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2화 (18/203)

2화

1. 미래의 괴물 황녀님

악몽을 꾸었다.

배경은 죽은 새들의 시체와 빈 새장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유리 온실.

별빛으로 엮은 듯한 긴 금발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채 주저앉은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다.

까악, 까악!

평생 험한 일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을 것 같은 하얗고 고운 손이 검은 새의 깃털을 움켜쥐었다.

곧이어 날카로운 새의 울음소리가 온실 안에 퍼졌다.

“유디트……. 내가 갖지 못하는 건, 너도 갖지 못해.”

핏물이 밴 붉은 입술에서 증오와 서러움이 뒤섞인 음성이 저주처럼 흘러나왔다.

“그러니 어차피 이 손에 무엇 하나 쥐지 못한 채 죽어야 한다면…….”

여인은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새를 보며 광기가 깃든 웃음을 아름다운 얼굴에 그렸다.

“원래 내 것이어야 했던 이 세상도, 차라리 아무도 탐낼 수 없게 전부 다 망가뜨리고 가리라.”

턱 밑으로 고인 눈물방울에 붉은 낙조가 내려앉아 꼭 피눈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흩날리는 깃털 사이에서 정면으로 확인한 여자의 얼굴은…….

나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

* * *

“헉!”

나는 황녀답지 않은 괴상한 숨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황녀님, 일어나셨어요?”

미어캣처럼 목을 빼고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익숙한 침실 풍경을 확인한 뒤 안심했다.

아, 뭐야? 꿈이었어? 그런데 뭐 이렇게 생생해, 소름 끼치게.

요즘 들어 금발 여자가 온실에서 새를 괴롭히는 악몽을 자주 꾸는데, 잠깐 선잠이 든 사이에 또 같은 장면을 보았다.

“마리나.”

“예, 황녀님. 시원한 꿀물을 드릴까요?”

이불에 폭 파묻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부르자 마리나가 내 옆으로 후다닥 다가왔다.

이런 상황도 한두 해 겪은 것이 아니다 보니 이제는 척 하면 척이었다.

나는 마리나가 준 꿀물을 마시며 골골거렸다.

냉기 마법이 유지되고 있는 이불 속에 있었지만 불덩이 같은 몸은 식을 줄을 몰랐다.

“황녀님……. 이제 조금만 더 참으시면 금방 나을 거예요.”

기운 없는 나를 보고 마리나가 안타깝게 위로했다.

여동생 중 하나인 클로에와 만나 다과를 든 지도 벌써 열흘가량이 지났다.

그 직전에도 열병과 화병이 겹쳐 한바탕 크게 앓았었는데 벌써 또 이렇게 드러눕다니.

아, 죽겠다. 이놈의 쓸모없는 몸뚱이.

하지만 이번에 내가 이렇게 아픈 것은 모두 내 아버지인 황제 때문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저께 또 그의 명으로 무리해서 가뭄이 온 핀른 지방에 비를 내리는 마법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황께서는 내가 죽기 전에 골수까지 다 빼먹을 속셈이신 거야.”

“그런 말씀 마세요. 황녀님께서 카뮬리타 최고의 마법사이시니 그런 거지요.”

내 신랄한 말에 이제는 마리나도 익숙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고작 열네 살밖에 안 된 딸을 이렇게 혹사시키는 황제라니. 아버지로서는 확실히 자격 미달이다.

‘물론 내가 우리나라 최고의 마법사인 건 사실이지만 말이지.’

나는 약간 뻐기듯이 내 특출함을 되새겼지만 막상 지금 내가 처한 신세를 생각하자 다시금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강한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 지금처럼 내 강대한 마력 때문에 종종 앓아누워야 할 때가 있었다.

“그 애는 어떻게 지내?”

“냉궁의 황녀님 말씀이지요?”

마리나가 말하는 냉궁의 황녀는 바로 얼마 전에 본 유디트였다.

클로에와 함께 있던 그 작은 아이.

4황녀 유디트는 노예 소생이었지만 검은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가 초대 황제의 용모를 쏙 빼닮았다 하여 부왕에게 딸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라, 황궁 내에서도 박대받으며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도 없이 냉궁이라 불리는 곳에 거의 혼자 살고 있었다.

“평소와 같아요. 황족으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공부할 때를 제외하고는 혼자 조용히 책을 읽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인 것 같더군요.”

마리나는 내가 갑자기 유디트에게 관심을 갖자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전에는 노예 출신의 천한 것과 상대하기도 싫다고 아예 그 아이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었으니까.

그런 내가 달라진 건 얼마 전 내 고질병 때문에 신열을 앓았을 때부터였다.

그때 나는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일을 겪었다.

뇌가 전부 녹아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극심한 고열에 시달리던 밤.

잠들었는지 기절한 건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신비로운 공간에 서 있었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보랏빛 공간에는 기이하게도 셀 수 없이 많은 새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그 안에 든 반짝이는 무언가가 꼭 밤하늘에 떠 있는 찬란한 별 같았다.

나는 그 신비로운 광경에 압도되었다.

찬연하게 반짝이는 새장이 꼭 열어 달라는 듯이 나를 향해 빛을 깜빡였다.

그래서 열었다. 꼭 홀린 것처럼 그중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새장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자 새장 속에서 터져 나온 환한 빛이 황금색 표지를 가진 책으로 변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타인의 삶이 글귀가 되어 내 머릿속을 뜬금없이 비집고 들어왔다.

열두 살의 유디트 카뮬리타는 자신이 평생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타인이 아니었다.

반쪽짜리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노예 소생 황녀.

황실의 수치. 그동안 말조차 한번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는, 내 이복 여동생…….

새장 밖으로 나와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유디트 카뮬리타를 주인공으로 한 책이었다.

황당하게도, 거기에는 그럴듯한 제목까지 붙어 있었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

내용은 꼭 클로에가 곧잘 읽곤 하던 유치한 연애 소설 같았다.

여주인공인 유디트의 성장과 로맨스가 주를 이루는 책 내용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지어낸 이야기라도 해도, 누가 자신과 피를 나눈 사람의 연애사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싶겠냐고.

만약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건 변태겠지!

아무튼, 쓸데없는 곁가지를 다 쳐내자 책의 줄거리는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노예 소생의 황녀로 냉궁에 살며 박대받던 여주인공 유디트가 역경과 시련을 이겨 내고 사랑과 권력을 모두 움켜쥔다.

그 역경과 시련 속에는 바로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복형제들의 괴롭힘이 속해 있었다.

기묘한 현실 반영에 놀란 것도 잠시. 이어지는 내용에 기가 막혔다.

책에서 특히 유디트의 꽃길에 방해가 된 것이 바로 나, 1황녀 아르벨라라고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만한 1황녀 아르벨라는 누구보다 고매한 황족 중의 황족으로, 노예에게서 태어난 유디트를 아예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잘것없던 유디트가 중간에 마력 각성을 해 단숨에 다른 황자와 황녀들을 뛰어넘는 가장 뛰어난 마법사가 되자, 그 후부터 그녀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지 못해 안달했다.

당혹감을 느낀 것도 잠시뿐, 서서히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다.

‘뭔데? 뭔데 이거?’

황족 모독도 정도가 있지, 감히 이딴 허접한 책에 나를 등장시켜?

게다가 평소에 천하게 여겨왔던 유디트가 나중에 나를 능가하는 마법사가 되어 내 걸 다 빼앗아갈 거라고?

내가 태어난 카뮬리타는 고대 마도 왕국의 대를 이은 마법 강국이었고, 그중에서도 황족의 마력은 특히 강력했다.

그리고 그 대단한 황족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강대한 마력을 타고난 것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감히 이런 식으로 나를 우롱하는 책을 쓴단 말인가!

급기야 책의 후반부에서 내가 유디트에게 패배한 것으로도 모자라 비참한 죽음을 맞는 내용까지 나오자, 나는 혈압이 올라서 그만 뒷목을 잡고 말았다.

이후 격노해서 손에 들린 책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생각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이후 열이 내리자마자 무언가에 홀린 듯이 궁 밖으로 나갔을 때 클로에와 유디트를 만난 것이다.

‘그딴 엉터리 책.’

당연히 그딴 개꿈은 코웃음을 치면서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 슬라임 똥 같은 책의 내용대로라면 지금까지 내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그 작은 아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고, 나는 그런 그녀를 괴롭히다가 파멸할 악녀였다.

하지만 그게 말이 되나?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한 번만 살짝 확인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몇 가지 확인을 거친 뒤 나는 오히려 극심한 정서 불안에 시달렸다.

못된 시녀들이 유디트를 무시해서 분수에 빠트려 골탕 먹인 사건도, 다른 황자와 황녀들이 유디트의 머리에 끈적이는 풀을 부어 괴롭힌 일도 모두 책에 적힌 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지난 열흘 동안의 시간을 떠올리자 갑자기 또 열이 올라서 마리나가 준 얼음을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아무튼 마리나, 네가 가끔 가서 그 애를 살펴보도록 해.”

“네! 그렇게 할게요.”

마리나는 내 명령이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이 군말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 곧 그녀에게서 머뭇거림이 담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황녀님……. 얼마 전부터 갑자기 좀 변하신 것 같아요.”

마리나의 예리한 말에 속이 뜨끔거렸다.

아닌 척해도 내가 꿈에서 본 그 기묘한 책의 내용을 은근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양 툭 던지듯이 대꾸했다.

“죽을 때가 돼서 그런가 봐.”

“그런 말씀 마시라니까요.”

갑자기 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숨 자야겠어. 그만 나가 봐.”

그래서 나는 마리나를 방에서 내보내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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