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벨라는 제라드가 자신의 뒤를 쫓는 것을 알았지만 그를 돌아보지 않고 앞서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제라드가 아직 망설임을 품은 채로도 충분히 쫓아올 수 있을 정도로 느렸다.
기묘하게 고요하고 평온하던 밤이었다.
*
신열이 가라앉은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연히 황제 폐하를 만나는 거였다.
“그래, 1황녀. 자숙은 충분히 하였느냐?”
그의 옆에는 샤렐 황후와 카타리나 2황비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탐탁지 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샤렐 황후는 남들의 입방아에 오를 짓을 벌인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테고, 카타리나 2황비는 내게 고작 자숙 따위의 벌만 내린 황제가 불만스러운 것일 터였다.
“예, 아버지. 일전의 일은 명하신 대로 궁에서 자숙하며 반성했습니다.”
“아무리 가여운 아이를 위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마음이 과했다. 백야의 전당에서 그동안 이만저만 내 골치를 아프게 한 게 아니야.”
“황실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모범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더 성심성의껏 노력하겠습니다.”
“흠, 그래. 카뮬리타 황실을 위해 늘 앞장서 솔선수범하던 황녀이니, 이번 일은 더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겠다.”
“황송합니다, 아바마마.”
우리는 언제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졌냐는 듯이 뻔한 대화를 짤막하게 나누고 헤어졌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이번 처사는 너무 가벼운 게 아닙니까?”
“2황비, 지금 폐하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겐가?”
역시 카타리나 2황비가 황제의 결정에 반발하고 황후가 거기에 또 날카롭게 일침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피곤함이 벌써부터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본궁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다음 일정을 위해 걷고 있을 때, 마리나에게 시녀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와 뭐라고 귓속말했다.
“1황녀님.”
그냥 무시해도 될 일이 아닌지, 이후에는 마리나가 내게 와서 시녀에게 들은 소식을 전달했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그 아이도 참, 귀찮은 일에 끊임없이 휘말리는구나.”
마리나가 내게 말해 준 건 유디트가 현재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거였다.
안 그래도 마침 유디트에게 한번 들러 봐야겠다 싶었는데 그 수고를 덜어 준다고 해야 할지.
“가자. 마침 가까운 곳이네.”
나는 마리나가 들고 있던 양산을 직접 옮겨 받고 앞서 걸었다.
*
내가 향한 곳은 보라색과 분홍색이 섞인 희귀한 품종의 장미가 지천에 피어 있는 화원이었다.
화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진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여기가 3황비 소피아가 직접 관리하는 곳이었던가.
“야, 그렇게 굼떠서 오늘 해 지기 전에 찾을 수나 있겠냐?”
지금 들려온 저 꿀꿀거리는 목소리의 주인이 3황비의 아들이니 맞겠지.
“아까보다 손이 느려졌는데, 너 지금 속으로 내 욕하느라 그런 건 아니지?”
유디트와 동갑인 2황자 로이드.
그가 계속해서 떠드는 목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내가 리키랑 놀아 주다가 실수로 리키 장난감 대신 네 노예 어미의 유품 좀 집어 던졌기로서니,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아니에요, 2황자님……. 화나지 않았어요.”
“그래? 하긴 내가 특별히 너한테 우리 어마마마 화원에 들어가서 그 쓰레기 같은 물건을 직접 찾을 기회까지 줬잖아. 그럼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말이야.”
“네……. 감사합니다, 2황자님.”
음, 벌써부터 고구마의 향기가 느껴지는군.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마리나가 아까 알려 주었을 때보다 상황이 더 탄 고구마 맛으로 진행되었다는 걸 알았다.
내가 듣기로 분명 잘못은 2황자 로이드가 저질렀는데, 유디트가 저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고 있는 것부터가 정상적이지 않았다.
2황자의 거들먹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슬슬 기다리기 지루해지는데 빨리빨리 좀 해. 아니면 역시 별로 소중한 유품이 아닌가? 그냥 우리 리키 개 목걸이로 줘도 되겠어?”
“컹컹!”
“아니요, 금방 찾을 수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잠시 후 목소리의 주인들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 머리칼과 진녹색 눈동자를 가진 뚱뚱한 소년이 티 테이블 앞에 앉아 한가롭게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그가 기르는 사냥개도 잔디 위에 드러누워 개껌을 씹는 중이었다.
반면 검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는 그 앞에 있는 장미 덤불 안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모습이었다.
조경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덤불 바깥은 가시를 정리해 깔끔했지만, 그 안쪽에는 제거되지 않은 가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증거로, 지금 장미 덤불 안에 들어간 소녀의 행색은 멀쩡하지 못했다.
가시에 걸린 치마는 찢어졌고 꽃이 빼곡한 덤불 속을 직접 뒤진 손과 팔에도 긁힌 자국이 곳곳에 나 있었다.
그 웃기지도 않은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
“너희, 지금 거기서 뭐 하니?”
“푸읍!”
2황자 로이드는 장미 덤불 속에서 바보같이 쩔쩔매는 유디트를 구경하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마시던 차를 입 밖으로 뿜었다.
듣기만 해도 뒷덜미를 차갑게 만드는 저 소름 끼치는 목소리는 분명……!
“헉! 아, 아르벨라 누나?”
급히 뒤돌아보자 역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첫째 누이인 1황녀 아르벨라였다.
그녀는 어쩐 일로 손에 직접 든 양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로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나가 우리 어머니 화원에는 왜…….”
‘근신 중인 거 아니었나?’
원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아르벨라였으나, 백야의 전당에서 미친 짓을 저지르고 나서는 한동안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것도 어제까지였는지, 오늘은 꼭 황제를 만날 때처럼 격의에 맞게 단장한 아르벨라가 인형처럼 예쁜 얼굴을 갸웃 기울인 채로 로이드를 응시했다.
“오, 오랜만이네, 아르벨라 누나. 이번에 큰 사고 하나 쳤다더니, 벌써 밖에 나와도 되는 거야?”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네 눈앞에 있는 거 아니겠어?”
“그, 그렇지…….”
경계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는 로이드의 얼굴이 오늘따라 멍청해 보였다.
“1황녀님……!”
유디트도 덤불을 뒤지다가 뒤늦게 아르벨라를 발견하고 숙였던 몸을 번쩍 일으켜 세웠다.
“오랜만에 뵈어요! 그동안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 와중에도 아르벨라가 반가운 듯이 유디트의 얼굴은 환해져 있었다.
게다가 정말 아르벨라가 그리웠던 듯,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는 중에는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졌다.
아르벨라도 힐끗 그런 유디트를 쳐다봤다.
“그래, 유디트. 정말 오랜만에 보네.”
오랜만에 유디트의 맹목적인 눈빛을 받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만약 유디트가 진짜 동물이었다면 눈이 마주친 순간 살랑살랑 바쁘게 꼬리를 흔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내 동생들이 친목 도모를 하고 있던 건 아닌 것 같고.”
가시에 찔리고 긁혀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유디트의 몸을 한번 훑은 아르벨라가 다시 로이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이드, 뭘 하고 있었는지 물었는데 대답이 없네.”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짐짓 가벼운 어투였지만 2황자는 이상하게 뒤통수가 시렸다.
요즘은 그런 느낌이 든 적이 없었는데, 왠지 예전에 아르벨라에게 건방지게 나대다가 된통 당해 다리가 부러졌을 때의 생각이 났다.
비록 근육이 아니라 살로 키운 몸집이긴 했지만, 어쨌든 2황자의 체격은 또래에 비해 월등했다.
그러니 꼭 설탕이나 유리로 만든 인형같이 생긴 1황녀 아르벨라를 앞에 두고 그가 겁낼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살얼음이 깔린 호수처럼 시린 빛을 발하는 연하늘색 눈동자 앞에서 로이드는 오늘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나…… 나는…….”
아르벨라가 요구한 대로 이 상황을 설명하는 건 둘째 치고, 왠지 그녀를 납득시켜야만 자신이 무사할 것 같은 기묘한 압박감까지 느껴졌다.
“저 계집애가 화단에 자기 어머니 유품을 떨어뜨렸다고 해서 특별히 직접 찾아볼 기회를 주고 있던 것뿐…….”
“아하, 지금 네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 있는 목걸이 말이지?”
아르벨라가 손가락을 한번 소리 나게 튕기자 2황자 로이드의 바지에 불룩하게 숨겨져 있던 낡은 목걸이가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혼자 빠져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헉! 이, 이걸 여기 숨길 걸 누나가 어떻게……!”
설마 이렇게 아르벨라가 오자마자 들킬 줄은 몰랐는지, 로이드가 허둥지둥거렸다.
“2황자님, 그건……! 왜, 왜 그 목걸이가 2황자님 주머니에 있어요?”
유디트의 얼굴에도 충격이 떠올랐다.
“조금 전에 황자님이 주워서 실수로 화단에 던졌다고 했잖아요. 설마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
그녀는 설마 로이드가 자신을 속일 거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던 듯했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유독 창백하게 보이는 유디트의 얼굴에 실망과 슬픔이 떠올랐다. 군데군데 상처가 나 피까지 맺힌 그녀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유디트에게서 드러난 감정에 분노는 없어, 아르벨라는 실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머금은 채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러나 2황자 로이드는 당연히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빨개진 얼굴을 구기면서 아르벨라에게 소리쳤다.
“씨, 뭐야……! 아르벨라 누나는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그래?”
평소라면 다른 사람도 아닌 아르벨라를 상대로 이렇게 겁 없이 큰 소리를 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의 속임수를 들통 내 창피하게 만든 그녀에게 잔뜩 부아가 치민 기색이었다.
“평소에는 저 계집애한테 관심도 없었잖아! 누가 뭐라고 하든, 어떻게 괴롭히든, 신경도 안 썼잖아!”
하여 로이드가 신경질적으로 외친 말을 듣고, 아르벨라는 하룻강아지를 보듯이 웃었다.
“그래, 로이드. 내 멍청한 동생아. 그래서 네 말대로 내가 이제부터 그 관심이란 걸 좀 가져 보려고 하는데.”
햇빛이 밝고 따사로운 한낮임에도 왜인지 보는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리고 로이드, 너는.”
동시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강대한 마력이 움직였다.
“재수 없게 하필 지금 내 눈에 띈 게 문제야.”
촤아악!
유디트를 둘러싸고 있던 장미 덤불이 그녀를 피해 일제히 살아 있는 것처럼 빠르게 바닥을 기어 미끄러졌다.
보라색 홍수가 순식간에 2황자 로이드의 몸을 뒤덮었다.
“으아악!”
로이드도 마법을 사용해 그것을 불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어림없었다.
“악! 아야! 앗, 따가워……!”
“2, 2황자님!”
유디트가 그런 것처럼 잔가시에 찔린 로이드가 발버둥 치며 요란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가 펄떡일수록 가시에 긁힌 상처도 점점 더 많아질 뿐이었다.
주위에 있던 시종들이 놀라서 로이드에게 달려갔다.
아르벨라는 그들에게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이 시선을 떼고 텅 빈 화단에 멍하니 선 유디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디트, 이리 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유디트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네 궁으로 돌아가자.”
그런 그녀를 향해 아르벨라가 손을 내밀었다.
유디트는 이전에 그녀의 궁에서 아르벨라가 지금처럼 손을 내밀었을 때 그랬듯이, 잠시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네.”
그러다가 한 발 한 발 천천히 앞으로 내디뎌 걸음을 옮겼다.
“네, 1황녀님……!”
마침내 거의 뛰듯이 아르벨라에게 다가간 유디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간 마력이 유디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아르벨라는 깨끗해진 팔을 끌어당겨 그녀가 쓴 양산 안에 유디트를 들였다.
곧 짙은 그림자가 유디트의 몸을 완전히 검게 뒤덮었다.
한순간 아르벨라의 얼굴에 떠올랐던 서늘한 미소도 그림자에 함께 먹혀 사라졌다.
두 사람은 바닥에 융단처럼 깔린 장미를 밟으며 함께 화원을 나섰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검은 음영 속이었지만 시야에 비친 세상은 여전히 온통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그런 초여름이었다.
13. 괴물 황녀님의 귀여운 작은 새들
남들 눈에는 근신이었으나 실상은 자발적인 휴식기였던 짧은 은둔 생활을 끝내고 나는 다시 대외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일단 첫 순서는 백야의 전당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지난날 내가 부순 마법사들의 연구실 수리 비용을 성의 표시로 직접 전달하고, 겸사겸사 제라드는 이제부터 내가 잘 키우겠다고 이번 일에 공식적인 종지부까지 쾅쾅 찍고 왔다.
그러고 나서 그냥 돌아오려다가, 내가 망가뜨린 결계들의 마력장이 꼬여서 아직도 복구하지 못하고 생고생을 하고 있기에 선심 써서 그것도 고쳐 줬다.
그러자 전과 달리 내게 데면데면하게 굴던 마법사들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이번 일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계속 서먹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예전처럼 그들에게 친근감 넘치는 인사를 들으며 백야의 전당을 빠져나왔다.
다만 레반테온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혹시 이번에 날 도운 걸 들켜서 난처한 상황에 처했나 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이번 학회 때 발표자로 뽑혔던 마법사가 제라드의 일에 연루되어 퇴출되는 바람에 레반테온이 강제적으로 대신 그 자리를 때우게 되었다고 한다.
약속 잊으시면 안 됩니다. 조만간 다시 연락드릴 테니까, 꼭이요!
대신 레반테온은 나한테 잉크로 꾹꾹 눌러쓴 짧은 편지를 남겼다. 그러고 나서 다른 마법사들에게 끌려가 연구실에 강제로 통조림 당했다.
한편 유디트와의 일로 나한테 봉변을 당한 2황자 로이드 쪽은 조용했다.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한 건 당연히 아닐 테고, 그냥 나한테 덤빌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의 모친인 3황비 소피아도 아들과 달리 순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으니, 그녀가 아들 대신 나한테 따질 리도 없었다.
“언니! 설마 진짜 그 천한 이단자 놈을 종속 기사로 삼을 거야?”
어제는 클로에도 만났었다.
몇 번이나 보내 온 서신에서도 느꼈듯이 그녀는 이번 일이 무척이나 놀라운 듯했다.
“그래. 그러려고 데리고 나온 거니까.”
“언니……. 요즘 정말 왜 그래? 갑자기 자선 사업에 취미라도 생겼어? 그럼 차라리 나랑 같이 고아원에 기부라도 할래?”
나는 클로에의 말을 듣고 웃었다. 유디트에 이어 느닷없이 이단자까지 데려와 거두었으니, 이해가 안 될 만도 하지.
“네 말처럼 요즘 새로운 취미 생활이 꽤 재미있더라고.”
그리고 클로에의 말처럼 요즘 나는 새장 속의 두 마리 새들을 돌보는 데 시간을 쏟고 있었다.
“제라드는 좀 어떻지?”
“아직 몸을 회복 중이에요.”
“그래, 일단 다 나을 때까지 쉬게 해. 밖에 마음대로 못 나가게 하고.”
그중 하나인 제라드는 현재 천천히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를 치료하는 데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일단 내 입장에서는 제라드가 빨리 낫지 않는 게 편리했기 때문이다. 혹시 몸이 금방 괜찮아지면 또 탈출하겠다고 설칠지도 몰랐으니까.
또, 마법이 쉽고 간편하긴 하지만 계속 남발하다 보면 자체 치유력이 약해질 수 있어 위험했다.
제라드는 근시일 내에 백야의 전당에서 몇 번 치유 마법에 당한 적이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았다. 내 소중한 제물이 다 자라기도 전에 망가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같은 의미로, 앞으로는 유디트를 내가 직접 치료해 주는 것도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마리나가 나간 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에 다시 눈길을 옮겼다.
지금 제라드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있는데, 생각보다 별 내용은 없었다. 너무 별 내용이 없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일단 그의 나이는 나와 동갑인 14살이었다.
부친은 나도 알다시피 유명한 글렌 라스너 백작이었다.
부자가 나란히 10년이 넘도록 저택에만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더니, 정말 그동안 밖으로 나온 일 자체가 드문지 제라드의 14년 인생에 대한 정보는 종이 한 장이 전부였다.
‘라스너 백작 부인이 죽고 이렇게 되었다고 했지?’
그럼 그 부인이 어떻게 죽었는지라도 자세히 나와야 할 텐데…….
심지어 그 이유도 병인지 사고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나와 있었다.
나는 살며시 눈살을 찌푸리며 보고서를 책상에 던지듯이 내려놨다.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제라드의 부친은 아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혀 있었다.
각을 재 보니 저 나이가 되도록 교육도 제대로 안 시켰던 것 같고.
‘이러니 유디트하고 서로 동병상련으로 마음을 열고 친해진 건가?’
하긴,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남주인공은 킬리안이었지만 유디트와 제라드 두 사람은 그것과 별개로 끈끈한 유대감이 있어 보이긴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그걸 킬리안의 질투심 유발 장치처럼 사용했던 기억이 났다.
‘쯧, 시간 낭비했네. 하긴, 촌구석에 내내 처박혀 살았으니 나올 건더기가 뭐가 있겠느냐만은.’
물론 제라드에게 물어보거나, 사람을 써서 더 깊게 파헤쳐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일단 제라드의 과거에 그 정도 관심도 없었고, 또 어차피 내 제물로 사용될 사람인데 그의 인생을 자세히 알게 되면 아무리 나라도 조금 찜찜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냉정하게 보고서를 치우고 이번에는 조금 전에 마리나가 두고 간 쟁반 위의 서신들을 확인하기로 했다.
‘아무튼, 라스너 백작이 이번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금단술이 시간을 돌리는 것이라니 그건 좀 의외였어.’
하지만 그런 게 성공할 리가 없었다. 성공 가능성이 반절 이상으로만 높았어도 당연히 미래의 내가 시도했겠지.
라스너 백작이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였다고 한들, 천재 황녀님인 내 능력이 더 뛰어났을 테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앞에 쌓인 서신들을 의무적으로 확인하다가 어느 순간 손을 멈추었다.
하늘색 봉투에는 몬테라 가문의 인장과 서명이 새겨져 있었다. 이번에도 발신인은 바비 몬테라였다.
‘……혹시 이번에도 노래를 담은 건 아니겠지?’
괜한 경계심이 들어서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내 고막을 괴롭히는 노랫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팡!
대신 봉투에서 하트 모양 종이 쪼가리가 폭죽처럼 터져 나와 하늘하늘 떨어졌다.
“…….”
나는 차게 식은 기분으로 머리카락에 붙은 분홍 하트를 털어내며 서신의 내용을 확인했다.
바비 몬테라는 다음 달에 열릴 황궁 연회 때 내 파트너가 되고 싶다고 에스코트를 신청하고 있었다.
그걸 보니 갑자기 일전에 봤던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떠올랐다.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1황녀 전하.”
“혹시 다가오는 황궁 연회 때 감히 파트너를 청하는 것으로 그 약조를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수상한 놈.’
킬리안이 지난 사냥 대회 때부터 왜 갑자기 나한테 안 하던 짓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쉽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킬리안과 유디트는 온 제국민의 사랑을 받는 정의롭고 선량한 연인이었다.
하지만 마냥 착하고 정의롭기만 해서는 남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법.
킬리안도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공답게 유디트를 지키는 데는 늘 최선을 다했다.
유디트를 괴롭히는 미래의 나에게도 몇 번인가 권력과 재력을 이용해 제재를 걸었을 정도였다.
그걸 아는 만큼 나도 킬리안에게 어쩔 수 없이 경계심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보니까 왠지 얘, 내 생각하고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속을 읽을 수 없는 눈을 하고 있던 킬리안을 생각하자 또 기묘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몬테라 영식의 편지를 한쪽에 치우며 킬리안에 대한 생각도 같이 떨쳐 버렸다.
*
“1황녀님, 어서 오세요!”
오늘도 유디트의 궁에 가자마자 주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나와 나를 맞아 주었다.
“그래. 잘 지냈니, 유디트?”
“네, 1황녀님.”
요즘 내 관심을 받고 있는 유디트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기꺼워져서, 유디트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러자 유디트가 또 뺨을 발갛게 붉히며 기쁘게 웃었다.
아, 내 손짓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아이란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차라리 유디트도 제라드처럼 종속 각인시켜 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같은 카뮬리타 핏줄에게는 보호 마법이 작용해 심각한 마력 저항이 일어나서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저, 1황녀님. 오늘은 후원을 산책하지 않으실래요?”
유디트는 전보다 나를 한결 가깝게 느끼는 것 같았다.
내 쓰다듬을 받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유디트가 먼저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1황녀님이 정원사를 불러 주셔서 후원이 아주 예뻐졌어요.”
그녀의 말대로, 내가 직접 손을 대기 시작한 이후로 유디트의 궁은 더 이상 냉궁이라 할 수 없었다.
거미줄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던 궁이 지금은 깔끔해져서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곳이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것도 괜찮겠지만 오늘은 먼저 할 일이 있어.”
내 말에 유디트가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할 일이요?”
나는 지금 대답하는 대신 유디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아주 바쁠 거야, 유디트.”
“이, 이게 다 뭐예요?”
유디트는 방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사람들과 그들이 손에 들린 물건들을 보고 입을 벌렸다.
황녀라면 이 정도는 보통인데, 그동안 단 한 번도 이런 것을 누리고 살지 못한 유디트에게는 역시나 놀라운 광경이었던 모양이다.
“너한테 필요한 거.”
나는 소파에 다리를 느긋이 꼬고 앉아 차를 마시면서 내가 들인 물건으로 방 안이 가득 차는 모습을 지켜봤다.
*
오늘은 유디트의 의복을 새로 맞출 예정이었다.
드레스와 속옷 같은 기본적인 것과 거기에 맞는 장갑, 스타킹 등등 봐야 할 게 많았다.
물론 이것만 본다고 끝은 아니었다.
의복을 맞췄으면 거기에 맞는 구두, 모자, 장신구 등까지 고르는 게 기본이었으니까.
하지만 모두 오늘 하루 동안 볼 수는 없어서 나머지는 다른 날 차차 살필 계획이었다.
“시간이 부족하니 빨리 시작해.”
“예, 1황녀님.”
명령을 받은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4황녀님, 잠시만 이쪽에 가만히 서 주시겠어요?”
“재단실의 기록을 보았는데, 4황녀님은 작년 이후로 제대로 치수를 재신 적이 없군요.”
“옷감을 대 보겠습니다. 혹시 특별히 선호하는 색상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줄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수를 재고, 여러 가지 옷감을 얼굴과 팔에 대 보는 동안 유디트는 거울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건 유디트한테 안 맞는 것 같네. 치워. 아, 그쪽 건 좀 더 짙은 색상으로 가져와 봐.”
나는 소파에 느긋이 턱을 괴고 앉아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사실 이건 그냥 내 돈 한 푼 안 들이면서 생색만 내는 거였다.
어차피 품위 유지비는 모두 황실 돈이었으니까.
그동안 최소한으로만 책정되어 있던 유디트 궁의 예산을 더 받아낸 노력 정도는 들였지만, 나머지는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4황녀님께는 이런 스타일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황실 재단사들 중 거의 내 전담인 르벨린 백작이 가제봉한 드레스 몇 점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녀가 권한 건 레이스가 풍성하고 색상이 밝아 사랑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드레스들이었다.
확실히 동그랗고 순한 인상의 유디트가 입으면 귀여울 것 같은 의상이었다.
“유디트, 넌 어때? 특별히 마음에 들거나 네 취향이 아닌 게 있으면 말해.”
“저는…… 다 좋아요.”
유디트는 여전히 얼떨떨해 보였다.
살짝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보니, 그녀에게 의견을 물어봐도 제대로 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왼쪽 건 제외해. 세 번째, 여덟 번째는 좀 더 가까이 가져오고. 나머지는 일단 놔둬.”
내가 말한 드레스를 들고 오라는 의미로 시녀들에게 손짓한 뒤 유디트가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장식이 많이 붙고 너무 화려한 건 네 취향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니면 분홍색이 별로야?”
색상과 스타일이 정반대인 드레스를 유디트의 몸에 대보게 하며 말했다.
“지난번에 클로에의 옷을 입었을 때 표정이 밝지 않았었잖아?”
“아, 그게, 2황녀님 옷이 싫었던 게 아니고…….”
내 말에 유디트가 당황해서 서둘러 변명했다.
“저, 저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런 것치고는 그날 표정이 떨떠름하던데 말이다.
“하지만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더 마음에 들지? 붉은 계열보다는 푸른 계열이 네 취향이고.”
유디트의 바로 뒤에 서자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디트는 내 말에 놀란 것 같았다.
잠깐 가만히 서서 아무 말이 없던 유디트가 잠시 후 자그마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어떻게…… 아셨어요?”
애써 아닌 척해도 얼굴로 다 말하고 있으니 알았지.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10분만 유디트를 지켜봐도 그녀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지금 방 안에 있는 재단실 사람들과 시녀들 모두 이 순진한 아이의 취향쯤은 한눈에 꿰고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유디트의 마음에 좀 더 깊이 새겨질 달콤한 거짓말을 속삭였다.
“전부터 널 계속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저를……요?”
“그래. 네가 나한테 처음 말을 걸기 전부터.”
고개를 돌려 시녀에게 다른 옷을 한 벌 더 가져오게 했다.
“싫은 게 아니면 이것도 입어 보지 않을래? 너하고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눈치가 빨라 내 의도를 알아차린 르벨린 백작이 옆에서 내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4황녀님이 입으시면 정말 사랑스러우실 것 같아요. 곧 황궁 연회이기도 하고요.”
“황궁 연회요……?”
거울에 비친 유디트의 눈에 한결 더 큰 파문이 그려졌다.
무도회의 시작 직전, 요정을 만나 그곳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동화 속 신데렐라의 표정이 이랬을까?
“제가…… 거기에 참석하나요?”
“넌 어때? 가고 싶니?”
믿을 수 없는 일이 거듭 이어져 현실감을 잃은 듯이 물어오는 유디트에게 반문했다.
“생각해 봐. 가고 싶은지, 아닌지.”
“제가 그런 데 가도 돼요?”
“네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고, 가기 싫으면 마는 거야.”
물론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건 나였고, 유디트도 그쯤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어때? 네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말해 봐.”
나는 기꺼이 유디트에게 호박 마차와 아름다운 유리구두를 선물해 줄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동화 속에서 순수한 선의로 공주를 도와주는 요정이 아니라 못된 흑심을 품고 있는 마녀라 할 수 있을 테지만.
“1황녀님이 옆에 계셔 주시면…… 가고 싶어요.”
마침내 유디트가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다가, 그 사이로 내가 기다렸던 대답을 내뱉었다.
“그래, 같이 가자.”
내 뜻대로 말하고 움직이는 아이가 마음에 들어서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유디트는 그걸 보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저…… 한 번만…… 해도 돼요?”
잠시 후 유디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자그마해서, 중간 중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음성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며시 기울인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허락했다.
“그래. 괜찮아.”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디트가 몸을 돌려 나를 끌어안았다.
꼭 강한 물살에 떠밀려 가는 와중에 유일하게 몸을 지지할 곳을 찾은 것처럼 마른 팔이 나를 절박할 정도로 꽉 붙들었다.
이런 과감한 짓을 해 놓고 뒤늦게 꼭 도망치듯이 유디트가 옷을 갈아입으러 뛰어갔을 때, 르벨린 백작이 내게 말했다.
“4황녀님이 1황녀님을 잘 따르시네요.”
“그렇게 보이지?”
아주 훈훈한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미소 짓는 그녀를 따라 나도 웃었다.
유디트는 내게 아주 빠르게 마음을 열어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내게 큰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가끔은 이렇게 쉬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나로서는 편한 일이었다.
유디트의 마음을 내게로 더 끌어오기 위해 굳이 내가 나서서 그녀를 곤경에 빠트릴 필요도 없었다.
여주인공답게 그녀에게는 성장을 위한 수많은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얼마 전 2황자 로이드와 있었던 일 같은 자잘한 괴롭힘도 포함되어 있었고 말이다.
이미 몇 번 내 도움을 받은 유디트는 전보다 나를 더 믿고 가깝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이 역시 내게는 기꺼운 일이었다.
이대로 유디트가 나한테 완전히 의지하고 기대게 되면 좋을 텐데.
그리고 내가 이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사실은 이 모든 것이 기만이었음을 알려 주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혹시 내가 결국 병을 막지 못해 죽게 된다면, 그때 이 아이의 마음에 내 이름을 낙인처럼 새기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조금 전까지 유디트가 서 있던 자리를 보는 동안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꿈에서 본 미래에서 내가 제물로 썼던 제라드를 손에 넣긴 했지만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하염없이 좋다가도, 여전히 불투명한 미래를 떠올릴 때면 가끔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곤 했다.
“4황녀님이 환복을 마치셨습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유디트가 내 앞으로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1황녀님이 골라 주신 옷으로 갈아입었어요. 어때요……?”
이런 것이 영 낯선 듯이 쭈뼛거리는 움직임이었다.
나는 아까보다 차가운 눈으로 유디트를 보다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응, 생각대로 잘 어울리네.”
유디트는 내가 웃어 주자 그제야 안심한 듯이 나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목 뒤에 리본이 풀렸어. 내가 묶어 줄 테니까 이리 와.”
나는 재단사와 시녀들을 물러가게 한 뒤, 유디트를 내 옆에 비스듬히 앉혔다.
나를 등지고 앉아 조금 긴장한 듯이 아이의 어깨와 목이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유디트의 목 뒤로 연결된 리본을 다시 묶었다.
“역시 너한테는 보라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넌 어때? 마음에 들어?”
내 물음에 유디트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
“저는…… 1황녀님이 골라 주시는 건 뭐든 다 좋아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이건 내 선물이야. 연회용 드레스는 따로 맞추고 오늘은 이대로 밖으로 나가 후원에서 차를 마시자.”
나는 유디트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너한테 어울릴 만한 구두도 골라 놨으니 한번 신어 볼래?”
유디트가 이대로 내가 만든 새장 속에서 나를 위해서만 노래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문득 그녀가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녀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 준 것임을.
그럼 유디트가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어 아무리 내가 끔찍하게 싫어져도, 결국은 평생 내 그림자 속에서 살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내 외로움도 조금은 덜어지겠지.
“자, 다 됐다. 그럼 나갈까, 유디트?”
“네, 1황녀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자 유디트는 경계심 하나 없이 활짝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오늘도 귀여운 검은 새는 내 손길 아래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
“누나!”
저녁 무렵 유디트와 헤어져 1황녀궁으로 향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불러왔다.
“벨라 누나!”
첫음절에서부터 내 신경을 긁는 이 목소리는…….
“3황자님이시네요.”
마리나의 말대로, 밀리엄이었다.
오늘도 외모만큼은 아기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어린 소년이 나를 보고 환한 얼굴을 했다.
그는 자신을 안고 있는 시녀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며 빨리 나한테 가자고 재촉까지 하고 있었다.
“어디 다녀와, 누나?”
잠시 후 내 앞에 도착한 밀리엄과 그의 시녀들이 나를 보고 인사했다.
“1황녀님을 뵙습니다. 카뮬리타의 축복과 가호가 함께 하시어 제국의 광영을 무구히 빛낼 이 시대의 첫 번째 창과 방패가 되시기를. 지성에서 태어난 지고하고도 유일한 태양의 딸로서 최고의 홍복을 누리소서.”
내 시녀들도 같은 인사를 밀리엄에게 했다.
쓸데없이 긴 인사를 들을 동안 주위를 한번 힐끔 훑어봤다.
그런데 밀리엄의 유모인 맥노아 백작 부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밀리엄을 직접 안고 온 건, 그동안 그의 곁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여인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누구지?”
“하이어스 백작 가문의 미레이유입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얼마 전부터 4황자님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맥노아 백작 부인과 달리 아직 20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풀잎 같은 연한 녹색 머리에 주황색 눈. 주근깨가 박힌 얼굴은 특색 없이 평범했다.
아무래도 맥노아 백작 부인은 사냥터의 일로 우리 어머니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모양이다.
하기야, 금쪽같은 아들내미가 다칠 뻔한 일이었으니 오죽하련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머니가 아예 이렇게 새로운 인물을 밀리엄의 옆에 두다니, 왠지 의외였다.
새로운 시녀의 얼굴을 좀 더 살피려 했지만 밀리엄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누나, 왜 그동안 우리 궁에 나 보러 한 번도 안 왔어?”
밀리엄은 나한테 안아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누나는 나 안 보고 싶었어?”
그 모습이 객관적인 시각으로는 꽤 귀여워 보였는지, 시녀들이 웃으면서 ‘어머’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어린 게 영악하기는.’
하지만 나는 밀리엄의 이런 행동이 계산된 것임을 눈치채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밀리엄이 귀여운 척 칭얼거리기 전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이 재빠르게 눈을 굴리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도 어릴 때 저런 짓을 많이 해 봐서 모를 수가 없단 말이지.’
왠지 나 자신의 흑역사를 목격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부드럽게 녹아든 시녀들과 달리 그저 의례상의 미소만 얼굴에 그린 채 떨떠름한 마음으로 밀리엄을 안아 들었다.
“바빠서. 누나가 할 일이 좀 많았거든.”
“치, 그래도 그렇지, 내 얼굴 보러 올 시간도 없어?”
나와는 그렇게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면서 밀리엄은 나를 상당히 좋아했다.
어쩌면 유일한 동복 누나라 괜히 더 친밀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흥, 좋아. 이번만 봐줄게. 그 불쌍한 애 구해 주느라 그런 거지?”
계속 귀여운 척 칭얼거리던 밀리엄이 이내 특별히 넘어가 주겠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다 들었어. 누나가 백야의 전당에서 괴롭힘 당하던 애를 도와줬다며?”
꼭 재미있는 무용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밀리엄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그나저나 불쌍한 애라…….
제라드를 직접 보면 그런 생각은 안 들 텐데.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다.
제라드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4년 인생 동안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게 방치당한 일이 있었는데도 주눅이 들거나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악바리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1황녀님!”
그때 유디트의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다.
생각대로 유디트가 나한테 뛰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의아해졌다. 조금 전에 보고 헤어졌는데, 왜 또 저렇게 급하게 달려오는 거지?
“앗……. 3황자님을 뵙습니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유디트가 나한테 안긴 3황자를 발견하고 서둘러 인사했다.
“죄송해요. 두 분이 같이 계신 줄 모르고…….”
“누구야?”
밀리엄은 유디트가 누군지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의아해했다.
하긴, 유디트의 모습이 예전과 많이 달라지긴 했지.
“4황녀님이십니다, 황자님.”
밀리엄의 새로운 시녀 미레이유가 밀리엄의 의문에 답했다.
“4황녀? 아! 그때 벨라 누나한테 손수건 준 애!”
밀리엄은 그제야 유디트의 정체를 깨달은 듯이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왠지 또 심통을 부릴 것 같아서 이번에는 내가 덧붙였다.
“그리고 사냥 대회 때 널 도와준 사람이기도 해.”
“아, 맞아. 그때 뒤에서 나 밀친 사람! 그런데 날 도와줬다고?”
“그래, 네가 다치지 않게 밀치고 대신 마법 생물에게 공격당했지.”
“진짜? 그런 거야?”
“응. 그런 거야.”
내 말에 밀리엄은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의 눈이 또 다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곁눈질해 싹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그래, 그러면……. 고마워!”
곧 밀리엄이 특별히 큰마음 먹고 인사해 준다는 듯이, 유디트에게 지난 일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이거 벨라 누나한테 주려고 가져온 건데, 너한테도 하나 줄게.”
그는 다른 시녀가 들고 있던 꽃다발에서 꽃을 하나 꺼내 유디트에게 건네주기까지 했다.
사실 밀리엄의 이런 행동은 그동안 제멋대로이던 그의 성정을 생각했을 때 약간 뜻밖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밀리엄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밀리엄은 아까처럼 자신이 어떻게 해야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더 받을 수 있을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행동한 게 분명했다.
‘역시 우리 어머니 교육 방침 때문에 생긴 공통점인가……. 아니면 그냥 핏줄의 영향으로 나와 밀리엄의 성격이 닮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까?’
약간 기분이 오묘해져서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지켜봤다.
“아…….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응! 줄 테니까 가져.”
유디트는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도와주고 보답을 받는 게 처음인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밀리엄이 내민 꽃을 봤다.
“정말…… 감사합니다, 3황자님.”
잠시 후 그것을 받아드는 유디트의 손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고작 타인의 이런 사소한 호의, 또 고작 이런 작은 꽃 한 송이에 감동해 그것을 두 손으로 소중히 받아드는 유디트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곧 그녀의 울망한 눈이 나를 향했다.
언젠가부터 나를 볼 때면 그랬듯이, 촉촉하게 반짝이는 눈이었다.
유디트는 내 덕분에 밀리엄에게 이런 호의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누나, 나 잘했지?”
“그래, 잘했어.”
“나 착하지?”
“응, 착하네.”
밀리엄은 또 나한테 칭찬해 달라는 듯이 치댔다.
그래도 오늘은 그를 은근슬쩍 내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칭찬해 주며 안고 있는 몸을 한번 토닥여 줬다.
밀리엄이 만족한 듯이 헤헤 웃으면서 나한테 더 바짝 안겨들었다.
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 앵기는 것 같은데. 게다가 슬슬 무거웠다.
“밀리엄, 저 꽃을 나한테 주려고 가져왔다고?”
“응! 벨라 누나 거야! 내가 누나 주려고 정원에서 특별히 하나하나 골라서 꺾었어!”
“고마워라. 누나한테 주려고 선물까지 가져오다니.”
나는 자연스럽게 밀리엄을 시녀에게 넘겨주고 대신 품에 꽃다발을 안았다.
당연히 꽃다발의 무게는 밀리엄과 비할 수조차 없이 가벼웠다.
밀리엄은 내가 자신을 적당히 떠넘긴 것도 모르고, 꽃다발을 안은 나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예뻐! 역시 누나한테는 하얀색이랑 파란색 꽃이 잘 어울려!”
어린 녀석이 취향 한번 확고하기도 하지.
슬슬 자리를 떠날 생각으로 이번엔 유디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디트, 그러고 보니 넌 왜 날 찾아왔지?”
“아, 제 방에 장갑을 두고 가셔서요.”
유디트가 뒤돌아보자, 그녀의 뒤를 따라온 시녀가 손에 고이 들고 있던 것을 내게 넘겨줬다.
“내가 깜빡했네. 가져다 줘서 고마워.”
나중에 시녀에게 따로 시키면 될 걸 굳이 이렇게 직접 나를 쫓아오다니.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만해서 유디트에게 그저 고맙다고 하며 웃어 줬다.
그러자 유디트가 밀리엄이 준 꽃을 든 채로 나를 따라 배시시 웃었다.
“네 방?”
옆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벨라 누나가 네 방에 갔었다고?”
밀리엄이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나, 바빴다고 했잖아. 그래서 나 보러 한 번도 못 왔다고 했잖아?”
아직 어려서 자세한 정황은 알지 못해도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밀리엄이 말하면서 점점 얼굴을 찌푸렸다.
“근데 쟤 방에는 갔었다고? 왜?”
답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나는 내심 곤혹감을 느끼며 남몰래 혀를 찼다.
아, 난 바보인가?
바로 조금 전에 밀리엄한테 바빠서 못 찾아갔다고 핑계를 대 놓고,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유디트와 이런 대화를 나누다니.
실수했다는 생각에 난감해졌지만, 동시에 이 상황이 귀찮다고도 느꼈다.
“뭐야……! 벨라 누나, 우리 궁에는 내가 몇 번이나 오라고 해도 한 번도 안 와 놓고!”
밀리엄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라 곧 상황을 어렴풋이 눈치챈 것 같았다.
급기야 씨근덕거리던 밀리엄이 빼액 울음을 터트렸다.
유디트는 자신의 말이 이런 상황을 불러올 줄 몰랐던 듯, 크게 당황했다.
나는 밀리엄을 달래 주려 무심코 반사적으로 입술을 뗐다가, 곧 다시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나서 울고 있는 밀리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또다시 마음속에 희미한 물살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번 일은 내가 나빴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사실 밀리엄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도 안다.
아직은 어린 밀리엄에게 이런 내 태도가 얼마나 불합리하게 느껴질까?
내 피도 완전히 파랗기만 한 건 아니라, 아주 가끔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이런 식으로 화풀이하는 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누나로서 밀리엄을 달래 주는 것이 올바른 태도였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직접 그것을 행하는 것은 많이 달랐다.
속상해서 우는 밀리엄을 보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차게 얼어붙어, 그를 달래 줘야 할 입술과 손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황자님, 울지 마세요.”
그때, 밀리엄을 안고 있던 시녀 미레이유가 나를 대신해 그를 어르며 조곤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1황녀님께서 정말 누구보다 바쁜 분인 걸 황자님도 잘 아시잖아요? 더군다나 3황자님이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던 백야의 전당 일로 1황녀님이 궁 밖으로 나오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요.”
“그래도…… 우으, 다른 궁에는 갔잖아…….”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4황녀님은 사냥 대회 때 3황자님을 구해 주신 분이니까 그런 거예요.”
울면서 반박하는 밀리엄에게 미레이유가 부드러운 말씨로 설명했다.
“그래서 1황녀님께서 바쁘신 와중에 대신 고마움을 전하러 가신 거지요. 하나뿐인 동복동생이신 3황자님을 무서운 마법 생물로부터 다치지 않게 지켜 주셨으니까요.”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밀리엄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조용히 있던 유디트도 주저하다가 덧붙였다.
“맞아요, 4황자님……. 3황자님은 1황녀님의 하나뿐인 동생이신걸요.”
어쩐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약간 씁쓸하게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내가 뭘 하는 건지 조금 한심한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이래서야 내가 밀리엄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나, 나보다 한참 어린 이런 작은 아이만도 못하겠구나 싶었다.
아까 밀리엄이 준 꽃다발을 품고 있는 가슴이 괜히 버석거리는 것 같았다.
눈을 한번 감아 마음속에 있는 검고 질척한 감정을 다시 밟아 넣은 뒤 들고 있던 꽃다발과 장갑을 다른 시녀에게 넘겨줬다.
그러고 나서 밀리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밀리엄, 누나한테 와.”
밀리엄은 여전히 마음이 안 풀린 듯이 훌쩍이면서 팽하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미레이유의 품에서 나를 힐끔거리며 적극적으로 싫다는 의사를 표현하지는 않았다.
미레이유는 꽤 눈치가 빠른 듯, 밀리엄을 나한테 넘겨줬다.
이번에도 밀리엄은 투정을 부리듯이 잠깐 작게 칭얼거리면서 몸을 꿈틀거렸을 뿐, 나한테 안기는 걸 거부하거나 진심으로 버둥거리지는 않았다.
나는 가끔 밀리엄을 상대할 때 그러던 것처럼 상냥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누나 때문에 밀리엄이 속상했구나. 아무리 바쁘다 해도 누나가 먼저 찾아갔어야 하는 건데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
“누나 미워…….”
“누나가 미워서 이젠 다시 보기 싫어?”
“아냐, 안 미워…….”
밀리엄이 눈물과 콧물을 잔뜩 묻힌 얼굴을 내 품에 비비적거렸다.
평소라면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를 떼어냈겠지만 지금만큼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하이어스 백작 영애, 이 시간 이후 밀리엄의 일정은 어떻지?”
“오늘은 남은 일정이 없으십니다.”
“그럼 지금 밀리엄과 함께 1황녀궁으로 가겠다. 어차피 밀리엄도 날 보러 우리 궁으로 가던 길이었다 하고, 곧 저녁 식사 시간이기도 하니까.”
예상했던 대로 밀리엄은 코만 훌쩍거릴 뿐 싫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안고 유디트에게 인사했다.
“유디트, 잊고 있던 장갑을 가져다 줘서 고마워. 좋은 저녁 시간 보내렴.”
조금 전부터 밀리엄과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유디트가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했다.
“네. 1황녀님과 3황자님도 좋은 저녁 시간 보내세요.”
해질 무렵의 황도에 그렇게 유디트를 혼자 남겨 놓고 돌아섰다.
밀리엄과 함께 1황녀궁으로 향하는 내 등 뒤로 꽤 오랫동안 시선이 머무는 듯했다.
*
‘왠지 나잇값도 못하고 있는 기분이 살짝 드는데.’
그날 밤, 혼자 정원에 있는 의자에 누워 밤하늘에 뜬 보름달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동그스름한 달이 휘영청 밝기도 했다.
보안이 철저한 1황녀궁이니만큼 밤이 깊어지면 사람들도 따로 경비를 서지 않고 모두 물러갔다.
그래서 혼자 방을 빠져 나온 지금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는 눈이 없는 만큼 내 행동도 자유로워졌다.
하여 나도 체면이고 품위고 신경 쓰지 않고, 정원의 한구석에 있는 긴 의자에 아무렇게나 몸을 누이고 있었다.
한밤중의 정원은 낮보다 고요하고 평온했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다가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꿈속의 책에서 본 미래의 나는 완벽주의자였고, 그건 현재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에 짜증이 났다.
이렇듯 나 자신의 미성숙한 모습을 또 발견하고 마는 것은 생각 이상의 불쾌감을 수반했다.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 대충 몸 위에 덮고 있던 담요가 조금씩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움직이는 게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뒀다.
그때 정원의 입구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내게 다가온 누군가가 의자 밑으로 완전히 흘러내리기 직전이던 담요 자락을 들어 올렸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그동안 다물려 있던 입술을 열고 물었다.
당연히 지금 날 찾아온 사람이 제라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는 일전에 밤 산책을 나왔을 때 그와 함께 왔던 곳이기도 했고, 또 다가오는 발소리가 마리나치고는 보폭이 컸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보지도 않고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 종속 각인 때문이었다.
마법적 계약을 맺어 내게 속하게 된 사람이라 그런지, 지난번처럼 지금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제라드라는 걸 그냥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너도 잠이 안 와서 나왔어?”
잠옷만 입고 있던 내 위로 다시 포근한 온기가 내려앉은 건 그때였다.
“그렇습니다, 1황녀님.”
곧이어 귀에 울린 낯설 정도로 공손한 소년의 목소리에, 한순간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휙 들어 내 앞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조금 전 내게 담요를 다시 덮어 준 제라드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의자 밑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라드라면 당연히 내 앞에 서서 또 건방지게 날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야……. 다른 사람인 줄 알았네.”
깜짝 놀라서 얼떨떨한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이기는 좀 그랬다.
그러다가 발등에 반쯤 걸쳐져 있던 신발이 떨어졌다.
제라드의 다리 위를 한번 치고 굴러떨어진 신발에 그와 내 시선이 따라붙었다.
“제가 줍겠습니다.”
조용히 움직인 제라드의 손이 아무렇지 않게 내 신발을 주워들었다.
거기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어낸 뒤 내 발에 다시 꿰어 주는 움직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또 한 번 소름이 돋을 뻔했다.
그러면서 제라드는 정작 자신의 다리에 묻은 흙은 털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다음 명령을 기다리듯이 가만히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게 순종적으로 보였다.
물론 흉내만 내는 것에 불과한 게 뻔히 보였지만, 어쨌든 보이는 겉모습만큼은 그럴듯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마리나가 제라드의 몸이 다 나을 때까지 말버릇부터 교정시키겠다고 의욕이 넘쳤었는데…….
와, 도대체 애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렇게 단기간에 말투랑 몸가짐이 달라지지?
그러다 문득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제라드. 그런데 말투가 변한 건 둘째 치고 너 갑자기 왜 이렇게 시중드는 게 자연스러워? 요즘 뭘 하고 있는 거야?”
“황녀님의 시녀에게 예절을 배우고 있습니다.”
“어떤 예절?”
반복된 내 물음에 제라드가 시선을 들고 나를 응시했다.
역시 정면에서 마주한 그의 눈에는 전과 비교해 조금도 흐려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광채가 여전히 박혀 있었다.
“그냥…… 이제는 황녀님께 소속되었으니 기본적으로 알아 둬야 할 예절이라고만 들었는데.”
그때서야 나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깨달았다.
‘마리나……. 제라드한테 시종 예법을 가르쳤구나.’
그러고 보니 제라드를 데려와서 어떻게 할 건지 마리나에게 말해 준 적이 없었지.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제라드는 촉망받는 기사였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거니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소년은 아직 단 한 번도 자신을 증명한 적이 없는 평범한 보통 소년이었다.
나는 내 앞에 여전히 무릎을 굽히고 있는 제라드를 내려다봤다.
‘시종이라…… 의외로 나쁘지 않은데?’
내 성격이 나빠서인지, 건방진 눈빛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정중히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는 제라드를 보자 기분이 괜찮았다.
하긴, 원래 유디트의 기사였던 제라드가 이번엔 날 위해 충성스러운 개처럼 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만큼 짜릿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나는 제라드의 모습을 더 감상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과 눈빛을 조용히 훑어봤다.
‘그런데…… 너무 얌전한 게 수상하군.’
제 부친을 구하러 가겠다며 백야의 전당에 들어가자마자 탈출을 시도했던 녀석이 이렇게 순종적으로 구는 게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방심시키려는 게 티 나잖아.’
싸늘히 가라앉은 눈으로 제라드를 보다가 다시 친절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아무튼 지금은 일어나.”
뭐, 상관없었다. 녀석이 머릿속에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든.
“잠깐 손 좀 줘 볼래?”
그렇게 제라드를 일으켜 세운 뒤 내 앞에 선 그에게 부드러운 말씨로 요구했다.
제라드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요구를 한 나를 잠깐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이유를 묻지 않고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제라드에게 내 마력을 흘려보냈다.
“……!”
그 순간 벌침에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제라드가 팔꿈치를 뒤로 확 잡아 뺐다.
어허, 또 종속 각인할 때처럼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할 생각인가?
‘하지만 두 번은 안 당하지.’
나는 지난번 온실에서처럼 아예 마법으로 힘을 더해 맞잡은 손을 확 끌어당겼다. 그래도 제라드는 용케 버텼다.
“갑자기, 이게 뭐 하는…….”
당황스러운 듯이 입을 여는 제라드를 보며 눈을 치켜떴다.
‘이걸 버틴다고? 이 녀석이 내 승부욕을 자극하는데?’
이번에는 마법의 강도를 다섯 배는 더해 다시 제라드를 확 끌어당겼다. 그러자 마침내 제라드의 상체가 무너지면서 그가 나한테 훅 끌려왔다.
제라드가 나한테 잡히지 않은 손으로 급히 내가 기댄 의자의 등받이를 짚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그에게 다시 마력을 불어넣었다.
제라드의 눈매가 움찔 튀었다.
급히 입술을 달싹이던 제라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가 이를 으득 악물었다.
맞잡은 손을 파르르 떨면서 눈가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제라드의 모습을 보니, 지금 이 상황이 그에게 어지간히 굴욕적인 모양이었다.
‘훗, 하지만 어쩔 것이냐? 내가 더 센데.’
나는 제라드의 반응을 무시하고 그의 마력을 살폈다.
처음엔 그냥 가볍게 해 볼 생각이었는데 별로 느낌이 오지 않아서 더 많은 마력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제라드의 속을 샅샅이 훑으면서 마력을 휘감아 나한테 감응하는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나도 다른 사람에게 이런 걸 해 본 게 처음이라 그런가? 내가 제대로 맞게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력에 반발 현상이 나타나지는 않았으니까 파장이 잘 맞긴 한 거겠지?’
지난번에 온실에 제라드가 침입했을 때 결계가 반응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인 것 같으니까.
결국 잠시 후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제라드에게서 마력을 거두었다.
“지금…….”
내가 손을 놔주자마자 제라드가 나한테 가까이 붙어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금, 이게 무슨…… 짓…….”
뭐긴, 내 마력 파장이 너랑 얼마나 잘 맞나 확인해 본 거지.
그런데 제라드의 반응이 좀 과했다. 그는 나한테 엄청난 봉변이라도 당한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화가 나서 그런지, 그의 얼굴에 발갛게 열이 오른 게 보였다. 아까 처음 손을 잡았을 때 제라드가 벌침에 맞은 듯이 놀랐다면, 지금은 꼭 독전갈의 꼬리에 쏘이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잠깐 실례 좀 했어.”
내 천연덕스러운 말에 제라드는 기가 막힌 듯이 하, 하고 날카로운 숨을 내뱉었다.
이 녀석 왠지 지금 욕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움직인 것 같은데.
평소라면 황녀님 앞에서 또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한마디 해 주고 싶었겠지만, 지금은 제라드를 보고 삐죽 웃었다.
“그런데 너, 몸이 너무 허약한 거 같은데. 잡아당기니까 자세가 너무 쉽게 무너지네.”
“……뭐라고?”
“보기엔 나름대로 균형이 잡힌 것 같았는데 방금 보니까 어깨랑 팔, 특히 허리를 더 단련하는 게 좋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남의 패배를 가련히 여겨 모른 척해 주는 게 아니라 즐겁게 비웃어 주는 성격이었다.
“하긴, 조금 전에 비틀거리던 걸 보면 하반신 단련도 필요할 것 같고……. 몸은 좀 쓰는 것 같긴 하지만 그동안 제대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가? 이참에 황궁 기사라도 한 명 소개시켜 줄까?”
이 자존심 강한 녀석이 나한테 힘으로 져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걸 보니 더 약을 올리고 싶어졌다. 게다가 백야의 전당에서 그랬듯이 내 앞에서도 온순한 척, 영악하게 나를 속이려 드는 꼴에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내가 허약…….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리…….”
제라드는 내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황녀님한테 헛소리라고? 이게 은근슬쩍 무엄한 소리 하네.
하지만 제라드는 오히려 내가 자신한테 엄청나게 파렴치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쳐다보며 재차 격양된 목소리를 토해냈다.
“애초에…… 지금 나한테 그런, 그런 짓을 해 놓고, 내가 이러는 게 누구 때문인데……!”
“아, 그래. 내가 살짝 마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진짜 살짝이었는데. 애초에 너랑 나는 기초 체력이나 근육량이 다르니 그 정도로 불공평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아니, 지금 그런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하, 진짜.”
뭐가 자꾸 그런 게 아니래?
아무튼 제라드는 몹시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다.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나를 노려보는 눈이 불덩이를 삼킨 듯이 강렬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차가운 눈으로 나를 마구 쏘아보다가 인사도 없이 홱 돌아서서 정원을 떠났다. 황녀님의 앞에서 보이기에 건방진 작태였지만 기분은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쟤 좀 봐라? 놀리는 맛이 있게 반응이 꽤 재미있네.’
나는 순식간에 멀어진 제라드의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킥킥 웃었다. 왠지 오늘 밤은 기분 좋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제라드가 1황녀궁을 정말 탈출한 건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었다.
14. 배신자에게는 영원히 춤추는 붉은 구두를
“라미엘. 뭘 하고 있니?”
“어라, 어머니?”
라미엘이 1황자 궁에서 기르는 흰 뱀에게 직접 먹이를 주고 있을 때, 2황비 카타리나가 방문했다.
라미엘은 누가 봐도 게으르다 할 만한 자세로 소파에 늘어져 있던 몸을 반쯤 일으켰다.
“또 그 뱀이냐? 흉측하니 어서 치워라.”
막 흰 뱀의 입으로 들어가는 쥐를 발견한 카타리나가 질색했다.
“왜요, 귀엽기만 한데.”
“귀여운 게 다 죽었니?”
“어머니도 보세요. 먹이를 통째로 삼키면 볼록해지는 몸통이 얼마나 매력적이냐고요. 특히 먹이가 목에서 배로 점점 내려가는 모습이 귀엽…….”
“하, 듣기 싫으니 이제 그만해라! 하여간에 취향 한번 특이해서는.”
라미엘은 진저리치는 카타리나의 모습을 보고 킥킥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팔에 감고 있던 뱀을 우리 안으로 돌려보냈다.
“황후 전하와 차를 드신다더니, 일찍 오셨네요?”
“흥, 길게 나눌 이야기가 뭐가 있겠니.”
라미엘의 말에 카타리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나마 요즘은 아르벨라 때문에 황후를 약 올려 주는 재미라도 있기에 망정이지.”
카타리나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라미엘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카타리나는 이후로 몇 마디 더 황후와 아르벨라를 비웃는 말을 했다.
라미엘이 팔꿈치를 기댄 우리에서 통통 소리가 들렸다.
웃고 있는 입술과 달리 미소 한 점 맺히지 않은 시린 푸른 눈이 우리 안에 있는 흰 뱀을 내려다봤다.
“라미엘, 아직도 아르벨라와 틈날 때마다 어울려 다니는 건 아니겠지? 클로에는 아직 철이 없어. 그러니 너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카타리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라미엘에게 당부했다.
그에 라미엘이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듯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어머니도 참, 가끔 보면 진짜 별걱정을 다 하신다니까.”
뱀 우리에 기댄 팔에 얼굴을 올려 살짝 일그러진 라미엘의 입술에 비린 미소가 떠올랐다.
“클로에도 아니고 어머니까지 제가 진짜 그 오만한 계집애가 좋아서 멍청하게 달라붙어 있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면 솔직히 재미없거든요.”
뱀이 허물을 벗듯이, 지금의 라미엘에게서는 평소의 실없고 경박하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카타리나는 그런 아들을 보고 흡족하게 웃었다.
“물론 그렇겠지, 내 아들.”
손톱을 길게 기른 하얀 손이 라미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아. 왜 예전부터 폐하께서는 그 아이에게만 그렇게 무르실까.”
카타리나의 눈빛이 서서히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번에도 만약 다른 황녀나 황자가 같은 일을 했다면 진작 불러다 혼을 내고도 남았을 텐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첫째라고 너무 많이 봐주시는 게지.”
“어머니가 이해해 주세요. 불쌍하잖아요.”
라미엘이 피식 웃으며 카타리나에게 말했다.
“이렇게 든든한 어머니가 있는 저와 달리 아르벨라는 남동생만 아끼는 무관심한 어머니만 뒷배로 있는 셈이니. 황후 전하도 참 그럴 줄 몰랐는데, 어릴 땐 그렇게 아르벨라를 매일 안고 다니면서 물고 빨더니 둘째가 생겼다고 순식간에 입을 싹 씻을 줄이야.”
사냥 대회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지, 라미엘의 입매가 조금 전보다 더 선명하게 비틀렸다.
“그런 의미에서 전 우리 어머니가 참 좋아요. 클로에가 태어나고 나서도 첫째라고 절 이렇게 아껴 주시고.”
“그럼, 너희 둘 다 내게 소중한 아이들인데.”
라미엘은 카타리나의 애정 어린 손길을 느끼며 잠깐 말없이 있다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르벨라가 요즘 인형 놀이에 재미가 들린 듯한데, 한번 같이 놀아 볼까 봐요.”
우리 속의 하얀 뱀이 아직 배가 고픈 듯이 입을 뻐끔거렸다.
“특히 아르벨라가 이번에 종속 기사로 삼았다는 그 천한 놈…….”
독액이 흐르는 뱀의 날카로운 이빨을 내려다보면서 라미엘은 못된 장난을 앞둔 아이처럼 심술궂게 웃었다.
“그걸 건드리면 아르벨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주 궁금하네요.”
*
사건 직전, 나는 자선 행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제라드의 사건 이후 이렇게 황궁 밖에 외부 일정을 나온 건 오랜만이었다.
총 닷새 동안 열리는 이번 자선 행사는 1황비 플로라의 외가인 화이트 백작가에서 주최했다. 원래 화이트 가문은 이런 자선 활동 방면으로 관심이 많았다. 화이트 가문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많다는 게 예로부터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속설이었는데, 그 피를 이은 1황비 플로라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러면서 유디트는 신경 쓰지 않았던 걸 보면 선택적인 선행인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나는 멀리서 손님들을 맞고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모녀를 보면서 혼자 혀를 찼다. 그래도 어찌 되었거나 1황비는 선택적 선행이든 뭐든 이번 자선 활동처럼 나름대로 좋은 일을 많이 하긴 했다.
그에 비하면 그녀의 딸인 3황녀 리리아나는…….
얼마 전에 그녀가 유디트를 매 맞는 시동으로 썼던 사건을 떠올리자 저절로 ‘어휴’ 소리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1황녀님!”
그러다 나를 부르는 앳된 목소리가 들려와서 얼른 다시 표정 관리를 했다.
“1황녀님, 제 꽃을 받아 주세요!”
“저도요!”
오늘 자선 행사에 나온 고아원 아이들이 나한테 꽃을 안겨 줬다. 성가대에 속한 아이들인지 그들은 다 똑같은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나를 향해 동그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모습이 귀여웠다.
“고마워. 모두 카뮬리타의 축복과 가호를 받으렴.”
내가 꽃을 받고 인사까지 해 주자 아이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갔다.
‘후, 내 인기는 정말 귀찮을 정도로 사그라들 줄을 모르는군.’
나는 꽃다발을 들지 않은 손으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잠깐 내 인기를 만끽했다. 오랜만에 외부 일정을 나와 만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니 찌뿌둥하던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벨라 언니, 애들한테 꽃 많이 받았네. 좋겠다.”
“너도 그럭저럭 받았으면서 뭘.”
어느새 제 어머니와 떨어져 내 근처까지 와 있던 리리아나가 부러운 듯이 내가 든 꽃다발을 힐끔거렸다. 자선 행사에 나온 고아원 아이들에게 꽃다발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인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런 걸로 경쟁심을 느낄 만큼 나이가 어리지도, 남들의 관심이 궁하지도 않았다.
‘물론 귀여운 아이들에게 꽃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사실이지만 말이지.’
“칫, 벨라 언니 말고 클로에 언니랑 같이 올 걸 그랬어. 그럼 내가 애들한테 꽃다발 다 받았을 텐데.”
그러다 리리아나가 투덜거리듯이 중얼거린 말을 듣고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리리아나……. 너 진짜 화이트 가문 사람 같지 않구나.’
확실히 클로에는 조금 사나워 보이는 외모 때문에 이런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꽃다발을 거의 받지 못하는 편이었다.
이 자선 행사는 1황비의 가문에서 주최하는 것이라 황족들도 시간이 될 때 하루씩 참석하기로 이야기되어 있었다. 그래서 클로에도 나랑 같이 오고 싶어 했는데, 2황비 카타리나와의 말싸움에서 패배해 결국 오늘은 오빠인 라미엘과 함께 궁을 지키고 있었다.
“리리아나!”
“네, 어머니!”
그때 1황비가 리리아나를 불러서 나는 다른 귀족들 사이에 혼자 남게 되었다. 물론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는 걸 즐기는 편이므로 문제 될 건 없었다.
“나도 잠깐 실례하지.”
그러다 휴게실에 잠깐 들르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중, 꽃다발 한 개를 떨어뜨렸다.
“이런, 꽃다발을 떨어뜨리셨습니다, 1황녀님.”
거의 동시에 낮은 음성이 내 귀에 울렸다. 이어서 나 대신 꽃다발을 주워 건네준 것은, 꽃조차 부끄러워할 정도의 초절정 미남…….
“1황녀님도 오늘 자선 행사에 오셨군요. 쥬논 그레이엄이 1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이라면 좋았겠지만, 꼴 보기 싫은 그레이엄 후작이었다.
나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레이엄 후작에게 떨떠름하게 인사했다.
“여기서 또 보는군, 후작.”
“예, 1황녀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보시는 대로.”
아, 느낌 별론데. 이 인간 얼굴을 보니 꼭 건수 하나 잡아서 신난 것 같잖아.
아니나 다를까, 쥬논 그레이엄이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내 속을 긁기 시작했다.
“무탈하셨다니 그것참 다행이군요. 제가 개인적인 용무로 도중에 자리를 비운 지난 사냥제 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어 걱정했습니다.”
사냥제 때 마법 생물이 결계를 뚫고 나온 걸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그레이엄 후작은 사냥제의 첫째 날만 참석했었지.’
그래도 그렇지, 사냥제가 언제 일인데 이제 와서 뒷북이야?
“바깥에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는데. 황실 근위 기사들이 빠르게 대처해 큰 피해가 없기도 했고.”
“그랬군요. 하지만 황후 전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지 않아 애석할 따름입니다.”
어울리지 않게 걱정하는 척하는 얼굴에 무심코 썩은 표정을 지을 뻔했다. 귀족적인 화법으로 나를 염려하듯이 우아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건 어딜 봐도 나를 물 먹이는 거였다. 저 말은 ‘너랑 네 엄마 사이에 불화 있는 거 소문 다 났다?’라는 뜻이었으니까.
‘살판났네, 살판났어.’
몹시 고까운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서 발끈한 티를 내면 지는 거였다.
“아, 뭐. 상황을 과장해 전달하는 할 일 없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나는 흐음, 하고 옅게 웃으면서 그레이엄 후작의 눈을 정면에서 응시했다.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머리 나쁜 자들도 드물지 않고 말이지.”
내가 눈빛으로 말하는 게 뭔지 알아들었는지, 그레이엄 후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래, 그 머리 나쁜 사람이 댁이라는 소리란다.
“후작도 알다피시 예전부터 나한테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이 좀 많다 보니, 그런 하잘것없는 소문은 신경 쓰지 않아.”
“큼, 그러시다면 다행이군요.”
그레이엄 후작은 내 천연덕스러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직도 나를 물 먹이는 걸 포기하지 않은 그레이엄 후작이 바로 2차 시도에 나섰다.
“참, 듣자 하니 이번에 이단자 아이를 종속 기사로 들이셨다지요?”
“그렇게 됐어. 이미 소문으로 들었다 하니, 사정은 후작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도 그가 내게 관심이 많은 것을 꼬집어 빈정거렸다.
“1황녀님의 독특한 행보에는 가끔 참 놀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해도 그런 천한 자를 종속 각인까지 해서 들이시다니요.”
“천한 자라니. 글렌 라스너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봤자 그가 죄를 저지르기 전의 옛 친분일 뿐입니다. 라스너 가문은 지금 이름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으니, 그 마지막 후계자였던 아이 역시 지금은 천한 이단자일 뿐이지요.”
옛날에 라스너 백작이랑 친구였던 거 맞아? 아무리 그래도 친구 아들인데 태도 한번 냉담하네.
“아바마마께서는 늘 부모 형제와 같은 마음으로 제국민들을 돌보라 하셨지.”
나는 그의 말이 간지럽지도 않은 것처럼 그레이엄 후작을 보며 약간 삐딱하게 웃었다.
“아무리 낮은 곳에 있는 자라도 카뮬리타의 백성이라면, 나는 언제든 황족으로서 그들을 품을 준비가 되어 있어.”
좋아, 오늘 콘셉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직접 실천 중인 대인배 황녀님이다. 사방에서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사람들아, 다들 잘 들었냐?
“참으로 멋지십니다, 1황녀님!”
그때, 아까부터 내 옆에서 얼쩡거리고 있던 귀족 중 한 명인 세르쥬 백작이 빈틈을 노려 그레이엄 후작과 나 사이에 냉큼 끼어들었다.
세르쥬 백작은 평소에도 아부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그래서 지금도 주변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개박수를 치며 탄복했다.
“역시 카뮬리타의 빛나는 창과 방패! 과연 지성에서 태어난 첫 번째 따님이신 1황녀님이십니다!”
그레이엄 후작의 입꼬리가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과연 감명 깊은 미담이로군요……. 아무튼 그 이단자를 종속 기사로 들이셨다니, 다음에는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조만간 동행하실 계획이 있습니까?”
“글쎄. 기회가 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러자 그레이엄 후작이 또 아쉽다며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얼마 후 저도 자선 파티를 주최할 예정인데 1황녀님께서 종속 기사와 함께 와 주신다면 좋은 귀감이 될 겁니다.”
뻔한 소리 하기는. 좋은 귀감이 아니라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지.
“후작이 자선 파티도 열어?”
“그럼요. 예전부터 제가 후원하는 고아원이 다섯 곳이 넘는답니다.”
“후작이 그리 간절히 원하니 생각은 해 보지.”
아무튼 이쯤해서 그레이엄 후작과의 대화는 마무리되는 줄 알았으나, 내가 너무 섣부르게 방심했나 보다.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라 그런지, 내게 뜻밖의 타격을 입혔다.
“참, 그러고 보니 몬테라 가문의 셋째 영식과 긍정적인 교제를 이어가는 중이시라지요?”
“뭐라고?”
“사냥제 때 1황녀님께서 몬테라 셋째 영식의 연가를 받아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몇 년 전부터 남몰래 편지를 나누던 사이였다고 하던데…….”
“누가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지?”
“그날 1황녀님과 몬테라 영식의 다정한 모습을 목격한 이들이 많습니다.”
하, 씨……. 그럴 줄 알았어. 너무 탁 트인 데서 얘기를 하긴 했지.
“후작은 참 뜬소문을 잘 믿는 것 같군.”
“글쎄요. 오래전에 약혼 이야기까지 오가던 사이였다고 알고 있는데, 마냥 뜬소문이라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가느다란 미소를 베어 문 그레이엄 후작의 눈이 악의로 반짝였다. 속이 너무 훤히 보여서, 무슨 목적으로 나한테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른 척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다른 쟁쟁한 가문에서 약혼자를 맞이하기 전에 바비 몬테라를 가져다 붙이려고 하는 거구먼.
“그런 옛일까지 꺼내는 건 너무 우스운데. 내 약혼자 후보가 두 명 더 있었던 건 알고 있나?”
“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깜짝이야!
갑자기 뒤에서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나타났다.
얘는 뭐 이렇게 소리도 없이 튀어나온다니?
“또 뵙습니다, 1황녀님.”
내게 인사하는 킬리안은 오늘도 아주 잘생긴 모습이었다.
“갑자기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기에.”
“아니, 딱히 소공작 얘기는 아니었는데.”
“약혼자 후보를 거론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킬리안이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나보다 그레이엄 후작이 더 크게 흠칫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 말을 삼가시게. 1황녀님의 약혼 후보자라니, 그런 이야기가 오간 건 오래전이라고 알고 있는데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아, 속보여.
나는 그레이엄 후작을 향해 비스듬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먼저 그 얘기를 꺼낸 건 후작 아닌가?”
“크흠. 지나간 인연보다는 현재의 인연을 소중히 해야지요.”
그래서 킬리안 베른하르트는 지나간 인연이고, 바비 몬테라는 현재의 인연이라 이건가? 별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레이엄 후작님이 잘못 알고 계십니다. 아직 1황녀님과 제 약혼 이야기는 종결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런데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기껏 잠잠해지려 하던 수면 위에 돌을 던졌다.
“자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아무래도 후작께서 뭘 착각하시는 듯해서.”
아무래도 킬리안은 조금 전 그레이엄 후작이 내 앞에서 바비 몬테라의 이야기를 꺼냈던 걸 들은 것 같았다.
그레이엄 후작의 안색이 나빠졌다.
‘옛 인연을 빌미 삼아 나를 바비 몬테라와 붙이려 했는데 갑자기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내 약혼자 후보를 자청하며 나타났으니 경계심이 들기도 하겠지.’
“그레이엄 후작. 더 얘기할 건가? 나는 인사를 나눌 사람들이 더 있어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썩어 들어가는 그레이엄 후작의 얼굴이 보기 좋았지만 다른 귀족들이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앞에서 약혼 이야기를 더 이어가는 것도 마뜩잖았다. 그래서 적당히 잘라내고 그레이엄 후작에게 그만 가 보라고 눈치를 줬다.
그레이엄 후작도 더 남아 있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는지, 여전히 떫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내게 인사했다.
“하면 저도…… 좀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다음 일정이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그래, 허락하지. 가 봐도 좋네, 그레이엄 후작.”
나는 물러나는 그레이엄 후작을 찌푸린 눈으로 보았다.
‘그래 봤자 중간 악역인 주제에 귀찮게 굴기는.’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보았던 쥬논 그레이엄 후작의 최후가 어땠는지 떠올렸다.
사실 그 책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후작은 훗날 나한테 죽을 운명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2황비 카타리나와 쥬논 그레이엄은 미래에 나를 몰락시키기 위한 계략을 꾸몄다. 유디트가 강력한 황위 계승권자로 급부상한 이후에는 그녀도 같이 없애려 시도했고 말이다.
‘그러던 중에 뒤에서 나한테 목이 슥삭!’
나날이 강력한 경쟁자로 급부상하는 유디트 때문에 빡쳐서 흑화한 미래의 내 손에 제거당하고 만다.
‘역시 최종 악역인 나한테는 안 된다니까.’
어쨌든 유디트는 손 안 대고 한쪽 코를 푼 셈이었다. 더군다나 미래에 나와 쥬논 그레이엄이 서로를 상대하는 동안, 유디트는 다른 귀족들을 포섭해 정치적 세력을 공고히 하는 이득까지 봤다. 그리고 유디트를 위해 그레이엄 후작과 나를 뒤에서 싸움 붙인 게 바로…….
“1황녀님, 왜 그러십니까?”
유디트의 남자인 미래의 킬리안이었지.
나는 내 앞에 있는 소년을 살짝 찡그린 눈으로 쳐다봤다. 킬리안 베른하르트의 모습은 오늘도 청아했지만 순간 떠오른 책 속의 전개에 그를 마냥 좋게 볼 수가 없었다.
킬리안은 자신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는 나를 향해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모로 살짝 기울였다. 그러다 이내 그가 알겠다는 듯이 ‘아’ 하고 소리 낸 뒤 아주 아주 정중하게 황족에 대한 정식 예법을 갖춰 다시 인사했다.
“처음 뵈었을 때 멋대로 인사를 약식으로 생략해 죄송합니다.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1황녀님을 뵙습니다. 카뮬리타의 축복과 가호가 함께 하시어 제국의 광영을 무구히 빛낼 이 시대의…….”
“아니, 됐어. 거기까지만 해.”
내가 마뜩잖다는 듯 장황한 인사를 막자, 킬리안이 다시 우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미 킬리안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박혀서 그런지, 지금 이러는 것도 왠지 날 우롱하려는 것으로만 보였다.
“베른하르트 소공작.”
“예, 1황녀님.”
“나는 연애한다고 무조건 자기 애인 편을 들면서 주변인은 죄다 배척하는 사람이 싫더라.”
“……예?”
“베른하르트 소공작은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꼭 객관적인 판단력을 유지하길 바라지.”
킬리안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나를 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레이엄 후작의 같잖은 수작질로부터 나를 도와준 셈인데 고맙다는 소리를 듣기는커녕 갑자기 냉대받았으니 이 상황이 이상하고 당황스럽게 여겨질 만했다.
‘하지만 애초에 누가 도움 같은 거 필요하다고 했나?’
게다가 지난 사냥제 때부터 킬리안이 강아지풀을 처음 본 개라도 되는 것처럼 자꾸 나를 살살 건드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콧방귀를 뀌면서 그를 지나쳐 갔다.
*
“1황녀님.”
아니, 그런데 왜 따라오고 난리야?
“송구하지만 방금 그 말씀은 무슨 의미신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할 일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 뜬금없는 소리에 정말 호기심이 든 건지. 아무튼 킬리안이 나를 따라오며 물었다.
“말 그대로인데 무슨 의미를 따로 물어봐?”
“1황녀님께서 제게 이런 방면의 말씀을 하시는 건 처음이라 몹시 신선하고 새로워서요. 혹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으신 건지 궁금하군요.”
심경의 변화가 있긴 하지만, 그런 얘기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하니.
‘그리고 지금까지는 안 그러다가 왜 오늘은 이렇게 쓸데없이 집요하게 구는 거야?’
그를 또 무시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킬리안도 나를 따라 멈춰 섰다.
하지만 내가 제자리에 선 건 킬리안과 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1황녀님, 저어…… 실례가 아니면 꽃을 드려도 될까요?”
양 갈래로 머리를 묶어 꽃 장식을 한 귀여운 여자아이가 나한테 총총 걸어와서 수줍게 꽃다발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으시군요.”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아르벨라 황녀인데.
나는 뻔한 소리를 하는 킬리안을 무시하고 허리를 숙여 아이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나한테 꽃을 준다니 고맙구나.”
그러고 나서 우아한 황녀님의 미소를 지으며 아이가 내미는 꽃을 받았다.
‘음? 그런데 이건 다른 꽃다발하고 달리 빨간 리본이 아니라 노란 리본이 묶여 있네.’
바로 그때였다.
파앗!
막 손끝이 닿은 순간, 꽃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거의 동시에 눈앞에 하얀 섬광이 번쩍였다.
“1황녀님……!”
킬리안이 황급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퍼엉!
곧 시끄러운 굉음이 자선 행사장 안을 거대하게 울렸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뭐가 폭발했나?”
잠시 후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손에 든 꽃다발을 경멸 어린 눈으로 내려다봤다.
“뭐야? 이 너절한 마법식은.”
꽃다발에서 또 한 번 폭발이 일어나며 펑,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내 마법 결계에 둘러싸여 외부로 피해가 번지지는 않았다. 누군가 실수로 꽃다발에 이런 장치를 해 놨을 리는 없으니 고의인 게 확실했다.
“1황녀님, 괜찮으십니까?!”
기사들과 일부 귀족들이 기겁해서 내게 달려왔다. 물론 제 목숨이 더 귀한 이들은 혼비백산해서 폭발음이 들린 곳을 피해 멀찍이 물러났다.
‘생각지 못한 순작용이네. 이런 식으로 충성심 확인이 다 되는군?’
나는 다가오는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내 팔에 들린 아이를 내려다봤다.
“괜찮니, 아가야?”
원래대로라면 이 정도 아이를 한 팔로 들어올리기 어려웠겠지만 마력으로 힘을 증가시켜서 거뜬했다.
“소공작, 방해되니까 팔 좀 치워 봐.”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킬리안이 내 말을 듣고 꽃과 나 사이를 가로막듯이 중간에 뻗고 있던 팔을 내렸다. 검술과 마법 모두에 능통한 소년답게, 그 역시 어느새 보호 마법을 앞에 펼치고 있었다.
“우, 흐으, 흐아앙……!”
내 팔에 안긴 채 놀란 듯이 멍하니 있던 아이가 곧 울음을 터트렸다. 실제로는 아무런 인명 피해가 없었음에도, 자선 행사장 안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화, 황족 시해 미수다!”
“누가 1황녀님을 노리고 이런 짓을……!”
“당장 황실 근위대를 불러와!”
“괘, 괜찮나요, 1황녀?”
특히 오늘 자선 행사를 준비한 화이트 가문의 사람들과 1황비 플로라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천재 마법사인 나한테는 폭발 사고고 뭐고 별로 위험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확실히 이건 죄질이 나쁘긴 했다. 내가 막아내지 않았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이 꽃다발을 내게 건넨 아이도 위험했을 테니까.
아이가 소속된 고아원의 원장이 금방 달려왔다.
아이를 달래서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그냥 오늘 자선 행사장에 준비된 꽃다발 중에 아무것이나 들고 온 것뿐이라고 했다.
폭발 직후 자선 행사장의 출입구를 폐쇄하고 인근까지 수색 범위를 넓혔으나 범인은 찾아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황실 기사단의 오귀스트 경이 부하들에게 사건을 보고 받고 광분했다.
“황족 시해 미수라니, 어떻게 카뮬리타에서 이런 일이! 당장 제도 전체의 출입을 통제해 반드시 범인을 색출하겠습니다!”
“오귀스트 경. 잠깐 이것 좀 봐 주지.”
만약을 위해 아직 결계 마법을 두르고 있던 꽃다발을 들어, 거기에 다른 마법식을 사용했다.
파앗!
그러자 꽃다발에 걸려 있던 출처 미상의 폭발 마법진이 주르륵 해체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다들 이런 걸 처음 봐서 그런지 입을 떡 벌린 채 허공에 그려진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번에 새로 개발한 마법 분해식인데 말이야. 마법진을 그릴 때 이렇게 중간에 아그리타식 기호와 세로 삐침을 사용하는 학파가 열두 곳 있거든.”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뿌리가 나뉘고 파가 갈려, 사용하는 마법식의 세밀한 부분은 무리마다 달랐다.
“그리고 마지막 기원식에서 메시아 고대어를 응용하는 건 다섯 개 학파고, 또 육망성 모양을 이렇게 그리는 건…….”
내가 말하는 동안 1황비와 3황녀, 그리고 오귀스트 경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멍한 얼굴을 했다.
나는 더 설명해도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리란 걸 깨닫고 간단히 줄여 말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런 마법식을 쓰는 건 발푸르기스 마법 사단밖에 없어. 가서 관련자 조사해.”
“예, 예! 알겠습니다, 1황녀님!”
일단 오귀스트 경이 그의 부하들에게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나는 증거물로 제출한 노란 리본이 묶인 꽃다발을 살짝 찌푸린 얼굴로 내려다봤다.
‘……혹시 그레이엄 후작인 건 아니겠지?’
내가 본 미래에서 이렇게 날 죽이려고 한 사람은 거의 그 아저씨밖에 없었는데.
내 미래가 적혀 있던 책은 아무래도 유디트의 관점에서 주로 전개되어서, 다른 세세한 부분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책에서 그레이엄 후작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또 실제로도 후작은 지금까지 말로 나를 긁는 것 말고 딱히 위협적인 행동을 취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오늘 일은 정말 다른 자의 소행일지도 몰랐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황녀님을 추앙해 발밑에 엎드리지는 못할망정 제 열등감과 시기심을 앞세워 자폭하는 인간도 어딘가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다 문득 나는 옆에서 킬리안의 시선을 느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아닙니다.”
킬리안은 왠지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그보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1황녀님?”
빨리도 물어본다.
일이 너무 경황없이 흘러가서 그런지, 킬리안도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다친 곳이 있을 리 없지. 고작 이깟 수작질에 내가 당할 것 같아?”
킬리안에게 콧방귀를 뀌어 준 뒤, 꽃다발을 들었던 손을 시큰둥하게 내려다봤다. 그리고 뒤늦게 내 손의 이상을 눈치챘다.
“앗……!”
“왜 그러십니까, 1황녀님? 역시 손에 상처라도…….”
“손톱 끝이 부러졌어!”
“…….”
조금 전 꽃다발의 폭발을 막을 때 내가 살짝 느렸나?
이깟 걸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하다니, 왠지 자존심이 좀 상했다.
“하…….”
그때, 킬리안이 또 지난번처럼 갑자기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느닷없이 왜 웃어?”
얘는 또 뭐가 웃겨서 이래? 내 손톱이 상한 게 재미있어?
“아니요……. 전에는 몰랐는데, 1황녀님은 상당히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그 말처럼 킬리안은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그를 보는 내 얼굴은 점점 떨떠름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기묘한 느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잠깐 멈칫했다. 그러다 곧 내 입에서 싸늘한 실소가 작게 흘러나왔다. 지금 막, 제라드에게 걸어 둔 마법이 작동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별로 좋지 않던 기분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기어이 탈출을 시도했다 이건가?’
혹시 일부러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를 노린 거라면 조금 화가 날 것 같기도 했다.
“난 먼저 가 봐야겠군.”
킬리안을 두고 자선 행사장의 입구로 빠르게 걸어갔다.
뒤에서 킬리안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내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붙잡기 전에 이동 마법을 사용해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
쾅!
“젠장, 또 실패했단 말이냐!”
마차에 타고 있던 쥬논 그레이엄이 손에 든 지팡이를 바닥으로 거칠게 내려쳤다. 그의 앞에 있던 수하가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오늘 자선 행사에서 고아원의 아이를 이용해 1황녀 아르벨라를 제거하려 한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1황녀 아르벨라는 예전부터 그레이엄 후작의 노력을 번번이 수포로 만들기 일쑤였다. 심지어 아르벨라는 그레이엄 후작이 꾸민 대부분의 사고를 날벌레 잡듯이 너무나도 가볍게 해결해, 몇 번이나 그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우연을 가장한 사고를 내기 위해 위험한 물건을 그녀의 옆에 가져다 놔도…….
“응? 이 물건, 마법식이 좀 꼬인 것 같은데? 초보 마법사가 만들었나 봐? 마법식이 영 아름답지 못하고 허접하네.”
이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아르벨라가 손장난을 하듯이 가볍게 몇 번 마법식을 건드린 후에는, 그게 무엇이든 위험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정상적인 물건으로 되돌아갔다.
또, 아르벨라가 방문하는 건물에 조치를 취하려 해도…….
“여기 느낌이 왠지 이상하네. 탐지 마법 한 번만 써 보고 들어가지. 응? 뭐가 이상하냐고? 그냥, 말로는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내 마력이 좀 섬세하고 예민한 편이라서. 그래서 가끔 쎄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대부분은 그런 직감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편이야.”
하다못해 그녀가 먹는 음식물에 독을 넣으려 해도…….
“참, 제가 이번에 새로 개발한 마법식이 있는데, 체내에 들어오는 불순물은 그게 뭐든 자동으로 정화되는 마법이에요. 예전부터 우리 황족의 위대함을 시기한 우매한 자들이 있어 역사 속에서도 위험한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지요. 그래서 아바마마와 황실 가족들을 위해 만들어 봤습니다. 이제 언제 어디서든 즐겁고 편안하게 먹고 마시세요.”
이런 식으로 예전부터 이어진 쥬논 그레이엄의 모든 노력은 전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왜 하필이면 카뮬리타에서 가장 강대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1황녀 아르벨라란 말인가!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랗던 그 오만하고 건방진 얼굴을 떠올리자, 그레이엄 후작은 또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후작님. 방금 자선 행사장 안에서 1황녀님이 새로운 마법 해체식을 공개하셨다고 합니다.”
“뭐라고? 마법 해체식이라니, 그건 또 뭐란 말이냐?”
수하의 설명을 들은 그레이엄 후작이 또 지팡이로 바닥을 쾅 내려쳤다.
“이,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그 얘기를 왜 이제 해! 꼬리가 밟히지 않게 지금 당장 가서 처리해라!”
수하를 마차에서 내보낸 뒤, 쥬논 그레이엄은 식은땀이 배어난 머리를 싸매며 욕설을 읊조렸다.
마법을 건 당사자를 이전보다 훨씬 세밀하게 추적할 수 있게 되는 마법식이라니, 생각할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그가 직접 그 망할 꽃다발에 마법을 걸었다면 당장 용의선상에 올랐을 것이 아닌가!
“젠장, 젠장! 그 빌어먹을 것!”
처음에는 그레이엄의 피를 이은 1황자 라미엘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그저 아르벨라를 조금만 견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수록 위기감이 느껴졌다.
차라리 아르벨라의 성격이 조금만 유순했으면 그레이엄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건방진 어린 황녀는 어릴 때부터 사사건건 그의 신경을 긁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는 아르벨라가 그 글렌 라스너의 아들까지 거두어, 꼴 보기 싫은 얼굴이 둘로 늘어났다.
‘그놈도 제 아비와 함께 라스너 저택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레이엄 후작은 그가 저주하는 옛 친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면 그 숲에서라도, 글렌 라스너의 아들은 절대 살아 나가서는 안 되었다. 일부러 오래 고통받고 죽으라고 그 숲에 처박은 것인데, 설마 또 1황녀가 나타나 모든 것을 망쳐 놓을 줄이야.
그레이엄 후작의 눈에서 잔혹한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눈앞에서 없애 버리고 싶어도 이제 그는 1황녀의 것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야 아르벨라와 제라드를 둘 다 갈가리 찢어 없애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은 요원해 보였다.
“젠장……! 으악!”
그레이엄 후작은 분을 못 이겨 또 지팡이로 바닥을 후려치다가 그만 발등을 찍어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분노로 포효하는 그를 싣고 마차는 매끄럽게 도로를 달려갔다.
*
그 시각, 황궁.
사실 아르벨라의 생각과 달리 제라드는 도망칠 생각으로 1황녀궁을 나선 건 아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들으면 거짓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처음 의도는 그랬다.
오늘도 제라드의 일상은 다른 날과 비슷했다. 1황녀궁에서의 생활은 백야의 전당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하고 자유로웠다.
아침에 문을 거칠게 두드려 억지로 잠을 깨우는 사람도 없었고, 식사를 엎어 그를 굶기는 사람도 없었다. 굴욕적인 인사를 강요하거나 고된 노동을 강제하는 일도 없었다. 얼굴을 마주쳤을 때 그에게 욕을 하고 우연을 가장해 몸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는 일상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시녀 마리나가 두고 간 1황녀 아르벨라의 영상 마력석을 볼 때면 한가로운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잠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했지?’
그러다 문득 제라드는 방금 그가 떠올린 생각에 위화감을 느꼈다. 곧 뒷머리가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날카로운 경계심이 제라드의 뒷덜미를 스쳤다.
제라드는 백야의 전당을 나온 후 1황녀궁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태를 자유롭다고 느끼다니, 그새 갇혀 사는 생활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건가?
제라드는 굳은 얼굴로 마력석의 작동을 멈췄다.
허공에 물방울을 띄워 무지개를 만들고 있던 귀여운 어린 황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알고 보니 무서운 영상이었어.’
어쩌면 백야의 전당보다 마리나라는 시녀의 수법이 더 악랄하고 교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라드는 자꾸만 자신을 봐 달라는 듯이 반짝이는 마력석에서 어렵게 눈을 떼고 방을 나섰다. 이대로 마력석이 있는 장소에 머물면 저도 모르게 다시 그것을 작동시키고 말 것 같았다.
복도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오는 동안 황녀궁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과 마주쳤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제라드를 붙잡지 않았다. 주변의 기척을 살폈으나 그를 감시하는 듯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까 언뜻 듣기로 1황녀 아르벨라는 오늘 외부 일정이 있어 외출했다고 하는 것 같았다.
제라드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가 곧 정처 없이 이어졌다.
요즘은 지쳐 쓰러지듯이 잠드는 일이 없어져서인지, 라스너 저택에서의 마지막 날을 꿈에서 보는 날이 많아졌다.
가물가물한 시야를 비집고 들어오던 불길한 보라색 빛기둥.
늘 방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연구하는 데 여념이 없던 아버지가 그날만큼은 밖으로 나와 제라드의 방으로 찾아왔던 기억.
“미안하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유를 알 수 없던 그의 사과.
어째서인지 제라드는 그날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불길한 보라색 빛 속에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는 이미 이상한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어디론가 팔려가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숲에 사냥감으로 내던져진 채 굶주린 짐승들을 피해 달아나야 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라스너 저택에서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을 막았다.
그에게 당시의 상황을 캐내려 하던 백야의 전당 사람들은 금단술을 가까이에서 겪은 여파로 생긴 일시적인 기억 상실일 수 있다고 했다.
“미안하다, 제라드…….”
제라드는 그날 보라색 빛 사이로 흘러든 나지막한 사과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 떠올렸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눅눅하게 잠겨 있었다.
어머니가 죽은 이후 그에게 아버지다운 일을 해 준 적은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제라드에게 미안하다고 해 주었다.
‘혹시 금단술에 실패하면 이런 꼴이 될 걸 알았기 때문에 가진 죄책감이든 뭐든…….’
제라드는 살아오는 동안 부친이 자신에게 내뱉어 왔던 수많은 모진 말 대신, 그 마지막 진심 어린 사과만 마음에 담기로 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제라드는 누군가 그의 등을 살포시 떠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에게.
솨아아.
이윽고 제라드는 압도적일 정도로 큰 문 앞에 섰다.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붉은 머리칼이 문의 창살을 따라 핀 장미꽃과 함께 흔들렸다.
지금 제라드의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 해서 1황녀 아르벨라가 자리를 비운 틈에 도망가려는 생각으로 지금 이 앞에 선 건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백야의 전당에 있을 때보다 더한 망설임이 자라 있었다.
그가 1황녀궁에서 보낸 날들은 길지 않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지금껏 살아온 그 어느 날보다 안온했다. 살아 있는 생물은 어떻게든 더 편한 자리를 찾아 몸을 뻗으려는 본능이 있어, 제라드도 금세 이 낯선 편안함에 그대로 잠겨 들고 싶어졌다.
“지금 내 손 잡아.”
문득 그를 받아 주고, 그에게 머물 곳을 준 유일한 소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가 내 마음에 들었거든.”
“갈 곳이 없다면 내 옆에 있어. 너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제라드에게 그 속삭임은 지나치게 달콤해서, 한번 거기에 속절없이 빠져들면 두 번 다시는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라드는 한참이나 문 앞에 서서 창살 사이로 보이는 그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눈앞의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