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클로에가 나를 정원 안쪽으로 이끌었다.
“언니, 저쪽으로 가자! 다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어!”
그녀의 뒤를 따르며 괜히 머리를 한번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내렸다.
지금의 나는 다시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마리나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애원해 결국 오늘은 붙인 머리를 했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해 둔 의상과 짧은 머리가 어울리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냥 단발이 낯설어서 그렇지 이상한 것까진 아니었는데, 마리나가 너무 간절한 눈으로 날 보는 바람에…….
아무래도 마리나에게 내 머리에 익숙해질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단 오늘은 내가 한발 물러나 줬다.
‘하, 역시 난 너무 좋은 주인이라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향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며 초록빛 길을 지나 마침내 주황색 꽃이 만발한 정원 안쪽에 다다랐다.
오늘 클로에가 연 티 파티는 스탠딩 파티 형식이었다.
원래 티 파티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다과를 드는 기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니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손으로 간식을 집어 먹는 스타일은 특히 격식을 중요시하는 황궁에서는 이례적이었다.
클로에는 전부터 은근히 튀는 걸 좋아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인 2황비 카타리나가 그 까탈스러운 성미에 이런 걸 허락했다니, 그 점은 좀 의외였다.
‘……혹시 포기한 건가? 아까 모습을 보면 그럴 만도 해.’
“다들 인사해! 우리 언니야.”
클로에는 오순도순 모여 있던 영애들 앞에 다다라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미 다들 다른 자리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영애들이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내가 자신의 언니라는 걸 소개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꺅, 안녕하세요, 1황녀님!”
“2황녀님의 티 파티에서는 처음 뵈어요!”
클로에와 친분이 있는 영애들은 다들 그녀와 성격이 비슷했다.
‘그런데 황족 중에는 나만 왔나 보군.’
아예 초대장을 나한테만 보낸 건가? 클로에 얘는, 진짜 나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모두 반가워. 클로에가 오늘 티 파티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다들 즐거운 시간 보냈으면 좋겠네.”
호들갑스러운 인사에 나도 적당히 호응했다.
다들 열두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비슷한 또래로 구성된 손님들이었고, 성격들도 활발한 편이라 티 파티는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나도 그 속에 있으니 말을 많이 안 해도 되어서 편했다.
오늘은 별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응? 그런데 방금 내가 잘못 봤나?’
그러다 문득 내 시야에 들어온 사람이 있어서, 조금 전 무심코 스쳐 지나간 곳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그럼 그렇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확연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테이블의 한쪽에 혼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검은 머리칼과 단출한 옷, 그리고 작은 몸집을 가진 소녀. 4황녀 유디트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유디트가 허리를 황급히 반으로 접어 나한테 꾸벅 인사했다.
대번에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 거지 같은 꿈을 꾼 이후로 유디트가 눈에 아주 거슬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꿈에서는 클로에의 티 파티에 대한 내용을 본 기억이 없어서 의아해졌다.
‘왜 여기에 저 아이가 있지?’
대놓고 테이블 앞에 서 있는 걸 보면, 클로에가 초대해서 온 것 같은데…….
클로에 성격에 하하 호호 친분이나 쌓자고 유디트를 불렀을 리는 절대 없었다.
사교계에서 흔히 있는 일을 떠올리자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견적이 나왔다.
‘티 파티 내내 무시해서 창피 주려고 불렀구나.’
겸사겸사 제 처지를 다시 한번 인식하게 해서 수치심을 주려는 이유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책에서 내가 유디트의 생명을 위협하는 악녀였다면, 클로에는 악녀 하수인 정도의 느낌이었지.’
“유디트, 감히 너 따위가 벨라 언니의 백옥 같은 미간에 한순간이나마 주름을 생기게 만들다니! 가만 안 둬!”
그래서 대사도 이런 식으로…….
“유디트, 이 천한 계집! 주제도 모르고 네가 감히 벨라 언니와 맞먹으려고 해? 당장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 못할까!”
전형적인 악녀의 오른팔이라 그런지, 유디트를 괴롭히면서 하는 행동이나 말은 다 이렇게 뻔하고 식상했었다.
“하.”
어찌 되었든 간에 클로에의 의도를 깨닫자 나는 기분이 좀 나빠졌다.
어린 나이에 끔찍한 티 파티를 보내게 될 유디트가 가엾다거나, 동정심이 들어서는 아니었다.
‘이딴 수준 낮은 짓거리를 하는 자리에 감히 나를 동석시켜서 공범으로 만들어?’
서늘한 시선을 클로에에게 보냈으나, 그녀는 눈치 없이 다른 영애들과 여전히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때 유디트가 테이블 위의 간식들을 보면서 침을 꼴깍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굴려 옆에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나는 냉담한 기분으로 눈앞의 소녀를 탐색했다.
초라한 몰골이긴 하지만 이렇게 보니 원석 자체는 제법 괜찮아 보였다.
저렇게 없어 보이는 짓을 하고 있어도 그렇게 멍청해 보이지 않았고.
‘그동안에는 더러운 노예의 피가 흐르는 반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망할 책에서는 유디트의 모친이 그냥 천한 노예가 아니라고 쓰여 있었지.’
그래, 예전에 멸망한 작은 마법 왕국의 후예라고 했던가.
원래 마력량은 선천적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유디트가 나중에 각성을 통해 강력한 마법사가 된 이유는 그녀의 모계 핏줄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중에 혈통의 고귀함 또한 인정받게 된 유디트는 더더욱 내 신경을 긁는 존재가 되었다고 나온다.
그때, 망설임이 담긴 손을 꼼지락거리던 유디트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앞에 있는 과자로 손을 뻗었다.
찰싹!
옆에 있던 캐논 백작 영애가 부채로 유디트의 손등을 때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날이 따뜻해서 그런지 여기 벌레가 다 있네요.”
“어머, 정말요. 설탕 냄새를 맡고 왔나 봐요.”
“거기 냅킨 좀 건네줄래요? 부채가 더러워져서 닦아야겠어요.”
영애들의 대화에 유디트의 얼굴이 빨개졌다. 벌레 운운한 것이 자기를 욕한 소리라는 걸 그녀도 눈치챈 듯했다.
나이가 조금만 더 들어도 코웃음 치고 말 유치한 짓거리였지만, 저 나이 때는 그럭저럭 동요할 만한 일이었다.
“하, 진짜…….”
왜 사람을 가만히 있게 두지를 않지?
‘내가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저 급 떨어지는 짓거리에 동참하는 꼴이 되는 거 아니냐고.’
나는 다시 과자를 향해 뻗지 못하고 움츠러든 유디트의 손을 찡그린 눈으로 보다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마침 캐논 백작 영애가 옆에 있던 사람에게 냅킨을 건네받고 있었다.
“여기 냅킨이요.”
“아, 고마…….”
철썩!
나도 부채를 들어 그 손을 후려쳤다.
깜짝 놀란 캐논 백작 영애가 나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의 손등을 한 번 더 찰싹 때렸다.
그런 뒤 말했다.
“정말 여름이라 그런지 정원에 벌레가 많네.”
황궁의 정원에, 그것도 티 파티를 위해 여러 날 동안 준비한 장소에 벌레 같은 게 있을 리 없었지만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냅킨에도 벌레가 앉으려는 것 같아서 내가 쫓아 줬어.”
“그, 그러셨군요.”
“벌레가 꽤 커서 한 번으로는 쫓아내지 못하겠더라고. 다들 봤을 테니 이해하지?”
방금 자신이 한 일과 비슷한 일을 당해서 그런지 나한테 부채로 맞은 영애의 뺨이 붉어졌다.
클로에의 체면도 있으니 초대객인 내가 대놓고 호통을 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무안을 겪었으니 이제 얌전해지겠지.
“전 미처 못 봤는데, 대신 벌레를 쫓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황녀님!”
……그런데 왜 수줍어하는 건데?
나는 살짝 당황했다.
왠지 캐논 백작 영애의 표정을 보니, 내가 진짜 자신을 위해 벌레를 쫓아 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설마 지금 내가 돌려서 깐 걸 못 알아들은 건가?’
이렇게 노골적이었는데? 더군다나 방금 네가 했던 짓이잖아?
그러다 나는 내가 잠시 잊고 있던 걸 기억해 냈다.
아, 그래……. 깜빡했네.
클로에의 친구들은 다 비슷한 수준이라 머리가 썩 좋지 못했지.
“1황녀님은 정말 친절하세요!”
“꺅, 방금 벌레를 쫓으시려 부채를 날리실 때 너무 절도 있고 멋있었어요!”
“하아…….”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을 때, 클로에가 후다닥 뛰어왔다.
“우리 언니가 원래 그래! 얼마나 친절하고 상냥하고 멋진데! 흥, 이건 비밀인데 사실 가까운 사람들한테는 더 그렇거든.”
그녀는 또 눈치 없이 내 자랑을 하는 건지 자기 자랑을 하는 건지 모를 으스대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다 유디트를 발견한 클로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뭐야, 넌 눈치가 없니?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거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눈치 없는 애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참, 아까 리리아나가 너 찾는 것 같던데. 할 일 없으면 3황녀궁에나 가 보든가.”
클로에와 달리 분위기를 제법 살필 줄 아는 유디트는 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다람쥐처럼 달려 정원을 떠났다.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클로에의 귀에 속삭였다.
“클로에……. 너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하자.”
“어? 그, 그래! 좋아, 언니! 나 시간 많아!”
“…….”
내가 왜 따로 이야기를 하자고 하는지 여전히 한 치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서 클로에가 환하게 웃었다.
그걸 보니 또 내 삶에 잠깐 회의가 들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