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디트한테 요즘 아르벨라가 이상하게 신경 쓰는 것 같단 말이야?’
아르벨라와 닮은 연청색 눈이 싸늘한 빛을 머금었다.
스륵.
그 순간, 라미엘의 그림자에서 또다시 일부 떨어져 나온 검은 형체가 뱀처럼 빠르게 움직여 사라졌다.
‘아르벨라가 전에 1황녀궁에 그림자를 붙이지 말라고 경고한 적이 있지만……. 그 잡종 계집애한테 붙이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라미엘은 입술에 잔혹한 미소를 띠었다.
잠시 후 1황자궁으로 향하는 라미엘의 얼굴은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금 보호색 같은 나태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5. 유디트의 남주인공, 유디트의 기사
“롬벨 경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예, 알겠습니다, 1황녀님.”
오늘은 황궁 밖에 있는, 카뮬리타에서 가장 거대한 마법사들의 공립 도서관에 방문했다. 유디트고 자시고, 지금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내 목숨 줄을 이어 붙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거슬리는 유디트를 굳이 건드리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유디트가 있든 없든, 어차피 내 병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나한테 당장 필요한 건 그 애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병만 고치면 내가 다 이겨!’
그래서 일정을 소화하는 틈틈이 혹시 마법사의 열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는지 또 백방으로 찾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황실 서고에서는 쓸모 있는 자료를 발견할 수 없었다.
“마리나는 휴게실에서 기다려도 돼.”
오늘 내가 데리고 나온 인원은 단출했다.
내 최측근 시녀인 마리나와 황궁 밖에 나올 때만 데리고 다니는 호위 기사 롬벨 경이 수행원의 전부였다.
내가 카뮬리타 최강의 마법사인데 호위들을 줄줄이 달고 다닐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헉! 1황녀님……!”
“아, 인사는 받은 걸로 할게. 도서관에서는 정숙해야지.”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이 호들갑스럽게 다가왔지만 손을 들어 막았다. 다행히 다들 눈치가 있는지 나를 쫓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열람 제한이 걸린 서고로 들어갔다. 나이는 어쩔 수 없었지만, 신분 제한이 걸린 곳은 막힘없이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지금의 내게 쓸모 있는 자료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하긴 이미 온갖 곳을 다 수소문해 보았는데.’
게다가 그런 게 있었으면 황제와 어머니가 영약이든 뭐든 진작 나한테 구해 줬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난 죽는 게 아까운 쓸모 있는 황녀일 테니까.
갑자기 또 분노와 짜증이 치밀어서 들고 있던 책을 벽으로 집어 던질 뻔했다.
문득 울분이 치밀어 뜨끈하게 달아오른 눈두덩을 손등으로 덮었다.
“짜증 나.”
얼마 전 내가 본 걸 그저 단순한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날 그 기묘한 공간에서 내가 본 것들이 내 앞에 예정된 진짜 미래가 맞다고, 그렇게 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부정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지겹도록 되뇌고 또 되뇌어 이제는 머릿속에서 너덜거리는 것 같은 기억을 다시금 상기하다가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지금 나한테 일어난 일과 비슷한 사례를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
조금 전에 대충 보고 넘긴 책을 다시 가져왔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여기서 본 거였나?’
그렇게 자료를 뒤지다가, 마침내 내가 찾던 내용을 발견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법사들에게 전해지는 격언.
위대한 마법사 중에서도 선택받은 특별한 자에게만 이 세계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것이 허락된다.
‘이거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마법사가 평생 단 한 번이라도 엿보기를 염원하는 진리의 공간, 세계의 이면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것과 관련한 자료를 샅샅이 훑었다.
이상한 꿈.
광활한 공간에 매달린 새장.
그 안의 책.
거기에 적힌 지평선 너머의 진리.
사례에 적힌 위대한 마법사들이 꿈에서 보았다고 말한 책의 내용은 모두 달랐으나, 그들은 모두 그것을 통해 인생이 크게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고 공통적으로 말했다.
세계의 비밀이란 우주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해서, 작디작은 존재인 인간은 대부분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그것을 보고도 망가지지 않을 자에게만 세상의 이면을 손에 쥘 자격이 주어진다.
나는 꼭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와 관련된 내용이 적힌 책을 찾고 또 찾았다.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서야 멍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와, 나 미쳤다.’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정말 심각하게 생각했다.
‘이 나이에 세계의 이면까지 보다니. 미친 천재다, 난 진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꿈에서 다녀온 게 세계의 이면이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새장 속에 있던 게 바로 밤하늘의 별처럼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이 흩뿌려진 지평선 너머의 진리였겠지.
깨달음의 순간 희열이 온몸을 감쌌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더 높은 지혜를 열망하기 마련이었고, 따라서 오랫동안 진리를 탐구해온 자들의 입에서 오르내린 세계의 이면이란 모두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목표이자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누가 들으면 나한테 착각한 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확신했다.
당연하지. 나 같은 천재 마법사님이 아니면 또 누구에게 세계의 이면에 다녀올 자격이 있단 말인가!
세계의 이면을 본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위대한 마법사의 반열에 올랐다. 내 천재성은 가끔 나조차 두려울 정도였으니 이 최연소 나이에 세계의 이면을 경험한 것도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대단함에 도취된 것도 잠깐뿐이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자 또다시 속에서 울컥거리는 감정이 올라왔다.
‘하, 그래……. 진짜 세계의 이면이든 가짜 세계의 이면이든 무슨 상관이야. 기왕이면 쓸데없는 전지적 유디트 시점의 쓰레기 소설 말고 마법사의 열병을 치료할 방법이 적힌 의학 서적이나 보여 줬으면 좋았잖아.’
사실 나는 책에 적혀 있던 미래의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게는 힘, 권력, 명예 모두가 있었다. 그런데 이미 그 달콤함을 실컷 맛본 사람에게 갑자기 이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하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금단술에까지 손을 댔던 거겠지.
‘금단술…….’
“백야의 전당에서 받아들이기로 했대. 너도 알다시피 금단술을 사용한 죄인의 자식들은 따로 교화가 필요하잖아.”
“맞습니다. 아직 정화되지 않아 부정한 자이니 시선을 거두세요, 황녀님.”
생각의 고리가 오찬 직후 황도를 걷다가 본 소년에게로 이어졌다.
그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했던 말도 같이 떠올랐다.
“하여튼 아비를 잘못 둬서 저놈만 불쌍하게 됐지. 뭐, 어차피 이번 일로 라스너 가문은 아예 이름 자체가 사라지게 되었으니까…….”
금단술이 무거운 죄로 치부되는 이유는, 거기에 반드시 제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내가 사용했다고 적힌 금단술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내 손끝에서 책장이 우그러졌다.
‘책에 적힌 미래에서 내가 괴물이 되어 죽은 건, 금단술에 실패했기 때문이지.’
강력한 마력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제물로 바쳐 이미 진행 중인 마법사의 열병을 멈추고 그들의 마력을 빼앗는 마법식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그럼, 실패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멈춰 있던 책장 앞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삐이이이이!
그러다 문득 귀에 이명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 나타난 결계가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다른 생각에 한참 빠져 있던 탓인지 상황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1황녀님, 반출이 불가능한 열람 전용 책을 손에 들고 계십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꼭 최면에서 깨어나듯이 반짝 정신이 들었다. 그 말대로, 서고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안 되는 책을 버젓이 손에 들고 입구에 서 있었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자 결계에서 울리던 소리가 멈췄다. 이후 고개를 들었다.
새벽이슬처럼 투명하니 맑게 생긴 소년이 내 앞에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1황녀님을 뵙습니다.”
순간 책의 묘사가 떠올랐다.
흰 눈송이 같은 은빛 머리칼과 빨려들 것만 같은 보라색 눈이 어쩌구…… 진짜네.
“아무래도 깊은 상념에 잠기신 것 같아 혹여 방해가 될까 싶어 먼저 인사드리지 못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아직은 앳되다 할 수 있는 열여섯의 나이임에도 놀라운 균형과 미를 자랑하는 이목구비와 육체는 장인이 공들여 만든 조각품이라도 해도 될 것 같았다.
킬리안 베른하르트.
내 어머니의 가문인 델피니움과 함께 현재 제국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 중 하나인 베른하르트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내가 그를 본 것은 당연히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킬리안은 베른하르트 공작가의 적장자였고, 그런 이유로 이런 공식적인 자리 등에서 가끔 본 적이 있었다. 또한 그는 5년 전 황실에서 거론된 적 있던 내 약혼자 후보 중 하나이기도 했다.
킬리안 베른하르트는 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다방면에서 특출한 인재였다. 올해 봄에는 기사 서품까지 받았다고 들었다.
베른하르트를 이끌 것이 확정된 소공작이니 권력도 있고, 또 마법과 검 모두에 혀를 내두를 실력을 가지고 있어 본인 자체의 능력도 뛰어났다. 심지어 성격도 모난 곳 하나 없이 반듯하고 견실해 귀족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고 했다.
이제야 납득이 된다. 저 범상치 않은 반짝임은 남주인공의 것이었구나.
‘그래.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여주인공인 유디트와 알콩달콩 예쁘게 연애해서 나중에는 결혼까지 하던…….’
유디트의 미래 남편.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나도 모르게 킬리안을 보며 얼굴을 왕창 우그러뜨리고 만 것이다.
그게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나와 마주한 소년이 한순간 멈칫했다. 그의 수려한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때쯤에는 나도 다시 표정을 펴고 시치미를 뗐다.
“아니야. 배려해 줘서 고맙군.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삐이이이이이!
킬리안에게 날림으로 인사를 남긴 뒤 다시 입구로 다가가자 또 결계에서 소리가 울렸다.
내 손에는 여전히 반출 금지 서적이 들려 있었다.
아 씨…….
“정말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어어, 내가 좀.”
“대신 책을 가져다 놔 드릴까요?”
“아니, 됐어.”
내가 뭘 읽고 있었는지 킬리안이 알아내는 것도 별로였다. 그래서 후다닥 책장으로 가서 책을 꽂아 놓고 다시 돌아왔다.
“그럼 나는 진짜 바빠서 이만.”
그런 뒤 킬리안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서고에서 탈출했다.
뒤에서 나를 비웃는 듯한 옅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착각일 것이라고 믿었다.
*
“마리나, 먼저 가. 난 온실에 들렀다 갈게.”
황궁으로 돌아와서도 영 기분이 찝찝했다. 그래서 기분 전환을 위해 오랜만에 취미 생활을 좀 해 보기로 했다.
망망!
망망!
그런데 온실로 향하는 길에 귀 따갑게 짖어대는 동물의 소리가 들려왔다.
“와하하! 야, 너 이런 새끼가 무서워? 완전 겁쟁이잖아!”
“그, 그러지 마세요, 2황자님…….”
“참 나, 그러지 말긴 뭘 그러지 마? 내가 너한테 뭘 했다고?”
시끄러운 소리에 갑자기 두통이 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서늘한 눈으로 초록빛 정원 입구에서 씨름하는 중인 두 사람과 한 마리의 개를 쳐다봤다.
“저, 저 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지나가게 해 주세요.”
“누가 가지 말래? 가!”
“가, 강아지를 조금만 옆으로 치워 주시면…….”
“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우리 애기한테 그래? 나랑 리키는 가만히 있을 테니까 지나가라고.”
갈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을 가진, 통통하고 심술궂은 인상의 소년이 목줄을 맨 도베르만 새끼를 데리고 유디트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유디트와 동갑인 2황자 로이드였다.
참 이상하네…….
전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한번 인식한 뒤로는 이상하게 유디트가 자꾸 눈에 띄었다.
“쯧, 시끄럽게.”
딱히 유디트를 도와줄 마음은 없었지만 내 평온함을 방해하는 소음이 거슬렸다.
그래서 두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손짓했다.
“으악!”
황금빛 바람이 정원의 입구에 얼기설기 내려온 덩굴을 휘감았다.
2황자 로이드와 새끼 도베르만은 초록빛 덩굴이 순식간에 솟아올라 만든 우리에 갇혀 당황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디트도 놀란 듯이 입을 벌렸다.
“이, 이 마력은 설마 벨라 누나?”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어디야?! 어디 있지? 누, 누나! 나 사냥개 목줄 맸어! 지, 진짜야, 누나……!”
2황자 로이드는 어릴 때 특히 버르장머리 없이 나한테 까불다가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나를 무서워했다. 특히 예전에 키우던 사냥개를 함부로 밖에 풀어서 나한테 혼난 적이 있어 그런지, 그는 지금도 개의 목줄 여부부터 서둘러 밝혔다.
나는 두 사람이 나를 발견해 더 귀찮아지기 전에, 걸음을 서둘러 온실로 향했다.
다행히 이후로는 평온한 산책길이 이어졌다. 오늘따라 날씨가 아주 화창하고 초목은 푸르렀다.
“꺄아아아악!”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못했다. 이번에 내 앞에 나타난 건 클로에였다. 하필 정면에서 마주쳐서 피할 수도 없었다.
‘뭐야, 오늘 다들 날 잡았어? 왜 지나가는 길마다 한 명씩 보여?’
“어, 언니? 머리가……!”
비명 소리가 이렇게 크다니. 클로에는 마리나만큼이나 성량이 좋았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내가 입고 있던 것 같은 개나리색의 노란 드레스를 입고, 시녀가 씌워준 양산 밑에서 우아하게 걷던 클로에가 날 보자마자 턱을 떨어뜨렸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언니 머리가 왜, 왜……!”
정말 많이 놀랐는지, 그녀는 한 문장도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반응을 보니, 아직 다른 사람에게 내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다.
아무튼 그동안 내 머리와 관련한 질문을 많이 받았던 터라 또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대수롭지 않은 양 말했다.
“그냥 한번 기분 전환 삼아 바꿔 봤어. 별로야?”
“어, 아니. 머, 멋있어……!”
잠깐 넋 놓고 나를 보던 클로에가 내 물음에 정신을 차린 듯이 화들짝 어깨를 떨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반응이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물론 빈말이겠지만 그래도 이상하다는 소리 한마디 정도는 할 줄 알았더니.
“머리가 짧아지니까 왠지…… 얼마 전에 본 『별빛 폭풍의 기사』 속 주인공이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뭔데?
클로에가 보던 책인가?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앗, 벨라 언니. 그런데 있잖아.”
그런데 어째서인지 뺨을 붉힌 채 우물쭈물하던 클로에가 내게 물었다.
“저기, 혹시 머리카락 자른 거 버렸어?”
“아니. 왜?”
“그, 그럼 나 언니 머리카락 조금만 주면 안 돼?”
“잘 가, 클로에.”
“잠깐만, 언니……!”
뒤에서 날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무시하고 걸었다. 클로에도 자신이 이상한 요구를 한 걸 알았는지, 날 쫓아오면서까지 조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도착한 온실에서, 나는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지도 모를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
“안녕, 얘들아. 오랜만에 보네.”
삐삐! 짹짹!
내 인사에 대답하듯이 온실 안에 있던 작은 생명체들이 노래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냈다.
화려한 꽃과 풀들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이곳에는 온갖 아름답고 진귀한 새들이 가득했다.
이 온실은 오직 나만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내 개인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새를 키우는 건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취미 중 하나였다.
‘꿈에서의 나는 나중에 새들의 모가지를 비틀며 스트레스를 해소했었지.’
특히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는 유디트와 닮은 검은 깃털을 가진 새들을 구해서 괴롭히는 게 아주 일상이었다.
내가 한동안 이 온실에 걸음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세계의 이면에 다녀온 후로, 나는 가끔 악몽을 꾸곤 했다.
배경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온실이었고, 그 안에서 어른이 된 내가 검은 새를 죽이고 있었다.
“유디트……. 내가 갖지 못하는 건, 너도 갖지 못해.”
어우. 또 생각났다.
지금도 온실 안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자, 여지없이 그 소름끼치던 장면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혹시 아무것도 모른 채 나이를 먹었으면 진짜 그런 짓을 하게 되었을까?
아름답게 지저귀며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자, 그건 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나 좀 알은체해 주지 않을래?”
가까운 꽃나무 가지에 앉은 새에게 손을 뻗었다.
짹짹!
하지만 오늘도 여지없이 새는 내 손을 피해 날아갔다.
……사실 나는 새들한테 인기가 없는 편이었다. 새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도 그랬다.
하지만 오늘따라 새들이 너무 기를 쓰고 날 피하는 것 같아서 입 안이 좀 써졌다.
새에게 뻗었던 손을 거두고 온실 속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순간 황족들과 모였던 식당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이곳에서도 나 혼자만 이방인인 것 같았다.
이 위화감은 그 꿈을 꾼 이후로 나를 늘 따라다니던 것이었다.
새들을 보다가 조금은 충동적으로 마법을 이용해 온실 창문을 전부 개방했다.
철컹! 철컹!
탁 트인 사방에서 한꺼번에 바람이 불어닥쳤다.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며 색색의 깃털이 휘날렸다.
“그래. 원하지 않는 곳에 억지로 있을 필요 없어.”
지금까지 나름대로 애지중지하며 기르던 새들을 전부 온실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그냥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너희라도 자유로워지라는 마음이기도 했고, 너희도 내가 그렇게 싫다면 그냥 어디로든 가 버리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사실 요즘 내 마음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복잡하고 모순적이라 지금의 심정도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새들의 날갯짓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온실 속의 식물들이 흔들리며 서로 쓸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소란하게 부딪쳤다.
아니, 그런데…… 너무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거 아닌가?
그래도 내심은 아름다운 옛이야기 속의 공주와 새처럼, 한 마리 정도는 내 옆에 남아 주기를 기대했는데.
그러나 역시 현실은 씁쓸한 것이었다.
나는 왠지 좀 서운한 마음에 깃털만을 족적처럼 남긴 채 멀리 날아가는 새들을 아련하게 쳐다봤다.
새들의 퍼덕이는 날갯짓과 춤을 추는 초록 잎사귀들이 빛과 그림자를 쉼 없이 교차시키며 눈앞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 사이에서 이질적인 붉은빛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흩날리는 머리칼 아래로 박힌 선명한 광채의 은회색 눈이 약간 크게 떠진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시력은 좋은 편이었고, 알고 보니 지금 이 자리의 이방인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초록 식물들 사이에서 나타난 불청객. 얼마 전에 보았던 이단자 소년이었다.
숲에서 봤을 때는 워낙 행색이 처참했고, 또 지난번에 황도에서는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 못 봤는데, 오늘 이렇게 보니 내 심미안을 충족시킬 정도로 꽤 수려하게 생겼다. 꼭 초록빛 풀들 사이에 자라난 한 송이 붉은 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라스너 백작은 은둔 생활을 하기 전에 잘생긴 것으로 유명했다고 했지.’
어쨌든 뜻밖의 만남에 잠깐 멈칫하다가 입을 열었다.
“넌 뭐지?”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도도한 황녀님다운 모습으로 돌아가 소년에게 물었다.
“왜 여기 있어? 이곳은 허가 없이 출입해도 되는 곳이 아닌데.”
백야의 전당에 있어야 할 이단자가 왜 밖으로 나와 내 온실에까지 발을 들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꼭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서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쳐다보던 소년이 퍼뜩 숨을 들이마셨다.
“……토끼풀 황녀님.”
또 그 얘기네.
역시 내 어릴 때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토끼풀이라니, 그게 언제 적 마력석인데 하필 지금의 날 보고 그걸 떠올리는 거야?
아무튼 이렇게 소년을 다시 보니 마음이 좀 무거워졌다.
물론 죽는 것보다는 낫긴 하겠지만, 그래도 왠지 나 때문에 이 소년이 죄인의 아들인 게 밝혀져 백야의 전당에 붙잡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그 일 때문에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분명 누구냐고 물었는데 대답은 하지 않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
그런 마음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소년을 기억하지 못하는 척 다시 말했다.
그러자 그가 움찔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쪽이다!”
그때 온실 밖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다른 사람이 온실 안으로 들어온 건 아니었지만 주변을 수색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순간 소년의 눈에 형형한 빛이 떠올랐다. 갑자기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변했다.
조금 전까지는 잘생긴 보통의 귀족 영식처럼 보였다면, 지금 이렇게 퇴로를 찾듯이 날카로운 시선을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은 꼭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잘못 들어온 사나운 야생 동물 같았다.
‘얘 라스너 백작 아들이라지 않았어? 그런데 지난번부터 왜 이렇게 분위기가…….’
나는 늑대 무리 속에서 살다 온 것처럼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풍기는 소년을 보고 움찔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더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잠깐 갈등하는 듯하던 소년이 이내 결심한 듯이 이를 악물고 내게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굉장히 날쌔서,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그 직후, 그가 대뜸 내 팔을 붙잡았다.
“궁 밖으로 나가는 길이 어디인지 안내해.”
허?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상황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급소를 공격하거나 사지를 전부 속박한 것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팔만 붙잡고 있어서 애매하긴 했지만, 분명 이 상황은…….
“너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내 물음에 소년은 아주 잠깐 침묵했다. 왠지 내 팔을 잡은 손이 살짝 움찔거린 것 같았다.
“순순히 협조하면…… 다치게 하지는 않겠어. 그러니까 빨리 나가는 곳이 어디인지 말해. 궁에는 비밀 통로도 많다고 들었으니까…….”
와, 진짜인가 봐.
나처럼 위대한 마법사의 팔만 달랑 한 짝 잡아 놓고 협박하는 바보가 여기에 있네?
심지어 내가 헛웃음을 참느라 숨을 들이마셨더니 겁을 먹어서 그러는 줄 알았는지, 손아귀에 힘도 조금 빼 줬다.
와……. 이런 건 처음인데 엄청 신선하네……?
색다르다 못해 충격적인 자극에 흥미마저 생길 정도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백야의 전당에서 이단자가 도주를 시도한 모양이었다.
‘그럼 잠깐 숨을 곳을 찾아 여기에 발을 들이게 된 건가?’
그런데 왜 결계가 작동하지 않았지?
‘온실에 있는 감시용 마력석을 나중에 돌려 봐야겠군.’
아무튼 백야의 전당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탈출을 시도하다니, 이제 보니 난 놈이었다.
그보다, 이 이단자 소년하고 왜 자꾸 마주치는 걸까?
혹시 이것도 금단술에 대한 무슨 암시 같은 건가? 찝찝하게 말이야.
“너, 내가 누구인지 몰라?”
아무튼 나는 이 소년이 제법 깜찍했다.
지금 자신이 감히 인질로 삼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건지 영 의심스러웠다.
“조금 전에 토끼풀 황녀님이라고 했잖아. 그럼 내가 누군지 아는 거 아니야?”
소년은 또 입을 다물었다.
얼굴을 보니, 곤혹스러운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달싹인 그의 입술에서 이내 내 귀에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아……. 미안.”
그런데 황녀님한테 왜 자꾸 반말이야, 이 녀석은.
‘진짜 깡촌에라도 살다 왔나?’
아, 하긴. 제 아비랑 같이 내내 영지의 저택에만 처박혀 살았다고 했으니 깡촌이라면 깡촌이네.
“저쪽으로.”
나는 순순히 팔을 들어 온실의 뒷문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튼 이 녀석은 나를 원망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걸 알고 나니 나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먼저 뒷문 쪽으로 걸어가는 나를 소년이 따라왔다.
그런데 협박범이면 협박범답게 나를 좀 끌고 가든가, 뭐 이렇게 순순히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뒤따라 와?
‘현재 그림으로 봐서는 이건 뭐, 우리 둘이 사이좋게 손 붙들고 걸어가는 것밖에 더 되나?’
나는 이 상황이 좀 웃겼지만 그냥 아무 말도 안 했다. 어차피 진짜 도망치지는 못할 테니 잠깐만 어울려 줄 생각이었다.
나는 온실에는 다른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오히려 이 안에 숨어 있는 게 더 안전하다는 사실, 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소년의 몸에 있는 마력 사슬이 발동해 추격자들에게 바로 들킬 것이라는 사실을 굳이 그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너, 백야의 전당에서 어떻게 도망쳤어?”
“…….”
“이 온실에 들어올 때 아무 느낌 없었어?”
“…….”
“내 영상을 담은 마력석은 한두 개가 아닌데 왜 하필 토끼풀 황녀님이라고 그랬어? 그거 되게 오래전 건데.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어?”
뒷문으로 가는 동안 심심하기도 하고, 또 궁금하던 것도 있어서 소년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내 질문에 하나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협박범답지 않게 침묵을 지킬 뿐, 나한테 조용히 하라면서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예의 바른 인질범이었다.
“황궁에서 나가면 어디로 가려고?”
하지만 이번 물음에는 소년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어디든.”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갈 거야.”
왠지 그 말에서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느껴졌다. 이 소년이 살아온 삶이 한순간 궁금해졌지만 그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소년이 멈췄던 몸을 먼저 움직여 내 팔을 잡고 앞서 걸어갔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구하러 가야 돼.”
“아, 그래…….”
아주 원대한 꿈이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아버지를 구하러 간다는 걸 보니까 라스너 백작은 사형이 아니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나 보지?
하지만 어쩌나. 넌 황궁을 빠져나가지 못할 텐데.
“너 이 녀석……! 여기 있었구나!”
내 생각대로 온실의 뒷문을 열자마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소년이 굳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위협해 인질극을 벌일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봐줬다.’
나는 마력으로 근력을 증강시켜 그의 몸을 밀쳤다.
부릅떠진 은회색 눈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나를 놀란 듯이 쳐다봤다. 애초에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처럼 소년과 내 거리가 벌어졌다.
팟!
동시에 소년의 손목과 발목에서 검푸른 마력의 사슬이 번쩍였다. 꼭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이 바닥으로 패대기쳐졌다.
곧 상황을 파악한 그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크윽! 이거…… 놔!”
“이단자 주제에 감히 도망치려 하다니, 이 간 큰 자식!”
나는 옆에 서서 소년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헉, 1황녀님!”
“카뮬리타의 1황녀님을 뵙습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자들이 급히 예를 차려 인사했다.
“그래, 이단자가 탈출을 시도했나 보군.”
“예! 혹시…… 이놈이 황녀님께 무슨 실례를……?”
그러다 소년과 내 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마주한 얼굴에 긴장과 당혹감이 어렸다.
나는 제압당한 채 바닥에서 거칠게 몸부림치는 소년을 내려다봤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어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이내 나는 짤막하게 답했다.
“아니, 그냥 나도 마침 지금 온실에 왔다가 우연히 상황을 목격한 것뿐이야.”
“아, 네! 별일이 없으셨다니 천만다행입니다! 황녀님의 휴식 시간을 방해해 죄송합니다! 이 이단자는 저희가 속히 데려가겠습니다.”
“그래. 데려가라.”
백야의 전당의 마법사와 경비병들이 붉은 머리 소년을 둘러업고 서둘러 온실을 빠져나갔다.
내가 1황자에게 그랬듯이 마법으로 입을 막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듯, 소년은 아까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핏발 선 눈만큼은 아주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왠지 그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
“황녀님, 냉궁의 황녀님이 오늘도 2황녀님 때문에 곤욕을 치르셨다고 해요.”
“그래?”
그리고 그날 저녁, 마리나의 보고를 들으며 태연히 읽고 있던 책의 책장을 넘겼다.
“또 둘이 1황녀궁 근처에서 마주쳤나 보지?”
“네……. 2황녀님이 노발대발하시면서 다시는 1황녀궁 앞에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냉궁의 황녀님을 또 혼내셨다나 봐요.”
“누가 들으면 내 궁이 클로에 것인 줄 알겠네.”
마리나에게 전해 들은 클로에의 작태가 웃겨서 코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황실 내의 모든 길을 자기가 세낸 것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저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런 식으로 클로에에게 당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면서 계속 같은 길을 이용하는 유디트도 바보 같았다.
‘생각보다 머리가 좀 나쁜 편인가?’
내가 유디트였다면 좀 빙 둘러 가더라도 클로에를 피해서 다른 길로 움직였을 텐데.
책에서 본 유디트는 제법 총명한 황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지금은 아직 어려서 상황 판단력이 떨어지는 걸 수도 있었다.
“황녀님이 명하신 대로 일단 지켜보고 있기는 한데……. 혹시 제가 따로 해야 할 일은 없을까요?”
마리나는 혹시 내가 유디트를 위해 나서려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 걸 알 텐데, 괜한 물음이었다.
‘요즘 나답지 않은 행동을 몇 번 해서 그런가.’
하지만 내가 마리나에게 유디트를 지켜보게 한 것은 딱히 그 애가 걱정된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건 오히려 감시에 가까웠다.
“없어. 계속 지금처럼 해.”
“네. 알겠습니다.”
마리나는 그래도 눈치가 빨라서 내게 두 번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마리나가 자리를 떠나고 난 뒤, 나는 마법서를 덮고 다른 책들 밑에 있던 금단술에 대한 책을 펼쳤다.
그래. 결국은 황실의 비밀 서고에서 꺼내 왔다. 물론 아직은 내 자격 요건이 부족해, 가장 엄중하게 보관된 금서들은 빌리지 못했다.
내가 황족이고 1황녀이긴 하지만 일단은 아직 미성년이라 나이에서부터 제한에 걸렸다. 또 황실에서 관리 중인 1급 금서를 열람하기 위해서는 마법사로서의 공식적인 직책도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지금은 겉핥기로만 금단술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게 전부였다.
아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실제로 금단술을 사용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다.
진짜 그냥 궁금해서. 진짜 그냥 알아만 두려고…….
‘아, 진짠데 되게 변명같이 들리네.’
아무튼…… 뭐, 이 정도는 괜찮잖아? 원래 무언가를 경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알아두는 것도 중요하니까.
또 마음속으로 누구에게인지 모를 변명을 읊조린 뒤 진지하게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성에 차는 내용은 없어 책장을 넘길수록 짜증만 가중되었다.
결국은 책을 덮어 버리고 종이와 펜을 꺼내 직접 몇 가지 마법식을 적어 내려갔다.
꿈속의 책에서는 미래의 내가 사용한 금단술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 마법식을 응용한 게 맞는 것 같은데.’
아니면 이거……. 아냐, 이것보다는 이쪽인가?
어느새 생각보다 심취해서 마법식을 그리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참 집중한 뒤 펜을 내렸을 때는 어느새 해가 저물어 창밖에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마리나가 불을 밝혀 주었겠지만 오늘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탓에 방이 어두웠다.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역시 어렵네.’
혹시 금단술을 응용해 마법사의 열병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을까 싶었는데 역시 쉽지 않았다.
애초에 이 방법에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한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제물로 삼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금단술을 시전하는 자와 제물의 마력 파장이 반드시 어느 정도 일치해야만 가능했으니까.
‘책에서 나하고 파장이 가장 잘 맞았던 제물은 단순한 소모성 엑스트라가 아니라, 유디트의 꽃길에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한 등장인물이었지.’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유디트는 마력 각성 후 비로소 진정한 황족으로 대우받게 되었다. 로맨스 소설에 빠질 수 없는 존재인 남주인공과 본격적으로 엮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건 남주인공만이 아니었는데, 그중에는 서브 남주였던 유디트의 충성스러운 기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 모든 것은 유디트 황녀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황녀님을 위해 살고 황녀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그가 유디트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유디트에게 위험이 닥치면 앞장서 그녀를 지키고, 늘 유디트의 옆에서 그녀를 격려해 주고, 또 유디트가 남주인공과 엇갈려 슬퍼할 때면 쓰라린 마음을 안고 오작교 역할을 자처하기도 하는…….
유디트의 기사는 그렇게 주인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순정남다운 면모가 있던 서브 남주였다. 그러나 주인인 유디트를 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나운 맹견 같았던 남자라, 책에서는 나도 그를 몹시 눈에 거슬려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유디트 괴롭히기에 열을 올리던 나한테 직접 경고를 날리며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던 남자였으니까.’
그래서 미래의 나도 유디트의 기사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차에, 그의 마력과 자신의 마력의 파장이 기적적인 확률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여 결국 그 기사는 내 덫에 걸려 금단술의 제물로 희생되어 죽었다.
잠깐 그 장면을 떠올렸다.
[“드디어 네가 죽는구나, 제라드. 버러지치고는 제법이었다고 인정해 주마.”]
미래의 나는 죽어가는 유디트의 기사를 앞에 두고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가엽게도. 너는 유디트에게 네 육신과 영혼을 모두 바치겠노라 맹세했지만 결국 네 피와 살은 전부 내게 속하게 될 테니. 그러니 주인을 잘못 선택해 내 눈에 띈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해라.”]
대사조차 정말 악녀 같지 않은가?
더군다나 비열하게 유디트에 대한 그의 감정을 이용해, 유디트가 위험한 것처럼 함정을 파서 기사를 죽여 버리는 전개였다.
‘아주 똑똑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말아야지.’
그런데 유디트의 충견이라는 이유 말고도, 책 속의 내가 그를 더 고까워했던 이유가 있었는데?
[“천한 것들끼리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도 비슷하군.”]
아,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유디트의 기사에게 백야의 전당 소속 이단자라는 설정 값이 있었지.’
그래서 성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똑같이 노예 취급받던 것들끼리 붙어 다닌다고 나한테 멸시하던 장면이 몇 번 나왔던…….
“……!”
드륵!
그 순간 뇌리를 스친 기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막 떠오른 유디트의 기사, 제라드에 대한 정보를 여러 번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지금 내 방 안을 물들인 노을처럼 짙붉은 머리. 속까지 관통할 것처럼 날카로운 빛을 띤 은회색 눈. 묘하게 어둡고 삭막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자 같은 남자.
소설에서 묘사되었던 부분들을 떠올린 순간,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바로 연관시켜 생각하지 못했지?’
나와 온실에서 마주쳤던 백야의 전당 소속 이단자.
그 소년이 딱 저런 인상착의를 가지고 있었다.
6. 델피니움의 꽃말
“아앗!”
나는 갑자기 탄성을 내지르며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을 응시했다.
보란 듯이 내 궁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사람은 유디트였다.
그녀는 긴 까만색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껴 헝클어지고, 치맛자락이 마구 나풀거려 발목이 보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로 내게 다급히 뛰어왔다. 지금까지의 나였다면 그 품위 없음에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른 의미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저……! 1황녀님을 뵙…….”
쿠당!
내게 급히 다가오던 유디트가 발목을 삐끗해 넘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촤아악!
심지어 그냥 넘어진 것이 아니라, 옷자락을 바닥에 끌며 내 앞까지 미끄러져 오기까지 했다.
“…….”
“…….”
잠깐 유디트와 나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굳은 듯이 움직임이 없던 아이가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아, 그…….”
떨리는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여실히 깃들어 있었다. 내 앞에 볼썽사납게 넘어진 것이 창피한지 하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1, 1황녀님을 뵙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쥐구멍에라도 기어들어 갈 것 같은 작은 인사말이 내 귓가에 울렸다.
나는 느닷없이 튀어나온 유디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먼저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유디트에게 일단 예의상 괜찮냐고 물을 생각이었다.
“풉.”
그때, 유디트의 뒤를 따라온 두 명의 시녀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그들이 무엇을 보고 이런 반응을 내보였는지는 궁금해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뻔했다.
그 순간 나는 이맛살을 구겼고, 유디트는 빨갛게 물든 얼굴을 굳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
조금 전의 어리숙한 모습은 당혹감에 의한 것이었던 듯, 유디트가 이번에는 반듯하게 예를 갖추며 똑 부러지게 말했다. 하지만 의연한 태도와 달리 까만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는 아직도 붉었다.
나는 유디트의 시녀들을 한 차례 눈으로 훑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이 얼른 내게 인사했다.
“1황녀님을 뵙습니다. 카뮬리타의 축복과 가호가 함께 하시어 제국의 광영을 무구히 빛낼 이 시대의 첫 번째 창과 방패가 되시기를. 지성에서 태어난 지고하고도 유일한 태양의 딸로서 최고의 홍복을 누리소서.”
그래도 어쩐 일로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 시녀들을 데리고 있군.
‘물론 없느니만 못한 것들이긴 하지만.’
내가 인사를 받아 주지 않으면 그들은 계속 무릎을 굽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들을 일부러 무시한 채 유디트에게 다시 시선을 움직였다.
“유디트.”
내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을 듣고 아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황궁 안에서는 예법을 잘 지켜야지. 급하게 뛰니까 이렇게 넘어졌잖아.”
지금까지의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무시로 답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유디트와는 접점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할 일 자체가 생기지 않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엔 유디트에게서 눈에 띈 것 때문에 약간의 변덕이 생겼다.
‘라미엘……. 어지간히 할 짓이 없나 보네.’
아까도 언뜻 보고 수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역시 유디트에게 라미엘의 그림자가 붙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갑자기 유디트에게 흥미라도 생겼나?
‘아니면…… 혹시 나 때문인가? 내가 유디트에게 관심을 가져서.’
그때 문득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는 유디트의 손에 시선이 갔다.
“그런데 손등이 왜 그렇지?”
지난번까지만 해도 하얗던 아이의 손에 붉은 줄이 여러 개 나 있는 게 보였다.
“아, 이건…… 그게.”
유디트가 머뭇거렸다.
“말하기 싫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나도 그렇게까지 궁금했던 건 아니라 냉큼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심코 질문해 놓고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화들짝 놀라서 얼른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이건, 그러니까 수업을 받다가요.”
“수업?”
영문 모를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유디트한테는 그녀를 가르치는 교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사실은 요즘, 3황녀님께서 같이 수업을 들을 기회를 주셔서…….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3황녀궁에 가고 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유디트가 요즘 3황녀 리리아나의 궁에 가끔 불려간다고 마리나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온실에서 본 소년에게 관심이 쏠려 크게 신경 쓰지 않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유디트랑 같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고?
‘뭐야, 리리아나가 갑자기 유디트랑 친하게 지낼 마음이라도 들었나?’
클로에가 악녀의 하수인 느낌이라면, 리리아나는 악녀의 하수인의 하수인 같은 느낌이었다. 즉, 클로에와 어울리며 그녀에게 붙어 바람잡이 역할을 주로 하는 개미 악역 느낌이었다.
들을수록 알쏭달쏭해지는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수업이랑 네 손등이 그렇게 된 게 무슨 상관……. 설마 네가 진도를 못 따라서 리리아나의 선생이 너를 때린 거야?”
“아뇨, 선생님은 저한테 질문 안 하세요.”
“그럼?”
“3황녀님이 대답을 못 하시면 제가 대신 맞아요.”
아니, 잠깐.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만. 유디트, 얘야? 그러니까 그거, 매 맞는 시동이잖아?
기상천외한 짓을 벌인 리리아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뒷골이 저리기 시작했다.
‘아니, 씨. 세상에 어떤 황녀가 매 맞는 시동 노릇을 해?!’
이것들이 진짜 돌아가면서 난리야!
‘아무리 반쪽짜리라 해도 그렇지, 리리아나 이 상식 없는 게!’
리리아나의 교사 중 누가 그 수업에 들어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 맞는 시동이라면서 4황녀가 왔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겠어!
‘아니, 아니지…….’
이 경우에는 때리라고 데려온 사람도 그렇지만, 진짜 때린 사람도 문제지?
‘아무리 이름뿐이라고는 해도 명색이 황녀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데, 감히 같은 피를 나눈 황족도 아니고 귀족 따위가 회초리질을 해?’
“유디트, 그 선생 이름이 뭐지?”
속으로 서늘한 분노를 삭이다 보니 오히려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유디트는 내가 왜 물어보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을 향한 관심에 들뜬 듯이 말갛게 웃었다.
“토르센 자작님이라고 들었어요!”
“토르센 자작이구나.”
나는 곧 유디트가 영영 볼 수 없게 될 남자의 이름을 되새겼다.
손을 내밀어 유디트의 손등에 밀착시켰다.
화아앗. 내가 내보낸 마력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잠시 후 피부가 벗겨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던 유디트의 손과 무릎이 완벽하게 치료되었다. 피가 배어난 상태로 구겨져 있던 옷도 새것처럼 깔끔해졌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왜 그렇게 뛰어온 거야? 날 보려고 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유디트는 어쩐지 조금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게.”
유디트는 내가 치료해 준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더듬거리는 음성을 흘려보냈다.
“늦장을 부리면 금방 가 버리실 것 같아서…… 그러니까, 저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꼴이 답답했지만 그래도 유디트를 기다려 주었다.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요.”
역시 날 보려고 일부러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던 거였나.
클로에에게 봉변을 당하면서도 계속 1황녀궁 앞을 얼쩡거리기에 머리가 나쁜 줄로만 알았더니.
“감사받을 일을 한 적은 없는데.”
“아니에요.”
내 말에 유디트가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에 마법 정원에서도 구해 주셨고…… 또 2황녀님한테 벌을 받을 뻔했을 때도 도와주셨잖아요. 저한테…… 과자도 주셨고요.”
딱히 자기를 위해 한 행동은 아닌데 그걸 도와줬다고 생각하는군.
원래의 내 성격대로라면 ‘내가 네까짓 걸 도와주다니, 그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착각이냐’고 일침을 놓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디트가 너무 순한 얼굴로 정말 기쁘다는 듯이 배시시 웃고 있는 걸 보니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소리 해 줄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래?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그래서 결국 그 책은 이렇게 멍청할 정도로 착하게 살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뭐야?’
유디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차라리 유디트가 경계했다면 내 기분이 좀 나아졌을까?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맑은 눈으로 말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유디트의 목에 손가락 끝이 닿았다. 충동적으로 손에 힘을 주려다가 멈췄다.
‘미쳤나. 진짜 괴물이라도 되려고?’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유디트의 옷깃 밖으로 삐져나온 체인을 완전히 밖으로 빼냈다.
“……네가 매일 하고 다니는 이 목걸이, 체인이 헐거워져서 빠질 것 같은데.”
내 말이 의외였는지, 유디트가 번쩍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아……. 제가, 이걸 매일 하고 다니는 걸…… 알고 계셨어요?”
내 말의 어디에 그렇게 큰 놀라움을 느꼈는지, 유디트의 눈이 당장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동그랗게 떠져 있었다.
“내가 잠깐 봐도 될까? 혹시 망가졌으면 고쳐 주고 싶어서.”
유디트는 경계심도 없이 바로 목걸이를 풀어서 내게 주었다.
그동안 교류도 없던 내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데 의심 한 톨 없이 선뜻 제 물건을 내주다니? 열두 살이나 먹어서는 뭐 이렇게 맹탕인가 싶었다.
속으로 혀를 차면서 유디트의 목걸이를 확인했다.
그냥 봐서는 낡아 빠진 고물에 불과했지만 역시 목걸이의 뒷면 이음새 부분에 아주 작게 새겨진 깃털과 초승달 모양의 문장이 있었다. 얼마 전, 황실 서고를 뒤져 확인해 본 멸망한 마법 왕국의 문양과 일치했다.
이미 그럴 걸 알고 있었지만, 꿈에서 봤던 내용이 사실임을 이렇게 다시금 내 눈으로 확인하자 왠지 머리꼭지로 피가 쓸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이거…… 네 어머니의 유품이었지?”
“네, 맞아요……! 그, 그것도 알고 계셨어요?”
뺨을 발갛게 상기시킨 채 손을 꼼지락거리는 아이를 앞에 두고 나는 차갑게 웃었다.
일단 내 손에 들린 흉물 같은 목걸이를 유디트에게 돌려줬다.
“망가진 곳은 없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난 다음 일정이 있어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구나.”
“아, 그러셨군요. 바쁘신데 제가 방해한 거네요.”
유디트는 금세 풀 죽은 얼굴을 보였다.
“아니야…….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어. 내가 다른 공무로 바쁠 때가 많아서 그동안에는 이렇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드물었으니까.”
아마도 싸늘하게 식었을 눈을 감추기 위해 유디트의 뒤에 있던 시녀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런, 인사를 받아 주는 걸 깜빡 잊었네. 그만 일어나도 좋아.”
“가, 감사합니다, 1황녀님.”
무릎을 반쯤 굽힌 불편한 상태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시녀들이 그제야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마 내가 일부러 그랬다는 사실을 그들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럼 살펴 가렴, 유디트.”
유디트는 잠깐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아련히 미소 지으며 내게 인사했다.
“네.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
무슨 정신으로 유디트와 인사하고 그녀를 지나쳐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햇빛이 쨍쨍했지만 괜히 등줄기가 서늘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꿈에서 본 책의 내용이 아주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내 병을 고칠 방법.
거기에 필요한 아이.
온실에서 그 붉은 머리 소년을 보고 그의 정체를 깨달은 이후로 내 마음에 깊게 뿌리내린 끔찍한 생각이 있었다.
책에서 미래의 내가 했던 짓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느새 나는 그것을 현실화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실패한 게 문제였던 거야. 그러니 이번에는 성공시키면 돼.’
나도 몰랐던 냉정함과 이기심, 그리고 잔혹함에 스스로조차 질린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세계의 이면이 내게 하필이면 그런 미래를 보여 준 것도, 이번에는 금단술에 성공할 방법을 찾으라는 의미인 게 분명해.’
지금도 밝은 햇빛 아래 있으면서도 손이 떨렸다. 비록 중죄로 여겨지는 금단술이긴 하지만…… 나는…….
“1황녀.”
그 순간 양산 아래로 흘러든 낮은 음성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심장이 덜컹거렸다. 하지만 곧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고 나도 모르게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을 사르르 풀었다.
“어머니.”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차갑게 얼어 있던 마음에 불안감 대신 놀라움이 차올랐다.
‘지금, 어머니가 먼저 나를 불러 주신 건가?’
주위를 둘러봤으나 어머니와 나, 그리고 우리를 따르는 시녀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지난번에 황후궁에 찾아갔을 때도 결국 어머니를 멀리서만 보고 돌아섰으니, 이렇게 그녀와 둘이 마주하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게 말을 걸어 준 것도 거의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어머니, 좋은 오후예요. 산책을 나오셨나요?”
바보같이 나는 조금 마음이 들떴다. 내 손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마음을 다잡은 것이 무색하게도, 이렇게 어머니의 앞에 선 순간 나는 또다시 그녀의 어린 딸이 되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어머니가 밀리엄과 함께 있지 않은 것도 내 기분을 고양되게 했다.
혹시 나를 보러 일부러 나오신 건 아닐까? 온실에서의 일을 어머니도 들으셨나?
탈출한 이단자가 내 온실 앞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게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도 많았는데.
‘만약 그런 거라면…… 나도 어머니에게 말해도 될까?’
지금 내 마음속에 혼자서는 견디기 어려운 커다란 짐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머니, 저…….”
“네가 제정신이냐?”
그러나 내게 떨어진 건 냉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네 이상한 행동거지에 대한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내 귀가 잘못되었겠거니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어머니의 눈은 나를 볼 때면 싸늘한 빛을 띠게 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런 꼴을 하고 있나 싶었다만. 이제 보니 천한 것과 어울리느라 황녀로서의 몸가짐도 망각한 모양이구나.”
나를 질책하는 목소리에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어머니는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한 번도 웃어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에요, 어머니. 유디트는…….”
아무래도 조금 전 내가 유디트와 만나고 있는 걸 보신 듯해서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아무 말 없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이런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는 카뮬리타의 1황녀이고 내 딸이며 밀리엄의 누이다. 그러니 우리가 낯부끄러울 일 없게 처신 잘하거라.”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싸늘하게 훈계한 뒤 미련 한 점 없다는 듯이 나를 지나쳐 갔다.
“황녀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마리나가 작게 불렀다. 걱정 어린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이럴 때는 내가 황녀라 다행이었다. 모두 뒤쪽에 서 있어서, 아무도 내 얼굴을 보지 못할 테니까.
“마리나, 다음 일정은 뭐지?”
그리고 나는 이런 순간에도 목소리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꾸며낼 줄 알았다.
“사냥제 의상의 마지막 가봉을 위해 재단실에서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래, 가자.”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한 뒤 멈춰있던 걸음을 옮겼다.
길을 걷다가 바닥에 앉은 작은 무당벌레가 보였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무참히 밟고 지나갔다. 파삭 소리와 함께 내 마음 한 귀퉁이도 같이 부서졌다.
*
“황녀님, 갑자기 움직이시면 다치실 수도 있어요.”
황실 재단사 중 하나인 르벨린 백작과 사냥제 의상을 가봉하다가 몇 번이나 바늘에 찔릴 뻔했다.
시녀들에게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서 있는 동안에도 머리로는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책에 적힌 미래에서 유디트가 마력 각성을 했던 게 몇 살 때였지.’
열다섯 살? 열여섯 살?
유디트가 지금 열두 살이니 그렇게 오래 남지는 않았군.
‘……그럼 차라리 지금 전부 다 없애 버리는 게 나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동안 내 안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진심 어린 살의를 느꼈다.
무심코 무서운 생각을 해 놓고 흠칫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향한 놀라움도 곧 질척이는 어두운 감정에 먹혀 바스라졌다.
도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우습고 하찮은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입으로는 ‘너를 딸로 둔 것은 내 가장 큰 자랑이다’, 또 ‘네가 카뮬리타의 유일한 보배다’ 하면서 떠들어 댔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를 쓸모가 다하면 언제든 팽할 사냥개로 취급한 아버지.
국가적인 행사 때마다 제국민들 앞에서 대대적인 마법을 시연해 황족에 대한 존경심을 드높이는 것도 내 역할이었고, 재해 등의 문제가 벌어져 피해를 줄이거나 피해를 입은 곳을 수복해야 할 때 앞장서는 것도 내 역할이었다.
내가 마법사로서 완전히 무력해지기 전에 뽑아 먹을 수 있는 만큼 실컷 이용하려는 속셈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 내게 더 큰 배신감을 안겨 준 건 어머니다.
나만을 다정하게 안아 주던 손, 나만을 향한 애정으로 빛나던 눈, 나만을 사랑한다고 매일같이 속삭여 주던 입술.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나 대신 내 남동생에게 주게 된 그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 어머니의 앞에서 그녀의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을 없애 버리면 얼마나 비통해할까?
사실은 그 애를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 어머니도, 그녀를 빼앗아간 밀리엄도 어떨 땐 아버지보다도 더 미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에 거슬리는 또 한 사람.
“지난번에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요.”
아까 1황녀궁 앞에서 만났던 유디트가 떠올랐다.
“벌을 받을 뻔했는데 도와주셨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결국은 네가 최종 승자란 말이구나.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결국은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보물을 두 손에 거머쥐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
‘아, 전부 다 없애 버리고 싶다.’
사실은 침착함을 흉내 내고 있었을 뿐, 조금도 냉정하지 못한 속이 또 득시글거리며 끓기 시작했다.
이 익숙하지 않은 무력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줄곧 내 심장과 뇌를 갉아 먹는 듯했던 부정적인 상념이 또 삐죽한 이를 세우고 내 안에 독을 흘려 넣었다.
“다 됐어요, 황녀님. 이제 편히 계셔도 돼요.”
이 세상에 빛나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한데.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들은 전부 내 것이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아무리 괴롭고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도, 내 앞에 눈부신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끝났으면 다들 나가 봐.”
내 것인지 내가 본 책 속의 아르벨라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좌절감과 파괴욕을 밀어 넣고 사람들을 전부 내보냈다.
이 추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면, 잠깐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
그날 밤, 나는 마력석을 가져와 늦은 시간까지 내 과거의 모습을 보고 또 봤다.
-아르벨라, 꽃구경을 한다더니 거기서 혼자 뭐 하고 있니?
-토끼풀을 찾아요.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오늘따라 내 마음을 눅눅하게 적셨다.
-토끼풀은 왜?
-우응, 비밀인데…….
-이 어머니에게도 알려 주지 못할 비밀이니?
-그건 아니지만……. 실은 어제 유모가 토끼풀로 왕관 만드는 걸 알려 줘서 오늘 어머니한테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요!
-어머, 나한테? 세상에. 고맙구나, 아가.
그러나 마력석의 영상 속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아이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릴 때 늘 나를 안아 주고 사랑해 주던 사람도 이제는 아무 데도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나를 슬프게 했다.
결국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그날 밤 나는 창피하게 혼자서 남몰래 눈물까지 찔끔 짜면서 내 반짝이던 어린 시절과 완전한 작별을 고했다.
분명 그날이 이제까지 살아온 내 14년 인생에서 가장 길던 밤이었다.
6.5 사소한 변화
“아, 아니, 1황녀님?”
토르센 자작은 3황녀 리리아나의 수업 시간에 나타난 1황녀 아르벨라를 보고 당황했다.
“1황녀님이 제 수업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토르센 자작의 수업이 그렇게 감명 깊다고 들어서 오늘은 나도 참관하려고 와 봤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아르벨라가 입매를 삐뚤게 기울이며 말했다.
“여기에 오면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다고 하던데?”
방의 주인은 3황녀 리리아나였지만, 1황녀 아르벨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이 너무 강렬해서 다른 사람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토르센 자작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고민했다. 그러다 합당한 결론을 내렸다.
‘아하, 4황녀가 회초리로 맞는 것을 구경하러 오셨나 보구나!’
3황녀 리리아나도 4황녀 유디트가 회초리질 당하는 모습을 보는 걸 퍽 즐겼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눈치가 비상한 사람이라면 지금 3황녀 리리아나의 얼굴에 식은땀이 나고 있는 것과 아르벨라의 눈이 독사처럼 매섭게 빛나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면, 감히 황궁 안에서 아무리 반쪽이라고는 하나 명실상부한 황족의 이름을 단 소녀에게 회초리를 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토르센 자작은 처음 3황녀의 공부방에 들어왔을 때보다 평정을 되찾았다.
유디트가 여전히 멍청해 보일 정도로 유순한 얼굴을 한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더 편안해졌다.
“자, 3황녀님? 지난주에 공부했던 내용의 복습부터 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 유명한 1황녀의 눈빛을 정면에서 받고 있으려니 긴장이 되기는 했다.
“카뮬리타와 이웃한 시노 왕국과 보를레오 제국 사이에 엘렉시아 조약이 체결된 배경을 말씀해 보세요.”
“그, 그게…….”
이번에도 3황녀 리리아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런, 복습을 충분히 못 하셨나 보군요.”
토르센 자작은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그래서 오늘도 망설이지 않고 유디트를 불렀다.
“그럼 4황녀님. 앞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네!”
토르센 자작은 늘 먼저 회초리로 유디트를 때린 뒤 질문의 정답을 말해 주고 수업 진도를 나갔다. 그래서 유디트는 평소에도 빨리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손을 내밀곤 했다.
마침내 회초리를 든 토르센 자작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막 회초리가 유디트의 손등을 내려치려던 찰나…….
“하, 정말 기가 막혀.”
낮게 울린 음산한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싸늘히 식혔다.
어느새 토르센 자작의 손에 들려 있던 회초리는 아르벨라의 마력에 휘감겨 허공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토르센 자작, 그대는 목숨이 여러 개인가?”
“예, 예?”
“지금 감히, 내가 보는 앞에서 황족을 능멸해?”
토르센 자작은 아르벨라의 시퍼런 눈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깜짝 놀랐다.
“간도 크게 감히 황족을 체벌하여 신하의 본분을 잊은 그 건방진 손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순간 회초리가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꺾이고 휘어진 나무가 당황한 토르센 자작의 손을 아프게 옥죄었다.
“으, 으악! 화, 황녀님……!”
그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서둘러 바닥에 엎드렸다.
“저, 저는 그런 게 아니라 3황녀님이 시키는 대로……!”
“그래? 3황녀가 시키면 내 뺨이라도 칠 기세군?”
“헉!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자작 말이 그렇잖아. 어디서 시치미야?”
그날 토르센 자작은 유디트가 그에게 매를 맞았던 횟수대로 똑같이 회초리질 당했다. 물론 그가 손으로 체벌한 강도보다 아르벨라가 마법으로 회초리를 내려치는 강도가 훨씬 더 셌다.
“선생이라는 자가 어린 황녀의 말에 휘둘려 이토록 분별없이 굴다니, 내 이 일을 아바마마께 직접 고할 것이다.”
그렇게 먼저 토르센 자작을 처리한 후 3황녀 리리아나에게 아르벨라의 날카로운 시선이 닿았다.
“리리아나!”
“히익!”
“너 제정신이야? 유디트를 네 매 맞는 시동으로 쓰다니, 카뮬리타 황실 역사에 새로 쓰일 별 해괴한 짓거리를 다 하는구나!”
“자, 잘못했어, 언니!”
유디트는 처음에 아르벨라가 수업을 참관한다는 소리에 마냥 신나 하다가, 기대와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당황했다.
“제, 제가 원해서 그런 거예요! 저도 수업을 듣고 싶어서요.”
유디트가 오히려 리리아나를 두둔하자 아르벨라는 기가 막혀 보였다.
“넌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땐 네가 회초리를 맞을 줄 알아.”
리리아나에게 싸늘히 말한 아르벨라가 이번에는 유디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유디트 너는…….”
“네, 네!”
옆에서 리리아나가 눈물을 쏙 빼도록 혼나는 모습을 본 유디트가 긴장했다.
아르벨라는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조차 남의 눈치를 보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삶은 감자를 목구멍에 쑤셔 넣은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에서 치열한 갈등이 발발했다.
아르벨라는 속으로 욕을 읊조리며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을 꺼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네…….”
“그리고 그렇게 수업이 듣고 싶으면 따로 교사를 붙여 주지.”
“네?!”
유디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아르벨라는 왠지 지금 자신이 내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어져서 혀를 씹었다.
“일단 그런 줄 알고 있어.”
아르벨라가 휙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유디트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7. 사냥 대회, 남주인공과 악녀의 상성
“1황녀님, 이쪽에 앉으십시오.”
내 여러 번민 따위와는 상관없이 시간은 착실히 흘러 사냥제가 시작되었다.
“여어, 아르벨라! 어서 와.”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1황자 라미엘을 포함해 다른 이복동생들이 나한테 인사했다.
“오늘도 나만큼 아름답구나, 우리 누이. 그래, 연설 준비는 잘했고?”
“시답잖은 소리 좀 하지 마. 어느 쪽이든 당연한 걸 가지고.”
“오, 역시 자신감!”
소란을 떠는 라미엘을 흘겨보며 자리에 착석했다. 오늘도 경박한 얼굴로 웃으면서 박수를 치는 그의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라미엘의 말대로 나는 오늘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황족을 대표해 단상에 오를 예정이었다.
내가 마법사의 열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황실 내에서도 황제와 황후를 제외하면, 내 상태를 확인한 마법사와 의원들만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조차 금언 마법으로 입이 막혀 죽을 때까지 이 일에 관련된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여 나는 여전히 카뮬리타의 가장 강력한 마법사로 제국민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었고, 아버지는 황실의 이름을 높이는 데 그걸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지금까지는 이런 것에도 곧잘 우쭐함을 느끼곤 했으나 지금은 그저 뜨뜻미지근한 심정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정말 아버지의 속내를 모르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모른 척했던 것뿐인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아직 행사가 시작되기 전이라 나는 상석에서 시녀의 부채질을 받으며 쉬고 있었다. 여전히 머리가 짧긴 했지만 여러 장식들을 더해서 그런지 지난번에 거울을 봤을 때처럼 화려한 드레스가 어색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주위에는 다른 황족과 귀족들도 자리해 있었다.
“1황녀님…….”
“영상에서처럼 정말 머리카락이…….”
그들 눈에도 내 짧아진 머리카락이 생경해 보이긴 했는지, 아까부터 날 힐끔거리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머리가 길든 짧은 어차피 나는 나고, 이 상태로도 난 황족들 중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웠으니까.
물론 이건 오만함이 발휘된 근거 없는 착각이 아니라, 매우 객관적인 판단에 기초한 이유 있는 자신감이었다.
“역시 다들 영상 마력석 얘기를 하네. 아르벨라, 너 이번에도 한 건 했더라?”
라미엘의 말처럼, 실제로 이번에 시중에 푼 영상 마력석도 대박이 났으니 말이다.
밖에 내놓자마자 100만 개 추가 제작에 ‘이달의 황녀님’으로도 선정되었다지?
한 달에 한 번씩 황족들이 제국민들을 상대로 마력석 장사를 해먹는다는 건 전에 말했을 것이다. 특히 이 황족들의 영상 마력석은 제국민들 사이의 인기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정치적 도구로도 쓰였다.
아, 물론 한 명은 제외였다.
노예 소생의 황녀 유디트.
그녀만큼은 무늬만 황족이었기에, 영상 마력석을 제작해 밖에 내보내지 않았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다들 안 그런 척하면서도 은근히 매달 신경 써서 마력석을 제출하는 추세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는 턱걸이로 마지막에 아슬아슬하게 제출했다. 이번 달에는 유디트니 마법사의 열병이니 하는 일로 바빠서 그쪽 일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리나가 영상 마력석 제출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벌써 시기가 그렇게 되었나 싶었다.
“다른 황족들은 다 제출했대?”
“절반 정도는요.”
“내용 보고해 봐.”
1황자 라미엘은 어쩐 일로 그답지 않게 성실하게 수업을 받는 모습으로 최종 결정되었다고 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2황비 카타리나의 취향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라미엘의 영상 마력석을 결정하는 데 그녀의 입김이 많이 들어갔구나 싶었다.
내 말에 마리나는 ‘네, 아무래도 평소에는 좀…… 여러 의미로 튀셨잖아요?’라면서 미묘하게 웃었다.
마리나 말대로, 1황자 라미엘은 평소에 못생긴 주제에 자신감만 높아서 제 외모를 지나치게 과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매달 ‘장미꽃을 문 꽃보다 아름다운 1황자님’, ‘눈물조차 보석처럼 아름다운 1황자님’ 따위의, 주먹을 부르는 거지 같은 컬렉션을 내놓기 일쑤였다.
쓸데없이 꽃을 먹거나 눈물을 흘리는 영상 같은 걸 뭐하러 찍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지난번에는 비를 맞으면서 실수인 척 상반신을 슬쩍 노출한 영상을 내보내려고 해서 난리가 났었다.
나는 라미엘의 지난 추태를 떠올리며 도대체 어린놈이 나중에 뭐가 되려고 벌써부터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둘렀다.
밀리엄은 어머니한테 꽃 화관을 만들어 선물하는 장면을 찍어서 제출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썩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밀리엄은 내 어머니의 기대만큼 제국민들에게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었다. 막내라 그런지 이미 웬만한 소재는 다른 황녀, 황자들을 거쳐 가서 불리한 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마리나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밀리엄의 마력석이 인기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밀리엄의 영상은 어렸을 때의 나를 따라한 게 많았다. 그래서 내 인기가 많은 만큼 동복동생인 밀리엄의 영상도 한편으로는 수요가 많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그래서 식상하다는 소리를 듣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황녀님과 밀리엄 황자님이 같이 계신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요청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그래서 찍었잖아. 남동생에게 간식을 먹여 주는 다정한 1황녀님 영상.”
“그건 벌써 작년 일이잖아요.”
어머니는 나를 포기했지만, 그래도 밀리엄을 위한 발판으로는 아직 쓸모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종종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와 밀리엄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보여 주려 했다.
어쨌든 나도 내 입장이 있으니 공식적인 자리 같은 곳에서 밀리엄과 적당히 친분이 있는 모습을 보이는 건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도 매달 제국민들에게 보이는 영상 마력석에서 밀리엄과 내가 같이 무언가를 하는 모습은 아주 드물게만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솔직히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우리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나도 이번 달 영상 마력석의 내용을 고민하느라 시간을 좀 썼다.
의외로 돌파구는 이단자 소년 제라드와 만났던 온실에서 나왔다.
사실은 마침 마리나가 영상 마력석 얘기를 꺼내서 잊고 있던 온실의 감시용 마력석을 떠올렸다. 그래서 제라드에 대해 확인하려고 감시용 마력석을 돌려 봤더니 쓸 만한 게 나왔다.
열린 온실의 천장으로 알록달록한 새들이 날아가고, 휘날리는 깃털과 초록 잎들 사이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마력석에 찍혀 있었다. 내가 봐도 꽤 신비롭고 근사해 보이는 모습이라 오랜만에 자아도취에 빠질 뻔했다.
나는 옳다구나 싶어서, 그것을 이번 달 영상 마력석에 옮겨 담아 제출했다.
“진짜 재주도 좋다니까. 나도 100만 개 추가 제작해 보고 싶다.”
라미엘이 앞에서 계속 부럽다고 찡찡거렸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흥,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
어쩐지 온실의 감시 마력석에 찍힌 장면을 보는 순간 딱 ‘이거다!’ 하는 느낌이 오더라니까.
‘의도했던 것도 아닌데 생활 속에서 이런 작품을 만들어 내다니. 역시 난 대단해.’
“아르벨라, 너랑 내 미모면 최단기간 200만 개 돌파도 가능할 텐데? 응? 나랑도 같이 찍자, 응?”
“일없어. 넌 매일 이상한 것만 찍잖아.”
“와, 얘가 이렇게 예술을 모르네.”
예술이 다 죽었니?
“쳇, 진짜 도도해 가지고. 한 번을 안 넘어와.”
느른하게 턱을 괴고 앉아 투덜거리는 라미엘을 무시하고 오랜만에 스스로의 천재성을 실감하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다.
‘응?’
그러다 문득 말석에 앉은 유디트를 발견했다.
그녀는 아무와도 인사를 나누지 않고 혼자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검은색 긴 머리카락을 단정히 늘어뜨리고 단아한 흰 드레스를 입은 유디트를 보며 난 눈살을 찌푸렸다.
‘옷이 왜 저렇게 허름하지?’
물론 유디트의 의상은 상당히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과할 정도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다른 황족들 사이에서는 자못 초라해 보였다.
한번 유디트를 의식한 뒤라 그런지, 이전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자리에서 보니 생각 이상으로 볼품없는 느낌인데. 나이에 비해 작고 말라서 더 그래 보이는 건가?’
비교를 위해 유디트와 동갑인 3황녀 리리아나와 2황자 로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3황녀 리리아나는 1황비 플로라의 소생으로 눈에 띄는 분홍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동그랗게 땋아서 말아 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원래 마른 편이라 뾰족한 얼굴이 더 강조되어 보였다.
‘그런데 왜 죄다 분홍색이야? 눈이 부담스럽네.’
내 지긋한 시선을 받은 3황녀 리리아나가 몸을 흠칫 떨었다.
얼마 전에 나한테 혼났던 걸 떠올리기라도 했나? 하지만 그건 그럴 만했다.
‘이제는 황족들도 매 맞는 시동을 들이지 않는 추세인데 어디서 이미 사라진 고리타분한 전통을 들고 와서 애를 때릴 핑계로 삼아?’
아무튼, 마른 편인 리리아나와 비교해도 유디트가 훨씬 작고 말라 보였다.
2황자 로이드와 비교하면 더 무참해졌다. 2황자 로이드는 3황비 소피아 소생인데, 유독 토실토실함이 지나쳐 비대해 보이는 몸집이었다. 하지만 키만 봐도 확실히 유디트가 한 뼘은 더 작아 보였다.
“어디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요, 오빠?”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뻔뻔하기도 해라. 여기가 어디라고 천한 낯짝을 들이미는 건지.”
황자와 황녀들이 들으란 듯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디트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 분명했다.
나는 유디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았다.
유디트는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그저 동요 없는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에 다른 황자와 황녀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황족들의 자리에 유디트가 함께 있는 것이 그들의 눈에 몹시도 거슬리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게 익숙한지 유디트는 끝까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굳게 다문 입술에 아까보다 지그시 힘이 들어간 것을 보면, 그녀가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잠깐, 그런데 왜 클로에가 유디트의 옆자리에 앉아 있지? 다른 때 같으면 진작 내 옆자리를 꿰찼을 텐데.’
클로에는 황비들 중 가장 입김이 센 2황비의 소생으로, 출신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유디트의 옆에 앉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본래 유디트 다음으로 말석에 앉던 것은 3황비 소피아의 소생인 5황녀 비비안이었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니, 클로에의 뒤쪽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갈색 머리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5황녀 비비안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클로에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모양이다.
5황녀는 아직 나이가 어린 데다, 또 앙칼진 성격의 클로에를 평소에 무서워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자리를 돌려 달라고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그렇다 해서 상석인 클로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날씨가 덥네! 여기, 차가운 음료 가져와.”
그때 갑자기 클로에가 멀쩡히 마시던 차를 놔두고 시녀에게 마실 것을 새로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딸기를 갈아 넣은 주스가 그녀의 앞에 대령되었다. 평소에 클로에가 즐겨 먹던 음료였다.
그런데 클로에의 반응이 이상했다.
무심코 유리잔에 손을 대던 클로에가 갑자기 흠칫 몸을 떨었다.
“이건……! 색이 너무 진하잖아. 좀 더 옅은 거 없어?”
그러더니 그녀는 애꿎은 음료의 색을 트집 잡기 시작했다.
클로에에게 음료를 내온 시녀가 혹시 그녀의 변덕에 또 꼬투리라도 잡힐까 싶은지 서둘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금방 다른 걸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다시 가져와! 그리고 이렇게 생과일 들어간 거 말고! 박하 차나 레몬에이드처럼 묽은 걸로 준비하란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도대체 뭐가 심하다는 건지…….
어쨌거나 시녀는 클로에의 말대로 냉침한 박하 차를 가져왔다. 이번에는 클로에도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이후 이어진 클로에의 행동을 보고 나는 그녀가 5황녀의 자리를 빌린 이유를 깨달았다.
촤악!
별안간 시녀가 가져온 유리잔을 들어 올린 클로에가 그 안의 내용물을 유디트의 치마에 쏟아 버렸다.
“어머, 빈자리인 줄 알았는데 누가 있었잖아?”
실수인 듯이 말했지만 클로에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전혀 없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연을 가장한 고의였다. 역시 괴롭히려고 유디트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던 모양이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 참. 그래도 나름대로 양심적이라고 해야 할지.’
뜨거운 걸 부었으면 분명 살갗을 뎄을 텐데, 일부러 차가운 음료를 준비한 정성이 갸륵했다.
게다가 음료의 농도까지 신경 쓰다니…….
지금은 어려서 그런지, 아직 소설에서 본 것 같은 악독한 악녀 하수인으로는 진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렸다.
사실 클로에가 아무리 악독하다고 한들, 그녀의 수준이면 귀엽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의 최고 악역이던 내가 유디트를 괴롭힌 강도는 클로에와 비교도 못 하게 심했다.
‘하긴 지금의 내 성격만 생각해 봐도 누구를 작정하고 괴롭히려면 이렇게 자잘한 짓거리를 하지는 않겠지.’
미래의 나도 상당히 큰 스케일로 놀았던 기억이 났다.
최소한 화염 마법이 내재된 물건을 유디트의 생일날 선물해 궁을 연소시킨다든가, 무도회에서 유디트의 머리 위에 있는 샹들리에를 폭파시켜서 주변을 초토화시킨다든가…….
그러다 갑자기 움찔했다.
‘흠……. 생각해 보니 어째 전부 다 살인 미수로군.’
이러니 혹시 금단술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권선징악의 결말로 파멸 엔딩을 맞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어 기분이 좀 언짢아졌다.
“너, 설마 이런 더러운 몰골로 사냥제에 참석할 생각은 아니겠지?”
클로에가 유디트를 향해 얄밉게도 말했다.
그녀의 목적은 단순히 유디트의 옷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녀를 사냥제에 참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인 듯했다.
“애초에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있는 거야?”
클로에의 말을 듣고 무릎 위에 얹어진 유디트의 손이 꽉 쥐어졌다.
그러나 잇따른 그녀의 음성은 담담했다.
“폐하께서 이번 사냥제에는 반드시 황족 모두가 참석해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그러니까 그 ‘황족 모두’에 왜 네가 끼냐 이 말이지.”
그러고 보니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클로에의 최후는 어땠을까?
아르벨라가 죽었으니, 악녀 하수인도 같이 망했을까?
들고 있던 부채로 테이블을 툭툭 치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클로에.”
내가 이름을 부르자 클로에가 멈칫했다.
그녀는 유디트를 달달 볶는 것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네 궁이 아니야.”
나는 주위에 있는 귀족들이 돌아볼 정도로 언성을 높이고 있는 클로에를 향해 냉엄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황족의 품위를 직접 깎아내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자중하도록 해.”
속으로는 다른 황자와 황녀들을 깔아 볼지언정 겉으로는 나름대로의 상냥함을 보여 왔던 나였다.
그런 내가 그들에게 한기를 내비칠 때는 주로 궁 밖에서 황족의 위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할 때였다.
그나마 궁 안에서는 못마땅함을 느껴도 굳이 형제들의 일에 끼어들 정도의 관심이 없어 그냥 넘어갈 때가 많았으나 밖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다른 귀족들이나 제국민들 앞에서 고귀한 황족의 이미지에 손상을 줄 법한 일을 하는 것을 지금까지의 나는 용납하지 못했다.
“조심할게.”
그것을 알기 때문에 클로에는 날카로운 기운을 한 풀 꺾고 얌전히 대답했다.
내게 경고받은 클로에가 유디트를 한번 흘겨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로에가 떠난 자리에 5황녀 비비안이 주춤거리며 착석했다. 유디트를 두고 수군거리던 다른 남매들도 조용해졌다.
아까부터 상황을 관망하던 1황자 라미엘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날 보고 있었다.
뒤이어 유디트와 짧게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무어라 말할 듯이 작게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유디트.”
나는 그런 유디트를 향해 말했다.
“클로에 때문에 옷이 많이 더러워졌구나. 그 상태로 사냥제에 참석하기는 힘들겠어.”
그러자 유디트가 흠칫했다. 다른 황자와 황녀들의 얼굴에는 비린 미소가 피어났다. 내가 유디트를 이 자리에서 치우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만 황성에 돌아가고 싶니, 아니면 그래도 사냥제에 참석하고 싶니?”
“저는…….”
유디트는 머뭇거렸다.
나는 독촉하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일순간 유디트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 내가 그녀에게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순전히 의견을 물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사냥제에 참석하고 싶어요.”
유디트가 이내 대답했다.
“여벌로 준비한 의상은 있고?”
“아니요.”
조금은 의외였다. 더러운 드레스 차림을 하고서도 구태여 사냥제에 참석하고 싶다니.
“그래. 내 옷을 빌려주고 싶지만 크기가 맞지 않을 것 같고.”
나는 들고 있는 부채로 반대쪽 손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클로에에게 여벌 드레스가 있을 거야. 원한다면 그걸 빌리도록 해. 클로에도 자신의 실수 때문에 생긴 일이니 기꺼이 너를 도와주고 싶다고 하는구나.”
“언니!”
본래 자리로 돌아가 착석해 있던 클로에가 화들짝 놀라 나를 불렀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
클로에가 나를 잘 따르는 걸 아는 만큼, 나도 그녀가 가끔 귀찮을지언정 진심으로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정말, 유디트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쉴 새 없이 파멸을 부르고 있었다.
물론 나도 유디트가 좋은 건 아니지만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클로에도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게 좋았다.
“유디트. 물론 네가 원하지 않으면 거절해도 된단다.”
유디트는 또 놀란 것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흔들리던 그녀의 눈이 이내 밑으로 내리깔렸다. 곧 유디트가 차분하게 답했다.
“1황녀님과 2황녀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클로에에게 시선을 돌렸다.
클로에는 억울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말만큼은 잘 듣는 클로에라, 마침내 그녀는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시녀에게 명령했다.
“유디트에게 드레스를 내줘.”
클로에에 비하면 유디트의 키가 작지만 사냥터에서 입는 드레스는 발목까지 덮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나 종아리 부근에서 잘리는 형식이었으니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
시녀와 함께 이동하는 유디트를 보고 나도 내 뒤에 선 시녀에게 고갯짓했다.
“가서 유디트를 도와주도록 해.”
그러고 나서 나는 동생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클로에를 본받는 게 좋겠다. 이렇게 솔선수범해 실수를 책임지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아?”
클로에에게도 잘했다는 듯이 부채로 팔을 툭툭 토닥여 줬다.
클로에는 처음에 속이 상한 얼굴이었지만 단순한 성격답게 내 손짓을 받고 표정을 풀었다.
그 후로는 제법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더 이상 귀에 듣기 싫은 잡음이 흘러들지도 않았고, 거슬리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지도 않았다.
“앗, 저기 좀 봐.”
그러다 문득 황녀들 사이에서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터져 나왔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내 동생들에게는 체통이 부족했다.
“우와, 베른하르트 소공작이잖아. 언제 왔지?”
그러나 귀에 익은 이름이 들어온 순간, 그들의 반응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무심결에 황녀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잠시 후 눈에 들어온 것은 수려한 외모를 가진 소년이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청아한 은빛 머리칼이 부서지는 햇빛에 섞여 시야를 파고들었다. 마찬가지로 희게 반짝이는 속눈썹 아래로 보석처럼 박힌 눈동자는 신비로운 보랏빛이었다.
황녀들이 야단을 떠는 것이 단번에 납득이 갈 정도로 눈에 띄는 소년이었다. 그러니까…….
‘남주인공 등장이로군.’
나는 얼마 전 공립 도서관에서도 봤던 지독히도 잘생긴 소년을 시야에 담으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새삼스럽지만 잘생기긴 참 잘생겼다. 물론 나는 다른 황녀나 영애들에 비하면 그의 외모에 무감한 편이었지만 말이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여주인공인 유디트와 악역인 나는 적대 관계이되, 연적은 아니었다. 내가 다른 누군가와 치정으로 얽히는 건 상상만 해도 별로라 그래도 그건 좀 마음에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에 나온 나는 자기애가 너무 강해서 남자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남주인공인 킬리안을 의식한 것도 유디트를 짓밟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로써였다. 참으로 일관성 있는 악역이 아닌가?
현실의 나도 앞으로 유디트와 킬리안이 어떤 로맨스를 찍든지 거기에 관여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배다른 자매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치정극이라니.’
온갖 이야기 속에 질릴 정도로 등장하는 흔하디흔한 소재. 그만큼 꾸준히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내용이기도 했지만, 어디를 봐도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황녀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킬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괜히 사람의 속을 간지럽게 만드는 보라색 눈동자가 황족들이 앉은 자리로 미끄러졌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촥 펼쳐 들었다. 처음부터 그를 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애초에 나는 킬리안과 아무런 친분도 없었다. 따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없다. 고작해야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났을 때 몇 마디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라고 할까.
‘지난번에 공립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걸 제외하면.’
약혼 이야기가 있던 것도 벌써 5년 전 일이었고, 이후로 우리 둘 다 그 같은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낸 일조차 없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이 없었듯이 그 역시 내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나는 어릴 때 잠깐이나마 그와 짧은 안부 편지를 주고받던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아는 킬리안은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제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답게 언제나 품위 있고 격조 높은 언행을 보였고, 그것은 내 까다로운 성미에도 책잡을 곳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슬쩍 부채를 내렸을 때, 착각인지 킬리안과 일순간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 순간 그가 자로 잰 듯이 반듯하게 묵례했다. 약식이지만 분명 황족을 향한 인사였다. 옆에 있던 황녀들이 꺅꺅거리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우아하지 못한 행태에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던 중 드디어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들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자와 황녀들, 그리고 우리보다 더 상석에 앉아 있던 황후와 황비도 황제를 맞아 몸을 일으켰다.
밀리엄은 아직 어리다는 것을 핑계로 어머니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유디트도 늦지 않게 돌아왔다. 클로에의 화려한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유디트는 아까보다 다섯 배 정도는 더 화사하고 예뻐 보였다. 클로에의 취향답게 프릴과 리본을 아낌없이 사용해 제 나이다운 발랄함과 귀여움이 돋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디트의 표정은 어쩐지 아까보다 밝지 못했다. 조금 떨떠름한 기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왠지 클로에와 취향이 달라 드레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카뮬리타의 지고한 태양께 축복과 가호를.”
그러나 황제가 마침내 단상 위에 올라가 서서 그에게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유디트의 얼굴을 더 관찰하지는 못했다.
“카뮬리타에 축복과 가호를.”
내 아버지인 황제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한 뒤에야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모두 환영하오. 오늘 사냥제를 맞아…….”
황제가 먼저 축사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냥제는 추수철을 맞아 제국의 번영을 기리는 의미로 시행되는 국가 행사였다. 그런 고로 오늘도 황제가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죄다 흘려들었다.
“1황녀.”
시간이 좀 더 지나 황제의 축사가 끝나고 이제 내 차례였다.
나는 그의 부름을 받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카뮬리타의 지고한 태양께 축복과 광영을.”
황제가 근엄하게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나는 황제의 허락을 받고 단상에 섰다.
나로서는 아주 익숙한 자리였다. 그것은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내가 단상에 서자 아까의 나처럼 영혼의 일부가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1황자 라미엘은 이미 하품을 찍찍 하기 바빴다.
다만 킬리안 베른하르트는 여전히 곧은 자세로 서서 표정 변화 없는 수려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단상에 오를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그는 상당히 좋은 청자였다. 연설 중 다른 사람들처럼 지루한 티 한 번 내지 않고 끝까지 담담한 낯으로 자리를 지키곤 했으니까.
과연 카뮬리타에서 누구보다 기사다운 성품과 강직함을 지녔다고 소문날 만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또 의외로…… 유디트가 지루함 대신 희미한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유디트는 지루한 연설을 좋아하는 걸까?
사실 나는 그동안 이런 자리에서마다 축사를 엄청나게 길게 읊어 왔다.
제국의 영광과 번영을 기원하는 말들로 매번 빼곡하게 채워 넣었던 내 축사는 지금 생각해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혈통주의자답게 나라 사랑 황족 사랑이 상당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실로 열과 성을 다해 황족의 위신을 드높이는 데 앞장서 왔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만사가 귀찮았다.
“제 축사는…….”
나는 음성 증폭 마법이 걸린 단상 앞에서 입술을 뗐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영혼 없는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축포로 대신하겠습니다.”
“?”
“??”
그 순간 사람들의 머리 위에 단체로 물음표가 떠오르는 것 같은 환영이 보였다. 평소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 열 장 정도 되는 분량의 축사를 좔좔 읊어댔던 나였으니 그런 반응을 보일 만도 했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마력을 담아 머리 위로 불꽃을 쏘아 보냈다.
퍼엉! 펑!
머리 위에서 사냥제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꽃처럼 만개해 번져 나갔다.
이 정도 마력을 쓴다고 병의 증세가 가속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온 하늘에 아낌없이 불꽃을 퍼트렸다.
……조금만 장난을 쳐 볼까?
잠시 후 봉오리가 꽃잎을 틔우듯이 푸른 하늘로 터져나간 불꽃 속에서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거대한 글씨들이 나열되었다.
제국의 지고한 태양은 사실 극심한 탈모를 앓고 있다.
시야 가득 적힌 것은 사멸된 고대어였으니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고대어는 오늘날에 해독할 수 있는 학자가 아예 없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말했다시피 나는 위대한 천재 황녀님이었다. 그래서 이 정도는 나한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지금 보이는 그의 머리는 부분 가발이다.
그의 정수리에는 직경 10cm 정도의 공터가 있으며 모발의 황폐화는 나날이 가속화되고 있다.
황제 폐하 귀는 당나귀 귀!
유치한 짓이었지만 속이 조금 시원했다.
멋모르는 사람들이 불꽃 속에서 반짝이는 글자를 보고 아름다운 문양이라며 감탄을 연발하고 있어서 상황이 더 우습게 느껴졌다.
지금 이게 황제 모독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까.
아마 황제가 안다면 당장에 부들거리며 나를 반역죄로 감옥에 처넣을지도 몰랐다.
다음 생에는 나무늘보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
숨 쉬는 것 말고는 아주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눈을 뜨세요, 용사여!
급기야 나중에는 아무 말 대잔치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 위에서 여전히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며 빛나는 글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거 좀 재미있는 것 같기도…….’
그러고 보니 아르벨라의 몸일 때 밖에서 이런 일탈을 하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모를 은근한 짜릿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큭…….”
그때, 문득 어디선가 실낱같이 낮은 웃음소리가 날아들었다.
탄성에 뒤섞여 아주 희미하게 밀려든 소리였지만 내 예민한 귀는 그것을 포착해 냈다. 고개를 돌리자 공교롭게도 눈이 마주친 것은…….
남주인공인 킬리안 베른하르트였다.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어 순간적으로 그가 웃은 건가 의심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막 마주친 눈동자에 당혹감과 그밖에 다른 오묘한 감정이 뒤섞인 뜻 모를 이채가 어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뒤이어 자연스럽게 손을 내려 드러난 킬리안의 태연한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청아한 낯에는 화사한 오후의 햇빛만이 유일한 장식으로 맺혀 있을 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하긴, 다시 생각해 보니 웃음소리가 아니라 재채기 소리 같기도 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이런 자리에서 점잖지 못하게 웃음을 흘리다니. 있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래도 흥이 깨졌다.
그러고 나자 곧 내가 지금 애처럼 뭘 하는 건가 싶은 회의감이 들어서 축포를 쏘아 보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 이 무슨 영양가 없이 유치한 짓이지?
천재인 내 정신 연령이 높긴 하지만 이 육체의 나이는 열네 살이다 보니, 사춘기라도 온 모양이다.
“그럼, 카뮬리타의 광영이 여러분께 내리기를.”
나는 마지막으로 기원한 뒤 다시 영혼 없는 얼굴로 단상 앞을 떠났다.
황제는 내가 고분고분하게 축사를 읊지 않고 축포로 때우려 하자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다가, 그래도 사람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 표정을 폈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인 사냥제가 시작되었다.
*
“1황녀님, 정말 멋진 축사였어요.”
“특히 불꽃 중간에 그려진 문양이 참 아름답더군요.”
“나열한 모양에 규칙성이 있어 꼭 문자 같기도 하던데…….”
뜨끔.
그래도 감이 좋은 사람이 있구나.
나는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주위에 몰려든 귀족들을 향해 뻔뻔하게 말했다.
“고대 언어 중 하나예요. 제국의 번영과 황제 폐하의 안녕을 비는 축원을 새겼는데 알아보시는 분이 계셨군요.”
“아, 그렇군요! 고대어에도 능통하시다니 역시 1황녀님이세요.”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감탄했다.
“그런데 1황녀님, 오늘은 평소와 좀 많이 달라 보이시네요. 긴 금빛 머리칼이 정말 아름다웠었는데……. 혹시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셨던 건지요?”
“그냥요. 요즘 긴 머리카락이 좀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요.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죠?”
“아, 네! 정말 새롭고 신선한 시도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마력석에 담긴 영상도 정말 감명 깊었고요.”
괜히 떠보려고 접근한 주제에 내가 직설적으로 묻자 또 얼른 칭찬하는 꼴이 웃기지도 않았다.
슬슬 상대하기 귀찮아서 나는 삐뚤게 웃는 낯으로 걸음을 옮겨 그들에게서 벗어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1황녀님.”
“그레이엄 후작.”
그러다 무시하기 어려운 사람이 내게 다가와 할 수 없이 다시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자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여우상을 한 호리호리한 3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오는 남자의 푸른 머리카락이 흰옷 위로 흔들렸다. 안경알 밑으로 드러난 그의 녹색 눈은 차가운 에메랄드 같았다. 남자의 갸름한 얼굴에 박힌 이목구비가 2황비 카타리나와 놀랍도록 빼닮아 있었다.
당연했다. 그는 2황비의 쌍둥이 오라비인 쥬논 그레이엄 후작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보는군, 후작.”
“예, 저도 그렇지만 1황녀님께서는 특히…… 요즘 참 바쁜 일정을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를 따갑게 쳐다보는 시선도 남매가 비슷했다.
‘아무래도 지난번의 웨이스턴 남작의 일로 뒤끝이 남아서 이러는 것 같은데.’
쥬논 그레이엄은 2황비를 따라서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2황비 카타리나는 1황자 라미엘을 황위에 올리고자 하는 야욕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쥬논 그레이엄은 그런 2황비의 든든한 아군이었다. 그래서 꿈에서 본 미래에서도 내 앞길을 가로막으려고 열심히 움직였다. 물론 유디트가 각성해 나를 뛰어넘는 마법사가 된 후에는, 그녀까지 같이 처리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말이다.
그래서 쥬논 그레이엄 후작은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위협 단계가 중간 정도 되는 악역을 맡고 있었다. 물론 책 속의 최고 악역은 바로 나였다.
‘아니지. 이건 으쓱거릴 일이 아니지.’
아무튼 그레이엄 후작과 나는 원래부터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얄밉게 웃으면서 그를 상대했다.
“흠, 나도 한가하고 싶은데 여기저기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너무 잘나서 그렇다는 듯이 말하자 그레이엄 후작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나는 짐짓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척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 블로비스 숲에서 일어난 사건의 주동자인 웨이스턴 남작이 그레이엄 후작과 제법 가까운 자였다지?”
“가깝다니요? 그저 제가 워낙 발이 넓다 보니 어쩌다 한두 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을 뿐입니다.”
그레이엄 후작이 펄쩍 뛰었다.
그는 웨이스턴 남작과의 친분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물론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들의 인신매매와 연관된 일이니만큼, 일가가 풍비박산 나고 싶지 않다면 바로 잘라내야 할 친분이긴 했다.
이번에 웨이스턴 남작의 일로, 그와 가깝게 지냈던 그레이엄 후작가를 비롯한 몇몇 가문들도 뒷말이 좀 있었다고 들었으니까.
“크흠. 그보다 이번에 백야의 전당에 들어간 이단자 소년이 그 숲에 있던 소년이라 들었습니다.”
이 화제가 탐탁지 않았던 듯, 그레이엄 후작이 말을 돌렸다.
“후작도 들었나 보군.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은 일인데.”
“예. 더군다나 그 라스너 백작의 아들이라지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