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체불명의 균열은 나중에 점점 커져, 얼마 후에는 저 안에서 기이한 괴물까지 튀어나오게 된다.
괴물이 나오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균열이 저절로 닫힌다고 책에 적혀 있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한번 그러고 끝인 게 아니라 얼마 후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고 또 생기고…….
‘시간이 흐를수록 균열의 크기도 점점 커지고 거기에서 나오는 괴물의 수도 많아졌다고 했지, 아마?’
급기야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 이야기의 막바지에는 결국 하늘 전체가 덮일 정도의 균열이 나타나 거대한 재앙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래서 세계가 위태로워지지만, 뛰어난 마법사인 여주인공 유디트가 놀라운 힘으로 균열을 닫으면서 세상은 다시 평화로워진다.
결국 유디트는 영웅이 되어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이미 병증에 의한 마력 소실로 약해진 나는 뒷전으로 물러나 굴욕감에 휩싸인 채 그 모습을 핏발 선 눈으로 지켜보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미래의 내가 금단술에 손을 대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최후의 균열이 나타나기 전에 발생한 다른 자잘한 균열들은 카뮬리타에 특별한 위협이 되지 않는 것 같던데…….’
책에서 본 유디트의 일상도 저 균열에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진 않았고 말이다.
그냥 여주인공 유디트가 이렇게 대단하다! 우리 유디트가 이 소설에서 이렇게 최고 세다! 이런 걸 드러내기 위한 배경 설정이자 장치일 뿐일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나도 저 괴상한 현상을 보고도 큰 긴장감이 생기지 않았다.
‘흐음, 그런데 막상 직접 보니 뭔가 느낌이 좀…… 이상한데?’
하늘의 균열을 보다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저기에서 풍겨져 나오는 마력 파장이 낯설지가 않았다.
‘저런 느낌을 어디서 내가 또 경험해 봤더라?’
아, 그러고 보니 그 꿈속의 공간. 내가 본 세계의 이면하고 왠지 느낌이 비슷한 것 같기도…….
“이런, 귀한 분들께서 저희 영지의 일을 해결해 주시러 오셨군요.”
내 귀에 뱀처럼 차갑고 미끄덩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1황녀님. 그리고 조카님.”
“외숙부.”
“라미엘 황자님. 조카님이 이렇게 직접 와 주다니 든든하군요.”
나는 무심코 얼굴을 구겼다.
‘아, 대충 좌표만 보고 위치를 찍어서 몰랐는데 여기가 그레이엄 후작 영지였어?’
재수가 없으려니까.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
아무리 제 어머니의 명이라고는 하나 라미엘이 이렇게 직접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기에 온 이유가 이제야 완전히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게으르긴 해도 담이 작지는 않은 녀석이 아까부터 은근히 긴장한 것처럼 계속 얼굴을 굳히고 있었던 이유도.
나는 그레이엄 후작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나저나 그레이엄 후작……. 저택에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작년에 클로에와 함께 그레이엄 후작을 만났을 때 쎄한 느낌을 받고 나도 라미엘처럼 그림자 사역마를 만들어서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레이엄 후작은 잠잠했다. 자선 행사 때 폭발 마법이 걸린 꽃다발을 나한테 보낸 사람으로 그를 의심했으나, 꼬리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 괜한 기우였나 싶었지만…….
‘내 촉이 그레이엄 후작에게 뭔가 있다고 말해 주고 있어.’
그러나 그레이엄 후작가의 보안은 철통같아서 이 나조차도 결계를 쉽게 깰 수 없었다. 사실은 그래서 더 수상했다. 그렇다고 강행 돌파하자니, 그럴 만한 명분이 아직 없었으니까.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1황녀님과 1황자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떨떠름한 인물의 출현은 그레이엄 후작에서 그치지 않았다.
넌 또 왜 갑자기 튀어나와?
“베른하르트 소공작? 여기에서 만날 줄 몰랐는데.”
오늘도 잘생긴 얼굴을 한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상 현상이 생긴 위치가 저희 베른하르트 영지와도 가까운 곳이라 확인 차 와 보았습니다.”
하기야 여기가 출입 금지 지역도 아니고, 대략의 위치만 알면 누구나 올 수 있는 장소니 킬리안이 방문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것은 그레이엄 후작만이 아니었다. 킬리안은 그레이엄 후작과는 다른 의미로 이상했다.
‘나만 보면 자꾸 실실 웃는단 말이야? 내가 웃긴가?’
“앗! 저기, 마법사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마침 잘되었군.”
세르쥬 백작의 말처럼 때마침 멀리서 로브를 펄럭이며 날아오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그래 봤자 아직은 거리가 멀어 작은 점일 뿐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마법사들을 향해 이동했다.
*
“다녀오셨어요, 황녀님?”
“그래.”
1황녀궁에 돌아오자마자 마리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어땠어요? 저 흉측한 형상은 도대체 뭐래요?”
“아직 알아보는 중이야.”
갑자기 하늘에 나타난 균열로 황궁에도 큰 소란이 일어났다.
나와 라미엘은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황제를 알현해야 했다.
황제는 크게 심각해하며 소란을 떨었고, 그 결과 조만간 부유 마법과 이동 마법, 또 탐지 마법 등이 가능한 마법사들로 조사단이 꾸려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균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겠지.
‘물론 조만간 균열에서 처음으로 괴물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괴물이든 뭐든 그냥 마법으로 죄다 쓸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사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는 균열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 도대체 저기에서 뭐가 나온다는 건지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래가 적힌 책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은 내용이니, 별 것 아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차라리 지금 당장 괴물이라도 한 마리 떨어져서 그레이엄 후작이 망해 버리면 좋겠지만.’
마침 위치도 딱 후작네 영지 위고, 아주 좋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 균열을 향해 여러 가지 마법적 테스트를 해 봤을 때도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거기에 진심으로 아쉬워할 만큼 철이 없지는 않았다. 괴물이 떨어지면 무고한 영지민들이 죽거나 다칠지도 모르는데.
“제라드는 지금 뭘 하고 있지?”
“롬벨 경과 대련 중이에요. 테스트를 통과하면 황실 기사단에 데려갈 거래요.”
오, 제법이네.
확실히 제라드는 몸을 쓰는 일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라스너 백작가에서 정식으로 검을 배운 적도 없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도 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빨랐다. 오죽하면 처음에는 슬슬 게으름을 피우며 대충 제라드를 가르치던 롬벨 경이 이렇게 진지해졌을까.
‘더군다나 내가 지시한 바도 아닌데 제라드를 황실 기사단에도 데려가 다른 기사들과 함께 훈련시키고 싶다고 말하다니.’
게다가 제라드 녀석, 요즘은 혼자서 몰래 마법도 공부 중인 것 같았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처럼 킬리안 베른하르트의 뒤를 잇는 마검사라도 될 생각인가?
“황녀님, 다음 일정 시간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아, 그래. 준비하자.”
나도 열다섯 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기에, 제라드에 대한 생각을 금방 지우고 걸음을 서둘렀다.
*
첫 균열이 하늘에 생겨나고 사흘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간밤에는 비가 내리더니, 오늘 새벽부터는 날이 맑게 갰다. 산천초목을 적셨던 빗물은 낮 동안 완전히 말라 한결 싱그러운 냄새를 풍겼다.
그런 오후에 아르벨라는 황도를 걷다가 황후 샤렐과 마주쳤다.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서늘히 내뱉는 소리에 아르벨라는 반응하지 않고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좋은 오후입니다, 황후 전하.”
황후도 그냥 평소처럼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가면 좋으련만, 오늘은 작정했는지 아르벨라에게 거리를 두고 서서 예리하게 날이 선 목소리를 재차 흘려보냈다.
“예전에는 좀 더 영특한 아이였거늘. 왜 요즘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은 전부 제 살 갉아먹기밖에 안 되는 한심한 일뿐이란 말이냐?”
아르벨라는 힐끗 시선을 들었다.
아르벨라처럼 시녀가 들어 주는 양산을 쓴 샤렐의 얼굴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아르벨라에게 꽂힌 붉은 눈만큼은 그 속에서도 시린 광채를 내며 빛나고 있었다. 샤렐 황후가 지금 아르벨라에게 이런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제라드가 황실 기사단의 연무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 때문이겠지.’
그는 롬벨 경의 테스트를 훌륭히 통과해 이제 황실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게 되었다.
샤렐 황후는 아르벨라의 큰 오점이나 마찬가지인 이단자 출신의 종속 기사가 이렇게 황궁 안을 마음대로 활보하는 것이 큰 불만인 듯했다.
“그리 보이셨나요?”
작게 떼어진 아르벨라의 입술에서 피식, 가벼운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후 전하와 제가 닮은 점이 있다면, 아마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점일 겁니다.”
샤렐은 평온하게까지 느껴지는 아르벨라의 차분한 음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눈매를 찌푸렸다.
“그럼 너는, 이런 짓거리가 정말 네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천한 것들만 골라서 네 옆에 두는 게?”
아르벨라의 입에서 좀 더 노골적인 실소가 새어 나온 건 그때였다.
그녀는 잠깐 샤렐의 얼굴을 말없이 보다가 말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황후 전하께서는 정말 제게 관심이 없으신가 보군요.”
순간 부채를 쥔 샤렐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시겠다고요?”
“…….”
“그렇겠지요. 이렇듯 알고자 하지도 않으시니.”
샤렐의 입술이 작게 열렸으나 결국 그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르벨라도 이제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기에 상관없었다.
“다음 일정이 있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평안한 오후 보내십시오, 황후 전하.”
처음 보았을 때처럼 예의 바르게 인사한 아르벨라가 먼저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아르벨라가 완전히 스쳐 지나기 전, 미동 없이 서 있던 샤렐 황후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를 계속 황후 전하라고,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이냐.”
아르벨라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짤막하게 답했다.
“알면서 물으시는군요.”
*
“불면증이라도 있으십니까?”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존댓말이 귀에 울렸다.
한낮에 있던 샤렐 황후와의 소동은 작은 일로 치부될 정도로 아득히 느껴지는 밤. 아르벨라는 오늘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나서 혼자 정원의 벤치에 앉아 있을 때, 제라드가 조용히 나타났다.
“그러는 너도 늦은 밤인데 안 자고 왜 나왔어?”
아르벨라는 옆에 다가와 선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옆에 뒷짐을 지고 선 모습에서 제법 기사다운 태가 났다.
아르벨라는 속으로 호오, 하고 작게 감탄하며 제라드를 살펴봤다.
혹시 롬벨 경이 멋있게 보이는 자세부터 집중적으로 가르쳤나?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제라드의 서 있는 자세는 꽤 그럴듯했다.
“잠이 안 와서 혼자 수련이라도 할 생각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예.”
밤늦게 수련이라니 꽤나 성실하네 싶었다.
아르벨라는 잠깐 손에 턱을 괸 채 제라드의 위아래로 훑어봤다.
처음 봤을 때보다 키가 좀 더 컸나? 몸은 원래 또래보다 단련돼 있었고.
얼굴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선이 굵직한 게, 남자답게 잘생겼다.
아르벨라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저 나이의 소년들은 대개 곱상하게 자란 느낌인 반면, 제라드에게는 좀 더 정제되지 않은 날카롭고 거친 멋이 있었다. 그러니 제라드가 만약 가문의 이름을 걸고 사교계에 나갔다면 영애들 사이에서도 신선함에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았다.
물론 그냥 심심해서 한번 떠올려 봤을 뿐인 의미 없는 상상이었다. 라스너 가문은 이미 이슬이 되어 사라졌고, 제라드는 다시 라스너 영식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제라드는 자신을 구석구석 뜯어보는 듯한 아르벨라의 시선이 불편한 듯했다. 하지만 아르벨라는 황녀고, 제라드는 이미 도장까지 쾅쾅 찍은 그녀의 것이었으니 그냥 당당하게 계속 쳐다봤다.
그러다 장난스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왜 정원으로 왔지? 여긴 네가 수련하는 곳과 거리도 가깝지 않은데.”
달빛을 닮은 제라드의 눈이 아르벨라에게 미끄러졌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벨라는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아하, 날 보러 왔구나?”
눈과 입술을 움직여 소리 없이 웃자 제라드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제라드는 끝까지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문 채 아르벨라를 응시했다.
선선한 바람에 쓸려 온 은목서 향기가 그들을 부드럽게 감쌌다. 마주친 시선 사이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아르벨라는 달빛을 맞으며 서 있는 제라드를 엷게 미소 띤 얼굴로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까는 잠이 안 왔는데 이제는 누우면 잠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밤이 더 깊어져서인가 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풀벌레 소리가 작게 들리는 정원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한동안 시간을 공유했다.
열다섯 살의 어느 날 밤도 그렇게 고요하고 안온하게 지나갔다.
17. 열여덟 살의 괴물 황녀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나는 열여덟 살이 되었다. 그래도 지금까지와 비교해 내 생활이 크게 바뀐 건 없었다.
여전히 나는 가끔 열병을 앓았고, 또 여전히 취미로 두 마리의 귀여운 새를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이제는 균열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괴물까지 때려잡기 시작한,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황녀님이었다.
“아르벨라, 어서 와라.”
“할머니.”
오늘은 거의 일주일 만에 외부 일정이 있었다.
은은한 약초 향이 감도는 방에 들어가자, 창가에 앉아 있던 노부인이 웃으며 나를 맞아 주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느슨히 틀어 올린 채 담요를 무릎에 덮고 안락의자에 편안히 기대앉아 있는 늙은 여인의 모습은 영락없이 노후를 즐기는 중인 평범한 노인처럼 보였다. 온갖 화초가 자라난 방의 정경 또한 푸근하고 아늑한 시골집 같았다.
하지만 노부인의 손에 들린 건 소박한 취미 거리가 아니라 황가와 공작가의 직인이 찍힌 중요한 기밀 서류였다.
내 외할머니이자 델피니움 공작가의 가주인 테레사 델피니움.
그녀는 내 어머니를 늦둥이로 낳아 지금 벌써 팔순이 넘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아직도 장성한 아들에게 가주직을 넘겨주지 않고 정계에서 현역으로 활동 중인 철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안경을 벗으며 나를 보는 그녀의 눈에는 조금 전까지 띠고 있던 날카로운 빛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할머니. 그간 무탈하셨나요?”
“그래, 염려해 준 덕분에 나야 아무 문제없었다.”
공작가를 이끄는 가주의 얼굴에서 손녀를 보는 외조모의 얼굴로 돌아온 테레사가 나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늘 오랜만에 할머니를 뵈러 델피니움 공작가에 들렀다. 외가와 친가를 포함해, 내 조부모는 대부분 일찍 타계해 이제 외조모인 테레사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가끔 따로 시간을 내 그녀에게 지금처럼 안부 인사를 하러 오곤 했다.
“이리 오련.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손녀 얼굴 좀 보자.”
나는 그녀가 손짓하는 대로 다가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주름진 손이 부드럽게 내 얼굴을 쓸었다.
“요즘 힘든 일은 없었고? 얼마 전에 또 균열이 나타났다지? 거기에서 쏟아진 괴물을 네가 처리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나는 할머니의 손에 얌전히 얼굴을 맡겼다. 좀 더 어릴 때는 어머니 대신 그녀에게 안겨서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러기엔 내가 너무 나이를 먹었다.
“한데 이렇게 머리카락이 또 반 토막이 난 걸 보니, 혹시 그 빌어먹을 괴물이 한 짓이냐?”
“아니요. 이건 제가 자른 거예요. 균열의 괴수 처리는 늘 하던 일이라 전혀 어렵지 않았어요.”
“그래? 한데 우리 손녀 얼굴이 왜 못 본 새 반쪽이 되었지?”
나는 매일 보는 얼굴이라 변한 걸 모르겠는데, 할머니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아르벨라. 늘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 한다. 마법이 편리하긴 하다만 적당히 몸을 움직여 주는 것도 필요하니 운동은 매일 꼭 하고.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점점 땀 흘리는 걸 싫어해서 문제…….”
대부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주들을 보면 그렇듯이, 그녀도 기다렸다는 듯이 나한테 이런저런 당부와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궁에서 부모에게도 거의 들을 일이 없는 소리라 그런가. 성가시다거나,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벨라.”
오히려 내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건, 나에 대한 염려 이후에 늘 덧붙여지는 할머니의 말이었다.
“샤렐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렴.”
할머니 테레사는 오늘도 내 손을 붙잡고 부탁하듯이 속삭였다.
왠지 목에 흙이 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가만히 보다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마음에 미움이 있는 건 저보다 어머니일 텐데요.”
“그렇지 않다.”
할머니는 내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자식을 미워하는 어미가 세상 어디에 있겠니.”
내 손등을 다독이는 그녀의 손은 여전히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쉽게 긍정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 아이는 생긴 것과 달리 마음이 많이 여려. 그래서 그런 거란다.”
내 외조모인 테레사는 내가 마법사의 열병에 걸린 걸 모르고 있었다. 그건 여전히 절대 외부에 유출되어선 안 될 황실의 기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지, 그녀는 최소한 내게 병이 있어 어머니가 나를 멀리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스스로 유추해낸 것 같았다.
나는 테레사를 좋아했지만 이래서 그녀에게 마음 편히 안길 수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내가 슬프고 외로울 때 어머니 대신 나를 자주 찾아와 위로해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결국 테레사는 내 할머니이기 이전에 내 어머니의 어머니였다. 그래서 이렇게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어머니를 이해하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물론 테레사가 나를 아끼고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진짜인 건 알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내가 늘 어머니 다음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진작 깨닫고 있었다.
나는 달래듯이 내 손을 다독이는 주름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요. 부모도 자식을 미워할 수 있어요.’
목 끝까지 찰랑찰랑하게 차오르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고 그냥 삼켰다.
마법사의 열병을 선고받은 이후로 8년이 흐른 지금. 어머니와 내 관계는 최악 중에 최악으로 치달아 있었다.
“……쉬세요, 할머니. 전 그만 가 봐야겠어요.”
할머니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타까움을 담은 시선이 내 뒤로 따라붙었다.
이렇게 나와 가까운 혈육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온기를 나누어도 마음은 여전히 허했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거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델피니움 공작가를 빠져나왔다.
“일찍 나오셨네요. 날씨도 좋은데 이대로 궁으로 돌아가나요?”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리나가 나를 반겼다.
“그럼 다음 일정이 있는데 바로 돌아가야지.”
“황녀님은 가끔 보면 그 나이에 벌써 일 중독자 같아요…….”
그녀는 약간의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날 보다가, 내 얄짤 없는 대답에 실망한 듯이 눈동자의 빛을 꺼뜨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궁 밖에 같이 나와서 들뜬 건 알겠는데,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바로 황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황녀님, 새로운 균열이 나타났습니다!
마차가 막 출발했을 때 내 앞에 나타난 익숙한 새 형태의 마력 덩어리 때문이었다.
-좌표는 a89, x132, k770입니다. 이번 균열은 규모가 상당히 커서 되도록 빨리 와 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1황자 라미엘의 검은 뱀 모양 그림자처럼, 마력을 떼서 신호를 보내기 위해 만든 분홍색 새가 부리를 열어 꽥꽥거렸다.
나는 기가 막혔다.
아니, 최소 한 달 동안은 새 균열 안 나타날 거라며?
“하, 역시 마도학자들 균열 예측 보고는 믿을 게 아니라니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황녀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마리나는 이제 걱정하는 기색도 없이 나를 배웅했다.
나는 분홍색 새를 손에 쥐고 마법을 사용해 방금 전달받은 좌표로 바로 이동했다.
*
카뮬리타뿐 아니라 대륙 곳곳에 원인 불명의 균열이 나타난 건 그리 역사가 길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 하늘이 열리고 얼마 후 그곳에서 기이한 생김새를 가진 괴물이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드디어 세상이 멸망하는 줄 알았다.
정체불명의 괴물들은 지옥의 악귀들처럼 날뛰었다. 카뮬리타와는 거리가 제법 떨어진 자그마한 왕국 하나가 불과 사흘 만에 지도에서 흔적조차 없이 지워지고 말았을 정도로, 균열의 괴물들은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뮬리타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 시기에는 마법사들의 존재조차 위안이 되지 않았다.
기상천외하게도 균열의 괴물은 자신을 공격하는 마력을 흡수하며 점점 강해지는 특성이 있어 마법사들조차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균열을 보고도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불길한 붉은 틈을 내며 찢어진 허공에서 괴수들이 쏟아질 때도 일말의 불안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2소대, 결계 준비!”
이제는 괴물을 상대하기 위한 전문적인 전투 부대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방식의 마법이 고안되어 괴물에게 마력을 먹힐 걱정이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저까짓 괴물 따위는 개미 눌러 죽이듯이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아군이 있었다.
“이번엔 규모가 큰 균열이라더니, 정말이네.”
“1황녀님, 오셨습니까!”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에 전투 부대 소속 기사와 마법사들이 일제히 몸을 낮췄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청실을 두른 흰 케이프가 펄럭이고, 짧은 금빛 머리칼이 흩날렸다. 이런 척박한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소녀가 결계에 갇혀 아우성치는 괴물들을 보며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나올 만큼 나온 것 같은데 도합 몇 마리 정도 돼?”
아직 열아홉 살 성인도 안 된 소녀라면 눈앞의 광경을 보고 기가 질릴 만도 하건만, 완전히 바닥을 딛고 서 전방을 주시하는 얼굴에는 심드렁한 기색마저 감돌았다.
이 소녀가 바로 균열에 마력을 흡수당하지 않는 새로운 마법식을 개발하고 또 그들을 손짓 한 번으로 섬멸해 버리는 1황녀 아르벨라였다.
전투 부대를 이끄는 세르쥬 백작이 얼른 무릎을 꿇고 방금의 질문에 답했다.
“대략 200구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점점 늘어나네. 바퀴벌레 같은 것들.”
괜한 기분 탓인지, 세월이 흐를수록 고상하던 황녀님의 말투가 살짝 친근감 있게 변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사소한 부분이었다.
약간은 따분한 듯이 긴 속눈썹을 내려 유리구슬 같은 눈을 느리게 깜빡인 소녀가 말했다.
“바로 처리하지. 결계 해제해.”
“예!”
세르쥬 백작은 명령받은 대로 재빨리 움직였다.
-캬아악!
그리고 1황녀 아르벨라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슈우우우!
곧바로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력의 원이 그려졌다.
강력한 파동에 바람이 일며 근처에 있던 모든 것이 흔들렸다. 이어서 압도적인 힘이 결계 안의 생물체들을 전부 쓸어버렸다.
-끼에엑!
꼭 물감을 넣은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아르벨라의 마력에 휩쓸린 괴물이 검보라색 잉크 같은 체액을 뿜으며 바스러졌다.
순식간에 상황이 종식되었다.
모든 결계가 해제된 뒤, 세르쥬 백작과 다른 인원들이 괴물의 사체를 처리하러 움직였다.
“1황녀님! 이번에도 고생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셔서 잠시 땀이라도 식히고 가시지요.”
“고생은 무슨. 이게 땀 흘릴 일이나 되나.”
세르쥬 백작이 아르벨라가 그냥 돌아가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아르벨라는 조금 전 괴물 200구를 혼자서 단숨에 작살낸 엄청난 일을 해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드렁한 태도였다.
“하하, 그렇지요! 1황녀님께 이런 일은 날벌레 잡는 일만도 못하지요.”
아부에 소질이 있는 세르쥬 백작은 또 얼른 아르벨라를 추켜세워 주었다.
“그래도 이왕 오셨는데 시원한 음료라도 드시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1황녀님을 위해 자리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르벨라의 반응은 미적지근했지만 세르쥬 백작이 재차 권하자 목만 축이고 갈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 설치했는지 모를 동그란 차광막 아래에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아르벨라의 기호를 파악해 준비한 허브 잎을 띄운 시원한 라임 차와 간단한 다과, 그리고 꽃까지 테이블을 장식하고 있는 모습이 상황에 맞지 않게 굉장히 평화로워 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곳에 괴물을 해치우러 온 게 아니라 피크닉이라도 온 줄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르벨라는 이 또한 익숙한 듯이 무덤덤하게 앉아 그녀를 위해 준비된 라임 차를 마셨다. 그러는 동안 세르쥬 백작은 그녀의 옆에서 열심히 비위를 맞추었다.
이렇듯 상황이 너무 금방 종결되어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지만, 처음에는 나름대로 처리 작업이 까다로웠다.
아르벨라와 마법사들이 머리를 맞대 괴수에게 마력을 흡수당하지 않는 결계 마법을 개발한 것이 관건이었다. 물론 그래도 괴수들은 방어력이 강해 쉽게 죽지 않았다. 하지만 압도적인 마력량 앞에서는 괴수들의 단단한 방어력도 무용지물이었다.
아르벨라는 새로운 마법식을 개발한 이후 괴수들이 마력을 흡수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들이 찍 소리조차 내기 전에 벌레 잡듯이 간단히 숨통을 끊어 버렸다.
‘그때부터였지. 내가 무임금 해충 박멸 전문가가 된 게…….’
아르벨라는 잠깐 자신의 어렸던 과거를 상기하며 혀를 찼다.
사람을 이렇게 무보수로 부려먹다니, 아동 노동 착취라 해도 될 일이 아닌가?
아르벨라에게 황족으로서의 자긍심과 책임감이 있지 않았다면, 또 남들 앞에서 우월해 보이고자 하는 자만심이 있지 않았다면 귀찮아서 굳이 나서지 않았을 일이었다.
아르벨라는 힐끔 멀리 있는 보라색 덩어리들을 응시했다. 말만 괴물이지, 생김새가 만들다 만 것처럼 느껴졌다.
괴물들은 딱히 흉측하거나 징그럽지도 않고, 그냥 보라색 슬라임 덩어리가 대충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미지의 생물체에 대한 두려움 탓인지 다른 사람들은 괴물의 검은 그림자만 봐도 끔찍한 것을 본 듯이 진저리를 쳤지만.
-꾸르륵…….
바닥에 깔린 보랏빛 덩어리들 사이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소리도 좀 더 포악한 ‘크르륵’이나 ‘크와악’이 아니라 뭔가 없어 보이는 ‘꾸르륵’이었다.
아르벨라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아직 숨이 붙은 놈이 있어?’
이렇게 많은 수를 한 번에 박멸한 건 처음이라 그런 듯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아르벨라답지 않은 실수였다.
“앗, 아직 간당간당하게 명줄이 붙은 놈이 있나 봅니다. 저희가 당장 처리할 테니 황녀님은 여기서 편하게 쉬고 계십시오!”
세르쥬 백작이 아르벨라의 눈치를 보더니 얼른 뛰어갔다.
아르벨라도 찻잔을 내려놓고 조금 전 괴수의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눈썹이 슬그머니 위로 치켜 올라간 걸 보니, 자신의 실수에 살짝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아니야, 혹시 아직 살아 있는 게 더 있을 수도 있으니 내가 확인을…….”
-강한…… 자여.
하지만 그 순간 괴물에게서 들려온 기이한 음성에 아르벨라는 귀를 의심하며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너는 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냐.
아주 낮고 거친, 발음이 뚜렷하지 않은 음성이었지만 분명 그건 사람의 말이었다.
한순간 소름이 돋으면서 머리꼭지로 피가 쓸려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마 지금, 저 괴물이 사람 말을 한 건가?’
그리고 이어서 귀에 꽂힌 괴물의 음성은 더 기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어째서 너는…… 동족을…….
“뭐?”
푹!
그러나 아르벨라의 눈치를 보던 세르쥬 백작이 얼른 괴물의 숨을 끊어 버려 뒷말은 듣지 못했다.
아르벨라는 황망하게 죽은 괴물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저게 뭐라고 한 거야?”
“예?”
괴수가 인간의 말을 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직접 괴물을 죽인 세르쥬 백작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기사들 모두가 어리둥절하게 아르벨라를 쳐다봤다.
“누가 황녀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만한 말을 한 겁니까? 도대체 어느 건방진 놈이! 누구냐……!”
세르쥬 백작은 자신의 부하 중 누군가가 아르벨라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기라도 한 줄 알았는지, 성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아르벨라는 입을 다물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기이한 일이었으나, 괴수가 방금 지껄인 헛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혹시 괴물이 아니라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이 한 말인가 싶었다. 순간이지만 기분 나쁘게 괴물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던 것도 그냥 착각일 수도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르벨라의 손이 한번 옆으로 대충 휘저어졌다.
바닥의 덩어리들이 다시 한번 펑펑 터졌다.
“괴수들이 모두 처리되었으면 난 그만 가 보겠어.”
아르벨라는 찝찝함을 안은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이후로도 환청인지 뭔지 모를 괴물의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하지만 곧 바쁘게 몰려드는 일정에 휩쓸려, 그 일은 자연스럽게 아르벨라에게 뒷전으로 밀려 버렸다.
*
“1황녀님, 황후 전하께서 4황녀님을 황후궁으로 부르셨습니다.”
“뭐?”
외부 일정을 마치고 황성에 돌아오자마자 달갑지 않은 소식이 들려 왔다.
장갑을 벗어 마리나에게 건네다가, 막 다가와 내 앞에 고개를 조아린 시녀에게 싸늘히 시선을 돌렸다.
“언제?”
“30분 정도 전에…….”
“이젠 별짓을 다 하시는구나.”
황당한 마음에 피식 웃음이 다 나왔다.
‘어머니 쪽에서 어쩐 일로 먼저 만나자고 몇 번 서신이 오는 걸 전부 무시했더니, 이제는 유디트를 궁에 불렀다고?’
어머니치고는 꽤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실소하며 황후궁으로 이동했다.
“누나!”
후원에 어머니와 함께 있던 밀리엄이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여덟 살이 된 밀리엄은 전보다 많이 컸다. 그리고 전보다 어머니와 더 많이 닮아 보였다. 예전에는 나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찬란한 금발을 길게 기르고 홍옥 같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는 밀리엄은 이제 아기 천사에서 소년 천사가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옆에 앉은 샤렐 황후를 보았다. 연녹색 이파리와 노란 햇빛이 만연한 화원에 꼿꼿이 앉아 있는 여인은 오늘도 고고했다.
“왔느냐, 1황녀. 요즘 그 귀한 얼굴 보기가 아주 힘들구나.”
어머니가 차를 마시며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후 전하. 제 얼굴 한번 보려고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시다니, 감격에 겨워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것 같군요.”
나도 시선을 돌려 테이블의 한쪽에 앉아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유디트와 함께 보내는 티타임은 즐거우셨습니까?”
“먼저 앉아라. 제대로 된 안부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대뜸 무슨 무례지?”
어머니가 나를 꾸짖듯이 말했다.
물론 나는 그녀가 뭐라고 하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었다.
어머니의 맞은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어여쁜 소녀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어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나한테 먼저 알은척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발그레하게 상기된 뺨이 딱 보기 좋게 동그스름했다.
내 시선이 닿은 곳에는 번데기가 나비로 변하듯이 눈에 띄게 성장한 열여섯 살의 유디트가 앉아 있었다.
예전의 비쩍 마르고 작았던 볼품없는 소녀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윤기 있는 새까만 머리칼은 별을 품은 밤하늘 같았고, 맑은 황금빛 눈이 반짝이는 고운 얼굴은 이슬을 머금은 꽃송이처럼 싱그러웠다. 이제는 누가 봐도 유디트를 초라한 냉궁에 살며 무시당하던 비천한 황녀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웃는 걸 보니 의외로 별일은 없었던 것 같군.’
나는 유디트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황후 전하. 즐거운 시간을 충분히 보내셨다면 유디트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겠다는 말이냐?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앉아라.”
“죄송하지만…….”
나는 이 무의미한 상황이 지겨워졌다.
어머니와 내가 작정하고 맞붙으면 결국 자존심 겨루기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은 더 아쉬운 사람이 지기 마련인 싸움이었으나, 오늘의 승산은 내게 있었다.
“요즘 제 일정이 꽉 차 있어 굉장히 바쁘답니다. 혹시 제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는 거라면 지금 본론만 간략히 말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얼마 전부터 계속 내게 만나자는 서신을 먼저 보냈던 데다, 오늘은 일부러 유디트를 황후궁에 부르기까지 했으니 어머니에게 나를 보고자 한 목적이 있는 건 확실했다.
어머니는 내가 재차 그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제야 겨우 내게 고개를 돌려 찌푸려진 눈으로 나를 보던 어머니가 잠시 후 얼굴을 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밀리엄의 수업 진도가 빨라 벌써 초급 마법 교본을 떼고 곧 중급 교본에 들어간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세월이 흘러도 참 한결같으셨다.
“마침 밀리엄의 교사를 바꾸려던 참이기도 하고, 또 누이로서 동생을 직접 가르쳐 보는 것도 네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기회를 주려고 보고자 했다.”
실제로 내게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은 눈곱만큼도 없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꼭 어머니는 그녀와 밀리엄 쪽에서 나한테 대단한 시혜를 베풀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실 정도의 짧은 시간이 지날 동안 후원에는 꽃들이 바람과 함께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유디트가 조용히 내 얼굴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밀리엄도 예전보다는 나이가 들어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알게 되어서, 어머니와 내 눈치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밀리엄에게 옮겼다.
“밀리엄, 너도 황후 전하와 같은 의견이니?”
생각보다 내 목소리가 차분하고 부드러워 안심했는지, 밀리엄이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다른 선생님들보다 누나가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그래, 얼마 전에 네가 몇 번이나 똑같은 청을 했을 때 내가 거절한 건 기억하고?”
내 물음에 밀리엄은 대답하지 못했다. 눈빛을 보니 그의 기억은 멀쩡한 게 분명했다.
‘갑자기 사고라도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게 아니고서야 그렇겠지.’
바로 사흘 전쯤에도 날 찾아와서 떼를 쓰기에 충분히 알아듣게 내 나름대로의 친절함까지 발휘해 설명해 줬었는데.
“그, 그렇지만 누나가 자꾸 거절만 하니까…….”
역시 밀리엄이 어머니에게 말해서 이런 자리를 만든 게 분명했다.
‘어머니를 통해 나한테 압력을 넣으면 내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나는 속으로 쯧, 혀를 찼다.
“황후 전하. 지금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많이 바쁘답니다.”
내 싸늘한 눈빛을 받고 어물어물 변명하는 밀리엄에게서 시선을 뗐다.
“또 제게 가르침을 받기에 밀리엄은 아직 너무 어리고 미숙하니, 저보다 더 친절하고 안전한 방식으로 가르침을 줄 교사를 구하시지요.”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한 뒤 유디트를 불렀다.
“가자, 유디트.”
“네, 네! 언니.”
여전히 내 말을 잘 듣는 유디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황후 전하, 4황자 전하…….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남긴 유디트가 나를 따라왔다.
구석에 서 있던 밀리엄의 시녀 미레이유 하이어스가 나와 유디트를 향해 작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르벨라!”
뒤에서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후원을 나섰다.
*
“네가 고생했구나. 괜히 나 때문에 황후 전하께 불려가 즐겁지도 않은 시간을 보냈으니.”
“아니요! 아니에요, 언니. 전 괜찮아요.”
황후궁에서 나가는 길에 유디트에게 말하자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 나쁘게 대한 것도 없으시고…… 정말 그냥 차만 마셨는걸요. 그리고 언니가 와 주셨잖아요.”
기뻐요, 라고 덧붙이며 천진하게 웃는 얼굴이 여전히 티 없이 해맑았다.
이제 유디트는 나를 1황녀님이라 부르지 않고 언니라고 불렀다. 물론 내가 허락한 일이었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변화 중 하나였다.
“의외구나. 그분 성격이면 네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셨을 만도 한데.”
예전에는 몇 번이나 내게 유디트와 거리를 두라고 말했던 어머니였다. 물론 그때마다 내가 번번이 무시하자, 어머니도 자존심이 상했는지 더 관여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리고 이어서 유디트가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며 꺼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 그냥…… 별말씀은 안 하시고, 언니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셨어요.”
왜 이제 와서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건지, 살짝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아주 잠깐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그냥 지금 들은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래, 아무 일도 없었다니 다행이다. 참, 그러고 보니 유디트. 네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혹시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생각해 둬.”
유디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가 곧 눈을 접어 배시시 웃었다.
“네, 그럴게요. 그보다 어제 혼자 공부한 책에서 이해가 잘 안 되는 내용이 있는데, 혹시 시간이 괜찮으실 때 언니가 봐주실 수 없을까요?”
“지난번에 보던 그 마력 파동학 책을 말하는 거야? 좀 더 심도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거면 다른 과목처럼 교사를 붙여 준다고 했잖아.”
“어차피 저는 마력을 사용할 줄도 모르고, 언니한테 물어보는 게 좋아서요.”
유디트가 내 말에 약간의 씁쓸함과 부끄러움이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말처럼, 유디트는 카뮬리타의 황족이면서 아직 마력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다른 황녀, 황자들에게 역시 이래서 천한 핏줄은 안 된다며 뒤에서 무시당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있으니, 앞에서 대놓고 저런 얘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 그럼.”
내가 수락하자 유디트는 또 진심으로 기쁜 듯이 웃었다.
그 얼굴과 대조되어 더 서늘하게 보일 내 가라앉은 눈을 들킬까 봐 멈춰 있던 다리를 움직여 먼저 걸어갔다.
시간이 흘러 나는 이제 열여덟 살, 유디트는 열여섯 살이 되었다. 곧 유디트의 생일이 다가온다. 그녀가 마력 각성을 할 시기가 어느새 가까워져 있었다.
*
할머니 테레사 델피니움을 오랜만에 만나고 온 데 이어 어머니와 밀리엄까지 상대한 탓인지 그날 밤에는 달갑지 않은 과거의 꿈을 꾸었다.
“황녀님, 일어나셨군요!”
“마리나……. 어머니는?”
마법사의 열병을 선고받고 반년이 지난 열 살의 어느 가을날.
처음으로 어머니가 열병을 앓는 내내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내 궁의 막내 시녀였던 마리나가 겨우 열이 떨어져 정신을 차린 내게 달려와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줬다.
“황후 전하께서는…… 그러니까, 황녀님이 주무시는 동안 함께 계시다 조금 전에 황후궁으로 돌아가셨어요.”
사실 그건 마리나의 거짓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기는 어머니가 밀리엄의 회임 소식을 황궁의에게 처음 확언받은 때와 맞물려 있었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황후궁에 찾아갔다.
“황후 전하께서는 정원에 계십니다.”
황후궁의 시녀들은 내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나는 황후의 유일한 적장자로 그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딸이었고, 그 당시에는 아무 때나 황후궁을 오가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황후궁은 내 궁만큼이나 익숙했기에 당연히 안내도 따로 필요 없었다.
“아르벨라가 왔다고?”
“예, 전하. 안정기에 들어설 때까지는 각별히 주의하셔야 하니 조심해서 일어나십시오.”
어머니가 나와 자주 함께 시간을 보냈던 정원에 도착하자, 내 키만큼 높은 꽃 덤불 너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라.”
“예, 황후 전하.”
“그 병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된 것이 많지 않지.”
어머니는 내가 쉽게 알아듣지 못할 낯선 대화를 그녀의 오랜 친우이자 황궁의인 레멘토 후작과 나누고 있었다.
“그럼 태아에게 전염될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아직까지 그런 사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마력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미숙한 태아의 경우에는 특히…….”
마침내 꽃 덤불 사이로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평소처럼 반갑게 그녀를 부르며 뛰어가려 했다. 아마 이어진 어머니의 말이 먼저 내 귀를 스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할 수 없군. 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아르벨라를 만나지 않겠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지금도 불안하다. 황궁에서는 그 아이를 피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한동안 친정에라도 가 있어야겠구나. 내 몸이 좋지 않아 한동안 정양하러 간다고 하면 되겠지.”
흔들리는 붉은 꽃송이 사이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읊조리던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때 얼마나 차가웠는지 모른다.
“이 아이마저 아르벨라처럼 실패할 순 없어.”
바스락.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꽃 덤불을 팔로 건드려 난 소리에 어머니가 나를 발견했다.
그때 배를 감싸고 급히 뒤로 물러나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과거보다 오히려 지금 더 선명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어마마마…….”
“……가까이 오지 마라, 아르벨라!”
그건 분명 역병에 걸린 환자라도 보는 듯한 공포였다.
*
그동안 잊으려고 애썼던 과거의 일을 꿈에서 보게 되자 불편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밖은 어두웠지만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아, 이런 꿈 꾼 거 진짜 오랜만인데.’
반갑지 않은 기억을 보게 되자 은근히 짜증이 밀려왔다.
사실 이 기억은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요 몇 년 동안 어머니와 자주 부딪치면서 그동안 서운하고 화가 났던 일들을 나도 모르게 하나둘씩 떠올린 게 문제였다. 그러다가 불현듯 ‘아, 맞아. 이런 일도 있었지.’ 하고 무의식에 묻혀 있던 기억들까지 죄다 수면 위로 부상하고 만 것이다.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던 걸 떠올린 건 좀 짜증스러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 번씩 내 과거의 한심함을 되짚으며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잠을 다 잔 듯해서 얼굴을 찡그린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방을 나섰다.
*
밤의 복도는 조용했다.
나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이 고요함이 좋았다. 가을이 되면서 살짝 공기가 쌀쌀해지긴 했지만 아직 밤 산책을 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막 1황녀궁의 본궁을 빠져나가 회랑을 걷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차가운 손이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바닥에 이어진 내 그림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버텼겠지만 지금은 쥐새끼 한 마리 없는 곳이었다.
“으, 흐으…….”
비틀거리다가 옆에 있는 벽을 짚고 몸을 기댔다. 심장에 급격한 통증이 발발하며 온몸이 금세 식은땀으로 젖어들었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사실은 나이가 들면서 빌어먹을 마법사의 열병 증세도 전보다 심해졌다. 이제는 지금처럼 가끔씩 일상에서 열병을 동반하지 않은 통증까지 느낄 정도였다.
또각.
공교롭게도 하필 그때 앞쪽에서 들려온 작은 발소리에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던 신경이 곤두섰다.
“황녀님?”
잠시 후 어른거리는 불빛 뒤에서 어린 시녀가 나타났다. 얼마 전 1황녀궁에 빈자리가 생겨 들어온 신입 시녀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 놀란 듯이 등불을 들고 다가왔다.
“이 시간에 왜 혼자 나와 계시나요?”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애써 풀고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왜 이 시간에 밖을 돌아다니고 있지?”
다행히 목소리는 그럭저럭 무덤덤하게 흘러나왔다.
“아, 저는 저녁 시간에 식당에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나서 잠깐 다녀왔어요.”
시녀가 다가오기 전에 몸을 꼿꼿이 펴고 평온한 목소리를 꾸며내서 그런지, 그녀는 내게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녀님, 시간이 늦었는데 제가 모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황녀님.”
그때 내 뒤쪽에서 튀어나온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지던 시녀의 말을 끊었다.
나를 비껴 시선을 옮긴 시녀가 입을 다물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너는 그만 가 봐.”
나는 시녀에게 까딱 고갯짓했다.
시녀는 두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때쯤에는 나도 통증이 가라앉아서 마력을 움직일 수 있었다.
뒤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마법으로 식은땀에 젖은 몸을 깨끗이 했다. 그 후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보았다.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이 시간에 아직 안 자고 있었어?”
회랑 한복판에 달빛을 맞으며 선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둠에 물든 그의 붉은 머리카락은 거의 검은색처럼 보였다. 반면 머리칼 밑으로 드러난 은회색 눈동자는 달빛을 머금어 한결 더 선명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내가 침실 밖으로 나온 것을 느끼고 뒤따라 온 제라드였다.
나와 같은 18세가 된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린 소년이라 할 수 없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이전보다 굵직한 선으로 그려진 잘생긴 얼굴은 낮보다 밤에 더 묘한 인상을 풍기며 시선을 붙들었다. 성인 못지않게 체격이 커진 몸이 내가 서 있는 벽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라드는 태양 아래에서 햇빛을 맞고 있을 때보다 지금처럼 어둠과 달빛이 뒤섞인 곳에 조용히 서 있을 때 더 그에게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황녀님은 또 잠이 안 오시나 보군요.”
“그냥 그래. 나 때문에 나온 거면 그만 가 봐. 나도 다시 방으로 돌아갈 거니까.”
제라드가 내 말에 고개를 모로 슬쩍 기울였다.
“밤 산책을 나오셨던 게 아닙니까?”
“마음이 변했어.”
그냥 한번 이유 없이 변덕을 부려보는 양 심드렁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미동 없이 서서 나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꼭 내게서 아주 작은 티끌 하나라도 있으면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그 눈빛은 탐색적이고 예리했다.
사실 나는 제라드의 시선이 좀 찜찜했다. 언젠가부터 이 녀석은 가끔 나를 이런 눈으로 볼 때가 있었는데, 왠지 그게 꼭 내 병에 대한 뭔가를 눈치챈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긴 원래 감이 좋은 녀석이기도 했고, 또 미우나 고우나 4년이나 옆에 붙어 있었으니 내게 이상함을 느낄 만도 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가 이런 식으로 나를 들여다보려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오래 관찰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먼저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그럼 난 먼저 가 볼 테니 수고해.”
하지만 이제는 소년보다 청년에 가깝게 되어 더 이상 귀엽지 않게 된 내 종속 기사 제라드는 기어이 나를 혼자 보내지 않고 뒤를 따라왔다.
“가시는 곳까지 따르겠습니다.”
뒤에서 들린 소리를 듣고 발을 멈췄다. 몸을 반쯤 돌려서 제라드를 쳐다봤다.
“제라드.”
방금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회랑에 울렸다.
“내가 혼자 가겠다고 말했잖아. 꼭 명령이란 말을 써야 알아듣겠어?”
달보다 밝게 빛나고 있는 은회색 눈에 이채가 스쳤다.
곧 제라드가 나를 보던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제가 건방졌습니다.”
제라드는 지난 4년 동안 이제는 아주 능숙하게 예의 바른 척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말은 저렇게 해도 실제로 반성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굴종을 모르는 저 천성이 어디 가랴.
그동안 황궁 예법을 착실히 몸에 익혀 어떨 때 주인의 비위를 맞춰야 할지 알고 있긴 하지만 단지 그뿐, 지금도 머릿속으로는 자신의 말이 정말 건방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내 앞에 조아려진 머리를 탐탁지 않게 내려다봤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서 날카롭게 말해 놓고, 이 또한 수상한 반응이었나 싶어 뒤늦게 경계심이 들었던 탓이다.
“참, 이럴 필요 없는데 너도 가끔은 귀찮게 군다니까. 정 따라오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결국 그냥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말하고 다시 몸을 돌려 앞서 걸었다. 그 뒤를 익숙해진 발소리가 따랐다.
조용한 밤공기 속에 울리는 그와 내 발소리를 듣는 동안 나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결국 내 뜻대로 하지 못하고 저 녀석이 바라는 대로 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귀엽지도 않은 게.”
나도 모르게 툭 내뱉듯이 투덜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또 공손함을 가장한 발칙한 대꾸가 이어졌다.
“칭찬 감사합니다. 이 나이에 귀여워 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요즘 시녀들한테 멋지단 말 좀 듣는다고 자신감이 생겼나 보지?”
제라드는 3년 전부터 생활 반경을 넓혀, 롬벨 경을 따라 황실 기사들과 실전 대련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들 이단자 출신인 제라드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래도 3년이나 부대끼다 보니 조금씩 미운 정이 든 사람들도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제라드가 1황녀궁 밖으로 나올 때마다 그를 힐끔거리는 어린 시녀들이 자주 보였다. 대련하는 제라드의 모습을 상기된 얼굴로 몰래 훔쳐보면서 저들끼리 꺅꺅거리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꼭 시녀들뿐만이 아니었다. 내 어린 동생들도 이제 제라드를 볼 때면 깜짝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곤 했으니까.
‘예전에는 제라드를 마냥 경멸하던 클로에의 눈빛도 언젠가부터 전에 비할 수 없이 누그러졌을 정도이니 뭐.’
“그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제게는 의미 없는 일이지만…….”
살짝 놀려 주려고 꺼낸 말이었지만 제라드는 들뜨거나 쑥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말했다.
“황녀님의 뒤에 서기에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라는 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라드를 놀려 주려다가 괜히 나만 기분이 미묘해졌다.
잠시 후 침실에 거의 다다라 제라드를 돌아봤다.
“제라드. 손 내밀어 봐.”
내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제라드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를 향해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네 마음대로 따라왔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빨리 손 내밀어 봐.”
재차 독촉하자, 제라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지못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잡고 마력을 움직여 그의 안에 밀어 넣었다. 맞잡은 제라드의 손끝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제라드에게는 내 종속 기사인 그의 상태를 가끔 점검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제물의 온전함을 확인하는 행위였다.
제라드의 마력이 여전히 내 마력과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안심했다. 또 요즘은 특히나 전보다 자주 제라드의 마력을 확인하곤 했는데, 그건 사실 내 현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녀석은 내 제물이고, 내가 금단술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때가 되면 반드시 내 옆을 떠날 녀석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럴듯한 포장지로 감싸 진심을 꾸며냈어도, 나는 이 녀석을 기만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계속된 거짓말에 가끔 나조차 헷갈리는 순간이 올 때마다 그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이제 됐어. 침실은 바로 이 앞이니까 더 따라올 필요 없어.”
잡고 있던 제라드의 손을 놓고 웃었다.
“너도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
장난스럽게 뒷걸음질 치는 동안 역시 제라드는 나를 더 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복도에 우두커니 선 채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바늘 하나 찔러 들 틈이 없을 것 같은 팽팽한 공기가 제라드의 주위에 맴도는 것 같았다.
제라드는 내가 이런 식으로 마력을 이용해 그의 속을 헤집어대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내가 잡았던 손을 으스러지도록 꽉 움켜쥐고, 가라앉은 눈으로 멀어지는 나를 씹어 삼킬 것처럼 주시하고 있었다. 꼭 언제 눈앞에 있는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을지 가늠하는 육식 동물 같았다.
이럴 때의 제라드는 몇 년 전의 소년 시절과 거의 비슷해 보였다. 아무리 매끄러운 광택이 나게 표면을 갈고 닦아 놨어도, 그 거친 본질은 아직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난 4년 동안 몇 번이나 그랬듯이, 그것을 내 손으로 예쁘게 깨부숴 주고 싶은 마음에 갈등을 느끼며 제라드에게서 완전히 돌아섰다.
*
제법 후덥지근한 낮 시간임에도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다.
“안녕하신가, 후작?”
“1황녀님?”
나를 보자마자 그레이엄 후작이 흠칫했다.
밝은 햇볕 아래에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물론 금방 얼굴을 다시 펴긴 했지만,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지었던 걸 이미 다 봤다.
“1황녀님을 뵙습니다!”
그레이엄 후작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서둘러 인사했다. 그레이엄 후작도 표정 관리를 하며 내게 다가왔다.
“말씀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우연히 이 앞을 지나다가 후작이 보여서 와 봤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내가 이 근처를 그냥 우연히 지나갈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후작은 또 사냥을 하러 나온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그래, 요 몇 년 동안 사냥에 부쩍 재미를 들린 것 같던데.”
가늘게 웃으며 꺼낸 말에 그레이엄 후작이 입매를 꿈틀거렸다.
그가 손짓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일부는 사냥터 한구석에 놓인 수레를 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수레에는 방금 사냥한 것 같은 짐승들의 사체가 실려 있었다.
“예, 주변에 사냥을 취미로 둔 귀족들이 많아 종종 동행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 맛을 알겠더군요. 1황녀님도 사냥을 즐기시지요?”
“나야 사교 목적이지. 원래 피를 보는 건 그리 즐기지 않아.”
내 겸손한 말에 그레이엄 후작이 ‘퍽이나 그러시겠군.’ 하는 얼굴로 삐뚤게 웃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내 뒤에 선 제라드에게 닿았다.
“이제는 그 종속 기사도 곧잘 데리고 다니시는군요. 아예 직속 호위로 삼으실 예정입니까?”
그레이엄 후작의 말대로 작년부터는 가끔 제라드를 데리고 외출할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시험적으로 동행을 제안했는데, 제라드는 예전처럼 기회를 엿봐서 도망치려 하거나 허튼짓을 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순진한 녀석이라 그런지, 5년 안에 그가 사라지면 그 책임을 내가 대신 져야 해서 곤란하다는 말을 아직 그대로 믿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후로는 종종 그를 데리고 궁 밖에 나오기도 했다.
아직은 공식적인 자리에 제라드와 매번 동행하는 건 아니었지만, 서서히 롬벨 경과 외출하는 비중을 줄이고 대신 제라드를 수행원으로 두는 횟수를 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느낀 건데, 역시 그레이엄 후작은 제라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예전에도 제라드에 대해 입에 올릴 때마다 말투나 눈빛이 은근히 날카로워서 눈치를 챘었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더 노골적이었다. 그건 단순히 다른 사람들처럼 제라드가 금단술을 사용한 죄인의 아들이란 이유에서 기인하는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나는 4년 전에 제라드와 그의 부친에 대해 겉핥기로만 정보를 수집하고 추가적인 사항은 더 조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제라드와 함께 지내는 동안 점점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중간에 살짝 다시 조사를 명령한 적이 있었다.
그때 쥬논 그레이엄 후작과 글렌 라스너 백작이 아카데미 재학 시절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의 라이벌이라 하면 뭔가 귀여운 어감이었지만, 이 두 사람의 경우에는 상당히 치열한 경쟁을 했던 듯했다.
알고 보니 글렌 라스너 백작은 당시 백야의 전당을 제외하고 가장 큰 마법 기관이었던 ‘네피림’의 의장까지 역임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또 다른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게 쥬논 그레이엄 후작이라고 한다.
참고로 그 네피림은 현재 갈가리 분해되었다. 글렌 라스너 백작이 영지에 틀어박히고 나서 1년인가 2년인가가 지났을 때쯤, 여러 가지 문제가 연거푸 터져 그렇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그레이엄 후작이 있다는 게 학계 정설…… 까지는 아니고, 아무튼 매우 신빙성 있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중년의 질투는 추했다. 정작 제라드는 그레이엄 후작에 대해 부친에게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 것 같던데, 후작 혼자만 학창 시절의 시기심을 징그럽게 이어가고 있는 셈이 아닌가.
“애초에 내가 데리고 다니는 기사가 제라드 하나밖에 없으니 그런 구분은 별 의미 없지.”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부터 1황녀님의 곁을 지키던 롬벨 경이 있지 않습니까?”
“롬벨 경은…….”
-크르릉!
그 순간 숲에서 무언가가 확 튀어나왔다.
정체는 거의 호랑이 정도 크기의 거대한 검은 마법 생물이었다.
-컹!
나한테 바로 달려들었다면 내가 직접 나섰겠지만 짐승이 노린 건 제라드 쪽이었다.
그 순간 제라드의 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검을 뽑지 않고, 마력을 두른 검집을 들어서 달려드는 짐승을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마법 생물이 멀리 날아갔다. 깨갱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덤불 위에 그대로 널브러진 걸 보니, 아무래도 바로 급소를 맞고 기절한 것 같았다.
‘어? 그런데 저거 마다라크잖아?’
몸체가 튼튼해서 마법으로 공격해도 대부분 충격을 흡수해 버리는데 뭐 이렇게 한 방에 기절해?
너무 가볍게 날아가서 다른 짐승인 줄 알았다.
“처리할까요?”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은회색 눈이 내게 조용히 미끄러졌다.
제라드의 입에서 나온 건 짧고 굵은 물음이었다. 내가 그러라고 작은 고갯짓이라도 하면, 당장 내 눈앞에 달려든 저 마법 생물과 사냥터의 관리자, 또 오늘 사냥터에 와서 마법 생물이 흥분해 뛰쳐나오도록 숲을 들쑤신 사람들까지 모두 정리해 버릴 것 같았다.
역시 제라드는 배움이 빨랐다.
누가 보면 꼭 처음부터 기사 제복을 입고 ‘응애!’ 소리 대신 ‘충성!’ 소리를 외치면서 태어난 사람인 줄 알겠네.
어릴 때는 그렇게 야생의 날짐승처럼 굴던 놈이 이제는 이렇게 내 종속 기사로서의 역할을 겉으로나마 잘 숙지하고 꽤 그럴싸하게 이행하는 걸 보자, 새삼스럽게 지나간 세월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런……. 숲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때 그레이엄 후작이 미세하게 눈가를 떨면서 말했다.
그는 매우 유감스러워 보였다. 물론 그가 유감스러워하는 건 마법 생물이 나와 제라드를 덮친 것 때문이 아니라, 제라드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마법 생물을 격파한 것 때문일 것이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식으로 그레이엄 후작이 나와 제라드를 살짝 건드리려 시도한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데다, 후작도 그걸 알면서 그냥 기분상 깔짝거려 보는 것 같아서 나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고 있었다.
“위험한 짐승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사냥터의 관리자를 엄벌에 처하도록 하겠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아랫사람들이 죄를 뒤집어써서 후작의 잘못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봐라! 감히 황녀님께 위협을 가한 저 짐승을 당장 죽여 없애라!”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그레이엄 후작을 보다가 이내 싸늘히 미소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루비 박힌 금장 지팡이를 까딱였다.
“됐어. 그러다 숲의 동물들 씨가 마르겠네. 제라드, 그만 가자.”
내가 몸을 돌리자 제라드가 손에 들고 있던 검집을 다시 허리에 찬 뒤 나를 따랐다.
“가시는 겁니까? 다음 사냥 때는 1황녀님도 꼭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좋겠군요.”
“후작이 그리 원하니 생각해 보지.”
나를 배웅하는 그레이엄 후작을 뒤로한 채 사냥터를 걸었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특이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4년 전에 처음으로 그레이엄 후작을 감시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틈틈이 그를 지켜봐 왔다. 하지만 크게 덜미가 잡힐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엄 후작은 전처럼 사브리엘인지 사브리나인지 하는 요상한 이름을 대며 클로에를 따로 만나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내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그래도 나도 일단은 후작을 내버려 둔 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이번에도 그냥 내 느낌이 괜히 싸해서 그렇지, 요 몇 년 사이에 그레이엄 후작이 사냥에 재미를 들린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한 의구심은 남아 있었다.
그레이엄 후작이 한번 사냥을 빌미로 숲에 들어갈 때마다 마법 생물과 짐승들의 사체가 수레로 두세 개씩은 채워진다고 했다. 물론 사냥을 즐기는 이들 중에 잡은 짐승을 박제해 수집하거나 사냥감에서 나온 부속물로 물건을 만들거나, 혹은 요리해서 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그레이엄 후작도 사냥을 즐기기 시작하며 자신에게 그런 취미가 생겼노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최근에 그레이엄 후작이 저택에 가져가는 짐승들의 양은 다소 많았다.
‘그럼 그는 그것들로 도대체 뭘 하는 걸까……?’
나는 가늘게 좁힌 눈으로 사냥터를 돌아봤다.
숲에서 왠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18. 아르벨라의 기사
오늘은 오랜만에 황족과 귀족 대부분이 참석하는 카뮬리타의 국가적인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다가오는 건국제를 맞아 기념으로 열린 마법과 검술 대회였다.
이 행사는 매년 열리는 게 아니라 5년 단위로 개최되었는데, 올해가 바로 그 시기였다.
카뮬리타를 세운 젊은 건국 왕과 그를 도운 조력자들의 용맹한 정신을 이어받자는 취지 하에 만들어진 대회로, 젊은 청년 준걸을 발굴해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18세~22세 사이의 젊은이들에게만 참가자격이 주어졌다.
원래 대회 초기에는 황실에서 우승자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는 통 큰 상품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전부터는 여러 가지 내부 사정에 의해 황실 소속 마법사 혹은 기사의 직위를 하사하는 쪽으로 상품이 바뀌었다. 귀한 마도구를 주는 것은 덤이었다.
심지어 전자의 경우는 꽤 선택의 폭이 넓었다. 마법사의 경우는 황실 소속 최고 마법 기관인 백야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기사의 경우는 황족 중 한 명을 선택해 그 직속 호위가 되거나, 황실 기사단 중 원하는 곳에 시험 없이 입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정도만으로 굉장히 파격적인 대우로 여겨졌다.
게다가 이 대회는 참가하는 데 신분 제한이 없어, 평민 출신 마법사와 검사들에게 신분 상승의 발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실제로, 10년 전 우승자는 그때 황실 직속 기사단에 들어가 현재 부단장까지 승진해 있었다. 그러니 다들 제2의 영광을 꿈꾸며 우승에 집착할 만도 했다. 물론 신분 상승을 꿈꾸는 평민뿐 아니라, 개인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귀족들도 많이 참가하는 추세였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대회의 준결승과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다.
“왜들 저렇게 시끄러워?”
황족들을 위한 관중석으로 향하던 아르벨라가 귀족석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뒤에는 최측근 시녀인 마리나와 종속 기사 제라드가 따르고 있었다.
검술 대회의 최종 결전을 앞두고 흥분한 사람들의 함성에 멀리서도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마리나도 아르벨라를 따라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곧 우승자가 가려지니까 다들 흥분한 거지요. 황녀님도 아시다시피 이런 대회 때는 우승자를 두고 판돈을 거는 것도 성행하잖아요. 게다가 소문을 들어 보니, 특히 이번에는 경우에 따라 배당률이 엄청날 거라고 하던데요?”
“흐음, 그래? 나도 언뜻 들었는데 혹시 오늘 준결승 경기를 하는 그 검은 갑주의 기사 말하는 거야?”
“네, 맞아요! 처음에는 다들 이름 한번 들어 본 적 없어서 무시했는데, 불패로 준결승까지 올라오고 인기가 아주 많아졌대요. 더군다나 투구를 써서 얼굴이 코 밑으로만 보이긴 하지만, 마력석에 저장된 근접 영상을 보니 99퍼센트의 가능성으로 초절정 미남일 거라는 의견이 대세라던데…….”
“크흠! 큼.”
순간 아르벨라의 뒤에 서 있던 제라드에게서 사레에 들린 듯한 헛기침 소리가 작게 터져 나왔다.
아르벨라는 픽 웃으면서 다시 관중석의 계단을 올랐다.
“알겠느냐? 오늘 대회에서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
그러다 그녀는 가까운 귀족석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청년의 어깨를 두 손으로 압박하고 있는 푸른 머리칼의 남자. 쥬논 그레이엄 후작이었다.
“그동안 널 후원한 우리 가문과 내 명예가 걸려 있으니 혹여 나를 부끄럽게 한다면 그땐 알아서 해라.”
“예! 반드시 우승하겠습니다!”
꼭 격려가 아니라 협박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아르벨라는 그의 말을 듣고 코웃음 쳤다.
가문의 명예든 자기 명예든 스스로 지켜야지, 왜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맡긴단 말인가.
‘그 정도로 하찮은 명예인가 보지?’
“그레이엄 후작이 후원하는 기사도 준결승까지 올랐구나.”
“네,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에요.”
“황실 기사단 자리가 탐나는 상품이긴 한가 보네. 저렇게 다들 목을 매는 걸 보니. 이번 대회의 참가자 수도 어마어마했다고 들었는데.”
“음,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마리나가 심드렁하게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아르벨라를 뒤따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황녀님은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듯이 푸념했다.
“제가 듣기로는 황녀님께 당당하게 검을 바치고 싶어서 의욕을 불태우는 청년들도 많다고 하던걸요. 지금도 저 열렬한 시선들이 안 느껴지세요?”
마리나의 말대로였다.
아르벨라가 처음 관중석에 나타났을 때부터 사방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눈빛에 주변 사람들의 살갗이 다 따끔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늘 주목받는 삶을 살아왔던 아르벨라에게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날이 눈에 띄는 찬란함을 내뿜는 황녀님을 선망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세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아르벨라는 카뮬리타 최고의 전투 마법사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으니.
그런 만큼 오히려 아르벨라는 그녀의 눈길 한 번만 스쳐도 쉽게 생산되는 추종자들에게 지겨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야박한 황녀님이 아니었다. 아르벨라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인사하듯이 손을 들어올리자 그녀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누가 들으면 대회가 시작된 줄 알았을 정도로, 우레 같은 환호성이었다.
*
“이야. 아르벨라, 넌 여전히 인기가 엄청나네. 아니다, 전보다 더 대단한 것 같은데?”
황족들의 관중석에 올라오자마자 1황자 라미엘이 가장 먼저 아르벨라를 반겼다.
라미엘은 열여덟 살이 된 지금도 여전히 눈에 띄는 미남이었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일곱 가지 죄악 중에 나태와 색욕의 화신이 아마 이렇게 생겼을까 싶었다.
라미엘의 긴 머리는 꽃과 보석으로 아주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게 또 비웃어 주기 어려울 정도로 그에게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그는 피를 보는 것을 싫어했지만, 오늘은 대회의 결승전까지 있는 날이라 관중석에 나온 것 같았다.
그러다 라미엘의 시선이 아르벨라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의 입술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오늘은 그 종속 기사도 옆에 달고 있구나.”
제라드의 싸늘한 시선도 라미엘을 향했다.
전에 아르벨라가 경고했던 이후로 라미엘이 또 제라드를 건드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라미엘은 여전히 그를 마뜩잖아하는 눈치였다.
물론 아르벨라는 라미엘을 지나치며 딱 한마디만 했다.
“네 거 아니니까 관심 꺼.”
라미엘은 어련하겠냐는 듯이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고 웃었다.
“앗, 아르벨라 언니! 어서 와!”
옆에 있던 사람과 티격태격하는 것 같던 클로에도 아르벨라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달려왔다.
“클로에, 먼저 와 있었구나.”
클로에도 아르벨라처럼 단발을 하고 있었다.
아르벨라의 짧은 머리칼은 카뮬리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이 된 지 오래였다. 처음에는 그녀를 별종이라 여기던 황족들 중에도 하나둘씩 머리카락을 자르고 나타나는 사람이 생겼다.
“유디트랑 같이 놀고 있었어?”
아르벨라의 시선이 조금 전까지 클로에와 티격태격하고 있던 다른 소녀에게 향했다.
“뭐, 놀았다기보다는…….”
“네, 언니! 2황녀님이랑 같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클로에는 떨떠름하게 반응했지만 다른 쪽에서는 해맑은 긍정의 답이 튀어나왔다.
4황녀 유디트가 아르벨라를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활짝 피어난 민들레 꽃처럼 어여뻐진 유디트는 지금도 숱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자리는 더 이상 말석이 아니었다. 아르벨라가 늘 유디트를 옆에 달고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자리는 아르벨라의 옆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르벨라의 오른쪽 자리는 클로에가, 왼쪽 자리는 유디트가 차지하고 있었다.
라미엘은 튀고 싶어 하는 성격답게 입구 쪽에 화려한 꽃장식을 한 의자와 테이블을 두고 혼자 따로 앉았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중이었다.
“언니, 언니! 내 머리 좀 볼래?”
아르벨라가 착석한 뒤 클로에가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어때? 벨라 언니랑 비슷한 머리 장식으로 맞춰 봤어. 언니는 오늘 의상이 흰색에 금색, 붉은색 포인트잖아. 그래서 난 반대로 파란색……으로 하려다가 내 머리 색 때문에 눈에 안 띄어서 금색으로 강조해 봤어!”
클로에는 아르벨라보다는 긴, 쇄골까지 닿는 단발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아르벨라의 의상 스타일을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었다.
아르벨라는 그런 클로에가 귀찮아서 대개 무시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원하는 대로 정보를 주기도 했다.
“응, 그래. 괜찮네, 잘 어울리네.”
아르벨라는 시녀가 가져다준 라임 차로 목을 축이며 클로에가 바라는 대로 대충 칭찬해 줬다.
클로에는 자신의 머리칼이 마음에 안 드는 듯이 손가락으로 배배 꼬면서 투덜거렸다.
“나도 언니처럼 화사한 금발이면 좋았을 텐데.”
“네 머리도 바다색 같아서 이런 날씨에는 특히 시원해 보이고 좋은데 뭐.”
그러다 아르벨라가 관중석 아래를 내려다보며 툭 던진 말에 클로에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정작 아르벨라는 다른 곳에 관심을 두느라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인 듯했지만 말이다.
뒤에 서 있던 마리나는 참 죄 많은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제라드도 자각 없이 사람을 홀리는 아르벨라의 모습을 한두 해 봐 온 게 아님에도 이럴 때마다 묘한 눈빛을 띨 수밖에 없었다.
“언니도 참! 나한테는 은근히 그런 쑥스러운 말을 잘한다니까.”
클로에가 이번에는 머리카락 대신 몸을 배배 꼬며 좋아했다.
그러다 그녀는 아르벨라의 왼쪽에 앉은 유디트를 향해 대뜸 비웃음을 날렸다.
“유디트, 넌 긴 머리라 어떻게 해도 벨라 언니랑 비슷한 느낌이 안 나겠네. 안됐다!”
그렇지 않아도 사이좋아 보이는 아르벨라와 클로에의 모습을 은근히 경계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던 유디트가 찻잔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넌 언니랑 닮고 싶다고 하면서도 아직 머리카락을 자를 용기는 없나 보지? 흥, 아직 어리기는.”
그래봤자 클로에와 유디트는 고작 한 살 차이였다. 게다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클로에는 예전에 자신도 차마 머리카락을 자르지는 못하고 안으로 말아 넣어 단발 흉내만 내던 것을 잊은 듯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클로에의 말에 초조하게 입술을 옴짝거리다가, 이내 할 말이 생각난 듯이 눈을 자신만만하게 떴다.
“어, 언니가…… 제 긴 머리가 좋다고 하셔서요. 그래서 자르지 않고 기르기로 했어요.”
“뭐……?! 언니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얘네가 지금 뭘 하는 거야.
한편 귀족석에서부터 다가오는 그레이엄 후작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벨라도 그때쯤 옆쪽의 소란을 알아차렸다.
확실히 유디트에게 저 비슷한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의도는 완전히 달랐다. 그냥 얼마 전에 유디트가 ‘저어, 언니. 요즘 카뮬리타에 짧은 머리가 유행하고 있대요. 혹시 저도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생각하면 어떠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묻기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여기서 유디트까지 머리를 자르면, 클로에까지 합해서 세 명이나 비슷한 모습으로 다니게 된다.
“글쎄, 네가 원한다면 잘라도 괜찮겠지만 꼭 유행을 따를 필요가 있을까? 난 지금 그대로의 네 모습도 좋다고 생각해.”
그래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는데, 지금 유디트의 말을 들어 보니 왠지 그때의 일이 와전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아무튼 불청객이 어느새 황족들의 관중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클로에, 유디트. 관중석 뒤에 핀 꽃이 아주 예쁘던데. 너희가 한 송이씩 나한테 가져다주지 않을래?”
아르벨라의 뜬금없는 말에 두 사람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 그렇게 예쁜 꽃이야? 언니가 갖고 싶으면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도레아!”
눈치 없는 클로에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시녀를 불렀다.
반면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빠르던 유디트는 아르벨라의 얼굴을 한번 보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2황녀님은 여기 계세요. 아르벨라 언니는 우리 동생들이 직접 가져다드린 꽃을 갖고 싶으신 것 같으니 제가 다녀올게요.”
“뭐? 이게 어디서 은근슬쩍 우리 동생들이라고 너랑 나를 같이 묶어? 아니, 잠깐 기다려 봐! 나도 갈 거야! 벨라 언니한테는 내가 제일 예쁜 꽃을 선물해 줄 거라고!”
클로에는 유디트의 도발에 넘어가, 헐레벌떡 관중석의 뒤쪽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뛰어갔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마자 그레이엄 후작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1황녀 전하. 쥬논 그레이엄이 인사드립니다.”
아르벨라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웃었다.
“이런, 관람석의 계단도 많던데 굳이 무리해서 힘들게 인사까지 하러 올 줄은 몰랐네, 후작.”
“하하……. 관람석의 계단이 몇 개나 된다고 힘들겠습니까. 게다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그렇게 방심하는군. 후작도 이제 그리 젊은 나이가 아니니 노파심에 하는 소리인데. 원래 그러다 한순간에 훅 가 버린다는 말이 있는 거 몰라?”
시간이 지나 이제 거의 40줄에 접어든 그레이엄 후작의 나이를 두고 살살 비꼬자, 언제나처럼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던 그의 입꼬리가 굳었다.
하지만 그레이엄 후작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제 감정을 능숙하게 숨겼다.
“1황녀님께서 이리도 저를 걱정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데…… 오늘 같은 자리에도 저 종속 기사를 데려오셨군요.”
곧 그의 뱀 같은 눈이 아르벨라의 뒤에 서 있던 제라드에게 닿았다.
아르벨라는 눈에 보이는 도발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내 기사가 내가 가는 곳에 동행한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흠, 아닙니다. 그보다 오늘 준비된 건국 기념 검술 대회의 준결승전에는 저희 그레이엄 후작 가문에서 지원하는 기사도 참가한답니다.”
“아, 그래?”
그레이엄 후작은 그 기사가 자신의 방계 가문 출신이며 황실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큰지, 아르벨라로서는 궁금하지도 않던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래서 오늘 대회에서 우승하면 1황녀님께 검을 바치고 싶다더군요.”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여진 말에 아르벨라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제라드의 손도 한순간 움찔거렸다.
그레이엄 후작이 아르벨라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우승자의 청은 절대적이라 황족분들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지요. 그래도 실력 하나는 뛰어나니 1황녀님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꽤 자신만만하게 우승을 확신하는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제가 후원하는 기사라 과장해서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실력도 훌륭하고 생긴 것도 제법 반반하답니다. 데리고 다니시기 부끄럽진 않을 겁니다.”
“그거 기대되는군.”
그레이엄 후작이 기분 나쁘게 웃는 얼굴로 물러간 뒤, 1황녀가 앉은 자리에는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곧 시합이 시작됩니다! 준결승전 참가자는 1층 대기실로 와 주십시오.”
때마침 예정된 시간이 다가와, 참가자들을 부르는 소리가 마법 확성기를 통해 들려왔다.
“벌써 시간이 됐네.”
아르벨라는 여전히 정면을 본 채 뒤에 있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제라드.”
“부르셨습니까, 1황녀님.”
“부담 갖지 말고 하던 대로 해.”
“예, 알겠습니다.”
“부담 갖지 말고 1등이나, 우승자나, 뭐 그 정도? 내 말 무슨 의미인지 알지?”
“…….”
“어차피 너도 그럴 생각이었겠지만.”
4년의 시간이면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산 사람의 성격 정도는 파악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지금 아르벨라가 하고 있을 생각에는 제라드도 동의했다.
제라드는 그의 주인인 1황녀 아르벨라에게 한쪽 무릎을 꿇어 복종을 표하며 대답했다.
“반드시 1황녀님께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
준결승전을 앞둔 대회 참가자들의 대기실은 시끌벅적했다.
“거기! 다들 비켜, 비켜!”
“그레이엄 후작가의 윌슨 님이 오셨다!”
“윌슨 님이 앉으시게 어서 자리를 비우지 못해!”
그때 한 무리가 나타나 유독 거드름을 피우며 소란을 떨었다. 1차전에서부터 시끄러웠던 그레이엄 후작가의 기사들이었다.
가운데 있는 잘생긴 외모의 남자는 그중 유일하게 준결승까지 올라 이번 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도 거론되는 윌슨 파벨라였다. 그가 온몸에 두른 휘황찬란한 무구에 새겨진 그레이엄 후작가의 쌍두 늑대 문장이 유독 눈에 띄었다.
“윌슨 님, 여기 시원한 음료입니다. 그리고 손목을 주물러 드릴까요?”
“어어, 그래. 거기 좀 살살 주물러 봐라.”
윌슨은 옆에서 건네주는 음료를 마시고 안마를 받으며 느긋하게 대기실의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그들은 다른 때와 달리 사람들이 잽싸게 길을 비키지 않고 여전히 대기실 앞에서 미어터질 듯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굴을 구겼다.
“어이, 거기! 길 막지 말고 비키라는 말 안 들려?”
그제야 윌슨을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앗! 야야, 윌슨 파벨라 왔어.”
“저 녀석 또 시작이네.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지원을 받으면 다인가?”
“그냥 저쪽으로 가자. 아까도 복도에서 엄청 시비 걸고 다니던데.”
윌슨은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즐겼다. 그래 봤자 가문, 능력, 외모, 어느 것 하나 자신에게 대지 못할 패배자들의 눈물 젖은 하모니라고 생각하면, 저런 소리들은 즐겁기만 했다.
“오늘따라 대기실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왜 저렇게 많아?”
“준결승전을 앞두고 다들 윌슨 님을 보러 왔나 봅니다.”
윌슨을 따르는 기사들이 그에게 열심히 아부했다.
그에 윌슨의 어깨가 으쓱거리려던 찰나, 갑자기 뒤쪽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얘기 들었어? 지금 대기실에 검은 갑주의 기사가 있는데 드디어 투구를 벗었대!”
그 순간 윌슨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뭐? 검은 갑주의 기사가 얼굴을 드러냈어?’
건국 기념 검술 대회에 혜성처럼 나타나 단번에 유망주로 떠오른 검은 갑주의 기사는 결승에서 윌슨과 맞붙을 것이 거의 기정사실화된 참가자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 대기실 앞에 모여든 사람들은 뒤쪽에 나타난 윌슨을 보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대기실 안쪽을 훔쳐보려 애쓰는 중이었다.
“저리 비켜! 당장 내 앞에서 꺼지지 못해?!”
윌슨은 사람들을 마구 밀치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보호대를 팔에 착용 중인 남자를 발견했다.
짙붉은 머리칼이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차분하고 냉랭한 인상의 얼굴이 생각과 달리 젊어 보였다.
저 정도면 아직 성인도 안 된 것 같은데……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못내 믿기가 어려워 혹시 사람들이 비슷한 검은 갑주를 입은 사람을 보고 착각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옆에 놓인 무기를 보면 그 유명한 검은 갑주의 기사가 확실했다.
“응? 잠깐. 그런데 저 얼굴은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러다 불현듯 뇌리를 스친 깨달음에 윌슨은 경악해서 눈앞에 있는 청년을 손가락질했다.
“너, 설마 1황녀님의 기사?!”
귀족 출신 중에 1황녀의 종속 기사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드물었던 탓에, 당연히 윌슨 역시 소문이 무성했던 제라드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제라드를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었기에, 윌슨은 큰 충격을 느끼며 그를 샅샅이 뜯어봤다. 그리고 곧바로 기분이 나빠져 얼굴을 왕창 구기고 말았다.
‘뭐야, 1황녀의 동정심으로 기사가 된 이단자 출신이라고 해서 별 볼 일 없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쓸 만해 보이잖아?’
분명 정식으로 검을 잡은 건 1황녀의 기사가 된 직후라고 들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몸의 균형이 굉장히 잘 잡혀 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격도 좋은 것 같았고, 몸에 붙은 게 죄다 실용적인 근육인 데다 양질적으로도 훌륭한 걸 보면, 의외로 신체 단련도 꽤 오래 한 듯했다. 직접 대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자신보다 어깨도 더 넓고 키도 클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언뜻 본 옆얼굴이 자신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잘생겼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놈 부친인 라스너 백작도 소문난 미남이었다고 했지.’
윌슨은 자신을 후원하는 그레이엄 후작의 명으로 오늘 대회에서 우승하면 1황녀 아르벨라의 호위 기사 자리를 꿰차려 생각하고 있었다.
윌슨도 그 아르벨라 황녀의 옆에 어울리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래 봬도 어릴 때부터 고향인 남부에서 검술 천재 소리를 듣던 몸이었다. 그러니 카뮬리타의 최강 마법사인 아르벨라의 명성에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또 외모도 남부 최고의 미남으로 이름 높던 자신이니, 아르벨라의 화려한 미모와도 잘 어울릴 것이다.
그러니 어쩌다 운 좋게 1황녀의 은혜로 기사 자리를 꿰찬 쭉정이쯤은 가볍게 비웃으며 걷어차 주려고 했는데…….
윌슨은 괜히 자존심이 좀 상해서 제라드를 위아래로 훑으면서 이죽거렸다.
“하, 네가 검은 갑주의 기사였다니 놀랍긴 하다만. 뭐, 가까이에서 보니 듣던 대로 얼굴 하나는 반반한데. 1황녀님이 종속 기사를 외모로 골랐다는 게 정말인가 보지?”
그러자 윌슨이 대기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그를 무시하던 제라드가 처음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서늘한 눈빛을 받은 윌슨과 그의 뒤에 있던 기사들이 묘한 압박감에 움찔했다.
“네놈……. 눈빛이 왜 이렇게 시건방져?”
곧바로 윌슨이 발끈했다.
그는 비록 한순간이지만, 자신이 저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기세로 밀렸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다.
“설마 준결승까지 운 좋게 올라왔다고 이 윌슨 님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정식으로 1황녀님의 기사로 발탁되면 네 손윗사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제일 먼저 네놈 정신 교육부터 시켜 주마.”
“마, 맞습니다, 윌슨 님! 저런 건방진 놈은 가만히 두면 안 됩니다!”
발끈한 윌슨이 제라드에게 엄포를 놓자, 뒤의 기사들이 서둘러 맞장구쳤다.
“그동안 직책에 어울리지도 않는 종속 기사 놈 때문에 1황녀님의 명성에 이만저만 손상이 간 게 아니야. 이제부터 1황녀님의 명예는 내가 지킬 테니 넌 죽은 것처럼 숨만 쉬고 살아. 알았어?”
“윌슨 님 말씀이 다 옳으십니다!”
그때 마지막 무구를 몸에 찬 제라드가 윌슨이 서 있는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가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다가오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기이하게도, 방금까지만 해도 일부러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짐승이 사냥을 앞두고 몸을 거대하게 부풀려 갑자기 존재감이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윌슨은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예상대로 제라드는 윌슨보다 키가 컸다.
싸늘한 은회색 눈을 내리깐 제라드가 이내 입술을 열어 그 눈빛보다 더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미련한 입으로 1황녀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뭐? 미, 미련? 이게 어디서 감히……!”
“너는 네가 주인으로 섬기고자 하는 1황녀님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모양인데.”
발끈하는 윌슨을 지나치기 직전, 제라드의 입술이 조소를 머금으며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1황녀님이라면 지금 네 말을 듣고 감격하는 게 아니라, 네까짓 게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감히 내 명예를 나눠 지려 하느냐며 비웃으셨을 거다.”
제라드가 아는 아르벨라라면, 자신의 명예를 결코 남의 손에 맡기지 않을 테니까.
제라드는 말문이 막혀 입을 뻐끔거리는 윌슨을 무시한 채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
잠시 후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비들이 경기장에 도착해 대회가 시작되었다.
“검은 갑주의 기사다!”
“우와아아아!”
첫 번째 준결승 시합에는 이번 대회 내내 관중석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 검은 갑주의 기사가 나왔다.
아르벨라는 느긋이 차를 마시며 시합을 관전했다.
시작 신호와 함께 두 기사가 엄청난 속도로 검을 부딪쳤다.
챙강! 챙!
사실 아르벨라는 검술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음량 증폭기를 통해 해설자가 떠드는 소리를 들어도 그냥 그렇구나 할 뿐이었다.
첫 번째 준결승전의 결과는 그녀가 찻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나왔다.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의 승리에 관중석에는 또 한차례 열기가 들썩였다.
검술에 일가견이 없는 문외한이 보았을 때도, 까만 잔상을 남기며 빛처럼 움직이는 검은 갑주의 기사는 실력이 굉장해 보였다.
아르벨라로서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두 번째 준결승 시합이 끝난 후 결정된 또 한 명의 결승 진출자는 그레이엄 후작의 후원을 받는 윌슨 파벨라였다.
*
“이제 결승전이네! 우리끼리도 내기할래?”
“내기 소리는 꺼내지도 마. 1차전 때 아래 관중석에서 우승 후보자 두고 판돈 거는 걸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나도 꼈는데 지금 완전히 망했어.”
“난 그거 그레이엄 후작이 후원하는 기사에 걸었는데, 우승해도 거의 본전에 가깝더라. 검은 갑주의 기사한테 걸어 볼걸.”
아르벨라는 황녀와 황자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검은 갑주의 기사한테 1차전 때부터 건 사람은 세 명밖에 없어서 만약 우승까지 하면 배당률이 역대 최고일 거래.”
‘그 선견지명이 있는 한 사람이 바로 나란다.’
“저기, 언니.”
그때 갑자기 옆에 있던 유디트가 아르벨라에게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지금 다른 황녀, 황자님들이 말씀하신 우승 후보자를 점치는 내기 도박이요……. 사실은 저도 1차전 때부터 검은 갑주의 기사한테 걸었는데요.”
만약 그때 아르벨라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면, 품위 없이 입 밖으로 찻물을 내뿜었을지도 몰랐다.
“뭐?”
그녀는 당황해서 유디트를 쳐다보았다.
“아니, 뭘 보고 그렇게 일찍부터 제, 아니, 검은 갑주의 기사한테 돈을 건 거야?”
“사실은 대회 전에 잠깐 세면실에 가려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우연히 마주쳤는데 저한테 길을 알려 줘서……. 그래서 한번 재미 삼아 걸어 봤어요.”
유디트가 쑥스러운 듯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곧 그녀는 아르벨라에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혹시 돈 많이 받으면 저도 언니가 갖고 싶으신 거 다 사 드릴게요!”
그래 봤자 유디트가 내기에 걸고 또 돌려받을 돈은 아르벨라의 입장에서는 어린애 코 묻은 돈 수준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아르벨라가 누구인데, 갖고 싶은 물건도 못 사서 어린 황녀의 도움을 받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해맑게 들떠 있는 유디트의 모습을 보니 왠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르벨라는 생각한 대로 유디트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마구 헝클여 줬다. 클로에가 옆에서 질투하며 왁왁거려서 그녀의 머리도 똑같이 쓰다듬어 줘야 했던 건 덤이었다.
“이제부터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후 우승 후보자 두 명이 경기장에 나왔다.
“그럼 최종 경기를 앞둔 우승 후보자들의 각오와 소감을 한마디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윌슨 파벨라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반드시 우승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경기 때마다 보인 허세 섞인 모습으로 봐서, 결승전에서도 한껏 잘난 척하며 거드름을 피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진지한 태도였다.
이후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가 처음으로 투구를 벗었다.
아르벨라의 눈에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고개를 흔들어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자, 관중석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유명한 검은 갑주의 기사가 처음으로 얼굴을 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 뭐야……?! 저, 저, 저! 저 검은 갑주의 기사가 언니 기사였어?!”
그때 클로에가 놀라서 외친 소리가 황족 관중석에 울렸다.
유디트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르벨라를 돌아봤다.
제라드를 알아본 황족과 귀족들이 크게 술렁였다.
예전에는 제라드를 향한 그들의 눈에 담긴 게 오로지 부정적인 감정뿐이었다면, 지금은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충격과 놀라움이었다. 제라드의 성장에 놀라는 귀족들도 있었고, 우승 가능성을 재보듯이 제라드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도박꾼들도 있었다.
제라드의 얼굴을 보고 황실 시녀들처럼 호들갑을 떠는 이들도 보였다. 심지어 귀족석에 앉아 있던 쥬논 그레이엄은 제라드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아르벨라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긋하게 즐겼다.
‘뭐, 우리 애가 잘 크긴 했지. 다 이 황녀님이 잘 키워 준 덕분 아니겠어?’
인재를 육성하는 스스로의 능력을 자화자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클로에의 말대로 이 대회가 바로 제라드의 첫 공식적인 출전이었다. 그를 처음으로 온 제국민들 앞에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제라드를 처음 거둔 지 4년이 지났으니 슬슬 때가 되었다. 아무리 잠깐 가지고 있는 기간 한정 소유물이라 해도 아르벨라의 것은 모두 최고여야만 했다.
이는 제라드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오늘 이후로 그를 무작정 무시하며 헐뜯는 자들은 자취를 감출 터였으니.
이내 제라드가 아르벨라를 보며 기사의 맹세를 할 때처럼 검을 들어올렸다.
“제 주인이신 1황녀님께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시작 신호가 울리자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움직였다.
챙강!
곧 거대하게 울린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눈부신 섬광이 하늘을 갈랐다.
*
“1황녀님, 축하드립니다!”
“1황녀님의 종속 기사는 정말 강하더군요.”
“설마 우승까지 하다니, 역시 1황녀님이 직접 거두신 기사답습니다.”
대회가 끝난 뒤, 나는 산뜻한 기분으로 내게 쏟아지는 축하 인사를 들었다.
조금 전에는 황제까지 묘한 눈으로 나를 보며 ‘네 종속 기사가 생각보다 쓸 만하더구나.’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언니, 설마 검은 갑주의 기사가 언니의 종속 기사일 줄 몰랐어요.”
유디트가 아직도 신기하다는 듯이 나한테 말했다.
‘그러게, 나도 아까 네가 제라드에게 돈을 걸었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혹시 원래 유디트의 기사가 될 운명이던 놈이라 뭔가를 느낀 건 아닌지 한순간 의구심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저도요, 황녀님. 어떻게 저한테까지 이렇게 감쪽같이 숨기시고…….”
뒤에서 마리나가 허탈한 듯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갑주의 기사가 제라드라는 걸 알게 되니 정신적 타격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닌 것 같았다.
“아, 그레이엄 후작!”
그러다 나는 표정 관리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레이엄 후작을 발견했다.
이럴 때는 외롭게 서 있는 후작을 혼자 둘 수 없지.
“후작이 후원한다는 그 기사 말이야. 이번에는 안타깝게 되었어. 후작이 그렇게 우승을 장담했었는데 말이야.”
나는 안타깝다는 듯이 웃으면서 그레이엄 후작의 속을 긁어 줬다.
“물론 그 기사의 실력도 나쁘진 않았지만 내 기사가 너무 강한 걸 어쩌겠어? 후작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예…….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이번에는 그레이엄 후작도 타격이 컸는지, 이를 악물며 가까스로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오죽하면 마지막 말은 거의 ‘축하드릅느드.’로 들렸을 정도였다.
그레이엄 후작은 이 자리가 몹시 수치스러운 듯, 곧바로 옷자락을 거칠게 휘날리면서 경기장을 떠났다. 그 모습을 보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한테 자기 사람을 밀어 넣으려 하다니. 백 년은 이르지.’
사실 그레이엄 후작은 제라드가 검은 갑주의 기사인 걸 모르고 그동안 온갖 치사한 짓거리를 다 시도했다. 경기 전에 이상한 약을 탄 물을 먹이려 한다든가, 우연을 가장해 부상을 입히려 한다든가, 대기실에서 몰래 무구를 망가뜨리려 한다든가.
‘너무 전형적인 악역다워서 할 말이 없는 수법들이었지.’
“1황녀님! 1황녀님~!”
그때, 귀에 익숙한 팔랑거리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은 바비 몬테라였다.
“종속 기사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런 실력 있는 자를 거두어 기사로 삼으시다니, 역시 1황녀님의 안목이 기가 막히십니다!”
바비 몬테라는 4년이 지난 요즘도 이렇게 여전히 내 뒤를 따라다니며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주고 있었다. 전에 그레이엄 후작이 바비 몬테라와 나를 엮으려 한 이후 일부러 거리를 두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내게 편지를 보내고 말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바비 몬테라를 마냥 무시하기 좀 미안해서 적당히 상대해 주고 있었다.
“고마워, 몬테라 영식. 내 기사가 들으면 기뻐하겠군.”
“실은 저도 검은 갑주의 기사를 강력한 우승 후보로 생각해 관중석에서 하는 내기에 소박하게나마 판돈도 걸었었거든요!”
“아, 그래? 혹시 1회전에서부터 걸었어?”
혹시 나와 유디트를 제외하고 1회전에서 제라드에게 판돈을 건 다른 한 사람이 바비 몬테라인가 싶어서 물었다.
하지만 내 물음에 그는 어색한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준결승에서부터…….”
“그랬군…….”
에라이, 그건 거의 막바지에 건 거잖아.
나는 바비 몬테라에게 흥미를 잃고 눈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제라드는 경기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또 다른 수려한 미청년이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내 앞에 나타났다.
“1황녀님.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인사드립니다.”
스무 살이 된 킬리안 베른하르트는 여전히 흰 눈송이 같은 은빛 머리칼과 빨려 들 것만 같은 보라색 눈이 어쩌구…… 였다.
전에도 수려했으나 이제는 그보다 더 눈에 띄는 완성형 외모를 갖게 된 킬리안이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했다. 평소라면 그를 보고 반사적으로 얼굴을 슬쩍 찡그리고도 남았겠지만, 오늘의 나는 마음이 넓었다.
“소공작도 오늘 경기를 관전하러 왔었군.”
그래서 그냥 오늘만큼은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킬리안에게 인사해 주었다.
“예, 1황녀님의 종속 기사의 경기가 상당히 인상 깊더군요.”
“그렇지? 내가 좀 인재를 보는 눈이 있어.”
그런데 왠지 한순간, 킬리안의 미소가 좀 삐딱해진 것 같았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입니다만, 그 종속 기사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건 또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의아하게 답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난 내 것은 특별히 아끼는 주의거든.”
“그러십니까. 그 종속 기사가 부럽군요.”
그때 킬리안이 또 미묘한 말을 했다.
“그런데 저도 카뮬리타 황실에 충성을 바친 가신이니, 1황녀님의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의 보라색 눈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런 식으로 킬리안이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는 말을 한 번씩 툭툭 내뱉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피차 반은 장난으로 하는 소리란 걸 알아서 나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난 나한테만 맹목적인 사람이 좋거든.”
킬리안이라면 여느 때처럼 매끄럽게 웃는 얼굴로 내 말을 받아넘기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킬리안의 눈이 평소보다 살짝 굳은 것 같았다.
“1황녀님, 저는…….”
“언니!”
그러다 킬리안이 다시 입을 열어 내게 무슨 말을 하려 했을 때, 유디트가 다가왔다.
“언니, 저 잠깐 아래 관중석에……. 아, 다른 분하고 얘기 중이셨군요. 죄송해요.”
“아니야, 이제 막 인사 끝난 참이었어.”
어째서인지 흥분해서 뛰어오던 유디트가 내 앞에 있는 킬리안을 보고 주춤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소란을 떤 게 창피한 것 같았다.
킬리안이 먼저 유디트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4황녀님.”
“네, 안녕하세요, 베른하르트 소공작님.”
마찬가지로 짧은 인사를 되돌린 유디트가 발뒤꿈치를 들고 내 귀에 소곤거렸다.
“저 잠깐 관중석에 다녀와도 될까요? 우승자가 발표되어서 돈을 준대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 얼굴 홍조는 그래서 생긴 거였나? 어쩐지 들뜬 얼굴이더라.
“네가 직접 가면 너무 눈에 띌 거야. 시종을 보내는 게 좋겠다.”
게다가 최종 배당률을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1회전에서부터 걸었으면 돈이 많이 불어났을 테니, 어차피 유디트 혼자서는 그걸 다 들고 오기 힘들 것이다.
유디트는 신이 난 듯이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시종을 찾아 또 바쁘게 움직이는 유디트의 뒷모습을 보다가 마리나를 그녀에게 보냈다.
왠지 물가에 내놓은 애 같아서 혼자 보내기 불안하단 말이지.
“역시 웃는 얼굴이 변하셨습니다, 1황녀님.”
그때 내 앞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직까지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킬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특히 4황녀님을 보실 때 눈빛이 예전과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런데 킬리안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한순간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았다.
하필 정면에 서 있던 킬리안도 그걸 봤는지 그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런데 내 표정이 정말 많이 이상했는지, 킬리안이 드물게도 당혹감과 곤혹스러움이 번진 얼굴을 한 채로 서둘러 덧붙였다.
“1황녀님. 나쁜 의미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 지금이 더 보기 좋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혹시 오해하셨다면…….”
킬리안의 말은 내 한 귀로 흘려 지나갔다. 하지만 어느새 굳은 얼굴은 다시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킬리안과 대충 인사를 나누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
“후, 후작님!”
아직 무구를 채 벗지도 못한 윌슨 파벨라가 쥬논 그레이엄을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 왔다.
쥬논 그레이엄은 그를 무시한 채 경기장을 빠져나가며 입안으로 끊임없이 욕설을 씹어 삼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경기장에서 보았던 광경이 연거푸 반복해 떠오르고 있었다.
우승자의 권리로 1황녀에게 검을 바치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하던 글렌 라스너의 아들놈. 그리고 여느 때처럼 오만하게 웃으며 자신을 깔보던 1황녀.
그 두 사람을 생각하자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레이엄 후작은 거칠게 문을 닫고 마차에 올랐다.
“후작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뒤로 겨우 따라붙은 윌슨이 막 출발하려던 마차에 다급히 매달렸다.
그는 결승전에서 부상까지 입어 팔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후작님! 반드시 우승했어야 했는데, 절대 제 실력이 그놈보다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한순간 방심해서 실수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시끄럽다! 어디서 감히 내 앞에 그 낯짝을 들이미는 것이냐?”
변명하는 윌슨에게 더 진노한 그레이엄 후작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너는 내게 수치심을 주었다. 내가 분명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누누이 말했었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후, 후작님…….”
“그러니 파벨라 가문과 네놈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굳이 내가 입 아프게 직접 말하지는 않겠다.”
쥬논 그레이엄은 윌슨에게 서슬 퍼렇게 일갈한 뒤 마차를 출발시켰다.
다리에 힘이 풀린 윌슨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멀어지는 마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대로는 안 돼.’
달리는 마차 안에서 쥬논 그레이엄은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세게 악 물었다.
그동안에는 1황녀 아르벨라가 무슨 냄새라도 맡은 것처럼 자신을 감시해 몸을 사리고 있었다. 또 아르벨라가 개발한 빌어먹을 마법 해체식 때문에 마법적 흔적을 남기게 되면 꼬리가 잡힐 위험이 있어, 전보다 은밀히 그녀를 노리는 것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쥬논 그레이엄의 누이인 2황비 카타리나라도 도움을 주면 좋으련만, 그녀는 생긴 것답지 않게 마음이 약해 그의 계획에 쉽게 동참해 주지 않았다.
‘젠장, 준비 중인 일에 빨리 진척이 생기면 좋으련만.’
그 와중에 아르벨라를 상대하려 남몰래 은밀히 진행 중이던 일도 계속 실패만 거듭하고 있어, 그레이엄 후작은 속이 끓었다.
그는 열이 오른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역시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눈앞에서 자꾸만 거슬리게 구는 것들에게 어떻게든 빨리 세상의 쓴맛을 보여 줘야만 했다.
“숲으로 가자! 오늘은 다들 할당량의 두 배는 모아 와야 할 것이다!”
그레이엄 후작은 아르벨라를 나락으로 빠트릴 실험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마부석에 앉은 부하를 닦달했다.
*
“제라드, 기분이 어때?”
그날 밤, 아르벨라가 제라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르벨라는 건국 기념 대회의 우승자를 위해 열린 파티를 위해 의상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요즘 균열이 발생하는 일이 많아지며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한 아르벨라도 물론 눈에 띄었지만, 오늘처럼 연회에 걸맞은 차림을 한 모습도 또 다른 의미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건 제라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제라드는 황실 소속 기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번듯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동안에도 1황녀의 종속 기사로 아르벨라의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하면서 적당한 품위 유지 정도는 했었다.
아르벨라의 기사라면 누구에게도 얕보여서는 안 된다며 시녀인 마리나가 하도 열성적인 의견을 토해낸 탓에 제라드는 어딜 가도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를 위해 준비된 제복은 파티의 주인공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단번에 이해될 정도였다.
아르벨라의 명을 받은 황실 재단사들이 심혈을 기울인 덕에 오늘 제라드가 입은 제복은 그의 장점만 최대치로 두드러져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확실히 이 모습을 보면 4년 전 숲에서 엉망이 된 모습으로 늑대들에게 쫓기고 있던 소년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제라드는 아르벨라의 질문을 받고 고개를 돌려 연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르벨라와 제라드에게 다가와 오늘 대회에 대한 축하와 감상을 떠들던 사람들이었다.
“이상하네요.”
제라드는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가장 이상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전과 달리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말을 걸고 호의를 보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이상했다.
물론 아직 그를 꺼리는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늘 만난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아르벨라의 명령대로 대회에 나가 그럴듯한 성과를 하나 냈을 뿐인데, 그 하나만으로도 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것 같았다.
하기야 이건 그냥 대회가 아니라 우승자에게 황실에 들어올 기회까지 부여하는 큰 규모의 대회이긴 했다. 또 지금까지 제라드에게는 1황녀의 자비로 거두어진 이단자 출신의 종속 기사라는 꼬리표만 붙어 있었다.
그러니 사실상 제라드라는 사람 자체는 변한 것이 없되, 그를 감싸고 있는 포장지는 훨씬 깨끗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이 화려한 제복처럼.
“이상하겠지. 그래도 지금을 즐겨. 너도 금방 적응될 거야.”
옅은 웃음이 서린 아르벨라의 목소리가 은은한 음악 소리에 섞여 귓가에 울렸다.
“자, 오늘의 승리자를 위한 선물.”
다음 순간 아르벨라가 내민 건 작은 기포가 서린 유리잔이었다.
제라드의 입매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카뮬리타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군요.”
마력 회로를 살짝 건드려 기분을 들뜨게 하는 효과가 있는 미성년자들의 음료였다. 종종 아르벨라가 파티에서 이것을 마시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되어 돌아오던 기억이 제라드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르벨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제라드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이건 진짜 술이야. 너나 나나, 이제 준성인이잖아.”
성인이면 성인이고 미성년이면 미성년이지, 준성인은 또 뭐란 말인가.
“자, 받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이 정도 일탈은 해도 돼.”
하지만 아르벨라가 재미있는 장난을 치듯이 짓궂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그녀가 내민 것을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제라드는 결국 아르벨라가 주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옆에 서 있는 아르벨라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아까만 해도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표정을 굳히고 있더니, 그래도 지금은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연회장 안의 사람들을 응시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묘하게 건조한 감정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것을 목격한 제라드의 눈에 날카로운 이채가 스쳤다.
*
얼마 전부터 아르벨라는 부쩍 이런 얼굴을 할 때가 많았다. 그녀가 이런 얼굴을 할 때마다 제라드는 이유를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르벨라가 대답하지 않을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르벨라가 미리 말해 둔 건지 한동안 두 사람을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간 둘이서만 침묵을 공유할 수 있었다.
“제라드.”
그러다 잠시 후, 아르벨라가 조용한 음성으로 제라드를 불렀다.
“넌 생일이 언제야?”
이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라드에게 기이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지난 4년 동안 아르벨라가 그에게 이런 사적인 부분을 물어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제라드는 잠깐 말이 없다가 귀에 흘러들던 음악이 막 끝났을 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뭐?”
“농담인데.”
“야.”
아르벨라가 발끈한 듯이 제라드의 팔을 빈 술잔으로 쳤다.
“무엄하긴. 넌 황녀님에 대한 존경심을 더 배울 필요가 있어.”
조금 전의 이상한 낯빛을 지운 채로 아르벨라가 투덜거렸다. 그 모습은 제라드가 알고 있는 보통의 아르벨라와 같았다. 그래서 제라드는 안심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마음에 조금 놀랐다.
여러 가지 변화를 내재한 파티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19. 다가오는 폭풍, 유디트의 마력 각성
건국 기념 검술 대회 이후로 킬리안의 말을 생각하는 날이 늘었다.
“역시 웃는 얼굴이 변하셨습니다, 1황녀님.”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세계의 이면에서 본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의 내용을 떠올리는 게 줄어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유디트나 제라드 옆에서 마음을 풀고 있을 때도 많은 것 같았다.
사실 나는 킬리안이 말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유디트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별로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도착했습니다, 황녀님.”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경계심을 느끼고 있던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벨라 언니!”
“1황녀, 어서 와요.”
티 파티가 열리는 방에 들어서자 먼저 앉아 있던 여인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황후 전하. 그리고 황비님들. 동생들도 반갑구나.”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대부분 나를 반겨 주었으나, 2황비 카타리나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특히 내 뒤에 서 있는 제라드에게 시선이 닿았을 때는 입술을 아프게 꾹 깨무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오늘만큼은 그런 2황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황궁 여인들 간의 모임이라 어쩔 수 없이 나오긴 했지만, 특히 이번에는 내 얼굴을 보기 싫었겠지.’
얼마 전에 열린 건국 기념 검술 대회에서 내 종속 기사인 제라드가 그레이엄 가문의 후원을 받는 기사를 누르고 우승했으니, 얼마나 꼴 보기 싫겠는가.
반면 나는 이 상황이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2황비와 반대로, 바쁜 일정 중에도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이기도 했다.
“앉아라, 아르벨라.”
별로 탐탁지는 않았지만 내 자리는 어머니의 옆이었다.
어쩐 일로 오늘은 어머니도 티 파티에 참석했다. 어머니와는 지난번 황후궁에서 밀리엄의 일로 마주친 게 마지막이라, 사실 이렇게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는 게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게 편했던 건 아주 어릴 때 외에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군. 저 시녀, 오늘은 밀리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머니를 따라왔잖아?’
그보다 내 신경을 건드리는 건 어머니의 뒤쪽에 서 있는 미레이유 하이더스였다.
자리에 앉기 직전에, 벽에 붙어 선 채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연한 풀색 머리에 주황색 눈을 가진 주근깨 박힌 얼굴은 오늘도 얌전하고 순종적으로 보였다.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저 시녀는 어머니의 신뢰를 상당히 많이 얻은 것 같았다. 밀리엄을 거의 전담해 돌보는 데 이어, 이런 자리에까지 어머니와 동행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는 트집을 잡을 만한 부분이 없어, 일단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