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 괴물 황녀님 [S공금]
1화
Prologue. 파멸 예정의 괴물 황녀님
오랜만에 본 내 이복 여동생은 오늘도 열심히 파멸 엔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지?”
“벨라 언니!”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있던 2황녀 클로에가 물살 같은 푸른 머리칼을 휘날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곁에 줄줄이 서 있던 시녀들이 나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1황녀님을 뵙습니다. 카뮬리타의 축복과 가호가 함께 하시어 제국의 광영을…….”
“아, 인사는 됐어.”
앞으로 한참이나 이어질 것이 뻔한 인사말에 벌써부터 질려서 그냥 도중에 말을 끊었다.
모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귀족들이었지만 그들은 내 말 한마디에 불평 없이 곧장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제 겨우 열네 살짜리 어린 여자애일 뿐이었으나 황족의 이름이 갖는 힘은 이렇게도 컸다.
“천한 것이 눈을 더럽혀서 벌을 주려 하고 있었어.”
클로에는 꼭 쥐를 궁지에 몬 고양이처럼 득의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클로에의 앞에 서 있는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그 꿈’을 꾸자마자 가장 처음 목격한 장면이 이런 것이라니. 어떤 의미로는 이것도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1황녀님을 뵙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나를 향해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 아이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았다.
‘분명 올해로 열두 살이었던가.’
흑단 같은 긴 검은 머리카락과 호박 보석처럼 짙은 금색 눈동자.
치맛자락을 꼭 움켜쥔 채 웅크린 몸이 굉장히 가냘파 보였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이 여자아이는 우리들의 부왕께서 한낱 노예에게서 본 사생아였다.
그럼에도 운 좋게 황족의 특성을 가장 완벽하게 타고나 클로에를 포함한 다른 황자와 황녀들이 몹시도 싫어하는 아이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단순히 눈에 띄는 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벌을 주려고 하다니 확실히 과한 처사였다.
하지만 클로에보다도 어린아이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있을 뿐, 한마디 항변조차 하지 않았다.
어쩌면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도 별로 안 좋은데 더러운 게 눈앞에서 얼쩡거리잖아. 감히 황족들과 같은 길을 사용하다니, 제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아니야?”
클로에가 한껏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이 반쪽짜리 황녀의 이름은 유디트 카뮬리타.
출생이 천하기에 미들 네임은 없었다.
‘정해진 운명대로라면 나도 곧 클로에처럼 이 아이를 괴롭히게 되었겠지.’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부황께서 인정하신 우리의 동생이니 황도를 사용할 자격은 충분한 것 같은데.”
“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유디트를 두둔하는 듯한 내 말을 듣고 클로에가 기함했다. 주위에 있던 수행인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무시하며 나는 클로에를 돌아보곤 천연덕스럽게 빙긋 웃었다.
“그보다 클로에, 네 기분이 아침부터 좋지 않았다니 걱정이네. 내가 한동안 바빠서 이렇게 만난 건 오랜만이잖아. 혹시 다른 일정이 없다면 내 방에 가서 함께 다과를 들며 이야기 나누지 않겠어?”
나는 황족들 사이에서 그래도 꽤 인망이 있어 이런 식으로 먼저 권유하면 누구도 내 청을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그것은 클로에도 마찬가지라, 그녀는 잠깐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락했다.
“좋아. 오늘 티타임은 1황녀궁에서 보낼게.”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 기분이 풀린 티가 났다.
“마리나, 저 아이를 궁까지 데려다주도록 해.”
클로에와 함께 자리를 떠나기 전에 나는 내 최측근 시녀에게 유디트를 챙기게 했다.
뒤돌아서기 전,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퍼뜩 놀란 듯이 아이가 곧바로 고개를 푹 수그려서 눈이 마주친 시간은 길지 않았다.
뒤돌아 걷는 동안 기분 탓인지 등줄기에 또다시 강렬한 눈길이 날아와 꽂히는 듯했다.
유디트 카뮬리타.
내가 본 꿈속의 책에 의하면 지금 내 뒤에 있는 저 어린 여자아이는 이 세계의 여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유디트의 이복 언니인 나 ‘아르벨라 레온 카뮬리타’는 훗날 그녀의 최대 라이벌이 될 운명이었다.
짧은 부연 설명을 더 하자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여동생을 증오한 끝에 금단의 술법에까지 손을 댄 악역.
그리고 그 부작용으로 살육밖에 모르는 끔찍한 괴물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 인생의 패배자.
그런 비웃음조차 아까운 인물이 바로 나, 아르벨라였다.
나는 허탈함이 섞인 실소를 입술 사이로 내뱉었다.
아니, 그런 구질구질한 미래가 내 것이라는 사실도 믿을 수가 없는데, 더군다나 저렇게 초라하고 하찮은 애가 내 걸 다 빼앗아갈 거라고?
이건 진짜 말도 안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