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벨라는 직접 그 당사자를 만나러 갔다.
미레이유와 다른 솔렘 왕국 사람들은 마력 사슬로 포박된 채 바닥에 꿇려 앉아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을 앞에 두고 느긋이 의자에 등을 기대앉은 아르벨라만이 유일하게 그 자리에서 여유가 있어 보였다. 싸늘한 벽안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느릿하게 훑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도망치려고 꽤 많이 시도했나 보지? 근성 있네. 물론 칭찬은 아니야.”
내상을 입어 피를 토한 듯이 그들의 옷은 붉게 젖어 있었다. 물론 아까 아르벨라에게 당한 상처로 그들의 행색은 원래부터 엉망이었지만, 지금은 특히나 얼굴이 허옇게 질려 반쯤 죽어가는 것 같은 몰골이었다.
당연히 그래 봤자 자업자득이었기에, 동정심은 생기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들은 아르벨라가 라칸 때문에 분노해 무서운 기세로 마법을 난발하기 시작했을 때, 두 번째 균열까지 열어 혼란을 야기한 후 도주를 시도했다.
결국은 그런 보람도 없이 이렇게 아르벨라에게 붙잡히긴 했으나, 어찌 되었든 하는 짓을 보면 가엾게 여길 주제는 되지 못했다.
“내가 그쪽한테 궁금한 게 상당히 많은데. 어때, 하이어스 백작 영애? 이제는 대화를 나눌 마음이 생기셨나?”
아르벨라는 미레이유에게 걸었던 금언 마법을 풀어 줬다.
미레이유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뗐다가, 몇 시간 동안 막혀 있던 목에 무리가 갔는지 마른기침을 몇 번 토해냈다.
그런 뒤 그녀는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리는 눈으로 아르벨라를 보며 갈라진 목소리를 더듬더듬 입술 밖으로 흘려보냈다.
“어, 어떻게…… 어떻게 기억을……. 분명히 그때 마법을 걸었는데!”
“아, 하이어스 영애는 그게 제일 궁금한가 보구나.”
아르벨라에게 직접 마법을 건 당사자라 그런지, 미레이유는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황후 전하나 밀리엄과 달리 나한테는 마법이 통하지 않아서 신기해? 내가 잡아 간 동료에 대해 제일 처음 물을 줄 알았는데 매정하네.”
그 순간 미레이유의 몸이 움찔 떨렸다. 마찬가지로 아르벨라의 말에 동요한 듯이, 금언 마법에 걸린 다른 솔렘 왕국 사람들이 몸을 뒤틀며 ‘읍읍’ 소리를 냈다.
“그보다 미레이유 영애 때문에 하이어스 가문이 난처해질지도 모르겠어. 황족 납치 및 시해 사건인 만큼 반역죄를 물어 일가족을 모두 처형시켜도 할 말이 없다는 건 알겠지.”
미레이유의 말처럼 그녀의 마법이 통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아르벨라도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 아르벨라가 진짜 알고 싶은 건 다른 부분이었다.
일단 미레이유 하이어스의 진짜 신분과 이름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녀가 사용하는 이상한 정신계 마법에는 흥미가 있었다. 또 오늘 솔렘 왕국 사람들이 두 개나 열어젖힌 균열에 대해서도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아까 미레이유가 아르벨라에게 마법을 썼을 때, 또 라칸을 비롯한 다른 솔렘 왕국 마법사들을 상대했을 때, 이상하게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빨리 완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하루 만에 병증이 나아지다니,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 요행이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이어스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이 일과 무관합니다.”
“그건 내가 판단해. 제대로 해명한 적도 없으면서 벌써부터 무죄를 주장하다니, 너무 성의가 없는데.”
그래도 하이어스 백작 가문의 일가가 참형을 당하는 건 원하지 않는지, 미레이유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물론 아르벨라는 거기에 눈곱만큼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닌 듯하고. 노먼 하이어스의 전시회에서 본 그림도 유디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던데 말이야.”
“그림……이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여자 그림.”
그 순간 미레이유의 눈빛이 변했다. 아르벨라는 지금 생각해 보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실소하며 말을 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묘한 기시감이 들었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아주 어릴 때 본 적이 있는 유디트의 모친이 딱 그렇게 생겼던 것 같네?”
“그런 건 그냥 우연…….”
“아래 서명까지 우연일까? 글록시니아(Gloxinia)라고 떡하니 이름까지 박혀 있던데, 이건 어떻게 변명할래?”
물론 아르벨라도 솔렘 왕국 사람들 사이에 있는 미레이유를 본 후에야 노먼 하이어스의 전시회장에서 본 그림과 유디트의 모친을 겨우 연결시킨 것이긴 했다. 노예 출신인 유디트의 모친에 대한 정보는 황궁 안에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르벨라의 성격상 유디트의 모친의 진짜 신분을 몰랐던 예전에는 특히나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말이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 유디트의 모친을 황궁 안에서 한두 번 직접 마주친 적도 있었음에도, 그녀의 얼굴과 언뜻 들었던 이름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노먼, 그 멍청한 놈이…….”
그림의 서명 이야기까지 나오자 미레이유도 더 발뺌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는 울컥한 듯이 작은 욕설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보니, 아무래도 전시회에 그런 그림이 올라간 사실은 몰랐던 모양이다.
“노먼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그림이 전시회에 올라간 건 정말 우연이에요. 이번 일도 하이어스 가문에서는 저 혼자……!”
“하이어스 영애.”
다급한 목소리로 노먼과 하이어스 가문을 두둔하기 시작한 미레이유를 아르벨라가 가로막았다. 아르벨라의 손톱이 의자의 손잡이를 느릿하게 두어 번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영애는 지금 내가 정말 관심 있는 게 그딴 거라고 생각해?”
“…….”
“그 정도로 머리가 나쁜 거면 아주 실망스러워.”
미레이유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향했다. 누군가는 고개를 저었고, 누군가는 미레이유처럼 긴장감과 혼란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마른침을 삼키자 뻣뻣하게 굳은 미레이유의 목이 작게 움직였다. 그녀는 눈을 한번 길게 감았다 뜬 뒤, 조금 전보다 한결 침착해진 눈으로 아르벨라를 마주했다.
“……1황녀님이 어떻게 저희의 정체를 단번에 간파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4황녀님의 모친 되시는 글록시니아 님과의 연관성까지 꿰고 계시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쉬울 수도 있겠지요.”
결국 미레이유는 아르벨라에게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솔렘 왕국의 동료 중 일부에서 격렬한 반발이 느껴졌지만 미레이유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예상하신 대로 저희는 솔렘 왕국의 후손들로, 예전부터 고귀한 피를 이은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4황녀님을 지켜보고 있던 중, 이번 마력 각성을 통해 그분께서 솔렘 왕족의 유일한 혈통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했고요.”
대략의 이야기는 아르벨라가 알고 있는 것과 같았다. 미레이유는 아르벨라의 생각대로 진짜 하이어스 가문 사람이 아니며, 솔렘 왕국의 마법을 이용해 카뮬리타에 숨어들었다고 했다.
“1황녀님은 4황녀님과 사이가 돈독하시지요.”
아무래도 미레이유는 아르벨라를 회유하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녀는 호소하는 듯한 눈빛과 목소리로 아르벨라에게 부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3황자님의 옆에서 지켜봐서 알아요. 그러니 4황녀님을 위하신다면 1황녀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세요.”
“싫은데.”
“예?”
“싫다고.”
그러나 아르벨라는 미레이유의 말을 냉정할 정도로 단칼에 싹둑 잘라냈다. 손에 턱을 괴고 앉아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너희가 내 발밑에 납작 엎드려서 간절히 애원하며 빌어도 생각해 볼까 말까 한 문제야. 그런데 오늘 너희들이 한 짓은 부탁하는 사람들이 보일 만한 태도가 아니었잖아?”
“그건 저희의 실수…….”
“심지어 넌 지금 네가 말한 대로 밀리엄의 최측근 시녀로 몇 년이나 황궁에 있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그 애를 꾀어내 목적을 이루려고 했지.”
“…….”
“만약 오늘 납치된 게 밀리엄이었다면 지금 황궁 지하 감옥에서 고문받고 있는 그 더러운 놈에게 험한 꼴을 당한 건 그 어린애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순간 미레이유를 포함한 솔렘 왕국 사람들이 동요했다. 그들 중에서 나름대로 높은 지위에 있는 듯했던 라칸이란 이름의 남자가 카뮬리타 황궁 지하 감옥에서 고문받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고, 오늘 그들이 사용한 비윤리적인 방법을 꼬집히자 불편함을 느낀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기억 조작 마법을 비롯한 수상쩍은 마법들까지 사용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균열을 열어 카뮬리타 제국민들을 혼란에 빠트리기까지.”
아르벨라는 의자의 손잡이를 연이어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위험하고 수상한 인간들을 굳이 내 친애하는 여동생에게 붙여 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는데.”
미레이유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가늠하듯이 그런 아르벨라의 얼굴을 살폈다.
“그럼…… 무엇을 바라시나요?”
그러다 이내 미레이유가 다시 입을 열어 조심스럽게 물어 온 순간, 아르벨라의 손이 멈췄다.
“저희를 바로 라칸처럼 황궁에 끌고 가지 않고 남겨 두신 이유가 있겠지요. 원하시는 게 뭐죠?”
“지금 감히 너희가 나와 거래를 하겠다는 말이냐?”
서늘한 반문에 미레이유는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도 만만치 않던 1황녀이나, 이렇게 온몸을 구속당한 채 완전히 무력해진 상태로 마주한 그녀는 단지 목소리를 내리까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솜털까지 곤두서게 만들었다.
“아닙니다. 그저…… 1황녀님의 마음을 풀어드릴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노력하겠다는 의미지요.”
다른 솔렘 왕국의 동료들은 미레이유가 이렇게 아르벨라의 앞에서 몸을 낮추는 태도를 취하는 게 굴욕적인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까 라칸 때문에 대노해 폭주하던 아르벨라를 막아내는 건 고사하고, 그녀에게서 도망치지도 못했다.
그런데 더군다나 이렇게 옴짝달싹도 못하게 몸을 묶인 상태에서는 아르벨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았다.
방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미레이유의 얼굴에 꽂힌 아르벨라의 새파란 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렸다.
그 후로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마침내 아르벨라가 소리 없이 웃었다.
“미레이유 하이어스 영애와는 생각보다 말이 통하겠구나.”
그렇게 되어 원래라면 4황녀 유디트의 가신이 되어야 할 솔렘 왕국의 수상한 마법사들은 아르벨라에게 신변을 구속당해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
라칸이란 남자는 의외로 입이 무거웠다.
그는 높은 강도의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정체와 동료들의 존재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들이 찾고 있는 솔렘 왕국의 유일한 왕족인 유디트의 존재와 이번 납치극을 벌인 원인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았다.
혹시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유디트에게도 불똥이 튀게 될까 우려한 모양인데, 아주 절절한 충성심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감히 황족을 시해하려 한 데다 건방지게 입까지 굳게 다물고 있는 이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황제 폐하께서는 대노하셨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권한대로 가장 높은 강도의 고문까지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이번에 두 개나 동시에 열린 균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마도공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도, 마땅한 원인은 밝혀낼 수 없었다.
이렇게 황궁 안이 뒤숭숭한 와중에도 유디트를 공식적인 자리에 선보일 준비는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마침 다가오는 중요한 황실 행사들이 몇 개 있었다.
다른 황족들 모두 유디트가 재평가되는 이런 상황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지만, 의외로 여기에 가장 큰 불만을 품은 건 5황녀 비비안이었다.
특히 전과 달리 황제까지 유디트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황족들의 공식적인 좌석 위치가 바뀐 것이 발단이었다.
원래 유디트는 4황녀지만 가장 말석에 앉았었다. 하지만 유디트의 마력 각성 후 황제가 다시 지정한 위치에서 말석은 유디트가 아닌 5황녀 비비안의 차지였다.
비비안은 거기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봤을 때는 우리 게으른 황제 폐하께서 자식들의 서열을 단순히 나이순으로 재정렬한 것뿐인데,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할 건 뭔지.
물론 모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막내인 3황자 밀리엄이 말석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황후 소생이었기에 예외적으로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비안도 감히 거기에 비벼 볼 생각은 못하는 눈치였으나, 유디트가 말석에서 탈출한 것만큼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듯했다.
“황녀님, 완성된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이리 가져와.”
그사이에 내가 맡긴 물건도 제작이 끝났다. 나는 마리나가 들고 온 것을 확인했다.
보관함에 든 건 언뜻 보면 평범한 장신구들 같았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여기에 사용된 건 내 마력을 넣어 가공한 보석이었다. 즉, 다른 마법사들이 보조용으로 소지하는 마력석과 같은 용도였다.
이런 용도의 물건은 당연히 지금까지의 나는 쳐다본 적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마력을 보충해야 할 정도로 능력치가 부족한 마법사들을 비웃었으면 또 몰라.
‘이 정도면 그래도 다른 보석에 섞여 티가 나지 않는군.’
“수고했어. 그만 치워도 돼.”
“네, 황녀님.”
하지만 이제는 나한테도 필요한 물건이었다. 혹시 또 이번처럼 갑작스럽게 마법 발동이 어려워졌을 때를 대비해야 했으니까.
그래도 역시 이런 걸 사용하는 티를 내기는 싫어서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한 게 이렇게 다른 용품으로 탈바꿈해 몸에 소지하는 것이었다.
“황후 전하께서 보시면 기뻐하시겠어요. 지금까지는 선물 받으신 보석을 보석함에 넣어 두시기만 했잖아요.”
아니, 그냥 일회용으로 쓰려고 꺼낸 거야…….
이 보석이 일반 보석이 아니라 내 마력을 넣어 가공한 것이란 사실은 마리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내게 심경의 변화가 있어 아주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받은 보석을 꺼낸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나는 보석함을 들고 다시 방을 나서려 하는 마리나를 보다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마리나,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으면 언제든지 해.”
그러자 마리나가 멈칫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잠깐 가만히 보다가 평소처럼 빙긋 웃었다.
“네, 그럴게요. 그럼 쉬세요, 황녀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마리나의 모습을 말없이 주시했다. 마리나는 내 앞에서 여느 때처럼 행동했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전에 없던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 다녀오면서부터였다. 이번에 만든 마력석에 대해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그 위화감 때문이었다.
-힝, 나 배고파.
그때 구석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내 사색을 방해했다.
-맛있는 거 준다더니 약속도 안 지키고, 얼마 전에도 너만 맛있는 냄새 풍기면서 들어오고, 나빠!
여전히 방 한구석의 결계 안에 갇힌 보라색 괴물이 자리에서 통통 튀면서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학습이라는 걸 하는지, 이제는 언어를 구사하는 게 전보다 자연스러워진 보라색 생물체에게 말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널 굶기는 줄 알겠구나. 뭐든 다 맛있다고 먹어 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야?”
녀석은 잡식인지, 뭐든 다 잘 먹었다. 심지어 시험 삼아 동물 사료 같은 것을 줘도 좋다고 죄다 먹어치웠다. 그래봤자 어차피 이 괴물 놈이 빨아먹는 것은 생명체의 마력뿐이긴 했다. 그래도 역시 찝찝해서 육류는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관찰했는데, 이놈은 특이하게도 과일이나 식물 같은 것의 마력을 흡수할수록 몸 색깔이 짙어졌다.
‘그러니까 저 보라색의 정도로 알 수 있는 게, 혈중 마력 농도…… 뭐 그런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몸통의 색이 서서히 옅어지는 걸 확인했으니 아마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결계 속에 있는 보라색 생물체를 보다가 손으로 잡아 빼냈다. 이제는 내가 제법 익숙해졌는지, 녀석은 내 손에 들려서도 오들오들 떨지 않았다.
“이상하게 너한테서 그들과 살짝 비슷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그들?
그 솔렘 왕국의 놈들.
하기야, 저들 마음대로 균열을 여는 놈들이니 거기에서 살다 온 괴물과 뭔가의 공통점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 수 있었다.
내 동정심과 협조를 얻을 생각으로 자기네들과 유디트의 관계에 대해 술술 불 때는 입이 가볍더니만, 그들은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지하 감옥에 있는 라칸이란 놈만큼이나 쓸데없이 말을 아꼈다.
나는 꿈틀거리는 괴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녀석에게 그놈들을 한번 직접 보여 줘 볼까?’
솔렘 왕국 놈들을 보고 와서 떠봤을 때, 이 괴물 녀석은 균열을 여는 인간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혹시 직접 보면 뭔가 반응이 있을지도 모르지.
-에잇!
살살 눈을 굴리며 내 눈치를 보던 연보라색 괴물이 탈출을 시도한 건 바로 그때였다. 녀석은 내 손이 느슨해진 틈에 튕기듯이 재빠르게 몸을 날려 열린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퍽!
-꾸엥!
그러나 보라둥이 녀석의 반란은 너무도 간단히 끝났다. 마침 창문 밑에 있던 사람이 아래로 뛰어내려 돌진하는 녀석을 한 손으로 덥석 붙들어 저지했기 때문이다.
붉은 머리 청년이 고개를 들어 창문 앞에 있는 나를 올려다봤다.
“제라드, 그거 이리 던져.”
“가지고 올라가겠습니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제라드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방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냥 밑에서 던지라니까.”
“어떻게 황녀님께 그런 무엄한 짓을 하겠습니까.”
평소에 무엄한 짓을 잘만 하던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잠깐 사이에 급격히 쪼그라든 듯한 보라색 덩어리를 제라드에게 받았다.
“감히 내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앞에서 탈출을 시도하다니 아주 용감해졌구나.”
-꾸헤에엥…….
“차라리 백야의 전당에 보내 줄까? 요즘 연구실의 표본이 부족하다고 하던데. 더군다나 이렇게 살아 있는 표본이라면 대환영할 거야.”
-흐아, 아냐! 나 그런 거 싫어! 난 여기 있는 게 좋아.
녀석이 재빨리 내 손에 몸통을 비비적거렸다.
-동족 중에 네가 제일 좋아! 그러니까 맛있는 거 주면서 날 옆에 둬라.
역시 학습이란 걸 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약한 척하면서 매달리면 내가 화를 덜 낸다는 걸 알고 수작을 부리는 느낌이었다.
나와 괴물의 모습을 지켜보던 제라드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황녀님께서는… 버려진 것을 주워서 키우는 취미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왠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평소와 조금 다른 듯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역시 제라드의 눈은 약간 건조하고 차가운 느낌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얼마 전에 주운 자들도 이대로 살려 두실 겁니까?”
이내 제라드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괴물 녀석을 다시 결계 안에 넣었다.
지금 제라드가 말한 건, 그렇지 않아도 내가 방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납치극 사건이 있었던 날 밤 그들을 따로 만나러 갔을 때, 본의 아니게 제라드와 동행했었다.
당연히 원래는 나 혼자 황궁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그와 나는 종속 각인 때문에 연결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그날따라 제라드는 한밤중에도 내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듯, 내가 침실에서 빠져나가자마자 바로 따라붙어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뒤따르는 게 마음에 안 드시면 롬벨 경이라도 데려가십시오.”
제라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런 자리에 황제의 사람인 롬벨 경을 데려갈 리가 있나?
나는 그날 내 앞에 버티고 선 제라드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결국 그의 동행을 수락했다. 그래서 제라드도 내가 그 납치범들을 황실에 넘기지 않고 따로 감금시켜 둔 걸 알고 있었다.
제라드는 또 그때처럼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그날, 숲의 창고에서 본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내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나를 보자마자 무섭게 굳어졌던 제라드의 얼굴을 생각하면 썩 보기 좋은 몰골은 아니었을 것 같다.
‘라칸이었나, 그 미친놈이 있는 힘껏 후려치긴 했지. 마차랑 창고 바닥에서 굴러서 옷차림도 더러웠고.’
그래서인지 제라드는 그 후로 나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더불어 내가 따로 살려 둔 솔렘 왕국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그럼…… 무엇을 바라시나요?”
“저희를 바로 라칸처럼 황궁에 끌고 가지 않고 남겨 두신 이유가 있겠지요. 원하시는 게 뭐죠?”
“한동안은 살려 둘 거야. 써먹을 데가 있거든.”
나는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에서 사과 하나를 들어 결계 안에 집어넣었다. 괴물은 내 눈치를 보면서도 그것을 냉큼 받아 마력을 쭉쭉 빨아먹었다.
“미레이유 하이어스 영애와는 생각보다 말이 통하겠구나. 그럼 일단은 너희가 만들어 낸 그 균열 말이야…….”
그런 괴물의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옆에 서 있는 제라드가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 열자.”
그날, 지금처럼 웃으면서 꺼낸 내 말에 당황하던 솔렘 왕국 사람들의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떠올리자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저절로 싸늘하게 비틀렸다.
마침내 내일로 다가온 사냥제가 제법 기대되었다.
23. 나 말고 다른 악역은 다 망해도 된다
“또 실패했다니!”
커다란 노성이 밀폐된 공간 안에 울렸다.
곧바로 쥬논 그레이엄의 손이 앞에 있던 남자의 따귀를 거세게 올려붙였다. 강한 힘에 잠깐 휘청인 남자가 다시 몸을 바로 세우고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꼭 성공할 자신이 있었는데…….”
“그 말이 몇 번째인지 알긴 아는 거냐?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네놈의 무능함을 봐줘야 한단 말이냐!”
분노 어린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남자의 얼굴을 매섭게 후려치는 것 같았다.
쥬논 그레이엄은 이번에도 무산되어 싸늘한 피비린내만 풍기는 마법진을 보며 치솟는 분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쥬논의 계획은 매번 성공할 듯 말 듯하며 그를 애태우다가 항상 거의 마지막에 실패했다. 게다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이러는지 아직까지 원인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반복되는 시행착오에, 이제는 공급할 제물을 더 구하기도 어려웠다.
“워, 원래 금단술은 까다로운 마법이니만큼 실패할 확률도 큽니다. 그래도 조금씩 성공의 조짐이 보이고 있으니 너무 실망하시지는…….”
“닥쳐라! 이 쓸모없는 놈이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것이냐!”
쥬논 그레이엄은 아예 들고 있는 지팡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악! 죄송합니다, 후작님! 그래도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발밑에서 애원하는 목소리가 참으로 절실했으나 쥬논의 손을 멈추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쥬논 그레이엄에게 성이 찰 때까지 맞아 기절한 남자는 다른 사람들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거기 너. 앞으로는 네가 이놈의 역할을 대신해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방법을 조금 바꿔 보도록 하지. 이놈을 제물로 사용할 테니 그때까지 숨은 붙여 놓도록.”
“예, 예! 알겠습니다.”
쥬논 그레이엄은 피 묻은 지팡이를 바닥에 거칠게 내던진 뒤 지하의 다른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눈들이 그를 반기듯이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 한가운데에 몸을 들인 이후에야 분노로 뜨겁게 달궈져 있던 몸이 서서히 식으면서 마음에도 안정감이 찾아왔다.
냉정을 되찾은 쥬논 그레이엄은 조금 전보다 차분하게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 역시 좀 더 제대로 된 공양물이 필요해.”
머릿속으로 조용히 제물을 탐색하는 그의 눈도 방 안에 있는 다른 눈들처럼 맹렬하게 반짝였다.
결국 쥬논 그레이엄이 지하를 떠난 것은 어둠이 저물고 동이 틀 무렵이었다.
*
사냥제가 시작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막 도착한 사냥터는 시끌벅적했다. 오늘은 날씨도 아주 화창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특히나 활력이 도는 것 같았다.
“황녀님도 사냥 대회에 참가하실 겁니까?”
언제나처럼 열화와 같이 쏟아지는 사람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 주며 황족들이 모인 자리로 향했다. 그러던 중에 제라드가 뒤에서 물어 왔다.
“글쎄, 왜?”
“참가하실 거라면 제가 수행원으로 따르겠습니다.”
나는 걸음을 늦추면서 제라드를 돌아봤다. 공식적인 행사인 만큼 제라드도 평소보다 멋들어진 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결 눈에 띄는 모습을 한 제라드를 쳐다보는 사람들도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 사냥터에 있는 사람이 나뿐인 것처럼, 내 얼굴에만 줄곧 고정되어 있었다.
제라드도 지금까지 내 옆에서 보낸 시간이 있으니, 내가 사냥터에 들어갈 때마다 수행원을 따로 두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역시 얼마 전의 일 때문이겠지.
“올해는 참가하지 않을 거야.”
나는 제라드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혼잣말을 하듯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래. 황금 여우를 닮은 금빛 갈라시아는 한 마리 갖고 싶구나.”
갈라시아는 매년 사냥 대회 때마다 잡기 어렵기로 유명한 영물급 마법 생물이었다.
“제라드, 올해 사냥 대회에는 네가 참가해.”
“저는…….”
“참고로 이건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란다.”
거부를 상정하지 않은 명령에 제라드가 침묵했다.
사실 정말 마법 생물 따위가 갖고 싶어서 제라드에게 대회 참가를 시킨 건 아니었다. 다만 얼마 전의 일 이후로 나를 보는 제라드의 시선이 속을 불편하게 해 그를 옆에 두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와 조금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제라드는 내 뒤에서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제라드에게서 격양된 감정을 억누른 듯한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당신은 왜 매번 그렇게…….”
“이런, 1황녀님도 지금 도착하셨나 보군요.”
제라드가 이런 식으로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드문 일이라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하지만 때마침 옆쪽에서 나타난 제삼자가 그런 행동을 자연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다.
“쥬논 그레이엄이 1황녀님을 뵙습니다.”
공교로운 시점에 등장한 그레이엄 후작을 보며 설핏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을 뿐, 나는 곧 입매를 당겨 그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침 비슷한 때 도착했군, 후작. 지금은 다른 황족들도 거의 착석했을 시간인데.”
“1황녀님 말씀대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마차를 타고 긴 시간 이동하는 게 이제는 제법 힘에 부치더군요.”
늦게 도착한 그레이엄 후작을 살짝 꼬아서 말하자 그가 능청맞게 그것을 흘려 넘겼다.
“나이 탓에 체력이 달린다니, 그럼 이번 사냥 대회에 오래 있지는 못하겠군.”
“그래도 1황녀님께서 계시는 자리이니 되도록 긴 시간 머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것 참 아쉽네, 후작.”
그레이엄 후작은 내가 그를 빨리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어서 떠보는 줄 알았는지, 오히려 반대로 말하며 내 약을 올리려 했다. 그러던 중에 그레이엄 후작의 시선이 제라드에게 닿았다. 그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입매를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하면 1황녀님. 황녀님의 말씀대로 오늘은 제가 다소 늦은 듯하니,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남긴 그레이엄 후작이 먼저 물러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싸늘히 웃는 얼굴로 응시했다. 그러다가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오늘따라 그레이엄 후작을 유독 오래 바라보고 있는 제라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왠지 다른 때와 달리 그런 제라드의 눈빛이 살짝 날카롭고 차가웠다.
“왜 그래?”
내가 묻고 나서야 제라드는 그레이엄 후작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뗐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제라드가 또 같은 대답을 하면 나도 더 말을 꺼내지 않으려 했는데, 그는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왠지 예전에…… 저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억이 떠올라서요.”
“예전에? 언제?”
“그 숲에 가기 전에.”
처음에는 제라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곧,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숲이 처음 우리가 만났던 4년 전의 그 블로비스 숲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그때 그레이엄 후작을 본 기억이 났다고? 지금까지는 전혀 그런 낌새를 보인 적이 없었는데…….
“확실한 기억은 아닙니다. 황녀님을 기다리는 자들이 많으니 그만 가시지요.”
하지만 내가 뭔가를 더 묻기 전에 제라드가 화제를 돌리며 대화를 단절시켰다.
‘얘 삐졌네.’
나는 내심 속으로 혀를 찼다.
얼굴이나 말투를 보아하니, 그레이엄 후작이 오기 전의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한 걸 이렇게 티 내는 게 분명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눈에는 평소와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겠지만, 내가 이 녀석하고 한두 해 같이 있었던가?
“그래, 그만 가자.”
하지만 그런 걸 눈치채지 못한 척 태연한 태도로 먼저 앞서 걸었다.
덩치도 산만 한 녀석을 은근히 귀엽다고 생각하는 내가 좀 낯설었다.
*
역시 대부분의 황녀, 황자들은 나보다 일찍 사냥터에 도착해 있었다. 이런 자리에 지각하는 건 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타의 모범이 되는 황녀님이었기에, 웬만한 경우 일부러 지각까지 한 적은 없었다. 오늘처럼 간당간당하게 시간을 딱 맞춰 도착한 적은 있었지만.
그리고 황족들을 위한 상석에 거의 도착한 내가 가장 먼저 목격한 장면은 바로, 5황녀 비비안이 유디트에게 발을 거는 모습이었다.
“앗!”
“어머, 미안해라. 거기 서 있는 줄 몰랐어.”
지정석에 앉으려고 걸어가던 유디트가 비비안의 발을 피하지 못하고 순간 휘청거렸다. 재빨리 테이블을 손으로 짚어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손가락에 걸린 찻잔이 쓰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찻잔이 깨지는 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더불어 유디트의 얼굴이 당황한 듯이 붉어졌다.
나는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면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가 알고 있는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기라 그런가? 유디트의 마력 각성에 자극받은 조무래기 악역 한 명이 벌써부터 제 역할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나들이용의 산뜻한 원피스를 입고 보닛 모자를 쓴 비비안은 오늘 꽤 귀여운 차림새였다. 하지만 그녀의 푸른 눈에는 오기와 분노로 점철된 불씨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잘 보니 비비안의 뒤에 선 시녀들도 유디트와 유디트의 시녀들에게 불순한 눈빛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게 앞을 잘 보고 걷지 그랬어? 갑자기 이상한 마력 각성인지 뭔지를 했어도 마력 감응 능력은 떨어지나 보지?”
더군다나 비비안은 유디트에게 누가 봐도 허울뿐인 사과를 대충 툭 내뱉은 뒤 이런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까지 늘어놓았다.
“바로 근처에 있는 사람의 마력 파장 정도는 눈치채고 알아서 피했어야 할 것 아니야!”
마력 감응 능력과 옆에 있는 사람의 발을 피하지 못하는 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 걸까? 분명 비비안도 지금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게 무슨 소리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품위 없이 찻잔까지 깨트리고, 이게 뭐니? 나한테 파편이라도 튀어서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입에서 어이구, 소리가 저절로 나오려고 했다.
그래도 평소에는 황자, 황녀들 중 가장 얌전한 편이었는데, 애가 한순간에 저렇게 되는구나. 황제 폐하의 명으로 유디트와 좌석이 바뀐 게 그렇게 큰 충격이었던 건가?
솔직히 내가 봤을 때는 말석이나 말석 옆자리나 거기서 거기였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엄청난 문제인 모양이니, 뭐.
“너희는 왜 가만히 서 있어? 당장 여기 치워. 그리고 너는 가서 새 찻잔 가져와. 아, 그리고 내 구두에도 찻물이 튀었네. 넌 이리 와서 내 구두 닦아.”
심지어 비비안은 유디트의 시녀들에게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다음부터는 조심 좀 해. 앞 좀 잘 보고 다니고. 나니까 이 정도로 넘어가 주는 거야.”
먼저 발을 걸어서 유디트를 넘어질 뻔하게 만든 건 비비안인데, 지금 상황은 꼭 비비안이 선심 써서 유디트를 용서해 주는 듯했다.
비비안의 만행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하, 더워. 시원한 음료 좀 마셔야겠어.”
마지막까지 헛소리의 연장선으로 별 시답잖은 경고를 남긴 비비안이 유디트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의 명이 있기 전까지 원래 그녀의 자리이던 말석 옆자리에 앉았다.
비비안의 얼굴을 보니 무심코 저지른 실수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얼렁뚱땅 말석을 유디트에게 넘기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유디트의 평소 성격이라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굳이 얼굴 붉히는 일을 만들지 않고 그냥 참으리란 생각에 더 뻔뻔하게 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바로 다가가지 않고 잠깐 멈춰 서서 상황을 지켜봤다. 그동안에는 내 보호가 있었기에 유디트와 다른 황족들 사이에 이런 직접적인 마찰이 일어난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집중된 시선 속에서 유디트가 옷자락을 꽉 쥐는 게 보였다.
그리고 유디트는 비비안의 기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거긴…… 제 자리예요. 비켜 주세요, 5황녀님.”
“뭐라고?”
“거긴 제 자리이니 비켜 달라고 말했어요.”
비비안의 반문에 재차 울린 목소리는 차분하고 조용했으나, 그 파급력은 작지 않았다.
당연히 비비안이 가장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유디트가 이렇게 대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요구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색이었다.
“야, 너 지금 어디서……!”
비비안의 동복 오빠인 2황자 로이드도 기가 막힌 듯이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곧 흠칫 몸을 떨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꼭 누가 주변에 없는지 먼저 확인하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나를 발견한 순간 로이드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다물린 것으로 보아, 평소에 유디트를 비호하던 내가 근처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얼굴을 빨갛게 붉힌 비비안이 유디트에게 따졌다.
“여기가 왜 네 자리야……?! 네 자리는 가장 끝이잖아. 원래 여긴 내가 앉던 자리였어!”
“그건 얼마 전까지의 일이잖아요.”
“너, 너 왜 이렇게 뻔뻔해졌어? 지금 그깟 마력 양 좀 늘었다고 잘난 척하는 거야?”
“왜 얘기가 그렇게 돼요? 폐하께서 지정해 주신 자리를 5황녀님이 혼동하신 듯해서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흥분한 비비안과 달리 유디트는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혼자서 분을 못 이겨 울먹이는 비비안이 더 철없어 보였다.
“웃기지 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잖아……!”
“그런 적 없어요. 좌석 배치가 불만이시면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세요.”
유디트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유순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은근히 해야 할 말은 다 했다. 하지만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유디트의 손은 긴장한 듯이 떨리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뭐 하는데? 야, 둘 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그냥 대충들 앉아.”
그때,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는 라미엘이 손에 느른히 턱을 괸 채 실소했다. 그 역시 나처럼 이 말석 싸움을 웃기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라미엘 오빠 말이 맞아. 그냥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 되는데 뭐가 문제야?”
클로에도 옆에서 짜증스러운 어투로 거들었다. 어쩐 일로 유디트의 편을 들어 주는 듯한 말이었다.
결국 눈총을 못 이긴 비비안이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사실은 유디트가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 폐하를 들먹였으니, 비비안으로서는 더 버틸 재간이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 대신, 비비안은 유디트의 시녀들에게 한결 더 사나운 시선을 보냈다.
“뭐 해? 당장 여기 치우라니까! 그리고 넌 이리 와서 내 구두 닦으라고 했지? 이제 보니까 옷에도 찻물이 묻었잖아! 이건 어떻게 할 거야?”
유디트를 어쩔 수 없으니 유디트의 시녀라도 잡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눈에서 엿보였다.
“죄송하지만…… 5황녀님이 시키신 일은 제 시녀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이번에도 유디트의 침착한 목소리가 비비안을 가로막았다.
“어지럽혀진 자리를 정리하는 건 이번 사냥제를 위해 발탁된 시종들이 할 일이고, 5황녀님의 구두를 닦는 건 황녀님의 시녀가 해야 할 일이지요. 그래도 저 때문에 구두가 더러워졌다고 하니…….”
잠깐 망설이는 듯하던 유디트가 손을 움직였다.
바로 그 순간, 유디트의 마력이 약동했다. 대기가 부드럽게 춤을 추듯이 움직이며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하늘하늘 흔들리게 만들었다.
잠시 후 허공에 떠오른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사이에 서 있는 유디트는 꼭 물의 정령이 현신한 것처럼 보였다.
이내 동그란 물방울이 눈부신 궤적을 그리며 비비안에게 날아가 찻물이 묻은 옷과 구두를 깨끗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반짝이는 물방울이 빛으로 터져 사라졌다.
“이 정도면 만족하시겠어요?”
황족석이 조용해졌다. 유디트가 직접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목격한 황자, 황녀들의 눈빛도 단숨에 변했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도 아까부터 연속된 의외의 광경에 놀란 듯이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비비안은 그게 또 창피한지 몸을 파르르 떨었지만, 애초에 소란을 피워 이목을 집중시킨 건 비비안 본인이었다.
“4황녀의 마력 운용 능력이 아주 뛰어나구나.”
황제 폐하께서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앗! 폐하.”
“아바마마!”
꼭 뒤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절묘한 개입이었다. 그의 뒤에는 황후 전하와 다른 황비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조금 전의 상황을 전부 목격한 것 같았다.
황녀와 황자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황실의 웃어른을 맞았다. 가까이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갓 마력을 움직이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으니 이 분야에 대해서는 아직 햇병아리와 마찬가지일 텐데, 벌써부터 이렇게 능숙하게 마법을 사용하다니.”
그러나 황제 폐하는 오직 유디트에게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는 방금 본 상황이 아주 기꺼운 듯이, 눈에 이채를 띤 채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게다가 옆에 있는 물을 움직여 이용한 것도 아니고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더냐? 마법을 정식으로 배운 지 이제 고작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구나. 이 정도면 1황녀만큼이나, 아니, 1황녀보다 마법 실력이 더 뛰어난 듯한데.”
“아바마마! 어떻게 이제 겨우 마력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유디트와 벨라 언니를 비교하세요?”
이어진 황제의 말에 클로에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가시 돋친 시선이 유디트에게 꽂혔다. 조금 전에 비비안과의 마찰에서 유디트를 살짝 편들 듯이 말해줬을 때와 달리, 그 눈빛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황제 폐하의 뒤에 서 있던 내 어머니, 황후 전하의 낯빛도 아주 싸늘해졌다. 오늘도 그녀와 동행해 사냥터까지 함께 온 밀리엄도 얼굴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등 뒤에서 느껴지는 공기도 한결 서늘해진 걸 보니, 내 수행원들도 주인이 다른 황녀와 비교당하는 상황에 기분이 언짢아진 듯했다.
정작 유디트부터도 황제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아르벨라 언니에 비견할 수 있겠어요. 말씀을 거두어 주세요, 폐하.”
“4황녀가 아주 겸손하기까지 하구나.”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오직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조금 전에 보여 준 유디트의 마법은 이제 막 마력 각성을 해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 사람치고 아주 훌륭했다. 그러니 황제 폐하가 그녀에게 이렇게 관심을 갖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런 태도는 확실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에 익은 이름이 들리던데, 제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 봅니다.”
“1황녀.”
나도 걸음을 떼 황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래도 내심 켕기는 구석이 있는지, 황제 폐하께서 나를 보고 눈매를 움찔거렸다.
“어서 와요, 1황녀. 마침 4황녀의 마법 실력이 1황녀보다 출중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폐하께서 하고 계셨답니다.”
2황비 카타리나가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상 밖의 마법 실력을 보인 데다 황제에게 보기 드문 극찬을 들은 유디트를 살짝 경계하는 눈으로 보더니, 그 일로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들 기회는 또 놓치지 않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 유디트가 카타리나의 말을 듣고 입술을 달싹이면서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황제도 이 상황이 조금 불편한 듯했다.
“크흠. 유디트가 방금 마법을 사용했는데, 역시 1황녀가 동생들을 잘 돌봐서 그런지 그 성취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 앞에서까지 대놓고 유디트와 나를 비교할 생각까지는 없었는지, 황제가 헛기침을 하면서 괜히 변명하듯이 말했다.
나는 이미 상황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저 담담하게 반응했다.
“그러셨군요. 동생들의 성취가 뛰어난 것은 기뻐할 일이지요.”
“그렇지. 그럼…… 다들 자리에 앉아라. 조금 전처럼 괜한 일로 소란 부리지 말고.”
상황이 더 길게 이어지는 건 피곤해서 피하고 싶었던 듯이, 황제가 바로 자리를 정리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확연히 5황녀 비비안을 향한 것이었다. 방금 유디트와의 자리싸움을 먼저 시작한 비비안에게 황제의 마뜩잖은 시선이 닿았다. 비비안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자리로 가서 착석했다. 다른 황녀와 황자들도 하나둘씩 나를 따랐다.
비비안도 울상을 지은 채 마지못한 듯이 그토록 앉기 싫어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확실히 날이 덥긴 하구나. 음료는 됐고, 시원한 물이나 한 잔 새로 가져와.”
내 명령을 받은 시종이 곧바로 움직였다.
조금 전부터 유디트가 계속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테이블 위의 음료를 전체적으로 교환하러 온 시종들의 몸에 가려져 유디트의 얼굴은 곧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 우리 아바마마지만 가끔은 진짜 어이없어. 방금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클로에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작게 들려왔다.
“아르벨라, 오늘은 좀 늦게 왔네. 방금 상황 되게 거지 같고 우스웠는데 말이야. 이런 꼴같잖은 상황도 피해 가고 역시 우리 누이는 타이밍이 좋다니까.”
라미엘도 얼굴에 찡그린 듯한 미소를 띤 채 가볍게 말했다. 나는 손에 든 부채로 팔을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희는 둘 다 오늘 어디 아프니? 안색이 왜 그래?”
“내 얼굴이 왜? 오늘도 눈 튀어나오게 아름답기만 한데.”
“아름다운 게 다 죽었어?”
“그건 벨라 언니 말이 맞아. 오빠가 그런 말 할 때마다 짜증 나니까 그냥 입 다물어.”
“야, 클로에. 너도 내 얼굴을 하고 하루만 살아 봐. 이런 말을 안 할 수가 없을 거라니까.”
“어우, 뭐래.”
얼마간 여느 때처럼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다. 조금 전의 일들 때문인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테이블의 공기가 살짝 이완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일부러 빈말을 한 건 아니었다. 나와 가장 가까이에 앉은 라미엘과 클로에 남매는 확실히 오늘따라 얼굴들이 안 좋아 보였다.
특히 라미엘의 얼굴은 어째 날이 갈수록 병약미가 더해져 가는 듯했다. 그는 오늘도 아주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얼굴의 창백함이 더 눈에 띄었다.
‘혼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니 오죽하련만.’
나는 차를 마시는 라미엘을 가늘게 좁힌 눈으로 조용히 응시하며 부채로 손을 툭툭 두드렸다. 라미엘이 무엇 때문에 몰래 바쁘게 움직이는지는, 곧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리리아나.”
“응?”
“비비안의 옷매무새를 다시 만질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네가 같이 가서 도와주지 않을래?”
내 말을 듣고 리리아나가 의아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정말 많이 속상한지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있는 비비안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금방 테이블을 떠났다. 그래도 잠깐 머리를 식히고 오면 진정이 되겠지.
하지만 이것 역시 유디트의 잘못은 아닌데, 그녀는 또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비비안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혼자 굳세게 제 권리를 지켜내더니, 이럴 때 보면 여전히 어릴 때처럼 맹탕인 부분이 느껴졌다.
“유디트.”
“아, 네……?!”
“너도 더워 보이는구나. 시원한 차를 좀 마시렴.”
내가 말을 걸어 줘서 비로소 안심했는지, 유디트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잠시 후 내 말처럼 차를 마시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은 조금 전에 비해 확연히 편안해 보였다.
매년 사냥제 때마다 그래왔듯이, 잠시 후 황제 폐하의 축사가 시작되었다. 그것이 끝나고 나도 곧바로 앞에 나가서 올해의 사냥제를 기념한 연설을 짧게 읊었다.
“1황녀님, 올해 사냥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뒤 단상 아래로 내려가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에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다가왔다.
“그렇게 되었어. 이번에는 다른 이들에게 우승의 기회를 양보하기로 했지.”
내 말을 들은 킬리안이 감복한 듯이 대꾸했다.
“황녀님께서 우승 후 최고의 사냥감을 자신에게 헌정하시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이번에는 보지 못한다니 아쉽군요.”
참고로 나도 이제는 사냥 대회에서 우승해 봤다. 지난 4년 동안 나라고 해서 늘 킬리안에게 지기만 한 건 아니라 이 말이었다.
그리고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대로, 나는 우승할 때마다 승자의 권리를 적용해 가장 훌륭한 사냥감을 고생한 나 자신에게 선사했다. 처음에는 내 진취적이고 파격적인 발상에 놀란 듯하던 사람들도 이내 모두 감탄한 눈치였다.
“대신 올해는 내 종속 기사가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으니까.”
“황녀님의 종속 기사가요?”
킬리안의 시선이 내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곳에는 지금 내가 말한 제라드가 서 있었다.
기분 탓인지, 킬리안의 눈빛은 무언가를 가늠하고 재 보듯이 살짝 차갑고 건조했다. 제라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킬리안은 금방 평소의 산뜻한 얼굴로 돌아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럼 1황녀님의 기사와는 오늘 처음 실력을 겨루게 되겠군요.”
“그래? 소공작도 대회에 참가할 건가 보군.”
“예, 황녀님과 함께 말을 타고 숲길을 거닐던 즐거움이 각별했는데 이번에는 역시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킬리안과 별생각 없이 대화하다가 멈칫했다.
‘얘는 꼭 한 번씩 이렇게 말을 이상하게 하더라. 그냥 말버릇인가? 아니면…….’
이쯤 되자 나도 슬슬 미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지만 그걸 아는 척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킬리안을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수고해. 올해 월계관의 영광은 누구에게 돌아갈지 기대되네.”
“감사합니다. 제가 우승하면 1황녀님께 사냥감을 바치고 싶은데 혹시 원하시는 게 있을지요?”
“글쎄, 금빛 갈라시아 정도일까?”
“기대를 충족시켜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킬리안이 뭇 여인들의 가슴을 떨리게 할 만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갔다.
그런 뒤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의 킬리안과 비슷한 눈을 한 채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제라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곧 숲에 들어가야겠네. 너도 가서 준비해.”
내가 입을 열자 제라드가 고개를 숙여 나를 응시했다.
머리 위로 높게 자라난 나무가 그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그 그림자를 품은 제라드의 얼굴에도 스민 것 같았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황녀님의 기사지요.”
곧 그의 입술이 열리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러니 숲에 들어가기 전에 승리를 기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뜸을 들인 것치고 제라드가 요구한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네게 월계관의 영광이 있기를 바랄게. 아쉽게도 기원을 담은 물건은 따로 준비하지 못해서 너한테 줄 만한 게 없네.”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꼭 그 대신이라는 듯이, 제라드가 내게 손을 뻗었다. 약간 서늘한 온기가 손을 감쌌다.
곧 내 앞에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남자의 위로 나무 그림자와 햇빛이 뒤섞여 흔들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손등을 간질이고, 그 다음으로 이마가 닿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깃털처럼 가볍게 입술이 스쳤다.
제라드가 내 손으로 그 많은 일을 할 동안 어째서인지 나는 굳은 듯이 선 채 그를 떨쳐내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원하시는 결과를 안고 돌아오겠습니다.”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던 일련의 행동 뒤에 내 손을 놓은 제라드가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후에도 얼마간 가만히 그곳에 서 있다가, 나를 부르는 사람이 온 후에야 나무 그림자 밑에서 걸음을 옮겼다.
*
숲으로 들어간 제라드는 사냥감의 기척이 왕성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했다.
사냥 대회의 참가자들은 대개 동쪽과 남쪽으로 향한 것 같았다. 첫날부터 무리해서 강한 마법 생물을 잡으려 하는 이는 드물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곧바로 말을 달려 위험한 사냥감이 주로 서식하고 있는 숲의 서쪽과 북쪽으로 들어갔다. 그의 목표는 아르벨라가 명령한 황금빛 갈라시아를 신속히 잡아 돌아가는 것이었다.
황금빛 갈라시아는 가장 포획하기 어려운 사냥감이니, 그것을 잡는다면 다른 사냥감을 잡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우승을 노려볼 만할 것이다. 아르벨라의 명령을 받고 나온 이상 제라드는 초라한 성과를 안고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냥 대회 내내 숲에 들어가 있느라 아르벨라의 곁을 비울 생각도 없었다.
‘물론 황녀가 정말 원하는 건 내 우승이 아닐 테지만.’
제라드는 자신을 포함한 1황녀궁의 다른 수행원들에게조차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아르벨라의 그런 강인하고 고고한 면모를 존경했다.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보다 보면, 이런 것이 황족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걱정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 하는 아르벨라에게는 조금 화가 났다.
물론 아르벨라에게 그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제라드를 종속 기사로 삼은 것도 정말 호위가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아르벨라는 카뮬리타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고, 감히 그녀에게 위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라드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만큼, 얼마 전 납치 사건에서 그 강한 황녀가 그렇게 엉망인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 제라드가 맞이한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그로서는 아르벨라가 어째서 그 사건의 잔당들을 살려 두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아르벨라에게 다른 생각이 있어 남겨 둔 것이겠지만, 제라드는 그들을 본 순간 아주 오랜만에 진심 어린 살의를 느꼈다.
스스로도 어째서 이만큼이나 강한 분노가 느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감히 아르벨라에게 손을 댄 자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싶은 욕망마저 솟구쳤다.
제라드는 아직 살인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만약 그때 아르벨라가 제라드에게 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망설임 없이 그것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마음 한구석에 생겨난 욕망이 한 가지 더 있는데…….
예전부터 들어 왔던 말처럼, 어쩌면 제라드는 정말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인간인 건지도 몰랐다. 감히 아르벨라가 아주 가끔이라도 믿고 등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품다니.
하지만 만약 아르벨라가 여전히 누구에게도 여린 부분을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제라드는 그런 그녀의 고귀한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 주고 싶기도 했다.
“크르르.”
바로 그때, 눈앞에 덩치 큰 마법 생물 하나가 나타났다. 불필요하게 시간을 쓰고 싶진 않았지만 길을 돌아가는 것이 더 큰 시간 낭비였다.
그러나 제라드가 그것을 처리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선수를 쳤다.
마력을 담은 검기가 제라드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베고 날아가 사냥감을 절명시켰다.
“미안하군. 먼저 온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
제라드는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쓰러진 사냥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숲에 단풍이 일찍 들어서인지 붉은 머리가 눈에 띄지 않더군.”
흰 말을 탄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제라드를 보며 말했다. 겉으로 봤을 때는 흠 잡을 곳 없는 사과였으나 제라드를 향한 그의 눈빛은 냉정하여, 방금의 일이 고의임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너도 금빛 갈라시아를 노리고 있나?”
킬리안의 물음에 제라드도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면?”
짤막한 대꾸에 킬리안의 눈썹이 작게 휘었다. 킬리안의 뒤를 따르고 있던 수행원도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숨을 들이켰다.
“아니, 뭐 저런 건방진……!”
킬리안이 손을 들어 수행원을 막았다.
“황녀님께서 네게 관대하긴 하신 것 같군. 아무리 유서 깊은 라스너의 혈통이라고는 하나 이제 더 이상 그 이름은 남지 않았으니 좀 더 스스로를 낮추는 법을 배우는 게 좋을 텐데.”
하지만 제라드는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킬리안을 보며 말했다.
“황녀님께서는 내게 다른 사람에게 굴종하는 법을 배우라 지시하지 않으셨다.”
킬리안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는 제라드에게 불쾌감과 흥미를 동시에 느꼈다. 아르벨라와 생각 이상으로 가까워 보이는 제라드를 볼 때마다 탐탁지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렇게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자는 확실히 드물었다.
하지만 여기서 제라드와 오래 대치할 생각은 없는 듯, 킬리안이 먼저 말고삐를 쥐고 방향을 돌렸다.
“그래. 너도, 나도, 1황녀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게 노력할 뿐이지. 물론 네게 어디까지 운이 따를지는 모르겠지만.”
휘익!
킬리안의 앞으로 첨예한 검기가 날아든 건 바로 그때였다. 공기가 베이며 머리 위의 나뭇잎이 우수수 흩어져 날렸다. 하얀 말이 놀라서 우는 것과 동시에, 제라드의 공격에 당한 사냥감이 쿠오오, 단말마의 소리를 내지르며 나무 밑으로 쿵 떨어졌다.
“실례. 하필 그쪽으로 움직일 줄 몰라서.”
제라드가 이곳에 처음 나타났을 때의 킬리안처럼 툭 내뱉듯이 말한 뒤 검은 말을 타고 먼저 숲 안쪽으로 달려갔다.
킬리안이 그 뒤에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
“2황녀님, 시간이 되었어요. 이제 다른 분들이 모인 곳으로 자리를 옮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알아. 지금 가면 되잖아.”
시녀의 독촉에 클로에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사냥 대회에 참석할 사람들은 이제 모두 숲에 들어갔다. 그러니 이제는 남은 사람들끼리 모여 사교의 장을 열 시간이었다.
아르벨라의 생각대로 오늘 클로에는 아침부터 기분이 나빴다. 지난밤에 꾼 꿈 때문이었다. 얼마 전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 다녀온 이후로 한동안 잠잠하던 악몽이 또다시 그녀를 찾아왔다.
“이런, 너희들. 허락도 없이 친구를 데려오면 어떻게 하니.”
어릴 때, 클로에는 오빠인 라미엘과 함께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여름을 보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날은,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 쥬논 그레이엄이 숨겨 둔 비밀 공간에 발을 들인 것이 문제였다.
“이곳에는 그레이엄이 아닌 자를 공격하는 주문이 새겨져 있단 말이다.”
조금 전에 발동한 마법진의 흔적으로 간간이 빛이 반짝이는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들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클로에와 라미엘은 외가인 그레이엄의 피를 이었기에 마법진이 발동할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클로에가 황궁 밖에서 사귄 첫 친구는 영원히 사라졌다.
“쯧, 그래도 아직 숨은 붙어 있군. 그럼 이걸 어떻게 할까? 그래도 우리 조카님의 친구이니 살려 줄까?”
“네, 네! 살려 주세요……!”
“하지만 이 친구는 비밀을 알아 버렸으니 멀리 보내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니?”
클로에는 울면서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쥬논 그레이엄은 클로에가 그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이기에 특별히 친구를 살려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너는,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이 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구나.”
짐짓 다정한 척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서 썩은 고목 나무의 수액 같은 악취 나는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래……. 마침 이 아이도 갈색 머리이니, 이 방에 있는 것들 중 하나에게 네 친구 이름을 붙여 줄까? 분명 이 아이 이름이…….”
그날 본 쥬논의 미소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브리엘이었지.”
오늘 아침에도 그 꿈을 꾼 뒤, 클로에는 진저리를 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어떨 때는 사브리엘이 피투성이가 되어 꿈에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클로에는 자신 때문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잘못을 빌면서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원래도 클로에가 이런 식으로 시끄러운 아침을 맞는 건 가끔 있었던 일이라 시녀들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태연한 시녀들의 얼굴이 또 괜히 신경에 거슬려서, 클로에는 시중을 들러 온 그들에게 성질을 부리며 베개를 던져 댔다.
“2황녀님, 괜찮으세요?”
그때, 잔디밭을 가로지르던 클로에의 옆에서 유리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에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리고 눈을 치켜떴다.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검은 머리카락과 금색 눈을 가진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유디트는 꽤 걱정스러운 눈으로 클로에를 보고 있었다.
“오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세요.”
“내 안색이 좋든 나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클로에는 정곡을 찔린 기분에 괜히 유디트에게 성질을 부렸다.
“이럴 시간에 벨라 언니한테나 가 보지 그래? 조금 전에 너랑 비교당한 일 때문에 언니가 마음 상했을지도 모르잖아? 물론 그게 네 탓은 아니지만!”
“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아르벨라 언니를 찾아가던 길이었어요. 그런데 2황녀님 얼굴이 안 좋아 보여서…….”
“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요즘 어쩌다 보니 너랑 내가 전보다 자주 얼굴 보고 있는 게 맞긴 한데, 그렇다고 우리가 막 엄청 친해졌다고 착각하지는 마!”
“네, 그런 생각은 안 해요.”
하지만 유디트가 너무 단칼에 클로에의 말을 부정하자 거기에는 또 마음이 상했다.
‘뭐야? 내가 예전과 달리 자기한테 얼마나 잘해 주고 있는데?’
“전 그냥 걱정돼서 그랬어요.”
그러다 클로에는 유디트가 더 가까이 다가와서 소리를 낮추어 속삭인 말에 얼굴을 굳혔다.
“혹시 또 악몽을 꾸셔서 몸 상태가 안 좋으신 건가 해서.”
“너…….”
클로에의 눈이 구겨졌다.
그녀는 지금도 가끔 그날의 유디트가 생각났다.
4년 전 유디트와 아르벨라가 처음으로 동석한 무도회 직후, 클로에는 유디트에게 경고를 하러 찾아갔었다. 하지만 그날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것은 클로에였다.
“그러니까, 2황녀님. 저는 사실 이 황궁에 있는 사람들의 비밀을 제일 많이 알아요.”
“뭐…… 뭐라고?”
“2황녀님이 가진 비밀도 저는 알고 있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등골이 서늘했는지.
꼭 유디트가 자신의 모든 치부를 다 아는 듯해서, 이후로도 그녀를 볼 때마다 살짝 소름이 돋았다.
“사실 저도 얼마 전부터 이상한 악몽을 꾸고 있거든요.”
그래서 혹시 이번에도 입 가벼운 시녀들에게 무슨 소리를 듣고 자신을 협박하려는 건가 싶었으나, 이어진 유디트의 말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요즘 잠을 잘 못 자고 있는데, 2황녀님도 그러신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어요.”
뾰족해졌던 클로에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너 같은 애도 악몽을 다 꾸는구나? 요즘은 너한테 좋은 일뿐일 텐데 왜 그래?”
“그러게 말이에요. 그것도 되게 끔찍하고 말도 안 되는 꿈이어서…….”
“왜, 아르벨라 언니가 꿈에 나와서 너 같은 애 싫다고 말하기라도 하던?”
클로에로서는 어디까지나 의미 없이 그냥 한번 던져 본 말이었다. 유디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아르벨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뜻밖에도 유디트는 멈칫하며 얼굴을 굳혔다.
“뭐야, 진짜야?”
“아니요, 아니거든요……!”
그런데 평소에 웬만한 일로는 화 한 번 낸 적이 없던 유디트가 클로에의 말에 울컥한 티를 냈다.
“됐어요. 좋은 꿈도 아니고, 말이 씨가 된다고 하니까 굳이 얘기 안 할래요.”
게다가 입술이 오리처럼 불룩 튀어나와 있는 걸 보니 삐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저 그만 갈게요. 2황녀님도 혹시 몸이 많이 안 좋으시면 무리하지 마시고 중간에 꼭 쉬러 가세요.”
유디트는 더 말을 이을 생각이 없는지 먼저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클로에에게 마지막까지 당부를 남기고 갔다.
클로에는 멀어지는 유디트의 뒷모습을 보면서 표정을 찡그렸다.
“뭐야……. 쟤 설마 지금 끝까지 내 걱정하고 간 거야?”
그러나 ‘허 참, 기가 막혀.’ 하고 덧붙이는 클로에의 얼굴은 어딘가 이상했다.
‘진짜 바보 아닌가? 내가 예전에 자기한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데…….’
예전에는 몰랐던 감정이었으나, 왠지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보통 그런 것을 죄책감, 혹은 미안함이라고 불렀지만 클로에는 아직 거기까지 제 감정을 인정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괜히 ‘기가 막혀, 어이없어.’ 하고 툴툴거리면서 다과 모임이 준비된 장소로 향했다.
‘응……? 그런데 저거 마리나 아니야?’
그리고 그러던 길에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
사냥 대회가 진행될 동안 열린 다과회에는 많은 황족과 귀족들이 자리했다. 천장에서부터 드리운 차광막이 꽃가지와 함께 하늘하늘 흔들리며 잔디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아르벨라가 앉은 곳은 황족석이었지만, 귀족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도 바로 옆에 가깝게 배치되어 있었다.
“1황녀님, 올해 사냥제 때는 월계관을 노리지 않으시나요?”
“네. 올해에는 황비님들과 즐겁고도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요.”
“어머, 저희는 언제든 대환영이에요.”
같은 테이블에 앉은 3황비 소피아가 아르벨라의 말을 듣고 웃었다.
“정말 1황녀와 이렇게 사냥제 첫날부터 차를 드는 건 오랜만이네요. 황후 전하께서도 반가우시겠어요.”
2황비 카타리나도 가늘게 미소 지은 얼굴로 샤렐 황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황족들 중에서는 2황자 로이드와 3황녀 리리아나, 그리고 5황녀 비비안이 숲에 들어갔다. 비비안은 원래 사냥 대회에 참가할 계획이 없었으나 아까의 일로 마음이 상해, 다과회에 참석하기보다 평소에 친하던 리리아나와 제 동복 오라비인 로이드를 따라간 것 같았다.
그 외에는 그리 특이할 게 없었지만, 다른 때라면 황후와 황비들이 앉는 테이블에 동석하는 것까지는 허락받지 못했을 유디트가 지금은 황족석에 자리해 있다는 것이 조금 달랐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귀족들도 그것을 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유디트가 이례적으로 후천적인 각성을 통해 대단한 마력을 깨우치게 된 일로 요즘 황제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황궁 밖으로도 알음알음 소문이 흘러나간 상태였다.
“혹시 4황녀 때문에 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남은 건가요, 1황녀? 1황녀가 유독 4황녀와 돈독하게 지냈던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요.”
아르벨라는 카타리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카타리나는 여전히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이번에 폐하의 명으로 4황녀의 마법 전반을 가르치게 된 스승도 1황녀와 일찍이 친분이 있던 백야의 전당 소속의 마법사라고 하던데. 젊은 나이에 여섯 개의 월계수 잎을 단 인재라지요?”
레반테온 얘기였다. 카타리나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4황녀가 폐하께 1황녀를 뛰어넘을 정도의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은 게 그 덕분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무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르벨라는 속으로 황제를 욕했다. 아까 그가 경솔하게 입을 놀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그녀의 속을 긁을 건수를 하나 내주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하지만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는 아르벨라의 얼굴에는 그저 여유로운 미소만 걸려 있었다.
“아바마마께서 백야의 전당에 앞서 권유하시지 않았다면 제가 먼저 말씀드렸을 거랍니다. 2황비님의 말씀처럼 저와 유디트의 사이가 각별한데 아무에게나 교육을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카타리나의 웃는 얼굴이 살짝 깨졌다.
“신기하게도 예전부터 아바마마와는 이렇게 굳이 논의하지 않아도 깜짝 놀랄 만큼 의견이 일치할 때가 많더군요. 제가 동생들보다 일찍 태어나 아바마마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 그런 걸까요?”
“아무렴 다른 황녀, 황자들보다 아르벨라 네가 폐하와 가깝지.”
2황비 카타리나의 말이 거슬렸던 건 아르벨라뿐만이 아니라, 샤렐 황후도 옆에서 딸을 거들어 주었다.
“폐하께서 황녀, 황자들 중에 이 정도로 본인과 비슷한 시각을 공유하고 있는 건 너밖에 없노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지 않았더냐.”
샤렐 황후의 말에 아르벨라는 짐짓 겸손한 척했다.
“참 기쁘고 감사한 말씀이지요. 앞으로도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답니다.”
“이미 충분한걸요! 황후 전하의 말씀대로 1황녀님은 폐하께도, 또 저희 카뮬리타의 온 제국민들에게도 남다르신 존재죠!”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던 샤렐 황후의 시녀들을 선두로, 다른 귀족들도 하나둘씩 말을 얹었다. 어느새 아르벨라가 원한대로 변한 분위기에, 카타리나가 부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저도……! 요즘 레반테온 선생님께 아르벨라 언니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많이 이야기 들었어요.”
그때, 아까부터 불편하게 입술을 달싹이고 있던 유디트가 용기를 낸 듯이 말했다.
“카뮬리타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들만 모인 백야의 전당에서도 연구할 때 아르벨라 언니한테 의견을 구하는 일이 많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제법 아르벨라의 체면을 살려 주는 소리였다. 유디트의 성격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리도 없었지만, 테이블 위의 분위기를 살피고 일부러 이런 말을 꺼낸 게 분명했다.
누가 키웠는지 잘 크기도 했지, 하고 아르벨라는 무심코 생각했다.
“역시 보기 좋네요. 4황녀가 1황녀를 보고 배워 이렇게 훌륭해진 모양이에요.”
황족 중에서는 평화주의자에 가까운 1황비 플로라가 2황비와 아르벨라 사이의 분위기를 완화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2황비 카타리나는 얼굴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도 이 이상 아르벨라를 더 건드리지는 않았다.
“시간이 되었군. 그걸 가져와라.”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황후가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잠시 후 그들이 가져온 건 연분홍색 액체가 든 작은 크리스탈 병이었다. 고급스러운 보라색 리본이 달린 그것은 꼭 공방에서 만든 향수병처럼 예뻤다.
“시음회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마마마.”
“아니다. 네 말처럼 좋은 것은 함께 즐겨야지.”
아르벨라가 인사하자 샤렐 황후가 한순간 멈칫한 뒤 시녀들에게 손짓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아르벨라에게 어마마마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 것 같았다.
“다들 시음해 보게나. 이번에 우리 황실 식구가 후원하는 상단에서 새로 발표할 마법약일세.”
찻잔 옆에 하나씩 놓이기 시작한 크리스탈 병에 모두 흥미를 보였다.
“1황녀님이 새로 개발하신 걸까요?”
“이전보다 화려해진 느낌이네요.”
“그러고 보니 2황비님께서도 작년부터 비슷한 마법약 사업을 시작하셨지요. 이건 2황비님의 스타일과 조금 더 가까워 보이는데.”
오늘 사냥제 때 시음회가 열릴 계획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황족들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오직 2황비 카타리나만이 예상했던 일을 맞이한 듯이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듯이 1황녀 아르벨라는 마법식 연구 외에, 마법약 실험에도 취미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재작년 체내의 마력을 활성화시켜 피로 회복, 활력 증강, 집중력 상승 등의 효과를 보이는 마법약을 만들어 출시했다.
이는 아르벨라가 즐겨 마시던 미성년자들의 술……. 즉, 마력 회로를 살짝 건드려 들뜬 기분을 들게 만드는 음료에 착안해 개발한 것이었다.
효과가 좋은 것은 둘째치고 차에 넣으면 찻잎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화학 반응을 일으켜 새로운 향과 맛을 즐길 수 있었기에, 사람들의 구미에 딱 맞아 현재에는 기호품으로 널리 상용화되어 있었다.
이후로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마법약을 따라 만들어 시작한 사업도 제법 많이 늘어났다. 그중 하나가 바로 2황비 카타리나와 그녀의 외가인 그레이엄 후작가였다.
그들은 아르벨라의 마법약보다 효과는 다소 떨어지나, 그 안에 식용 가능한 보석 가루와 꽃을 넣거나 값비싼 용기를 사용하는 등 외적인 부분을 좀 더 고급화시켜 나름의 차별성을 노렸다. 그리고 이 전략으로 귀족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병이 참 예쁘기도 해라. 신경을 많이 썼네요, 1황녀.”
어쩐 일로 카타리나가 상냥한 말씨로 아르벨라를 칭찬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중요한 내용물에 대한 칭찬은 다 빼놓고 병만 에쁘다고 하는 게 그녀다웠다.
“저야말로 2황비님이 후원한 그레이엄 후작가의 상단에서 곧 신제품 마법약을 출시한다는 소식을 앞서 듣고 어찌나 기대되던지. 그래서 오늘은 저도 특별히 신경 써 준비해 봤답니다. 2황비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아르벨라도 그녀에게 화답하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1황녀가 이렇게 세심하게 준비한 만큼 사람들의 반응도 좋기를 바라요.”
“아무렴요. 훌륭한 마법약이니 그럴 겁니다.”
카타리나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아르벨라를 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의미심장했다.
이어서 사람들이 병 안에 든 액체를 잔에 떨어뜨리자 그 안에 든 찻물이 화사한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어머나, 정말 색이 곱네요.”
“향도 좋고요.”
“정말 냄새만 맡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은데요.”
다들 찻잔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음?”
그때 옆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레이엄 후작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후작님?”
“아……. 아무것도 아닐세.”
다른 이가 그에게 의문을 표했으나, 그레이엄 후작은 말을 아꼈다.
이제 본격적인 시음회가 시작되어, 모두 찻잔을 들어 마법약이 섞인 차를 맛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응이 아주 좋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서너 모금 정도 차를 마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터졌다.
“그런데…… 저만 그런가요? 갑자기 속이 좀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
“저도, 우웁……!”
다과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구역질을 하며 이상한 부작용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이들의 피부에는 그새 눈에 띄는 발진이 돋아 있기까지 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당장 의원을 불러와라!”
놀란 사람들이 사냥터에 대기중인 의원들을 서둘러 찾았다.
“어머나, 도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지 모르겠네요.”
2황비 카타리나가 찌푸린 얼굴을 부채로 가렸다.
당황한 시선들이 갈피를 못 잡고 주변을 훑다가 이내 아르벨라의 얼굴에 꽂혔다. 아르벨라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치료 마법을……!”
“잠깐만요, 1황녀. 금방 의원이 올 거예요. 치명적인 독성분은 아닌 듯하고, 원인을 파악해야 하니 가만히 있어요.”
그러나 카타리나가 아르벨라를 말렸다. 그녀의 시녀들도 그에 호응했다.
“맞아요, 1황녀님. 의원님들이 금방 오셔서 해결해 주실 겁니다.”
“혹시 마력 회로에 문제가 생겨서 벌어진 현상이라면, 오히려 치료 마법이 더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 순간 아르벨라의 얼굴이 싸늘히 굳었다.
“지금 마법약에 문제가 있어 이런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말하는 건가?”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을 말했을 뿐이니 진정해요, 1황녀.”
그때, 지금까지 귀족들 사이에 조용히 있던 귀부인 중 한 명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숨을 천천히 쉬세요. 증상이 심한 사람은 먼저 복용한 마법약을 희석하기 위해 물을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뜻밖에도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이 의원이 오는 동안 이상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먼저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의외로 꽤 능숙했다.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께 의료 지식이 있었나요?”
“그러게요. 왠지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것 같은데…….”
의구심을 느끼는 게 아르벨라만은 아닌지, 귀족들이 그 모습을 보고 소곤거렸다.
“잠시만 비켜 주십시오! 증상이 가장 심한 환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곧 황궁의가 도착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인 레멘토 후작이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을 보자마자 멈칫했다.
“니베이아?”
“빨리 이쪽부터 확인을.”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인지, 레멘토 후작이 무심코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레멘토 후작은 금방 입을 닫고 서둘러 환자들에게 향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광경을 목격한 귀족들 사이에서 뒤늦게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한 작은 탄성이 내뱉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이 황궁에서 레멘토 후작님과 함께 의료관으로 일했던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나 좀 봐. 시간이 꽤 지난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정말요? 언제요?”
“글쎄, 거의 10년은 된 것 같은데……. 대략 8, 9년쯤 전일까요?”
그 순간 아르벨라도 기분 나쁜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어쩐지 지난번에 가까이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를 대하는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략 8, 9년 전까지 황실 의료관으로 일했다면, 공교롭게도 아르벨라가 마법사의 열병을 선고받은 시기와 겹쳤다.
니베이아 베른하르트를 향한 아르벨라의 벽안이 서늘히 가라앉았다.
그러는 사이, 의원들이 서둘러 귀족들을 살폈다. 다행히 황족들 중에는 이런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야?”
라미엘이 눈살을 구긴 채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을 모친인 카타리나 쪽으로 돌렸다.
클로에도 다과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목격한 장면을 떠올리고 얼굴을 굳혔다.
‘설마……?’
“몇몇 분들은 아무래도 자리를 옮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황궁의 레멘토 후작이 입을 열었다. 대부분은 경미한 증상이라 바로 치료 마법을 사용했으나, 그중 일부는 지금 당장 손을 대기 무리인 듯했다.
“레멘토 후작,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샤렐 황후가 레멘토 후작에게 묻자 그녀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이런 말씀은 황공하오나…… 마력 회로가 엉킨 것을 보았을 때, 마법약의 부작용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황실 사람이 직접 제작에 참여한 마법약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소란이 일어날 만했다.
“일단 레멘토 후작의 말대로 상태 이상자들부터 옮기지요.”
아르벨라가 일단 이상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런 뒤 그녀는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한 채로 말을 골랐다.
“황후 전하, 그리고 황비님들. 황실에서 주관한 마법약의 시음회에서 이런 사고가 벌어졌으니 오늘 일은 제가 책임지고 면밀히 조사하라 지시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마법약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중간에 예상치 못한 어떤 변수가 있었던 듯한데…….”
“그게 무슨 말인가요, 1황녀.”
그때 카타리나가 탄식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라니요. 꼭 가벼운 실수로 이런 문제가 발생한 듯이 말하네요. 마력 회로에 이상이 생겼으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큰일 날 뻔한 일인 건데요. 이런 중차대한 사안을 다른 사람도 아닌 1황녀가 그리 가볍게 말하다니…… 실망스러운걸요.”
그녀는 아르벨라가 자신의 잘못을 축약하려는 듯이 말하는 게 몹시 유감스럽다는 듯이 시름 깊은 한숨까지 내뱉었다.
아르벨라는 카타리나의 말에 멈칫한 뒤,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시음회를 준비하면서 마법약의 용기를 옮겨 담은 탓에, 보관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아니에요, 방금 보니 병에 새겨진 보존 마법진은 아주 훌륭했어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2황비님.”
카타리나의 말에 마법진을 자세히 볼 줄 아는 일부 귀족들이 수긍했다.
카타리나는 그것 보라는 듯이 아르벨라를 돌아보았다. 아르벨라도 그런 카타리나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병에 이상이 없다 해도, 발생 가능한 변수는 더 있지요. 혹시 중간에 누군가가 마법약을 건드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머, 누군가 고의로 시음회에 내보낼 마법약에 무슨 짓을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고의로 그랬을 것이라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2황비님.”
예기치 못한 상황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샤렐 황후가 두 사람의 말을 끊고 명령했다.
“1황녀의 말대로 확인은 필요할 것 같군. 지금 당장 시음회의 마법약을 보관하고 있던 천막의 감시용 영상 마력석을 가져오라. 또한 시음회를 준비한 시녀들을 모두 불러오도록.”
그러나 감시용 영상 마력석에 누군가 불미스러운 목적으로 마법약에 손을 대는 듯한 장면은 담겨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한 번씩 마법약의 상태를 살피러 들어온 시녀들의 몸에 가려져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마력석의 영상으로는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영상 마력석에 나온 시녀들에게 진실을 판별하는 마법을 사용했으나, 그래도 수상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시녀들 사이에 섞여 있는 마리나를 인상을 쓴 채 지켜보던 클로에가 ‘내가 잘못 봤나?’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조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카타리나는 그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짐짓 안타깝다는 듯한 어투로 덧붙였다.
“아무래도 1황녀의 말대로 중간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던 건 아닌 듯하네요. 이렇게 되면 아예 마법약의 마력 공정 과정에서 부작용을 낼 만한 중차대한 오류가 발생했다고밖에는…….”
카타리나가 말끝을 흐렸지만,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아들었다. 주변에 있던 모두가 한 차례 또 술렁였다.
아르벨라의 눈이 살며시 가늘어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부채로 손을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2황비님께서는 이것이 마법약 자체의 문제라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래요, 1황녀.”
마침내 카타리나의 입에서 직설적인 발언이 내뱉어졌다.
“진심이신가요, 2황비님?”
아르벨라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한번 반문했다.
“2황비, 지금 뭐 하는 건가?”
상황을 지켜보던 샤렐 황후도 눈을 날카롭게 뜨면서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카타리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냈다.
“저도 비슷한 사업에 손을 대 알고 있지만, 이렇게 마법약을 대량으로 생산해 유통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요. 필수적으로 다른 사람이 손을 보탤 수밖에 없고요. 아마 1황녀도 시중에 판매하는 모든 마법약을 직접 만드는 건 아닐 테죠.”
“그건 그렇죠.”
“이번 문제도 아마 그래서 발생한 거겠지요. 사실 저와 그레이엄 후작 가문은 이런 문제가 발생할까 싶어, 번거롭더라도 마법약을 제조하고 유통하는 모든 과정을 일일이 확인한답니다. 시중에 판매되어 누구나 쉽게 음용할 수 있는 것인데, 신뢰하기 어려운 마법약을 내놓았다가 오늘 같은 문제가 생긴다면 큰일 아니겠어요?”
카타리나는 그래도 아르벨라를 아주 약간 두둔해 주는 척했다. 그러면서 기회를 살려, 자신이 제작을 후원한 마법약을 올려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카타리나와 그레이엄 후작은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마법약 사업에 이름만 올리고 있을 뿐이라 제작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관계자만 아는 사실이었다.
조금 전 마법약의 부작용으로 몇몇 사람들이 구역질과 발진을 일으키던 광경을 봐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도 그건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1황녀에게는 그런 세심함이 부족했던 것 같네요. 그동안 무엇이든 혼자서도 잘해 영특한 줄로만 알았더니……. 설마 이런 심각한 부작용을 가진 마법약을 만들 줄이야.”
“뭐? 2황비, 지금…….”
“그나마 정식으로 발표해 판매를 시작하기 전에 알아차려서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황후 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샤렐 황후가 눈매를 찌푸리며 입을 열었으나 카타리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르벨라를 위로하는 척했지만, 사실상 그녀의 새로운 마법약이 시중에 판매될 수 없는 것임을 수많은 이들 앞에서 강조하는 말이었다.
“큼큼. 실례지만 오늘 시음회에 사용된 마법약에 대해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때, 분위기를 살피던 그레이엄 후작까지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그에게 집중되었다.
사실 그레이엄 후작은 오늘 일에 대해 카타리나에게 들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1황녀 아르벨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해서, 자신이 나서도 될 것 같았다.
그레이엄 후작은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이것 참 송구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이런 말씀은 황송하오나, 1황녀님……. 오늘 시음회 때 공개하신 이 마법약은 어제 저희 상단에서 등록한 상품과 지나치게 흡사한 것 같습니다.”
뜻밖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차에 넣으면 독특한 장밋빛을 띠며 달콤한 향기를 내는 마법약은 불과 어제 저희 쪽에서 상품 등록을 마친 것입니다. 게다가 제가 얼마 전에 언뜻 듣기로, 1황녀님께서는 새로운 마법약을 약 한 달 동안 개발하셨다고 한 것 같은데…… 저희는 거의 반년에 걸쳐 연구를 진행했고, 그 기록도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곤혹스러운 척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레이엄 후작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즉, 아르벨라가 새로 개발해 오늘 공개한 마법약이 자신의 상품을 따라한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레이엄 후작님, 그게 사실입니까?”
“허허, 이것 참. 나도 이런 말을 하기 난처하네만, 자세한 성분표가 이미 등록되어 있으니 확인해 보면 될 일 아닌가?”
쥬논 그레이엄의 태도는 정말 당당했다. 그는 정말 난감하다는 듯이 턱을 쓸었다.
“물론 고작 하루 전의 일이고, 또 제가 조용히 등록해서 이미 특허권 발동이 되었는지 1황녀님께서 모르셨을 테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저희 쪽에서도 출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1황녀님이 먼저 공개해 버리시면…….”
카타리나가 눈치껏 얼른 끼어들어 그레이엄 후작을 타박하는 척했다.
“그레이엄 후작, 아무리 그래도 이는 황실의 위신과도 연관된 일인데 이런 곳에서 그런 내용까지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군.”
“아, 이런. 죄송합니다. 시음회에 나온 마법약을 보고 저도 모르게 놀라서 그만.”
꼭 황실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려는 듯한 대화였고, 그것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였다.
마법약에 부작용이 있는 것도 심각한데, 더군다나 그 마법약이 다른 이를 따라한 것이라는 의혹까지 제시되는 것은 누가 봐도 추문이 될 법한 불미스러운 일이었다.
“아, 아르벨라 언니가 그런 짓을 하셨을 리가 없잖아요!”
어찌 보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때 묻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유디트가 가장 먼저 격렬하게 반응하며 소리쳤다.
“맞아! 벨라 누나가 그랬을 리 없어! 이건 누명이야! 다 거짓말이라고!”
뒤이어 샤렐 황후의 옆에 앉아 있던 밀리엄이 씩씩거리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유디트, 밀리엄. 그만두렴.”
아르벨라가 그런 두 사람을 말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오히려 아르벨라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노 어린 표정이 아니라 이 모든 상황이 우습다는 듯한 미소였다.
“살다 보니 제가 이런 재미있는 구경을 다 해 보는군요, 2황비님.”
명백히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임에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싸늘한 웃음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레이엄 후작. 먼저 지금 제시한 의문에 답하자면, 두 마법약이 흡사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 같군.”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쥬논 그레이엄과 카타리나의 닮은 얼굴이 똑같이 찌푸려졌다.
“오늘 우리가 시음한 마법약이 바로 그레이엄 후작이 어제 정식으로 상표를 등록한 그 마법약이니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죠, 1황녀?”
아르벨라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이 찡그린 얼굴로 되묻는 카타리나에게 싸늘히 답했다.
“제가 언제 오늘 준비한 마법약이 제 발표작이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요?”
“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런 말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아르벨라가 부채를 느릿하게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시음회를 시작할 때도 제가 2황비님께 분명 말씀드렸지 않았나요. 2황비님이 후원한 그레이엄 후작가의 상단에서 곧 신제품 마법약을 출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가 되었다고요.”
분명 그리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아르벨라는 기묘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늘 시음회는 그래서 준비한 겁니다. 2황비님이 공들이신 사업이란 것을 알고 있어, 마침 사냥제 때 다 함께 즐길 기회를 마련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요.”
바로 그 순간 카타리나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녀는 시음회가 시작되었을 때의 상황을 재빨리 돌이켜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저야말로 2황비님이 후원한 그레이엄 후작가의 상단에서 곧 신제품 마법약을 출시한다는 소식을 앞서 듣고 어찌나 기대되던지. 그래서 오늘은 저도 특별히 신경 써 준비해 봤답니다. 2황비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1황녀가 이렇게 세심하게 준비한 만큼 사람들의 반응도 좋기를 바라요.”
“아무렴요. 훌륭한 마법약이니 그럴 겁니다.”
부채를 쥔 카타리나의 손에 마디가 불거질 정도로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황후 또한 이 시음회에 내보낼 마법약이 제 딸의 것이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었다.
시음회를 시작하며 그녀가 뭐라고 말했었지? 그래, 분명히…….
“다들 시음해 보게나. 이번에 우리 황실 식구가 후원하는 상단에서 새로 발표할 마법약일세.”
‘뭐 이런 모호한……!’
돌이켜 떠올려 보니 황후나 아르벨라나, 하나같이 애매한 말들만 지껄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듣다 보니 2황비님의 말씀이 기이하군요. 저야말로 의아합니다. 전 당연히 이 마법약을 내오자마자 바로 알아보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르벨라가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에도, 마법약 제조의 전 과정을 일일이 확인한다고 그 입으로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런데 단지 병만 바꾸었을 뿐, 내용물은 완전히 동일한 마법약을 왜 바로 알아보지 못하셨는지. 아, 혹시 이것도 마법약의 공정 과정에서 생겨난 중차대한 오류 때문일까요?”
아르벨라는 명백히, 조금 전에 카타리나가 그녀를 겨냥하며 쏟아냈던 말을 비웃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그레이엄 후작에게도 똑같이 통용되는 말이었다. 분명 제 이름으로 된 마법약을 출시하고 있으면서, 오늘 시음회에 나온 마법약을 보고 그저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뿐 동일한 제품임을 알아보지 못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수많은 이들 앞에서 수치스러운 꼴을 보이게 된 그레이엄 후작 역시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렇다 해도 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당연히 이걸 제 새로운 발표작이라 생각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카타리나는 섬뜩할 정도로 차디찬 빛을 발하는 아르벨라의 연푸른 눈을 마주하며 등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가 2황비님께 오늘의 시음회가 저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라도 흘리던가요?”
‘이게, 혹시 전부 다 알면서 나를 가지고 논 건가?’
사실 오늘 아르벨라가 새로운 마법약을 발표하기 위한 시음회를 열 것이란 소식을 듣고 준비된 물건을 건드리도록 지시한 건 카타리나가 맞았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실행한 사람은 따로 있었고, 카타리나는 꼬리를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설마 아르벨라가 이런 식으로 농간을 부리다니!
게다가 이렇게 눈앞에서 버젓이 그레이엄 후작가의 마법약과 바꿔치기한 것을 보면, 그들이 겉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마법약의 개발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어쨌든, 그래도 정 의심되신다면 성분 검사를 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마침 어제 등록이 끝났다고 했으니 이 마법약을 가져가서 비교해 보면 되겠군요.”
아르벨라는 어디까지나 2황비를 생각해 미리 새로운 마법약을 귀족들에게 선보일 자리를 준비한 것뿐인데 이런 일이 생겨 매우 안타깝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녀는 친히 시음회에 나왔던 마법약의 일부를 2황비와 그레이엄 후작에게 잘 포장해서 가져다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2황비님. 아시겠지만, 저는 혹시 제가 시음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을까 봐 우려했는데……. 2황비님께서 이렇게 부득불 상품 자체의 문제라고 말씀해 주셨으니, 저도 마음을 편히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랬다. 카타리나가 가장 분개할 만한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오늘 시음회에 나온 마법약이 아르벨라의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오늘 일이 단순한 우연이나 다른 외부적인 요소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니라 마법약의 문제라고 몇 번이나 제 입으로 주장해 버린 것이다. 이제 와서 마법약 탓이 아니라고 해 봤자 카타리나와 그레이엄 후작의 꼴만 더 우스워지는 셈이었다.
“2황비님의 말씀대로 공정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라면 정말 큰일이지요. 시중에 판매되어 누구나 음용할 수 있는 것인데 오늘 같은 사고가 또 발생하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정식으로 발표해 판매를 시작하기 전에 알아차려서 참 다행이에요. 그렇지요?”
아르벨라는 카타리나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그녀를 조롱했다. 입술만 끌어올려 미소 지은 아르벨라의 얼굴이 카타리나와 쥬논 그레이엄의 속을 있는 대로 뒤집었다.
“2황비, 정말 기가 막히는군.”
샤렐 황후도 드물게 몹시 노한 눈빛을 보였다.
“어쩐지 조금 전에 2황비가 하는 말을 들을수록 뭔가 이상하다고 했는데, 그럼 이 마법약이 1황녀의 것인 줄 알고 그렇게 깎아내리려 했던 거란 말인가? 1황녀는 좋은 의도로 자네 가문의 마법약을 선보일 기회를 주고, 또 이후에도 자네의 체면을 살려 주는 방향으로 일을 수습하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오해십니다, 황후 전하! 이건, 그런 게 아니라……!”
2황비가 뭐라고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그것이 통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이야기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지요?”
“오늘 시음회에 나온 그 부작용 있는 마법약이 2황비님과 그레이엄 후작가의 상품이었다는 거죠?”
“맙소사, 그럼 결국 본인들이 판매할 마법약에 문제가 있다고 그렇게 열심히 주장했던 거네요?”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2황비와 그레이엄 후작이 야심차게 준비한 신상 마법약이 성대하게 망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결국은 자업자득이었기에, 아르벨라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아르벨라가 준비한 선물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삐삑! 삐삑!
눈에 익은 분홍색 새가 때맞춰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시간 잘 맞췄군.’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좌표는 a19, x873, k222!
위급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신호를 주는 새가 오늘도 꽥꽥거리며 사냥터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저, 정확한 위치는 그레이엄 후작가 바로 위쪽의 상공입니다!
“뭐?!”
갑작스러운 소식에 그레이엄 후작이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르벨라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새가 또다시 시끄럽게 연달아 외쳤다.
-앗, 그리고 두 번째 균열이 방금 또 발생했습니다! 위치는 그레이엄 후작가입니다!
-맙소사, 세 번째 균열도 연속으로 발생했습니다! 위치는…… 이번에도 그레이엄 후작가입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내 영지에만 균열이 세 개나……!”
쥬논 그레이엄이 희게 변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휘청거렸다.
연속으로 발생한 균열이 저 먼 숲 너머의 하늘에 점점 붉은 기운을 드리우는 게 사냥터에서까지 보였다. 숲에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돌아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르벨라는 분홍색 새를 움켜잡고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다.
“특수한 상황이니, 해당 구역의 사람들을 신속히 대피시키고 그레이엄 후작가와 그 반경 5케론까지 전부 봉쇄하라 명해라!”
그레이엄 후작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마음대로 자신의 땅에 봉쇄령을 내린 뒤 사냥터를 떠나는 아르벨라를 어리벙벙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제는 그동안 명분이 없어 시도하지 못했던 빈집털이를 할 시간이었다.
24. 우리 집에 왜 왔니?
그레이엄 후작가의 위에 생겨난 균열은 일대 파란을 만들어 냈다.
물론 얼마 전에도 균열 두 개가 제도의 시가지와 상점가가 모여 있는 4지구에 연달아 생겨난 적이 있긴 했다. 그러나 자그마치 세 개의 균열이 이 정도로 시간차 없이 한꺼번에 발생한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엄청난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사건이었기에 황실에서도 그레이엄 소유의 부지를 일시적으로 봉쇄하는 것을 바로 허가했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대규모의 마법 부대가 신속히 투입되어, 세 군데의 균열에서 나온 괴생물체들을 늦지 않게 처리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레이엄 저택에 있던 사람들도 일찌감치 대피해, 기적적으로 인명 피해 또한 없었다.
이는 1황녀 아르벨라가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놀라운 결단력으로 누구보다 신속한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고 알려져 있었다.
“특이한 경우이니만큼 면밀하게 조사해 봐야 합니다.”
나는 황제 폐하의 어전에서 강경하게 주장했다.
“상공에 두 개의 균열이 나타난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입니다. 한데 또 이런 문제가 발생했으니, 앞으로도 얼마든지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지금까지보다 균열이 발생하는 원인을 찾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황제 폐하는 ‘그 말이 맞긴 하다만.’ 하고 읊조리며 턱을 매만졌다.
‘답답하시긴. 일단 허락해 주면 내가 다 알아서 할걸.’
그는 아직도 그레이엄 후작의 저택을 폐쇄시킨 뒤 조사하는 것에 미온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후작저인 데다 2황비의 외가인데 쥬논 그레이엄의 승인 없이 움직이기는 그렇다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균열이 세 개나 터져도 이 모양이니, 만약 내가 다른 문제를 핑계 삼아 그레이엄 후작저의 조사를 주장했으면 더군다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앞에 놓인 탁자에서는 계속 상소문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레이엄 후작은 이제 거의 초 단위로 황제에게 상소문을 보내는 중이었다.
균열은 물론 중차대한 국가 문제이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자신의 저택을 포함한 부지 일부를 대뜸 봉쇄해 버리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었다.
그레이엄 후작의 반발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고, 황제 폐하께서는 오히려 그게 거슬리는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귀찮은 듯이 내게 손짓했다.
“1황녀의 뜻대로 하라.”
“감사합니다, 폐하.”
*
“황녀님.”
다시 그레이엄 후작가로 가기 전에 1황녀궁에 들렀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마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연히 오늘의 사냥 대회는 더 이어지지 못하고 일찍 끝났다. 마법약 시음회 사건에 이어 전례 없던 균열까지 연달아 발생한 탓에 자리를 비운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후작저 바로 위에 균열이 세 개나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쥬논 그레이엄의 얼굴은 정말 봐줄 만했었다. 시음회에 올라간 마법약이 누구 것인지도 모르고 제 꾀에 제가 넘어간 2황비 카타리나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리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황녀님, 왜 제 방 앞에 다른 사람을 세워 두셨나요? 제가 황녀님의 심기를 어지럽힐 만한 일이라도 했나요?”
그녀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내 시선을 받고 당혹감 어린 눈을 흔드는 모습이 정말 오늘 생긴 일과 조금도 상관없이 무고해 보였다.
“혹시… 오늘 사냥터에서 있었던 일의 범인으로 저를 의심하는 중이신가요?”
실제로도 마리나는 진실을 판별하는 마법에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오늘 시음회에 나갈 마법약에 부작용이 생기도록 중간에 손을 쓴 것이 마리나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오늘 사용될 마법약이 내가 새로 발표할 신제품이라 알고 있던 것도 시음회를 준비한 우리 궁의 시녀들뿐이었다.
더군다나 얼마 전 마리나가 2황비와 접촉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고, 또 우연한 것으로 보였지만 이후에 마리나가 수상한 행동을 보인 건 사실이다.
나는 마리나에게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이 닿자 마리나가 한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마력을 움직여 마리나에게 혹시 다른 마법적 흔적이 있는지 살폈지만 이번에도 걸리는 건 없었다. 예전이라면 마리나를 좀 더 추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에 이런 식으로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마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자신을 방에 가두고 감시하는 듯한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마리나의 모습은 거짓이 아닐 수도 있었다.
“마리나, 너는 나를 믿니?”
마리나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마리나 역시 내 눈을 조용히 마주했다.
잠시 후 마리나가 진심이 담겨 있다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이지요.”
“그래, 나도 네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도 마리나의 창백한 뺨을 쓸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마리나를 방에 두고 그 앞에 지키는 사람을 둔 건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 그녀도 모르는 새 위험한 짓을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카타리나는 마리나를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나를 믿으면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다녀와서 다시 얘기하자.”
*
그레이엄 후작가의 하늘에는 여전히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한꺼번 여러 개의 균열이 발생한 만큼 거기에서 동시에 쏟아진 괴물들을 처리하는 것도 제법 까다로웠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신속하게 움직여 인명 피해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레이엄 후작가를 방해 없이 탈탈 털어 볼 구실이 필요했던 건 사실이지만 다른 무고한 카뮬리타 제국민들을 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1황녀님,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황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이끌고 그레이엄 후작가에 도착하자마자 쥬논 그레이엄이 분노 어린 얼굴을 한 채 다가왔다.
“이건 제 소유의 저택입니다. 한데 주인인 제가 들어가지 못하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명한 대로 후작저를 둘러싼 반경 5케론까지 출입 금지 결계가 쳐져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엄 후작은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유감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스러운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는 후작을 위한 것이기도 해. 처음 균열이 생겨날 때도 후작가의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기억나지 않는가? 혹시 앞으로 더 많은 균열이 오늘처럼 동시다발적으로 후작가 주변에 발생하면 이번처럼 요행으로 막아내지 못할지도 모르지.”
그레이엄 후작을 위한 일인 듯 말하자 그가 이를 악물어 딱딱하게 굳어진 턱을 바르르 떨었다.
“폐하께서 후작을 위해 이렇게 직접 마도학자들을 불러 조사를 명하셨으니 후작은 마음 편하게 쉬고 있어.”
나는 그레이엄 후작을 지나쳐, 그는 들어가지 못하는 결계 안으로 몸을 들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결계가 나타났다.
“1황녀님, 꽤 견고하고 복잡한 결계라 그레이엄 후작님께 마법식 해제를 요청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 결계는 해제식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든 것이라 저도 손을 대기 어렵습니다.”
결계를 들여다본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그레이엄 후작이 뒤에서 조소 어린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에게서는 누가 뭐라고 해도 후작저를 둘러싼 결계를 절대 해제해 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후작저를 견고하게 지키고 있는 이 두꺼운 결계는 물론 저택의 주인인 쥬논 그레이엄의 작품이었다. 일전에도 몇 번 몰래 깔짝거려 봤지만, 이 나조차도 쉽게 건드리는 게 어려울 만큼 복잡한 마법식이었다.
‘하지만 그건 들키지 않게 결계를 해제하려고 할 때의 이야기이고, 오늘은 조심할 필요가 없지.’
“괜찮다. 고작 이런 일로 후작이 나설 필요 있나.”
카가가각! 콰앙!
나는 인정사정없이 마력을 움직여 그레이엄 후작가를 둘러싼 결계를 산산이 부숴 버렸다.
뒤에서 그레이엄 후작이 경악하며 ‘안 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대지에 고인 마력 상태를 상세히 점검해라. 나는 저쪽으로 가 보지.”
사실 내가 허가받은 건 후작가의 반경 5케론 이내의 마력장을 조사하는 것까지였고, 후작저 안에 직접 들어가는 건 협의된 내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후작저로 향했다. 어차피 이 근처는 봉쇄되어 있으니 나를 방해할 사람은 없었다. 또, 혹시 나중에 문제가 되면 후작저 안에서 수상한 마력의 흐름을 느껴 조사했다고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래, 마음대로 해.”
그래도 내가 데려온 사람들이 보면 귀찮아질 수 있어서, 그들이 다른 곳을 조사하는 동안 제라드만 동행해 후작저로 들어갔다.
*
“후작님, 여기에서 이러실 게 아니라 그늘 밑에서 시원한 차라도, 억……!”
“닥쳐!”
쥬논 그레이엄이 그에게 장소를 옮길 것을 권유하는 시종의 정강이를 지팡이로 후려쳤다. 시종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바닥을 굴렀지만, 그를 벌레 보듯이 내려다보는 연녹색 눈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굳게 다문 그레이엄 후작의 입에서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은 결계 너머로 사라진 1황녀 아르벨라의 잔상을 쫓고 있었다.
1황녀가 자신의 저택을 수색하는 모습을 이렇게 두 눈 뜨고 가만히 지켜봐야만 한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 뇌가 다 익어 버릴 것 같았다.
하필이면 그놈의 균열이 후작저 위로 세 개나 생겨날 게 뭐란 말인가! 다른 때 같으면 2황비 카타리나도 그레이엄 후작을 도와 황제를 설득했을 것이나, 바로 직전에 있었던 마법약 시음회 사건 때문에 강경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후작저의 봉쇄와 조사는 오늘 하루로 끝나는 게 아니라, 최소 며칠 동안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하면 저 꼴을 앞으로 몇 번은 더 봐야 한다는 의미인가?
인근의 마력장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세밀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라는데, 그레이엄 후작이 듣기에는 전부 다 개소리였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결계를 깨고 안으로 들어가 1황녀를 밖으로 끌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그레이엄 후작은 곧바로 반역자로 취급되어 더욱 수세에 몰릴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저 1황녀는 그레이엄 후작에게 켕기는 것이 있다는 걸 확신하고, 바닥에 떨어진 모래 한 알 놓치지 않을 작정으로 후작저를 더더욱 샅샅이 수색하고 말리라.
‘진정해라. 그래도 그건 발견하지 못할 거야. 그래, 그것만큼은…….’
하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에라도, 1황녀가 자신이 가장 철저히 감춰 둔 비밀을 찾아내기라도 한다면…….
결계 너머의 후작저를 응시하는 그레이엄 후작의 눈이 날카롭고 음습하게 가라앉았다.
그러고는 곧 시종을 불러 조용히 어딘가로 보냈다.
*
텅 빈 대저택은 아주 조용했다.
평소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며 생활했을 건물에는 지금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방에 내려앉은 고요한 공기가 음산하게까지 느껴졌다.
“못 본 새 더 사치스러워졌군. 누가 보면 황실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그동안 내가 그레이엄 후작가에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귀족들도 각자의 저택에서 연회나 파티 같은 것을 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최근의 2~3년 동안에는 쥬논 그레이엄과 2황비 카타리나의 모친이 타계한 것을 이유로 후작저에 손님을 불러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불청객을 안에 들이게 될 줄은 몰랐겠지.
지금쯤 결계 밖에서 이를 갈고 있을 그레이엄 후작을 떠올리자 작게 코웃음이 나왔다. 그때 복도를 걷던 제라드가 입을 열었다.
“황녀님, 발밑을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수상한 기운을 감지했던 참이다.
바깥의 결계로도 모자라, 혹시 저택에 몰래 숨어들어 올지도 모를 침입자를 대비해 장치를 여럿 준비해 둔 것 같은데.
하지만 이 정도면 그리 유난스러운 정도는 아니었었다. 다른 가문들에서도 불청객에 대비해 이 정도의 준비는 해 두는 편이었으니까.
그러니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한 마법식이 얽혀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내 오감을 건드리는 곳은 네 군데, 아니 다섯 군데 정도인가?
그레이엄 후작가뿐만이 아니라, 이런 저택에서 보안이 철저한 곳은 대개 정해져 있었다. 가주의 침실, 집무실, 서재, 귀중품 방을 비롯해 가문의 중차대한 정보와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나, 혹은 유사시에 몸을 지킬 대피 공간 등이었다.
그건 그레이엄 후작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딱 한 군데, 의미 불명의 장소에 여러 마법식이 얽혀 있는 게 느껴졌다. 3층 세면실 옆쪽의 벽이었다. 구조상 이 뒤에 따로 나올 만한 공간도 없어 더욱 의아했다.
‘일단 조사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외부인인 내가 손을 대자 고슴도치가 가시를 부풀리듯이 마법식이 사납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주 복잡하고 공격적인 수식이었다.
‘좀 흥미로운 방식인데?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지만 지금은 하는 수 없었다. 내 학구적인 호기심이나 해소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었으니까.
“제라드, 여기에 검 찔러 넣어.”
제라드는 곧바로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살기를 띤 마력들이 마법진 한복판에 꽂힌 제라드의 검을 휘감고 날카로운 이를 벌렸다. ‘파지직!’ 하고 살벌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보통의 검이라면 당장 부서졌을 것이나, 지금 그가 사용하고 있는 건 건국제의 검술 대회 때 황실에서 하사받은 마도구였다. 그래서 꽤 강력한 마법 공격에도 망가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마법진이 내가 준 미끼가 가짜인 걸 알아채고 더 흉포해지기 전에 마력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개의 복잡한 수식 사이에서 이동 마법진이 내 마력에 얽혀들었다.
파앗!
공간이 이동되었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짙은 약품 냄새가 코끝으로 훅 밀려들었다. 동시에 지금 이 공간에 새겨져 있던 수많은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황녀님!”
제라드의 외침과 함께 눈앞에 요란한 빛이 반짝였다.
이곳에 침입하는 사람은 그게 누구더라도 전부 갈가리 찢어발겨 죽여 버리겠다는 굳은 의지마저 느껴지는 공격이 동시다발적으로 제라드와 나를 덮쳤다.
귓가에 듣기 싫은 날카로운 소음이 연거푸 울렸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마지막으로 날아드는 마법 공격을 쳐낸 제라드의 검이 우우웅 진동했다. 제라드가 공격을 막는 동안 나는 방 안에 있는 마법진을 해제하는 데 집중했다. 이곳에 있는 마법진 또한 여러 개의 수식이 연쇄적으로 얽혀 있어서, 마지막 수식까지 해제하기 전에는 공격이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완전히 부서진 마법진이 허공에 빛을 터트리며 사라졌다.
한순간 방 안이 밝아졌을 때 주변을 확인한 제라드가 눈매를 좁혔다.
“이 방은…….”
나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전부 박제품인가?”
마법으로 빛을 만들어 방 안을 밝혔다. 그러자 곳곳에 놓인 짐승 모형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레이엄 후작에게 사냥감을 박제로 만들어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는 것만큼은 진짜인가 싶었다.
나는 방 안쪽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막 지나치려던 좌측 벽의 한가운데에 호랑이 정도 크기의 검은색 짐승 가죽이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이건… 마다라크 같은데?’
그런데 이것만큼은 수집용으로 가져다 놓은 게 아닌지, 가죽에는 칼로 난도질하기라도 한 듯이 크고 작은 흠집이 곳곳에 나 있어 언뜻 보면 꼭 걸레짝 같았다. 나는 힐끗 제라드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그레이엄 후작을 보러 사냥터에 갔을 때 갑자기 튀어나와 제라드와 나를 공격하려 했던 것도 이 정도 크기의 검은 마다라크였지.’
제라드가 급소를 후려쳐 제압한 것을 후작이 가져가서 처분한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레이엄 후작이 속 좁고 쪼잔해도 설마 이게 진짜 그때 그 마다라크의 가죽일까 싶었다. 그래서 일단은 의혹을 떨쳐 버린 뒤 박제품이 가득한 방의 더 깊은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한쪽 벽에 또 작은 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뒤 나도 모르게 눈가를 움찔 떨었다.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다가온 제라드도 나와 같은 것을 보고 말없이 걸음을 멈췄다.
수십 쌍의 눈들이 침입자인 우리를 쳐다봤다. 그곳에 있는 건 수많은 인형이었다.
‘왠지 좀 소름 돋는 방인데.’
단순히 중년의 인형 수집 취미에 놀라서 이렇게 뒷덜미가 싸늘한 느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이 방에 있는 인형들은 전부 긴 갈색 머리와 짙푸른 남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서 본 인형과도 닮은 외양이었는데, 그 일관성에서 어떤 강박증마저 느껴졌다.
그때 제라드가 나를 지나쳐 방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굳어 있었다.
“……이건.”
제라드의 반응이 좀 의외라 그에게 물었다.
“왜,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어?”
그러자 제라드가 잠깐 침묵하다가 답했다.
“이 인형들이 왠지 제가 아는 사람과 닮은 것 같아서요.”
“그래? 누구?”
그때 내가 떠올린 건 클로에가 캐논 백작가에서 사색이 된 채 외쳤던 이름이었다. 혹시 제라드도 그 사브리엘이라는 클로에의 친구를 아는 걸까 싶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제라드의 입에서 나온 건 뜻밖의 사람이었다.
“돌아가신 제 어머니입니다.”
무심코 몸을 움찔했다.
제라드의 말을 듣고 나도 방 안을 다시 둘러봤다.
당연히 나는 제라드의 모친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인형들을 살핀다 해서 뭔가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라드의 부친에게 꽤 집요한 열등감과 시기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던 그레이엄 후작이 이렇게 그의 아내와 닮은 인형들까지 수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한결 더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문득, 나는 이 인형들에서 어떤 위화감을 눈치챘다.
‘대부분 진짜 사람 크기잖아.’
원래 이런 인형은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서 본 것처럼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인 게 보통이었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놀 수 있거나, 장식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런데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발견한 이 갈색 머리 인형들은 거의 다 실제 사람과 비슷한 크기였다.
그걸 깨닫고 나자 왠지 나를 노려보는 듯한 인형들의 눈빛이 한결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레이엄 후작이 인형 수집가 중에서도 취향이 특이해서 그냥 이런 인형을 공방에 주문해 만들었다고 해도 말이 안 될 건 없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고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려 내가 방금 들어온 문밖을 내다봤다.
그곳에는 동물 박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의 생각이 하나로 모아졌다.
아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진짜 그런 미친 짓을 할까 싶긴 한데…….
이미 한번 찜찜한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그때, 한 인형 앞에 서 있던 제라드가 손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숨소리를 작게 줄였다. 이내 제라드의 손가락이 인형의 얼굴에 소리 없이 닿았다.
“어때?”
소리 낮춘 음성으로 묻자 제라드가 나를 돌아봤다.
“차갑습니다.”
“그것 말고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손이 밑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낮은 음성도 함께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왠지 기분이 나쁘네요.”
나도 제라드의 말에 동의했다. 이 장소나, 이곳에 있는 인형들이나 똑같이 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궁금하시면 직접 만져 보셔도 될걸.”
“그건 별로 내키지 않아서 말이지. 일단 뭐로 만들었는지 조사는 해 보는 게 좋겠네.”
방 안에서 다른 마법적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이만 철수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후작저를 나서는 길에 제라드에게 물었다.
“네 어머니도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이었어?”
제라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것이 긍정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후작이 숨기려고 한 게 이 방이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느낌이 이상했다. 왠지 후작저에 숨겨져 있는 건 이게 다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날은 결국 다른 수상한 점을 찾지 못하고 후작저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오십니까. 소신의 저택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때까지도 시위하듯이 결계 밖에 꼿꼿이 서 있던 그레이엄 후작은 그것 보라는 듯이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거기에 약이 오르거나, 분노가 치밀지는 않았다.
원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니 후작저를 조사한 첫날부터 단번에 쥬논 그레이엄의 덜미를 잡을 만한 중대한 약점을 발견하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방을 숨기고 있더군, 후작.”
나는 떠보듯이 그레이엄 후작에게 박제품과 인형들이 가득 차 있던 방을 언급했다. 그러자 그레이엄 후작의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평범한 수집품들입니다. 이제는 제 취미까지 관여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멋진 물건들이던데 왜 그동안 자랑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서 그러지.”
“저는 수집품을 모아 혼자 감상하는 것이 취미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웃었다. 그러고는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찾은 사람 형상의 인형은 특별히 따로 조사할 것을 명했다.
그런 뒤 완전히 해가 지기 전에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미레이유 양은 어디에 있지?”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내 마력 사슬에 묶여 있었다. 오늘은 제라드와 동행하지 않고 나 혼자 그들을 보러 왔다.
“무리한 탓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아직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저런, 균열을 여는 게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다 알면서도 시킨 거면서…….”
미레이유 대신 나를 맞이한 마법사가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솔렘 왕국의 마법사 중에 나와 비슷한 또래로 가장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가진 진녹빛 머리칼의 소년 마법사였다.
혼잣말을 작게 속닥거린다고 한 것 같지만 그의 말은 내 귀에도 무리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꼬투리를 잡아 어린 마법사를 가지고 놀지는 않았다.
“몇 년 동안 줄기차게 균열을 열어대 카뮬리타 제국을 혼란에 빠트린 자들이 고작 이런 걸로 엄살을 부리면 쓰나.”
“오해십니다. 그 모든 균열들을 저희가 만든 건 아닙니다.”
“그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내 시선을 받은 사람이 불편한 듯이 몸을 옴짝거렸다.
나는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와 봐라.”
“……저요?”
“그래, 너.”
내 부름을 받은 진녹빛 머리칼의 마법사가 긴장한 듯이 굳어졌다. 그는 곧 도움을 청하듯이 주위를 둘러봤으나, 다른 마법사들은 그 시선을 피했다.
간절한 눈빛을 외면당한 마법사가 결국 체념한 듯이 고개를 밑으로 떨군 채 내게 다가왔다. 그 모습이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제법 불쌍해 보였다.
물론 나는 그가 나를 무서워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내 앞으로 오자마자 목적을 위해 손을 붙잡았다.
“헉!”
그 순간 마법사가 소스라치며 크게 몸을 떨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마법사의 몸에 내 마력을 밀어 넣었다.
“으흐, 앗! 잠깐……! 도대체 뭘 하는……!”
왠지 예전의 제라드가 생각나는 반응이었다. 진녹빛 머리칼을 가진 마법사는 어떻게든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런 일은 나도 익숙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법으로 마법사를 한 손에 제압한 뒤, 그가 보유한 마력을 샅샅이 훑었다.
잠시 후 내가 손을 놨을 때, 마법사는 튕기듯이 자리를 박차 단숨에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는 경계심이 가득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지, 지금, 지금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이번에도 예전의 제라드를 떠올리게 하는 반응이었다.
“어, 어떻게, 일국의 황녀라는 자가 이런 무도하고 방탕한 짓을……!”
그런데 내가 뭘 했다고 무도하고 방탕하대? 제라드도 나한테 한 번도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이놈은 더 시건방졌다. 심지어 나와 마력 파장이 썩 잘 맞는 느낌도 아니라 도중에 불쾌해져서 금방 손을 뗐는데도 그랬다.
“이상하구나, 너희가 마법을 사용할 때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의 마력이 완전히 다른 느낌인데.”
나는 곰곰이 조금 전의 느낌을 떠올리면서 다시 앞에 있는 마법사에게 까딱까딱 손가락질했다.
“너, 다시 이리 와서 아무 마법이나 한번 사용해 봐.”
이전에 이들이 마법을 사용했을 때, 내 마법사의 열병이 완화되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머리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내게는 마법사의 열병을 낫게 할 방법을 찾는 게 인생 과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때의 느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나한테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나타난 게 아니라 별다른 효과가 없을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 말이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솔렘 왕국 마법사들이 입술을 깨물며 나를 사납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특히 조금 전에 나한테 방탕하다고 했던 진녹빛 머리칼의 마법사는 방금과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힌 채 이를 빠드득 세게 갈기까지 했다.
“우리 솔렘 왕국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바로 눈앞에서 어떤 마법을 써도 쉽게 제압할 자신이 있다는 거냐?”
딱히 부정하지는 않고 팔짱을 꼈다. 솔직히 저런 마음으로 내 앞에서 마법을 사용해 보라고 시킨 게 사실이었으니까.
“우리는 절대 카뮬리타 황실에 굴복하지 않아! 아무리 4황녀님을 볼모처럼 손아귀에 잡고 있다 해도……!”
아무래도 얘네들은 유디트를 마왕의 손아귀에 잡힌 가련한 왕녀님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 카뮬리타 황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중에서도 이들을 핍박하고 있는 내가 마왕 역할인가 본데.
물론 이 솔렘 왕국 마법사들이 내 말을 잘 듣게 하려고 유디트의 이름을 앞에서 거론한 적이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그게 협박에 가까웠던 것도 맞았고.
대충 ‘너희가 내 말을 잘 안 들으면 유디트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으니, 알아서 처신 잘해라.’ 같은 소리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설령 이들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해서, 진짜 유디트한테 못된 짓을 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기껏 그것을 동력 삼아 순순히 내 말을 잘 따르고 있는 놈들에게 굳이 진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난 공격 마법을 사용하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그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나 보지? 단번에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까 말이야.”
내가 느릿하게 꺼낸 말을 듣고 진녹빛 머리칼의 마법사가 움찔했다. 이놈은 역시 솔렘 왕국 마법사들 중에 가장 어려서 그런지, 자기 감정을 제일 잘 숨기지 못했다.
“또 그런 말장난…….”
“그만해, 카챠.”
그가 또 울컥한 듯이 입을 열었을 때, 미레이유가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아주 초췌한 얼굴이었다. 지난번에 봤을 때까지만 해도 미레이유는 솔렘 왕국 사람 중에서는 지금의 상황에 가장 빠르게 적응해 비교적 마음의 평안을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새 병마라도 걸린 것처럼 핼쑥해져 있었다.
조금 전에 다른 마법사들에게 들은 말처럼 정말 균열을 여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긴 했나 보다.
“너, 이제 괜찮은 거야?”
“좀 더 누워 있지.”
“괜찮아. 아무렇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솔렘 왕국 마법사들이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모여 세상 애틋하게 속닥거리는 모습을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막 방에서 나온 미레이유를 둘러싸고 안부를 확인하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원망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보면 도대체 누가 악당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을 듯했다.
나는 고개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며 마법사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지금도 내가 얼마나 많이 봐주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저렇게 설치네.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을 두고 속으로 혼자 무언가를 재 보며 의자의 팔걸이를 느리게 툭툭 두드렸다.
“1황녀님이 오신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날 걸 그랬네요.”
그나마 미레이유가 개중에서는 제일 나았다. 그녀가 나를 보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