닌다고 나한테 멸시하던 장면이 몇 번 나왔던…….

“……!”

드륵!

그 순간 뇌리를 스친 기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막 떠오른 유디트의 기사, 제라드에 대한 정보를 여러 번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지금 내 방 안을 물들인 노을처럼 짙붉은 머리.

속까지 관통할 것처럼 날카로운 빛을 띤 은회색 눈.

묘하게 어둡고 삭막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자 같은 남자.

소설에서 묘사되었던 부분들을 떠올린 순간,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바로 연관시켜 생각하지 못했지?’

나와 온실에서 마주쳤던 백야의 전당 소속 이단자.

그 소년이 딱 저런 인상착의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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