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난 잠깐 쉬고 싶으니까 넌 가서 다른 영애들하고 얘기해.”
미적거리는 클로에를 다른 곳으로 보낸 뒤, 나는 답답한 속을 시원한 꽃차로 달랬다.
영애들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 빈 테이블을 보자, 조금 전에 보았던 유디트의 얼굴과 망설이던 그녀의 손이 떠올랐다.
나는 들고 있던 부채로 내 팔을 툭툭 두드렸다. 머릿속에 몇 가지 계산이 떠올랐다.
잠시 후 가까이에 있던 시녀를 불렀다.
“거기, 저 과자 남은 거 있지? 지금 포장해서 4황녀궁에 가져다줘.”
내가 지금 사소하고 하찮은 친절을 유디트에게 베풀기로 한 건 검은 속내 때문이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보던 과자를 결국 맛도 못 보고 대신 손만 얻어맞은 꼴이 된 유디트의 모습에 이제 와 위선적인 마음이 든 건 아니었다.
‘적은 가까이에 두는 게 낫지.’
부채를 펼쳐서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를 쫓아내며 흥 콧방귀를 뀌었다.
“……아, 이런!”
내가 놓치고 있던 사건이 떠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재빨리 이동 마법을 펼쳤다.
“앗, 벨라 언니? 어디 가?!”
클로에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유디트가 거대한 식충 식물과 고전하고 있을 마법 정원으로 이동했다.
* * *
“꺄아아아악!”
역시나 3황녀궁 근처에 있는 마법 정원에서는 유디트의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꿈에서 읽은 내용으로는, 유디트가 3황녀 리리아나의 부름을 받고 그녀의 궁으로 가다가, 마법 정원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향기에 홀려 큰일을 겪을 뻔했다고 했다.
‘클로에의 티 파티에 대한 내용은 없어서 그게 오늘인 줄 몰랐어!’
서둘러 마법 정원 안으로 들어가자, 유디트가 거대한 식충 식물의 줄기에 묶여 질질 끌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보라색 반점이 찍힌 붉은 꽃이 유디트를 향해 꽃잎을 활짝 펼치며 군침을 흘리듯이 소화액을 뚝뚝 흘렸다.
“아, 1황녀님……!”
유디트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보면서 울먹였다.
나는 유디트의 몸을 동여맨 식충 식물의 줄기를 마법으로 잘라냈다.
“괜찮아?”
마음이 급해서 식충 식물의 상태를 눈으로 살피며 일단 유디트를 끌어와 거리를 벌리게 했다.
유디트가 파르르 몸을 떨면서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이 꼭 물에 빠졌다가 나온 검은 토끼 같았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무서, 무서웠어요.”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한 유디트가 울먹이다가 나한테 안겨들었다.
낯선 접촉에 순간 반사적으로 맞닿은 몸을 밀어낼 뻔했다.
하지만 손만 움찔거렸을 뿐, 생각한 걸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쪽은 마법 식물들을 키우는 정원이 있어서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면 안 되는 거 몰라?”
“알았는데…… 냄새가 너무 좋아서…….”
“너처럼 마법 식물에 내성이 없는 애는 위험할 수 있어. 원래는…….”
원래 황족들은 어릴 때부터 정기적으로 정원에 들어가 유용한 마법 식물에 대한 내성을 기른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유디트는 황성 안에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처지라,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그 부분을 지적하려다가, 유디트가 서럽게 소리 내서 울기 시작하는 걸 듣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잠깐, 그런데 옷이 너무 축축해지는 것 같은데 이거 눈물 맞지?
‘눈물 말고 다른 거면 가만 안 둬.’
“아무튼,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해. 웬만하면 그냥 이 근처에 아예 안 오는 게 제일 좋고.”
잠시 후 유디트를 대충 달래 먼저 돌려보낸 뒤에 나는 안심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 네펜데리아 열매, 무사하네.”
사실 내가 걱정한 건 유디트가 아니라 마법 정원에 있는 이 식충 식물이었다.
나는 마법식 개발 말고도 마법약 연구에도 취미가 있었는데, 요즘 진행 중인 연구에 꼭 필요한 게 바로 네펜데리아 열매였다.
혹시 내가 아까 급하게 줄기를 자르면서 실수로 열매를 건드렸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식충 식물은 아주 멀쩡했다.
이런 다급한 순간에도 빛을 발하는 내 완벽한 마력 컨트롤 능력에 나조차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어라, 웬 비명이 들려서 와 봤더니, 이게 누구신가?”
내 귀에 달콤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설마 방금 소리 지른 게 아르벨라 너였어? 아닌데, 분명 우리 예쁜 누이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하늘에서 옷자락을 펄럭이며 내려오고 있는 건 쇄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칼과 벽안을 가진 화려하고 곱상한 소년이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가 장난스러운 빛을 띤 눈동자를 휘어 여우처럼 미소 지었다.
나와 동갑인 1황자 라미엘.
그는 앞서 말한 적 있듯이 2황비 카타리나 소생이자, 2황녀 클로에의 동복 오라비이기도 했다.
[“도와달라고? 내가 너 같은 잡종 계집애를 왜?”]
꿈에서 봤던 오늘의 장면을 떠올리자 저절로 얼굴이 우그러졌다.
[“흠, 그럼 어디 한번 날 설득해 봐. 내가 왜 널 도와줘야 하는지 이유를 들어보고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면 고려해 볼게.”]
원래 여기서 유디트를 구해 주는 건 내가 아니라 이 녀석이었다.
그리고 라미엘은 유디트가 위험한 걸 보고도 저딴 소리를 지껄이다가, 나중에야 선심 쓴다는 듯이 식충 식물들을 전부 불태웠다.
“성격 나쁜 놈. 저질.”
“뭐야, 갑자기 왜 욕해?”
라미엘은 나한테 느닷없이 욕을 먹은 게 이해가 안 되는 듯했다.
그는 꿈속의 책에서 묘사된 것처럼 실제로도 속에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읽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2황비 카타리나는 자신의 아들인 라미엘을 황태자로 삼고자 하는 야욕을 가지고 있어 노골적으로 나를 적대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라미엘은 황위 같은 데 관심이 조금도 없는 것처럼 굴며 가볍고 경박한 태도와 말투를 고수했다.
나를 대하는 태도도 살가운 편이었다.
나는 라미엘을 흘겨보면서 경고했다.
“내 네펜데리아 열매 건드리면 죽어.”
“이거? 우리 누이가 요즘 가지고 노는 게 이 식충 식물 열매인가 보지?”
라미엘은 내 옆에서 꽃잎을 뻐끔거리는 네펜데리아를 한번 힐끗 쳐다본 뒤 진저리를 쳤다.
“어우, 징그러워. 언제 봐도 죄다 불태워 버리고 싶게 생겼네. 이런 건 줘도 안 가지니까 다 네 거 해. 난 나하고 어울리는 아름다운 마법 식물이 좋더라.”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라미엘은 극성 나르시시즘 환자였다.
“어, 잠깐. 그럼 설마 아르벨라, 혹시 네가 이 식충이들한테 먹이라도 준 거야? 방금 비명을 지른 사람은 그럼 저 배 속에 있나?”
친한 척 내 어깨에 올라온 라미엘의 팔을 철썩 내려쳤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너나 잘해. 그리고 착하게 좀 살아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지. 나를 본받아서 착하게 살라고.”
라미엘이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물론 나는 진심이었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이 녀석도 유디트를 깔보고 괴롭히다가 훗날 그녀와 맺어질 남주인공에게 처단당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내가 오지 않았다면 유디트한테 변태 같은 짓을 했을 게 뻔하지 않은가?
이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이러니 나중에는 도대체 뭐가 되려는지 모르겠다니까. 쯧쯧.
그러나 동생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이 누님의 마음도 모르고, 라미엘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피식피식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제 눈가를 문질렀다.
“으음. 아르벨라, 이 오라버니가 널 꽤 좋아하긴 하지만 말이야. 그런 말은 진짜 착한 사람에게 너무 모욕적인 소리 아닐까?”
너 마리나랑 짰니? 짜증 나게 비슷한 소리를 하네.
“닥쳐. 나보다 일곱 달이나 늦게 태어난 주제에 어디서 오라버니 소리야?”
“그럼 누님이라고 부를까? 아르벨라 누님? 이게 마음에 들어?”
나는 라미엘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더 상대하지 않고 마법 정원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라미엘이 ‘같이 가, 누님!’ 하고 킥킥 웃으면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 * *
그날 저녁.
“그게 뭐예요?”
“1황녀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유디트는 그녀에게 상자를 내미는 시녀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시녀는 가만히 있는 유디트가 답답하다는 듯이 그녀에게 상자를 안겨 주고 떠났다.
유디트는 연분홍색 상자를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치된 유디트의 궁은 조용했다.
이곳에 배정된 시녀들은 게으름을 피우게 된 지 오래라, 지금은 다들 어디론가 놀러 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유디트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들은 궁에 외부인이 온 줄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유디트는 의자가 하나밖에 없는 테이블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자, 아까 정원에서 본 작고 예쁜 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유디트가 살고 있는 궁에서는 한 번도 볼 일이 없는, 맛있고 달아 보이는 과자였다.
창백할 정도로 하얗던 뺨에 처음으로 제 나이다운 온기가 발그스름하게 맴돌았다.
“정말 여름이라 그런지 정원에 벌레가 많네.”
“냅킨에도 벌레가 앉으려는 것 같아서 내가 쫓아 줬어.”
이 과자를 그녀에게 준 사람을 떠올리자, 티 파티가 있던 정원에서 있었던 일이 덩달아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잠깐 가만히 서서 상자를 내려다보던 유디트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 없이 예쁜 꽃 모양 과자를 만질 수 있었다.
누가 빼앗기라도 할까, 그것을 얼른 입 안에 숨길 때까지도 유디트의 궁은 여전히 조용했다.
설탕을 듬뿍 넣은 과자는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아 황홀한 맛을 선사했다.
……달았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한 기분이 들 정도로. 너무 빨리 녹아 사라져 버린 달콤함에 슬픈 마음까지 들 정도로.
“괜찮아?”
유디트는 그녀를 향해 다급히 달려와 줬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가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누군가 그렇게 와 준 건 처음이었다.
가뜩이나 빠듯하게 부풀었던 마음이 이제 진짜 터질 것 같았다.
다른 과자도 지금 전부 다 먹어 버리고 싶었지만 유디트는 꾹 참고 뚜껑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상자를 꼭 끌어안고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침대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아껴 먹어야지.’
지금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졌으니까.
이불 속에 들어가 상자를 꽉 끌어안고 누운 유디트의 얼굴에 민들레꽃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감은 눈꺼풀 밑으로 유디트의 눈동자 색과 꼭 닮은 금발을 가진 이복 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는 것이 설탕 과자를 먹는 것보다 더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