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4. 괴물 황녀님에게 필요한 것
똑똑!
“황녀님, 몬테라 가문의 셋째 영식에게 편지가 왔어요.”
“몬테라 영식이 또?”
방에서 마법사의 열병에 대한 서적들을 탐독하고 있을 때 내 앞으로 서신이 도착했다.
마리나는 엉망이 된 방 안의 모습에 잠깐 멈칫하다가 내게 쟁반 위에 있는 편지를 건네줬다.
시큰둥하게 편지를 받아 열자 그 안에서 마법처럼 꽃이 피어나고 나비가 날아올랐다.
거기에 더해 노랫소리까지 흘러나왔다.
-1황녀님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물론 ‘마법처럼’이 아니라, 이건 진짜 마법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카뮬리타 사람 중에는 황족이 아니라 귀족 중에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많았다.
“어머, 몬테라 셋째 영식이 직접 부른 건가 봐요. 귀엽네요.”
지금 나한테 편지를 보낸 몬테라 셋째 영식, 바비 몬테라는 음치였다.
마리나가 편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쿡쿡 웃었다.
바비 몬테라는 사실 내 약혼자 후보였다.
내 나이가 현재 열네 살. 일국의 황녀로서 약혼 논의가 오가기 충분한 나이였다.
다만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내 약혼자 후보는 한 명이 아니었는데, 그중 몬테라 가문의 셋째 공자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사실 내 약혼자는 어머니의 입김으로 일찌감치 논의되어 이미 5년 전에 본격적인 후보 색출에 들어갔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때쯤 마법사의 열병을 선고받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물론 세간에는 내 병이 비밀인 만큼 약혼 이야기가 아예 무산된 건 아니었지만, 5년간 이렇다 할 진척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도, 당시의 내 약혼자로 고려했을 정도로 좋은 영식이라면 일찍 죽을 나한테 붙여 주기는 아까울 테니까.
아마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도 나보다는 내 아래 황녀들과 약혼을 주선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솔직히 몬테라 영식은 당시에도 구색 맞추기로 내 약혼자 후보에 들어간 것일 뿐, 그중에서 조건이 가장 떨어졌다.
‘그러니까 이렇게 제일 열과 성을 다해 내 마음을 사려고 노력하는 거겠지. 내가 마법사의 열병에 걸려서 일찍 죽을 것도 모르고.’
아무튼 지난 5년간 이렇게 꼬박꼬박 나한테 한결같이 편지를 보내오는 건 그밖에 없었다.
‘내 부모도 나한테 이 정도 관심은 없을 텐데.’
그런 면에서는 정성이 갸륵하다 할 만했다.
물론 그래 봤자 여전히 하늘 끝에 달린 내 눈에는 차지 않는 상대였지만, 역시 꿈에서 최악으로 바닥을 치던 미래를 본 탓인가?
이전까지는 마냥 귀찮고 가소롭기만 하던 바비 몬테라에게 오늘은 조금 다른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코웃음을 친 뒤 바로 버렸을 편지를 처분하지 않고 옆에 놔두었다.
“어머나……. 오늘 편지는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왜 그래, 나도 가끔 답장 정도는 해.”
마리나는 그저 그러냐는 듯이 웃었다.
나는 손에 턱을 괸 뒤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보다 벌레 한 마리가 1황녀궁 밖에서 얼쩡거리는데.”
“또요? 할 짓들도 없지.”
마리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의견에는 나도 동감이었다.
따분한 기분마저 느끼며 마력을 담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1황녀궁의 결계에서 갉작거리던 검은 형체가 내 마력에 짓눌려 완전히 압사되어 사라졌다.
내 궁에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줄 아나? 왜 이렇게 자꾸만 안쪽을 엿보려고 기웃거리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편지가 들어올 때 결계에 붙은 것 같은데…….’
나는 다시 바비 몬테라의 편지를 내려다봤다.
물론 그렇다 해서 내가 그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이런 짓을 한 범인이야 뻔해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1황자 라미엘 아니면 그의 모친인 2황비 카타리나겠지.’
두 사람 다 내게 관심이 지대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아는 바비 몬테라는 이런 짓을 벌일 깜냥도 되지 못했다.
날 볼 때마다 바보같이 헤실거리던 몬테라 영식을 떠올리다가 문득 내 다른 약혼자 후보들한테까지 생각이 닿았다.
‘그러고 보니 내 약혼자 후보 중에…… 남주인공도 있었지, 아마?’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유디트와 맺어졌던 남자.
이름은 킬리안 베른하르트.
나이는 나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하지만 말이 약혼자 후보지, 그와는 5년 전 이후로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당시에도 예의상의 안부 편지를 서너 번 주고받은 게 전부였고 말이다.
그래도 역시 그 웃기지도 않은 로맨스 소설에서 남주인공이던 사람답게, 솔직히 조건으로만 치면 약혼자 후보 중 최상위인 남자였다.
그 망할 소설에서도 킬리안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가 남발했었으니 말이다.
‘대략 흰 눈송이 같은 은빛 머리칼과 빨려들 것만 같은 보라색 눈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수식어였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눈에 보기 좋고 먹기도 좋다고 해도, 난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남이 침 바른 건 비위 상해.’
그 상대가 유디트라면 더더욱 그랬다.
“황녀님, 곧 오찬 시간이에요.”
“그래, 가자.”
마침 나가야 할 시간이 되어, 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 * *
“아르벨라, 너……. 그 머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오늘 점심 오찬은 황제와 그의 자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가끔 황제가 다른 황족들을 불러 모아 함께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때도 있었는데, 정해진 주기나 날짜는 따로 없었다.
황제의 기분이 내킬 때 돌발적으로 가끔 만들어지는 자리이니만큼 피치 못하게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었다.
그래도 황제는 그런 부분에 나름대로 관대해서 불참한 황족들에게 쓴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아르벨라는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그녀에게 이따위 시시한 질문을 던진 남자를 응시했다.
세드릭 지그바르트 라젠 카뮬리타.
그는 이 나라의 황제이자 아르벨라의 아버지로,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풍채 좋은 남자였다.
꽤 멀끔하게 생긴 미남이자, 나이에 비해 아직 젊어 보이는 외양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황제다운 위엄을 가졌을지언정 순혈 황족의 증거인 금색 눈은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황족의 금색 눈은 거의 3대 전부터 나타나지 않게 되었으니, 오히려 격세유전을 한 유디트가 특별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보다, 지금 날 보자마자 안부 인사도 없이 제일 처음 물어본 게 고작 머리카락에 대한 거라니.’
아르벨라가 얼마 전까지 누구 때문에 침대 신세를 졌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에 대한 미안함이나 걱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낯짝에 분노가 치밀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까지 늘 그래 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세드릭 황제뿐 아니라, 오늘 오찬 자리에 동석한 다른 황녀와 황자들도 어깨 위까지 싹둑 잘린 아르벨라의 금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요. 꼭 이유가 있어야 머리카락을 자르는 건 아니잖아요.”
허접한 질문에는 공들여 대답할 필요가 없지.
아르벨라는 그런 생각으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물론 세드릭의 눈썹이 비대칭을 그리며 휘어지는 걸 보니, 아르벨라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는 게 분명했다.
“뭐야, 우리 완벽주의자 누이가 이유도 없이 머리를 그런 꼴로 만들었다고?”
누군가 장난스러운 어투로 아르벨라의 신경을 긁는 말을 던진 건 그때였다.
아르벨라의 서늘한 눈이 맞은편으로 움직였다. 그 자리에는 얼마 전에도 본 1황자 라미엘이 앉아 있었다.
라미엘은 세드릭 황제와 같은 흑발 벽안의 소유자였으나 그것을 제외한 얼굴 생김새나 성격은 부친과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아르벨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태함이 철철 흘러넘치던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에 달콤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하니, 천하의 아르벨라가 실연이라도 당한 거야? 그동안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몰랐…… 으읍!”
아르벨라는 마법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나불거리려 하는 라미엘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래도 경고용으로 살짝만 본때를 보여 준 것뿐이기에 라미엘은 금방 마법을 깨고 엄살을 피웠다.
“와. 오늘도 가차 없네, 아르벨라. 혹시 내가 정곡을 짚었…… 읍읍! 읍!”
아르벨라는 입술 끝을 삐뚤게 기울이며 다시 그의 입을 막았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 지겹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지금 식당에서 뭣들 하는 짓이냐? 그만들 하고 식사나 해라.”
아르벨라는 그때에서야 마력을 거두었다.
라미엘도 세 번이나 금언 마법에 당하기는 싫었는지,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이후 본격적인 오찬 모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