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렘 왕국은 왜 멸망했나요?”
유디트는 오늘도 그녀에게 솔렘 왕국의 마법을 가르쳐 주러 온 미유와 라칸에게 물었다.
“이렇게 강한 마법을 지녔는데 어째서 후대까지 번성하지 못하고 사라진 거죠?”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말했던 대로 그들의 마법은 특별했다. 마력을 아무리 사용해도 고갈되지 않는 이 특별한 마법식은 그 자체로 마법의 역사를 새로 쓰며 진귀하게 여겨질 만했다. 그러니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이렇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이토록 뛰어난 고유의 마법을 지니고 있던 솔렘 왕국이 왜 흔적조차 없이 멸망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앙 때문입니다.”
“그 재앙이란 게 무엇이지요?”
미유와 라칸은 유디트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저들끼리 시선을 맞댔다.
“저희도 몇 년 전까지 함께 있던 윗세대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대충 거대한 재해와 비슷한 재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큰 재해라 미처 막아내지 못했을 뿐이고, 그때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미유와 함께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을 이끄는 위치인 라칸이 입술을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생긴 것이 제법 험상궂고 말투도 사나웠지만, 그래도 라칸은 유디트에게만큼은 충성스러운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다르니 황녀님께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들에게 비극이라 할 만한 과거를 더 캐묻는 것도 좀 그래서 유디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4황녀, 네 실력이 날이 갈수록 훌륭해지는구나. 네가 성인이 되면 1황녀마저 가뿐히 뛰어넘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물살처럼 흘러갔다. 세드릭 황제는 이제 제법 황족다운 태를 갖춘 유디트를 ‘애물단지 황녀’에서 ‘고귀한 핏줄과 놀라운 마력을 가진 금덩어리 황녀’처럼 대우했다. 황제가 유디트를 그렇게 대하니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쉽게 무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끔 유디트는 자신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세드릭 황제에게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행동은 부성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겉으로 유디트를 아끼는 것처럼 굴어도, 그의 관심사는 사실 유디트의 마법적 성취뿐이었다.
하지만 카뮬리타에는 최고의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 천재적인 재능을 드러내며 제1 황위 계승권자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1황녀 아르벨라가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제가 1황녀님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지요.”
유디트는 왜 자꾸 세드릭 황제가 자신을 1황녀와 비교하며 이처럼 지나친 관심을 두는지 의아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유디트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1황녀 아르벨라가 마법사의 열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
1황녀 아르벨라의 소식이 온 카뮬리타 제국에 퍼지자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과 비탄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작년 10월 축제, 마법사들이 축일이라 불리는 그날부터 조짐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균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아르벨라가 마법에 실패해 쓰러진 일은 황실에서 갖은 애를 써서 덮은 사고였다.
그러나 그때 새벽 전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워낙에 많았던 탓에, 그 일은 이미 알음알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간 상태였다.
그 이후 1황녀 아르벨라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외부 일정을 소화했다.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균열과 괴수를 처리하는 일등 공신도 여전히 1황녀 아르벨라였다. 그래서 소문은 유야무야로 덮였으나, 일각에서는 그 사건을 계기로 의심을 품고 1황녀 아르벨라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유디트도 늘 아르벨라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전과 다른 어렴풋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 위화감의 이유가 마법사의 열병 때문이었다니……. 유디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전부터 아르벨라가 가끔 예고 없이 일정을 취소한 뒤 한동안 1황녀궁에서 두문불출하거나, 어떻게 해도 숨길 수 없는 병색을 얼굴에 드리울 때도 종종 있긴 했지만……. 그래도 마법사의 열병은 너무나 치명적이고도 잔인한 병이었다.
“아바마마, 착오일 것입니다. 1황녀님께서 마법사의 열병에 걸리셨다니, 황궁의가 오진한 것이 분명해요.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카뮬리타 곳곳에 퍼져 나가는 것을 막지 않으신 겁니까? 저라도 나서서 사람들이 이런 허튼소리로 더 이상 1황녀님의 명예를 더럽히지 못하게 바로잡겠습니다.”
유디트는 세드릭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놔두어라.”
“하지만 아바마마!”
“언제고 벌어질 일이 생긴 것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오래 버틴 것이지.”
세드릭 황제는 잔뜩 지친 듯한 얼굴로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유디트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부릅떴다. 세드릭 황제의 태도를 보아하니, 아르벨라의 상태를 훨씬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럼 설마…… 아르벨라가 마법사의 열병에 걸렸다는 것도 사실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이번에는 1황녀가 담당한 균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돌이킬 수 없는 문제 아니더냐? 1황녀가 성치도 않은 몸으로 고집을 부린 탓에 생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눈가림으로 숨기는 것도 이제는 한계다.”
아르벨라에게 어렸을 때부터 1황녀로서의 책임을 앞세워 온갖 일들을 시켜 왔던 건 세드릭 황제였다. 처음 균열이 생긴 이후로 아르벨라가 카뮬리타를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해 왔던 일들도 셀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세드릭 황제는 마치 이번 실수가 아르벨라 혼자만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피해인 것처럼 냉혹하게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이어서 작게 혀를 찬 세드릭 황제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망연히 있는 유디트에게 다가왔다. 유디트는 그녀의 어깨에 세드릭 황제의 손이 올라오는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1황녀를 대신할 네가 있으니 그 아이도 이제는 편히 쉴 수 있겠어.”
“그게 무슨…….”
“카뮬리타에서 1황녀는 존재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르지. 특히 균열이라는 골치 아픈 현상 때문에 각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금, 1황녀는 그 자체로 카뮬리타의 강력한 무력과 방어력을 상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카뮬리타에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지. 하지만 그 아이가 마력 한 줌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단명할 것은 이미 진작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사실 이만하면 1황녀도 버틸 만큼 버틴 것이다. 그러니 4황녀. 앞으로는 네가 1황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한다.”
유디트는 세드릭 황제의 말을 듣고 굳어졌다.
생각보다 아르벨라에 대한 세드릭 황제의 태도가 냉랭한 것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그 뒤에 그가 유디트에게 남긴 당부의 말에 놀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바마마.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제가 어찌 1황녀님을 대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4황녀. 내가 네게 처음 눈길을 주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세드릭 황제는 황망함에 고개를 숙인 유디트를 잠깐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혈통의 특이성 때문이다.”
혈통의 특이성……. 그것은 유디트에게 마력 개화를 일어나게 한 모계 혈통, 즉 솔렘 왕국의 혈통을 일컫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네가 내 기대보다 영특해서 마음에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에 네게 1황녀와 비견할 정도의 마력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너는 그 냉궁에서 초라하게 살다 죽었을 테지. 그러나 네 마법적 재능은 1황녀에게 결코 뒤처지지 않아. 그러니 앞으로 네 피를 카뮬리타 황실의 핏줄로 이어 간다면 더 강한 후대를 양성할 수도 있겠지.”
유디트의 어깨에 내려앉아 있던 손에 문득 강한 힘이 더해졌다.
“내가 지금 너를 유력한 차기 황위 계승권자로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히 상상조차 한 적이 없던 말에 유디트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드릭 황제의 차가운 푸른 눈에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1황녀는 편치도 않은 몸으로 너무 오랫동안 카뮬리타를 위해 헌신했어. 그러니 네가 1황녀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앞으로 더 노력해서 지금도 무리하고 있는 그 아이를 그만 편하게 해 주어라.”
그때 유디트가 느낀 감정은 가슴 벅찬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에 가까웠다.
“아바마마!”
그때 2황녀 클로에가 허락도 없이 황제의 내실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녀 역시 세간에 떠도는 아르벨라의 소문을 참다못해 세드릭 황제를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다 클로에는 세드릭 황제와 함께 있는 유디트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곧 그녀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유디트, 너 정말 기회를 놓치지 않는구나……! 이참에 아바마마한테 알랑거려서 점수라도 따겠다는 거야, 뭐야! 그래 봤자 네가 벨라 언니의 발끝이나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
클로에는 민감한 시기에 세드릭 황제를 찾아온 유디트를 보고 오해한 듯했다.
하지만 방금 세드릭 황제가 유디트에게 하고 있던 말을 떠올려 보면, 클로에가 마냥 오해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클로에, 시끄럽게 굴지 말거라. 유디트, 내가 한 말을 유념하고 그만 나가 보아라.”
유디트는 클로에의 비난과 세드릭 황제의 명령에 떠밀려 먼저 그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유디트도 그때 처음 깨달았는지도 몰랐다. 인생의 중요한 무언가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뒤엉키기 시작한 것을.
그러나 비탈길을 하염없이 굴러가기 시작한 눈덩이처럼, 유디트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삶의 궤도를 바로잡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
*
역사에도 숱하게 나와 있듯이,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사람은 제왕이 될 수 없다. 사소한 신체적인 결함이어도 문제가 될 판에, 그 약점이 치유할 방법도 없는 심각한 불치병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과 약혼해라.”
하여 세드릭 황제는 정말 아르벨라를 버리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는 얼마 전부터 가끔 유디트를 불러 단둘이 만찬 자리를 갖곤 했다. 그때마다 유디트는 꼭 돌을 씹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차마 황제이자 부친인 세드릭의 명을 거절하지 못해 자리에 참석해 왔다.
“네가 예전에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에게 도움을 준 일로 소공작과도 오늘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 중이라는 얘기는 들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인재지. 그를 네 사람으로 만들면 더 이상 너를 쉽게 볼 자는 없을 것이다. 네가 제법 똑똑한 짓을 했구나.”
“저는…… 그런 생각으로 공작 부인을 도운 게 아닙니다.”
유디트는 갑작스러운 세드릭 황제의 말에 가슴이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세드릭 황제는 유디트의 말에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러다가 이내 얕은 실소를 흘렸다.
“결과만 좋다면야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세드릭 황제는 베른하르트 공작가에 일부러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유디트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디트는 정말 베른하르트 소공작과 그런 의미로 가까워질 마음이 없었다.
더군다나 소공작인 킬리안 베른하르트는 1황녀 아르벨라와 약혼 논의가 오갔던 관계라고 들었다. 물론 오래된 이야기라고는 하나, 어쨌거나 그런 그를 유디트의 약혼자로 삼는다면 정말 아르벨라의 자리를 탐내고 있노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유디트의 마음에 있는 사람은…….
“아무튼 베른하르트 공작가에는 조만간…….”
“죄송하지만, 아바마마. 그 말씀은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뭐라?”
“송구합니다. 하지만 1황녀님께서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이 이대로 무너지실 리가 없어요.”
“아직도 그런 답답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남들이 뭐라 하든, 그것은 맹목적이기까지 한 믿음이었다. 긴 세월 동안 유디트에게 인생의 지침이 되어 온 사람이 이대로 주저앉아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질 리가 없었다.
유디트는 진노한 세드릭 황제를 뒤로한 채 서둘러 만찬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문앞에는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서 있었다.
“1황녀님……!”
오랜만에 본 아르벨라는 전보다 조금 마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유독 날카로워 보이는 눈이 차가운 광채를 내며 유디트를 응시했다.
유디트는 급히 입술을 뗐다가, 곧 아르벨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르벨라가 세드릭 황제와의 대화를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가 없어 쉬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유디트를 내려다보는 아르벨라의 얼굴에서는 싸늘한 냉기만이 느껴졌다. 그러다 이내, 아르벨라가 먼저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4황녀. 주제넘은 짓 하지 마라.”
그 건조한 한마디만을 남긴 채 아르벨라는 유디트를 스쳐 지나갔다. 유디트의 등 뒤에서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유디트는 가만히 선 채 몇 번 얕은 숨을 들이마시다가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수행원들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찍소리조차 하지 않고 유디트의 뒤를 따랐다.
“4황녀님은 1황녀님이 밉지 않으십니까?”
제라드가 유디트에게 조용히 물어온 건 4황녀궁에 들어선 이후였다. 유디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밉지 않아요. 그분이 제게 모질게 구시는 것을 이해합니다.”
“…….”
“그분의 눈에 제가 차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더군다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분에게 제가…….”
그러나 조금씩 잦아들던 말은 미처 끝맺어지지 못한 채 침묵 속에 공허하게 사그라졌다.
애당초 질문을 던진 제라드에게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누구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유디트를 답답하거나 바보 같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유디트가 착한 척을 하느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제라드는 그동안 1황녀 아르벨라가 유디트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몇 번이나 모욕을 주는 모습을 봐 왔다. 그러니 제라드의 입장에서는 더군다나 아르벨라에게 원망 한마디 드러내지 않는 유디트를 이해하지 못할 만도 했다.
그날 밤에도 유디트는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황족으로서의 교육을 늦게 받기 시작한 만큼 다른 황자, 황녀들보다 앞서가려면 몇 배는 더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세드릭 황제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 시작하면서 유디트는 원래 1황녀 아르벨라가 도맡던 일도 일부 넘겨받아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그녀에게 주어진 외부 일정을 마치고 황궁에 돌아오면, 내부의 남은 일을 끝마치기 위해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피곤했던 탓인지, 그만 깜빡 선잠이 들었던 듯하다. 유디트가 책상에 엎드려 가물가물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어깨에는 누군가 가져다준 듯한 담요가 덮여 있었다.
유디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습니다.”
문가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불빛이 거의 닿지 않는 어스름한 곳에 조용히 서 있는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제라드 경. 계속 거기에 서 있던 거예요? 그냥 깨우지…….”
“죄송합니다. 너무 곤히 주무시기에 깨우지 못했습니다.”
유디트는 시간을 확인한 뒤 제라드에게 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그만 방으로 가서 쉬어요.”
“유디트 님은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요즘 계속 밤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남은 일은 내일 마저 하시고 오늘만이라도 일찍 침실로 돌아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디트는 자신에게 휴식을 권하는 제라드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오늘 쉬면 내일 진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안 돼요.”
“…….”
“제가 그나마 잘하는 게 노력하는 거라서요. 그리고 보기보다 튼튼해서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은은한 마력석의 불빛이 미소를 띤 유디트의 하얀 얼굴에 부드러운 윤곽을 덧그렸다. 제라드는 유디트의 얼굴을 잠깐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잠도 깰 겸 잠깐 바람을 쐬는 것도 괜찮겠네요. 복도가 어두우니 계단 앞까지 배웅해 줄게요, 제라드 경.”
하지만 유디트는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문제점을 깨달았다.
도대체 언제 벗겨졌는지, 실내용 신발 한 짝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선잠이 든 동안에 저도 모르게 신발을 벗어 놓은 듯한데, 잠결에 어디론가 차 버리기라도 한 듯이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라진 신이 눈에 띄지를 않았다.
유디트는 난처하게 하얗게 드러난 맨발을 뒤로 숨겼다. 제라드가 줄곧 그림자처럼 서 있던 문가에서 움직인 건 그때였다.
그는 책상 옆의 화분 뒤에 가려져 있던 실내용 신발을 찾아 들고 유디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추었다.
유디트는 자신의 앞에 머리를 숙인 남자를 내려다보며 숨소리를 죽였다.
곧이어 제라드의 손이 서늘한 한기를 입은 유디트의 발목을 스쳤다. 유디트는 움찔거리면서 발끝을 움츠렸다. 하지만 제라드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그녀에게 신을 신겨 주었다.
“유디트 님은 특이하십니다.”
차갑던 발에 따스한 온기가 덧씌워지고, 밤의 고요함을 입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정말로, 제가 보아 온 누구보다도 카뮬리타의 황족답지 않으십니다.”
그동안 유디트가 다른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들어왔던 말이었다. 그들이 유디트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하는 목적은 황족답지 못하게 살아왔던 그녀를 비웃거나 동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디트 님은 제가 보아 온 그 누구보다도 황족다운 품격을 지닌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라드는 어떤 경우에도 유디트를 부정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고개를 든 제라드가 유디트의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제멋대로 구셔도 많은 사람들이 유디트 님을 아끼고 사랑할 겁니다.”
밤하늘의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눈은 시린 은회색이었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감정이 녹아 있었다.
“제라드 경도요?”
유디트는 제라드의 눈을 마주하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정말 마음 놓고 제멋대로 굴어도, 또 아주 오만하고 교활한 사람이 되어도 제 곁에 있어 주실 건가요?”
그러자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제라드에게서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가 따르고 싶은 건 단 한 분뿐이라고.”
이내 제라드가 유디트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에 맹세하듯이 이마를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유디트 님이 어떤 사람이어도 저는 기꺼이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분명 새와 나무조차 잠든 깊은 밤인데 이상할 정도로 두 사람이 있는 곳만 환하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새어 든 달빛이 몸에 가득 차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묘하게 벅찼다.
유디트는 그녀의 기사를 왠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으로 내려다보다가 손을 움직여 그의 뺨을 감쌌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입술을 열어 속삭였다.
“나도 그래요. 어떤 경우에라도 제라드 경의 옆에 있을게요.”
증인으로 세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경건한 두 사람만의 맹세였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를 보는 눈빛에서 그들의 마음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가 소중해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디트 황녀님. 당신은 우리의 하나뿐인 빛.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충실한 종입니다.”
하지만 유디트의 삶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대로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당신의 뒤에는 저희가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황녀님이 원하시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저희가 반드시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유디트를 향한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기대는 나날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들은 유디트에게 매번 다짐하는 대로, 유디트의 이름이 카뮬리타 전역에 알려지도록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것은 유디트가 딱히 바라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디트는 그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부채감 같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유디트를 위해서 했다는 행동들은 점점 그녀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역시 카뮬리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어울리는 건 유디트 님입니다. 아직도 1황녀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워요. 1황녀는 물론이고 다른 황족들에게도 유디트님과 계승권을 두고 다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카뮬리타의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해 줘야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도 내 허락 없이 델피니움 공작가를 건드렸잖아요. 그 일로 샤렐 황후님이 쓰러져서 아직 회복되시지도 않았어요. 델피니움 공작가의 권한을 빼앗고 연로한 공작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것으로는 부족한 거예요?”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유디트에게 충성했다. 하지만 종종 유디트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었다. 특히 미유보다는 성정이 불같은 라칸이 그러했다.
유디트가 가끔 견디지 못해 화를 내면 그때는 말귀를 알아들은 듯이 잠잠해졌으나, 그마저도 일시적일 뿐이었다.
“모두 유디트 님을 위해 한 일입니다. 유디트 님의 행복을 바라는 저희의 충심을 알아주십시오.”
처음에는 그들의 신뢰와 기대가 그저 기쁘고 고맙게만 느껴졌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유디트는 점점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제라드와 함께 있는 시간은 달랐다.
“제 모든 것은 유디트 황녀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황녀님을 위해 살고 황녀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그의 맹세는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과 비슷했으나, 제라드는 그들과 달리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주겠다고 했다. 제라드와 함께 있을 때, 유디트는 비로소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유디트 님, 더 이상 세드릭 황제의 권유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베른하르트 소공작과의 약혼을 받아들이세요.”
그러나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은 무엇이든 유디트의 원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말과 달리 그녀의 마음마저 잘라내려 했다.
“저희가 봤을 때도 카뮬리타 안에서는 그자가 가장 낫습니다. 그러니 베른하르트 소공작으로 하세요. 황녀님께서 옆에 거두신 그 기사는 안 됩니다. 격이 맞지 않아요.”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자신의 비밀스러운 진심을 그들이 제멋대로 읽고 냉정하게 말했을 때, 유디트는 꼭 그녀가 부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슬프고 화가 났다.
“격이라니, 그런 걸 누가 정한단 말인가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아무리 그대들이어도 용납할 수 없으니까.”
솔렘 왕국 마법사들만으로도 벅찬데, 위에서는 세드릭 황제 또한 유디트를 한시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4황녀, 동부 지역에 또 대규모 균열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쪽에서 직접 네게 도움을 요청했으니 당장 가 보도록 해라.”
“4황녀, 오늘 국무 회의에서 그 미적지근한 태도는 도대체 무엇이냐? 카뮬리타 제국민들이 이제 1황녀 대신 의지하고 있는 것은 너이니, 좀 더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
“4황녀, 베른하르트 소공작과의 혼약은 왜 자꾸 미루는 거지? 마침 오늘 소공작이 입궁한다 했으니 한번 만나 보아라. 이번에도 또 거부하면 강제로 진행하겠다.”
이렇게 위아래에서 끊임없이 쪼아대니 매일 신경줄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유디트 황녀님…….”
“4황녀…….”
이제는 그녀를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유디트가 황궁의 정원에서 아르벨라를 만난 것은 그렇게 한참 지쳐 있던 어느 날이었다.
*
“1황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만남은 우연이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갑갑한 마음에 잠깐 산책 삼아 바람을 쐬러 나간 황실 정원에서 유디트는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아르벨라를 발견했다.
유디트는 한동안 또 마법사의 열병 증상 때문에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아르벨라를 오랜만에 만난 것이 반가웠다. 그래서 조금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네 밑에 거슬리는 벌레들이 붙어 있구나.”
하지만 아르벨라는 어둡던 얼굴을 살짝 밝게 편 채 자신에게 걸어오는 유디트를 여느 때처럼 서늘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날카롭게 벼려진 말을 꺼냈다.
“아무리 내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그늘 속에 숨어 있는 해충들을 청소하는 것쯤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그러니 내 손으로 벌레들을 죄다 터트려 죽여 버리기 전에 주인으로서 단속을 좀 더 잘하는 게 어떻겠어?”
그 순간, 유디트의 얼굴에 잠깐 어렸던 빛이 사그라졌다. 유디트는 아르벨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르벨라 황녀는 원래도 유디트에게 싸늘했지만 얼마 전부터는 특히나 그러했다.
일전에 아르벨라의 외가인 델피니움 공작가에 문제가 생겨, 노쇠한 테레사 델피니움 공작이 타격을 입고 일선에서 물러난 일이 있었다. 그 후 테레사 델피니움은 몸이 약해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지난달에 결국 작고했다.
유디트는 아무리 정신없이 바빴다고는 하나, 그 일을 잊고 있던 자신을 속으로 질책했다.
어쩐지 정원에 혼자 앉아 있던 아르벨라에게서 평소보다 쓸쓸하고 삭막한 분위기가 풍기는 듯했는데, 단순히 마법사의 열병을 앓고 나와서 그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아르벨라가 지금 내뱉은 말을 들어 보니, 그녀는 델피니움 공작가의 일이 유디트에게 남몰래 붙어 있는 솔렘 왕국의 사람들이 저지른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니 지금 아르벨라의 눈에는 자신이 얼마나 가증스러워 보일까?
“1황녀님, 그때의 일은……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그들이 또 제 일에 나서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대외적으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두 황녀의 수행원들이 있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꺼낼 수는 없었다. 또 아르벨라에게 그들의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망설이던 유디트가 다른 말을 더 덧붙이려 다시 입을 열었으나, 아르벨라는 그녀를 더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유디트는 속이 더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대하는 아르벨라의 태도에서는 이전보다 더 강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아르벨라를 위해 그냥 이대로 자리를 비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았지만,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디트는 깊이 고민하다가, 주저함이 깃든 목소리로 아르벨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1황녀님은…… 요즘 어떠신가요?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유디트도 얼핏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아르벨라에게 깃든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들었다. 하여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으나, 유디트에게 돌아온 건 날카로운 비소였다.
“이제는 너도 내가 우스워졌더냐?”
유디트는 귓가를 파고든 서릿발 같은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한기로 가득 찬 시린 벽안이 그녀를 화살처럼 꿰뚫었다.
“예전에는 고작 멀리서 나를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듯이 굴던 주제에, 지금은 이처럼 겁 없이 내게 다가와 감히 안부를 묻다니. 네가 나를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니, 아니에요. 1황녀님, 저는…….”
“이렇게 네가 나를 동정하는 것을 보니, 나도 떨어질 때까지 떨어진 모양이구나.”
아르벨라의 그 자조와 냉소로 뒤섞인 얼굴을 본 순간, 유디트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지그시 깨문 입술에 비린 맛이 느껴지면서, 세게 움켜쥔 손아귀도 저릿해져 왔다.
왜 아르벨라는, 항상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걸까?
사실 유디트도 아르벨라에게 매번 이런 가시 돋친 말을 들을수록 조금씩 지쳐 갔다. 한 번쯤은 아르벨라에게 직접 소리쳐 묻고 싶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 거야?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를 거부하는 거야?
“또 그런 식으로 혼자만 무고하고 억울한 척하는 눈으로 나를 보는군.”
하지만 아르벨라의 냉혹한 눈빛이 다시 한번 가슴 한복판을 꿰뚫은 순간.
“너, 솔직히 말해 보렴. 처음 내 소식을 들었을 때, 네 마음에 희열이 한 조각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목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입 밖으로 부정의 말이 한마디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너를 무시하고 깔보던 내가 이제는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져서 너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걸 보고,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고 후련했던 적이 없어?”
심장이 망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사정없이 쿵쿵거리며 크게 뛰었다.
“이렇게 내 모든 걸 야금야금 갈취해서 네 걸로 만들고 있는 게, 정말 억지로 남이 시켜서 하는 것뿐이라고? 정말 너는 티끌만큼도 원하지 않았다고 내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유디트도 가끔 아르벨라에게 서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불행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치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따끔거리는 건 어째서인지 몰랐다.
“어째서…… 1황녀님은 그렇게 제 마음을 비꼬아서 안 좋게만 생각하시는 거예요?”
결국 유디트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관통하는 듯한 푸른 눈을 더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오히려 저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건 1황녀님이잖아요. 그동안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 한 걸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유디트는 진작 아르벨라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디트는 그런 일들을 제 선에서 덮어 왔다.
그녀도 성인군자가 아니라 화가 날 때도 있었고, 몹시 속이 상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르벨라의 상황을 알기에 어떻게든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벨라는 그런 유디트의 노력마저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다.
지금도 아르벨라는 또다시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로 유디트를 비웃듯이 말했다.
“말했을 텐데.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믿지 않아요. 1황녀님이 지금껏 제게 그래 왔듯이.”
유디트는 처음으로 아르벨라를 향한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래요. 저도 이제는 1황녀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게요. 황녀님의 피는 분명 냉정한 황족들 중에서도 가장 짙푸른 색일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제가 먼저 1황녀님께 말을 걸고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그 후 달아나듯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처음으로 아르벨라가 너무 미워서 죽을 것 같았다.
물론 그녀의 말은 예리하게 가슴을 뚫고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디트가 아르벨라에게 품었던 다른 호의적인 감정들마저 전부 거짓인 건 아니었다.
“요즘 황궁에 흉내쟁이 원숭이가 생겼다고 하던데.”
“이렇게 직접 보니…… 웃음만 나오는군.”
그날처럼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고 초라해서 눈가가 홧홧해졌다. 제 치부를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자신의 가장 더럽고 음습한 부분을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에 마음속의 동경과 경외가 미움과 원망으로 변했다.
그럼 차라리 그냥 이대로 아르벨라를 미워하자고 생각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이 귀가 닳도록 말하던 것처럼, 그녀를 적으로 여기고 이대로 사람들에게서 잊혀 비참하게 죽든 말든 그냥 모른 척하자고. 자신의 우상이 더 이상 예전처럼 환하게 반짝이지 않아도 이제는 마음 아파하지 말자고.
하지만 그날 유디트의 속을 잔인하게 후벼팠던 아르벨라는 얼마 후 온실에서 누구보다도 초라하고 나약해진 모습으로 혼자 섧게 울고 있었다.
그래서 유디트는 아르벨라를 마음껏 미워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유디트를 조롱하기라도 하듯이, 아르벨라는 그녀의 기사를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괴물이 되어 카뮬리타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
유디트가 처음 그 보랏빛 공간에 가게 된 건 아르벨라가 죽은 날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디트의 손으로 아르벨라를 죽인 날…….
아르벨라는 유디트의 기사인 제라드를 금단술의 제물로 삼았고, 그럼에도 마법에 실패해 이성 없이 살육만을 거듭하는 괴물로 변했다. 설상가상으로 카뮬리타 상공을 전부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균열까지 열려 제국을 공포와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
거의 본능으로만 움직였던 건 그 당시의 유디트도 마찬가지였다. 유디트는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거대한 증오심과 분노, 또 강렬한 원망과 서글픔에 집어 삼켜져 아르벨라를 쫓았고, 그녀를 죽였다.
마지막 순간, 유디트는 그녀가 죽인 1황녀 아르벨라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 복잡한 마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당신은 고작 이런 식으로 죽으려고 그런 삶을 살았나. 정말로, 고작 이런 식으로 끝을 맺고 싶어 그런 짓을 했나…….
이후 유디트는 거의 관성적으로 몸을 움직여 균열에서 나온 괴수들을 죽이고 붉게 벌어져 있던 하늘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힘을 다해 의식을 잃었을 때, 그녀는 보랏빛 공간에 서 있었다.
“여긴 어디지……?”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보랏빛 공간에는 기이하게도 셀 수 없이 많은 새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그 안에 든 반짝이는 무언가가 꼭 밤하늘에 떠 있는 찬란한 별 같았다.
유디트는 그 신비로운 광경에 압도되었다. 찬연하게 반짝이는 새장이 꼭 열어 달라는 듯이 그녀를 향해 빛을 깜빡였다. 거기에 홀린 듯이 유디트가 손을 뻗자, 새장 안에 있던 황금색 빛이 책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열두 살의 유디트 카뮬리타는 자신이 평생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유디트는 그 책에 기록된 자신의 생애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다음으로는 뇌리를 스친 깨달음에 경악했다. 작살에 꿰인 듯한 충격이 전신을 뒤덮었다. 전율인지 소름인지 모를 날 선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
“4황녀님, 깨어나셨군요!”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유디트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세드릭 황제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1황녀 아르벨라의 흔적을 카뮬리타에서 지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쌓아 온 위대한 업적들은 인생의 마지막에 단 한 번 잘못 새겨진 거대한 오점에 파묻혀 광채를 잃었다.
세드릭 황제는 유디트를 정식 후계자로 임명하고 책봉식을 준비하게 했다.
“축하드립니다, 유디트 황녀님!”
“드디어 황녀님께서 카뮬리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시겠군요.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릅니다.”
솔렘 왕국 마법사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했다. 그러나 제라드와 아르벨라의 죽음 이후 미소를 잃은 유디트는 감격에 겨워하는 자신의 마법사들을 그저 메마른 눈으로 조용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모두가 유디트를 찬양하며 그녀를 우러러 보았지만, 그녀는 거기에 조금의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것들을 손에 넣었지만 무엇 하나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마음은 한없이 허전하기만 했다.
“나는 늘 1황녀님을 경애하면서도 동정하고 있었지요. 어릴 때부터 그녀처럼 살고 싶었고, 늘 그녀가 부러웠어요.”
결국 유디트는 아르벨라의 말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예전에는 아르벨라의 말처럼, 어쩌면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을 뿐 내심 거기에 희열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짙은 피로에 눌려, 아침이 와도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였어요. 그러니 내가 그녀를 용서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황녀님…….”
“그래도…… 나는 그만큼 그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기도 하니까. 그러니 오늘 같은 날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생각나네요.”
유디트의 세계는 이전과 달리 밝고 찬란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알았다. 그녀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책봉식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술에 취해 잠든 날 밤, 유디트는 다시 한번 보랏빛 공간에 가게 되었다.
그때 내용을 전부 확인하지 못한 황금빛 책이 다시 읽어 달라는 듯이 그녀의 눈앞에서 빛을 깜빡였다. 그러나 유디트는 그저 무기력하게 가만히 서서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 책에 그녀의 인생이 어디까지 기록되어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만이 적혀 있을 뿐인지, 아니면 아직 겪지 않은 자신의 앞날마저 예측해 기록한 것인지.
그러니 저 책을 끝까지 읽으면 자신의 미래마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디트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끝나든, 그 결말 같은 건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바로 그때, 환하게 반짝이는 황금빛 새장에 가려져 있던 다른 새장 하나가 유디트의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한눈에 다른 것들과 비교될 정도로 녹슬고 낡은 새장이었다. 그 안에는 겨우 불티 하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작디작고 희미한 빛 하나가 점처럼 찍혀 있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유디트는…… 왠지 그것이 누구의 인생을 담은 새장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유디트의 눈에 일시적으로나마 빛이 돌아왔다. 뒤이어 끓어오른 기이한 충동이 그녀의 손을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녹슨 새장에 손이 닿은 순간, 그 안에 기록된 타인의 인생이 유디트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잠에서 깨어난 유디트는 비명을 내지르며 오열했다.
유디트는 지금까지 자신이 동경해 온 아르벨라의 인생이, 그저 저 좋을 대로 환상을 덧입혀 그려 온 아름다운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은 그녀의 인생 역시 자신처럼 처절한 발버둥의 연속이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아르벨라는 정말 그동안 단 한 번도 유디트에게 거짓말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유디트를 기만하고 속여 온 것은 그녀가 믿고 있던 주변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눈을 가려 왔던 편견과 고집이 떼어지자, 감춰져 있던 진실이 너무나도 명료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후 유디트는 예전에 멸망한 솔렘 왕국과 그녀를 따르는 마법사들에 대해 은밀한 조사를 시작했다.
예전의 유디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이제 그녀는 카뮬리타의 다음 제위를 약속받은 위대한 황족이자 카뮬리타의 영웅이었다. 그래서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 몰래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드러난 실체 앞에서 유디트는 허탈함에 미친 듯이 웃었다. 한번 마음먹자 이렇게 쉬운 일인 것을, 그동안에는 왜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원하는 것만 보고 들으려 했을까.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은 이제 유디트를 카뮬리타의 황제로 만들기 위해 그녀의 황태자 책봉식 이후 세드릭 황제를 암살하려 모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그 책봉식 날, 이전에 솔렘 왕국을 멸망하게 했던 재앙이 다시 도래할 거라고는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카뮬리타와 이 세상 전체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 그날, 유디트는 균열에 집어 삼켜져 다시 한번 그 보랏빛 공간에 섰다.
그곳에서는 여지없이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영혼의 새장. 영혼의 보석 상자. 영혼의 감옥…….
곧 흰 빛들이 유디트를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서히 창살 같은 모양을 그리며 그녀를 옥죄었다.
죄업을 등에 진 망자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세계의 이면 속에서 유디트는 마지막으로 간절히 염원했다.
그녀는 마땅히 속죄해야만 했다. 이제는 이 모든 일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유디트도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정말 그녀가 이 모든 원죄가 시작된 원인이라면, 반드시 지금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절벽 끝까지 내몰려 가장 불행해진 사람에게도…… 어떻게든 보상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어릴 때 본 저희 솔렘 왕국의 옛 서적에 운명을 바꾸는 재미있는 마법이 있었지요. 예전에 사멸되어 불완전한 기록으로만 남아 있기에 지금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아니지만, 심심풀이 삼아 한번 들어 보시렵니까?”
빛의 창살에 완전히 갇히기 직전, 유디트는 자신의 영혼을 걸고 최후의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유디트 카뮬리타는 아르벨라 레온 카뮬리타가 되어 눈을 떴다.
27. 리부트: 다시, 아르벨라
“1황녀님!”
얼어붙은 강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이 따가울 정도로 차갑고 시렸다.
“이제 정신이 드세요? 빨리, 빨리 황궁의를……!”
정신을 차리자마자 막혔던 숨통이 트인 것처럼 급히 숨을 들이마시면서 눈을 떴다. 곧바로 익숙한 마리나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지?
내가 처한 현실이 바로 파악되지 않아서 눈을 부릅뜬 채 숨만 헐떡였다.
꼭 아주 기나긴 꿈을 꾸고 일어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이상한 꿈이었다.
내가, 내가 아닌 꿈.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았던 꿈…….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비명을 토해 낼 뻔했다.
나는 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꿈과 현실이 머릿속에 뒤엉키면서 한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황녀님, 좀 더 누워 계셔야 해요!”
앉은 채로 휘청거리는 나를 마리나가 다급히 붙들었다. 마리나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자, 그제야 지금의 내가 누구이며 또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어떠한지 조금씩 현실감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마리나…….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한순간 넘쳐서 쏟아질 뻔한 감정들을 서둘러 꾸역꾸역 삼킨 뒤, 마리나에게 물었다.
“마법사의 축일로부터 사흘이 지났습니다.”
사흘. 생각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나는 마법사의 축일 때 내가 새벽 전당 안에서 의식을 잃은 것을 떠올리고 이불을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눈을 감고 몇 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자,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균열의 처리는 어떻게 됐어? 상황은?”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게 마무리되었어요. 피해 규모도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우선은 카뮬리타의 1황녀 아르벨라로서 그날의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부터 확인했다.
“이례적일 만큼 큰 균열인 데다 하필이면 축제의 인파가 모인 곳에 발생해 아찔한 상황이긴 했지만, 그 자리에 다른 마법사들도 많이 있었고 또 이후에 4황녀님께서 놀랍도록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셔서 다행히 피해가 생각보다 커지지는 않았어요.”
마리나의 입에서 나온 ‘4황녀’라는 말을 듣자 머리가 더 아파져서 손으로 이마를 꾹꾹 문질렀다. 가슴에 돌덩이가 얹히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메슥거렸다. 의식이 없는 동안 꾸었던 긴 꿈이 또다시 내 머릿속을 정신 사납게 들쑤시기 시작했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가까스로 열어 입에 올리기 어려운 이름 중 하나를 밖으로 꺼냈다.
“그날, 제라드가 돌아온 것 같았는데…….”
“네, 1황녀님께서 새벽 전당에 계신 걸 제라드 경이 발견해 황궁으로 모셨습니다.”
마리나는 고개를 숙인 채 간결하게 답했다. 그녀가 연속된 내 물음에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는 것이 느껴졌다. 마리나가 무엇을 꺼려서 이러는지 알 만했다. 그래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면서 마리나를 가만히 보다가, 그녀가 줄곧 설명하기를 미루고 있던 내용을 직설적으로 물었다.
“내가 의식을 잃은 상태로 있는 걸 몇 명이나 목격했지?”
대답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마리나가 한결 깊게 고개를 숙인 뒤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래도 소수입니다. 다행히 제라드 경의 발견이 빨라서, 시선을 피해 움직일 수…….”
“마리나. 그냥 에두르지 말고 말해.”
“……일단 황실 분들은 전부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일부 백야의 전당 마법사 분들과 베른하르트 소공작 정도…….”
마리나는 우려와 긴장이 섞인 얼굴로 내 반응을 지켜봤다. 하지만 이미 예상하던 일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일단은 황녀님께서 연일 이어진 과로로 몸이 편치 않으시다고 전달해 두었습니다.”
“그래, 알겠어.”
그래도 미봉책으로나마 내가 쓰러진 것을 과로 때문인 것으로 처리했다지만, 그걸 몇 명이나 곧이곧대로 믿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문제조차도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다른 사안에 비하면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머리를 문지르던 손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마리나가 말렸다.
“1황녀님, 황궁의가 올 때까지 좀 더 누워서 쉬시지요.”
“내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열이 떨어졌으니 황궁의는 올 필요 없어.”
내가 쓰러진 동안 여기저기서 연락이 온 곳이 많은 듯이 테이블 위에는 서신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나는 거기에 적힌 내 이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제라드는 어디에 있어?”
“내내 문 앞에 서 있다가 지금은 잠깐…… 앗, 황녀님! 아직 환복하시기 전인데 어딜 가시려고…….”
마리나가 뒤에서 나를 따라오면서 급히 뭐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흘려들으며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내가 문고리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눈앞에서 방문이 벌컥 열렸다.
“1황녀님.”
급히 뛰어오기라도 한 듯이 붉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남자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쳐 오는 시선에 나도 막 문고리를 잡으려고 들었던 손을 내린 뒤 자리에 멈춰 섰다.
“방금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
제라드는 나를 걱정하듯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꼭 상태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내 얼굴을 살피는 눈빛이나 내게 안부를 물어오는 목소리 모두가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런 제라드를 보고 얕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제라드와 마주하는 게 오랜만인 건 사실이지만, 기나긴 꿈을 꾸고 깨어난 탓인지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라드에게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사흘 전에만 해도 제라드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떤 말도 쉽게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다.
“……그래. 너는 라스너 백작가에 잘 다녀왔고?”
그래서 결국 잠긴 목소리로 제라드에게 고작 이런 말이나 꺼내고 말았다.
그 순간 제라드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게서 위화감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내 눈을 말없이 응시했다.
“1황녀님, 황궁의가 도착했습니다.”
그때 열린 문밖에서 시녀가 황궁의의 방문을 알렸다. 뒤에서 조용히 다가온 마리나가 내 어깨에 가운을 걸쳐 줬다. 그때서야 제라드도 내 복장이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상태가 아니란 걸 깨달았는지, 내게서 시선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지금 제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1황녀님의 몸부터 돌보시는 게 우선이니 먼저 황궁의에게 진찰을 받으십시오.”
나도 다른 말을 더하지 않고 조용히 돌아서서 침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마리나가 걸쳐 준 가운을 아프도록 세게 움켜쥔 손에는 아까보다도 더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
“1황녀님, 4황녀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가라앉아 내가 의식을 되찾은 건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오전에 세드릭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준비 중일 때, 마리나가 내게 유디트의 방문 소식을 알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굳힌 채 눈앞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그 안에는 차갑게 경직된 얼굴을 한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
“4황녀님이라면 어제도 방문하셨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거울 속의 여자는 곧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어제도 유디트가 방문했었다고? 그때는 그냥 돌려보냈나?”
“네, 황녀님이 깨어나시기 직전에 찾아오셨는데 그때는 방문을 거절했습니다. 그 후에 제라드 경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셔서 궁 밖에 잠깐 계시다가 금방 돌아가셨어요.”
“유디트가 제라드와 만났어?”
“짧게 대화를 나누다가, 곧 1황녀님이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라드 경이 자리를 먼저 떠나서 정말 잠깐만 얼굴을 보고 헤어졌다고 들었어요.”
그러나 마리나에게서 돌아온 예상 밖의 답변에 멈칫하고 말았다.
어제 내가 깨어났을 때 제라드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듯했는데, 그때 유디트가 찾아왔었다니……. 더군다나 그녀가 제라드와 따로 만나기를 원했다는 소식에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쉽사리 감을 잡기 어려워졌다.
“지금도 4황녀님이 말하시길, 1황녀님께서 곧 폐하를 배알하실 것을 아니 궁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1황녀님이 나가시는 길에 잠깐 얼굴만 뵙겠다고 지금 정원 앞에 계세요.”
마리나의 말대로 세드릭 황제와 약속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긴 했지만, 잠깐 짬을 내서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누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정 내키지 않는다면 이대로 미적거리다가 시간이 촉박할 때 밖으로 나가 세드릭 황제를 핑계로 삼으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 나를 찾아온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나가자.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구나.”
나는 꼭 무거운 추를 매단 듯이 무거운 걸음을 옮겨 유디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몸에서 조금씩 피가 빠져 나가는 것처럼 손발이 차갑게 식어 갔다.
마리나에게 들은 대로 유디트는 정원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 혼자 있는 건 아니었다.
유디트의 옆에는 제라드가 함께 있었다.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초록빛 잎사귀 사이로 유디트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는 것을 보자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드는 것 같았다.
사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그녀를 보고 싶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지금도 이렇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녀의 모습을 시야에 담자 가슴이 쿵쿵, 엇박자로 빠르게 뛰었다.
“1황녀님.”
그리고 마침내 제라드가 나를 발견한 듯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유디트를 뒤로 하고 바로 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뒤이어 유디트도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직후, 이내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피어나는 미소를 나는 약간 아연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사흘 만에 뵙네요, 언니.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쾌차하셨나요?”
뜻밖에도 유디트는 나를 향해 참으로 여상한 인사를 건넸다.
“그……래.”
나는 그녀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미처 결정하지 못한 채 거의 반사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마법사의 축일 때, 과로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줄곧 방문객을 받지 않으시다가 오늘 아바마마께 인사를 올리러 가신다기에 이렇게 급히 달려왔답니다.”
유디트는 제라드의 뒤를 따라 내게 다가오며 친근히 말을 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대하는 유디트를 보자 이상하게도 오히려 목이 더 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나도 태연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랬구나……. 염려해 준 덕분에 지금은 말끔히 나았단다.”
이전에 내가 유디트로서 보아온 게 그러했고, 아르벨라로 다시 살아가면서 행해 온 게 그러했기에.
“그러셨군요. 다행이에요.”
유디트는 여전히 속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서 나를 잠깐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선득해졌다.
정말 내 생각대로 그녀도 나와 같은 걸 알고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법사의 축일 때 유디트…… 네가 눈에 띄게 활약했다지?”
“아니에요. 아르벨라 언니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요.”
“겸손한 소리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그날 피해 규모가 컸을 거라고 들었는데.”
“아르벨라 언니가 그때 몸이 편치 않으셔서 그렇지, 만약 평소와 같았다면 제가 설 자리가 있었겠어요.”
대화를 이어갈수록 심장에 난 거스러미를 하나씩 뜯어내는 것처럼 속이 따끔거렸다. 꼭 유디트가 일부러 나를 겨냥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날카롭게 벼려서 내뱉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전에 우리의 이름과 모습이 정반대였을 때, 만약 그때도 내 운이 좋지 않았다면 그녀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이전의 아르벨라가 조소하는 것 같았다.
“언니,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지 않으세요?”
엷게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보던 유디트가 이내 다시 입술을 떼 내게 물었다. 제라드는 내 옆에 서서 기이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나와 그녀를 조용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줄곧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히 굴더니, 이제야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할 생각인가?
어제 기나긴 꿈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 후, 나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과 반드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마땅히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었고, 그럴 의지 또한 있었다.
만약 지금의 그녀에게 이전의 기억이 있다면, 왜 자신과 내가 바뀌었는지 의혹이 가시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막상 이렇게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 내 생각보다 더 힘에 부쳤다. 모든 것을 깨달은 직후라 그런지, 나도 아직 마음의 정리가 미처 끝나지 않았나 보다.
지금도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이런 마음은 분명 아르벨라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내가 버린, 내가 과거에 두고 온 유디트의 마음이었다.
“이제 폐하를 뵈러 가 봐야 해서.”
결국 지금은 내가 먼저 이 상황을 온전히 견디지 못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말고…… 좀 더 제대로 시간을 내서 다시 얘기하자.”
그러나 바로 세드릭 황제를 만나러 가야 하는 건 사실이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 지금은 때와 장소가 적절하지 않은 것도 맞긴 했다.
유디트는 그런 나를 또 물끄러미 보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좀 더 제대로 시간을 내서 대화해요.”
나는 그런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디트는 먼저 자리를 떠나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
몇 년 전 내가 유디트를 곁에 두기로 결심한 사냥터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나도 모르는 새 내 몸 안으로 벌레가 기어들어 온 것 같았다. 검은 개미들이 내 배 속을 갉아먹으며 나를 비웃는 것처럼 키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황제 궁을 향해 걷다가, 과거의 그날처럼 뛰기 시작했다.
“앗, 1황녀님?!”
“잠깐만요……!”
뒤에서 황망하게 나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행원들은 내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가자 놀라고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이제까지 황궁 안에서 내가 이런 식으로 체면 없이 행동한 적이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허둥지둥 나를 쫓아오는 수행원들을 뒤로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그저 하염없이 달렸다. 그렇게 하면 내 마음속에 기어들어 와서 나를 괴롭히는 것들을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헉, 허억…….”
뺨에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스치고, 밤사이 내린 이슬에 젖은 눅눅한 오전 공기가 폐에 아플 정도로 가득 들어찼다.
“저렇게 초라하고 하찮은 애가 내 걸 다 빼앗아갈 거라고? 이건 진짜 말도 안 되잖아.”
“적어도 유디트는 주제 파악 하나는 잘했는데.”
“어리석은 아이네. 자신을 향한 호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도 못 하고. 내가 사실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이처럼 무방비하게 나한테 다가오는지.”
하지만 내 안을 파고든 벌레는 여전히 깊은 곳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아르벨라로 살면서 유디트를 보고 모질게 생각했던 것들이 불시에 떠올랐다. 그 아이를 함부로 멸시하고 비웃었던 과거가 해일처럼 나를 덮쳐들었다.
그런 나를 꼭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던 유디트.
그러나 사실 그건 나였다. 사실 그건 아르벨라를 선망하고 갈망하던 내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정말 실소가 날 정도로 미련하고 멍청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내 이기심만으로 그녀의 날개를 꺾어 내 옆에 눌러 앉혀 두려고 했었다.
그래, 내가 그랬었다…….
아,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도대체 뭘까?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하고 나 자신을 우습게 여겨, 기어이 스스로를 배신하고 만 것에 대한 수치심과 자괴감일까?
아니면 내가 이 손으로 직접 내 과거의 육신에 가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감히 깔보고 멸시했다는 위선적인 죄책감일까?
“황녀님……!”
그렇게 견딜 수 없는 마음들을 전부 떨쳐 내고 싶어서 달리던 나를 어느 순간 누군가 붙잡아 세웠다.
팔을 움켜쥔 손길에 몸이 돌아가면서 일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나를 쫓아온 사람이 비틀대는 나를 더 단단한 손길로 지탱했다.
“괜찮으십니까?”
나만큼은 아니지만, 살짝 흐트러진 숨소리가 이마에 닿았다. 귓가에 울린 목소리에는 안도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왜 갑자기 이렇게 급하게 뛰시는 겁니까?”
나를 따라온 건 제라드뿐이었다. 다른 수행원들은 나를 쫓아오다가 전부 떨어져 나갔는지,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황궁 외곽의 우거진 나무들 밑에 서 있는 제라드를 올려다보았다.
“결국 실패한 게 문제였던 거야. 그러니 이번에는 성공시키면 돼.”
“아무리 귀족이었다고는 하나, 그래 봤자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그런데 제라드의 얼굴을 눈에 담은 순간, 이번에는 예전에 그를 두고 했던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흠칫해서 나를 붙들고 있는 제라드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나를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팔을 붙잡은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면서,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도 한결 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제라드는 곧 서서히 손에서 힘을 풀며 내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나도 조금씩 뒷걸음질 쳐 그에게서 거리를 더 벌렸다.
사시사철 피어 있는 장미 덤불이 내 등에 닿았다. 황실 정원사가 신중하게 한 송이 한 송이 가꾼 꽃에 가시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형체 없는 뾰족한 것이 내 온몸을 따갑게 찌르는 듯했다.
“이번에는 일찍부터 유디트가 아닌 내가 그를 거두어서, 내게 복종하게 만들어야지. 차근차근 그를 길들여,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날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도록. 책 속에서 유디트에게 그가 그랬듯이.”
“만약 그게 어렵다 해도, 최소한 내가 그를 죽이려 할 때 바로 반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신뢰를 쌓는 정도는 해야겠지. 방심하고 있으면 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연이어 떠오르는 기억에 나는 몹시도 속이 시리고 아려졌다. 불과 몇 년 전에 내가 품었던 잔인하고 독한 생각들이 이제 와서 나를 찌르고 할퀴며 괴로움에 몸서리치게 했다.
“송구합니다. 좀 더 원하시는 만큼 달리게 해 드리고 싶었지만, 역시 회복이 아직 덜 된 몸으로 격렬히 움직이는 건 좋지 않을 듯해서 무엄한 행동인 걸 알면서도 붙잡았습니다.”
제라드는 내가 그의 무례한 행동에 노해서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전 내게 손을 댄 것을 사죄했다.
나는 한바탕 정신없이 달린 탓에 가빠진 숨을 고르면서 애써 제라드의 앞에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니야……. 갑작스럽게 길에서 이탈한 내 잘못이지. 수행원들이 황당해하겠구나. 그만 황도로 돌아가자.”
내 본분을 지켜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갈무리하고 그만 자리를 떠나려 했다. 사실은 제라드와 이렇게 단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조금 버거웠다.
제라드는 말없이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다시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1황녀님……. 그냥 모른 척해 드리고 싶었는데, 어제부터 이상하십니다.”
내 얼굴을 조용히 주시하는 눈이 속까지 파헤치려는 듯이 다소 예리했다.
“아니, 그동안 애써 묻지 않았지만, 그 전부터 이상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제라드의 얼굴을 마주했다. 내 손목을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제라드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잇새에 좀 더 힘을 준 듯이, 그의 턱이 살짝 딱딱하게 조여드는 게 보였다.
이윽고 제라드가 내게 말했다.
“혼자 마음에 숨기고 있는 게 뭔지, 이제는 제게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내 안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그리움을 자극했다.
그 순간, 진심 어린 마음이 나도 모르게 불쑥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미안해.”
느닷없이 내게 사과를 들은 제라드가 표정을 변화시켰다. 그는 지금의 내 사과가 그의 청에 대한 거절이자 거부의 의미라고 받아들인 듯했다.
“미안해.”
하지만 내가 견디지 못해 또 한 번 꺼낸 말에 곧 그게 아니란 걸 알았는지, 작게 벌려졌던 제라드의 입술이 이내 그대로 다물어졌다. 그 상태로 그는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의 눈을 마주하는 동안 나는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전에, 내가 유디트일 때 아르벨라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만약 나도 저렇게 태어나 저렇게 살았다면, 오늘 저 사람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생각처럼, 나는 아르벨라로 사는 동안 정말 많이 변했던 모양이다.
내게 달라붙어 있던 굴욕적인 마음과 초라한 시절을 전부 잊고, 이 모든 것이 원래부터 주어진 내 것이라 생각하며 사는 동안 나는 예전의 나와 참 많이도 달라졌나 보다.
하지만 설마 그렇다 해도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던 걸까? 어떻게 내가 저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던 거지?
예전의 나는 오만하고 당당한 아르벨라를 부러워하면서도 사실 그녀의 어느 부분은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결국은 나도 똑같은 인간이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나는 그녀보다 더 나빴다.
이번에 꾼 꿈을 통해 이제는 확실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내가 유디트일 때 지켜본 1황녀 아르벨라는 차라리 나를 외면하고 무시했을지언정 뒤에서 비열한 짓을 해 놓고 거짓말하지는 않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정말 나를 해하려 비겁한 수를 썼던 적이 없었다.
그것은 솔렘 왕국 사람들이 내게 아르벨라에 대한 경계심과 미움을 심기 위해 그녀인 척 저질러 뒤집어씌운 누명이었다. 더군다나 아르벨라가 마지막에 그렇게 철저하게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무너졌던 것 역시, 솔렘 왕국 마법사들이 그녀에게 마법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때, 아르벨라가 제라드를 죽인 것은 분명 온전한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왜 진작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솔렘 왕국의 마법사 중에는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있지 않았던가?
아르벨라가 죽은 뒤 다시 가게 되었던 세계의 이면에서 나는 누더기가 된 책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그때, 아르벨라가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과 만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법사의 열병으로 마력을 잃어 어린아이만큼이나 무력해져 있던 아르벨라는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그들이 아르벨라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녀 안의 비틀린 욕망을 부추겨 잘못된 길을 걷도록. 그리하여 두 번 다시는 카뮬리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도, 용서받지도 못하게 되도록.
그렇게 해서 마땅히 그녀가 가져야 했던 모든 것을, 그들이 숭배해 마지않는 솔렘 왕국의 마지막 후손인 내게 바치려고.
“내가…… 이런 사람밖에 안 돼서 미안해.”
아마 그 일면에는 끝끝내 내 곁을 지키고 있던 제라드를 치워 버리려는 속셈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제라드를 마음에 품고 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으니까.
운명을 바꿔 아르벨라가 된 나 역시, 또다시 온전한 내 의지로 제라드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제라드를 옆에 둔 건 그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나는…… 그를 두 번이나 나 때문에 죽게 할 뻔했던 것이다.
“황녀님…….”
제라드는 내 거듭된 사과에 얼굴을 굳힌 채 나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와 마주한 동안 서서히 견디기 어려운 감정에 물들다가 지금은 완전히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 사과 또한 비겁한 짓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에 죄책감을 느끼는지 지금 그에게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설명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실은 이렇게 누더기에 불과한 나를……. 아무리 기억이 없었다고는 하나, 결국 내 이기심으로 그를 배신하고 만 나를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제라드는 그렇게 의미도 없는 사과를 반복하는 나를 그저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찾으러 올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
세드릭 황제는 결국 알현 시간에 늦은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흘 전 마법사의 축일 때 새벽 전당 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내 추태에 대해 몸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냐며 먼저 한바탕 훈계를 듣고, 또 내 병에 대한 소문이 밖으로 퍼지지 않도록 자신이 어렵게 목격자들의 입막음을 했다며 실컷 생색을 내는 소리를 들어 주어야 했다.
하지만 전부 다 이미 그럴 줄 알고 있던 일이라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또 무슨 시답잖은 소리를 할까 하며 사실 반쯤 귀를 닫고 있었는데…….
“송구하지만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애석하게도 현실은 내게 오랫동안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세드릭 황제를 알현하던 중에,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깊은 의구심을 느끼며 반문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귀를 의심했으나, 세드릭 황제는 몹시 불편한 얼굴로 내게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1황자가 사라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군.
이건 안 좋은 의미로 제법 내 흥미를 끄는 소식이었다.
“라미엘이 사라지다니요?”
“사흘 전, 10월 축제의 첫날 균열이 닫히고 상황이 정리된 이후에도 1황자의 모습이 통 보이지 않더구나. 알아보니 그레이엄 후작의 꼬리를 잡았다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나는 갑자기 두통이 도지는 느낌에 미간을 손으로 꾹꾹 짓눌렀다.
“그러니까…… 그레이엄 후작을 쫓다가 실종되었다는 뜻이군요?”
“그렇다.”
“이후 지금까지도 라미엘의 행적을 찾지 못했고요?”
“그렇다.”
하……. 진짜 라미엘, 이 자식…….
나는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려 하는 탄식과 짜증을 삼켰다.
분명 내가 그날은 귀찮은 짓 벌이지 말고 그냥 얌전히 황궁으로 돌아가라고 그랬는데, 기어이 마음대로 움직였구나.
라미엘이 갑자기 사라지기는 했지만, 애초에 그에게 꿍꿍이가 있었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1황자가 마지막에 말하기를, 1황녀라면 자신이 어디로 갔는지 알 것이라고 했다더구나.”
세드릭 황제가 찡그린 얼굴로 덧붙인 말을 듣고 나는 더욱이 이 상황이 성가셔졌다.
즉, 라미엘의 행방을 찾기 위해 모두들 지난 사흘간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뜻이었다.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어제 늦은 저녁에라도 찾아뵈었을 텐데요.”
“그래서 네게 먼저 서신을 보내 두었는데 보지 못했더냐?”
“제가 그걸 바로 확인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바마마께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급한 일이 있었다면 번거로우시더라도 다시 한번 연락을 주시는 편이 좋았을 듯합니다.”
“나도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느냐.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하도 많아서 다시 전갈하는 걸 깜빡했다.”
“…….”
그럼 지금 내가 알현하러 왔을 때라도, 훈계와 생색의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말했어야지…….
세드릭 황제가 자신의 체면을 차려 줄 자식 외에는 관심이 거의 없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세드릭 황제를 차게 식은 눈으로 보다가 두말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지금 바로 일어나 보겠습니다. 당장 가장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은 라미엘의 문제인 듯하군요.”
아무래도 내 마음 한구석을 찜찜하게 만들던 생각이 맞아떨어진 듯했다.
10월 축제의 첫날이자 마법사의 축일 때 터진 균열이 완전히 정리되기 전에 라미엘이 사라졌다면, 그는 내가 새벽 전당에서 쓰러진 소식을 접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내가 잠깐 의식을 잃은 것도 아니고, 설마 마법사의 열병 때문에 사흘이나 기절해 있을 줄은 몰랐을 테니까…….
‘바보 같은 녀석, 지금 멀쩡하려나.’
마음이 영 불편해서 황제 궁을 나서는 걸음을 서둘렀다.
사실 지금 라미엘에 대한 내 감정은 좀 미묘했다. 왜냐하면…….
“도와 달라고? 내가 너 같은 잡종 계집애를 왜?”
“흠, 그럼 어디 한번 날 설득해 봐. 내가 왜 널 도와줘야 하는지 이유를 들어 보고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면 고려해 볼게.”
사실 유디트를 주인공으로 한 책에 적혀 있던 라미엘의 만행들은 전부 다 내가 당했던 거잖아…….
게다가 솔직히 나는 유디트일 때 라미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이복 형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나를 직접 괴롭힌 적이 있었으니 당연했다. 자신과 똑같은 검은 머리칼을 가진 게 마음에 안 든다고 내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려 한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르벨라인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굉장히 달랐고, 아르벨라인 내가 그를 보는 시각 역시 유디트일 때와는 달라졌다.
지금의 내게는 그런 부분이 혼란스럽고 모순적이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라미엘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다른 문제는 잠깐 뒤로 제쳐 두고 그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1황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황제궁 밖으로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 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얼굴들이 낯익다 했더니, 그레이엄 후작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 세드릭 황제가 허가를 내려 라미엘이 이끌던 황실 기사단이었다.
“라미엘이 데리고 있던 이들이군.”
“예! 1황자님께서 혹시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1황녀님을 따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폐하께도 이미 허락을 받았으니 저희도 데려가 주십시오.”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미세하게 눈매를 찌푸렸다.
라미엘에게 기사들이 붙은 것처럼, 내 밑에도 나를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라미엘 녀석이 이렇게 굳이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사람들까지 나한테 보내다니…….
아까 세드릭 황제의 말을 듣고도 의심스럽긴 했지만, 이건 완전히 대놓고 나를 사건의 중심에 끼워 넣으려는 거였다.
게다가 이 많은 인원을 내 쪽에 추가로 붙이기까지 한 걸 보니, 일을 크게 키우고 싶어 하는 라미엘의 의지가 느껴졌다. 아니면……. 이 정도 인원이 있어야만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의 큰일이 지금 그가 있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걸까?
“그래…….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지.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 준비를 마친 자들은 따라와라.”
“예, 1황녀님!”
어쨌든 이미 세드릭 황제의 허락까지 받았다는데 내가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레이엄 후작에 관해서는 애초에 나도 라미엘에게 알아서 하라고 판을 깔아 주었던 만큼, 그에게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싶기도 했다.
“그리고 제라드, 너는…….”
“저도 1황녀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나는 라미엘을 찾으러 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뒤를 따르던 수행원들을 돌아보았다.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제라드가 내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주저 없이 말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곳에 1황녀님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이 굳건한 태도였다. 나도 굳은 얼굴로 제라드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굳이 지난 일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내가 불과 며칠 전에 쓰러졌다가 어제 늦은 저녁에서야 눈을 뜬 걸 염두에 두고 저러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제라드는 이상할 정도로 내게 그 일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내가 피를 토하면서 쓰러진 걸 직접 봤으니, 바깥에 핑계를 댄 것처럼 과로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도.
그리고…… 의식을 되찾은 이후로 아직 기회를 잡지 못해서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나는 제라드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알려 줘야 할 일이 있었다.
제라드의 부친인 글렌 라스너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역시 제라드의 얼굴을 보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제라드에게 비밀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떤 일은 내 개인적인 사정으로 더 미루기만 할 수 없었다. 내가 마법사의 열병 때문에 혼절해 있던 동안 이미 며칠이나 시간이 지나 버렸으니까.
“아니. 제라드, 넌 남아.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어. 그러니 마리나에게 축제 시작 직전에 도착한 서신을 보여 달라고 하고,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해.”
원래는 내 입으로 직접 말해 주고 싶었지만, 갑작스럽게 라미엘의 일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빠른 시일 내로 적절한 시기를 찾기가 어려울 듯했다. 그래서 차라리 제라드에게 이렇게나마 혼자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했다.
그러나 이어서 제라드가 나를 조용히 응시하며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1황녀님, 제 부친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뭐?”
“1황녀님의 시녀에게 엊그제 이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나는 제라드의 말에 놀라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부친의 부고 소식을 들은 것치고 나와 마주하고 있는 제라드의 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문득, 라일락 꽃향기가 가득하던 밤에 제 부친의 소식을 듣고 내 품 안에서 무너졌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지금 내 앞에 있는 제라드의 모습은 그때의 그와 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에는 기억 속에 박힌 과거의 잔상과 지금 시야에 비친 광경이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제라드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제라드…….”
“1황녀님, 다행히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군요.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만약 지금 때맞춰 눈앞에 나타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안타까운 마음에 예전처럼 제라드를 위로해 주려고 그에게 손을 뻗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공교로운 시점에 나타나 내 손길을 막은 그들을 불청객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적절하지 못한 장소에서 내가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걸 억제한 그들을 반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희는 또 뭐지?”
제라드에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싸늘히 묻자, 가장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2황비님께서 1황녀님을 도와 1황자님을 모셔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2황비님이?”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싸늘히 입매를 비틀었다.
마리나의 말에 따르면, 내가 마법사의 축일 때 새벽 전당에서 쓰러진 것을 거의 모든 황족이 알고 있다고 했다.
물론 세드릭 황제의 묵인과 도움하에 단순한 과로가 원인인 것으로 처리되었다지만, 애초에 정말 모든 사람이 그 말을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특히 그동안 내 약점을 호시탐탐 노려 왔던 이들이라면, 더군다나 이 일을 이상하게 여길 게 분명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기껏 트집을 잡을 일이 생겼으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겠지.
그러니 2황비 카타리나가 이렇게 라미엘을 명목으로 삼아 내게 사람을 보내 온 것도, 내 상태가 어떤지 확인할 겸 나를 감시하려는 속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황비님께서 지난 나흘 내내 1황자님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셨습니다. 또한 1황녀님께서 과로로 몸져누우시고 아직 몸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으셨는데도 이렇게 1황자님을 위해서 앞장서 주신 것에 고마움을 표하시면서, 자신의 성의를 무시하지 말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2황비의 사람을 달고 밖에 나갈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2황비의 친족인 그레이엄 후작을 잡으러 가면서 그녀의 수족을 달고 가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단체로 야유회라도 나가는 줄 아나? 이 많은 인원으로 우르르 몰려가면 어떤 바보천치여도 이상한 낌새를 바로 눈치채고 달아나겠군.”
2황비의 사람이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나는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에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 그냥 더 말하지 못하게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고 나서 주위에 있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원래 그레이엄 후작을 추적하는 데 동행했던 인원만 조용히 따라와라. 그리고 너희는 2황비님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라미엘을 위해서라도 의심받을 만한 일은 삼가시라고 가서 전해라.”
“하지만 1황녀님…….”
“설마 폐하께서 정예로 붙여 주신 기사들을 2황비님이 믿지 못하시는 건 아닐 테지?”
“…….”
“이렇게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라미엘이 혼자 위험에 노출되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해.”
내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협박하듯이 덧붙이기까지 하자, 말귀를 알아들은 듯이 2황비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역시 라미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책임을 지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애초에 2황비의 목적은 이쪽이었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친히 사람을 보내 라미엘을 찾아오는 데 도움을 주려 했으나 내가 대놓고 거절했으니, 혹시라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제 2황비 쪽에서 그 책임을 내게 물으려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2황비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귀찮은 일을 벌이다니, 나는 라미엘을 보면 역시 그를 시원하게 한 대 때려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황궁을 나섰다.
*
사실 세드릭 황제에게 그레이엄 후작의 추적 명령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라미엘의 행적은 조금씩 파악해 두고 있었다.
황궁 조사실에서 그레이엄 후작이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 확실히 느낀 것인데, 라미엘의 그림자 마법은 내 생각 이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른 듯했다. 그는 가끔 그림자를 이용해 황궁 밖을 자유롭게 오고 가는 것 같았다.
물론 라미엘의 마법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나보다는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그림자를 쫓아 간간이 움직임을 파악하고는 했다. 그래서 라미엘의 말처럼 지금 그가 어디에 있을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
그러다가 나는 문득 내가 또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찬미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확실히 습관이 무섭긴 한가 보다. 아르벨라로서 살아온 지도 어느덧 19년.
사실상 유디트로서 살았던 시간이 더 길다고 할 수 있는데도, 그건 벌써 오래전의 과거라 그런지 지금의 내 자의식은 유디트보다 아르벨라 쪽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아르벨라로 사는 동안 누린 대부분의 것들은 원래 내게 주어진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잊지 말아야 했다.
황궁 안에서 사람들이나 물건을 대규모로 옮길 때 사용하는 전송 마법진의 좌표를 지정한 후 기사들이 이동하는 동안 세드릭 황제와 알현하기 전에 만났던 검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를 떠올렸다.
황궁으로 다시 돌아오면 이번에는 반드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까는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먼저 자리를 피했지만, 왜 그녀가 유디트로 살아가게 되었는지, 또 내가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했는지, 그녀에게 모두 알려 줘야 했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을 속셈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라 오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언니,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지 않으세요?”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내가 물어야 할 것도 있었다.
마법사의 축일에 균열이 나타난 이후,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을 가두고 있던 내 결계가 부서진 것을 느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녀와 그 일이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뭘 어쩌려고 그들을 내 손안에서 빼돌렸을까?
“1황녀님, 지정된 위치로 이동이 끝났습니다!”
기사들의 이동이 모두 끝나고 마지막으로 나와 제라드가 전송 마법진 위에 섰다. 결국 나는 제라드가 내 뒤를 따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1황녀님. 돌아가면 그레이엄 후작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법진이 발동하기 직전에 제라드가 입을 열어 내게 뜻밖의 말을 꺼냈다.
“경황이 없어 아직 정식으로 보고드리지 못했지만, 라스너 백작가에서 그레이엄 후작의 금단술 사용과 관련한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소리에 놀라서 제라드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황실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몇 년 전에 진작 라스너 저택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 보았을 텐데, 그때 당시에 찾아내지 못했던 게 이제 와서 나왔다고?
“라스너 백작가의 조사는 진작 끝났을 텐데? 당시에 그레이엄 후작에 대한 보고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고.”
“저만 아는 부친의 비밀 공간에 보관된 것을 우연히 찾았는데, 관련해서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글렌 라스너의 비밀 공간에 은밀히 보관되어 있던 증거라니……. 그렇다면 제라드의 손에 뒤늦게 발견된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그 말에 따르면, 설마 몇 년 전에 글렌 라스너가 금단술을 사용한 일과 그레이엄 후작이 연관되어 있다는 건가?
“또 그것 말고도…….”
내가 유디트일 때도 미처 몰랐던 사실에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제라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황녀님께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도 있으니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심코 시선을 들어 제라드의 얼굴을 마주했다.
거의 동시에 전송 마법진이 발동했다. 하얗게 퍼져 가는 빛 속에서 제라드는 곧은 시선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떠나려는 건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제라드가 내 옆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인 글렌 라스너가 죽었으니까. 아까부터 제 부친의 부고를 알고도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제라드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라드의 의견 따위는 내게 중요치 않았다. 그가 내 손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하든 말든, 옆에 강제로라도 주저앉혀 필요한 걸 그에게서 빼앗을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를 강제할 수도 없었고, 그를 죽이는 일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앞으로의 거의 모든 일이 불투명한 와중에 오직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고 나자, 내 마음에도 비로소 고요함이 찾아드는 것 같았다. 긴 꿈을 꾸고 깨어난 이후 줄곧 물결치던 마음이 마침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뭐든 들을 테니 돌아가면 말해 줘.”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막기 위해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
마침내 빛이 사그라진 자리에서 나는 제라드에게 닿았던 시선을 떼고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우거진 짙은 초록빛 잎들이 머리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숲에서는 젖은 이끼와 풀잎 냄새가 났다.
“1황녀님, 명령하신 봉쇄 작업이 모두 끝났습니다.”
먼저 도착했던 기사들이 반경 10테론 이내에 결계를 치고, 쥐새끼 한 마리도 오고 가지 못하도록 숲 전체를 봉쇄했다.
“안에서의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미리 선별한 정예조만 따라와라. 나머지는 각자 지정된 자리에서 대기하다가 신호가 울리면 움직여.”
라미엘이 가끔 황궁 밖으로 나가 몰래 드나들던 곳은 깊은 숲속에 있는 낡은 저택이었다. 기록을 보니 예전에 몰락한 어느 귀족의 별장으로, 현재는 이용되지 않은 폐건물인 듯했다.
좀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자, 버려진 고택 특유의 스산함을 간직한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직접 와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내 마력으로 새겨진 표식이 있는 걸 보면 제대로 찾아온 게 확실했다.
그런데 기이할 정도로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물론 저택 둘레에 제법 견고한 결계가 쳐져 있긴 했지만, 이건 그런 이유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이었다.
“지금 바로 결계부터 처리하겠다. 뒤로 물러나!”
시간을 더 지체하지 않고 마력을 움직였다. 결계가 손상되면 안에도 신호가 갈 테니, 최대한 강한 마력을 불어넣어 단번에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고 내가 직접 움직였다. 제라드는 그런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가, 결국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결계는 꽤 두꺼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에 악화된 마법사의 열병 증상으로 쓰러진 전적이 있어 혹시라도 뜻대로 마력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으나,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력이 움직이는 통로가 살짝 막힌 것처럼 묘하게 거슬리는 느낌에, 미세하게 눈매를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강력한 마력이 결계를 후려치자, 금방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반투명한 막이 깨졌다.
“윽……. 이게 무슨 냄새지?”
그런데 결계가 파괴되자마자 건물에서 은은한 악취가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폐부에 스미는 불길함에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재빨리 수색 마법을 사용하자, 건물 곳곳으로 뻗어져 나간 마력에 생명체의 반응이 잡혔다.
잠시 후, 눈앞에 수상한 기운을 드리운 문이 나타났다. 코를 찌를 듯한 악취는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앞서 건물에 진입한 기사들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파앗!
바로 그 순간, 거대한 마력이 안에서 돌풍처럼 불어닥쳤다. 기사들이 곳곳에서 펼친 방어막과 보랏빛 마력이 부딪혀 불꽃처럼 번쩍였다.
간신히 시야가 확보되었을 때, 어느새 내 앞에 서서 마력의 파장을 막아 내고 있는 제라드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에 익은 불길한 보라색 빛기둥이 솟구치는 광경이 보였다.
방 안에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짙은 피비린내가 가득 배어 있었다. 바닥에 기이한 수식으로 그려진 마법진과 그 위에 있는 죽은 생물체들의 사체가 악취의 원인이었다.
그레이엄 후작은 검붉은 피로 그려진 마법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밑에 의식을 잃은 듯이 쓰러져 있는 라미엘이 있었다.
“1황자님……!”
“그레이엄 후작, 도대체 지금 무슨 미친 짓을……!”
기사들이 경악해 소리쳤으나, 그레이엄 후작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
촤악!
굳은 피가 엉겨 있는 날카로운 칼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붉은 핏줄기가 튀었다. 그레이엄 후작은 그가 있는 곳에 뛰어 들어온 불청객의 존재를 무시한 채 제 손목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를 마법진 위에 뿌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그동안 내가 알던 그레이엄 후작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움푹 파인 어두운 눈이 꼭 광인의 것처럼 기묘한 광채를 발하며 번들거렸다.
“그레이엄 후작, 당장 멈춰! 윽……!”
기사들이 달려가 그를 포박하려 했으나, 강력한 마력의 소용돌이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나도 굳은 듯이 서서 방 안의 광경을 다시 확인했다.
나는…… 지금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유디트일 때,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 아르벨라와 제라드를 찾으러 갔던 자리에서 이것과 똑같은 광경을 보았었다.
그래서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차가운 바늘이 정수리에 꽂혀 들어오는 것 같은 섬찟함이 등골을 강타했다.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 그레이엄 후작이 이런 짓을?
그러나 생각을 깊게 이어 갈 겨를은 없었다. 다음 순간, 이번에는 번쩍이는 칼날이 라미엘을 향해 내리 찍혔다.
다행히 그레이엄 후작이 휘두른 칼은 원래 노리던 목표물의 목을 찌르지 못했다. 검에 마력을 덧씌운 제라드가 마법진 안에서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미세한 틈 사이로 예리한 날붙이를 찔러 넣었기 때문이다.
카앙!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력의 반작용이 일어났다. 거기에 휘말린 그레이엄 후작이 휘청였다. 빗나간 칼은 라미엘의 팔에 꽂혔다.
그때 나도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충분히 경악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다들 마법진 밖으로 나가!”
크게 소리쳐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방의 중앙에서부터 그려진 마법진은 완성한 시간이 꽤 지난 것처럼 갈색으로 말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나와 기사들이 막 밟고 들어온 문 앞쪽을 포함해 방의 가장자리에 그려진 마법진은 나중에 추가로 덧대지기라도 한 듯이 비교적 선명한 붉은빛으로 그려진 상태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대로 다 같이 금단술에 휩쓸려 제물이 될지도 모를 판이었다.
그레이엄 후작이 왜 지난 사흘이나 뜸을 들이다가 우리가 결계를 깨고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금단술을 사용했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급해져서 마법의 시행을 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 처음부터 금단술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우리들까지 인간 제물로 삼을 생각이었던 건가?
“그레이엄 후작! 당장 멈춰……!”
하지만 그런 것치고 그레이엄 후작은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라미엘의 팔뚝에 꽂힌 칼을 다시 뽑아 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라미엘을 공격하려 했다.
카앙……!
나는 내 마력으로 그레이엄 후작을 둘러싼 두꺼운 마력을 후려쳤다. 바깥의 결계와 달리 이쪽은 금방 깨지지 않았다. 그래도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타격을 입은 그레이엄 후작이 또 한 번 비틀거렸다.
마력을 빼앗아 힘을 키우는 금단술은 마력의 파장이 맞는 사람을 제물로 삼는 것이 기본 조건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레이엄 후작은 라미엘을 그 주요 희생양으로 만들 생각인 듯했다.
아직 마법이 완성되지 않은 것을 보니, 라미엘은 내가 처음에 방 안의 상황을 보고 우려했던 것처럼 숨이 끊어진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그레이엄 후작이 라미엘을 죽이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그레이엄 후작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오직 라미엘에게만 관심을 두었다. 그걸 본 내 머릿속에 강한 의혹이 심어졌다.
지금 내 눈에 비친 그레이엄 후작의 모습에서 짙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 꼭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사람 같았다.
도대체 이 일의 어디까지가 라미엘이 계획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이 라미엘이 원했던 게 맞기는 한 건가?
뜻하지 않게 라미엘이 사라진 후 사흘이나 공백이 생긴 탓에, 그의 계획에 어느 정도나 오류가 생긴 것인지 현재로서는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라미엘이 지금 여기서 그레이엄 후작의 손에 죽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을 거라는 점이다.
하필 그 순간 라미엘의 팔에서 흐른 피가 마법진에 닿았고, 마력의 폭풍은 한결 거세졌다.
“황녀님, 이쪽으로 마력을!”
카가가강!
그때, 제라드가 아까 그랬듯이 사납게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틈을 찾아 검을 휘둘렀다. 나는 제라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고 그가 검으로 벌려 놓은 틈에 마력을 집중해 쏟아부었다.
콰앙!
마침내 구심점을 잃고 터져나간 마력이 역방향으로 폭발하듯이 움직였다. 그것을 뒤집어쓴 그레이엄 후작에게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으아아악……!”
눈앞에 벼락이 내려치는 것처럼 빛이 번쩍였다. 마력의 파장을 이기지 못하고 뜯겨 나간 천장과 깨진 유리창의 파편이 사방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그레이엄 후작은 거칠게 날뛰는 마력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비틀거렸다. 부릅뜬 그의 눈에서 섬뜩한 붉은 피가 흘렀다.
나는 그레이엄 후작의 마법이 깨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금단술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금단술에 실패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타격을 입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레이엄 후작은 내가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피를 흘리며 서서 불길할 정도로 짙은 마력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레이엄 후작의 핏발 선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한순간 예전에 내가 봤던 아르벨라의 최후의 모습과 그레이엄 후작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1황녀님……! 상공에 균열이 열렸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도 내 기억과 동일하게 하늘에 균열까지 열렸다.
“그레이엄 후작에게 전부 결박 마법을 사용해!”
기사들에게 명령한 뒤 서둘러 하늘로 마력의 빛을 쏘아 보냈다. 아까 저택 밖의 결계를 깬 것을 첫 번째 신호로 삼아 근처까지 접근해 있던 지원군이 지금의 두 번째 신호를 보고 곧장 움직일 것이었다. 그 후 황실 마법사들에게도 따로 마력으로 만든 전령들을 보내 균열에 대한 소식을 알렸다.
다행히 균열이 완전히 열리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고, 주변은 이미 봉쇄를 끝마친 뒤라 추가적인 인명 피해에 대한 우려를 덜 수 있었다.
“크아악……!”
그레이엄 후작이 또다시 날카로운 울부짖음을 쏟아내며 발버둥 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자신을 사방에서 옥죄고 있던 수많은 결박 마법을 한순간 뿌리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평소의 모습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짐승 같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깨진 유리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당연히 나는 곧장 그레이엄 후작에게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시도는 불발로 돌아갔다. 다행히 경황이 없어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지만, 마법을 사용한 순간 마력이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제라드!”
눈을 번뜩인 제라드가 누구보다도 빨리 그레이엄 후작의 뒤를 쫓아 나갔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른 기사들도 뒤따라 그레이엄 후작을 쫓았다. 그사이에 내 마력도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천만다행스럽게도 일시적인 문제였던 듯했다.
나도 입술을 짓씹으며 부유 마법을 사용해 당장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제라드와 그레이엄 후작은 다행히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1황녀님, 그레이엄 후작을 포박했습니다.”
내가 걱정했던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레이엄 후작을 제압하는 동안 부상을 입은 듯이 팔과 눈가에 찢어진 상처가 보이긴 했지만, 제라드는 멀쩡히 서 있었다.
제라드에게 등을 짓밟힌 채 바닥에 엎어진 그레이엄 후작은 의식이 없어 보였다. 다른 기사들의 놀란 시선이 제라드를 향한 걸 보니, 아무래도 제라드 혼자 그레이엄 후작을 제압한 것 같았다.
나는 주변에 흩어진 익숙한 마력을 느끼고 제라드가 마법을 사용한 걸 알았다.
원래 이단자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건 금기 사항이지만 제라드는 예외였다. 몇 년 전에 라미엘에게 위협당한 일로 제라드는 자신을 보호할 만한 힘을 가지고 싶어 했고, 그래서 채택된 게 검술이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배움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가 어깨너머로 마법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도 남들 몰래 그에게 종종 마법을 가르쳐 주곤 했다.
당시의 나는 그저 단순한 변덕이라고 스스로의 이상한 행동을 합리화했으나, 생각해 보면 이미 그때부터 제라드를 옆에 두는 목적이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어 검에 마력을 입히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제라드에게는 그의 부친만큼이나 뛰어난 마법적 재능이 있었다.
“잘했어, 제라드 경. 1황자를 납치해 시해하고 금단술까지 사용한 죄인인 그레이엄 후작을 포박한 그대의 공이 크다.”
그리고 오늘, 나는 제라드에게 마법을 가르치길 잘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 나도 의연하게 제라드를 대했지만, 조금 전에는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겁도 없이 그레이엄 후작을 혼자 쫓아 나가다니, 그러다가 예전처럼 죽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놀랐는지 그가 알까?
아무튼 그렇게 그레이엄 후작은 붙잡혔다. 똑같은 금단술에 실패하고 카뮬리타를 초토화로 만들었던 이전의 아르벨라와 달리 허무하다면 허무한 최후였다.
아무래도 그레이엄 후작의 마법적 재능은 아르벨라와 비교할 수조차 없다 보니 비교적 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면 그레이엄 후작의 생각보다 제물인 라미엘과의 상성이 맞지 않았거나, 제라드를 죽이는 데 성공했던 아르벨라와 달리 그레이엄 후작은 라미엘을 완전한 제물로 삼지 못해서 힘을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진이 빠졌다. 다른 사람들도 포박당한 그레이엄 후작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이상하고 희한한 일이었다. 분명 내가 운명을 바꾼 건 아르벨라와 유디트인데, 느닷없이 그레이엄 후작이 금단술로 인한 괴물이 되어 버리다니.
“라미엘, 정신 차려!”
그 해답을 지금 내게 알려 줄 수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와, 나는 빛이 꺼진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레이엄 후작을 처리하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그 안에 쓰러져 있던 라미엘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창백한 얼굴로 의식을 잃고 있는 라미엘을 더 큰 목소리로 불러서 깨웠다.
“라미엘……!”
너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민 거야?
*
그 시각, 유디트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황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유디트 황녀님!”
목적했던 곳에 도착하자마자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디트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솔렘 왕국의 사람들은 방 안에 들어온 유디트를 향해 일제히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었다. 그들은 유디트를 보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한 얼굴이었다. 마치 이렇게 살아서 유디트를 만난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다는 듯이, 어떤 마법사들은 그녀의 앞에서 눈을 촉촉하게 적시기까지 했다.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동료들과 유디트 황녀님을 정식으로 다시 뵙게 될 날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디트에게 직접 은혜를 입은 라칸의 충성심이 가장 깊어 보였다.
유디트는 망토의 모자를 벗으며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수그린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솔렘 왕국 마법사들이 전부 모였다고 들었는데, 여기에 있는 인원이 전부인가요?”
“예, 지금 남아 있는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은 저희가 전부입니다. 모두 유디트 님을 모시기 위해 모인 충성스러운 심복들이니 믿고 뒤를 맡겨 주십시오!”
라칸은 이어서 유디트에게 더 깊이 고개를 수그리고 충성을 맹세했다.
“유디트 황녀님. 당신은 우리의 하나뿐인 빛.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충실한 종입니다.”
그러나 그가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갈수록 유디트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저희는 유디트 님을 위해 살고 유디트 님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 유디트 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언제든 주저 없이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다른 마법사들도 라칸의 말에 동의하며 한목소리로 유디트에게 충성스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하겠다고요?”
“물론입니다!”
어쩐지 한기 어린 눈으로 그런 마법사들을 내려다보던 유디트의 입술이 이내 미묘하게 비틀렸다.
“정말 개 같네.”
“예?”
혼잣말하듯이 낮게 읊조려진 신랄한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라칸과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당신들, 정말 충성스러운 개 같다고요.”
첫 마디의 어감이 좀 미묘하게 느껴져서 한순간 그들의 주인이 욕을 한 것인가 싶었으나, 고개를 들어 마주한 얼굴에는 여전히 순수하고 맑은 빛만이 가득했다. 이런 선량하고 상냥한 얼굴을 한 소녀가 욕설을 내뱉는 광경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유디트 황녀님! 앞으로 더 깊은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래서 라칸과 다른 마법사들은 유디트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한결 더 감복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유디트는 그런 마법사들을 지나쳐 그녀를 위해 준비된 상석의 의자에 앉았다.
한편, 하이어스 백작 가문에 숨어들어 황실 시녀로 일했던 솔렘 왕국의 마법사 미유는 유디트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아니, 스스로조차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불안감이 시작된 건 유디트가 이렇게 그들을 직접 찾아와 얼굴을 보이기 전부터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디트의 도움을 받아 황실의 지하 감옥을 탈출했다는 라칸이 갑자기 돌아와 1황녀 아르벨라에게 감금되어 있던 그들을 구출해 주었을 때부터…….
이미 그때부터 미유의 불안함과 두려움은 시작되어 있었다. 물가에 고인 안개처럼 소리 없이 밀려든 감정이 지금도 그녀의 뒷덜미에 소름을 돋아나게 했다.
그동안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애타게 기다려 왔던 주인을 이제야 마침내 눈앞에 두게 되었는데, 기쁘고 감동적인 마음이 들기보다 꼭 사냥꾼에게 올가미로 묶인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미유는 까닭 모를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의자에 앉은 유디트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유디트 황녀님, 얼마 전 열린 카뮬리타 제국민들의 축일 때 황녀님이 뛰어난 기량을 보이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유디트 황녀님은 역시 저희 솔렘 왕국의 희망이신 분. 허영심에 찌들어 화려한 외관만 갈고 닦을 뿐, 정작 실속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카뮬리타의 다른 황족들과는 역시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르십니다.”
반면 라칸은 이미 유디트에게 매료되어 눈이 먼 듯했다. 그는 미유가 느끼는 기이한 위기감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듯이 유디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입안의 혀처럼 그녀를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1황녀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특별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걸 보니, 역시 유디트 황녀님에게 밀려 활약하지 못했던 게지요. 실제로 유디트 황녀님이 제게 주신 마력석으로 1황녀의 결계를 손쉽게 깨지 않았습니까? 이제 보니 대단하다고 소문난 1황녀도 거품이었을 뿐,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별것 아닌 1황녀에게 완전히 압살당해 굴욕적인 꼴을 당한 데다, 이후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죽을 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라칸이 1황녀 아르벨라에 대한 악의가 물씬 밴 말을 지껄이는 동안 유디트의 입술에 그려진 싸늘한 미소도 점점 짙어졌다. 라칸은 유디트가 자신의 말에 즐거워하고 있다고 생각해 더 적극적으로 입을 놀렸다.
“그래서 유디트 황녀님, 저희는 언제부터 움직이면 될까요?”
“움직이다니?”
“1황녀에게 복수해야 할 것 아닙니까.”
라칸은 유디트가 1황녀에 대한 처단을 명령할 것이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유디트는 말없이 그런 라칸의 얼굴을 응시했다. 미유는 한결 짙어진 불안감에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유디트의 얼굴은 여전히 온화하기만 했다. 라칸을 향한 그녀의 눈도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런데 왜 이런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인지 미유는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유디트의 입술이 다시 천천히 떼어졌다.
“누구를 건드린다고?”
“사악한 1황녀 말입니다.”
라칸은 왜 유디트가 자꾸 같은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힐끗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지하 감옥에서 저를 꺼내 주실 때, 저희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을 가두고 겁박한 1황녀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분노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그는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한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물론 유디트 황녀님은 마음이 여리시니, 이렇게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을 꺼리며 망설이시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1황녀의 성격은 모질고 잔인해서 만약 그녀의 손에서 저희를 빼돌린 것이 유디트 황녀님이라는 사실을 알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신하가 되어 어떻게 주인이 위협받는 것을 무시할 수 있겠느냐며, 라칸은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디트 황녀님은 굳이 이런 일로 손을 더럽히실 필요 없습니다. 1황녀를 처치하는 건 저와 다른 마법사들이 할 테니, 유디트 황녀님은 그저 잠시만 눈을 감고 지금까지처럼 깨끗하게…….”
“무슨 같잖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 멍청한 놈아.”
바로 그 순간, 유디트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말이 방 안의 공기를 쩡 하니 얼어붙게 만들었다.
“너희는 정말 한결같구나. 내가 언제 너한테 그 애를 죽이라고 했지? 이제 보니 솔렘 왕국에는 내 생각보다 더한 머저리들만 모여 있나 보구나.”
비웃음마저 어린 신랄한 목소리에 라칸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처음으로 본 유디트의 낯선 모습에 입술을 벙긋거리던 라칸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유디트 황녀님……! 감히 황녀님의 생각을 마음대로 추측해 입을 놀리다니,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자신의 말실수로 주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태에서도 앞에서 느껴지는 써늘한 시선에 정수리가 따가웠다.
“멍청한 것. 그때 내가 짜증이 났던 건 그 애가 여전히 무르단 걸 알게 돼서 그런 거야.”
그러나 이어진 유디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잘됐다고 생각해. 너희가 그때 전부 죽기라도 했으면 나한테 기회가 없었을 것 아니야? 그럼 지금 내가 얼마나 서운했을까.”
그 순간 등줄기를 스친 본능적인 경계심에 마법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넌 멍청하지만 한 가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도 있구나.”
그들의 시야에 여전히 말간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는 유디트의 얼굴이 비쳤다.
“네 말처럼 1황녀는 모질고 잔인해서 절대로 원한을 잊지 않는단다.”
다정하게까지 들리는 나긋한 목소리와 흰 얼굴에 그려진 선명한 미소에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다음 순간, 유디트가 꼭 연주를 지휘하는 악단의 지휘자처럼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기억하는 유디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제라드 경.”
황궁으로 돌아온 유디트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궁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1황녀님과 외출했다고 들었는데, 이제 돌아온 거예요?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었어요?”
유디트의 물음에 제라드가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짤막하게 답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황녀님께서 폐하와 알현하시는 도중에 잠깐 들렀습니다.”
1황녀 아르벨라가 오전에 세드릭 황제와 알현하자마자 라미엘의 문제로 출궁한 것을 유디트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레이엄 후작의 은거지를 찾아간 곳에서 금단술의 보라색 빛기둥이 치솟는 것도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목격했다.
물론 하늘 위로 치솟아 있던 보랏빛 기둥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그러나 그때 나타난 균열은 괴수들을 모두 처리했음에도 아직까지 완전히 닫히지 않아, 지금도 하늘에는 음산해 보이는 틈이 벌려져 있는 상태였다.
예상보다는 확실히 이르지만, 세계의 시간이 끝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유디트는 열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래요. 그럼 혹시 못다 한 얘기를 마저 하려고 왔나요? 하긴, 어제저녁에도 그렇고, 아까도 긴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시기가 별로 좋지 못했죠.”
제라드는 여상한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디트를 잠깐 말없이 바라보았다.
유디트는 어제 늦은 저녁에 1황녀궁에 방문해, 어째서인지 제라드에게 만남을 청했다. 오늘 오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녀는 제라드에게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4황녀님께서 그런 허황된 말을 하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 그것은 분명 아주 이상한 말이었다. 예전에는 제라드가 유디트의 기사였고,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하며 함께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
제라드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선 유디트가 그의 말에 소리 없이 웃었다.
“하지만 제라드 경. 당신도 내 말에 흥미가 있어서 지금 이렇게 나를 찾아온 게 아닌가요?”
그녀는 제라드가 자신의 말을 허투루 넘기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는 듯했다.
오늘 오전에 1황녀궁의 정원 앞에서 만났을 때, 유디트는 그에게 아르벨라에 대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해 주고 싶다고 했다. 확실히 다른 무엇도 아닌 아르벨라에 대한 것이라면 제라드의 관심을 끌고도 남았다.
“당신은 정말 중요한 얘기를 아직 듣지 못했어요. 마침 이렇게 만났으니 지금 말해 줄게요.”
“유감스럽지만, 4황녀님.”
하지만 제라드는 단호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유디트의 말이 더 이어지지 못하게 잘라냈다.
“제게 이러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듣지 않겠습니다.”
확실히 그의 말은 유디트의 예상과 달랐다.
“그러니 더는 어제처럼 직접 찾아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유디트는 설마 제라드가 이렇게 자신의 말을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듯했다. 제라드를 응시한 유디트의 눈이 설핏 시린 빛을 띠며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후회할 텐데요…….”
“제가 알아야 할 일이 있다면 1황녀님께 직접 듣겠습니다. 그게 맞는 일인 것 같으니.”
그렇게 본론만을 전한 뒤, 제라드는 유디트에게 다른 볼일은 더 없다는 듯이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을 거예요.”
“설령 그렇다 해도.”
유디트가 다시 생각해 보라는 듯이 말했지만 제라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분께서 직접 말씀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유디트는 자신을 등진 채 걸어가는 제라드의 뒷모습을 차가운 황금빛 눈 속에 담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저 남자의 저런 점이 항상 거슬렸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그 마음은 스스로도 실소가 날 만큼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사실 처음에 그녀는 꿈에서 본 ‘유디트’가 자신인 줄 알았다. 매일 밤 그녀를 찾아오는 꿈속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도저히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 황실 연회 때만 해도 테라스에서 따로 만난 이 남자에게 가당찮은 연민과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자신이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그저 다른 사람의 생을 엿본 것을 착각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이 남자에게 품어야 할 것은 ‘유디트’로서의 친애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에 생각해 보자, 제라드에게 자신과 비슷한 오해를 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라드 경.”
유디트는 지금 저 건방진 기사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저 외골수인 남자는 정말이지, 예전부터 단 한 사람에게만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아르벨라일 때도 그 이름을 미끼로 삼아 저 남자를 죽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르벨라 언니는 곧 죽어요.”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나지막한 음성이 귀에 울린 순간,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등진 채 걸어가던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유디트의 목소리는 분명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제라드에게는 그것이 천둥만큼이나 거대한 울림으로 귓전을 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얼어붙은 얼굴로 뒤돌아보는 제라드를 향해 유디트는 희미하게 입매를 당겨 건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했잖아요. 당신, 지금 그렇게 가면 후회할 거라고.”
이번에야말로 제라드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그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당장 거기 가만히 서서 내 말을 들어.”
유디트는 마침내 입을 열어, 제라드에게 결코 믿고 싶지 않을 진실을 알려 주었다.
*
“오셨어요, 언니?”
그날 저녁, 유디트는 자신의 궁을 찾은 아르벨라를 평소처럼 여상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앉으세요. 이렇게 빨리 시간을 내주실 줄은 몰랐어요.”
“…….”
“마침 좋은 차가 들어왔어요. 언니와 함께 시음해 보고 싶어서 저도 아직 맛보지는 않았는데, 지금처럼 늦은 저녁에 마시기에도 좋은 차래요. 아니면 그냥 늘 드시던 차로 내오라고 할까요?”
아르벨라는 지금도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며 자리를 권하는 유디트를 응시하다가 입술을 뗐다.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온 것뿐이니 늘 마시던 차가 좋겠어. 오늘은 차를 시음해도 제대로 된 품평을 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유디트의 시선이 잠깐 말없이 아르벨라의 얼굴에서 멈춰졌다.
아르벨라는 오늘 오전에 1황녀궁의 정원 앞에서 유디트와 만났을 때보다 마음이 확실히 많이 차분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시선을 제법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유디트가 아르벨라를 보며 가볍게 생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그냥 늘 마시던 것으로. 새로운 차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시음해 보도록 해요.”
시녀들은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아르벨라와 유디트만 남기고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오늘 1황자님과 그레이엄 후작의 문제로 바쁘셨다면서요?”
“그래, 너도 같은 시간에 외출했었다지?”
유디트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화두로 먼저 말을 꺼냈다. 아르벨라도 담담하게 거기에 화답하듯이 대화를 이었다.
“수행원도 두고 혼자 움직였다고 하던데,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해야 할 일이라도 있었어?”
“꼭 그렇지는 않아요. 그보다 언니야말로 하필 공교롭게 균열까지 열려서 더 고생하셨겠어요. 괴수들을 모두 처리했는데도 균열이 닫히지 않아 비상이라면서요.”
“내가 예전에 큰 금단술을 사용해서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 언젠가 와야 할 일이 온 것뿐이지.”
아르벨라의 말에 유디트의 입이 막 다물어졌을 때, 시녀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오늘 제라드 경과 만났어요.”
시녀가 방에서 나갈 때까지 잠깐 대화가 끊겼다. 그리고 다시 둘만 있게 되었을 때, 유디트가 찻잔에 손을 대면서 먼저 태연히 제라드에 대한 말을 꺼냈다.
“아르벨라 언니가 폐하와 알현 중일 때 그가 나를 찾아와서요.”
아르벨라는 설마 유디트가 먼저 이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기 때문에 다리 위에 올린 손을 일순간 작게 움찔했다.
“그래. 오늘 낮부터 제라드의 감정이 엄청나게 동요하던데, 무슨 말을 했어?”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이었고, 곧 그녀도 동요 없이 물을 수 있었다.
사실 지금도 아르벨라에게는 이 자리에 없는 제라드의 혼란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오전에 제라드와 유디트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지금만큼은 아니어도 마음이 다소 소란스러웠었다.
그때 당시에는 단순히 과거의 일을 모두 기억해 낸 뒤 처음 보는 유디트의 모습에 자신의 감정이 동요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후에 생각해 보니, 이렇게 요동치는 감정은 자신에게서 야기된 게 아니었다.
“아아, 종속 각인……. 맞아, 그런 게 있었지.”
유디트도 아르벨라의 말을 듣고 이제야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별 얘기는 아니었어요. 그냥 그가 알아야 할 걸 조금만 알려 줬을 뿐이니까.”
아르벨라의 푸른 눈과 유디트의 황금빛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유디트.”
수많은 감정의 파도를 느끼며 시선을 마주한 끝에, 마침내 아르벨라는 오늘 이 자리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아르벨라. 먼저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
그 순간 방 안의 모든 소음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방의 한쪽에서 울리던 시계 초침 소리도, 두 사람이 숨을 작게 들이마시고 내뱉는 소리도, 옷자락이 스치면서 만들어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일시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무거운 적막감만이 들어찼다.
“아르벨라……라고.”
잠시 후 유디트가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속삭임을 흘려보냈다. 꼭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입으로 읊조려 다시 한번 되새기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이었다.
“만약 당신이 이대로 계속 모른 척하면 나도 그냥 지금처럼 지내도 괜찮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찻잔을 든 채 미동 없이 앉아 있던 유디트가 잠시 아래로 내리깔았던 눈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런데 결국은 나를 그 이름으로 불렀네요.”
지금 아르벨라가 한 말에 대한 의문이나 의심은 그녀의 눈에 담겨 있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르벨라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유디트는 자신을 ‘아르벨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여전히 고요한 모습으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망상인 줄 알았어요.”
조용한 음성이 짙은 침묵으로 가득 찬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다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고. 하지만 역시 그건 아니었던 거네.”
그리고 마침내 찻잔에서 완전히 손을 뗀 유디트가 덧붙인 말에, 아르벨라는 소리 없이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그래, 그럼 나는 당신을 유디트라고 부르면 돼?”
그 순간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이 예전의 카뮬리타 황실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과 모습을 바꾸어 사용하고 있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물론 그 시절에 지금처럼 아르벨라가 유디트의 궁에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러 찾아오는 일 같은 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편한 대로.”
“그래. 그 이름으로 불린 이상, 내가 당신을 평소처럼 아르벨라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지.”
유디트는 그렇게 말하며, 꼭 재미없는 농담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실소하듯이 얕은 웃음을 입술 사이로 내뱉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 먼저 하나만 물어볼게.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그러나 그 웃음은 금방 사그라졌다.
“처음부터 우리가 바뀐 걸 알면서 나를 옆에 두고 모욕할 속셈이었던 거야?”
겉모습은 여전히 어린 소녀의 것이나 그 안에 다른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가? 왠지 지금 아르벨라의 눈앞에 있는 유디트에게서 예전의 위엄 있던 황녀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는 듯했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건 당신이지. 솔렘 왕국에는 기이한 마법이 여럿 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리고 얼음 호수처럼 사늘한 황금빛 눈을 정면에서 마주한 순간, 아르벨라도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럼 나한테 복수할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어? 내가 그때 네 기사를 죽이고 네가 가지게 될 카뮬리타를 망쳐서?”
“아니야.”
그러나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의 아르벨라 역시 예전의 미숙하던 어린 황녀는 아니었다.
“마법이 불완전했어. 그래서 나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거고.”
유디트의 말은 역린을 찌르다시피 했으나, 그녀 역시 일부러 아르벨라를 자극하거나 공격할 심산으로 이처럼 노골적인 표현을 사용해 과거의 일을 들춘 건 아닌 것 같았다.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원래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 같은 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어.”
설명을 잇는 목소리는 담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침착하고 차분했다.
“일부러…… 복수할 속셈으로 그런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치욕스럽게 만들 생각으로 옆에 둔 것도 아니야.”
그 말이 진실인지 가늠하려는 듯이 유디트는 입을 다물고 아르벨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네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리네.”
그러다 잠시 후, 유디트가 닫혀 있던 입술을 다시 열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복수할 생각도 아니고 치욕을 줄 마음도 아니었다니. 그럼 왜 이런 이상한 상황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는 둘째치고서라도……. 내가 너한테 한 짓이 있는데 원망스럽거나 밉지도 않았단 말이야?”
“당연히 원망스럽고 미웠어.”
대답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불시에 튀어나왔다. 무의식중에 내뱉어진 말이니만큼, 정작 입을 열어 그 말을 한 사람도 멈칫했다.
지금 겨우 얼굴을 마주한 사람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미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것도 기만인 것 같았고, 방금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구태여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 말이 맞아. 나를 무시하기만 하는 당신이 미웠고, 특히 당신이 그를 죽인 후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처음으로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런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죽기 직전의 일들은…… 당신의 의지로 저질렀던 게 아니란 걸 아니까.”
“그걸 안다면서 내게 솔렘 왕국 사람들에 대한 건 왜 묻지 않니?”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냉소 섞인 유디트의 물음이었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네가 데리고 있던 솔렘 왕국 사람들은 지난 마법사의 축일 때 내가 빼돌렸어. 네 소중한 심복들에게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걱정되지 않아? 네 말대로라면 내가 그들에게 복수할 게 너무 당연하지 않나? 지금쯤 살점 하나 안 남기고 고통스럽게 죽여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러지 않았잖아.”
그러나 아르벨라는 단호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유디트의 말을 부정했다.
“죽이지 않았잖아.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 걸 알고 있어.”
비록 솔렘 왕국 마법사들을 가두고 있던 결계가 유디트로 인해 깨지고, 또 그들에게 걸어두었던 추적 마법도 파쇄되기는 했지만, 그들의 생사를 알 수 있도록 심어 둔 마법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유디트가 지금 말한 것처럼 그들을 해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왠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면 방금 말한 것처럼 잔인하고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아르벨라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녀라면.
확신 어린 아르벨라의 말에, 유디트는 잠깐 침묵한 채 마주한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황금빛 눈을 살짝 내리깔아 시선을 비끼며 말했다.
“일단 계속 말해 봐. 복수하려는 게 아니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아르벨라의 손끝이 매끄러운 옷감을 긁듯이 잠깐 지그시 누르다가 다시 펴졌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최후의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거든.”
그녀도 처음부터 그런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었다.
언젠가 솔렘 왕국의 마법사이자 자신의 충신이었던 미유가 말해 주었던 ‘운명을 바꾸는 마법’은 그녀가 세계의 이면에 끌려 들어가 완전히 갇히기 직전에 가까스로 떠올려 낸 것이었다.
하필이면 왜 그게 떠올랐는지는 지금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어쩌면 예전의 아르벨라가 유디트이던 그녀에게 누누이 하던 말처럼 정말 자신의 안에 음습하게 숨겨져 있던 삐뚤어진 욕망이 그 순간 발현되었던 것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때 머물러 있던 세계의 이면이 그녀에게 이런 비약적인 행동을 하도록 어떤 농간을 부린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간에, 그것이 당시의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 중에 그나마 상황을 조금이라도 타파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마법이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사실은 그녀 역시 반신반의하면서 사용한 방법이라 성공할 확률은 반의반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마법은 성공했다.
그러나 역시 완벽하지는 못했던 것인지, 그녀는 치명적인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유디트로 살았던 기억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진짜 아르벨라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채 살게 되었고, 원래의 자신이 품었던 결심이나 목적 같은 건 조금도 깨닫지 못한 채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신이 죽은 후에 카뮬리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기이한 공간에서 봤으니까.”
과거에 아르벨라가 죽고 난 뒤 다시 한번 찾아왔던 대규모의 균열. 그 안에서 쏟아지던, 이전까지와 조금 다른 형태의 괴수들. 그리고 도래한 세상의 끝.
두 사람 모두가 그 일을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좀 더 쉬워졌다.
“내가 방법을 알아.”
다행히 아직은 늦지 않았다. 좀 더 빨리 기억을 되찾았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가장 중요한 것을 떠올려서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을 수 있어.”
이전에 짐작했듯이 솔렘 왕국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마력과 금단술, 그리고 균열의 발생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었다. 이번에 닫히지 않은 균열이 생긴 것도,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그레이엄 후작이 금단술을 사용한 영향이 컸다.
비록 그레이엄 후작이 이번에 돌발적인 일을 벌인 것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늦든 빠르든 이번처럼 균열이 닫히지 않는 시점이 올 것이란 사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허둥지둥거릴 이유는 없었다.
“네가 저 균열을 완전히 닫을 수 있다고?”
“그래.”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그때는 내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 보랏빛 공간. 다른 말로 세계의 이면. 진리의 공간.
“방법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혹은 균열…….
그것을 어떤 단어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만약 정말 어떤 철학자들의 주장처럼 이 땅의 모든 생물체가 죽은 뒤에 가게 되는 사후 세계가 있다면 그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혹은 신에 의해 창조된 모든 생물체가 처음 이름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그 영혼이 잠시 머문다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지금의 아르벨라가 유디트일 때 그 보랏빛 공간 안에서 마지막으로 느꼈던 것은, 그곳이 죽음과 생, 혹은 그것을 초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미지의 공간이라는 사실이었다. 만약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보다 큰 단위의 공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 보랏빛 공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금단술과 솔렘 왕국의 마법은, 바로 그곳의 마력을 빌려서 사용하는 독자적인 마법식이었다.
원래 마법을 사용할 때는 마법사가 태생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마력으로 수식을 그리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나, 금단술과 솔렘 왕국의 마법식은 특이하게도 외부의 마력을 빌려 사용했다.
이 세계에 깃든 마력.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생물체라면 응당 풀 한 포기라도 가지고 있는 자연물의 마력과, 더 나아가 허공에 흩어져 있는 구심점 없는 마력들을 끌어모아 사용했기에 그 방법은 획기적이라 할 만했다.
아무리 그물을 촘촘하게 짠다 해도 숨구멍은 생기기 마련이었으니, 본래부터 이 세상과 세계의 이면 사이에는 미세한 틈이 존재하던 것이리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마력을 빌려 쓰면 쓸수록, 지금 이 세계와 세계의 이면 사이의 통로는 점점 넓어지고, 결국은 작은 틈에 불과하던 균열이 어느새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하늘 전체가 열릴 정도가 된 것이리라.
예전에 강력한 마도 왕국으로 부흥했던 솔렘 왕조가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만 것도 그 균열로 인한 재앙 때문이었다.
아마도 생존자 중에서 그 솔렘 왕조의 피를 가장 짙게 이어받았던 예전의 유디트, 즉 현재의 아르벨라는 그곳에 가장 많이 가 본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새장에 갇혀 그 보랏빛 공간에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 균열과 이 세계의 연결을 끊을 방법이 뭔지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계획을 위해서도 솔렘 왕국의 사람들은 필요해. 그러니 그들을 나와 만나게 해 줬으면 좋겠어.”
사실 유디트가 이런 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무언가를 작당하려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르벨라로서도 이런 말을 꺼내는 건 조심스러웠다.
“내가 수락할 거라고 생각해?”
아니나 다를까, 유디트는 아르벨라의 협조 요청에 순순히 응할 마음이 없는 듯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당신을 속이지 않을게. 원한다면 마법으로 맹세해도 좋아. 그걸로도 믿기 어렵다면 그들과 만나는 자리에 동행해도 무방해.”
아르벨라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설득했다.
“내가 아는 재앙을 막을 방법은 이것뿐이고, 거기에 실패하면 예전처럼 멸망을 반복할 뿐이야. 협박하려는 의도로 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애석하게도 앞으로 닥쳐올 큰 재앙을 막아 내는 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르벨라. 당신도 이대로 세상이 끝나기를 바라지는 않잖아. 사실은 당신이 누구보다 이 카뮬리타를 아끼고 사랑했던 걸 알아.”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손으로 직접 이 땅을 망치도록 조종했던 것이 바로 솔렘 왕국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을 만도 했다.
하지만 진짜 아르벨라라면 결국 이 제안을 무시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로…… 카뮬리타의 누구보다도 이 땅을 지키는 데 헌신적이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미묘하게 요점에서 비껴 나간 얘기를 하네. 지금 내가 제일 관심이 있는 건 카뮬리타의 안위니, 세상의 존망이니, 그런 게 아닌데.”
그래서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때, 그 의외성에 아르벨라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디트는 그렇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말을 내뱉은 뒤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응시해 오는 시선에 왠지 주변에 고인 공기의 농도가 한층 짙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은 시계 초침 소리만 노크하듯이 방에 내려앉은 침묵을 두드렸다.
유디트는 아르벨라가 무언가를 말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아르벨라도 그녀가 원하는 바가 뭔지 눈치챘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향한 시선만 잠자코 마주할 뿐, 먼저 입술을 열지는 않았다.
“나, 처음에 모든 걸 기억해 냈을 때까지만 해도 당신을 예전의 나처럼 만들어 주려고 했어.”
결국 침묵을 깨트린 건 유디트였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수치스럽게 만들어 주려고 했어.”
이어진 말에 아르벨라의 눈매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마법사의 축일 때도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
그저 담담하게 고백하듯이 읊조려진 목소리에는 그 내용과 달리 부정적인 감정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어.”
유디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듯, 아르벨라의 푸른 눈이 일순간 희미하게 미동했다.
그러니까 지금 유디트는……. 복수를 위해 아르벨라가 이렇게 몸을 바꾸고 일부러 접근한 것으로 오해했을 때조차 끝내 그녀에게 반격할 마음을 품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르벨라의 귀에 그것은 마치,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무래도 먼저 말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내가 직접 물을게. 균열을 닫아 세상을 재앙으로부터 구하고 나면 뭘 할 거지?”
그러나 뒤따른 물음은 제법 날카로워서, 아르벨라를 미묘한 감상에 오래 젖어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마법사의 열병을 고칠 방법은 없어. 그걸 알면서 왜 몸을 바꾼 거야?”
“그건…….”
“내가 아는 바보같이 착하고 물러 터진 너라면, 네 마법사들이 한 짓에 대신 책임을 지고 내게 보상하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이라도 했을 것 같은데.”
아르벨라가 무어라 설명하려 했으나, 유디트의 말이 덧붙여진 게 더 빨랐다. 그리고 그것은 아르벨라가 예전에 했던 생각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짚어 냈다.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올 듯이 마주해 오는 황금빛 눈에서 아르벨라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저 눈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 건강한 육신으로 다시 한번 살 기회라도 주고 싶었던 거야?”
유디트는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냉소를 짓는 건지, 아니면 잇새에 힘을 준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게 그녀의 입매가 비틀렸다.
“처음에 제라드 라스너를 옆에 둔 것, 마법사의 열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던 게 맞지?”
그 말 역시…… 아르벨라는 바로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신은 내게 치욕을 주려고 옆에 둔 게 아니라고 했지만, 분명 처음에 나를 눈에 담은 것도 좋은 의도는 아니었겠지.”
유디트는 아르벨라가 구태여 이 자리에서 꺼내고 싶지 않았던 역린들을 사정없이 찌르고 들어왔다.
“아르벨라 언니.”
그리고 지나간 시절을 반추하던 시간은 끝났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현실의 이름으로 부르며 다시 유디트로 돌아온 소녀가 과거의 흔적을 얼굴에서 지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를 사람들의 앞에 나서게 했어요?”
아르벨라는 두 사람 사이를 막듯이 놓여 있던 테이블 옆을 지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디트를 바라보았다.
“왜 그에게 남들에게 인정받을 법한 공로를 주고, 왜 언제든 스스로 족쇄를 끊고 나갈 수 있을 정도의 힘을 키우게 해 줬어요?”
유디트는 왜 제라드를 제물로 삼기 쉽게, 남들의 눈을 피해 숨겨 놓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왜 나를 냉궁에 가둬 혼자 말라 죽게 하지 않고 매일 찾아와 줬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왜 그녀에게도 필요 이상의 관심을 쏟았느냐고 물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또 당신이 내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것……. 왜 전부 다 무시하지 않고 들어줬어요? 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대신 벌해 주었죠?”
유디트가 왜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그럴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가진 어머니의 유품을 백야의 전당 마법사에게 보여 주라고 한 것도 당신이죠. 나를 당신 뜻대로 언제든 편하게 좌지우지하려면 그냥 천한 노예의 자식으로 멸시받으며 살게 하는 게 나았을 텐데.”
어느새 아르벨라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유디트가 조용히 멈춰 섰다. 작게 기울어지는 고개를 따라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차라리 나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빼앗기만 하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나도 그냥 지금 망설임 없이 당신을 버렸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