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4화 (20/203)

4화

‘아, 그냥 방에서 쉴 걸 괜히 왔어.’

나는 조금 후회했다.

갑자기 이상한 꿈을 꾼 일로 어울리지도 않는 감수성이 생겨난 건지, 침대에서 시름시름 앓는 동안 공연히 마음이 약해져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처럼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불안한 마음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아직 내 속에 남아 있는 혼란스러움이 조금은 가실 것 같았다.

그래서 황후궁에 온 것인데 역시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그때, 뒤에서 또랑또랑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입술을 비틀었다.

저 목소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밀리엄의 것이었다.

조금 전 후원의 입구를 빠져나오기 전에 그 앞에 서 있던 나를 봤나 보다.

“황자님, 천천히 뛰셔요.”

어린애의 보폭 작은 걸음인 만큼 내가 무시하고 서둘러 걸으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뒤이어 밀리엄의 유모인 맥노아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그냥 생각으로만 그쳤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벨라 누나!”

그러자 환한 얼굴로 달려오는 밀리엄이 시야에 비쳤다.

뒤뚱거리며 위태롭게 내 앞까지 뛰어온 그가 곧 내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후원에서 화관을 만들며 흙이라도 만졌던 건지, 붙잡힌 치마가 금세 흙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더러워진 치맛자락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밀리엄.”

하지만 짜증스러운 마음을 능숙하게 숨기며 밀리엄을 향해 웃어 보였다.

“1황녀님을 뵙습니다.”

“3황자님을 뵙습니다.”

밀리엄의 뒤를 따른 그의 시녀들과 내 시녀들이 각각 인사를 건넸다.

“누나, 좀 전에 후원에 왔었지?”

금색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밀리엄은 생김새만큼은 아기 천사 같았다.

‘당연하지. 눈 색깔만 빼고는 외모가 나하고 상당히 많이 닮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밀리엄의 외모만큼은 전부터 후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왜 나한테 인사 안 하고 그냥 갔어?”

하지만 꼭 자신이 마땅히 인사를 받아야 할 상전이라도 된 것처럼 밀리엄이 내게 따져 묻는 순간, 모처럼의 인내심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나는 본래 어린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는 특히나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한결 성의가 없어졌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오늘은 그만 돌아가서 쉬려던 중이었어.”

“정말? 내가 ‘호’ 해 줄까? 내가 ‘호오’ 해 주면 다 낫는다고 어마마마가 그랬는데.”

어머나, 이게 무슨 멍청한 소리람.

천사같이 예쁜 얼굴에 잘난 척하는 듯한 표정이 어렸다. 꼬맹이 주제에 거들먹거리는 말투가 제법 잘 어울렸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꼭 내 어릴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호’ 해 줄게! 원래는 아무한테나 안 해 주는 거지만 벨라 누나는 예쁘니까 특별히!”

예쁘다는 말 자체만 놓고 보면 어린애의 칭찬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특유의 거만한 말투나 표정이 내 신경을 긁었다.

우리 어머니의 교육관은 어쩌면 이리도 일관적일까.

“자, 머리를 숙여 봐, 빨리!”

그래도 이런 어린애를 상대로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밀리엄이 지저분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순간 내 인내심은 또 한 차례 시험받고 말았다.

어머니와 유모가 하도 오냐오냐하며 키워서 그런지, 밀리엄은 꼬마 폭군 같은 경향이 있었다.

하기야 이제 고작 다섯 살이니 충분히 그럴 만한 나이이기도 하지만.

잠깐 방심한 순간, 동족 혐오 같은 것이 슬금슬금 내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랐다.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속마음을 내비쳤나 보다. 눈이 마주친 순간, 밀리엄이 움찔 몸을 떨며 입을 뻐끔거렸다.

나는 그것을 보고 다시금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밀리엄.”

부드럽게 꾸며낸 목소리를 흘려보내며 웃자 밀리엄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헤 입을 벌렸다.

“네가 이렇게 걱정해 주니 벌써 다 나은 것 같구나. 누나한테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으, 으응!”

“하지만 머리카락을 그렇게 세게 잡아당기는 건 예의 없는 짓이야. 게다가 아프기도 하고. 그러니 그만 놓아주지 않을래?”

그러자 밀리엄이 반사적으로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물론 그 직후에 나한테 꾸중 비슷한 것을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끈한 듯이 입을 벌리기는 했지만.

“누나가 내 말을 안 들어서 그렇잖아! 빨리 머리를 안 숙이니까…….”

“그래, 말 잘 듣네. 착하다.”

나는 그런 밀리엄의 머리를 개 쓰다듬듯이 대충 휘적여 주었다.

그런 내 목소리와 손짓에는 영혼이 없었지만 밀리엄은 아이답게 단순한 모습을 보이며 언제 눈을 치떴냐는 듯이 헤헤 웃었다.

“어머니는 아직 후원에 계시니?”

“응.”

“그래,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

나는 웃으며 작별 인사를 고한 뒤 지체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그게 인사였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밀리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에 걸음을 재게 놀리자 금방 거리가 벌어졌다.

역시 어린애는 귀찮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마리나, 손수건.”

“네.”

모퉁이를 꺾어 돌자마자, 나는 마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마리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조금 전에 밀리엄이 손댔던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묻어 나오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더러웠다.

나는 밀리엄에게 닿았던 손까지 닦은 뒤 들고 있던 손수건을 마리나에게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돌아가자마자 다시 목욕 준비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손수건은 버려.”

“예.”

하나뿐인 동복동생에게 매몰차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텐데, 마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뒤에 있던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주제넘게 입을 놀릴 것들은 뽑지도 않았으니 당연했다.

나는 싸늘히 식은 기분으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밀리엄은 분명 막 후원을 떠나던 나를 보고 뒤쫓아 왔다. 그때 그의 곁에는 어머니가 함께 있었다.

그러니 밀리엄이 나를 발견하고 쫓아오는 것을 어머니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어머니는 밀리엄과 함께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나 명확했다.

‘……새삼스럽게 상처받다니, 웃기지도 않지.’

분명 5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와 나는 세상에 둘도 없이 사이좋은 모녀였다.

어머니는 하나뿐인 딸인 나를 무척이나 귀애했고, 그 한결같은 애정 앞에서 나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더 이상 내게 관심을 두지 않게 된 것은, 역시 내가 ‘마법사의 열병’을 선고받은 이후부터였다.

남들은 모르는 내 치명적인 약점. 꿈에서 본 미래의 내가 금단술에 손을 대게 된 이유.

나는 주먹을 아프도록 세게 움켜쥔 채 황후궁을 빠져나갔다.

* * *

전에 말했듯이 지금 내가 빈번하게 앓고 있는 열병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체내의 강대한 마력을 감당하지 못해, 마력을 담아 두는 심장의 코어에 균열이 생기는 증상으로, 현재로서는 치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수시로 몸 안을 전부 불태우는 것만 같은 극심한 고열에 시달려야만 했고, 또 가끔은 가슴을 송곳으로 파는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발작하기도 했다.

그렇게 치료법 없는 열병을 앓고 또 앓다가, 언젠가는 깨진 독 밑으로 물이 새듯이 마력을 전부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내가 죽는 날이 되겠지.’

세상에 마력 없이 살 수 있는 생명체는 없으니.

물론 워낙에 강대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당장 오늘내일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내 마력의 유효 기간이 언제까지인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것이 가히 완벽하던 내 인생의 유일하고도 치명적인 비극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황실 마법사들과 의원들이 내게 ‘마법사의 열병’을 선고한 이후 한 시도 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둘째를 만들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바로 밀리엄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향했던 애정을 둘째인 밀리엄에게 고스란히 쏟아붓기 시작했다.

다행히 밀리엄은 나만큼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쓸 만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니 더 이상 불량품인 딸은 필요하지 않나 보지.’

그 사실을 지금까지 나만 외면하고 있었다.

“마리나……. 그동안 내가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살았나 봐.”

인생에 회한을 느끼며 중얼거리자 테이블 위의 찻잔을 치우던 마리나가 단호하게 답했다.

“황녀님, 순진한 사람을 모욕하지 마세요.”

스리슬쩍 고개를 들던 우울감이 쏙 들어갔다.

야……. 너 황녀님 앞에서 너무 냉정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참나, 됐어. 나 가위나 줘.”

“가위요? 어디에 사용하시려고요?”

내 갑작스러운 말에 마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좀 자르고 싶은 게 있어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마리나는 내 말에 두 번 질문하지 않고 가위를 가져다줬다.

물론 여전한 의문과 약간의 불안감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그녀가 준 것을 들고 거울 앞에 섰다.

‘멍청하게. 지금까지 거울을 볼 때마다 뭘 그렇게 뿌듯해했던 걸까?’

허리까지 곱게 길러 찰랑찰랑한 긴 금빛 머리와 맑은 여름 하늘을 닮은 푸른 눈이 그나마 차가운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아직 어린 소녀의 사랑스러움을 강조한 드레스는 레이스와 리본으로 꾸며져 거울에 비친 사람을 예쁜 인형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황녀로 살며 보물처럼 떠받들어진 몸은 손톱 하나까지 반짝반짝하니 고왔다.

이미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거울 속의 소녀는 아까 본 내 어머니와 놀랍도록 흡사했다.

초상화로 본 내 어머니의 어렸을 때 모습과 비교하면 더욱이 비슷한 외모였고 말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어머니와 닮았단 소리를 질릴 정도로 많이 들어 왔으니까.

특히 명주실처럼 가늘고 긴 금빛 머리칼은 가끔 멀리서 뒷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와 나를 착각하는 사람마저 있게 만들었다.

나는 어머니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그 점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황족의 고귀한 피를 그 무엇보다도 높이 숭상하는 내가, 황제를 닮지 못한 이 외모에 조금의 불만도 느끼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내 심경의 변화 때문인지 오늘따라 괜히 낯설게 느껴지는 거울 속의 소녀가 피식 웃었다.

미래의 악녀이고 자시고 간에, 사실 지금의 나는 아직 사랑이 고픈 어린애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그 사람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제는 두 번 다시 나를 사랑해 주지 않겠구나.’

마리나가 가져다준 가위를 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내 자랑이었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움켜쥐었다.

“화, 황녀님?”

마리나가 당황스럽게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내가 이미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싹둑!

곧 비단결 같은 금빛 머리칼이 무참히 잘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꺄아아아아아악!”

1황녀궁을 뒤덮은 마리나의 비명이 그리 반갑지 않은 내 인생의 전환점을 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