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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6화 (22/203)

6화

* * *

“정말 대단하십니다, 1황녀님! 직감만으로 웨이스턴 남작의 범죄를 정확히 감지하시다니 역시 대단한 혜안이십니다! 더군다나 현장을 덮쳐 이렇게 순식간에 일망타진하시고!”

막 블로비스 숲에 도착한 황실 기사단은 처음에 나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내가 마력 사슬로 포박한 사람들과 맹수들을 던져주자 그들도 금방 상황을 깨달은 듯했다.

불법 인신매매의 희생양인 아이들도 보호해 황실 기사단의 총책임자인 오귀스트 경에게 넘겨주었다.

황녀님의 활약에 감탄해서 앞다투어 찬양하는 소리가 내 귀에 달게 울렸다.

다른 때 같으면 그 상황을 좀 더 즐겼겠지만 지금은 영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 현장 마무리를 맡긴 뒤 황궁으로 돌아왔다.

“앗, 1황녀님!”

그리고 하필이면 황도에서 가장 보기 싫은 얼굴과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긴 검은 머리카락과 민들레 같은 금색 눈을 가진 소녀.

“네 궁엔 시녀 없니?”

“예?”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쏘아붙였다.

얘는 왜 볼 때마다 혼자 돌아다니는 거야.

“다음부터는 시녀랑 같이 다녀.”

눈치 있는 것들이라면 감히 네까짓 게 내 앞에 얼쩡거려서 신경을 건드리지 못하게 막겠지.

그런데 유디트가 내 말에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면서 우물 쭈물거렸다.

“네. 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그럴게요.”

걱정이라니, 도대체 내가 뭘 걱정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내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유디트를 싸늘히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앗, 저……!”

유디트는 나한테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무시했다.

1황녀궁에 도착해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에 엎어져 주먹으로 베개를 퍽퍽 두드렸다.

“왜! 이런 것까지! 진짜냐고……!”

이 거지 같은 책!

이 망할 책!

이 저주받은 책!

속 시원하게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한스럽게도 그동안 우아하고 고상한 황녀님으로 살아왔던 세월이 길어 마땅한 욕설이 생각나지 않았다.

“마리나! 영상 마력석 내 거 전부 다 가져와!”

“예, 황녀님.”

마리나는 다른 때 같으면 우쭐거렸을 일을 하고 돌아와서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시키는 대로 라벨이 붙은 마력석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았다.

나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서둘러 그중 가장 가까이 놓인 것부터 작동시켰다.

-자, 여길 보세요. 황녀님.

눈앞에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여자애가 나타났다.

얼룩말 인형을 끌어안은 채 큰 의자에 발을 달랑거리며 앉은 금발 벽안의 여자아이는 말랑한 뺨을 꽉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심각하게 귀엽고 예뻤다.

-자기소개를 한 번만 해 주시겠어요?

-싫어. 그거 재미없어.

-하하하……. 많이 해 보셔서 질리셨군요. 그래도 황녀님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쪽을 보고 이름이라도 한번 말씀해 주세요.

영상에는 나오지 않는 사람이 부탁하듯이 말하자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던 여자애가 마침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고민하듯이 입술을 우물거리던 어린 소녀가 결국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에휴, 한숨을 깊게 내쉰 뒤 앞을 보았다.

이어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녀의 얼굴에 꿀과 크림을 바른 것 같은 사랑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안녕, 난 아르벨라야! 지난주에 생일이 지나서 나이는 이제 다섯 살. 오늘은 새로운 친구랑 같이 왔어. 만나서 반가워.

“새삼스럽지만 이 ‘천사 황녀님의 미소’ 컬렉션은 몇 번을 봐도 정말 사랑스러우시네요.”

아직 침실에 남아 있던 마리나도 귀여운 소녀가 얼룩말 인형의 앞발을 붙잡고 흔드는 영상을 같이 보며 감탄했다.

그렇다. 저건 어릴 때의 내 모습이었다.

“역시 다른 황녀, 황자님들의 컬렉션을 통틀어서 최고 판매량을 자랑했을 법해요.”

심지어 내 모습을 담은 마력석에는 컬렉션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혈통과 미모와 마력 양 모두 최고인 황녀님으로 인기가 많았고, 황실에서는 그것을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그래서 내가 아기일 때부터 성장 과정을 마력석에 담아 제국민들에게 시범적으로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초대박이었다.

내가 카뮬리타 제국민들 모두의 황녀님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으면서 황실의 인지도도 쑥쑥 올라갔고, 동시에 영상 마력석 장사로 돈을 쓸어 담으면서 국고는 넘칠 지경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황녀, 황자들의 성장 모습을 담아 마력석을 푸는 게 유행이 되고 더 나아가 요즘에는 아예 하나의 문화로까지 자리를 잡았다.

특히 갓난아기일 때부터 내가 밥을 먹고 손을 씻고 또 동요를 부르거나 퍼즐 맞추기 등등의 놀이를 하는 장면을 담은 마력석은 육아의 생활 교본 같은 것으로도 쓰였다.

자, 그러니 이 카뮬리타 제국에서 내 위치와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이제 알겠지?

그런데 이런 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니, 이게 말이나 돼?

마리나는 내가 또 자아도취에 빠져서 과거의 영상을 돌려보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아르벨라 황녀님, 오늘은 물방울 띄우기 마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 주시겠어요?

-으음, 그건 말이죠. 이렇게 마력을 조금 떼서 물방울을 감싼 다음 위로 들어 올리면 돼요! 참 쉽죠?

기묘하게 불안하던 마음이 영상을 보는 동안 다시 안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역시 내가 제일 대단하잖아!

이런 내가 그딴 엉터리 책 같은 최후를 맞을 리가 없어.

마침 마력석의 송출이 끝났다.

“다른 마력석을 작동시킬까요? 어떤 걸로 보실래요? 전 ‘황녀님의 위험한 놀이 시간’이나 ‘여름 별궁 휴가’ 컬렉션도 좋은데.”

“그래, 아무거나 틀어 봐.”

아직 남아 있는 마력석은 많았고, 내 기분이 완전히 회복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듯했다.

그래서 나는 마리나와 함께 다시 영상 마력석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설령 책에서처럼 금단술의 부작용으로 괴물이 되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내 앞에는 반짝이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마법사의 열병.

예전부터 나를 갉아먹고 있는 이 빌어먹을 불치병 때문에.

“그러니 어차피 이 손에 무엇 하나 쥐지 못한 채 죽어야 한다면…….”

“원래 내 것이어야 했던 이 세상도, 차라리 아무도 탐낼 수 없게 전부 다 망가뜨리고 가리라.”

악몽에서 보았던 여인의 독기 어린 목소리가 마력석의 영상 위로 겹쳐졌다.

이상하게도 지금은 영상 속의 어린 소녀보다, 환영이나 마찬가지인 꿈속의 여자가 나와 더 가깝게 느껴졌다.

3. 괴물 황녀님과 민들레 황녀님

블로비스 숲에서 발견한 인간 사냥의 희생양 아이들은 구조되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꿈속의 책에서는 원래 4명의 아이 중 1명이 죽었다고 되어 있었는데, 현실에서는 발견이 빨라 모두 무사했다.

그 사실만큼은 나한테도 다행스러웠다.

적어도 꿈에서 본 미래가 전부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하게 되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숲에서 본 소년이 나한테 ‘토끼풀 황녀님’이라는 소리를 했었지?’

황도를 걷다가 문득 생각난 것에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그 영상 마력석을 보고 말하는 건가? 어릴 때 내가 어머니에게 토끼풀 화관을 만들어 주는…….’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 생각을 했더니 또 기분이 살짝 언짢아지려고 했다.

그래서 고개를 가볍게 저어 머릿속의 생각을 털어 버리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 * *

“벨라 언니! 어서 와!”

클로에의 티 파티는 황궁에 있는 18개의 화원 중 가장 큰 분수대가 세워진 곳에서 열렸다.

인어 모양 조각상이 분수대를 꾸미고 있어, 우리끼리는 인어 정원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클로에, 좋은 오후네. 오늘 초대해 줘서 고맙구나.”

“나야말로 와 줘서 너무 고마워! 벨라 언니가 와 줘서 너무 좋아!”

유디트를 핍박할 때는 사나웠지만 지금 나를 보며 웃는 클로에의 얼굴은 해맑기 그지없었다.

“어서 와요, 1황녀.”

“안녕하세요, 2황비님. 좋은 오후입니다.”

클로에의 모친인 2황비 카타리나도 딸의 옆에 같이 서 있었다. 그녀와도 인사를 나눴다.

카타리나는 물결처럼 구불거리는 짙푸른 머리칼과 연녹색 눈을 가진 앙칼진 인상의 미녀였다.

클로에와는 같은 틀에 찍어 낸 과자처럼 굉장히 닮은 인상이었다.

“그래요. 오랜만에 1황녀를 보니 더 반갑기도 하지. 어째서인지 한동안 1황녀궁 안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고 들어, 오늘 클로에의 티 파티에 불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클로에와 달리 그녀는 나를 싫어한다는 점이 둘의 차이점이었다.

지금처럼 카타리나가 가늘게 웃음 지은 눈으로 나를 관찰하듯이 보면서 은근히 떠보는 것도 익숙했다.

카타리나에게는 2황녀 클로에 말고도 자식이 한 명 더 있었는데, 나와 동갑인 1황자 라미엘이었다.

카타리나는 나를 그의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블로비스 숲 사건에 내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그런지, 오늘따라 카타리나의 눈빛이 따가웠다.

‘그래도 웨이스턴 남작을 재빨리 끊어내서 2황비나 그녀의 외척인 그레이엄 후작가에 별다른 피해는 없다고 들었는데.’

나는 짐짓 순진한 척 카타리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제가 학구열이 남다르다 보니 가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법 수식을 연구하곤 한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마마마께 꾸중을 들은 참이에요.”

“맞아요, 어머니! 벨라 언니는 너무 똑똑하고 성실하기까지 해! 조금은 여유 부리면서 나랑 더 놀아 주면 좋을 텐데.”

클로에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나를 거들어 내 칭찬을 했다.

카타리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우리 라미엘도 어제 밤새워 마법 수식을 공부했다고 하던데.”

“어, 아닌데? 오늘 아침에 오빠 봤는데 14시간이나 자서 얼굴이 빵빵하게 부었다고 얼음 마사지하고 난리 났던데?”

“얘는 무슨……. 그건 알레르기 때문에 부은 거야.”

“그리고 어머니. 오빠가 마법 수식이랑 담쌓은 거 모르세요? 바로 이틀 전에 선생님이 더 못 해 먹겠다고 관뒀잖아요.”

“크흠, 오늘 새 선생님 왔어!”

카타리나가 눈치 없는 딸을 째려봤으나 클로에는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이 ‘아닌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보다 굳은 미소를 입가에 그린 카타리나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럼 난 가 볼 테니 즐거운 시간 보내요, 1황녀. 클로에…… 너도 재미있게 놀고, 저녁에 보자.”

왠지 저녁에 보자는 그녀의 말이 음산하게 들렸지만 클로에는 그저 신이 나서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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