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03)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 봐라. 카뮬리타의 기둥인 네가 최대한 오랫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켜야지.”

그리고 한순간 떠오른 목소리에 아르벨라의 손이 닿아 있던 책장 끝이 우그러졌다.

“…….”

반듯하던 미간에 깊게 파인 자국이 생겼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이렇게 한때 마음을 줬던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왜 하필 네가 나한테 필요한 제물일까?’

차라리 다른 사람을 금단술의 제물로 바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차라리 너 말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도 되는 거라면…….’

그러나 결국은 이 또한 의미 없는 가정이었기에, 아르벨라는 구겨진 종이를 손가락으로 펴고 냉정하게 책장을 넘겼다.

오늘도 늦게까지 잠들지 못할 밤이었다.

*

요즘 침실에 둔 괴물과 몇 마디 말을 해 보면서 느낀 건데, 이 녀석은 생각 이상으로 머리가 나빴다.

“네가 살다 온 균열은 어떤 곳이야?”

가령 내가 이런 질문을 하면…….

-빨갛고 파랗고 넓은 곳!

이딴 추상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빨갛고 파랗고 넓다니,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 균열이 생길 때 여기서 들여다보면 눈에 띄는 것처럼 그냥 색깔이 있는 빈공간이라는 거야?”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다시 질문해 보면…….

-으음, 빨간색이랑 파란색 빛이 있고, 한 번 뛰면 끝없이 갈 수 있을 만큼 넓어!

어김없이 또 이런 멍청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 그럼 그렇게 넓다면서 왜 자꾸 여기로 넘어오는 거야?”

-구멍이 생기니까 그렇지?

“원하지 않는데 그냥 틈이 생기니까 이쪽으로 떨어질 뿐이라고?”

-원해서 가는 애도 있고, 싫은데 가는 애도 있어.

이렇게 내 속만 답답해지는 경우가 전부였다.

“아, 그래. 그건 됐고. 도대체 너희는 정체가 뭔데? 거기는 다 너 같이 생긴 것만 살아?”

-다 동족들만 살지.

“그러니까 너 같이 생긴 애들만 있다고?”

-우리는 다 다르게 생겼다.

이게 날 놀리나?

자꾸 속 시원한 답변은 안 하고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게 거슬렸다. 그래서 인상을 쓴 채 연보라색 생물체를 노려보다가, 마지 못해 나도 좀 더 직설적으로 녀석에게 다시 물었다.

“넌 나한테 동족이라고 했잖아. 그럼 사람도 거기 있다는 얘기야?”

-사람……? 나 그런 거 몰라. 우리는 우리. 너도 우리. 거기는 동족만 살아.

“하, 씨. 너 진짜 나 가지고 놀아?”

-으어아! 왜 화내!

결국 짜증을 참지 못해 괴물의 연보라색 몸체를 손으로 마구 주물렀다. 괴물이 내 손길을 피하려고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말랑말랑 쫀득쫀득한 몸은 내 손바닥에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 그런데 이거 의외로 중독성 있네. 왠지 스트레스가 좀 풀리는 기분인데…….

“황녀님, 시간이 되었어요.”

“그래, 지금 나갈게.”

하지만 그때 마리나가 날 불러서 손안의 촉감을 오래 즐길 수는 없었다.

“난 잠깐 밖에 나갔다 올 거니까 얌전히 있어. 돌아오면 먹이 줄 테니까.”

-맛있는 거! 나 잘 기다려! 빨리 와야 된다, 너!

나는 통통거리는 괴물을 아쉽게 놓아준 뒤 방을 나섰다.

*

컹컹!

컹컹컹!

아유, 깜짝이야.

캐논 백작가에 들어가자마자 정원에 나와 있던 개들이 갑자기 나를 보며 맹렬히 짖어서 흠칫했다.

‘윤기 흐르는 털을 곱게 기르고 보석 장식에 레이스 리본까지 하고 있는 걸 보니 사냥개로 키우는 개들은 아닌데.’

그런데 왜 저렇게 사납게 짖는 거야?

“이, 이 아이들이 왜 이럴까?”

나를 마중하러 나온 캐논 백작 부인도 당황한 눈치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1황녀님. 원래 온순한 아이들인데 뭐에 놀랐는지…….”

별로 온순해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주인들은 다 자기 애들이 얌전하고 귀엽고 착하다고 그러더라.’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객관성을 잃은 게 틀림없었다.

“오늘 손님이 많이 와서 개들이 예민해졌나 보군.”

“예, 그런가 봐요. 다시 후원으로 옮겨 놔야겠어요.”

하지만 사람도 갑자기 돌변해 난폭해질 때가 있는데 개라고 그런 일이 없을까 싶어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늘은 손님이 오는 날이라 그런지 정원에 개들을 그냥 풀어놓은 게 아니라 목줄을 매서 안전하게 잘 묶어 놓기도 했고.

물론 사람이 나한테 난폭하게 짖었다면 가만히 놔두지 않았겠지만, 동물에게는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뭐야, 감히 언니를 보면서 짖다니 건방지게. 캐논 백작가에서는 개 훈련을 대충시키나 보지?”

오늘 나와 동행한 클로에가 고용인들에게 안겨 멀어지기 시작한 개들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원래는 안 그런다잖아.”

“다른 사람한테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야! 언니한테 이를 드러낸 게 문제지!”

클로에는 방금 본 개들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그녀는 가뜩이나 사나운 눈매를 더 무섭게 추어올린 채 개들을 째려봤다. 그래 봤자 이미 그들은 고용인들의 품에서 안정을 되찾았는지, 캐논 백작 부인의 말처럼 순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클로에의 불만 어린 눈초리가 우리를 안내 중인 캐논 백작 부인에게 향했다.

“됐어. 들어가기나 하자.”

원래 오늘은 클로에와 함께 올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심심하다면서 나를 찾아와서 동행하게 됐다. 보아하니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서 열린 교류회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한 것 같았다.

오늘 마련한 자리의 주된 목적은 캐논 백작이 발굴한 연주자들을 불러 음악 감상회를 열고 겸사겸사 캐논 영지의 특산물인 ‘루비 포도’로 만든 와인을 시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 말고도 한 가지 더 선보일 게 있다고 하던데…… 그건 이따 보면 알겠지.’

나는 클로에와 함께 활짝 열린 정문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잠시 후.

“1황녀님, 이 과일도 같이 드셔 보세요. 저희 포도주와 아주 잘 어울린답니다.”

“그래. 캐논 영지의 루비 포도주는 역시 향이 남다르네.”

“1황녀님도 바르다스의 클래식을 좋아하시죠? 오늘 연주자들이 준비한 14번 교향곡이 특히 아주 좋았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바르다스의 곡은 서정적이지만 강렬하지.”

“그러고 보니 황녀님들 두 분 다 짧은 머리가 정말 잘 어울리세요. 지난번 건국 기념 검술 대회 때 머리 장식을 맞춰서 하고 오셨었죠?”

“어머, 얘 보는 눈이 있네? 벨라 언니랑 보석 색만 다르게 해서 맞춰 봤어!”

하하 호호, 까르르…….

여유롭게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캐논 백작가의 명물인 루비 포도 와인을 느긋이 맛보다가, 문득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왠지 내가 연 사교회 같은 느낌인데?’

소파에 앉은 내 주위로 어느새 옹기종기 모여든 영애들을 보자 갑자기 여기가 캐논 백작가인지, 내 궁인지 영 헷갈려졌다.

원래 나도 가끔 황궁에서 이런 사교 모임을 열 때가 있었다. 황족에게 귀족들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은 필수적인 부분이었으니까.

그런데 사교회를 열 때마다 마리나는 나한테 ‘꼭 아름다운 후궁들을 100명이나 끼고 살았다는 역사 속의 방탕한 황제 같은 모습’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지금 살롱 안의 광경을 보면 왜 마리나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영애들이 나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화기애애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이 꼭 색색의 꽃들로 가득 찬 화원, 혹은 예쁜 새들이 지저귀는 온실 같았다.

‘이상하네. 물론 난 원래 두루두루 인기가 많았지만, 요즘은 이런 자리마다 영식들보다는 영애들이 주위에 압도적으로 많이 몰려든단 말이지.’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다가, 요즘 대외적으로 보이는 내 행보에 의식이 닿았다.

‘균열에서 나오는 괴물들을 때려잡기 시작하면서부터인가?’

최근에 제국민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떠올려 보면, 확실히 이전보다 나한테 강인하고 믿음직스러운 황녀님의 이미지가 더해진 것 같긴 했다.

‘좋은데? 강인하고 믿음직스러운 황녀님.’

나는 흡족하게 손에 든 와인잔을 기울였다.

그때, 잠깐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뭐라고 소곤거리던 일부 영애들이 내게 말했다.

“혹시 황녀님의 기사도 이쪽으로 오라고 하면 안 되나요?”

“지난번 건국제 검술 대회 때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사실은 아까부터 영애들이 나를 따라온 제라드에게 숱한 시선을 보내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확실히 제라드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예전에도 이성적 호감을 느끼는 눈으로 제라드를 힐끔거리던 영애들은 있었으나, 이렇게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역시 검술 대회 이후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제라드는 눈에 띄게 잘생긴 외관이니 영애들이 관심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예전에 내가 언뜻 생각한 대로 주변에 흔히 없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제라드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으면 왠지 우수에 찬, 사연 있는 고독한 남자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제라드는 사연 있는 고독한 남자였다.

개국 공신 가문 중 하나인 명문 라스너 가문에서 태어나 누구보다 존귀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아버지의 죄로 신분을 박탈당하고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불운한 청년.

그러다 지금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은 채 황녀의 기사가 되어 한평생 아버지의 죗값을 대신 치르며 그림자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숭고한 청년.

……대충 영애들 사이에서 제라드의 이미지는 이 정도로인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 지나가듯이 들어보니, 제라드에게는 귀하게 자란 영애들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욕망을 자극하는 포인트가 있다고 했다.

사실 나는 들어도 잘 모르겠긴 한데, 가장 중요한 건 신분이 낮되 진짜 천한 피를 가져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도 얼굴이 아주 잘생겨야 한다나?

제라드는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 있으니, 영애들이 은근한 설렘을 품은 눈빛으로 그를 힐끔거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영애들의 시선을 따라 슬쩍 뒤를 돌아봤다.

나와 조금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선 제라드는 실로 기사의 귀감이라 해도 좋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줄곧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듯, 내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선이 마주쳤다. 건방진 녀석은 바로 눈을 내려까는 게 아니라,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제라드를 오래 쳐다보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나서 영애들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글쎄, 난 영애들하고 얘기하는 게 더 좋은데.”

영애들이 꺅, 하고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곧 저도 황녀님이 제일 좋아요, 하고 귀여운 카나리아들처럼 지저귀는 소리가 이어졌다.

영애들의 관심이 제라드에게서 떠나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순간 ‘응?’하고 의아해졌다.

영애들이 제라드를 보지 않으니까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다니, 영애들의 관심이 제라드에게 향한 게 내 마음에 안 들었었나?

나는 금방 그 이유를 파악했다.

‘나 혼자 주목받는 게 좋으니까 그렇지.’

다시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앉아 나를 찬양하는 영애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술잔을 기울였다.

아직까지는 평화롭고 즐거운 사교회였다.

*

제라드는 아까부터 아르벨라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아르벨라가 처음 살롱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를 힐끔거리던 영식 한 명이 이내 용기를 낸 듯이 영애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제라드는 아르벨라의 뒤쪽에 가만히 서서 그런 그에게 조용히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따라붙은 눈길을 느낀 영식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제라드를 발견했다.

그는 아르벨라와 일곱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다가오는 영식에게 서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제라드가 한 일은 단지 그것뿐이었으나, 그의 시선을 받은 영식은 선득함을 느끼며 흠칫했다. 결국 아르벨라에게 다가가려 시도하던 여섯 번째 영식도 자신을 향한 차가운 시선에 밀려 다시 뒷걸음질 쳤다.

그 후 제라드는 다시 반짝이는 금발을 가진 소녀의 뒷모습으로 눈길을 돌렸다. 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뒷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머나, 베른하르트 소공작님이 오셨어요!”

그때, 영애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막 살롱 안에 들어선 수려한 청년 때문이었다.

살롱의 밝은 조명 아래에서 그의 투명한 은빛 머리카락이 더욱 찬연하게 빛났다.

어쩐 일로 살롱에 다 방문한 킬리안이 마침 출입구 쪽에 서 있던 오늘 사교회의 주최자 캐논 백작 부인에게 인사했다.

“모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캐논 백작 부인. 훌륭한 살롱이군요.”

“베른하르트 소공작, 어서 와요. 오늘 방문해 줘서 고마워요.”

킬리안은 곳곳에서 날아드는 시선을 느끼며 황녀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킬리안이 고개를 돌려 벽 쪽에 서 있는 제라드를 쳐다봤다.

제라드도 킬리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에 동시에 서늘한 빛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1황녀님과 2황녀님을 뵙습니다.”

킬리안은 살롱에 모인 사람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아르벨라와 클로에에게 먼저 인사했다.

아르벨라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기울여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모를 모호한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말했다.

“오늘 소공작도 오는 줄 몰랐는데.”

“1황녀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와 보았습니다.”

킬리안의 말을 듣고 아르벨라보다 주변 영애들이 더 소란을 떨었다. 클로에도 옆에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이 녀석이 또 주변 사람들 착각하게 할 말을 하네.’

반면 아르벨라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킬리안을 보았다. 원래도 그를 볼 때마다 고운 눈을 했던 적이 별로 없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떨떠름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에 미술 전시회장에서 만난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이 떠오른 탓이었다.

“괜한 소리하지 말고 저기 빈자리에 가서 앉지.”

아르벨라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은 지금 그녀가 있는 곳과 멀리 떨어진 자리였다.

고개를 슬쩍 모로 기울인 킬리안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영애들에게 말했다.

“제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황녀님과 영애님들께 실례일까요?”

“헉, 아니요! 전혀 아니에요.”

“여기 빈자리 있어요, 빈자리 많아요!”

영애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킬리안의 말을 부정했다.

“호호, 그렇지 않아도 슬슬 우리끼리만 이야기하기 질려서 다른 사람들과 합석하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그렇지, 언니?”

믿었던 클로에까지 아르벨라를 배신했다.

이미 영애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빈자리까지 만든 참이었다. 차라리 이게 아르벨라가 연 사교회라면 불청객을 마음껏 쫓아냈겠지만, 오늘 살롱의 주최 측인 캐논 백작 영애도 킬리안을 대환영하는 기색이었다.

“빈자리니 상관없지. 마음대로 해.”

결국 아르벨라도 작게 혀를 차며 킬리안의 동석을 허락했다.

킬리안이 우아한 움직임으로 영애들이 만들어 준 빈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미술 전시회장에서 저희 어머니를 만나셨다지요?”

킬리안은 아무것도 모르고 꺼낸 말이었지만, 아르벨라는 기분이 살짝 더 나빠졌다.

“그랬지.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이 말하던가?”

“예, 저희 어머니께서 평소에 1황녀님을 많이 존경하십니다. 이번에도 누구나 황녀님을 보면 저절로 눈이 가고 마음이 갈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극찬하시더군요.”

킬리안의 말을 듣고 아르벨라는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미술 전시회장에서 보인 태도를 보면 아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나 듣기 좋으라고 킬리안이 그냥 하는 소리인 것 같지?

‘그런데 킬리안, 이제 봤더니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사실 저 말은 니베이아가 진짜 킬리안에게 한 말이라 그가 거짓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르벨라는 킬리안에게 의심 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그래……. 사실이라면 그것 참 고마운 일이네.”

그렇게 아르벨라가 떫은 기분을 느끼는 사이, 주변에 있던 클로에와 영애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일부 영애들이 머리를 맞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베른하르트 소공작님과 1황녀님은 확실히 조합이 좋네요. 이쪽이 로맨스물의 왕도, 정석적인 느낌이긴 하죠.”

“그래도 저는 역시 검은 기사 쪽이 더 좋아요. 원래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인과 그 밑에 있는 기사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에서는 주인공들이 역경을 헤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심금을 울리는 거잖아요.”

그들은 얼마간 소리 죽여 속닥거리다가 이내 클로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2황녀님은 어떠세요? 요즘은 1황녀님의 종속 기사 쪽으로 마음이 기우셨던 것 같은데.”

클로에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아르벨라와 킬리안, 그리고 제라드를 번갈아 보면서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초탈한 듯이 눈을 감았다.

“난 그냥 둘 다 양팔에 거느리고 사는 쪽이 가장 평화롭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

“앗, 그건 『거미 여왕의 화원』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결말이네요! 역시 우리 독서 모임 ‘로사로즈’의 명예 회원인 2황녀님이세요.”

“하긴, 꼭 그런 작은 사막 왕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카뮬리타에서도 황위에 오르면 배우자를 여러 명 둘 수 있잖아요. 바보같이 너무 저희 눈높이에서만 생각했어요.”

“2황녀님 덕분에 지금 눈이 뜨인 기분이에요! 좋네요, 양손의 케이크 결말.”

클로에의 말에 영애들이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감탄했다.

그들은 몇 년 전 유행했던 카뮬리타 최고의 명작 로맨스 소설 『별빛 폭풍의 기사』를 시작으로 인연을 맺어, 지금은 아예 같은 독서 클럽에 속해 있었다.

모임의 이름인 로사로즈는 ‘로맨스 소설 사교회’의 앞글자를 하나씩 딴 ‘로사’에서 착안해 지은 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이것은 로맨스 소설을 읽는 영애들의 소소하고 즐거운 모임이었다.

다만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면, 실제 사람을 보고도 로맨스 필터가 눈에 끼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그들과 인물 관계나 상황이 비슷한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찾아 대입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모든 영애들이 동경하는 1황녀와 그녀의 주위에 있는 멋진 청년들은 그 자체로 이미 명작 로맨스 소설의 멋진 여주인공과 남주인공 같았다.

특히 요즘은 황녀님을 사이에 둔 우아한 귀공자와 멋진 기사 사이에서 하루하루가 뜨거운 토론의 장이었다.

그러나 영애들의 취향은 늘 반반으로 갈려, 어느 한쪽이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매번 엎치락뒤치락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 치열한 공방도 이제 오늘부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클로에의 말에 마음 깊이 수긍한 영애들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는 사이, 아르벨라와 킬리안의 화제는 곧 다가올 올해의 사냥제로 옮겨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의 그건 이제 안 하십니까, 1황녀님?”

“그거라니, 뭘 말하는 거야?”

“리아코어로 축포를 터트리시던 것 말입니다.”

“……그건 원래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야. 그보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1황녀님에 대한 것은 그게 뭐든 전부 마음에 깊이 담아 두고 있습니다.”

“소공작, 오늘은 다른 때보다 능청스럽네.”

“황녀님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제게 쌀쌀맞으신 것 같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되는군요.”

제라드는 사람들의 뒤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 사이좋은 모습으로 떠드는 아르벨라와 킬리안을 보는 동안 그의 눈빛이 서서히 차게 가라앉았다.

제라드는 괜히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참, 캐논 백작가에서 한 가지 더 선보일 게 있다고 했지요?”

“아아, 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지금 바로 가져오라고 할게요.”

그때, 시간을 확인한 캐논 백작 영애가 시종에게 서둘러 손짓했다.

곧 예쁜 레이스 리본으로 장식된 상자 하나가 테이블마다 하나씩 옮겨졌다.

“저희 가문에서 운영하는 공방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 만든 인형이에요. 다음 달부터 시험적으로 판매하려고 해요.”

“어머나, 정말 정교하네요!”

“정말 예쁘기도 해라. 진짜 살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상자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 있던 인형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아르벨라의 옆에 앉아 차를 마시던 클로에의 움직임이 멎었다.

“꺄아악……!”

뒤이어 그녀가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날카로운 비명이었는지, 듣는 사람조차 한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을 정도였다.

*

살롱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클로에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어느새 찻잔을 떨어뜨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상자 속의 인형을 보는 얼굴이 새하얬다.

“사, 사브리…….”

“클로에.”

거친 숨을 헐떡이며 말을 더듬던 클로에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클로에는 자신을 부르는 아르벨라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푸른 눈이 보였다.

클로에는 침착함을 살짝 되찾았다.

“…….”

곧 마른 침을 삼킨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클로에의 눈에 어려 있던 떨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놀란 게 인형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잠깐만 실례할게.”

풍성한 치맛자락이 인형을 넣은 상자를 스쳐 지나갔다.

클로에가 급히 자리를 뜨자, 그녀의 최측근 시녀 도레아가 서둘러 뒤를 따랐다. 다른 때 같으면 적절한 이유를 대고 자리를 비켰겠지만, 지금 클로에는 그럴 만한 여유조차 없는 것 같았다.

“…….”

“…….”

클로에가 떠난 뒤, 살롱의 분위기는 더 싸늘해졌다.

달그락.

아르벨라가 들고 있던 찻잔을 일부러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느긋하게 움직인 그녀의 손이 상자 속에 든 인형에 닿았다.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진짜처럼 생긴 인형이네. 그렇지?”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아르벨라의 말에 동의했다.

“마, 맞아요. 정말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생긴 인형이 있다니 놀랍네요.”

“밤에 보면 좀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요. 진짜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이라.”

“그래도 정말 예뻐요, 캐논 영애.”

한마디씩 꺼내는 동안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서서히 풀렸다.

“…….”

“…….”

하지만 캐논 백작 부인과 영애의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들은 특히 2황비 카타리나와 클로에하고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들이 주최한 살롱에서 클로에가 이렇게 이상한 반응을 보이며 뛰쳐나갔으니 당황스럽고 걱정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까탈스러운 클로에의 심기를 괜히 더 상하게 만들까 봐 그녀에게 가보지도 못하고 불안하게 문만 힐끔거리고 있었다.

“다음 달에 출시할 거라고 했지? 나도 하나 갖고 싶네. 단지 인형 머리는 갈색이 아니라 금발이면 좋겠어.”

“예, 그, 그럼요! 1황녀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맞춤으로 가능합니다!”

아르벨라가 태연히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두 사람의 얼굴도 조금 밝아졌다.

그런 뒤 아르벨라의 시선이 상자 속의 인형에게 서늘히 닿았다.

“…….”

그것은 진짜 사람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섬세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방금 클로에가 이 인형을 본 뒤 사색이 되어 경황 없이 중얼거리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맺혀 있었다.

‘혹시 사브리엘이라고 말하려고 했던 걸까?’

아르벨라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갈색 머리 인형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생각 외로 평범한 인형인데. 2황비 카타리나가 캐논 백작 부인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 들어서 오늘 뭔가를 꾸미는 줄 알았더니.’

푸른 눈에 한순간 희미한 광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다 아르벨라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나에게 클로에의 상태를 보고 오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마리나, 지금 클로에한테 가서…… 음? 얼굴이 왜 그래?”

그런데 이제 보니 아르벨라의 뒤에 서 있던 마리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황녀님, 저…….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무슨 일인데?”

“속이, 갑자기 좋지 않아서요.”

“그래? 어서 가 봐.”

갑자기 체기라도 있는 건지, 마리나의 상태는 정말 나빠 보였다.

아르벨라가 허락하자, 마리나가 급히 방을 빠져 나갔다.

아르벨라는 다시 인형을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조금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클로에가 소리를 지를 때 거기에 묻힌 또 다른 작은 비명 소리가 있지 않았던가?

*

“뭐야, 클로에 쟤가 왜 여기 있어?”

라미엘은 캐논 백작가에 몰래 들어 와 정원의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인상을 썼다.

그는 방금 살롱 안에서 있었던 일을 그림자를 통해 보았다.

캐논 백작 부인과 영애가 상자 속의 인형을 공개한 직후, 클로에가 경악해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급기야 살롱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늘 라미엘은 2황비 카타리나가 이 살롱에서 무슨 일을 꾸밀 걸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클로에가 올 줄 알았으면 말렸을 텐데, 설마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촐싹거리면서 아르벨라와 동행했을 줄이야.’

2황비 카타리나가 캐논 백작 부인에게 서신을 보내 명령한 건 오늘 살롱에서 공개할 인형 중 하나를 그녀가 말한 생김새로 만들어 끼워 넣으라는 것이었다.

곱슬거리는 긴 갈색 머리카락에 짙푸른 남색 눈을 가지고, 거기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인형.

라미엘은 그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어릴 때 클로에와 함께 그레이엄 후작가에 갔을 때 본, 저택의 깊고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던 그 역겨운…….

‘그런데 아르벨라의 시녀가 왜 저 인형을 보고 클로에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거지?’

라미엘의 눈에 날카로운 이채가 스쳤다.

분명 아르벨라의 뒤에 서 있던 마리나라는 시녀 또한 상자 속의 인형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더 가까이에서 인형을 본 클로에의 반응이 워낙 컸던 탓에 묻혔지만, 이후에 마리나도 사색이 된 채 살롱을 빠져나갔다.

라미엘은 카타리나가 유디트 대신 이번 타킷을 마리나로 바꾼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방법이 왜 저 인형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저 시녀도 그레이엄 후작가와 관련이 있는 건가?’

라미엘의 손이 괜히 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혹시 어머니의 명으로 또 다른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아르벨라가 캐논 백작가를 떠나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캐논 백작가를 떠났다.

아르벨라가 마차에 오르기 전, 언뜻 그녀의 시선이 나무 위에 숨은 라미엘에게 향한 것 같았지만, 그는 곧 나무 위로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

“뭐? 클로에가 오늘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 갔다고?”

2황비 카타리나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막 잎사귀를 정리하던 꽃의 머리를 가위로 댕강 잘랐다.

“이 미련한 것이! 내가 그렇게 궁 안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독히도 듣지 않는 딸에게 답답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그래서, 다른 건 계획대로 되었더냐?”

“그것이……. 1황녀님의 시녀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2황녀님이 인형을 보고 비명을 지르셔서…….”

클로에가 불러들인 소란이 너무 커서 1황녀의 시녀가 보인 반응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탁. 카타리나가 손에 들고 있던 꽃의 줄기와 가위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하지만 인형을 확실히 보긴 한 거겠지?”

“예, 그건 그런 것 같습니다. 나중에 보니 꼭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살롱을 빠져나갔다고 했으니까…….”

“흐음…….”

시녀는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카타리나는 그 정도면 되었다는 듯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오늘 1황녀의 시녀가 그 인형을 보고 주인의 체면이 상할 정도의 추태라도 떨었다면 좋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 일단은 괜찮았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카타리나가 시녀를 돌아보던 몸을 다시 의자에 기댔다. 그녀의 시선이 머리가 잘린 꽃송이에 닿았다. 이윽고 붉은 입술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클로에, 그 아이는 왜 오늘따라 하필 그 살롱에 가서 그런 일을 당한단 말이냐.”

카타리나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짙은 염려였다.

“클로에는 지금 궁으로 돌아왔나?”

“예, 몸이 좋지 않으셔서 일찍 귀궁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 그 아이에게 가 봐야겠다. 너는 먼저 가서 심신 안정에 좋은 펜닐 차를 클로에에게 올리라고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카타리나는 꽃들이 쌓인 테이블 앞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딸을 염려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밖에서는 어떤 일을 하든, 어쨌거나 라미엘과 클로에에게 그녀는 좋은 어머니였다.

*

“황녀님, 4황녀님의 시녀가 또 한 번 찾아왔어요.”

“그래?”

“그리고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나를 찾아와 건넨 마리나의 말에 서류에 사인하던 손이 멈췄다.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정말 마리나의 말처럼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녀가 어련히 우산을 가져다주겠지. 그보다 마리나, 이제 몸은 괜찮아?”

“예, 염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그럼 그만 나가 봐.”

나는 무덤덤하게 말하며 마리나를 방에서 내보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서류로 고개를 내렸다.

사실 오늘은 유디트와 야외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요즘 그녀는 갑자기 황제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며 바빠졌다. 내가 알아서 신경을 쓴다고 했는데도, 황제는 유디트의 생활을 직접 신경 쓰기 시작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그가 백야의 전당에 직접 연락을 넣어, 레반테온이 유디트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지금까지 유디트를 방치한 것에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건지, 아니면 지난 오찬 시간 때 체면을 구겨 자존심이 상한 것을 회복하고 싶은 건지.

‘내가 아는 아버지의 성격상, 분명 후자겠지.’

그래도 유디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기쁘고 설레기보다는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 불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도 바쁘다는 이유로 그녀를 만나 주지 않았다.

유디트는 내 말을 순진하게 믿고 시간이 자꾸 엇갈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도 오늘은 모처럼 시간을 내서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자 유디트는 아주 기뻐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지금은 오후 4시.

약속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나 있었다.

쏴아아……!

잠시 후 빗줄기가 굵어져 거의 폭우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까 마리나에게 말한 대로 시녀가 우산을 가져다줄 테니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아까보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서류가 잘 읽히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슬슬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한 참이기도 해서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언니!”

나를 보자마자 나무 밑에 서 있던 유디트가 달려왔다. 승마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뜀박질의 속도가 빨랐다.

나는 약속 시간에 두 시간 가까이 늦어 놓고도 태연한 얼굴로 유디트에게 말했다.

“유디트, 아직도 여기 있었네. 비도 내리는데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러다 언니랑 엇갈릴까 봐요.”

오늘 유디트를 밖에서 만나자고 한 건 승마를 봐준다는 명목에서였다.

사실 예전에 리리아나의 매 맞는 시동 사건이 있었던 직후에, 어쩌다 보니 유디트가 원하는 수업들을 대부분 다 듣게 해 줬었다.

유디트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나도 ‘내가 얘한테 이렇게까지 해 줘야 하나’ 싶었지만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이런 작은 일에도 기뻐하는 유디트의 얼굴은 내 안의 저열한 우월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내게는 별것 아닌 호의에도 늘 맑은 웃음을 보이는 모습도 내게 만족감을 주었고 말이다. 꼭 내 손으로만 모이를 받아먹도록 길들여진 온실 속의 카나리아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과목을 재미있어 하던 유디트가 단 하나 기초조차 떼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승마였다.

유디트는 말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그것만큼은 결국 더 이상 시도하지 못하고 포기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황제가 그런 유디트의 사정을 알고, 승마는 기본 교양이니 꼭 배워야 한다고 말했단다. 그래서 유디트의 부탁으로 오늘 내가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었다.

“혹시 못 오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셨다고 들었어요.”

유디트는 내가 그녀를 2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는데도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더군다나 유디트가 시녀를 보내도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 주지도 않아, 마냥 기다리기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일은 잘 처리하고 오신 거예요?”

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나를 걱정했다.

나는 살짝 젖어 있는 유디트의 머리칼과 옷을 천천히 훑어봤다. 시녀가 우산을 씌워 주고 있긴 했지만, 갑자기 쏟아진 비라 처음에는 대처하지 못했던 듯했다.

유디트는 이제 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참이라, 아직 비를 막거나 젖은 몸을 말릴 재주가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시녀들에게 서늘한 시선을 옮겼다.

“시녀들 중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없나? 왜 유디트를 이대로 놔뒀지?”

“죄송합니다, 1황녀님. 방수나 건조 마법에는 조예가 없어서…….”

황제가 새로 뽑아 준 시녀들은 전부 무지렁이 쭉정이들이었군.

그들을 깔보는 시선으로 훑은 뒤 유디트의 젖은 몸을 마법으로 말려 줬다.

“할 일도 많은 애가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이러고 있어?”

물론 그녀를 빗속에 두 시간이나 세워 둔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어쨌든 다시 보송한 모습으로 돌아온 유디트를 보자 그제야 좀 속이 편해졌다.

그때,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던 유디트가 생긋 웃었다.

“괜찮아요, 언니. 살짝 추웠지만 이 정도는 감기가 들 정도도 아닌 걸요.”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왠지 지금 한순간 유디트의 얼굴이 토끼가 아니라 여우처럼 보였는데…….’

착각이겠지.

“그보다 바쁘신데 이렇게 일부러 만나러 와 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또 맹탕 같이 자기를 바람맞힌 나한테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나 하는 걸 보면, 잘못 본 게 맞을 거다.

“요즘은 언니를 예전처럼 자주 못 만나서 너무 아쉽고 슬펐거든요.”

유디트는 여전히 맹목적인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이렇듯 변함없어 보이는 유디트를 물끄러미 보다가 툭 말했다.

“그러니? 난 이제 너한테 내가 필요 없는 줄 알았는데.”

“네?”

지나가듯이 흘린 말에 유디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내 말이 한 박자 늦게 인식되었는지, 다음 순간 그녀가 퍼뜩 놀라며 외쳤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유디트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는 듯이 망연함까지 느껴지는 얼굴을 한 채 두 눈을 흔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셨어요? 누가 언니한테 그런 소리를 했어요?”

“이제는 내가 아니어도 널 돌봐 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잖아.”

“어떻게 그 사람들하고 언니를 비교해요?”

유디트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언니 말처럼 갑자기 저한테 관심을 보이고 신경 써 주는 사람들이 생긴 건 맞죠. 하지만 언니는…….”

나를 바라보는 눈이 이제 갓 나뭇가지에서 돋아나 처음으로 빗물을 맞은 노란 잎사귀 같았다.

“저한테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주고 옆에 있어 준 사람인데.”

그렇게 말하며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무는 유디트의 모습이 참 처량해 보였다.

“그래서 요즘도 매일, 언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나는 유디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뾰족하게 돋아났던 추한 마음이 빗물에 맞은 것처럼 서서히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유디트는 아직도 가끔 내 앞에서 어린아이인 것처럼 굴었다. 그런 그녀를 보다가 어스름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다행이네. 내가 그렇게 네게 의미 있는 존재라니.”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액면 그대로의 순수한 의미가 아니라는 걸 유디트는 모를 것이다.

그녀를 향해 이어서 속삭였다.

“사실은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내 말은 유디트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진심을 담은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그녀에게 거짓말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왠지 내 귀에도 이 말이 조금 진실인 것처럼 들렸다. 절대 그럴 리가 없었는데도.

“오늘은 늦게 와서 미안해.”

“아니에요. 어쩔 수 없었잖아요.”

“혹시 나 때문에 다음 일정이 밀리지 않았니?”

“오늘은 다른 계획 없어요.”

“그래? 비가 와서 어차피 승마는 못할 것 같은데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그날 오랜만에 시간을 내서 유디트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유디트의 방에서 그녀가 직접 내준 차를 마셨다.

그런데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아늑한 방에 있는 동안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언니, 많이 피곤하신 것 같아요.”

내 얼굴을 보던 유디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왔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잠깐 눈을 붙이셔도 돼요. 제가 이따가 깨워 드릴게요.”

내 옆에 앉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미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이런 일이 있었기에 피로에 젖은 몸은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따스한 온기를 찾아들었다.

멀쩡한 정신이라면 당연히 거절했을 일인데, 이상하게 유디트의 궁에 올 때면 지금처럼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유디트의 어깨에 머리를 떨어뜨리자마자 바로 지독한 수면이 밀려들었다. 눈앞이 금방 흐려졌다.

“전 언니가 이렇게 제 앞에서 편안한 모습을 보일 때가 제일 좋아요.”

비눗방울이 톡톡 터지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가 귀에 맺혔다.

“잠깐이라도 푹 쉬세요, 언니.”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나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금방 의식이 멀어졌다.

오랜 불면증 끝에 찾아온 달콤한 잠이었다.

22. 납치

밀리엄은 3황자궁 화원에 있는 티 테이블 앞에 앉아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찌푸린 붉은 눈이나, 의자가 높아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앞뒤로 까딱이는 움직임에서도 깊은 불만이 느껴졌다.

“황자님, 왜 화가 나셨어요?”

꼭 누구든 봐 달라는 듯이 일부러 밖에 나와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밀리엄에게 시녀 미레이유가 말을 걸었다.

“흥, 몰라.”

“황자님이 모르시면 누가 알까요?”

“원래 사람은 다 자기 마음을 자기도 모를 때가 있는 거야.”

밀리엄은 아직 여덟 살밖에 안 됐으면서 제법 철학적인 소리를 했다. 미레이유가 그런 밀리엄을 보면서 귀엽다는 듯이 다정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지요. 역시 우리 황자님은 정말 영특하시네요.”

“이 정도는 기본이지. 난 카뮬리타에서 제일 뛰어난 마법사인 벨라 누나의 동생인걸.”

밀리엄이 턱을 살짝 들고 우쭐거렸다.

그 모습이 어릴 때의 아르벨라와도 닮아 있어서, 누가 보면 정말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라고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뿐, 밀리엄은 금방 다시 시무룩해졌다.

지금 자신의 입으로 꺼낸 이름에 또 마음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사실 밀리엄이 조금 전 심통이 났던 건 그의 하나뿐인 동복 누이인 아르벨라 때문이었다.

“벨라 누나가 또 나한테 화를 냈어.”

그는 얼마 전 샤렐 황후궁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아르벨라는 밀리엄에게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싸늘한 눈빛은 분명 그를 강하게 질책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 벨라 누나가 많이 바쁜 건 나도 알고 있었는데…….”

밀리엄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그때는 왜 그렇게 떼를 쓰고 우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라고 자자하게 떠드는 1황녀 아르벨라가 바로 그의 누이인데, 그녀에게 마법을 사사 받는 행운을 자신이 누리지 않으면 누가 또 누릴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 눈이 멀었다.

아르벨라가 이미 거절했는데도 도저히 포기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인 샤렐 황후에게 가서 어리광을 피우며 손을 벌렸다.

그 일로 아르벨라는 밀리엄에게 실망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요즘 낮이고 밤이고, 한숨을 달고 있지 않을 때가 없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밀리엄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데 있잖아. 벨라 누나가 어제 또 유디트하고 만났대.”

밀리엄의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는 서운함이 묻어 나왔다.

“이해가 안 돼. 클로에 누나까지는 그렇다 쳐도 그 여자애는 왜 예전부터 자꾸 옆에 두는 거지?”

어린 밀리엄에게 있어 유디트의 존재는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 미궁과도 같았다.

아르벨라의 성격은 평소에 누구에게나 그리 살가운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클로에는 어릴 때부터 하도 아르벨라를 좋아해 그녀의 뒤를 지겹도록 쫓아다닌 탓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지만, 유디트에게만큼은 아르벨라가 먼저 다가갔다고 했다.

밀리엄에게 그 이야기는 굉장히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아르벨라의 하나뿐인 동복동생이었으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서 먼저 다정한 말 한마디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1황녀님께 한번 말씀드려 보세요. 4황녀님과 가까이 지내지 마시라고요.”

“그건…… 그랬다가 누나가 화 내면 어떡해.”

미레이유의 말에 밀리엄은 우물쭈물거렸다. 오만한 어린 황자님인 밀리엄이 이렇게 소심해지는 건 그의 누이인 아르벨라와 연관되었을 때가 유일했다.

“그럼 차라리 4황녀님과 친해지시는 건 어떠세요?”

“내가 왜? 그런 근본도 없는 애하고.”

밀리엄의 눈이 찌푸려졌다. 혹시나 아르벨라의 화를 살까 싶어 유디트에게 직접 나쁘게 군 적은 없었지만, 사실 밀리엄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미천한 피를 가진 유디트를 누이라 생각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밀리엄은 유디트에게 질투가 났다.

“4황녀님과 친분을 다지시면 1황녀님의 얼굴을 뵙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늘어날 거예요.”

하지만 미레이유가 이어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인 말에는 밀리엄도 흔들리는 얼굴을 했다.

사실 미레이유는 최근에도 밀리엄에게 이와 같은 조언을 몇 번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밀리엄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조금 혹한 눈치였다.

얼마 전에 황후궁에서 샤렐 황후가 유디트를 궁에 불렀을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늘 바쁘다는 말로 샤렐 황후와 밀리엄의 만남 요청을 거절하던 아르벨라가 그날은 한달음에 나타나 유디트를 데려갔었다.

밀리엄이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미레이유에게 살짝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의견을 물었다.

“나도 그 애랑 친해지면 누나가 나랑도 같이 놀아 줄까?”

“그러실 거예요.”

미레이유는 다정한 목소리로 밀리엄에게 확언해 주었다.

“마침 곧 사냥제가 열리지요. 1황녀님을 위한 선물을 함께 고르러 가자고 4황녀님께 권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원래도 사냥제 때마다 밀리엄은 아르벨라에게 장식품을 선물하곤 했다.

아주 어릴 때는 모든 것을 유모에게 맡기다가, 그를 돌보는 사람이 미레이유가 되면서부터는 샤렐 황후의 허락을 받아 수행원들을 데리고 황궁 밖으로 외출하기도 했다.

“4황녀님이라면 흔쾌히 수락하실 테고, 1황녀님도 가장 아끼는 동생들이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는 걸 알게 되면 나중에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어린 밀리엄의 귀에도 미레이유의 말은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밀리엄은 부루퉁하던 얼굴을 마침내 밝게 편 채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를 따라 미레이유도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화원을 둘러싼 나무들처럼 새뜻한 연초록빛 머리카락이 그림자를 품은 채 하늘하늘 흔들렸다.

*

이후로 밀리엄은 유디트에게 큰마음 먹고 먼저 연락을 취했다.

대뜸 같이 외출을 권하면 많이 놀라고 당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름대로는 단계적인 과정을 밟았다.

물론 유디트로서는 밀리엄이 이렇게 먼저 관심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나친 영광에 너무 놀라서 감히 황자님과 동행할 용기가 없다며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밀리엄은 이렇듯 남들보다 우월한 인간으로서 남의 사정을 살펴 줄 정도의 아량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밀리엄이 샤렐 황후의 아들이고, 아르벨라의 남동생인 이상 그가 명령을 내리면 당연히 유디트도 거기에 따라야 할 터였다. 하지만 미레이유의 말처럼 밀리엄의 목적은 유디트와 친해져 아르벨라와도 가까워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강압적인 수단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먼저 안부 편지를 유디트에게 보내 적당히 말을 튼 다음, 한두 번 정도는 우연을 빙자해 길에서 얼굴을 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또 이후에 두세 번 정도는 따로 시간을 내서 같이 정원을 산책하거나 차를 마시자고 권유한 적도 있었다.

그 과정은 상당히 번거로워, 밀리엄의 짧은 인내심을 많이 소모하게 했다.

하지만 마침내 그 결실이 맺혀, 드디어 오늘 밀리엄과 유디트는 아르벨라를 위한 사냥제의 선물을 고르러 함께 외출하기로 했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밀리엄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마차를 세워 두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르벨라에게는 비밀로 하고 몰래 외출하는 것인 만큼, 황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유디트와는 상점가로 향하는 길목에서 따로 만나기로 이야기했다.

유디트는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 몰래 외출하는 게 처음이라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그녀는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2분이나 늦다니……. 이래서 근본 없는 애들은 안 된다니까.”

엉덩이에 뿔이 난 고양이처럼 불만스럽게 팔짱을 끼고 앉은 밀리엄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벌컥!

바로 그때, 마침내 마차의 문이 열렸다.

“왜 이제 와!”

밀리엄이 마차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그래도 황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혼자 조심해서 오라는 말은 잘 알아들었는지, 마차에 올라탄 유디트는 망토의 모자까지 뒤집어써 얼굴을 잘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건 그것뿐이었다.

“넌 내 천금 같은 시간을 3분이나 낭비하게 했어! 하지만 일단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왜 늦었는지는 가면서 말해!”

밀리엄이 서둘러 마차의 벽을 탁탁 두드렸다.

“출발해!”

하지만 그의 명령에도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응? 출발하라니까 뭐 해?”

짜증스럽게 창문을 내다 본 밀리엄은 바로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망토를 쓴 사람을 발견했다.

“어? 뭐야, 이거 네 시녀야? 오늘 일을 아는 사람은 최대한 적을수록 좋으니까 시녀랑 다른 수행원은 저 앞에 있는 가게에서 기다리게 하라고 했잖아? 호위는 내가 데리고 있다니까 그러네.”

그러다 밀리엄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휴, 설마 너 시녀한테 시간 때울 돈 안 줬어? 너도 참 답답하다. 자, 이거 줄 테니까 저쪽 찻집에 있는 내 시녀하고 같이 뭐라도 먹으면서 기다려.”

밀리엄은 마차 밖의 시녀에게 작은 돈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래도 당연히 황궁 법도상 몇 번은 거절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망토를 쓴 시녀는 선뜻 손을 내밀어 밀리엄이 내민 주머니를 받아갔다.

“감사합니다, 3황자님.”

“어?”

귀를 파고든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밀리엄은 놀랐다.

“뭐, 뭐야! 너 혹시…… 마리나?”

분명 1황녀 아르벨라의 최측근 시녀인 마리나의 목소리였다.

밀리엄은 나이가 어렸지만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방금 그의 마차에 오른 사람이 누구인지 정체를 깨달았다.

“그럼 설마……!”

경악한 밀리엄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 좌석에 앉은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음성 역시 귀에 익었다.

“내 시녀에게까지 신경 써 주다니 고맙구나, 밀리엄.”

하얀 손이 망토의 모자를 벗자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이 아니라 반짝이는 짧은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확실히 나들이를 나오기 좋은 날씨야. 그렇지?”

그러고 보니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마차에 훌쩍 올라타던 모습이나,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가 유디트라기엔 심히 대범했다.

“누, 누, 누나! 벨라 누나가 왜 여기 있어?!”

“꼭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네, 서운하게.”

기겁해서 묻는 밀리엄에게 아르벨라는 태연히 반문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오면 안 되는 곳에 온 건가?”

그러면서 그녀는 마차 밖에 서 있던 마리나에게 손짓했다. 미리 말해 둔 게 있었는지, 마리나는 여전히 망토 모자를 눌러 쓴 채로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인 뒤 밀리엄이 준 돈주머니를 들고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밀리엄이 말한 찻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여유로운 아르벨라와 달리 밀리엄은 너무 놀라서 심장이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설마 유디트한테 듣고 온 거야? 걔가 누나한테 전부 다 말했어?”

밀리엄은 유디트가 약속을 깼다는 생각에 씩씩거렸다.

“유디트, 이 배신자!”

‘이래서 옛 고대 격언에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있는 거였어!’

물론 밀리엄이 유디트를 거둔 적도 없었지만, 그는 진심으로 배신감에 치를 떨며 씨근덕거렸다.

“유디트는 너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런 밀리엄을 보면서 아르벨라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래서 너한테 묻고 싶은데. 왜 유디트를 이런 곳으로 은밀히 불러냈지?”

밀리엄과 유디트는 아르벨라 몰래 움직인다고 노력했지만, 그녀의 시선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아르벨라는 요즘 들어 부쩍 가깝게 지내는 밀리엄과 유디트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유디트에게 붙여 둔 시녀를 통해 두 사람이 함께 외출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의혹이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일단 유디트 쪽부터 떠보았으나, 의외로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르벨라에게도 밀리엄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르벨라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유디트가 자신에게 비밀을 만든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그런 아르벨라의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유디트는 덧붙였다.

“사실은 제가 내일 3황자님과 약속이 있는데요. 혹시 괜찮으시면 언니가 대신 나가 주시지 않을래요? 저는 내일 가벼운 감기에 걸릴 예정이라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곱게 웃는 얼굴이 실로 수상쩍었다. 아직 걸리지도 않은 감기를 핑계 삼아, 아예 아르벨라의 등을 떠밀어 주는 모양새가 참으로 모순적이지 않은가.

아르벨라는 단번에 유디트의 속내를 간파했다.

보아하니, 유디트는 아르벨라가 밀리엄과 함께 오누이 간의 허심탄회한 대화라도 나누며 우애를 돈독히 다지기를 바란 것 같았다.

반면 아르벨라가 그런 유디트의 속내를 눈치채고서도 이곳에 나온 건, 그녀의 말대로 오누이끼리의 친목 도모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밀리엄에게 의문을 느껴서였다.

이렇듯 그가 갑자기 유디트에게 접근하고, 또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뒤에서 은밀히 불러내기까지 한 목적이 뭔지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은 밀리엄과 유디트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 주변을 훑어본 뒤 더욱 강해졌다.

“내가 알기로는 밀리엄 네가 유디트랑 이렇게 둘이 외출할 만한 일이 없는데 말이야.”

“외, 외출 정도야 그냥 할 수도 있지!”

“그래? 그럼 어디를 가려고 했는데?”

“그건, 그건……!”

밀리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르벨라는 그런 밀리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렇게 그저 가만히 밀리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 그녀는 밀리엄을 다그치거나 질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밀리엄은 아르벨라에게 추궁받고 있다는 생각에 답답하고 억울해졌다.

“누나는…… 지금 또 유디트 때문에 이러는 거지? 왜, 내가 걔한테 나쁜 짓이라도 할까 봐 그래?”

밀리엄에게서 조금 전보다 더 거친 숨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어머니 궁에서도 그렇고, 누나는 유디트와 관련된 일에는 이렇게 바로 달려오더라.”

밀리엄의 말에 팔짱을 끼고 있는 아르벨라의 손이 아주 작게 움찔했다.

씨근덕거리던 밀리엄의 숨소리가 얼마 동안 이어지다가 이내 서서히 잦아들었다.

밀리엄은 잠깐 입을 꾹 다문 채 호흡을 골랐다. 그러다 이내 오늘 유디트와 만나기로 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아르벨라에게 솔직히 말했다.

“오늘 유디트한테 밖에서 보자고 한 건, 그냥 사냥제 때 누나한테 줄 선물을 같이 고르려고 그런 거야. 누나 몰래 준비해서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밀리엄의 눈이 울적하게 내리깔렸다.

그는 누구나 안쓰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을 법한 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웅얼거렸다.

“누나가 유디트를 좋아하니까, 나도 좀 친해져 보려고 그런 거라고.”

밀리엄은 어릴 때의 아르벨라 못지않게 영악해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기민하게 살필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라도 더 끌어 모르고, 또 자신에게 잘해 줄 마음을 들게 만들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 누나가 나한테도 잘했다고, 착하다고 그러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아서 그런 거란 말이야…….”

그러니 제아무리 냉정한 아르벨라라도 지금만큼은 자신을 가엾게 여겨 미안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유디트의 일로 오해를 했으니 더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르벨라는 밀리엄의 말을 듣고 바로 사과하며 그를 안아 주는 게 아니라,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팔을 툭툭 두드릴 뿐이었다. 그러더니, 단지 그에게 사실을 확인하듯이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유디트랑 둘이 나한테 줄 선물을 고르러 갈 생각이었다고? 아까 네 말대로 시녀도 떼어 놓고 지금 마부석에 올라 있는 최소한의 호위만 데리고, 몰래?”

“그으래……! 그런데 누, 누나. 지금 내가 뒤에 한 말은 너무 자연스럽게 무시하는 거 아니야? 그거 되게 중요한 말이었거든? 앞에 한 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말이었거든?”

“그래,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그럼 지금 주변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초대받은 손님은 아니라는 말이구나.”

“뭐?”

일부러 아르벨라에게 보란 듯이 불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밀리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덜컹! 콰앙!

마차가 크게 흔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으악!”

밀리엄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마차에 가해진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이 다 들썩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밀리엄은 어느새 아르벨라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 어?”

그의 붉은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혹시 마차가 흔들릴 때 자신의 몸이 날아가서 아르벨라의 위로 떨어진 것뿐인 게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아르벨라의 팔은 확실하게 밀리엄의 몸을 감싸듯이 둘러져 있었다. 게다가 아르벨라의 보호 마법 역시 밀리엄을 보호하고 있었다.

밀리엄의 입에서 딸꾹,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렇게 아르벨라가 밀리엄을 안아 준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물론 아주 어릴 때는 그가 떼를 써서 아르벨라에게 안긴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나이를 먹은 뒤로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밀리엄은 당황해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런 밀리엄의 반응을 갑작스럽게 마차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놀란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르벨라가 작게 혀를 차며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동생아, 다른 얘기는 황궁으로 돌아가면 마저 하자. 아무래도 지금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때는 아닌 듯하구나.”

딱히 성의 있는 위로는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밀리엄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르벨라의 마력이 황금색 그물망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곳곳에서 비명과 고함이 들렸다.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밀리엄의 눈앞이 번쩍였다.

“헉! 누, 누나!”

다시 눈을 떴을 때, 멈춰 있던 마차가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콰앙!

아르벨라는 곧바로 마차의 천장을 날려 버렸다. 뚫린 천장으로 거친 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밀리엄, 눈 감고 있어. 잠깐이면 끝나니까.”

밀리엄은 아르벨라의 말대로 눈을 꼭 감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신이 다 없었지만, 그의 옆에 있는 게 아르벨라라 두려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르벨라의 마법은 불발했다.

“……!”

막 뚫린 마차의 천장으로 밀리엄을 데리고 빠져나가려던 아르벨라가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심장을 으깨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 먹잇감을 옥죄고 있던 마력의 그물이 일시에 흩어지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볍기만 하던 몸이 중력을 갑절로 받기라도 한 것처럼 무거워졌다.

반대로, 폭풍에 휩쓸린 나무 열매라도 된 양 아르벨라의 마력에 묶여 바깥에 널브러졌던 괴한들은 자유롭게 풀려났다. 그들은 서둘러 마차에 결계를 겹겹이 둘렀다.

“누나……!”

함께 마차의 시트 위로 떨어진 밀리엄이 놀란 듯이 아르벨라를 불렀다.

아르벨라는 신음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젠……장. 왜 하필 지금…….’

마부석에 앉아 있던 밀리엄의 호위가 정체 모를 마차 탈취범들과 대치 중인 듯 바깥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별다른 소용은 없는 것 같았다. 마차를 둘러싼 괴한들은 네다섯 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어딘가 기이했다. 그래서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것 같았다.

아르벨라가 마력의 끈을 놓친 잠깐 사이에 주춤하던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를 촘촘히 감싸기 시작한 마력의 사슬이 느껴졌다.

오늘은 비공식적인 외출이었고, 또 아르벨라의 목적은 밀리엄과 만나는 게 전부였기에 외부인과 마주칠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르벨라가 데려온 건 시녀 마리나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찻집에 있다는 밀리엄의 시녀, 미레이유를 확인하러 가 있었다. 주변에 불청객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건 혼자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여 마리나를 보내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범인을 잡으려 하지 말고, 밀리엄과 함께 몸부터 피했어야 했다.

‘아니면 차라리 제라드든, 롬벨 경이든, 누구든 수행원을 데리고 외출했더라면…….’

그러나 결국은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아르벨라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욕을 씹어 삼켰다. 어떤 변명으로도 할 말이 없었다. 아르벨라는 방심했다. 그리하여 돌아온 결과가 이것이었다.

“누나, 갑자기 왜 그래?! 괘, 괜찮아?”

거칠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밀리엄이 몸을 숙인 아르벨라를 보며 허둥지둥거렸다.

“밀리엄…….”

아르벨라는 입을 열어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너 먼저 가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먼저 가라니, 그럼 누나는?! 그냥 같이 빠져나가면 되는 거 아니야?”

밀리엄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소리 질렀다.

아르벨라를 보는 붉은 눈이 불안감에 젖어 그렁그렁했다. 지금까지 밀리엄이 눈물을 보일 때마다 진심으로 달래 주려고 노력을 기울였던 적은 없지만, 지금은 그가 더 겁먹지 않게 안심시켜 줘야 할 것 같았다.

아르벨라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과 목소리를 꾸며내 말했다.

“나는…… 당연히 범인을 잡고 가려는 거지. 아까 말했던 다른 얘기는 나중에 황궁으로 돌아가면 마저 하자.”

“누나……!”

밀리엄의 다급한 목소리가 사그라졌다.

아르벨라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온기도 증발하듯이 사라졌다.

마차의 결계를 깨고 겨우 한 사람을 이동시킬 정도의 마력을 쥐어 짜낸 뒤 아르벨라는 심장을 잡아뜯는 듯한 통증에 좌석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번에는 고통이 너무 커서 차마 작은 숨소리조차 내뱉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런 상황에서 무리해 마법을 쓴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느낌을 보니 다행히 밀리엄을 황성으로 돌려보내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그때, 귓가에 꽥꽥거리는 새 소리가 들렸다.

-규, 균열이 나타났습니다!

아르벨라의 앞에 나타난 분홍색 새가 다급히 외쳤다.

-이번에는 제도의 시가지와 상점가가 모여 있는 4지구 위에 바로 균열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역대 균열들의 5배는 되는 엄청난 규모로, 좌표는…….

하지만 시끄럽게 울어대던 새는 아르벨라가 방금 깨 놓은 마차의 결계가 다시 견고해지면서 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아득해지는 시야 속에 정말 붉은빛이 번졌다. 뻥 뚫린 천장으로 보이는 하늘이 붉은 아가리를 벌리며 찢어지고 있었다.

아르벨라를 태운 마차가 붉은 하늘 밑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몸이 거칠게 흔들리는 와중에 하늘에서 무언가가 쏟아지는 게 보였다. 그러다 아르벨라는 이내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

그 시각, 제라드는 황궁의 후문으로 향하던 길에 4황녀 유디트와 마주쳤다.

“4황녀님을 뵙습니다.”

“제라드 경, 오늘은 언니와 함께 외출하지 않았네요?”

유디트는 백야의 전당으로 가던 길인 듯했다. 그러다 제라드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의외란 듯이 말했다.

제라드는 유디트의 손에 들린 눈에 익은 마법서들을 한번 쳐다본 뒤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1황녀님이 계신 곳으로 가던 길입니다.”

제라드는 아르벨라가 롬벨까지 두고 마리나와 단둘이 외출한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물론 각인 마법 때문에 아르벨라가 황궁에 없다는 건 연무장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롬벨 경은 동행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조금 전 연무장에 찾아온 롬벨을 보고 제라드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뒤늦게 아르벨라를 찾아 가려던 길에 유디트를 만난 것이다. 한데 그녀는 아르벨라의 외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듯했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유디트는 제라드에게 조금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제라드는 그녀에게 더 시선을 주지 않고 지나쳤다.

물론 아주 예전에 1황자 라미엘의 습격 사건 때 유디트가 그에게 도움을 주려 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는 이미 예전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전했다. 또 그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다. 그들의 공통분모는 오로지 1황녀 아르벨라뿐이었다.

“잠깐만요, 제라드 경!”

그래서 제라드가 유디트와 적당히 인사하고 자리를 떠나려 했을 때,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는 수 없이 제라드가 다시 몸을 돌리자, 유디트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검술 대회 경기장에서요. 길 알려 줘서 고마워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던 건 이것 때문이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경기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던 걸 잊고 있었다. 그날 길을 잃은 듯한 소녀를 발견하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다가, 아르벨라가 전부터 유독 옆에 두고 챙기던 4황녀인 걸 알고 제라드가 길을 알려 준 적이 있었다.

“아닙니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음, 아니요.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제라드 경 혹시 괜찮으시면…….”

파앗!

제라드와 유디트의 옆쪽에 갑자기 마력의 파장이 느껴진 건 바로 그때였다.

유디트가 막 말을 이으려던 찰나, 익숙한 황금색 빛 속에서 갑자기 3황자 밀리엄이 나타났다.

“3황자님?”

유디트가 밀리엄을 보고 깜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제라드의 귀를 파고들었다.

어린 황자는 잠깐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듯이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라드가 발을 붙잡힌 건 방금 3황자 밀리엄이 나타날 때 느껴졌던 것이 아르벨라의 마력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예요, 3황자님? 세상에, 이 식은땀 좀 봐요.”

유디트가 들고 있던 책들까지 떨어뜨린 채 밀리엄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그런데 왜 같이 있던 수행원들도 없이 이렇게 혼자 돌아오신 거예요? 설마 아르벨라 언니랑 못 만나셨어요?”

그러다 유디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밀리엄이 그녀의 옷을 붙잡고 외쳤다.

“도, 도와줘. 지금 벨라 누나가……!”

우우우웅!

거의 동시에 하늘에서 불길한 마력의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큰 균열이 하늘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경보음에 황궁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제라드는 그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당연히 목적지는 아르벨라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

아르벨라는 꿈을 꾸었다.

어딘가 눈에 익은 보랏빛 공간. 허공에는 여전히 수많은 새장이 매달려 있고, 아르벨라의 눈앞에는 또 다시 황금색 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 적힌 글귀가 아르벨라의 머릿속에 억지로 파고들었다.

유디트는 그녀가 죽인 1황녀 아르벨라의 시신 앞에서 울었다.

이것은 예전에 세계의 이면에서 아르벨라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때, 미래의 자신이 죽는 장면을 본 아르벨라가 분개해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 찢어 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 일로 그녀는 이 신비로운 공간에서 강제로 쫓겨났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 아르벨라는 또 한번 그 장소에 와 있었다.

모두들 그녀의 죽음을 동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1황녀 아르벨라가 앞장서 카뮬리타를 수호하고 제국민들을 지켰던 것도 옛일이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마법사의 열병으로 그 강대하던 힘을 잃은 1황녀를 가엾게 여겼다.

하지만 아르벨라는 이후 제국에서 철저히 금기시된 금단술을 사용해 끔찍한 괴물이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책이 굳이 되새기고 싶지 않은 미래의 내용을 아르벨라의 머리에 강제로 주입했다.

이렇게 다시 보아도 참으로 역겨운 미래였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운 상태에서도 아르벨라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뿐만 아니라 그 힘으로 거대한 균열을 불러, 유디트가 구했던 세계는 또 한 번 파멸에 이를 뻔했다.

거기에 휩쓸린 2황녀 클로에와 3황자 밀리엄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어린 아들을 잃은 샤렐 황후도 결국 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다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책에는 이제까지 아르벨라가 미처 알지 못했던 미래의 단락이 나와 있었다. 그녀의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해서였다.

비로소 아르벨라는 자신의 죽음에 진심으로 애도해 주던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유디트는 한때 동경했던 여인의 몰락이 가여웠다. 또, 한때는 누구보다도 눈부시게 빛나던 이복 언니의 죽음이 슬펐다.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 유디트만이 아르벨라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찬란한 영광이라고는 한 톨도 남지 않은 아르벨라의 초라한 최후에, 오직 유디트만이 눈물을 흘려 주었노라고 했다.

‘그래서, 이걸 지금 또 왜 보여 주는데?’

물론 그냥 느낌 탓일 수도 있지만, 황금색 책이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이 빛을 깜빡거렸다. 아직 뒤에 읽지 않은 페이지들이 남아 있었으나, 황금색 책은 이제 되었다는 듯이 아르벨라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그 자리에 빈 새장이 하나 나타났다.

그것은 한눈에 다른 것들과 비교될 정도로 녹슬고 낡은 새장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안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아예 텅 빈 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겨우 불티 하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작디작고 희미한 빛 하나가 점처럼 찍혀 있었다.

아르벨라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설마…… 이게 내 인생을 담은 새장이라도 된다는 거야?’

속에서 또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꼭 아르벨라에게 어서 문을 열어 보라는 듯이 빛을 깜빡였다. 혹시 이 새장 문을 열면, 그 안에 있는 작은 빛 역시 책이 되어 아르벨라의 눈앞에 펼쳐질지도 몰랐다.

‘싫어. 열어 보기 싫어.’

하지만 아르벨라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맹렬히 거부했다. 저것을 열어 보면, 정말 자신에게 설계된 초라한 인생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 것 같아서.

‘절대 안 볼 거야!’

그리고 거기에 영향을 받기라도 한 듯이 아르벨라의 의식이 현실로 끌려갔다.

*

“뭐야……! 이건 얘기랑 다르잖아……!”

나는 아득한 소음 속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듯, 머리가 몽롱했다.

“왜 4황녀님이 아니라 1황녀가…….”

사방이 어두워서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비치는 사람들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아, 그들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도 어려웠다.

단지 내가 몸을 포박당한 채 바닥에 누워 있다는 것만이 지금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상태가 왜 이런…….”

누군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지, 가까이에서 시선 같은 게 느껴졌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또다시 잘게 쪼개져 뭉개진 채로 내 귀를 스쳐 지나갔다.

내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서인지, 눕혀져 있는 바닥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색색 내뱉는 숨조차 열기에 먹혀 뜨끈뜨끈했다. 이건 내게 익숙한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꼭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쑤셔 오는 게 영 이상했다.

‘아, 그러고 보니 마차가 엄청나게 흔들리면서 몸을 여기저기 부딪쳤었지.’

바로 그 순간, 어지러운 머릿속에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자 조금이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잠깐의 현실 부정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아니, 씨. 이게 무슨 쪽팔린 상황이야……?’

밀리엄에게 잠깐이면 끝나니까 눈을 감고 있으라는 둥, 온갖 잘난 척은 다 해 놓고 결국 이런 꼴이라니.

‘납치라고? 납치……? 이 내가 납치라고?’

아무래도 상황을 보면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도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가장 먼저 느낀 게 아니라 불쾌감부터 올라오다니, 역시 사람의 성격이 그렇게 한순간에 바뀌는 건 아니었다.

어느덧 주위가 조금 전보다 조용해진 걸 보니, 옆에 있던 사람들은 자리를 떠난 것 같았다.

지금 내 몸을 옥죄고 있는 건 누군가의 마력 사슬이었다. 역시 마차에서 느낀 것처럼, 이들이 사용하는 마법식은 배합이 낯설었다.

나는 일단 마력을 한번 살살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흡, 숨을 들이켠 채 하던 걸 멈춰야 했다. 다시 심장이 쪼개질 것처럼 극심히 쑤셔 왔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입을 벌리면 그 틈으로 욕이든 신음이든 비명이든 뭐든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마법을 사용하는 건 무리인 듯했다. 하긴, 병증 때문에 몸에서 이렇게 열이 펄펄 끓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뜨거운 얼굴을 맨바닥에 대고 비비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나가면 욕부터 제대로 좀 배워 놔야겠구나 싶었다. 나를 이 꼴로 만든 놈들한테든, 아니면 멍청하게 방심한 나한테든 속 시원하게 뭐라고 쏴붙이고 싶은데 아는 욕이 거의 없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깐 또 의식을 잃었다가, 누군가 나를 세게 흔드는 게 느껴져서 다시 눈을 떴다.

“이봐, 정신 차려. 일단 해열제부터 먹어.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으니까.”

잠시 후, 정말 입에 약과 물이 흘러들어 왔다.

‘별 소용도 없을 짓하네.’

그래도 납치범 주제에 나름대로는 친절을 베푸는 게 의외였다.

그들은 나를 죽일 생각이 없는지, 어디선가 가져온 듯한 이불 비슷한 천 쪼가리까지 몸에 덮어 줬다. 물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데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황궁 시녀들조차 걸레로도 쓰지 않을 더럽고 낡은 천 쪼가리였지만.

“1황녀는 4황녀님과 가까운 사이야. 지금 죽이면 안 돼.”

“그러게 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끌고 와서……. 어쩐지 마차에서부터 이상하다 했어.”

또다시 납치범들이 자기네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약을 먹여서 뭘 어쩌려고? 1황녀 소문 몰라? 멀쩡해지면 우리만 곤란해질 수도 있잖아.”

“그건 그래……. 아까도 괴물같이 결계 깨고 그 와중에 3황자까지 이동시킨 거 봐. 지금도 카뮬리타 황실에서 우리를 쫓고 있을 수도 있다고.”

“일단 밖에 균열 때문에 난리 나서 그쪽이 어느 정도 잠잠해질 때까지 다른 데는 신경 쓰지 못할 거야. 그래도 여차하면…… 그냥 하나 더 열어 버리면 그만이야.”

내가 심한 열 때문에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라고 생각해서인지, 그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떠들어 댔다.

그러나 이 고통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탓에, 나는 의식의 끈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자, 그럼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대신 머리라도 굴려 보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열심히 주워들은 정보에 의하면, 애초에 이자들이 노리던 건 밀리엄이 아니라 유디트였을 것이다.

아까도 왜 4황녀가 아니라 1황녀가 마차에 있었느냐며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밀리엄은 유디트를 밖으로 끌어내는 미끼 같은 거였겠지. 하필 밀리엄을 이용한 건 그 애가 어려서 마법 실력도 떨어지는 데다 가장 구슬리기 쉬워서였을 것이다.

그럼 왜 이들은 유디트를 납치하려고 했을까? 그 애는 지금까지 존재감도 없이 황궁 안에 틀어박혀 살던 천덕꾸러기 황녀일 뿐인데.

그 이유는 괴한들이 다른 황족들에게는 존칭을 붙이지 않으면서 유디트에게만 ‘4황녀님’이라고 높임말을 쓴 것에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잘 지키고 있어. 이따 라칸이 돌아와서 쓸데없는 짓하지 못하게.”

마침 오랜만에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의 내용이 생생히 떠오른 덕분에 내 생각에 설득력이 더해졌다.

“너희…… 솔렘 왕국?”

가쁜 숨소리 사이로 작게 새어 나간 내 목소리를 그들도 들은 것 같았다. 곧 경악 어린 시선들이 내게로 쏟아졌다.

“뭐야……! 어떻게 1황녀가 우리 정체를……!”

아, 역시 그렇구나. 지금 나를 납치한 녀석들은 옛 마법 왕국의 재건을 노리는 자들이 분명했다.

오래전부터 유디트의 모계 혈족을 찾아 헤매고 있던 고대 마법 왕국의 후예들. 그리고 후에 유디트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그녀의 조력자들.

하지만 이상한 부분들이 있었다. 일단 내 귀에 가장 또렷이 박혀 든 건…….

“일단 밖에 균열 때문에 난리 나서 그쪽이 어느 정도 잠잠해질 때까지 다른 데는 신경 쓰지 못할 거야. 그래도 여차하면…… 그냥 하나 더 열어 버리면 그만이야.”

분명 저 말의 끝에 어떤 여자가 ‘하나 더 열어 버린다’고 했다. 왠지 맥락상 그건 균열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럼 설마 저들이 마음대로 균열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얘기인가?

‘그런 이야기는 꿈속의 책에서도 본 적 없는데…….’

그러나 성치 않은 몸으로 머리를 오래 굴려서 그런지, 열이 더 심하게 치솟기 시작해서 생각을 오래 이어갈 수는 없었다. 눈두덩이 걷잡을 수 없이 무거워지며 머리가 몽롱해졌다.

결국 가열된 숨을 내뱉으며 또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아득해지는 의식 너머로, 희미하지만 익숙한 기운이 조금씩 나한테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

하늘에 열린 균열에서 보라색 덩어리들이 쏟아졌다. 마법사와 기사들이 소집되었으나 상황은 금방 타진되지 않았다.

이번 균열은 지금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열린 구멍에서 아직도 괴물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황궁 안에서는 다른 문제로도 정신이 없었다. 3황자 밀리엄이 아르벨라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차 탈취범들과 함께 사라졌노라고 횡설수설 고한 말 때문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 말을 듣고도 아르벨라를 걱정하지 않았다. 밀리엄의 말대로 아르벨라가 그들을 습격한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다면, 당연히 그들을 일망타진해 올 생각이기 때문일 터였다. 하여 아르벨라를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빨리 돌아와서 사태를 해결해야 할 사람이 지금 어디에서 이렇게 오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냐는 불만 어린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래도 부모는 부모인지, 황제와 황후의 안색은 어두웠다. 그 외에는 아르벨라를 좋아하는 유디트와 밀리엄, 그리고 클로에와 라미엘 남매의 표정만 좋지 않았다.

“어머니. 혹시 아르벨라의 일, 어머니나 외숙부가 하신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그리고 라미엘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한 채로 2황비 카타리나를 찾아갔다.

“이번 납치 사건이요. 혹시 사주한 게 어머니나 외숙부냐고요.”

“조용히 하지 못해? 어디서 큰일 날 소리를 함부로 해!”

카타리나가 깜짝 놀라서 살짝 열려 있던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혹여나 라미엘의 말을 들은 사람이 있을까 봐 우려되는 듯했다.

“어머니, 제가 아르벨라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라미엘은 카타리나가 그러거나 말거나,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힐책했다.

“보통 계집애가 아니라, 섣불리 건드리면 괜히 귀찮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을 텐데요. 아르벨라는 제가 기회를 봐서 알아서 하겠다고 했죠?”

라미엘은 오늘 아르벨라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기분이 아주 저조하고 불쾌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도 아르벨라의 시녀에게 이상한 짓을 하시고, 지금까지는 제 말대로 가만히 계시다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뭐? 그 시녀의 일을 네가 어떻게…….”

라미엘의 말에 카타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설마 라미엘이 얼마 전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서의 일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듯했다.

카타리나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다시 침착해진 얼굴로 라미엘을 보며 말했다.

“아르벨라를 건드린 건 내가 아니다.”

“진짜예요?”

“그래. 그리고 내가 알기로, 네 외숙부도 아닐 거야.”

물론 뒷말에는 살짝 확신이 덜했지만, 어쨌든 카타리나는 라미엘의 의심을 일축시켰다.

“그 시녀의 일은…… 알고 보니 그 마리나라는 아이, 전에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더구나. 그래서 그저 묶어 둔 암시를 깨 두었을 뿐이야. 조만간 쓸 데가 있을 것 같아서.”

덧붙여진 카타리나의 설명에 라미엘이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어머니가 그 시녀한테 사용하려고 하시는 방법이 뭔지나 제대로 알고 그러시는 거예요?”

이번에는 카타리나도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구는구나. 혹시 덜미를 잡힐까 우려되어서 그러는 것이냐? 그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마라.”

그녀는 라미엘을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마디, 한마디를 더할수록 라미엘의 얼굴은 형언하기 어려운 빛을 띤 채 일그러졌다.

“라미엘, 네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다. 어차피 다음 황위에 앉게 되는 건 너일 테니, 너무 염려 말고…….”

“어머니는 제가 걱정하는 게 그런 건 줄 아세요? 그까짓 황위 따위, 누가……!”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지잉!

바로 그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의 올가미가 라미엘의 목을 조였다. 라미엘이 ‘허억!’ 숨을 들이마시며 휘청거렸다.

“라, 라미엘!”

카타리나가 바닥에 몸을 접고 쓰러진 라미엘을 보고 놀라서 달려갔다. 라미엘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겠는지, 손으로 목을 긁으면서 헐떡이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이 그새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카타리나는 문득 라미엘이 어릴 때도 종종 이런 식으로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던 것을 떠올렸다.

“설마 어릴 때 병이 또 도진 것이야? 거기 누구 없느냐……!”

다른 사람을 불러오려는 듯, 서둘러 몸을 일으키던 카타리나의 팔을 라미엘의 손이 붙잡았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네가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다행히 그새 발작이 가라앉았는지, 라미엘이 비틀거리면서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식은땀에 젖은 라미엘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아무튼, 어머니……. 외숙부가 공들이는 일이 있는 듯하니, 일단 어머니는 끼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고.”

“라미엘……!”

카타리나의 부름을 뒤로한 채 라미엘은 그녀의 방에서 빠져나갔다.

*

“젠장…….”

1황자궁으로 돌아온 라미엘은 따끔거리는 목을 긁으며 비틀거리다가 방까지 가지도 못하고 복도에서 쓰러졌다. 조금 전 주위를 모두 물렸기에, 그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라미엘의 그림자에서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빠져나온 검은 뱀들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것들은 지금도 라미엘의 목을 옭아매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올가미를 갉아먹듯이 날카로운 독니를 번뜩이며 움직였다.

방금 라미엘이 카타리나의 앞에서 발작하듯이 쓰러진 건, 그녀의 생각대로 어릴 때의 병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라미엘은 병에 걸렸던 적 자체가 없었다.

이것은 아주 어릴 때 외숙부인 그레이엄 후작이 조카인 라미엘과 클로에에게 박아 둔 저주이자 금기된 마법이었다.

이것 때문에 지금도 그들은 말과 행동 모두에 제약이 걸려, 그레이엄 후작에게 불리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 조금 남았어. 진짜 조금.’

어느새 방 밖으로 나온 흰 뱀이 라미엘의 앞으로 기어와 쉭쉭거렸다. 라미엘은 그에게 달라붙는 뱀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또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움직였다.

*

제라드는 아르벨라의 기운을 쫓다가 멈춰 섰다. 붉게 찢어진 하늘 밑으로 벽처럼 높이 솟은 검은 나무들이 보였다. 익숙한 기운이 손에 잡힐 때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결계에 가로막혀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렇게 여러 겹으로 중첩된 결계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건 제라드가 제대로 맞게 찾아왔다는 의미였다.

다행히 아르벨라는 아직 카뮬리타 제도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르벨라가 있는 곳이면 좀 더 시끄러울 줄 알았던 제라드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일단 뒤에 있는 롬벨과 다른 황궁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마음 같아서야 눈앞의 결계를 바로 돌파하고 싶었지만, ‘아르벨라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중하라’는 롬벨의 말을 떠올리며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눌렀다. 3황자 밀리엄을 보자마자 아르벨라의 자취를 쫓아 바로 황성을 뛰쳐나가려 하던 제라드를 붙잡은 것도 롬벨이었다.

그리고 황제 역시 롬벨과 비슷한 이유를 들어 최대한 조용히 아르벨라를 찾을 것을 명령했다.

“모두 알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1황녀를 찾기 위해 인원을 많이 투입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히 1황녀의 종속 기사가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하니, 최대한 은밀히 움직여라.”

제라드는 탐탁지 않았으나 그래도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는 다른 황궁 기사들과 함께 아르벨라를 찾는 것이 효율적일 듯해 그 말을 따랐다.

‘그런데 어째서지……. 이렇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쩌면 황궁을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황제의 표정 때문일 수도 있었다. 평소에 1황녀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던 그가, 어째서인지 이번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척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는 3황자 밀리엄에게 사건 당시의 설명을 들을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제라드는 눈앞에 있는 결계에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지금 저 너머의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지금 저곳에 아르벨라가 있었다.

*

방금 익숙한 기운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제라드인가.’

종속 각인 때문에 내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테니, 그가 이렇게 빨리 온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까 의식을 잃은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잠깐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머릿속이 깜깜해지는 걸 반복했다. 그러면서 얼추 상황을 파악한 결과, 나를 납치한 자들은 내 처우를 두고 다투는 중인 듯했다. 그들이 몇 번인가 나를 깨우려고 소란을 피우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가 제대로 정신을 차린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아직도 후끈거리는 몸으로 천천히 마력을 움직여 봤다. 속에 고인 굳은 마력을 아주 살짝만 유동시켰을 뿐인데도, 여전히 심장에 찌릿한 통증이 가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상태가 나아진 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한 번 정도는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건 최소한의 출력으로 마력을 움직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 나를 결박하고 있는 마력 사슬만 깬다고 바로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섣불리 시도했다가는 오히려 가만히 있으니만 못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덜컹, 끼이익…….

그때, 내가 갇힌 곳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깨어나셨군요, 1황녀님.”

안으로 들어온 건 눈에 익은 연두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 밀리엄의 시녀인 미레이유였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지금 너무 태연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건네는데, 하이어스 영애.”

이미 그녀가 이 일에 관련되어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 버젓이 내 눈앞에 얼굴을 내민 미레이유의 뻔뻔함은 좀 감탄스러웠다.

“아니지. 사실은 하이어스 영애도 아니신가?”

눈앞에 있는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미레이유는 나와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 듯했다.

“1황녀님이 어떻게 솔렘 왕국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더 이야기할 시간이 없네요.”

그 말처럼, 미레이유는 묘하게 서두르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몸 위에 덮어줬던 걸레짝 같은 천 조각을 걷어갔다.

“그래도 기뻐하세요. 1황녀님을 황성에 다시 고이 돌려보내드리기로 결정했으니.”

그런 뒤 그녀가 바닥에 누운 나와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다만 오늘 일은 모두 잊어 주셔야겠어요. 다음에 다시 뵐 때는 황궁이겠군요.”

또 특이한 마법식이 미레이유의 손에서 그려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나는 의아함에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지금 뭘 한 거지?’

미레이유가 마법을 사용한 건 확실한데, 아무 효과가 없어서 영 아리송했다.

‘방금 내 기억을 건드리는 마법을 사용하려 한 거 아닌가?’

물론 눈앞에 마법식이 떠오르는 걸 보고 나도 급히 마력을 움직여 방어하긴 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완벽하게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오히려 미레이유의 마력을 담은 마법식이 내 몸으로 흡수된 순간, 열 때문에 멍하던 머리가 살짝 맑아지는 느낌만 들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효과가 있는 척하자.’

이유가 뭐든 간에 이들은 나를 황궁으로 돌려보낼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마법이 통하는 것처럼 보여야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는 모습을 어느 정도로 흉내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척했다. 다행히 아직도 몸에서 열이 끓고 있는 상황이라, 미레이유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마법이 제대로 들어먹었다고 생각하는지, 그녀는 내 상태를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바로 부스럭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정말 서둘러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인 듯했다.

그런데 이 여자, 조금 전에 한 말을 들어 보니 또 아무렇지 않게 황궁에 들어갈 생각인가 본데.

지금도 낯선 정신계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 걸 보면, 어쩌면 어머니나 밀리엄에게도 이미 비슷한 짓을 했을지도 몰랐다. 어쩐지 의심 많고 까탈스러운 우리 황후 전하께서 처음 보는 젊은 영애를 지나치게 신임하며 옆에 둔다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건가?

물론 그동안 두 사람에게 마법적 흔적을 느낀 적은 없었으나, 애초에 이들이 사용하는 마법식조차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설령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리 다 끝났어? 1황녀 일은 처리했고?”

그때 누군가 방으로 들어와서 미레이유와 대화를 시작했다.

“그래, 우리 얼굴은 물론이고 여기서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역시 라칸이 너무 섣부르게 움직였어. 왕녀님의 마력 각성 소식을 듣고 조급해져서는 괜히 너만 닦달하고. 어차피 앞으로 더 좋은 기회가 있을 텐데…….”

“됐어, 지금 그런 얘기해서 뭐 해. 그 자식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정리하고 가자.”

속닥거리던 두 사람이 방에서 빠져나갔다. 나를 결박한 마력 사슬을 그대로 놔둔 걸 보면 완전히 떠난 건 아닌 것 같았고, 잠깐 다른 볼일을 보러 자리를 비운 듯했다.

나는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를 통해 알고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원래 유디트와 이 솔렘 왕국 사람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건 유디트가 황제의 인정을 받아 공식적인 외부 활동을 시작한 이후였다. 게다가 유디트와 처음 접촉을 시도한 방식도 온건하고 은밀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이 하는 짓을 보고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 원래도 이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유디트를 손에 넣으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러고 나서 지금처럼 기억을 조작해서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다든가.’

그래도 나를 그냥 순순히 돌려보내겠다니, 솔렘 왕국 사람들의 성향만큼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비슷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금방 철회해야 했다.

쾅!

“인질을 여기 숨겨 놨었군.”

미레이유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있던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 때문이었다.

“라, 라칸 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카뮬리타의 1황녀는 돌려보내기로 결정…….”

“이 멍청한 자식들이. 기껏 손에 들어온 카뮬리타의 1황녀를 왜 그냥 보내? 그냥 4황녀님을 돌려받기 위한 거래 조건으로 써먹으면 되잖아.”

남자의 거친 음성과 발소리가 내 쪽으로 거침없이 다가왔다. 귀에 함께 들어온 이름이 익숙했다. 납치범들의 입에서 아까부터 한 번씩 오르내리던 이름이니 당연했다.

“뭐야, 그런데 왜 이렇게 비실거려? 뭐 잘못 먹였어?”

“그게…… 처음 봤을 때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어요.”

앞에서 나를 뜯어 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카뮬리타의 1황녀가 유명하다더니 생각보다 별것 없어 보이는데. 역시 카뮬리타 황실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유명세 아니야?”

왠지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더러워지는 목소리였다. 단번에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나한테 명백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내 육감이 이 상황의 위험성을 나한테 경고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채 마력을 다시 점검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 회복 속도가 현저히 빨랐다. 오히려 방금 미레이유에게 대응해 마법을 사용하기 전보다 운용할 수 있는 마력량이 늘어난 것 같았다.

그때, 억센 손아귀에 멱살이 잡혀 상반신이 들어 올려졌다.

“어이, 일어나.”

철썩!

처음에는 내가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바로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뺨에 얼얼한 느낌이 돌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라, 라칸 님!”

“정신이 들었나 보군. 팔자 좋게 늘어져 있고 말이야.”

눈을 뜨자 비열한 인상을 한 갈색 머리 남자가 시야에 비쳤다.

혀끝에 비린 맛이 도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입 안이 찢어진 것 같았다. 단순히 내 정신을 차리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악감정을 품고 정말 있는 힘껏 뺨을 내려친 게 분명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일이라 그런지, 처음에는 오히려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인질이면 인질다운 대우를 해 줘야지. 기껏 써먹을 만한 패가 손에 들어왔는데 미련한 것들이 이걸 그냥 놔주려고 해?”

라칸이라 불린 남자에게 뺨을 한 대 더 맞고 나서야 가뜩이나 뜨겁던 속에서 더욱 홧홧한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웃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야, 너 지금 영상 마력석 가져와.”

“뭐, 뭘 하시려고요?”

“소문은 거품인 듯하지만 어쨌거나 카뮬리타의 1황녀인 건 사실이니, 몇 대 때리는 것 좀 마력석에 담아서 보여 주면 거래할 마음이 생기겠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야, 너희 지금 여기서 뭐…… 이 미친 새끼야! 내가 1황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뒤늦게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내 몸을 결박하고 있던 마력 사슬도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건방지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아무것도 없잖아!”

“어떻게 된 거지? 혹시 그새 장소를 이동했나?”

마침내 결계를 해제했을 때, 제라드와 다른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무들만 울창하게 자라 있는 빈 공터였다.

그들이 찾고 있던 1황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라드는 아무것도 없는 숲 한가운데를 응시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으나, 제라드는 바로 앞에 있는 아르벨라의 존재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의 것이 아닌 감정으로 가슴이 아주 뜨겁기까지 했다. 이것은 분명 아르벨라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것도 제라드의 속마저 전부 불태워 버릴 듯한, 아주 맹렬한 분노였다.

한순간, 제라드의 시야에 비친 허공에 아주 작은 실금 같은 선이 보였다. 그 사이로 익숙한 황금빛이 반짝였다.

그것을 목격한 은회색 눈에 날카로운 광채가 스쳤다.

“다들 비켜.”

곧 제라드의 손에서 검푸른 빛이 일렁였다. 그는 검에 마력을 입혀, 조금 전 발견한 허공의 극점을 향해 세게 휘둘렀다.

카가강!

공간의 작은 틈새를 날카롭게 벤 순간, 꼭 모서리를 찍힌 거울처럼 눈앞의 풍경이 산산이 쪼개져 흩어졌다.

제라드는 그 벌어진 틈으로 주저 없이 몸을 들였다. 하지만 결계는 제라드를 안으로 들이자마자 금방 다시 복구되어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뒤에서 아우성치며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제라드는 무시하고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제라드의 두 눈에 들어온 장면은…….

“뭐 하니? 웃어.”

폭풍이라도 다녀간 것처럼 여기저기가 부서진 창고 건물 같은 곳에서 아르벨라가 어떤 남자의 머리채를 잡은 채 인정사정없이 뺨을 후려치고 있는 광경이었다.

“영상 마력석 찍고 싶다며? 그래서 내가 지금 네 버러지 같은 모습을 마력석에 담아 주고 있잖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르벨라에게 붙잡힌 남자의 몰골은 처참했다. 꼭 이곳에만 거대한 재해가 일어나기라도 한 듯이 주변 경관도 전부 엉망이었다.

사방에 가득 흩뿌려져 공기 중에 녹아든 짙은 마력에 살이 다 따끔거렸다.

“아, 왔어?”

아르벨라도 제라드의 기척을 느낀 듯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귀에 날아든 목소리가 태풍의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더없이 나긋하고 여유로웠다.

그 모습만 보면, 지금 그녀의 손에 들린 게 얼굴이 다 터진 채 축 늘어진 남자가 아니라 인형이나 장식물인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듯했다.

“마침 딱 적당한 때 도착했구나.”

아르벨라의 말이 끝난 순간, 바로 머리 위에서 붉은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또 다른 균열이 열릴 징조였다.

현재 하늘에는 먼저 열린 균열조차 아직 닫히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동시에 두 개의 균열이 생기다니,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라드가 굳은 듯이 서서 두 눈에 담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얼굴이 왜…….”

“얘 말이야? 방금 못 봤어? 내가 살짝 만져 줬지.”

“아니, 그놈 말고.”

“얘 말고 누구…… 아아.”

제라드의 말에 아르벨라가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이 낮은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조금 전에 남자의 뺨을 후려쳤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뒤늦게 통증이 느껴졌는지, 부은 뺨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아르벨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며 마력을 움직였다.

“너 정말 딱 맞춰 왔구나. 하마터면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면 안 될 꼴을 보일 뻔했네.”

빨갛게 부은 뺨과 찢어져서 피가 맺힌 입술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뿐만 아니라, 바닥이라도 구른 것처럼 잔뜩 구겨지고 더러워져 있던 옷도 처음처럼 말끔하게 변했다.

제라드는 아르벨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마력을 움직여, 엉망이던 자신의 몰골을 먼지 하나 앉지 않은 깨끗한 모습으로 되돌리는 광경을 눈 한번 깜빡이지도 못한 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으나, 그런 아르벨라의 모습이 굉장히…… 괴이하고 위태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라드는 결계를 깨고 들어와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지금 아르벨라의 손에 머리채가 잡혀 있는 남자가 설마 그녀를 그런 꼴로 만든 거냐고. 하지만 곧 아르벨라의 자존심 강한 성격을 떠올리고는 목 끝까지 치민 목소리를 겨우 다시 짓눌러 삼켰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아예 모른 척 입을 다물기에는 지금 속에서 들끓는 자신의 감정이나, 지금 시야에 비친 아르벨라의 모습이 너무…….

“얘, 제라드. 나 말이야. 지금 기분이 아주 나쁜데 아주 좋아.”

아르벨라는 여전히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한심할 정도로 안일하게 살았었는지 이번 기회에 깨달았거든.”

허공에 떠 있던 영상 마력석이 아르벨라의 손으로 내려앉았다. 아르벨라답지 않은 자학적인 말에 제라드는 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조금 전보다 한결 더 알 수가 없어졌다.

“게다가 마리나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반박할 수도 있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어울리지도 않게 착하게 살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것도 어중간해서는…….”

아르벨라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생각하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착할 거면 제대로 착하든가, 아니면 그냥 다 때려치우고 제대로 못되게 굴든가, 이도 저도 아니고 짜증 나게.”

그렇게 덧붙이며 아르벨라가 그때까지도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있던 남자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내렸다.

“그래도 지금은 속이 개운해. 꼭 찬물 맞고 정신 차린 기분이야.”

감히 아르벨라에게 건방진 소리를 지껄인 데 이어 더러운 손을 대기까지 한 남자는 이미 기절해서 움직임이 없었다. 아르벨라로서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지.”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르벨라는 고개를 들어 붉게 찢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르벨라의 인내심이 끊어져 폭주하는 동안, 솔렘 왕국 사람들이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열어젖힌 두 번째 균열이었다.

“제라드, 너도 따라와. 일단 저것부터 해결하고 가자.”

제라드는 검에 마력을 둘렀다.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에게는 아르벨라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

“1황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세드릭 황제는 황궁으로 돌아온 아르벨라를 보고 언성을 높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감히 황족을 납치하고 시해하려 한 죄인을 붙잡아 왔습니다, 폐하.”

아르벨라는 태연한 낯으로 황제의 앞에 포박해 온 남자를 던져 놓았다. 죄인은 이미 누군가에게 성의 있게 다져져 곤죽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남자의 몰골을 보고, 알현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몸을 움찔 떨었다. 아르벨라는 그들을 향해 태연히 덧붙였다.

“마침 죄인을 붙잡으러 간 곳에 균열이 열려 겸사겸사 그것도 처리하고 왔고요.”

그에 대해서는 이미 세드릭 황제도 보고받은 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선 아르벨라를 조용히 훑어보았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던 게냐?”

아르벨라는 세드릭 황제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확인하려 하는지 쉽게 알아차렸다. 황제와 똑같은 그녀의 연청색 눈에 싸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기야 밀리엄에게 들은 말이 있을 테니, 아르벨라의 상태가 정말 멀쩡한지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몸의 회복이 빨라서, 황제는 그녀에게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또 왔던 게 맞는지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그럼요. 다만 생각보다 죄인의 발이 쥐새끼처럼 빨라서 잡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공교롭게도 균열까지 열린 탓에 아쉽게도 다른 잔당들은 놓쳤지만요.”

아르벨라는 그 납치범들 때문에 균열이 열린 것이란 사실은 지금 굳이 황제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보란 듯이 마력을 이용해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을 깨웠다. 벌레처럼 몸을 작게 꿈틀거리던 남자가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그걸 보니, 이제 완전히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으, 끄읍!”

하지만 온몸이 마력 사슬로 묶인 데다 금언 마법까지 걸려 있어, 그는 이렇다 할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몸만 버둥거렸다.

“감히 이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런 간 큰 짓을 벌이다니.”

세드릭 황제가 감히 황족을 납치하려 한 죄인에게 살벌한 시선을 보냈다.

“주제도 모르는 벌레 같은 것들. 남은 잔당도 전부 찾아내서 반드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제가 오는 길에 미리 심문해 봤는데 입이 제법 무거운 자더군요. 그래서 아무래도 쉽게 정체를 캐내기 힘들 것 같은데…….”

아르벨라도 차가운 눈으로 바닥에서 펄떡거리는 남자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고문실로 보내 최대한 높은 단계의 조치를 취해야 입을 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바마마.”

남자의 벌건 눈이 아르벨라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아르벨라는 남자를 비웃듯이 입술 끝을 들어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아르벨라는 이번 납치 사건의 주모자들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밝힐 기회는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특별히 먼저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한 과정에서 그에게 주어질 정신적, 육체적 고통 또한 아르벨라가 주는 상냥한 선물이었다.

그것을 이기지 못해 남자가 진실을 실토하면 실토하는 대로, 끝까지 침묵하면 침묵하는 대로 아르벨라에게는 나쁠 게 없었다. 동료들과 제 목숨을 저울에 올려놓고 갈팡질팡 갈등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여흥이 될 테니.

“벨라 누나!”

“언니!”

그때 알현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두 명의 소년 소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밀리엄과 유디트였다. 그들은 아르벨라가 황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달려온 듯했다.

그래도 평소에는 꽤 예의가 바른 아이들인데, 두 사람은 허락도 없이 알현실에 들이닥친 것으로도 모자라 상석에 앉은 황제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본체만체했다. 그들은 곧바로 아르벨라를 향해 들판 위의 양 떼처럼 달려들었다.

“누나아아아아! 으아아아앙……!”

밀리엄이 가장 먼저 울음을 팡 터트리며 아르벨라를 덥석 끌어안았다.

“무,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언니.”

그다음으로 매달리다시피 아르벨라의 팔을 붙든 유디트 역시 울먹울먹한 얼굴이었다.

“걱정했어요. 제, 제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언니가 휘말리신 것 같아서…….”

아르벨라 혼자 두고 마차 안에서 이동된 밀리엄이나, 밀리엄과의 약속에 아르벨라를 대신 보낸 유디트나, 둘 다 납치범과 함께 사라진 그녀를 많이 걱정했던 듯했다.

“둘 다 괜한 걱정을 했구나. 밀리엄에게 말했듯이 죄인을 잡아 오느라 늦은 것뿐이야.”

“누나는, 으흡, 흑, 바보야……! 그냥 나랑 같이 가자니까! 그, 그렇게 나만 보내면, 내가…… 내가 얼마나…… 으으허어엉!”

마차 안에서의 일을 생각하자 또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밀리엄이 한결 크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아비라도 죽은 줄 알겠구나, 3황자.”

아까부터 자식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던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 못마땅한 듯이 읊조렸다. 밀리엄과 유디트는 그런 황제를 또 무시했다.

“저놈은 사형이야, 사형! 감히 나와 누나를 납치하려 하다니, 백번 죽어도 모자라!”

밀리엄이 아르벨라가 잡아 온 남자를 먼저 발견하고 울면서 씩씩거렸다. 유디트도 밀리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곤죽이 된 남자를 보고 몸을 움찔 떨었다.

“저 사람이에요? 3황자님을 납치하려고 한 게.”

유디트는 이번 사건의 목표물이 밀리엄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아르벨라는 그것을 정정해 주는 대신, 두 사람을 따라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에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솔렘 왕국의 후예를 간절히 찾던 무리 중 한 명인 그는 아까부터 유디트에게 핏발 선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유디트를 보는 눈빛이 참으로 집요하고 절절하기도 했다.

아르벨라는 그 웃기지도 않은 모습을 구경하듯이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맞아, 아주 흉악한 놈이지. 마지막까지 얼마나 끈질기게 저항하던지, 나도 모르게 거친 방법을 사용해 버렸지 뭐야.”

그러다 그녀의 목소리가 꼭 누군가에게 들으란 듯이 묘한 어투로 내리깔렸다.

“그래도 저 꼴을 보니 조금 심했나 싶기도 하고……. 생각보다 흉악한 수법을 쓰기에 놀라서 그랬는데, 그래도 좀 봐줄 걸 그랬나?”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르벨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디트가 고개를 격렬히 저었다.

“혹시라도 사정을 봐주다가 언니가 조금이라도 위험해지시는 것보다 훨씬 나은걸요. 그리고 저런 나쁜 사람은 걱정해 줄 필요 없어요.”

유디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하며 남자에게 냉정한 눈빛을 보냈다. 만약 그가 아르벨라에게 손을 댄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무섭게 분노하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것 같은 매몰찬 분위기였다.

그것을 느낀 남자의 눈이 당혹스럽게 흔들렸다. 그는 변명하고 싶은 듯이 ‘읍! 읍!’ 소리를 내면서 유디트를 향해 기어가려는 것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유디트는 흠칫 하며 오히려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고 아르벨라는 하마터면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 웃을 뻔했다.

“아까부터 시끄럽군. 아무래도 빨리 취조실에 가서 입을 열고 싶은 모양인데. 여봐라! 당장 저놈을 끌고 가라!”

바닥에 엎어져 버둥거리는 죄인이 거슬린 듯, 황제가 명령했다. 결국 남자는 유디트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붙여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붙들려 강제로 알현실에서 끌려 나가야 했다.

쾅!

“벨라 언니……!”

“억!”

바로 그때, 누군가가 조금 전의 유디트와 밀리엄처럼 큰 소리로 아르벨라를 부르며 알현실의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왔다. 마침 그 앞에 있다가 문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남자가 단말마를 내지른 뒤 기절했다. 알현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소녀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이 우렁차게 외쳤다.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진짜였구나! 바깥의 균열도 단번에 해결하고 밀리엄 납치 미수범도 잡아 왔다며?”

마찬가지로 아르벨라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2황녀 클로에였다. 세드릭 황제는 정숙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어수선한 알현실의 분위기에 골치가 아픈 듯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1황녀, 일단 지금은 돌아가서 쉬어라. 곧 다시 부르겠다. 다른 황자, 황녀들도 같이 데리고 나가도록.”

세드릭 황제는 일단 복작거리는 자식들을 한꺼번에 눈앞에서 치워 버렸다.

*

“1황녀.”

알현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이번에는 샤렐 황후가 나타났다.

“어마마마!”

밀리엄이 가장 먼저 거기에 반응했다. 유디트가 잠깐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다가 클로에를 데리고 먼저 자리를 비켰다. 클로에는 이게 무슨 짓이냐며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의외로 유디트는 힘이 셌다. 그래서 결국 ‘앗’ 하는 사이에 유디트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샤렐 황후는 여느 때처럼 냉연한 얼굴을 한 채 아르벨라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차례 먼저 훑어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히 황족 납치를 사주한 범인을 잡아 왔다니 잘했구나.”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건 밀리엄을 금쪽같이 아끼는 샤렐 황후라면 으레 할 법한 평소 같은 말이었다.

“특히 어린 3황자를 먼저 황궁으로 돌려보낸 것은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3황자도 위험해질 수 있었으니.”

아르벨라는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싶어 눈가를 설핏 찌푸렸다.

“그러니 오늘 일은 잘했…….”

그러나 어째서인지 샤렐 황후는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이 이어지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아르벨라와 밀리엄이 동시에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아르벨라를 기다리며 알현실 문 앞에 서 있던 제라드도 슬쩍 시선을 들어 눈앞에 있는 황족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것을 의식한 듯이 샤렐 황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누이다운 의젓한 행동이었…….”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번에도 멈춰졌다.

아르벨라는 시야에 비친 샤렐 황후의 얼굴이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왠지 지금 그녀는 꼭 화가 난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지금 막 본인의 입으로 꺼낸 말처럼 아르벨라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혼내고 싶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뭐지? 수행원도 최소한만 데리고 나가서 밀리엄까지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혼내고 싶은 건가?’

그러나 샤렐 황후는 결국 아르벨라의 의문을 풀어 주지 않고, 성난 눈으로 딸을 보다가 아무 말도 없이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홱 돌아섰다. 아르벨라는 황당함과 의혹이 짙게 밴 눈으로 멀어지는 샤렐 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나, 어마마마도 누나 걱정 많이 하셨어. 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청 많이 혼났고…….”

그런 아르벨라에게 밀리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마마마가 네 시녀인 하이어스 영애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어?”

“응? 갑자기 내 시녀는 왜? 별 얘기는 안 하셨는데?”

밀리엄이 아르벨라의 질문에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것을 보고 아르벨라는 다시 한번 확신을 얻었다.

몇 년 전 사냥제 때 샤렐 황후는 갑자기 출몰한 마법 생물에게서 밀리엄을 지켜내지 못한 유모 맥노아 백작 부인을 두 번 다시 궁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었다. 한데 밀리엄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험하게 만든 미레이유를 그냥 놔두다니.

아르벨라가 알고 있는 샤렐 황후의 성정이라면 당장 미레이유를 찾아내 벌을 내리려 해도 모자랐을 것이다. 또 아직 어리긴 하나 황궁 법도에 밝은 밀리엄 역시 미레이유에게 이번 일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하여 그날 밤.

“본인은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미레이유 하이어스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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