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2. 내가 악녀인데 어쩌라고?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확인해 본다.’
질척이는 건 진짜 내 취향이 아니지만 원래 사람은 가끔 안 하던 짓도 하고 살아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마리나, 숲에서 무슨 소리 안 들려?”
“몰라요.”
블로비스 숲의 사냥터에 도착해 지나가는 말로 마리나에게 질문을 던지자, 그녀가 불퉁하게 답했다.
이럴 때 보면 진짜 무엄한 시녀라니까.
“너 별것도 아닌 일로 자꾸 그럴 거야?”
“이게 왜 별일이 아닌가요? 어떻게 이 예쁜 머리카락을, 황녀님은 이렇게……!”
마리나는 어깨에 닿을까 말까 한 정도로 짧아진 내 머리카락을 보면서 또 흥분해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반응이 많이 양호해진 거다.
어제는 진짜 1황녀궁 안에 마리나의 곡소리가 하루 종일 울렸었다.
“황녀님도 참 너무하셔요. 아무리 머리카락에 지저분한 게 묻어서 기분이 언짢으셔도 그렇지, 이 고운 머리카락을 제게 말씀 한 번 안 주시고 이렇게 짧게 자르시다니……. 이걸 아까워서 어쩌나요.”
앗, 또 울려고 한다.
어제도 내 행태를 보고 비명을 지른 데 이어, 하루가 넘어가도록 계속 이렇게 훌쩍이는 걸 보니 정말 속상한 모양이다.
“1황녀님?! 아, 아니,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하지만 눈앞에 다른 사람이 나타난 순간, 마리나는 다시 눈에 힘을 세게 줘서 냉정한 시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사냥터의 주인인 웨이스턴 남작이 콧수염을 휘날리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 갑작스러운 방문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나 보다.
하긴, 소식도 없이 황족이 대뜸 찾아왔으니 기절하게 놀라긴 했겠지. 물론 이렇게 사색이 된 이유는 다른 것일 테지만.
나도 근엄한 황녀님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가오는 콧수염 남자를 보았다.
“아, 그대가 숲의 주인인 웨이스턴 남작?”
“예, 예에! 그렇습니다, 1황녀님!”
나는 손에 멋으로 들고 있던 금장 지팡이를 느슨히 까딱거리며 웃었다.
“반가워. 그런데 내가 오면 안 될 곳을 왔나? 표정이 왜 그렇게 떨떠름해? 사람 서운하게.”
“무, 물론 1황녀님께서 이렇게 방문해 주신 것은 엄청난 영광이지요!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모습과 조금 다르셔서…… 그래서 생소한 마음에 무례한 시선을 보낸 것 같습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빈말하느라 애쓴다. 하다 하다 핑계를 댈 게 없어서 이젠 남이 머리카락 자른 것까지 핑계로 대나?
나는 웨이스턴 남작을 지나쳐 숲을 향해 걸어갔다.
웨이스턴 남작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로 서둘러 나를 따라왔다.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지?”
“아, 아닙니다.”
“올해 여름 사냥제가 얼마 안 남았잖아. 듣자 하니 이번에는 사냥 대회 장소가 이 플로리스 숲으로 정해졌다며? 그래서 지나가다가 궁금해 한번 들러 봤지.”
“여긴…… 플로리스 숲이 아니라 블로비스 숲입니다, 1황녀님.”
“아, 진짜? 여기가 플로리스 숲 아니야?”
몰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이 근방에 있는 숲 이름이 다 비슷해서 내가 헷갈렸나 보네. 그런데…… 마침 지금 사냥 모임이라도 있었나 봐?”
때마침 숲에서 들려온 사냥개 짖는 소리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웨이스턴 남작이 이제는 눈에 띌 정도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지극히 불안해 보이는 그 모습에 나를 따라온 수행원들도 이상함을 느낀 듯했다.
날카로운 분위기 속에서 내가 먼저 산책이라도 가듯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사냥에 취미가 있는데 이왕 온 김에 잠깐 둘러봐도 되겠지?”
“지, 지금은 위험합니다! 이미 사냥이 시작되어서 숲에 들어가면 다치실 수도…….”
“웨이스턴 남작, 그거 지금 나 웃으라고 한 소리야?”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듯이 아하하 건조하게 웃으면서 감히 내 앞을 막아선 웨이스턴 남작을 싸늘히 응시했다.
“내가 카뮬리타 최고 마법사라는 이름을 그냥 달고 있는 게 아닌데, 누가 감히 나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거지?”
보란 듯이 마력을 움직여서 강력한 보호 마법진을 치자 내 짧은 머리칼이 금빛 궤적을 남기며 흩날렸다.
나는 사색이 된 콧수염 남자를 두고 숲으로 들어갔다.
* * *
‘아, 불길하다, 불길해.’
숲에 들어서자 웨이스턴 남작과 다른 의미로 나도 한숨이 푹푹 나올 것 같았다.
어쩌면 그동안 꿈에서 본 책의 내용이 지나치게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던 이유가, 황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너무 일상적인 내용이라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런 고만고만한 거 말고, 황궁 바깥에서 일어난 큰 사건을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이 숲에서 귀족들이 어린 소년, 소녀들을 사냥감으로 삼아 잔인한 놀이를 하고 있었다고 했지.’
이 천재 황녀님은 기억력도 비상해서, 얼마 전에 읽은 책의 내용 정도는 간단히 떠올릴 수 있었다.
블로비스 숲에서 벌어진 끔찍한 인간 사냥은 온 카뮬리타에 대서특필되었다.
6월 마지막 날, 웨이스턴 남작이 소유한 블로비스 숲을 불시에 기습한 황실 기사단에 의해 불법 인신매매를 음지에서 일삼던 귀족들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의 불똥은 유디트에게도 튀었다.
블로비스 숲의 소유주인 웨이스턴 남작은 2황비 카타리나 쪽 사람이었는데, 유디트를 가장 많이 괴롭히는 2황녀 클로에가 바로 카타리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어머니를 따라 클로에의 심술도 덩달아 늘어, 화풀이 삼아 유디트를 더 심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디트는 매우 우울했다…….
그런데 솔직히 아까 웨이스턴 남작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건 텄구나 싶었다.
그냥 딱 표정만 봐도 ‘나 지금 여기에 엄청나게 뒤가 구린 걸 숨기고 있소!’ 하고 사방팔방으로 외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탐지 마법에도 계속 수상한 게 걸리고 있었다.
컹컹!
점점 가까워지는 사냥개의 소리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부스럭!
다음 순간, 갑자기 눈앞에 웬 하얗고 까만 형체가 뒤엉켜 튀어나왔다.
나뭇잎인지 풀잎인지 모를 것들을 잔뜩 묻힌 소년은 검은 사냥개와 엎치락뒤치락하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멈칫한 사이, 결판은 순식간에 났다.
소년의 팔에 목이 졸린 사냥개가 기절한 듯이 축 늘어졌다.
아니, 움직임을 멈춘 짐승의 모습을 확인하니 그건 사냥개가 아니라 늑대였다.
“하, 이게 뭐야.”
내 입에서 나온 소리를 듣고 그제야 내 존재를 눈치챘는지, 소년이 경계 어린 몸짓으로 벌떡 일어났다.
무언가에 베이고 짐승한테 물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몸에서 피가 물씬 배어 나오고 있었다.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은회색 눈동자가 나무 그림자 밑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꼭 눈빛만으로 사람의 정수리를 쪼개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내게 고정되어 있던 소년의 눈이 꼭 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본 것처럼 크게 떠졌다.
“……토끼풀 황녀님?”
별안간 그가 나를 향해 바보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내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전에, 옆에서 늑대 한 마리가 또 튀어나와 소년을 덮쳤다.
하지만 그것은 곧 내 마법에 튕겨 깨갱 소리를 내며 덤불 위로 떨어졌다.
“저쪽이다……!”
“내가 먼저 찾았…… 엇?”
눈치 없이 나무들 사이에서 나타난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뭐, 뭐야?”
“헉, 1황녀님?!”
카뮬리타 사람 중에 내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어서, 그들은 금방 내 정체를 알아차리고 경악했다.
“아니야, 머리가 짧잖아!”
“그럼 1황녀님이 아니라고?”
그런데 의외로 아까 웨이스턴 남작이 내 머리카락을 운운한 게 단순한 핑계는 아니었던 걸까?
평소에 반짝이는 긴 금발이 내 상징이나 마찬가지였어서 그런지, 누군가 한 사람이 내 단발을 지적하자 다른 이들도 혼란스러워하며 우왕좌왕했다.
나는 나대로 두 손을 들어 머리를 싸매고 싶어졌다.
‘……왜 진짜 튀어나와!’
꿈속의 책에 나와 있던 대로 진짜 인간 사냥이었다.
예상했던 광경이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오히려 편두통이 도져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는 것 같았다.
“야, 너희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데?”
너무 짜증이 나서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이를 갈며 내 뒤에 있던 수행원들에게 명령했다.
“황실 기사단의 오귀스트 경을 당장 불러와.”
분노를 담은 내 마력이 폭발하듯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