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얼굴을 살피듯이 다소 집요하게 응시하는 라미엘을 뒤로한 채 먼저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라미엘이 나를 부르며 따라왔으나 무시하고 그냥 걸었다.
라미엘까지 상대하기에는 오늘 내가 너무 피곤했다.
*
“앗, 황녀님……!”
며칠 동안 이상하게 몸 상태가 계속 별로더니, 결국 코피가 났다.
내 옷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옆에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무심코 손을 들어 피가 떨어지는 코를 막자 하얀 장갑에도 붉은 물이 들었다. 그걸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옷도 다 갈아입었는데 이게 무슨 짜증스러운 일이람?
“괜찮으세요, 황녀님? 어쩐지 요즘 너무 무리하신다 했어요!”
마리나가 황급히 손수건을 가져와 피를 지혈했다. 오늘도 건방지게 나를 책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뭘 그렇게 무리했다고 그래? 원래 계절이 바뀔 때는 혈관이 약해져서 코피가 날 수도 있는 거라고 그랬어.”
“19년 동안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으면서 무슨 소리세요!”
마리나……. 한동안 얌전하더니, 오늘따라 박력 터지네.
이런 마리나는 전투력이 급상승해서 내가 제 주인인 것도 잊곤 했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로 되돌려 주곤 했기 때문에, 나도 그냥 그녀와 실랑이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지혈이 되자 시녀들이 이번에는 피가 묻은 내 옷에 손을 대려고 했다.
“아, 됐어. 그냥 놔둬.”
하지만 이제 와서 씻고 옷을 바꿔 입기에는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마법으로 해결했다.
이미 오늘 저녁에 있을 큰 연회를 위해 단장한 참이라, 처음부터 그 과정을 반복하자니 몹시 귀찮기도 했다.
“오늘은 일찍 귀궁하시는 게 어떨까요, 황녀님?”
마침 피도 완전히 멎었다. 그래서 얼굴도 깨끗하게 만든 다음 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마리나가 나를 쫓아오며 권유했다.
그녀의 눈에는 나를 향한 염려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마리나가 걱정하는 게 내 건강만은 아니란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다. 마리나는 오늘 있을 황실 연회에서 내 기분이 상할까 봐 우려하는 중이었다.
“봐서. 어차피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
하지만 마리나와 길게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어서, 그냥 짤막하게 대꾸한 뒤 문을 나섰다.
“나오셨습니까, 황녀님.”
문 앞에 서 있던 제라드도 예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는 밖으로 나온 나를 보고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3황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가자.”
금방 갈무리하기는 했지만, 내 모습을 본 제라드에게서 순간적인 동요가 느껴져서 혹시 아직도 나한테 피가 묻은 곳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한번 훑어본 내 모습은 말끔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이 뛰어난 마법 천재님이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그럼 제라드의 저 반응은 뭐지? 그냥 새삼스럽게 내가 너무 예뻐서 놀란 건가?
“밀리엄. 오래 기다렸니?”
“누나! 우와, 오늘 되게 예쁘다!”
잠시 후, 나 못지않게 화려한 연회복을 차려입은 귀여운 소년이 나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이면서 달려왔다.
첫눈에 감탄을 숨기지 못하는 밀리엄을 보고 나는 흡족해졌다. 역시 나를 닮아서 그런지 그의 심미안은 쓸 만했다.
조금 거추장스럽긴 하지만, 오늘의 나는 누구나 한 번은 시선을 멈출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황실 재단사인 르벨린 백작이 나를 위해 짧은 머리카락에 맞춰 새로 디자인한 의상도 즐겨 입었지만, 그렇다고 드레스와 보석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일단 나는 무엇이든 다 잘 어울렸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었다. 분명 나는 거적때기를 걸쳐도 아름답고 우아할 거라고, 오랜만에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한테 달려오는 동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밀리엄은 내 앞에 도착해서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크흠. 오늘 굉장히 눈부신 모습이네요, 누님.”
나는 이 어린 녀석이 그래도 신사라고 여기까지 직접 나를 데리러 온 것이나, 지금 이렇게 내 앞에서 어른인 척하는 모습이 웃겨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맙구나. 너도 오늘 아주 멋지네.”
나도 밀리엄에게 제법 후하게 칭찬해 줬다. 그러자 밀리엄이 다시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서 기쁜 듯이 헤헤 웃었다.
“그럼 가자.”
“응! 저기, 손잡아도 돼?”
“손을 안 잡고 어떻게 에스코트를 하려고?”
내 말에 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던 밀리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내가 허락했는데도 내 손을 조심조심 잡았다. 그런 태도가 그동안 내가 밀리엄에게 어떤 누나였는지 보여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살짝 껄끄러워졌다.
지난 사냥제 이후 변한 것에는 밀리엄과 내 관계도 속해 있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밀리엄이 완전히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를 대하는 태도를 이제라도 조금씩 바꿔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도 예전보다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동안 밀리엄과 얽힌 일들이 있어서 그런지, 매번 내가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는데도 나를 누나라고 따르는 밀리엄에게 전처럼 마냥 냉담하게 굴기가 어려워졌다.
그런 이유로 오늘의 황궁 연회 때도 밀리엄의 파트너 요청을 수락해 연회장에 함께 입장하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황후 전하께서는 아주 흡족해하셨고, 나는 또 거기에 약간 청개구리 심보가 드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한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이렇게 기뻐하는 밀리엄을 보니, 그와 연회장에 가기로 한 것에 뒤늦게 후회되는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아르벨라 레온 카뮬리타 1황녀 전하와 밀리엄 윈드 카뮬리타 3황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밀리엄은 평소보다 더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펴고 아주 성심성의껏 나를 에스코트했다. 그런 내 뒤를 제라드가 따랐다.
황실의 어른들은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밀리엄과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귀족들이 인사를 하러 다가왔다.
“오늘은 1황녀님과 3황자님이 함께 입장하셨네요.”
“어쩜 보기 좋기도 하지. 두 분 전하들께서 이렇게 장성하시고 또 이리도 우애가 돈독하시니 황후 전하께서도 아주 흐뭇하시겠습니다.”
나도 그들에게 적당히 화답했다. 밀리엄도 나와 같은 황후 소생으로 평소에 어머니의 옆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 왔던 터라, 이런 상황이 어색하진 않은 것 같았다.
“1황녀님!”
그러다 낯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이렇게 몹시도 반가운 듯이 나를 부르며 팔랑팔랑 뛰어올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바비 몬테라였다.
“바비 몬테라가 1황녀 전하와 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몬테라 영식. 이번 황실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을 줄 알았더니.”
“예, 제가 사냥제 때부터 개도 안 걸린다는 한여름 독감에 걸려서……. 아이구, 제가 황녀님과 황자님 앞에서 이 무슨 경박한 소리를!”
바비 몬테라가 손으로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바비 몬테라를 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지금 그가 꺼낸 말처럼, 지독한 감기에 걸려 한동안 저택 밖으로 나온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만에 보는 바비 몬테라는 그동안 살이 쏙 빠져 귀엽게 동그스름하던 얼굴이 홀쭉해져 있었다.
“지금은 다 나은 건가?”
그걸 보고 혹시 바비 몬테라가 아직 감기를 전염시킬 가능성이 있을까 봐 우려되었는지, 밀리엄이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예, 지금은 멀쩡합니다.”
“그래, 지금은 완쾌한 것처럼 보여 다행이네.”
“전부 1황녀님과 3황자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런데 그는 더 할 말이 있는지, 인사를 끝마치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뒤이어 바비 몬테라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내 얼굴을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 보니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던데, 1황녀님의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영식.”
밀리엄이 그런 바비 몬테라에게 살짝 불쾌한 티를 냈다.
하지만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은 아까부터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작게 수군거리던 말이 내 귀에도 들어오던 참이었다. 감히 내 앞에서 직설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낼 사람이 없었을 뿐이지. 그런 의미에서 바비 몬테라는 몇 년이나 나를 쫓아다녔으면서 확실히 눈치가 없었다.
나는 기분이 나쁜 듯이 앞으로 나서는 밀리엄의 팔을 지그시 눌러 잡고, 태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카뮬리타의 태양은 지고하고, 그 빛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도 마땅히 축복과 가호가 따를 테니 심려할 만한 일이 뭐가 있겠나.”
바비 몬테라는 자신이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다고 서둘러 자신의 말실수를 사죄한 뒤 물러났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멋모르는 인간들이 떠드는 소리에 쉽게 현혹되어서는. 가뜩이나 저 몬테라 영식은 누나한테 너무 친한 척해서 거슬리는데 말이야.”
그래도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밀리엄은 바비 몬테라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면서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옆을 지나가던 시종의 쟁반에서 어른들이 즐기는 음료를 집어 마시려고 하기에 나도 자연스럽게 그걸 빼앗았다.
“그래. 멋모르는 인간들이 떠드는 소리이니 거기에 마음 상할 필요도 없겠지.”
그런 뒤에, 밀리엄에게 미성년자 중에서도 어린아이들이 마시는 음료를 새로 받아 건네줬다. 그는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그래도 내가 준 잔을 다른 것과 다시 바꾸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황실의 어른들은 오늘따라 늦는군.’
연회장에는 다른 황자와 황녀들만 도착해 있었다.
마리나 대신 데려온 시녀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녀가 금방 눈치채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에게 작게 물었다.
“라미엘과 클로에는?”
“불참하신다고 합니다.”
예상했던 답변이라 다른 질문을 더 하지는 않았다.
라미엘과 클로에, 그리고 2황비 카타리나가 이런 공식적인 연회 등에서 모습을 잘 보이지 않기 시작한 건 역시 그레이엄 후작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사냥제 기간에 행방이 묘연해져,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황제 폐하의 진노는 나날이 거세져 가고 있었고, 외부에도 그레이엄 후작에 대한 말이 새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바비 몬테라가 말한 심려할 말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벨라 언니! 오늘은 밀리엄이랑 같이 왔네.”
그때, 나와 밀리엄을 발견한 3황녀 리리아나와 5황녀 비비안, 2황자 로이드가 다가왔다. 그들은 나와 밀리엄에게 인사를 건넨 뒤 잠깐 주위를 둘러보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그럼 유디트만 아직 안 온 거야?”
“벨라 누나보다 늦게 오다니, 아주 건방져.”
“요즘 아바마마께서도 높게 올려쳐 주고 밖에서도 인기 좀 많아졌다고 완전히 살판났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유디트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내용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밀리엄도 요즘 유디트와 가깝게 지내지 않는 듯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그녀의 흉을 보는 건 듣기 싫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내 이복동생들의 우둔함이 이제 좀 지겨웠다. 예전 같으면 유디트를 비호하던 내 앞에서 이런 식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꺼낼 리가 없었지만, 요즘 들어 그들은 나를 자신들과 같은 무리로 묶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그래봤자 지금은 패망해서 사라진 솔렘 왕국 따위의 후손인 게 뭐가 대수라고…….”
“내 동생들이 여기가 황실의 내원인 줄 아나 보구나.”
더 이어지려던 그들의 대화는 중간에 내뱉은 내 말에 잘렸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샴페인 잔을 느릿하게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황실 연회에 참석한 게 몇 년이며 그 횟수는 또 몇 번인데 아직도 이곳이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착각하는 거지?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모두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면 대화할 내용은 좀 가려서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권유하듯이 말했지만, 다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듯했다.
지금 이렇게 황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유디트의 얘기를 해 봤자, 군침을 흘리며 이쪽을 주목하는 이들에게 맛 좋은 먹잇감을 던져주는 것밖에 안 되었다. 가뜩이나 요즘은 황족들을 대상으로 한 자극적인 이야깃거리에 목이 마른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벨라 언니는 속도 좋아. 언니도 지금 사람들 반응이 이상한 거 알잖아?”
하지만 역시 말귀를 한 번에 알아들으면 내 동생들이 아니지. 리리아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죽인 채 속닥거렸다.
“유디트가 노예 태생인 줄 알았다가 사실은 옛 마법 왕국의 피를 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아바마마도 지나치게 걔를 챙기고 말이야.”
“맞아. 제국민들 반응도 이상해. 유디트의 촌스러운 모습이 소박하고 친근한 황녀님인 걸로 포장되면서 이상하게 인기가 많아지고 있다니까?”
“귀족들 중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알고 보니 유디트가 가장 순수한 피를 가진 황족이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언니는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
얘네들은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연회장에 와서 이러지? 하긴, 그동안 내가 바빠서 같은 황궁 안에 있어도 따로 만날 시간이 없긴 했구나. 그나마 조금 전의 내 말을 듣고 목소리를 작게 낮춰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지금 동생들이 속닥거린 말을 듣고 나는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나를 자극하려고 없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니란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물론 카뮬리타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황족이 나라는 사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하루하루 늘 비슷하게 흘러가던 사람들의 일상에 혜성처럼 새로 나타난 신선한 존재였다.
더군다나 노예 소생으로 태어나 황실 사람들과도 잘 섞이지 못하고 밖에서도 거의 잊혀 가고 있던 반쪽짜리 황녀가 사실은 누구보다 정통성 있는 핏줄을 가지고 있었다니. 게다가 이렇게 아름답고 상냥한 황녀님으로 성장하기까지 했다니!
이는 당연히 사람들이 환장할 만한 소재였다. 유디트의 남다른 과거는 금방 사람들의 연민을 샀고, 그녀의 꾸밈 없는 모습은 쉽게 호감을 이끌어 냈다. 이것은 분명 늘 선망의 대상으로 제국민들의 위에 군림하려 노력해 온 다른 황족들이 따라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말하자면, 다른 황족들과 유디트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부분 자체가 달랐다.
유디트가 본격적으로 영상 마력석을 외부에 풀고 세드릭 황제의 계획하에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인기는 그야말로 깜짝 놀랄 만큼 급상승했다.
나는 내가 세계의 이면에서 봤던 미래의 내용을 떠올렸다. 확실히 지금의 이런 상황은 꿈에서 본 책 속의 내용을 연상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내 동생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 말에 귀 기울일 시간에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 낫지 않겠어?”
“언니!”
“누나!”
내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복동생들이 인상을 구겼다. 오직 밀리엄만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내 동복 남동생이 저렇게 품위 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만족스러웠고, 그래서 밀리엄의 머리 모양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디트 카뮬리타 4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바로 그때, 유디트의 등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렸다.
다른 황자, 황녀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유디트의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진작 내게 연락을 취해 오늘 황궁 연회에 같이 참석하면 안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을 유디트가 이번에는 어쩐 일로 조용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뒤를 이어 연회장에 울린 이름을 듣고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세드릭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심통 난 참새들처럼 내 앞에 서 있던 황녀, 황자들이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돌렸다. 나도 이번에는 눈살을 설핏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연회장 안에 우리들의 부친인 세드릭 황제와 유디트가 함께 나타났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유디트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연회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수런거렸다.
‘우리 부황께서는 요즘 중도란 걸 모르시는군.’
나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차갑게 미소 지었다.
리리아나를 포함한 황녀, 황자들의 말대로 요즘 세드릭 황제는 유디트를 노골적으로 편애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유디트가 마력을 개화시켰을 때도 그동안 무심하던 딸에게 급격한 관심을 갖기는 했었다. 오랫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딸에게 나름대로의 죄책감이라도 느껴졌는지, 뒤늦게 이런저런 지원을 해 주기도 했고.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이렇게 황제인 그가 직접 연회 자리에 유디트를 데리고 나오는 일까지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유디트가 솔렘 마법 왕국의 황족이란 사실을 알게 되니까 옆에 끼고 있을 마음이 든 거지.’
세드릭 황제가 그동안 노예에게서 본 유디트를 자신의 유일한 오점으로 생각한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쓸모없는 돌멩이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사실은 황금이었다고 하니, 세드릭 황제로서는 기껍기도 할 것이었다.
게다가 백야의 전당 마법사들이 유디트가 진짜 솔렘 왕국 후손이라면 이후에 또 한 번 각성을 통해 여기서 마력 양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확언한 데다, 지금까지 유디트의 가장 큰 흠이라 할 수 있던 혈통적인 문제도 해결된 셈이었다.
그래서 세드릭 황제는 역시 유디트의 모친을 선택했던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살짝 역겨운 자부심마저 느끼는 기색이었다.
그래봤자 솔직히 내가 보기엔 이런 꼴 전부가 웃길 뿐이었다.
물론 유디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혹시 모르지. 그래도 거의 처음 받아 보는 부친의 애정에 설레 기뻐하고 있을지.
아무튼, 밖에서도 유디트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높아진 데다 세드릭 황제가 요즘 거의 유디트만 옆에 끼고 다니자 사람들도 거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고 있었다.
오죽하면 원래 나한테만 맡겼던 공식적인 일정도 몇 개는 유디트에게 주어졌고, 그녀는 그것을 곧잘 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동생들처럼 유디트에게 질투심이 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유디트의 목걸이를 레반테온에게 알리게 한 것에 대해 후회하느냐고 하면…… 글쎄. 그건 아니라고 확답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나는 형식상의 미소를 띤 얼굴로 연회장에 입장한 유디트와 세드릭 황제를 보았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것을 환영하오. 모두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라오.”
간단한 황제의 축사가 끝난 뒤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었다.
황제는 유디트를 직접 연회장에 데려온 것으로도 모자라, 귀족들의 인사를 받는 동안 그녀를 옆에 계속 데리고 있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꼴이 뒤늦게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 딸을 배려해 귀족 사회에 쉽게 섞여들 수 있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꼭 희귀한 장식품이라도 옆에 달고 나온 양 혼자만 신이 나서 으스대는 모양새였다.
물론 그래도 유디트가 저 자리를 좋아하며 반기고 있다면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닐 테지만, 그녀의 얼굴은 내가 알고 있는 유디트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무표정하기만 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다른 곳에 닿았다. 나는 옆에 있던 세드릭 황제가 슬쩍 쳐다볼 정도로 몸을 움찔 떨면서 연회장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는 유디트를 따라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늦게 연회장에 도착한 듯한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있었다.
“아바마마.”
“오, 1황녀. 3황자도 같이 있었구나.”
나와 밀리엄이 다가가자, 생각에 잠긴 듯이 가라앉은 눈으로 한곳을 응시하던 유디트가 퍼뜩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그래, 오늘따라 연회장의 술이 달구나.”
나는 황제 폐하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웃는 낯으로 유디트를 쳐다봤다. 역시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얼굴에는 혈색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내 뒤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곳에 제라드가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눈을 설핏 가늘게 떴다.
“아바마마께서 즐거우시다니 저희도 기쁘군요. 참, 유디트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이가 있는데, 지금 그녀를 데려가도 될까요?”
“지금 말이냐?”
세드릭 황제가 마뜩잖다는 듯이 유디트를 힐끔 쳐다봤다. 내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유디트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 역시 몸이 안 좋은데 황제 폐하께 억지로 끌려 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말은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지만, 그냥 유디트를 이 정신없는 곳에서 빼내 가려고 둘러댄 것임을 누가 모를까.
“아니요.”
그런데 뜻밖에도 유디트가 먼저 내 제안을 거절했다.
“1황녀님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조금만 더 아바마마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유디트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거부의 말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유디트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아 나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유디트는 바보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에둘러 건넨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도 바보가 아니었다. 하여 지금 유디트가 진짜 우리들의 부친인 세드릭 황제의 옆이 좋아 이곳에 남겠다고 한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얼굴을 차갑게 굳힐 뻔했지만, 고작 이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흔들릴 만큼 표정 관리를 하는 데 미숙하지는 않았다.
“오, 그래. 4황녀가 이 아비 옆에 남고 싶다니. 얼마든지 뜻대로 하거라.”
세드릭 황제도 유디트의 말을 예상치 못한 듯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곧 흡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보니 4황녀님께서 폐하를 아주 잘 따르시는군요. 제 딸은 철이 들 무렵부터 비슷한 나이의 형제자매나 친구로 사귄 영애들하고만 어울리고 좀처럼 제 옆에 오지 않으려 하던데 말입니다.”
“폐하께서 그만큼 인자하고 자애로우시니 황자님과 황녀님들이 이토록 잘 따르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카뮬리타의 황실이 화목한 것은 만백성의 복이지요.”
가까이에 있던 고관대작 중 일부가 약삭빠르게 세드릭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반면 내 옆에 있던 밀리엄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유디트가 나를 거절하자 울컥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유디트. 내가 네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구나. 아바마마의 곁에서 함께 연회를 즐길 기회가 확실히 자주 있는 건 아니지.”
연회장 안에는 지금 우리를 주시하는 눈이 많았다. 그러나 누가 무엇을 원하든 내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아바마마와 좀 더 시간을 보내렴.”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황녀님.”
내 말을 들은 유디트가 나를 향해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에서조차 평소와 다른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니. 네가 그동안 아바마마를 그리워한 것을 내가 잘 아는데. 내가 네게 소개하고 싶었던 다른 귀족들도 충분히 이해할 거란다. 그러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나는 유디트에게서 시선을 떼고 세드릭 황제에게 인사했다.
“그럼 아바마마, 저희는 먼저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남은 연회도 즐겁게 보내시길.”
“편안한 저녁 시간 되십시오, 아바마마.”
밀리엄도 나를 따라 예의를 지켜 인사를 남겼다. 그런 뒤 나와 밀리엄은 먼저 자리를 비켰다. 세드릭 황제와 유디트로부터 거리가 조금 떨어지자마자 밀리엄이 삐죽거리는 입술을 뗐다.
“유디트가 왜 저러지? 설마 우리랑 같이 있는 것보다 아바마마 옆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낫다는 거야? 더군다나 지금은 유디트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누나가 도와주려고 일부러 말을 건 건데 말이야.”
밀리엄은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의 일이 불쾌했는지 작게 투덜거렸다. 아직 어려도 황족은 황족이라, 밀리엄도 내가 유디트에게 함께 자리를 옮기자고 권유한 이유가 뭔지 눈치 빠르게 알아챈 것 같았다.
“아니면 설마 정말 소문처럼 자기 위치가 달라졌다고 이제 와서 아바마마한테 붙고 우리는 무시하겠다는 거야, 뭐야? 나는 그렇다 쳐도 누나가 그동안 자기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내 동생이 도대체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듣고 온 건지 모르겠구나. 괜히 앞서 생각해서 열 내지 마, 밀리엄.”
나는 밀리엄을 진정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중간에 그의 말을 끊어냈다.
“유디트는 지금 네가 한 얘기와 비슷한 말 한마디도 우리한테 꺼낸 적이 없잖아. 또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애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솔직히 나도 내 말을 거절하는 유디트는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방금 그녀의 앞에서 멈칫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의 유디트는 정말이지, 내 말이라면 사과나무에서 포도가 열린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전부 잘 따라 왔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내가 처음 유디트를 가까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원하고 바라 왔던 대로 말이다.
아무튼, 밀리엄의 생각대로 내가 유디트에게 잘해 줬던 게 오로지 순수한 선의 때문이었던 것도 아니라, 설령 유디트가 정말 변한 것이라 해도 그녀를 마치 은혜도 모르는 괘씸한 사람인 양 말하는 건 애당초 이치에 맞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찜찜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밀리엄을 다독이며 방금 본 유디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어째서인지 나와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유디트의 출생이 밝혀졌을 때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바뀔 것은 예상했지만, 나를 대하는 유디트의 모습이 변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오늘 본 그녀의 모습은 내게 몹시도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는 동안 나도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치, 또 내 앞에서 유디트 편드는 거야?”
그때 밀리엄이 살짝 심통이 난 듯이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진심으로 마음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고, 그냥 자신을 달래 달라고 일부러 투정을 부리는 모양새였다.
“즐거워야 할 연회 날에 내 동생의 기분이 상하는 게 싫어서 그러지.”
나는 빙긋이 웃으며 밀리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뒤,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침 음악이 바꾸었구나. 그럼 특별한 시간을 위해 누나와 한 곡 춰 주지 않을래?”
여자가 남자에게 에스코트를 신청하는 손 모양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한테 댄스를 신청할 때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밀리엄의 뺨과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와 역할이 바뀌어서 자존심이 상해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밀리엄이 나를 보는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밀리엄과 내가 같이 파티에 참석한 것도, 또 이렇게 내가 먼저 같이 춤을 추자고 한 것도 처음이라 그는 기쁜 것 같았다.
“좋아. 누나는 내가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모르지? 오늘 깜짝 놀랄걸.”
밀리엄이 잘난 척하듯이 으스대는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오늘은 나도 그런 밀리엄의 얼굴이 거슬리지 않고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소리 없이 미소를 지은 채 밀리엄의 손을 잡고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별로 참석하고 싶은 마음은 없던 연회이나, 그래도 이런 시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
제라드는 연회장의 한구석에 서서 춤을 추는 아르벨라와 밀리엄을 바라보았다. 연회장의 벽 쪽에는 제라드 말고도 주인을 따라 연회에 참석한 기사들이 몇 명 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라드는 특히 아르벨라의 종속 기사로 인기를 끄는 중이라 수많은 사람의 관심과 시선을 집중 받았다.
연회에 동행한 호위 기사라 해도 어느 정도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건 가능했다. 그래서 이렇게 아르벨라를 기다리며 대기하는 동안에도 제라드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늘 연회를 즐기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대화나 춤을 청하는 사람들을 모두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 제라드의 태도는 예의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두 번 권하기 어려울 만큼 단호하고 서늘했다. 급기야 나중에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소리를 아예 듣지 못한 것처럼 내내 고개를 정면에 둔 채 무반응으로만 일관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제라드는 댄스 홀을 가득 채운 첫 곡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의 달갑지 않은 접근으로부터 제법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제라드의 시선은 저 멀리서 춤을 추는 밀리엄과 아르벨라에게 꽂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 남동생과 춤을 추는 아르벨라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그녀의 기분이 한결 나아 보여 제라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아르벨라는 정말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다. 그래서 비록 오늘의 황궁 연회 또한 공식 일정이기는 하나, 어쨌든 간에 아르벨라가 이렇게 여유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제라드 경.”
그때 누군가가 제라드를 불러 왔다. 그는 이번에도 듣지 못한 척했다.
“제라드 경.”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끈질겼고, 다시 들어보니 귀에 들어온 음성은 제라드에게 꽤 익숙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부른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얘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고요한 황금빛 눈으로 제라드를 보고 있던 소녀가 그의 시선을 받고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살구꽃처럼 연한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진주와 생화로 장식한 아름다운 소녀.
제라드를 찾아온 사람은 바로 4황녀 유디트였다.
연회장에 입장할 때부터 세드릭 황제와 함께 있던 유디트였으나 지금 그녀는 혼자였다. 그런데 유디트가 이렇게 제라드를 따로 찾아와 대화를 청한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제라드는 또 거절하려다가, 일전에 유디트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마다 그랬듯이 오늘도 아르벨라와 그녀의 관계를 떠올리고 대화하는 것을 수락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곳은 시선이 많으니 잠깐 자리를 옮겼으면 해요.”
제라드도 그들을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끼고 있던 참이라 침묵했다. 1황녀 아르벨라의 종속 기사로 얼마 전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제라드와 요즘 황녀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급부상하기 시작한 유디트의 조합은 수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내고도 남았다.
제라드는 아르벨라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마침 이제 막 첫 번째 곡이 끝난 참이었다. 한순간 아르벨라와 눈이 마주쳤으나 그녀는 제라드를 보다가 금방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춤을 청한 수려한 청년의 손을 잡았다. 그는 킬리안 베른하르트였다.
결국 제라드는 유디트의 청을 받아들였다. 마침 그들이 있는 곳은 테라스와 가까웠다.
두 사람이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그들을 쫓던 시선들도 사라졌다.
밤에 가까운 늦은 저녁 시간이라, 하늘은 짙은 남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낮의 열기가 한풀 꺾여 서늘하게 식은 바람이 제라드의 붉은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제라드는 먼저 테라스로 나간 유디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유리문 앞에 멈춰 선 채 거리를 둔 상태로 말했다.
“짧게 본론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디트 역시 황녀인지라 그의 말투는 아르벨라를 대할 때처럼 정중하다면 정중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유디트는 불빛이 반짝이는 테라스에 서서 그런 제라드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기이하게도 그 눈빛은 꼭 어딘가 그리우면서도 익숙한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아릿해서, 제라드는 그것이 못내 의아했다.
“4황녀님.”
유디트에게 시간을 오래 내줄 마음이 없었던 제라드가 독촉하듯이 부르고 나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제라드 경은…… 지금 1황녀님의 밑에서 행복하나요?”
그런데 유디트에게서 마침내 나온 질문이란 게 참으로 맥락 없었다. 하물며 친분이 없는 관계에서 대화의 소재로 삼기에 지나치게 사적인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디트는 제라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재차 이상한 질문을 이어갔다.
“1황녀님이 제라드 경에게 잘해 주세요?”
제라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것을 묻다니, 유디트가 지금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유디트는 제라드가 아르벨라의 기사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제법 친밀하게 여기는 듯했다. 아르벨라와 함께 있던 지난 몇 년 동안 이상할 정도로 가까워질 기회가 없던 두 사람이지만, 유디트는 아르벨라라는 공통점만으로도 제라드에게 호의를 품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런 선 넘은 행동이라니.
“1황녀님께는 늘 과분한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제라드는 조금 전보다 한결 메마른 목소리로 짤막하게 답했다. 딱히 흠잡을 곳 없을 정도로 판에 박힌 정석적인 대답이었지만, 그만큼 성의 또한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 제라드의 반응에 유디트가 살짝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겠죠. 1황녀님이 제라드 경에게 베푼 것들은 저도 그동안 직접 보고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어쩐지 유디트 스스로도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것을 인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후로 그녀는 제라드를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로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내보였다. 하지만 제라드로서는 유감스럽게도, 유디트의 이상한 물음은 거기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혹시 1황녀님이…… 제라드 경을 옆에 둔 이유가 뭔지 말씀해 주시던가요?”
그 말을 듣고, 제라드는 무의식중에 아르벨라를 처음 만났을 무렵의 일을 떠올렸다.
“네가 내 마음에 들었거든.”
아직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었다. 제라드는 그 시절에 아르벨라와 나누었던 대화를 전부 기억했다. 하다못해 그녀와 함께 있던 순간의 달빛이 얼마나 찬란하게 밝았는지, 또 그때 아르벨라가 제라드를 보며 어떤 식으로 미소를 지었는지, 망막에 새겨진 것처럼 그 모든 것이 전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라드. 네가 온실에서 그랬지. 어디든 너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가고 싶다고.”
“그러니 갈 곳이 없다면 내 옆에 있어. 너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지금 떠올려도…… 아니, 그것을 떠올린 것이 지금이기에 더욱 달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아르벨라의 입에서 나온, 그를 원한다는 말은.
만약 지금 아르벨라가 그를 불러 다시 한번 저런 말을 해 준다면…….
제라드는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을 고민했냐는 듯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도대체 자신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제라드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르벨라에게 저 말을 들은 과거의 바로 그 순간, 제라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각인되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마음과, 또 그런 마음을 품게 된 계기라고도 할 수 있는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4황녀님께 답변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제라드의 입에서 다소 무엄하게도 느껴지는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순간 얼어붙듯이 굳은 유디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감정은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유디트는 마치 제라드에게 이런 식으로 냉정하게 선을 긋는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럼 이것 하나만, 정말 이것 하나만 대답해 줄 수 없을까요?”
하지만 유디트는 금방 마음을 추스르고, 조금 전보다 한결 차분해진 고요한 눈을 들어 다시금 제라드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라드 경은 1황녀님에게 진심으로 충성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만약 1황녀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충심이 깊으냐는 뜻이에요.”
제라드는 정말 진심으로, 평소에는 제법 눈치도 있고 선을 지킬 줄도 알던 4황녀가 오늘은 왜 이렇게 정도를 모르는지 의혹이 생겼다.
물론 이 또한 답변하기 쉬운 질문이기는 했다. 더군다나 이것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제라드가 아르벨라에게 품은 감정은 결코 단 한순간도 기사의 기본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충성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제라드의 눈에 선득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혹시 이 어린 황녀가 지금 그에게 이따위 질문을 꺼낸 이유가, 그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물론 제 주인이신 1황녀님께는 언제나 충정 어린 마음으로 신의를 다하고 있습니다.”
제라드는 그 어느 때보다 유디트에게 두꺼운 벽을 친 상태로 거짓말을 했다.
유디트가 그런 그에게 또 뭐라고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벌렸으나, 제라드가 허용하지 않았다.
“4황녀님. 제가 대답해야 할 이유가 없는 질문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저는 1황녀님의 기사로, 4황녀님께는 제게 이런 것을 물을 자격이 없으십니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냉혹한 음성이 두 사람 사이에 떨어지고 나서야 유디트는 찬물을 맞아 정신을 차린 듯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실수했다는 듯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잠깐 침묵했다.
“네, 그래요. 맞아요. 제라드 경의 말이 합당하네요. 제가 자격 없는 질문을 했어요.”
잠시 후 다시 입을 연 유디트의 모습은 이제야 평상시의 그녀 같았다. 묘한 이질감을 풍기던 조금 전의 기이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유디트는 본래의 총명한 빛을 띤 눈으로 제라드를 보았다.
“그냥, 제라드 경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제 질문이 굉장히 이상하게 들렸겠지만……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혹시 나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요.”
언제 집요하게 굴었냐는 듯이 깔끔한 사과까지 이어졌다. 제라드도 먼저 고개를 숙여 오는 유디트에게 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제라드는 이곳에 더 남아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유디트에게서 돌아섰다. 먼저 테라스를 나서는 제라드의 등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이 꽂혔다. 하지만 거기에 그를 돌아서게 할 만한 가치가 있지는 않았다.
제라드는 사람들의 숱한 시선을 받으며 테라스에서 나와, 그의 주인인 아르벨라에게 돌아갔다.
*
‘뭐지?’
나는 조금 전에 본 광경을 떠올리며 의문을 느꼈다.
춤을 추면서도 시선은 간간이 지금 손을 맞잡고 있는 사람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분명 연회장의 한구석에 서 있던 유디트와 제라드가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그런데 도대체 왜 둘이 같이 움직인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세드릭 황제와 함께 있을 때도 유디트는 내 뒤에 선 제라드를 유심히 쳐다봤었다. 연이어 발생한 유디트의 영문 모를 행동에 나도 모르게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황녀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그러다 문득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테라스 쪽을 힐끔거리던 눈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와 춤을 추던 남자가 수려한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1황녀님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일이 많다는 건 알지만, 지금 이곳은 연회장이고 또 제게 허락하신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좀 더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아까 유디트가 주위의 시선도 모두 잊은 것처럼 빤히 쳐다보던 사람은 제라드 말고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지금 나와 춤을 추고 있는 남자, 킬리안 베른하르트였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이 세 사람 사이의 묘한 공통점에 의혹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다른 때 같으면 내키지 않아 핑계를 대서 거절했을 킬리안의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모처럼의 기회인 걸 알면 내가 다른 곳에 한눈 팔지 않게 재미있는 얘기라도 해 보지 그랬어?”
방금 킬리안이 한 말에 일부러 도발적으로 응수하자,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비스듬한 미소를 지었다.
“서운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다른 이들은 전부 제 얼굴만 봐도 즐겁다 하던데.”
나는 킬리안의 말에 기가 찼다.
아니, 물론 킬리안 베른하르트의 외모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럭저럭 괜찮은 건 사실이지만, 보통 본인 입으로 이런 소리를 하나?
게다가 킬리안의 말처럼 만약 내가 누군가의 얼굴만 봐도 배가 부르고 즐거운 경우가 있다면, 그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뿐일 터였다.
하지만 뒤이어 귀를 파고든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생각대로 콧방귀를 뀌며 킬리안을 비웃어 주지 못했다.
“게다가 제 손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테라스 쪽을 보시느라 이후의 말들을 전부 흘려들으신 건 1황녀님이십니다.”
음악을 따라 몸을 움직이며 나는 그제야 킬리안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킬리안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늦가을의 서리가 내린 듯했다.
나는 지금 킬리안의 기분이 살짝 날카롭게 날 서 있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킬리안의 말을 듣고 그와 춤을 추는 동안의 일을 곰곰이 되짚어 생각했다.
‘정말 킬리안이 나한테 뭐라고 얘기를 했는데 내가 전부 다 흘려들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 걸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나한테 무슨 말을 했었는데?”
“제 말을 전혀 듣지 않으셨다는 걸 너무 깔끔하게 인정하시는군요.”
킬리안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기울어졌다. 그는 변명조차 하지 않는 내 태연한 반응이 약간 허탈한 듯했다.
나는 정해진 스텝대로 왼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에게 말했다.
“이미 다 눈치챘는데 괜히 아닌 척해 봤자 기분만 더 나쁘지 않겠어?”
“어떻게 제가 감히 1황녀님께 그런 불순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이미 눈빛으로 말하고 있으면서 말은 잘한다. 게다가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나한테 은근히 얄밉고 건방지게 굴었던 게 하루 이틀 전의 일인 것도 아니었다.
“불순한 자로 치자면 베른하르트 소공작이 내 주변에 있는 사람 중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
“그 무슨 서운한 말씀이신지.”
딱히 킬리안을 달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의 기분도 좀 나아진 듯했다.
곧 눈동자 속의 날카로운 냉기를 한풀 꺾은 킬리안이 조금 전에 내가 던진 질문에 답했다.
“오늘 1황녀님의 파트너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내 파트너? 밀리엄 말이야?”
“더 정확하게는, 제 에스코트 신청을 거절하시고 누구와 함께 연회에 참석하실까 했더니 3황자님이라 조금 의외라고 말씀드린 참이었죠.”
킬리안의 말을 듣고 나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별로 시답잖은 얘기도 아니었는데 나한테 무시당했다고 방금 성질을 부렸단 말이지?
“딱히 의외라 할 건 없지. 밀리엄은 내 동생이니까.”
“그렇지요. 우애 좋은 모습이 보기 좋아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킬리안이 이제 와서 정중한 신사인 척하며 내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만개한 꽃처럼 펼쳐지고 머리 위의 샹들리에 불빛이 함께 춤을 췄다. 그러다 언뜻 옆을 스쳐 지나간 커플을 보고 하마터면 헛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어느 영애의 긴 머리카락이 몸을 빙글빙글 돌릴 때마다 파트너의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참사를 눈치채지 못한 듯이 춤에 열중해 있었다.
“저도 1황녀님께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그러나 여기서 웃음을 흘리면 킬리안을 또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 목이 간지러워도 참았다. 그때 킬리안이 지나가듯이 내게 말을 꺼냈고, 나도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를 가볍게 겨냥한 그의 물음은 제법 예리했다.
“1황녀님이 조금 전부터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건, 유달리 아끼시는 여동생과 종속 기사 중 어느 쪽입니까?”
킬리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답했다.
“당연히 유디트지.”
“왠지 그렇게 답변하실 것 같았습니다.”
킬리안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내 말을 받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목소리는 조금 미묘해서, 왠지 그 안에 뭐라고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킬리안과 이 화제로 더 얘기하기 껄끄러워져서 말을 돌렸다.
“베른하르트 소공작은 오늘 유디트와 인사를 나눴어?”
“제가 연회장에 들어와 1황녀님께 처음 인사드린 것이 조금 전 춤을 청할 때였지요. 그러니 그보다 먼저 4황녀님과 인사를 나누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꼭 유디트보다 나를 더 우선시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였다.
“요즘 유디트에게 관심을 가진 귀족들이 많던데, 베른하르트 소공작은 제법 무덤덤해 보이네.”
“물론 4황녀님께서 자리에 맞는 영광을 누리게 되신 것은 축하할 일이나, 달리 동요할 이유는 없지요.”
그의 말처럼, 황실에서의 위치가 변한 유디트에게 갑자기 노골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몇몇 귀족들과 달리 그녀를 대하는 킬리안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조금 전에 본 유디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킬리안의 얼굴을 살피듯이 주시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은 유디트에게 다른 관심은 없나?”
조금은 충동적으로 그를 떠보았다. 아까 킬리안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유디트의 모습을 보고 의심 어린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열여섯 살이면 한창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가질 만한 나이이기도 했다. 게다가 내가 본 미래에서는 유디트와 킬리안이 맺어지기도 했었고……. 물론 유디트가 제라드도 오래 쳐다보긴 했지만, 지금까지 내 옆에 있는 제라드와 마주칠 때마다 딱히 그런 종류의 호감을 품은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으니까.
“다른 관심이라니, 혹시 지금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의미로 물어보신 게 맞는지요?”
한편, 킬리안은 내 말이 굉장히 황당한 듯했다. 오죽하면 한순간 춤의 박자까지 놓쳤을 정도였다.
“물론 4황녀님은 충분히 매력적이시지만, 제가 관심을 갖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신데요.”
그리고 이내, 킬리안이 살짝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덧붙인 말이 단호해도 너무 단호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든, 앞으로도 4황녀님께 제 열정을 바칠 정도로 마음이 끌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에 나는 눈썹을 추어올렸다.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렇게 장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순간 내 입에서 생각을 거치지 않고 불쑥 튀어나온 건, 그런 이성적인 말이 아니라 지극히 감정적인 반박이었다.
“유디트가 뭐 어디가 어때서?”
내 불쾌함이 나조차도 의아했다.
킬리안도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는 나를 보고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킬리안이 좀 괘씸하게 여겨졌다. 오늘 유디트가 나한테 데면데면하게 군 건 둘째 치고, 어쨌거나 지금의 유디트를 만드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한 사람은 바로 나라고 할 수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그 애를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고, 물론 그 속에 흑심이 들어 있었다고는 해도 어쨌든 이날 이때까지 나는 나름대로 유디트를 고이 잘 키워 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팔이 안으로 굽게 되었나 보다. 킬리안의 말에 왠지 내 자존심이 묘하게 상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내 생각은 모순적이었다. 원래 나는 유디트가 누구나 볼 수 있는 햇빛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게 아니라, 계속 내 그늘 속에 조용히 머물기를 원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유디트가 내가 만든 새장 속에서 나가지 않기를 바라니까.
“그럼 1황녀님께서는 제가 지금 4황녀님께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면 기분이 더 좋으셨을 거란 말입니까?”
킬리안과 나는 거의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때마침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음악이 끝나서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동선을 방해해 시선을 집중 받는 일은 없었다.
나는 내가 순간 너무 감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걸 깨닫고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방금 소공작의 말이 좀 무례하게 들렸던 건 사실이야. 그래도 먼저 민감한 질문을 꺼낸 내 탓이기도 하니까 방금 나눈 대화는 우리 둘 다 잊기로 하자.”
딱히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아니었기 때문에 살짝 찌푸렸던 표정을 펴고 덧붙였다. 그러나 킬리안의 굳은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올 줄 몰랐다.
춤이 끝나 인사까지 마치고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한 사람들 틈에서 킬리안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얕은 실소를 내뱉는 그는 왠지 아까보다 더 허탈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내 손을 내려 내 앞에 드러난 킬리안의 눈에는 마치 상처받은 것 같은 눈빛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 킬리안과 얼굴을 마주한 적은 많았지만 이런 표정을 지은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잠깐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에, 킬리안이 먼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나도 그냥 입을 다물고 댄스 홀에서 벗어났다. 바비 몬테라를 비롯해 나한테 춤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금 테라스에서 나온 제라드가 다가왔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 없는 얼굴을 한 채 내게 물었다.
“소공작과 다투셨습니까?”
“몰라.”
나는 괜히 머리가 좀 아파졌다.
‘바보같이 나한테나 호감을 품고 말이야.’
굳이 내색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지금까지 그냥 모른 척하고 있긴 했지만, 나도 눈치가 그렇게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애초에 말했지 않은가? 자매간의 치정은 질색이라고 말이다.
물론 앞으로 유디트가 킬리안을 좋아하게 될지 아닐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내가 아는 미래의 내용이 그렇다 보니 쉽게 방심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제라드가 나온 테라스에서 뒤따라 모습을 드러낸 유디트가 보였다. 그녀는 바로 다른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다시 내 시야에서 가려졌다.
다른 때라면 당장 유디트를 저 복잡한 틈바구니에서 구출해 주러 갔을 테지만, 오늘은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다가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오늘 유디트에게 두 번은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좀 쉬고 싶네. 조용한 데로 가자.”
그래서 작게 혀를 찬 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밀리엄도 또래의 어린 귀족 자제들과 어울리느라 바쁜 듯해서, 지금 굳이 내가 방해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넌 유디트랑 무슨 얘기했어?”
“중요한 대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비밀이라는 거야?”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을 내놓은 제라드에게 막 눈을 흘기던 찰나에, 누군가 나한테 몸을 부딪칠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제라드가 손을 들어 바로 그 사람을 막아냈다. 연회장에서 술을 조금 많이 마신 듯한 사람이 얼른 사과한 뒤 옆을 지나쳐 갔다.
“일단 자리를 옮긴 뒤에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를 살짝 잡아당겨 보호하듯이 옆쪽을 팔로 막고 있던 제라드가 내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아까 킬리안이 내게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1황녀님이 조금 전부터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건, 유달리 아끼시는 여동생과 종속 기사 중 어느 쪽입니까?”
무심코 눈매를 움찔 찡그렸다. 예기치 못했던 질문에 당황하기라도 한 듯이 아까 킬리안에게는 곧바로 유디트라고 말했지만, 사실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유디트와 제라드 둘 모두가 신경 쓰였다. 한 명은 내 동생이고 다른 한 명은 내 기사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러니 딱히 남에게 숨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굳이 남에게 들키기 싫은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는 점에서, 내가 애써 외면하려 하는 진심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까 킬리안이 내 대답을 듣고 미묘한 반응을 보인 이유도, 내가 거짓말을 한 걸 간파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자 어쩐지 나는 살짝 입이 썼다.
“제라드.”
“네.”
“내가 먼저 걸어가면 넌 5초 정도 기다렸다가 따라와.”
내 갑작스러운 명령에 제라드가 눈썹을 추어올렸다. 나는 그의 불만을 무시하고 앞서 걸어갔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다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조금 전처럼 또 다시 내 뒤에 가깝게 붙어서 따라오고 있던 제라드에게 까칠한 눈빛을 보냈다.
“5초 기다렸다가 따라오랬지?”
“명령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얄미울 만큼 천연덕스럽게도 말했다.
“1황녀님보다 보폭이 넓어 본의 아니게 금방 따라잡은 게 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나보다 자기 다리가 길다는 말을 하는 건가?
기분은 좀 나빴지만, 그래도 제라드의 키가 쓸데없이 큰 건 사실이니 한편으로는 저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좀 더 구체적인 단위를 기준으로 들어 그에게 다시 명령했다.
“그럼 열 걸음 떨어져서 따라와.”
“사람이 많은 연회장에서 1황녀님을 호위하기에 거리가 너무 멉니다.”
“그럼 다섯 걸음 뒤에서 따라와.”
“세 걸음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아예 나하고 흥정하듯이 얘기하다가 제멋대로 결정하고 통보하는 제라드에게 기가 막혔다.
하지만 제라드의 말처럼 아직 연회장을 벗어나기 전이라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아, 더 입씨름하지 않고 그를 한번 째려본 뒤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우리는 시끄러운 연회장에서 완전히 벗어나 복도로 나왔다. 황족들의 휴식 공간은 따로 준비되어 있어서, 조금 더 걷자 길에서 마주치는 귀족들도 없어졌다.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은은한 음악 소리에 섞여 작게 들렸다.
그러다 문득 연회가 시작하기 전처럼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을 코에 대 보니, 또 피가 묻어 나왔다. 이번에는 바로 마법으로 지혈하고 피를 깨끗이 닦아냈다. 그런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복도를 걸었다.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제라드는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제라드. 너 라스너 백작가에 다녀오고 싶다고 했지?”
그렇게 조금 더 걷다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제라드에게 말했다. 그 순간 뒤에서 이어지던 발소리가 멎었다.
“허락하지. 다녀와도 좋아.”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건 아니었고, 생각한 지는 조금 되었다. 다만 마음을 정하고 나서도 제라드에게 말하지 않고 속에 담아두고만 있다가 이제야 입을 열었다.
내 뒷모습에 꽂힌 시선이 한결 강렬해졌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준비가 끝나면 네가 원할 때 출발해.”
그러고 나서 다른 말은 더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등 뒤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명령했던 세 걸음보다 발소리가 더 가까이 다가온 데 이어, 서늘한 손이 내 팔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달빛을 머금은 은회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제라드는 무엄하게도 나를 직접 붙잡아 세운 걸로도 모자라서, 한동안 가만히 서서 내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기까지 했다. 그런 그를 벌할 수도 있었지만 나도 그러지 않았다.
이내 제라드가 내 팔을 쥔 손에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여진 약속을 듣고 나는 그냥 ‘그래.’ 하고 말했다.
가을의 정취에 녹아든 반짝이는 불빛이 반딧불이처럼 황궁 곳곳의 어둠을 밝혔다. 연회의 밤이 서서히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
클로에는 연회가 열리는 궁전의 불빛이 가장 잘 보이는 2황녀궁의 테라스에 나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심심해. 다들 연회장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나만 이게 뭐람.”
클로에가 화려한 파티 같은 걸 유달리 좋아한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렇게 연회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수한 옷차림을 한 채 한가하게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조금 전에 시녀를 불러 파티에 참석하듯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치장해 보기도 했지만, 못 먹는 감 찔러만 보는 것도 아니고 곧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은 허무한 마음이 들어서 그냥 관두었다.
“클로에, 너 뭐 하냐?”
“라미엘 오빠!”
그때 클로에가 있는 테라스에 라미엘이 나타났다. 마침 할 일이 없던 클로에는 반갑게 라미엘을 맞았다.
“오빠도 심심해서 왔어? 마침 잘됐다. 나랑 같이 연회 기분이나 내 볼래?”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오빠들의 존재가 그렇듯이, 클로에도 평소에 라미엘과 오래 같이 있으면 열받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때 같으면 이렇게 라미엘을 환대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예전의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그리웠다. 그러니 라미엘이라도 있으면 조금은 흥이 날 것 같아 그를 붙잡았다.
“오빠도 요즘 그 요란하게 치렁치렁한 옷들 못 입어서 좀이 쑤시지? 어차피 지금 이 시간에는 아무도 우리한테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제대로 연회 분위기 나게 아예 옷도 갈아입고 올래?”
“그럴 시간 없어. 그냥 잠깐 밖에 나가려다가 들러 본 거야.”
하지만 이어진 라미엘의 말에, 클로에는 들뜬 얼굴로 당장 시녀를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그래도 네 말처럼 오늘은 연회장 밖의 이목이 덜할 테니까 심심하면 어머니한테 가 보든지.”
라미엘은 테라스의 티 테이블 위에 있는 관상용 사과를 들어 통째로 씹어 먹으며 말했다. 클로에는 그런 라미엘을 보면서 눈을 치켜떴다.
다음 순간 클로에가 라미엘이 먹던 사과를 빼앗아 바닥에 패대기치면서 버럭 소리쳤다.
“아, 진짜! 어차피 오빠가 말 안 해 줄 거 아니까 나도 웬만하면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외숙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래? 혹시 일단 시간을 벌어 놓고 뒤에서 무고하다는 증거라도 모으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 아무리 물어도 라미엘은 명확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클로에도 이후에는 그에게 그레이엄 후작에 대해 물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답답해서 저절로 큰 소리가 나왔다.
“라미엘 오빠가 외숙부를 잡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고 있는 거 맞지?”
클로에와 마찬가지로, 어차피 라미엘은 그레이엄 후작에게 불리한 일을 할 수 없었다.
클로에도 사실 그레이엄 후작에게 가족으로서의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그의 안위가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그레이엄 후작 때문에 자신과 어머니, 그리고 라미엘이 피해를 보는 게 더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처럼 외가 쪽의 문제로 크게 노심초사해서 의기소침해져 있지는 않았다.
“나중에 말해 줄게. 넌 지금까지처럼 옆에서 어머니나 잘 돌봐 드리고 있어.”
라미엘이 심통 난 강아지 털을 쓰다듬어 달래 주듯이 씩씩거리는 클로에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면서 또 그녀의 말을 흘려 넘겼다.
뒤에서 클로에가 성질을 부리며 왁왁거리든 말든, 라미엘은 망설임도 없이 그 길로 바로 사라져 더욱 그녀의 성질을 돋구었다.
“짜증 나, 진짜!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맨날 애 취급이야!”
클로에는 신경질을 내면서 라미엘이 서 있던 곳과 가까이에 놓인 의자를 걷어찼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다가 발가락을 의자 다리에 잘못 부딪쳐 악, 소리를 지르며 한참 동안 낑낑거려야만 했다.
잠시 후, 아직도 짜증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 클로에가 시녀를 불렀다.
“지금 어머니한테 갈 거야. 거추장스러우니까 너만 따라와.”
“예. 알겠습니다, 2황녀님.”
클로에는 최소한의 수행원만 데리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2황녀궁을 나섰다.
혹시라도 부친인 세드릭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경을 칠까 봐 우려돼, 요즘은 클로에도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눈에 띄는 짓을 하지 않도록 자중하는 중이었다. 평소에 눈치가 없는 편인 클로에였지만, 그녀에게도 이 정도 주변머리는 있었다.
클로에는 예전이라면 누구보다도 호화롭게 황궁 연회를 즐기고 있을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응? 쟤 유디트 아니야?”
그런데 2황비궁으로 가던 길에, 클로에는 지금 연회장에 있어야 할 사람을 발견했다.
생각대로 지금 황궁 안의 대부분의 인력과 이목은 연회장에 집중된 상태라, 다른 궁들은 비교적 한적했다. 유디트는 마치 보호색처럼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색상의 망토로 몸을 가린 뒤 수행원도 없이 그 한적한 길을 걸어 어디론가 혼자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클로에가 유디트를 주시해 온 게 몇 년인데 망토로 몸을 가렸다고 해서 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걸으면서 망토 자락이 살짝 흐트러져 드러난 얼굴은 역시 클로에의 눈에 낯익었다.
클로에는 망토 밑으로 드러난 유디트의 화려한 행색을 가늘게 뜬 눈에 담았다.
“쟤 완전히 출세했네. 난 이런 꼴로 궁에 처박혀 있는데…….”
클로에의 입에서 작은 투덜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동안 조용히 2황녀궁에만 틀어박혀 있던 클로에가 할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그녀는 황실 안의 소문들을 전부 섭렵해 유디트에 대한 소식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코딱지만 한 마력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던 유디트에게 갑자기 뛰어난 마법적 재능이 생긴 것도 놀라웠는데, 이번에는 숨겨져 있던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기까지 하다니. 사실상 카뮬리타 황실에서 유디트의 존재를 오점이라 여기며 다른 이복 남매들에게도 무시받도록 만들었던 치명적인 흠들이 한순간에 모두 깨끗이 사라진 셈이었다.
그러니 철없던 예전의 자신이라면 이렇게 유디트가 혼자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다가가서 화풀이 삼아 괴롭혀 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클로에는 이제 그 정도로 유디트가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 때때로 유디트에게 살짝 미안함 비슷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팔자가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보다도 더 화려한 매일을 보내고 있는 유디트에게 못된 짓을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클로에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클로에의 걸음은 금방 다시 멈춰졌다.
그런데 쟤는 어딜 가는 거지? 방금 사라진 곳은 지하 감옥이 있는 궁전 쪽인데…….
이 야심한 시각에, 더군다나 요즘 들어 부쩍 커진 세드릭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지금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연회를 즐기고 있어야 할 유디트가 왜 혼자 궁을 활보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디트가 사라진 곳을 보다가,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여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시각, 라미엘은 클로에의 예상대로 그레이엄 후작을 찾아갔다.
벽에 길게 그려진 검은 그림자에서 조용히 튀어나온 라미엘이 주위를 살폈다.
‘지독한 냄새로군.’
밀폐된 방 안에 고인 동물의 사체가 썩는 냄새가 역했다. 라미엘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에 손을 댔다. 겉으로는 티 나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마력이 마법진 안으로 흘러들어 회로를 손상시켰다.
그레이엄 후작은 지금까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동안 그가 무수히 많이 시도해 온 금단술의 실패 요인은 바로 라미엘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레이엄 후작이 하는 일을 방해하자마자 왈칵 피를 토해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조금 속이 쓰리고 목구멍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오는 정도였다.
라미엘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피가 섞인 침을 옆으로 뱉어 낸 뒤,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들였다.
이후에 그가 향한 곳은, 같은 건물 안에 있는 그레이엄 후작의 침실이었다. 그림자 밖으로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잔이 날아왔다.
“1시간이나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간이 부었구나.”
라미엘은 아무렇지 않게 그레이엄 후작이 던진 것을 피했다.
“최대한 빨리 온 거예요. 외숙부도 제가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운 거 아시잖아요.”
그레이엄 후작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은 라미엘이 대충 대꾸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 건들거리는 모양새가 예전만큼 공손하지 않고 퍽 시건방졌다.
그레이엄 후작은 그런 라미엘이 거슬리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라미엘이 그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었기에 예전처럼 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림자를 통해 이동하는 라미엘의 마법은 아르벨라와 다른 마법사들도 꼬리를 잡기 어려워, 지금처럼 몸을 숨기고 있는 상황에서 꽤나 유용했다.
“밖의 상황이 어떤지나 말해 봐라.”
“지금까지와 비슷하죠. 그나저나 외숙부. 요즘도 계속 시도하고 있는 마법은 진척이 없나 보네요?”
“닥쳐라! 적당한 제물을 구하기가 어려우니 당연한 것 아니냐?”
그레이엄 후작은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짓씹듯이 욕설을 내뱉는 모습에서 초조함마저 엿보였다.
그레이엄 후작의 얼굴은 예전과 비교해 확연히 초췌해져 있었다. 황궁 조사실에서 빠져나온 이후로 도피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데다, 요즘은 강박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금단술을 계속 시도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금단술을 사용하는 건 시전자의 체력도 많이 갉아먹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래 후작저에 있을 때는 다른 마법사들을 이용했으나, 라미엘의 도움으로 황궁의 조사실에서 탈출한 이후부터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금단술을 시도하고 있었다.
원래 그레이엄 후작이 사용하려 했던 금단술은 시전자가 지정한 대상을 서서히 죽어가도록 만드는 것으로, 금단술 중에서는 고위험군의 마법에 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금단술은 역시 까다로워서, 그레이엄 후작은 번번이 실패의 쓴맛을 봐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레이엄 후작이 이번에 사용하려는 것은 더 어려운 마법이었다. 원래는 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아르벨라를 천천히 고통스럽게 말려 죽이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이토록 그에게 불리하게 되었으니, 그레이엄 후작에게는 판을 완전히 뒤엎을 만한 더 강한 한 수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정도 고위험군 마법을 사용하려면 그 제물로는 반드시 더 큰 것이 필요했다. 가장 좋은 것은 사람이었고, 그중에서도 혈연이 이어진 자를 제물로 삼는 것이 가장 좋았다.
“라미엘. 클로에는 도대체 언제 데려올 생각이냐?”
라미엘은 탐욕으로 눈을 빛내는 그레이엄 후작을 보며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조만간 기회가 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그레이엄 후작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곧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레이엄 후작은 라미엘의 말에 조금 기이할 정도로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다 문득 묘한 느낌이 그의 등줄기를 스쳤다.
갑자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그는 라미엘의 말을 지나치게 순순히 따르고 있었다. 사실 황궁 조사실에서 라미엘이 몇 마디 꺼낸 말을 듣고 바로 탈출을 결심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서는 특히나 라미엘이 한마디만 하면 마음의 불안이 가라앉고 화가 누그러졌다.
그러다 문득 그레이엄 후작은 왠지 목이 따끔거려서 손으로 피부를 긁었다.
라미엘은 그레이엄 후작의 얼굴에 의구심이 떠오른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이엄 후작에게 가까이 다가간 라미엘이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지그시 내리눌렀다.
“지금 외숙부가 의지할 곳은 저밖에 없으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다들 외숙부를 외면할 때 저만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고 있잖아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달리 그레이엄 후작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은 아주 싸늘했다. 거기에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강렬한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불빛을 등진 라미엘의 얼굴이 그림자에 먹혀 있어서 그레이엄 후작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라미엘은 그레이엄 후작에게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래전부터 방법을 찾아왔다. 그 보람이 있어, 이제 라미엘에게 걸린 마법은 그레이엄 후작에게 조금씩 옮겨가고 있었다.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그러나 그레이엄 후작이 완벽하게 파멸하는 날이 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림자에 가려진 라미엘의 입술이 음습한 미소를 그리며 길게 찢어졌다.
*
“아르벨라 언니.”
연회가 끝난 후, 뜻밖에도 유디트가 아르벨라를 찾아왔다.
그때 아르벨라는 1황녀궁으로 돌아와 막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며 먼저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부터 떼어내던 참이었다. 그러다 유디트가 1황녀궁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르벨라는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유디트, 늦은 시간인데 네 궁에 가서 쉬지 않고 여기는 어쩐 일이지?”
아르벨라의 손을 떠난 귀걸이가 보석함 속으로 떨어졌다. 아르벨라는 방으로 들어온 유디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였다.
유디트는 문 앞에 가만히 서서 거울에 비친 아르벨라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그 순간 아르벨라의 손이 작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연회 중에는 내 얼굴이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것 같더니.”
결국 오늘 연회 중 유디트는 아르벨라의 곁에 오지 않았다. 연회가 거의 끝날 때쯤에는 아예 먼저 연회장에서 사라져 다시 모습을 비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나중에 유디트가 아르벨라를 따로 찾아온 것은 의외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유디트는 아르벨라의 말에 또 잠깐 말이 없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제가 싫어지셨어요?”
그런데 유디트에게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아르벨라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유디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뒤 작게 손짓해 방에 있는 시녀들을 내보냈다.
“네가 나를 속 좁은 사람으로 여기는구나.”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시녀들이 자리를 비키자 그제야 유디트가 아르벨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유디트는 아르벨라가 앉아 있는 의자 앞으로 다가가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 화려한 드레스가 반짝반짝 빛나며 바닥에 펼쳐졌다.
그런 뒤 아르벨라의 다리에 얼굴을 기대오는 유디트의 격식 없는 행동에 아르벨라가 그녀를 일으켜 앉히려 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고집스럽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오늘 너무 피곤해요. 그냥 이대로 잠깐만 쉬게 해 주세요.”
그렇게 속삭이는 유디트의 얼굴이 그 말처럼 몹시도 지쳐 보여서, 결국 아르벨라는 유디트를 그대로 놔두었다. 어쩐지 오늘 연회장에서도 낯빛이 안 좋아 보이더니, 역시 요즘 갑자기 주변 환경도 바뀌고 할 일도 많아져 무리한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쉰 아르벨라가 잠깐 망설이다가 유디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언니는…… 제 목걸이가 솔렘 왕국의 것인 걸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한동안 얌전히 아르벨라의 손길을 받던 유디트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래로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아르벨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되지 않았어.”
유디트의 질문에 아르벨라는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
“확신한 것도 아니었고. 나도 혹시 모를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너한테 레반테온에게 그 목걸이를 보여 줘 보라고 말했던 거야.”
아르벨라의 아름다운 얼굴은 그저 담담하기만 해서, 그녀에게서 누구도 거짓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유디트는 또 얼마 동안 말이 없었다. 아르벨라는 혹시 유디트가 이 문제 때문에 오늘 자신에게 이상한 모습을 보였던 것인가 싶었다.
“내가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밝혀야 했다고 생각해서 원망하는 거야?”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그러나 유디트는 아르벨라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럼 도대체 왜 유디트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지 아르벨라는 의아했다.
“저는요, 언니가 왜 저를 옆에 두셨는지 그게 늘 궁금했어요.”
잠시 후, 유디트가 고개를 돌려 아르벨라의 드레스 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아르벨라는 유디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사실은 저 같은 사람을 쉬이 가엽게 여기실 만한 분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거든요.”
조용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린 순간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움직이던 아르벨라의 손이 멈췄다.
“그래도 제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동정하는 척은 해 주셨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제가 언니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뻤어요.”
“유디트.”
“예전에도…… 그런 걸 간절히 바랐을 때가 있었어요.”
아르벨라가 유디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그것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소원이 이루어져서 너무 기쁜데…… 이상하게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없이 슬프기도 해요.”
“…….”
“언니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어요?”
오늘의 유디트는 확실히 이상했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지금까지 아르벨라가 겪어 본 적 없는 모습을 보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고개를 든 유디트의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티 없는 미소만이 어려 있었다.
“죄송해요. 오랜만에 만나서는 이상한 투정만 부렸네요.”
아르벨라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디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 쉬셔야죠. 전 가 볼게요. 그럼 좋은 꿈 꾸세요……. 언니.”
유디트가 뒤돌아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인 미소가 어쩐지 아르벨라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아르벨라는 멀어지는 유디트의 뒷모습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그날 밤, 예상치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지하 감옥에 있던 솔렘 왕국의 마법사, 라칸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
라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나는 놀랐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만 해도 그 솔렘 왕국의 마법사 놈은 아주 멀쩡했었다.
더군다나 이해할 수 없는 건, 놈의 사인이 자살이었다는 점이다. 내가 본 그 라칸이란 남자는 삶에 대한 열망이 아주 컸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찾고 있던 솔렘 왕국의 유일한 후손인 유디트에 대한 마음도 절절하기 짝이 없어, 어떻게든 감옥에서 벗어나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이렇게 느닷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야 라칸이 오랫동안의 지지부진한 취조와 모진 고초를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 여기는 듯했으나, 나는 이 상황이 못내 의심스러웠다.
감시용 영상 마력석에 잡힌 사람도 없었고, 경비병들도 지하 감옥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유야 어쨌든 간에 차라리 지금 라칸이 죽은 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라칸이 알아서 죽지 않았다면, 조만간 내가 나서서 그를 정리했을지도 몰랐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기보다는, 유디트 때문이었다.
유디트가 솔렘 마법 왕국의 후손이란 사실이 밝혀졌으니, 밀리엄의 납치 건과 연관된 마법사들의 존재는 그녀를 위해서 차라리 밝혀지지 않는 게 나았다. 더군다나 라칸은 내가 그레이엄 후작과 엮어 두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더더욱이나 유디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물론 유디트는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 그들을 지켜 주려 할 수도 있었다. 내가 본 미래에서 그들은 유디트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고, 유디트도 유일한 솔렘 왕국의 왕족으로서 그들을 보호해 주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그 천지 분간 못 하는 마법사 놈들이 밀리엄을 납치했을 때부터, 그리고 그걸 나한테 들켰을 때부터 그들은 이미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다소 매몰찬 생각을 하며, 남은 솔렘 왕국 마법사들은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그들은 지금 바로 치워 버리기엔 조금 아까웠는데, 그들이 마법을 사용할 때 내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옅어지는 것 같았던 부분에 대해 아직 명확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녀님, 제라드 경이 지금 완전히 황궁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다 마리나가 고한 말을 듣고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하여 뛰어난 마법사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해 황금기를 맞이했던 솔렘 왕국의 멸망 원인은 이 기록에 남은 ‘재앙’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재앙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아, 그저 위대한 마법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어떤 압도적인 천재지변이 갑작스럽게 닥친 것이 아닌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한창 부흥하던 전성기의 왕국이 하루아침에 이런 참극을 맞이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솔렘 왕국의 멸망사에 대한 내용이 짤막하게 적혀 있는 책은 영 쓸모가 없었다. 어떻게 된 게 찾은 자료마다 죄다 비슷비슷한 내용만 적혀 있어서, 이것도 더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제라드가 없는 동안 롬벨 경을 다시 불러와.”
“알겠습니다, 황녀님.”
마리나에게 명령을 내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기 전에 구석에 있는 괴물 녀석에게 잠깐 눈이 닿았는데, 놈은 자고 있는지 조용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이상하게 얌전하단 말이지.’
혹시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싶어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너 요즘 왜 이렇게 비실비실해? 너도 곰이나 다람쥐처럼 겨울잠이라도 자는 거야?”
물론 지금은 겨울이 아니라 가을이었지만, 밥도 잘 안 먹고 볼 때마다 방구석에 엎어져 있는 게 이상해서 물었다. 이 녀석을 놀리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기 때문에, 혹시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은근히 아쉬울 것 같기도 했다. 괴물이 아프다고 해서 의사를 불러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런데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녀석은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괴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너 왜 이래? 진짜 어디 아파?”
괴물은 내가 건드리자 몸을 파르르 떨다가 끈끈한 젤리처럼 내 손에 들러붙었다.
-무서워…….
“무섭다고? 뭐가?”
하지만 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게다가 그걸로도 모자라 꾸물거리면서 내 팔을 타고 기어 올라와, 아예 품에 철썩 달라붙었다.
내가 이 녀석을 애완동물 삼아 기른다고는 했지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나한테 엉겨 붙은 적은 없어서 그런지 살짝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황녀님은 의외로 애완동물하고 잘 놀아 주시는 것 같아요.”
그때 내게 다가온 마리나가 어쩐지 묘한 어투로 말했다. 하긴, 마리나한테는 괴물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으니, 그녀의 눈에는 내가 이 녀석을 상대로 혼자 자문자답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요즘 먹이도 잘 안 먹는 것 같던데, 정말 어디 아픈 건 아닐까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살짝 어색하게 괴물 녀석을 안은 채로 몸통을 토닥여 주며 이놈이 이러는 이유가 뭘까 고민했다. 하지만 곧 다음 일정이 있어 밖으로 나가 봐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괴물과 얘기해 보기로 하고 일단 1황녀궁을 나섰다.
*
“오늘따라 날씨가 좋군. 벌써 가을이라니, 갈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구나.”
오찬 시간, 세드릭 황제가 유독 온화한 얼굴로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카뮬리타 황실과 백성들의 삶이 이토록 풍요롭고 평온한 건 모두 폐하의 은혜 덕분이지요.”
나도 입술을 당겨 미소를 지으며 거의 관성적으로 세드릭 황제를 향한 건조한 찬사의 말을 읊조렸다.
“벨라 언니의 말이 맞아요. 아바마마 같은 성군이 계신 건 카뮬리타의 큰 복이에요.”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아바마마.”
테이블에 둘러앉은 다른 황녀와 황자들도 나를 따라 단체로 영혼 없는 눈빛을 한 채 세드릭 황제가 듣기 좋아할 말을 한마디씩 보탰다.
“허허허, 다들 갈수록 아부가 느는구나!”
세드릭 황제는 자식들의 재롱에 기분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유디트의 모친이 일반적인 노예가 아닌 솔렘 왕국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황실 가족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날도 늘어났다.
진열장에 보석들을 넣고 구경하듯이, 자신의 자식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감상하는 취미가 요즘 세드릭 황제에게 새로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테이블에 둘러앉은 황녀, 황자들을 훑어보는 그의 눈에는 흐뭇함이 어려 있었다.
물론 여기에 있는 그의 자식들이 모두 보석에 준할 만큼 결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던 가장 큰 오점이 사라져서 그런지, 이렇게 자식들을 모아 놓고 보았을 때 세드릭 황제가 느끼는 만족감도 예전보다 확연히 높아졌다.
물론 그 커다란 오점이란, 유디트의 출신이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황녀, 황자들도 세드릭 황제를 따라 모두 미소를 짓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화기애애한 황실 가족의 모습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실상은 다들 모래를 씹는 것처럼 깨작깨작 식사를 이어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유디트가 아니라 세드릭 황제 때문에 이 식사 자리가 벌써부터 짜증스러워졌는데, 그래도 그의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보다는 비위를 맞춰 주는 게 피곤함이 덜했기에 조금 참기로 했다.
사실 요즘 세드릭 황제의 기분은 들쑥날쑥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물론 유디트의 일로 기분이 좋은 날이 많긴 했지만, 심기가 불편해질 때는 한도 끝도 없이 날카로워져 자식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며 쥐 잡듯이 잡아대기 일쑤였다.
그 대상에 그레이엄 후작의 추적을 맡은 라미엘과 내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1황녀, 그리고 1황자. 그러고 보니 죄인의 추적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아니나 다를까, 슬슬 한 번 더 얘기가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세드릭 황제가 우리에게 그레이엄 후작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름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화제로 나온 죄인이 그레이엄 후작을 의미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레이엄 후작에 대한 세드릭 황제의 진노는 날이 갈수록 커져 가고 있었다. 그레이엄 후작이 조사받던 중에 탈출해 이렇게 종적을 감춘 건 황실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했다.
그나마 오늘은 세드릭 황제의 기분이 정말 좋은지, 우리에게 묻는 목소리가 다른 때보다는 누그러져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쓴 소리는 듣기 싫고 단 소리만 듣고 싶어진다더니, 그래도 성가심을 참고 비위를 맞춘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걱정 마세요. 조만간 폐하께서 원하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태연히 말했다.
입맛이 없는 듯이 삐딱하게 앉아 음식을 뒤적이고만 있던 라미엘이 내 말에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틀리냐는 듯이 라미엘을 쳐다봤다.
라미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 기묘한 미소를 그렸다. 곧 그가 의자에 기대고 있던 자세를 바로 하며 내 뒤를 이어 세드릭 황제에게 답했다.
“아르벨라 말이 맞습니다. 이번에 흔적을 발견했으니, 곧 은거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정말이냐?”
그 말에 아까부터 유디트를 힐끔거리면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던 클로에가 퍼뜩 시선을 돌려 라미엘을 쳐다봤다.
나는 반색하는 세드릭 황제에게 덧붙였다.
“그리고 폐하, 추가로 보고드릴 사항이 있는데 오찬 후 따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그럼 아르벨라와 라미엘은 오찬이 끝나고 잠깐 나를 따라와라.”
세드릭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고, 이후에는 잠깐 식탁 위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아바마마, 곧 10월 축제가 열리겠네요.”
그때, 지금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유디트가 입을 열었다.
“올해는 우리 카뮬리타의 황족이 마법사들의 대표로 축제를 빛낼 차례인데, 누구를 앞에 세우실지 결정하셨나요?”
유디트가 말한 이 10월 축제는 다름 아닌 마법사들의 축일이었다. 그래서 카뮬리타에서 가장 공신력 있다고 인정받는 마법사가 선출되어 모두의 앞에서 화려한 마법을 선보이곤 했다.
주로 백야의 전당에서 월계수 잎을 여섯 개 이상 단 마법사나, 황제가 직접 임명한 황족이 한 해마다 번갈아 대표로 나서는 게 보편적이었다. 이 경우 황제가 직접 임명한 황족은 보통 다음 옥좌에 앉을 후계자로 여겨졌다.
하여 지금까지 이런 자리에는 내가 나가는 게 불문율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세드릭 황제도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래, 올해도 1황녀가…….”
“아바마마, 제게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뒤이어 유디트가 예상 밖의 말을 내뱉은 순간, 식당 안에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요즘 그레이엄 후작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라미엘의 입에서 ‘하!’ 하고 기가 막히다는 듯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너 미쳤냐? 그 자리가 어떤 거라고 네가…….”
이내 라미엘이 입술을 비틀며 살벌하기까지 한 음성을 내뱉었다.
“아바마마, 저런 헛소리는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유디트, 네가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모르는 게 많은 모양인데, 그 자리에는 아무나 설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유디트를 향한 다른 황녀, 황자들의 눈길도 곱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디트, 네가 말이냐?”
유디트에게 되묻는 세드릭 황제의 목소리는 뜨뜻미지근했다.
지금까지 세드릭 황제가 유디트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선보이긴 했지만, 지금 이 10월 축제의 역할 같은 것은 확실히 아직 유디트가 맡기에 위험 부담이 있었다. 혹여나 마법을 숙련한 지 오래되지 않은 유디트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수라도 하면 황실의 명예가 이만저만 실추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벨라 언니만큼 뛰어난 실력은 아니지만, 저도 카뮬리타의 지고한 태양이신 아바마마의 딸이니 한번 믿고 맡겨 주시면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유디트는 황족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여전히 차분한 낯을 한 채 말을 이었다.
“황실에 누를 끼치는 일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제게 영광된 차례가 온다면 레반테온 선생님도 기꺼이 도와주시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세드릭 황제가 선뜻 허락하지 않자, 유디트가 살며시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아직 제 정통성으로 입방아를 찧는 자들이 있으니, 카뮬리타 황실의 위엄을 바로 세우기에도 나쁘지 않은 기회가 아닐까 하고요…….”
“뭐라고? 아직도 너에 대해 헛소리를 하고 다니는 자들이 있단 말이냐?”
“제 어머니께서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셨다는 게 밝혀진 지 오래되지 않았기도 하고, 또 그동안 뛰어난 황실 사람들 중에 저 혼자만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가련하게 고개를 숙이며 아릿한 미소를 짓는 유디트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 유디트를 보고 나도 모르게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유디트가 언제부터 이렇게 우리 부황을 잘 구워삶을 줄 알게 되었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의혹을 자극한 건, 유디트가 세드릭 황제에게 이런 청을 올린 이유였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이 10월 축제 때 벌어졌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유디트를 보는 시선이 나도 모르게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바마마. 유디트가 이렇게 먼저 아바마마께 무언가를 부탁드린 건 처음이니 한번 맡겨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도 겉으로는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입매를 당겨 미소를 지으며 세드릭 황제에게 말했다.
“아르벨라!”
라미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돌아봤다. 그러나 나는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어엿한 황실의 일원인 유디트를 아직도 무시하고 폄하하는 자들이 있다니, 카뮬리타의 황족이자 언니로서 묵인할 수 없네요. 마법사들의 축일에 유디트가 황족 대표로 나가 뛰어난 기량을 보인다면 더는 허튼소리를 지껄일 자도 없겠죠.”
나까지 유디트의 말을 거들자 결국 세드릭 황제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유디트의 청을 들어 주었다. 당연히 다른 황자, 황녀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 상징적인 자리에 유디트가 나선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눈치였다.
오찬이 끝난 후 나는 바로 라미엘과 함께 세드릭 황제를 따라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
라미엘은 그레이엄 후작을 추적한 결과에 대해 먼저 보고한 뒤 집무실을 나섰다. 그런 뒤 이번에는 내가 최근에 발견한 새로운 사실을 세드릭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레이엄 후작의 과거 행적을 조사하던 중에 그가 자선 활동을 하던 고아원에서 몇 년 전까지 수상한 경로로 사라진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뭐?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사라져?”
“네. 제 생각에는 몇 년 전 웨이스턴 남작을 포함한 일부 귀족들이 처벌받은 인간 사냥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드릭 황제가 쾅, 하고 책상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집무실 안에 울렸다.
“이 미친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이들한테까지 손을 댔단 말이냐……!”
그레이엄 후작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죄목이 나오자 그는 노발대발했다.
나는 이 사안에 대해 좀 더 면밀히 조사해 보겠다고 말한 뒤 세드릭 황제의 집무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 한동안 세드릭 황제를 상대하느라 먹먹해진 귀를 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귀가 따갑구나. 요즘 부황께서 확실히 전보다 쉽게 흥분하고 열을 내시는 것 같은데…… 혹시 중년의 갱년기 같은 건가?”
다른 사람이 들으면 불경하다 할 소리였지만, 나를 뒤따르던 마리나가 눈치 있게 내 말을 효심으로 포장해 줬다.
“1황녀님께서 폐하를 걱정하시는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마침 폐하께서 정기 진찰을 받으실 시기이니, 황궁의가 이번에는 더욱 성심성의껏 옥체를 살피도록 먼저 살짝 귀띔하는 게 좋겠네요.”
“역시 마리나가 내 마음을 잘 아는구나.”
마리나와 나는 그렇게 장단을 맞추며 황제의 집무실이 있는 궁전을 빠져 나왔다.
“아르벨라, 너 유디트한테 너무 무른 거 아니야?”
그런데 나보다 먼저 집무실 밖으로 나온 라미엘이 자신의 궁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회랑의 기둥에 기대듯이 서 있었다.
나를 본 그가 몸을 똑바로 세우며 입술 끝에 싸늘한 미소를 매달았다.
“넌 네가 거둔 게 귀여운 아기 새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봤을 때는 전혀 아니거든.”
라미엘은 요즘 들어서는 처음 보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뒤돌아섰다.
“조심해. 그러다 뱀 새끼한테 물어뜯기지 않게.”
나는 멀어지는 라미엘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역시 오찬 시간에 있었던 일로 유디트는 다른 이복형제들에게 미운털이 더욱 단단히 박힌 듯했다. 하지만 나한테 저런 충고를 하다니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지 싶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도 나를 걱정해 준 라미엘에게 조금 기특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황도를 따라 걸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황성 안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가 포착되었다.
“저건 무슨 돼지 우는 것 같은 소리야?”
나는 깊은 의구심을 느끼며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에서 2황자 로이드와 5황녀 비비안 남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지?”
나는 황당함을 느끼며 그들을 올려다봤다.
“읍읍! 읍!”
나를 발견한 로이드와 비비안이 마구 몸부림쳤다.
그들은 언젠가 내가 로이드에게 그랬던 적이 있듯이, 덩굴 식물에 몸을 칭칭 감긴 채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었다. 게다가 입도 줄기에 막혀 있어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물론 그들의 주위로 빛이 흩어지는 걸 보니, 나무에서 내려오려고 계속해서 마법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마법진만 번번이 깨져 반짝이면서, 오히려 주변에 있던 새들의 흥미만 끄는 것 같았다.
짹짹! 짹!
흥분한 새들까지 날아들어 푸드덕 푸드덕 정신 사납게 날갯짓을 하는 통에, 특히나 새의 날개에 뺨이며 이마를 얻어맞은 로이드의 얼굴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내가 이 상황을 설명해 보라는 듯이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시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서둘러 내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오찬 시간이 끝나고 2황자님과 5황녀님, 그리고 4황녀님께서 잠깐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4황녀님께서 갑자기 이렇게…….”
“이런 짓을 한 게 유디트라고?”
나는 팔짱을 낀 채 입술에 미묘한 미소를 그렸다.
범인이 유디트라니 의외라면 의외였고,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였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유디트는 지나치게 순진하고 착해서 누가 그녀를 괴롭혀도 반격하기는커녕, 동네북처럼 마냥 당하기만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늘 오찬 자리에서도 그렇고, 이제는 유디트도 변하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지금 시녀는 내게 로이드와 비비안, 유디트 이 세 사람이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지만, 그게 정말 말 그대로의 순수한 대화였을 리는 없었다. 아까 식당에서도 씩씩거리면서 유디트를 쫓아가던 녀석들이니, 보나 마나 또 먼저 유디트를 붙잡고 시비를 걸었겠지.
나는 도와 달라는 듯이 나를 간절한 눈으로 응시하는 로이드와 비비안을 한심하게 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 아이들이 한 짓에 비하면 유디트가 그동안 많이 참긴 했지.”
“으읍!”
“게다가 그동안 나도 입이 아프도록 경고한 게 몇 번인데, 이렇게 또 금방 헛짓거리를 하다니. 두 사람이 자력으로 빠져나올 때까지 도와주지 말고 놔둬라.”
언니와 누나로서 잘 알아듣게 얘기하고 꾸중하는 데도 한계가 있지, 지칠 줄도 모르고 유디트를 자꾸 건드려 대는 이 녀석들에게 이제는 나도 신물이 났다.
오죽하면 그 맹탕 같던 애도 더 못 참고 이런 짓을 다 했을까? 이제는 유디트가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혼자 있을 때도 이들에게 반격할 수 있게 되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르벨라 언니.”
그리고 1황녀궁에 거의 다다랐을 때, 꼭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유디트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도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던 유디트가 의외의 일을 했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내가 오찬 자리가 끝나고 유디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처럼, 왠지 그녀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디트, 왜 네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있지?”
“그냥 잠깐 얼굴을 뵙고 가고 싶어서요.”
유디트는 조금 전 로이드와 비비안에게 그런 과격한 보복을 한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맑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그런 유디트를 잠깐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모처럼이니 안으로 들어가서 오랜만에 함께 다과라도 들면 좋을 테지만, 지금은 내가 바로 외부 일정이 있어서 시간을 많이 내기가 어렵구나.”
“아니에요, 저도 할 일이 있어서 바로 가 봐야 해요.”
그런데 조금 전부터 유디트의 시선이 내 뒤쪽을 살피는 것 같았다. 연회장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모습에, 나는 유디트가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기 전부터 지금 그녀의 시선이 쫓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런데 제라드 경은…… 오늘 보이지 않네요?”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유디트의 입술에서 나온 이름은 역시 제라드의 것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녀는 여전히 태연하게 미소 띤 얼굴이었으나 이상하게 조금 불안해 보였다. 나는 설핏 눈을 가늘게 좁혔다가, 이내 평온한 목소리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잠깐 할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어.”
“그래요……?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확실히 유디트는 내가 원래 알던 그녀와 어딘가 달라졌다.
조금 전에 자신을 괴롭히던 로이드와 비비안을 직접 혼내 준 것처럼 좋은 의미의 변화도 있었지만, 연회장에서 내가 거리감을 느꼈던 것처럼 나로서는 별로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 변화도 거기에 속해 있었다.
지금 제라드에 대한 이 물음 또한,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유디트라면 섣불리 내게 꺼내지 않았을 사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유디트를 향해 느슨히 입매를 당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알기로 너와 제라드 사이에 특별한 교류는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제 보니 그에게 관심이 많구나?”
유디트의 눈이 일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나한테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조금은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매일 언니의 뒤에 서 있던 기사인데 오늘은 자리에 없으니 느낌이 괜히 이상해서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퍽 자연스러워서, 내가 조금 전에 유디트에게 느낀 위화감도 모조리 착각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디트에 관한 것을 내가 착각할 리는 없었다.
“유디트. 너 무슨 생각이니?”
그래서 나는 웃음을 거두고 유디트의 얼굴을 보면서 직설적으로 물었다.
황궁 연회가 있던 날 연회장에서, 그리고 연회가 끝난 후의 내 궁에서, 또 오늘 오찬 자리가 있던 식당에 이어 지금 내 눈앞에서도……. 그녀가 계속 보이는 기이한 모습에 대해 묻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유디트는 입을 다물고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햇빛을 받은 황금색 눈이 오늘도 티 한 점 없이 맑고 투명하게 반짝반짝 빛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눈에 그녀의 모든 것이 비쳐 보인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 안에서 아무것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유디트가 나를 향해 꽃봉오리가 피어나듯이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아르벨라 언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짓말이었다.
나는 작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래, 네가 모르겠다니 나도 더 할 말이 없구나. 그럼 다음 일정을 시작할 시간이 되어서 난 이만 들어가 볼게.”
원래는 오찬 시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유디트와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었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녀와는 아무 말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네……. 다음에 또 인사드릴게요, 언니.”
유디트는 내게 할 말이 더 있는 것처럼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결국 짧은 인사만을 내게 건넨 채 입을 다물었다.
나는 웃는 낯으로 유디트를 지나쳐 갔다. 그러나 그녀를 두고 뒤돌아서서 걷는 내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말끔히 가셔 있었다.
그날, 한동안 유디트에게서 떼어 놓았던 그림자 사역마를 다시 그녀에게 붙였다. 하지만 며칠 뒤, 나는 내 그림자 사역마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다.
“재미있네.”
그날 밤 나는 손에 잡히는 종이를 구긴 채 싸늘히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에서 열이 올라 아무래도 찬바람을 좀 쐬어야 할 것 같았다.
왠지 계속 기분이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그러나 요즘 내 신경을 날카롭게 만드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라, 지금 이렇게 속이 뒤틀리는 원인이 어느 한 가지라고 딱 꼬집어 규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침실을 빠져나가 가을의 짙은 풀 냄새가 밴 정원으로 향했다.
오늘도 밤의 1황녀궁은 조용했고, 늘 그랬듯이 익숙한 벤치 위에 눕자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늘 있어왔던, 이제는 특별할 것도 없는 밤 산책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렇게 내가 밖에 나와 있어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더니, 고작 며칠 동안 제라드가 없다고 벌써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런데 제라드 경은…… 오늘 보이지 않네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러다 문득 나는 며칠 전에 유디트와 만났을 때, 그녀가 내게 제라드에 대해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가뜩이나 가라앉았던 기분이 더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유디트가 왜 갑자기 지금까지 없던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걸까? 더군다나 제라드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공교로웠다. 갑자기 10월 축제 때 자신이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다고 자청한 것도 이상했고 말이다.
나는 뜨끈뜨끈한 눈두덩이에 손을 올렸다. 또 마법사의 열병이 오려는지 온몸이 뜨거웠다. 요즘 걸핏하면 피곤하고 코피가 나는 이유가 단순한 과로 때문이 아니란 걸 알았다.
곧 다가올 10월 축제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전부 다 귀찮아져서 눈을 감았다.
제라드는 축제가 시작하기 전에 돌아올까, 아니면 좀 더 늦을까?
사실 나는 제라드를 보내 준 걸 벌써부터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제라드와 유디트, 둘 다 내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을 향한 내 감정조차 내가 원하는 만큼 조절되지 않았다.
내 손아귀에 잡혀 있던 것들이 어느새 소리 없이 몰래 밖으로 빠져나가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왠지 싫었다.
*
침엽수림이 우거진 숲을 등진 채 높게 솟은 저택이 있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카뮬리타지만, 북동쪽 땅에는 가을과 겨울이 유독 길었다. 그래서 지금도 숲 곳곳에는 카뮬리타의 황도보다도 한발 일찍 붉게 무르익은 단풍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단풍만큼이나 짙붉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잠시 후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녹슨 대문 앞에 다가가 섰다.
지금은 황실에 귀속된 라스너 백작령. 그중에서도 옛 라스너 가문의 사람들이 살았던 이 버려진 저택에 오늘 몇 년 만에 찾아온 손님은 바로 전 글렌 라스너 백작의 아들인 제라드였다.
그는 잠깐 낡은 건물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이내 녹슨 정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원래 위엄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대저택이었으나, 지금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탓에 을씨년스러운 폐가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물론 제라드가 기억하고 있는 아주 오래전부터도 이곳은 유령의 저택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몇 년 동안의 세월만큼 쌓인 침묵이 한결 무겁게 고여 있는 느낌이었다. 제라드는 그런 저택의 모습을 때로는 익숙한 듯이, 또 때로는 낯선 듯이 훑어보았다.
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와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고 실내는 아주 조용했다. 두꺼운 먼지가 뽀얗게 쌓인 복도에, 이제는 예전에 여기에 살던 어린아이의 것보다 확연히 커진 발자국이 눌러 찍혔다.
제라드는 아직도 선명한 기억을 되짚어, 익숙한 길을 걸어갔다. 잠시 후 제라드가 도착한 곳은 예전에 그가 사용했던 방이었다.
그다지 그리울 것도 없는 유년 시절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과거의 흔적이 남은 곳으로 돌아오게 되자 묘한 감흥이 드는 것이 어쩐지 좀 이상했다.
제라드는 그의 부친인 글렌 라스너 백작이 금단술을 실패한 날 바로 붙잡혀 이 저택을 떠나야 했다. 그래서 방에는 그가 사용하던 얼마 안 되는 물건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다만 누가 방을 뒤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들은 전부 여기저기 엉망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글렌 라스너와 제라드가 떠난 이후 이곳을 조사한 황실 기사단이나 빈 저택을 털러 들어온 좀도둑의 소행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제라드는 방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침대 밑의 부서진 바닥 판자 사이에서 작은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도 이게 남아 있었다니…….”
제라드의 입에서 얕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오래된 영상 마력석이었다.
표면에 쌓인 먼지를 대충 문질러 닦자, 긁힌 자국이 나고 색이 바랜 것을 제외하고는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마력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라드는 그것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큰 기대 없이 한번 작동시켜 보았다.
-아르벨라, 꽃구경을 한다더니 거기서 혼자 뭐 하고 있니?
-토끼풀을 찾아요.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몇 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마력석은 아무 문제 없이 제대로 작동했다. 생각보다 뛰어난 마력석의 성능에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제라드는 어릴 때 처음으로 아르벨라의 존재를 그의 마음속에 각인하는 계기가 된 영상을 잠깐 넋 놓고 보다가, 이내 그 마력석을 가지고 방을 나섰다.
황궁에 있으면서 황족들의 영상 마력석을 구하는 건 몹시 쉬워졌다. 그래서 제라드가 남몰래 가지고 있는 아르벨라의 영상 마력석도 사실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의미가 남다른 물건이었기에 이런 곳에 버려두고 갈 수 없었다.
짧은 감상에서 벗어나 방을 빠져 나온 제라드는 조금 전보다 느린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이번에 그가 가려는 곳은, 이 저택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있는 장소였다. 제라드가 그의 부친인 글렌 라스너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복도에 찍히는 걸음은 점점 더뎌져만 갔다.
이곳에서 금단술을 시행했던 글렌 라스너는 종신형을 선고받아 아직도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아르벨라는 예전에 제라드에게 약속한 대로, 글렌 라스너의 소식을 가끔 그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때마다 제라드는 글렌 라스너인지 아르벨라인지, 명확히 대상을 구분하기 어려운 누군가에게 빚을 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옛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 기억 속의 장소를 찾게 된 것이다. 꼬인 실타래처럼 줄곧 답답하게 엉켜 있던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 또 지금까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이 기나긴 고민에도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왠지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이곳에 와 봐야만 할 것 같았다.
하여 제라드는 지금도 뒷걸음질 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고, 눈앞에 보이는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방 안에 몸을 들이자마자 써늘한 한기가 들이닥쳤다. 검게 변한 얼룩이 바닥과 벽면에 군데군데 눌어붙은 방은 제라드에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상기하게 했다.
그날, 가물가물한 시야를 비집고 들어오던 불길한 보라색 빛기둥이 다시 한번 눈앞에서 재현되는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아버지가 왜 그런 사과를 해야만 했는지, 얼마 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잊고 있던 기억을 되찾은 지금은, 그때 글렌 라스너가 어떤 상황에서 그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제라드…….”
글렌 라스너는, 단순히 금단술을 시도한 것을 들키면 자식인 제라드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걸 알았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져 그에게 사과한 것이 아니었다.
제라드는 그에게 잊혔던 그날의 기억을 돌아오게 만든 사건을 떠올렸다.
“차라리 죽여 주게.”
“결국 죽일 수가 없었어. 이 마법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이 아이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시도하는 동안,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려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너무도 간절하게 죽고 싶어졌다네.”
아르벨라와 함께 목격했던 금단술의 현장.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안에서 자식을 끌어안고 울던 남자를 보았을 때, 제라드는 그가 지금까지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깨달아 버렸다.
사실은 이 라스너 저택에서의 마지막 날, 제라드의 부친은 정말 그를 완전히 버렸던 것이다.
글렌 라스너는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역행하는 금단술을 사용하려 했다. 그리고 다른 무엇도 아닌 제라드를 그 제물로 삼아 죽일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아버지로서의 소임을 다해 아들인 제라드를 양육하기는커녕, 늘 방에만 틀어박혀 한 번도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던 남자였다. 하지만 그날은, 정말 하나뿐인 자식을 제 손으로 완전히 저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차라리 아르벨라와 함께 보았던 그 이름 모를 남자처럼 제라드의 부친 역시 마지막에는 차마 자식을 죽일 수 없어 금단술에 실패한 것이었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글렌 라스너는 스스로의 의지로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날, 꼭 글렌 라스너가 금단술을 사용할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마법을 시행하는 도중에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저택에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정말 그는 제라드를 죽여 제물로 삼았을 것이다.
제라드는 그때 부친에게서 그런 결연한 의지를 읽었고,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아 그날의 기억을 머리에서 지웠다.
도중에 방해자가 끼어들어 마법이 실패한 순간에도, 그는 제라드가 아니라 마법진 위에 흩어진 죽은 아내의 뼛가루를 보면서 울부짖었었다.
글렌 라스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어차피 시간을 되돌리면 죽은 아들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 생각해 깊은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던 걸까?
이렇게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장소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되자, 확실히 뿌연 안개가 서려 있는 듯하던 머리가 한결 맑게 개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제라드…….”
그래. 자신은 고작 그 값싼 사과 한마디에 목줄 걸린 개처럼 발이 묶여, 줄곧 부친과 함께 살던 이곳을 자신이 돌아와야 할 장소라 여기고 있었다.
혹시라도 부친인 글렌 라스너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로 헤어져야만 했던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전부 착각이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사람을 현혹시키며 어른거리는 신기루일 뿐이었다.
“지금 내 손 잡아.”
“네가 내 마음에 들었거든.”
“갈 곳이 없다면 내 옆에 있어. 너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그러니 정말로 이 세상에서 제라드를 원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는 셈이었다.
1황녀궁을 벗어나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했던 과거의 어느 날, 창살 사이로 보이는 세상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 이미 한번 낯선 달콤함에 속절없이 빠져들고 나니, 그 속에서 제 발로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냥 그곳에 있어도 되는 게 아닐까……?
처음으로 그를 원해 준 소녀의 곁에서, 무엇이든 그녀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 살아도 되는 게 아닐까?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아르벨라와 끝이 존재하는 약속을 임시로 맺은 것뿐이라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제라드의 의지로 선택해 언제까지고 기약 없이 아르벨라의 옆에 머물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날이 갈수록 욕심이 점점 커져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언젠가부터 그녀를 보면 그 옷자락에라도 닿고 싶었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생겨났다. 하지만 설령 지금까지처럼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그저 뒤에서 바라봐야만 하는 처지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그녀를 볼 수 있는 게 좋았다.
그래. 그러니 돌아가자, 아르벨라에게. 그리고 돌아가면, 예정된 기한이 끝나도 계속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자.
제라드는 이곳에 오기 전보다 확연히 홀가분해진 마음을 안고, 그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제라드는 지나온 과거를 등 뒤에 둔 채 육중한 문을 닫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이대로 곧장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전에 한 군데 더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부친인 글렌 라스너가 하루 종일 틀어박혀 마법을 연구하던 방이었다.
잊고 있던 과거를 떠올릴 때 함께 수면 밑에서 딸려 올라온 그레이엄 후작에 대한 기억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명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글렌 라스너가 금단술을 사용하던 날, 분명 가장 처음 저택에 들이닥쳐 그를 방해한 건 황실 기사단이 아니었다. 그자들은 글렌 라스너가 평생을 준비해 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망치고, 그 후에 제라드를 빼돌려 인간 사냥꾼들에게 팔았다.
비록 희미한 기억이기는 하나, 분명히 제라드는 그레이엄 후작의 얼굴을 그 무렵 어디에선가 보았었다. 그리고 또…… 그보다 더 오래전에, 부친인 글렌 라스너의 방에서 몰래 훔쳐봤었던 어떤 편지에서도 쥬논 그레이엄의 이름을 보았던 기억이 깊은 물 밑에서 흐릿한 형체를 띤 채 가물거렸다.
제라드는 잠시 후 그의 방과 마찬가지로 엉망이 된 글렌 라스너의 연구실에 도착해, 넘어진 책상 옆의 벽면을 더듬었다. 아주 어릴 때 호기심에 몰래 방을 엿봐 알게 되었던 방법대로 벽의 어딘가를 손으로 건드리자, 달칵 소리와 함께 구석의 작은 틈이 벌어졌다.
그 안에 든 물건들은 세월을 잊은 듯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상대로 예전에 연구실을 조사한 사람들은 이 작은 비밀 공간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글렌 라스너는 이 안에 죽은 아내의 유품으로 보이는 물건들과 몇 개의 마력석, 또 한창 연구 중이던 시간 역행 금단술에 대한 자료를 보관해 두었다. 다른 사람이 작성한 듯이 글렌과 필체가 다른 자료들도 거기에 일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몇 통의 편지들도 함께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 또한 글렌 라스너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금단술에 대한 것이었다. 제라드는 그것을 차례대로 읽어 내려갔다.
“이건…….”
그리고 잠시 후, 글렌 라스너가 숨겨둔 자료와 편지를 훑어보던 제라드의 얼굴이 굳었다.
*
날이 밝자 내 몸을 달구던 열기가 거짓말처럼 다시 가라앉았다.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다시 시작된 것 같았던 게 전부 내 착각일 뿐이었다는 듯이 개운한 아침이었다. 그래서 다행히도 미리 정해 둔 오늘의 일정을 취소하지 않아도 되었다.
“1황녀님! 이 이른 시간부터 백야의 전당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오전 일찍 백야의 전당에 들르자 나를 본 마법사가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제 유디트가 균열과 괴수에 대한 연구 자료를 열람했다지? 나도 그걸 좀 봤으면 좋겠는데.”
“그러십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법사는 두 황녀가 연달아 같은 자료에 관심을 보이자 의아한 듯했으나, 군말 없이 나를 안내했다.
유디트가 내 그림자 사역마를 없애 그녀를 직접 엿보는 건 어려워졌지만, 그렇다 해서 이 황궁에 내 눈과 귀가 되어 줄 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유디트가 백야의 전당에서 황실의 허가를 받아 연구 중인 균열과 괴수에 대한 자료에 요즘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자료들은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해 본 것이지만, 유디트가 특히 어제 오랫동안 집중해 읽었다는 자료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균열에 대한 연구 자료는 황족이라도 직접 신분을 인증해야 열람할 수 있었기에, 이렇게 여유 시간이 났을 때 직접 백야의 전당에 방문한 것이다.
“아이구, 1황녀님이 아니십니까?”
그렇게 길을 안내하는 마법사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복슬복슬한 하늘색 머리칼과 분홍 눈을 가진 호리호리한 청년이 로브를 헐렁하게 걸친 채 내게 다가왔다. 내가 백야의 전당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본 듯한 레반테온이었다.
“혹시 얼마 전에 제가 말씀드린 마법 실용학 논문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하러 와 주신 건가요?”
다른 때라면 적당히 호응해 줬겠지만, 오늘은 그를 한번 쳐다본 뒤 가차 없이 말했다.
“오늘은 레반테온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야.”
“그런 가슴 아픈 말씀을……. 지난 나흘 내내 1황녀님이 백야의 전당에 와 주시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린 제게 너무 냉담하신 게 아닙니까?”
“레반테온이야말로 마법사의 축일 준비 때문에 유디트를 돕느라 바쁜 것 같던데, 한동안 거기에만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어?”
“아, 1황녀님도 그 얘기를 들으셨군요.”
레반테온이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나를 따라왔다.
사실 나는 요즘 레반테온에게 감정이 좀 미묘했다. 자신의 연구 외에 귀찮은 일은 질색인 사람이 마법사의 축일처럼 도움도 안 되는 일에 직접 나서겠다고 하다니. 아무래도 레반테온과 유디트의 사이가 생각보다 더 원만한 모양이었다.
스승과 제자나 마찬가지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하지만 나는 생각 이상으로 가까워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왠지 마음이 묘하게 껄끄럽고 또 조금은 언짢아지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이런 기분은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좀처럼 느껴 보지 못했던 것이라 뭐라고 딱 잘라서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하지만 이게 어린애처럼 속 좁은 마음이란 것은 알았다. 이건 꼭 자기 친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겨 기분이 나쁜 것이나 다름없는 모양새가 아닌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레반테온을 언젠가부터 친구 비슷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내색하기에는 어쩐지 좀 겸연쩍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괜히 혼자 꽁해져 있을 때, 레반테온이 다른 할 말이 더 있는 것처럼 묘하게 망설이는 기색을 내보이다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침 4황녀님의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요. 혹시 요즘 4황녀님께 무슨 일 있습니까?”
“그런 건 왜 물어?”
“아니요……. 그냥 왠지 4황녀님이 요즘 묘하게 예전하고 좀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달라지다니, 뭐가 말이야?”
“으음,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운데요.”
레반테온은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실 레반테온이 무엇에 의혹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나도 얼마 전부터 유디트가 변한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레반테온에게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글쎄, 요즘은 나보다 레반테온이 그 애를 더 자주 볼 텐데.”
“하긴, 그렇지요. 1황녀님이 참 많이 바쁘시기는 하지요. 그래도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뵙게 되니 좋습니다. 전에 뵈었을 때보다 좀 여위신 것 같은데 바쁘시더라도 끼니는 잘 챙겨 드시고요.”
“지금 남 말 할 상황은 아니지 않나?”
단순하게도, 레반테온이 어울리지 않게 내 몸 걱정을 해 주자 기분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레반테온에게 볼일이 있는 게 아니시면 오늘 백야의 전당에는 왜 오신 겁니까? 지금 어딜 가시는 거지요?”
“균열과 괴수에 대한 자료를 열람하려고.”
“아, 요즘 4황녀님께서도 관심을 보이시던데. 흠……. 그러고 보니 저와 수업을 할 때도 균열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더군요. 그것 말고 마법사의 열병에 대해서도 자주 물으시던데…….”
이어진 레반테온의 말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그에게 고개를 돌려 지금 내가 들은 것이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유디트가 뭐에 대해 물어봤다고?”
그러나 레반테온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고,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의 열병이요. 이상하게도 요즘 각별하게 관심을 쏟으시는 것 같던데요?”
*
“어서 오십시오, 1황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가을치고는 따뜻한 오후 시간.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총장 알렉스 새뮤얼이 나를 열렬히 환대해 주었다. 나는 익숙한 상황에 예의상의 미소를 머금으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총장은 여전하군.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
일전에 내가 완공된 시기에 맞춰 방문했던 이 신축 아카데미는 이번 가을부터 재학생을 받아 운영을 시작한 상태였다. 새로 설립한 황립 아카데미이니만큼 황실에서도 신경을 많이 쓴 곳이었고, 그래서 아카데미가 열린 첫날에는 내가 황족을 대표해 친히 입학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1황녀님께서도 여전히 강건하고 아름다우신 모습입니다! 1황녀님께서 다시 저희 르벨 아카데미에 방문해 주실 날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총장 알렉스 새뮤얼이 감격 어린 눈망울을 촉촉하게 적시는 모습을 보자 나는 대번에 부담스러워졌다.
‘누가 들으면 내가 엄청 오랜만에 여기에 온 줄 알겠네.’
참고로 내가 반려시켰던 아카데미의 명칭은 결국 내 이름을 딴 ‘르벨’로 지어졌다. 내가 다른 일로 바쁜 사이에 그 이름이 통과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고 이마를 짚었지만,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만족하는 눈치였다.
“면접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여유가 있으니, 총장실로 가시지요. 1황녀님이 다시 아카데미를 찾아 주실 날을 기다리며 이 알렉스 새뮤얼이 잎 한 장이 천금보다 귀하다는 남부 키르토스의 홍차를 구해 놓았답니다!”
나는 총장에게 직접 안내받아 교정을 걷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건, 아직 공석인 아카데미의 ‘마법 실전’ 과목 교수를 선출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학기가 시작된 만큼, 다른 과목은 진작 교수들을 구해서 수업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 실전 과목 하나만 아직까지도 적임자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드디어 몇 사람이 물망에 올랐는데, 오늘이 그들의 최종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마법 실전은 아무래도 꽤나 중요도가 높은 과목이다 보니, 아카데미 측에서 나한테까지 면접관을 요청해 온 것이다. 사실 처음에 총장은 내게 마법 실전 교수를 직접 맡아 줄 것을 부탁했으나 내가 거절했다.
나는 알렉스 총장과 함께 교정을 거닐며 아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지금은 점심 시간인 듯, 바깥에 나와서 뛰어놀거나 산책을 하며 야외 활동을 즐기는 아이들이 드물지 않게 눈에 띄었다.
“헉! 저, 저기 좀 봐!”
“설마 1황녀님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개중에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서둘러 인사하거나, 긴가민가한 얼굴로 수군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내게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미소를 지어 인사해 주었다. 그러자 내가 1황녀라는 것을 확신한 아이들이 더욱 흥분해서 야단을 떨었다.
“아카데미 분위기가 활기차고 밝아서 보기 좋군.”
“그렇지요! 재학생들 모두 건실하고 모범적인 아이들입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밖에 나와 있는 학생들이 많아서 1황녀님이 귀찮지 않으실지 모르겠네요. 특히 사시사철 꽃이 피도록 품종을 개량한 이 아카시아 가로수길이 아주 인기가 좋답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아카데미의 산책로들은 전부 1황녀님의 탄생화인 아카시아를 심었지요!”
알렉스 총장은 또다시 이 아카데미를 자신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단장했는지 내게 자랑스럽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 올 때마다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내용이라 이제는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참, 마침 베른하르트 소공작 님도 저희 아카데미에 방문해 주셨는데 1황녀님만 괜찮으시다면 총장실로 같이 모셔도 될까요?”
오히려 한참 떠들던 알렉스 총장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꺼낸 말이 더욱 내 주의를 끌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이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나는 의아해졌다.
킬리안이 여기에 올 일이 뭐가 있지? 설마 아카데미 교수에 지원하려고…… 일 리는 없었다. 이미 이력서를 봤지만, 거기에 킬리안의 이름은 없었으니까. 그럼 진짜 아카데미에 온 이유가 뭘까?
‘설마 날 만나려고 온 건 아니겠지…….’
누가 들으면 자의식이 충만하다고 할 수 있는 생각을 잠깐 스치듯이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이내 고이 접어서 멀찍이 치워 두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하나 있었네. 킬리안이 아카데미에 올 만한 이유가.’
생각해 보면 이 또한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상당히 오랜만인 느낌이긴 했다.
거기에 나온 아카데미의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디트가 마력을 개화한 해의 가을쯤 황립 아카데미 하나가 새로 설립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황족으로 인정받으면서 혼자 외출하는 게 자유로워진 유디트는 호기심에 이 아카데미에 방문하게 되는데, 신분을 따지지 않는 평등한 교육을 표방한 이 황립 아카데미는 사실상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 극심한 곳이었다. 심지어는 같은 귀족 내에서도 차별이 심했다.
그곳에서 유디트는 귀족 학생들에게 괴롭힘당하던 평민 학생들을 발견하고 도와주게 된다.
[“이 세상에 천한 사람은 없어요. 모두가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존귀한 이들인걸요. 당신들은 노예 소생이라며 무시당하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내 본질이 다르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늘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지금은 모두가 화려한 껍데기를 뒤집어쓴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 당신들이 그토록 멸시하는 자들 역시 당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 일은 목격자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가게 된다. 카뮬리타의 백성들은 고귀한 황녀님의 입에서 나온, 자신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말에 감동했다.
반면 혈통 우월주의자인 1황녀 아르벨라는 황족의 위엄을 정면으로 부정했다고 할 수 있는 이 가당치도 않은 유디트의 말을 듣고 당연히 분노했다. 하여 이때부터 주제넘은 소리를 지껄인 유디트를 본격적으로 적대시하기 시작한다.
아무튼, 그 일을 계기로 유디트는 카뮬리타 백성들에게 그들의 대변자로 불리며 본격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게다가 그날 하필 아카데미에 방문해 그런 유디트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에는 킬리안 베른하르트도 있었다. 킬리안 베른하르트의 친척이 이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친척을 보러 왔던 킬리안이 자신의 허물이라 할 수 있는 과거를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귀족들에게 일침을 가한 유디트에게 흥미를 느끼게 된다는, 그런 전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이것은, 아직 유디트의 기사가 되기 전이라 한참 백야의 전당에서 노예 취급을 받으며 억압당하고 있던 제라드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4황녀에게 처음으로 호감을 갖게 된 사건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해 놓고 나는 속이 좀 껄끄러워져서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든,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 르벨 아카데미가 킬리안의 친척이 다니는 곳인 것 같은데……. 이 시기에 새로 설립된 황립 아카데미는 여기가 유일했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오늘 킬리안이 여기에 방문한 이유도 그래서가 아닐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미래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곳이 내 이름을 딴 이 아카데미지? 찜찜하게 말이야.’
하지만 지금의 내가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 나오는 1황녀 아르벨라와 달라서 그런지, 거기에서 본 아카데미와 이 르벨 아카데미 사이의 차이점도 명백하게 존재했다.
일단, 르벨 아카데미는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처럼 귀족들과 평민 아이들의 수업 내용에 차등을 두거나, 식당과 다과실을 비롯한 편의 시설 사용에 차별을 두는 일이 없었다.
지원이 필요한 가난한 평민, 혹은 한미한 가문의 귀족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대신 아카데미 내에서 고학년 귀족 자제들의 시중을 들게 하거나 교내 청소를 시켜 굴욕을 주는 등의 일도 일절 없었다. 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 중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무조건 후원 제도를 도입해 전액 장학금을 지원했다.
그러니 내가 본 미래와 똑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긴 하니, 생각난 김에 총장에게 다시 한번 당부의 말을 남겼다.
“총장이 늘 고생이 많아. 학생들이 이렇게 즐거워 보이는 걸 보니 나도 기쁘군. 혹시라도 학생들의 대우에 차별을 두는 일이 없게 지금처럼 항상 주의를 기울여 줬으면 좋겠어.”
“예, 물론이고말고요! 이 르벨 아카데미 안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평등합니다! 모두가 이 아카데미의 이름처럼 1황녀님의 정신을 이어받을 훌륭한 인재들인 것을요. 아무렴요!”
“그래……. 나도 내 이름을 딴 아카데미이니만큼 이곳에 애정이 각별하니 앞으로도 신경 써서 자주 들여다보도록 하지.”
“헉! 그렇게 해 주신다면 이 알렉스, 아니! 저희 새뮤얼 가문에게 두고두고 너무나도 큰 영광이 될 겁니다! 저도 1황녀님의 이름이 후세까지 오래오래 길이길이 남도록, 반드시 이 르벨 아카데미를 세계 최고의 교육 시설로 만들겠습니다……!”
알렉스 총장은 내 말에 흥분해서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라고 일부러 내가 이 아카데미를 계속 주시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 거였으니, 총장의 이 마음가짐도 되도록 변함없이 오래 가기를 바랐다. 내 팬을 자처하며 부담스럽게 구는 것치고는 일 처리가 꽤 마음에 들어서, 혹여나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 총장을 중간에 갈아치우기는 싫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베른하르트 소공작은 다른 볼일을 보느라 바쁜 것 같으니 지금 총장실로 부르지 않는 게 좋겠어.”
“핫, 과연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럼 제가 정성을 다해 1황녀님을 모시겠습니다!”
아무래도 지난 연회장에서의 일로 킬리안의 얼굴을 보기가 살짝 불편했기 때문에, 오늘 그와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아 총장에게 덧붙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해서, 오늘 나와 킬리안은 이 아카데미에서 마주칠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으아아악!”
돌연 어디선가 갑작스러운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지며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웬 학생 한 명이 아카시아 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산책로를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니! 저, 저런……!”
알렉스 총장도 나와 같은 것을 목격하고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그를 포함해 이 자리에 있던 몇몇 사람이 마법을 시도하는지 여기저기서 마력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법진을 완성하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파앗!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마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내 손에서 화려한 문양을 그리며 퍼져나간 거대한 황금빛 마법진이 아이에게 닿는 순간, 또 다른 마법진 하나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내 마법이 더 강해서, 아이는 내 마법진에 감싸여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바람에 휩쓸린 아카시아 나무에서 하얀 꽃잎이 떨어졌다. 나는 흰 꽃잎이 융단처럼 깔린 길을 걸어, 바닥에 얼떨떨하게 주저앉아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괜찮니?”
내 목소리를 들은 아이가 헉, 숨을 들이켜서면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은발로도 보이는 연미색 머리칼을 가진, 열두 살이나 열세 살가량의 예쁘장한 소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건 어디선가 본 듯한 영롱한 보라색 눈이었다.
“어, 어? 화, 황녀님……?”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크게 당황하고 놀란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나도 낭패라고 생각하며 남몰래 혀를 찼다. 선명한 보라색 눈을 본 순간, 이 소녀…… 아니, 소년이 누구인지 감이 왔기 때문이다.
“우……와아아아!”
그때, 뜬금없이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방금 봤어? 엄청 순식간에 마법진이 파바박! 날아갔어!”
“이렇게 가까이에서 1황녀님이 마법 쓰는 걸 본 건 처음인데 완전 빠르다. 그리고 영상 마력석으로 보던 것보다 실물이 훨씬 더 예뻐!”
“그런데 방금 날아간 애는 누구야?”
멍하니 나를 보던 보라색 눈의 소년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제 친구들에게 우다다다 달려가 성깔을 부렸다.
“야, 죽을래? 어디다 마법을 쏘는 거야!”
“우리도 네가 그렇게 종잇장처럼 날아갈 줄은 몰랐지!”
“뭐라고?! 누가 종잇장이야!”
“그래도 1황녀님이 구해 주셨잖아! 아 씨, 부러워! 차라리 내가 날아갔어야 했는데!”
보아 하니 귀족과 평민 아이들이 무리에 섞인 것 같은데, 어울려 노는 데 위화감이 없었다.
“이, 이 녀석들! 황녀님 앞에서 이 무슨 위험한 장난이냐!”
어느새 내 옆으로 달려온 총장이 학생들을 무섭게 꾸지람했다.
“마침 1황녀님이 아카데미에 방문하시지 않았다면 크게 다칠 뻔하지 않았어? 너희는 모두 벌점 10점에 반성문 50장이다!”
“앗! 한 번만 봐주세요, 총장님!”
“이 녀석들, 순서가 틀렸지 않느냐! 당장 1황녀님께 감사와 사죄를 드리지 못하겠느냐?”
“소란을 부려서 죄송합니다, 1황녀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황녀님!”
총장의 말을 따라 아이들이 나를 향해 넙죽 인사했다.
“역시 고명하신 1황녀님이십니다.”
그때,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아카시아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과 함께 귓바퀴를 휘감고 지나갔다. 나는 눈앞에 나타난 남자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1황녀님께서 누구보다 빠르게 나서 주신 덕분에 부상을 입은 학생이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오늘도 흰 눈송이 같은 은빛 머리칼과 빨려들 것만 같은 보라색 눈이 어쩌구…… 하는 수식어를 잘 지키고 있는 킬리안이었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서서 여느 때처럼 근사한 몸놀림으로 인사했다.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1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지난 황실 연회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그의 말대로, 지난 황실 연회 때 상처받은 듯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돌아섰던 킬리안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금의 킬리안에게서는 그날의 잔재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역시 조금 전에는 소공작의 마법이었군.”
그런데 별생각 없이 던진 내 말에, 다음 순간 킬리안이 이채를 띤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마법을 사용한 게 저라는 걸 알아보셨습니까?”
나를 지그시 응시해 오는 시선에 괜히 얼굴이 간지러워져서 손에 든 지팡이를 까딱거렸다.
왠지 별것도 아닌 말에 의미 부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뭐, 사람마다 마력의 느낌이 다르니까. 소공작도 알겠지만 원래 내 기억력이 좀 좋거든.”
“그렇지요. 1황녀님의 특출함은 물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을 긋듯이 내뱉은 내 말을 킬리안이 부드럽게 받았다.
“이안.”
그런 뒤 그가 내 마법으로 구해진 보라색 눈의 소년을 불렀다.
“제 육촌 동생인 이안 비스타스입니다. 저희 베른하르트 가문의 방계인 비스타스 백작가 출신이지요. 1황녀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다친 곳 없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안, 1황녀님께 다시 한번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려라.”
“이안 비스타스가 1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방금은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래, 다친 곳이 없다니 다행이구나. 하지만 이제 그런 위험한 장난은 치지 마렴.”
“네, 황녀님……!”
여전히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소녀처럼 예쁜 소년이 친구들과 언제 허물없이 티격태격했냐는 듯이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서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바로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문제가 일어난 황립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던 킬리안의 친척 동생이었다. 더불어 유디트를 아주 잘 따라, 킬리안 베른하르트와 그녀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는 소년이기도 했다.
이안은 킬리안이 시키는 대로 나한테 감사 인사를 한 뒤 들뜬 얼굴로 또다시 후다닥 뛰어서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그러고는 다 같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왁자지껄 시끄럽기도 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님. 이것 참, 조금 전에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하마터면 귀하신 공자님이 다칠 뻔했으니.”
“다음에도 오늘 같은 요행이 있으리란 법이 없으니, 이번에 단단히 주의를 주는 편이 좋겠지. 방금 위험한 장난을 친 학생들의 무리에는 이안도 속해 있으니, 아카데미에서 그 아이도 함께 단단히 타일러 주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일을 벌인 학생들 전부에게 제대로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총장은 킬리안이 보는 앞에서 그의 방계 친척 아이에게 벌을 준 것 때문에 혹시 그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내심 우려하다가 안심한 눈치였다.
킬리안은 총장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나를 돌아봤다.
“1황녀님께서는 오늘 어쩐 일로 아카데미에 방문하셨습니까?”
“아카데미의 교수 자리 하나가 공석인데, 오늘 면접관으로 초대받아서 방문했지.”
“1황녀님께서 명예 교수로 제안을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거절하셨나 보군요.”
“총장의 권유는 고맙지만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아카데미와 학생들 모두에게 아쉬운 일이겠습니다.”
의외로 킬리안과의 대화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그는 지난번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나한테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태연하게 굴었다.
“저는 이 황립 아카데미에 방문하는 게 오늘이 처음인데, 교정을 둘러보니 1황녀님의 이름을 딴 아카데미답게 아주 아름답게 꾸며져 있더군요.”
“그렇지요? 1황녀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알렉스 총장은 킬리안의 말에 반색했다. 킬리안도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특히 1황녀님의 모습을 본뜬 동상이 아주 인상적이던데요.”
“동상……?”
그 순간 내 귀에 박힌 말을 듣고 나는 눈썹을 추어올렸다.
“아직 보지 못하셨습니까? 본관의 교정 앞에 아주 위엄 있는 모습으로 우뚝 세워져 있으니 한번 가 보시지요.”
나는 스산한 눈으로 총장을 돌아보았다.
내가 예전에 분명 동상은 됐다고 했는데 결국 그걸 만들었어?
내 싸늘한 눈빛을 받은 알렉스 총장이 황급히 변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동상이 꼭 있어야 비로소 저희 아카데미가 완전해지는 느낌이라……! 앗, 잠깐 저쪽에서 저를 부르는군요. 금방 다녀올 테니, 잠깐 소공작님과 말씀 나누고 계십시오.”
급기야 총장은 내가 당장 동상을 철거하라고 명령을 내릴까 두려웠는지, 다른 핑계를 대면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까지 했다. 어차피 잠시 후에 면접 때문에라도 다시 내 얼굴을 볼 수밖에 없을 텐데 쓸데없는 짓이었다.
“잠깐 산책로를 걸으시겠습니까? 듣자 하니 1황녀님의 탄생화인 아카시아 꽃나무를 아카데미 전체에 심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교내 경관이 아주 훌륭합니다.”
“소공작,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는 능청맞게 권유하는 킬리안을 흘겨봤다.
이런 대화 패턴은 뭔가 익숙했다. 그래서 이 아카데미 곳곳에 새겨진 내 상징물들을 내가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걸 알고 지금 킬리안이 나를 놀리는 중이라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