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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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저벅.
동산을 오르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느릿했다.
한나는 조금 기운이 빠져 터덜터덜 걸었고, 세자르는 그런 한나의 보폭에 맞추며 천천히 따라 걷고 있었다.
좌우로 흔들리는 한나의 고개를 따라 묶은 머리가 대롱대롱 움직였다.
“휴.”
몇 번째일지 모를 한나의 한숨에 세자르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여?”
두 사람은 축제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축제에 나설 때만 해도 이보다 행복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은 그렇지 못했다.
“그럼요. 새해부터 찜찜하잖아요.”
그 이유는, 한나의 손에 들린 작은 쪽지 때문이었다. 한나는 변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쪽지를 다시 한번 펴 보았다.
“악몽이 찾아온다, 라니. 세상에 이런 점괘를 받고 어떻게 기분이 좋겠어요!”
그 쪽지는 서대륙에서 건너왔다는 용한 점술가에게 받아 온 신년 운세였다.
“미신이라니까.”
“그래요. 그래요. 교황 성하께선 여신님 말씀이 아니면 다 미신이라고 생각하겠죠. 더군다나 이런 엉망인 점괘를 받지 않았으니, 제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요.”
“내 점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걸.”
하지 않겠다는 세자르를 대신해 점술가에게 받은 그의 점괘는 ‘빛을 따르라. 답이 있다.’였다.
뜻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쁜 말은 아닌 것 같아 한나는 괜히 자신의 점괘와 비교가 되었다. 자신에게 불운한 점괘가 나온 게 세자르 탓이 아님을 알지만, 실실 웃고 있는 모습이 몹시 얄미운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상술에 속아 넘어가선 안 되는데…… 이 찜찜함을 뭐라 표현할 수가 없네.”
한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고 툴툴거리며 발길을 빨리했다. 단정히 묶어 올린 머리가 통통 튀었다.
그런 한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자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의 모습이 꼭 성난 망아지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세자르는 한나의 뒤로 바짝 따라붙으며 말했다.
“그런 점괘보다, 나를 믿는 게 낫지 않나?”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새초롬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뭘 믿으라는 거예요.”
한나가 돌아서자 세자르는 그런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에 한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는데, 세자르는 틈을 내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손이 한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가 그대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는 사실.”
“……세자르 님은, 어찌 그리 항상 자신만만하세요?”
“내가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세자르가 미소와 함께 한나의 손을 꽉 쥐었다.
“참, 나.”
그의 당당한 모습에 한나는 괜히 뻔뻔하다며 타박하면서도 잡힌 손을 흔들며 걸었다.
“그래도 즐거웠잖아?”
“같이 축제에 가니까 좋네요.”
한나는 점괘를 제외한 나머지 하루는 즐거웠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북적북적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길거리 음식도 먹고, 멀리서 온 광대들의 공연도 보고, 화룡점정으로 불꽃놀이까지 보았으니까.
“축제가 언제까지라고 했죠?”
“열흘 동안 이어진다던데.”
“앞으로 세 번은 더 내려와야겠네요.”
10일의 축제 동안 4일 정도는 즐겨 주는 것이 미덕이라며, 한나는 꺄르륵 웃었다.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언제든.”
세자르는 그런 한나의 손을 끌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손등을 스치자 한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세자르 님은 특이해요.”
“어떤 점이?”
나른한 눈매가 곱게 접혀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금욕적인 얼굴을 하고선, 이렇게 스킨십을 좋아하는 게 어색하잖아요.”
“이런. 겨우 이 정도로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많이 섭한데.”
세자르가 제 손에 잡힌 한나의 손을 보며 답하자 한나는 또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제가 어디 도망이라도 가는 줄 알겠어요. 어디서든 이렇게 손을 꼭 잡고 있으니.”
장난스러운 한나의 말에 세자르는 그저 미소로 답했다. 한나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세자르는 순순히 그 발길과 손길에 이끌려 갔다.
사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손으로 느껴지는 한나의 체온에 많이 집착하게 되었다.
‘내가 어느 날 사라진다면…….’
그날의 말이, 불현듯 떠오르는 순간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한나는 여전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어, 어?”
집 앞에 도착한 한나는 집주인인 자신보다 먼저 집으로 들어가는 세자르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한나의 말에 세자르는 아쉬운 표정으로 몸을 돌려 한나를 보았다.
“밤이 늦어서 위험한데.”
“누가요? 세자르 님이요? 이 허허벌판에서 뭐가 위험하다는 말이죠. 저기, 자고 있는 양들이 위험한가요.”
한나는 일양이, 이양이, 삼양이를 눈짓하며 말했다.
“내가 보기보다 많이 연약한 편이라.”
“보기엔 안 그렇다는 건 인정하는 거죠?”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도 많고.”
“없을걸요.”
한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이 세상에 세자르의 목숨을 노릴 겁을 상실한 인간이 존재할 리가 만무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철벽을 치는 한나를 보며 세자르는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눈빛 금지.”
“하지만,”
세자르가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할까 싶어 한나는 검지를 척하니 들어 그의 입술 앞에 갖다 대었다. 입이 막힌 세자르의 눈망울이 더욱 짠내를 자아내고 있었다.
“신전까지 그 큰 보폭으로 50걸음인 거 아시죠?”
세자르는 한나의 집에서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신전을 힐긋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그는 신전을 너무 가까운 곳에 지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따스한 향기가 새어 나오는 한나의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자꾸 이렇게 은근슬쩍 남의 집에 오는 거 버릇 들이지 마요.”
신전이 완성된 지도 어언 반년이었다. 한나는 여전히 틈만 나면 자신의 집을 제집처럼 이용하려는 세자르를 경계했다.
더군다나 요즘 세자르의 의도가 조금 불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 머리카락에서 손은 떼시죠.”
특히 이런 사소한 손짓이.
한나는 제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그의 손을 조용히 치워 냈다.
아쉬운 숨을 내뱉으며, 세자르가 한쪽 팔로 벽을 짚었다.
“이렇게 애를 태우니까 더 들어가고 싶잖아.”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라 이미 어두웠지만, 이제는 세자르의 몸이 달빛마저 막아 버렸다.
“사람들 눈이 있는데, 어디 다 큰 성인 둘이…….”
“그대의 말대로라면, 이 허허벌판엔 양 세 마리밖에 없지 않나?”
세자르의 입술이 진하게 올라갔다. 한나는 자신이 했던 말을 곧바로 이렇게 돌려주는 그를 흘겨보았다.
세자르의 남은 손이 한나의 턱선을 훑고, 턱을 가볍게 받쳐 들었다.
“우리가 이런 걸 해도 아무도 못 볼 테고.”
그의 얼굴이 점차 아래로 향했다. 푸른 시선이 한나의 붉고 탐스러운 입술에 못 박혀 있었다.
“세…….”
그를 부르려고 열린 입술이 세자르의 입술로 막혀 버렸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한나는 세자르의 이런 애정 행각이 그에게 너무 익숙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물이나 잡으며 사막에 있었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고, 열린 입술 틈새로 뜨거운 것이 밀려들었다. 호흡이 오가고, 이내 질척한 타액이 섞였다.
세자르는 점점 한나에게 밀착했다. 파도가 덮치며 몸을 밀어내는 것처럼, 한나는 주춤주춤 물러서야 했다.
“음…….”
농밀하게 얽혀 드는 혀끝의 감촉에 반응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세자르는 많은 것을 이루어 내고 있었다.
달칵.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세자르의 벽을 짚고 있던 손이 부지런히 움직여 문을 열어 냈다.
한나가 그 소리에 반응하고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세자르는 한나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한나와 자신의 위치를 바꾸었다.
“으음…….”
어느새 한나는 세자르의 단단한 팔에 갇혀, 그가 이끄는 대로 딸려 가고 있었다.
“천……천히.”
키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조금 진한 스킨십도 없던 것은 아니었고.
하지만 오늘은 어찌 평소 호흡보다 조금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댄 내가 얼마나 느리게 가고 있는지, 정말 모르나 봐.”
간지러운 속삭임이었다. 세자르의 입술이 한나의 조금 부르튼 입술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쉴 새 없이 한나의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간지러워요.”
“그댄 내 마음을 간지럽게 하고.”
입술이 바쁜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는 세자르를 보며 한나는 낮게 웃었다.
“그런 대사는 어디서 배워 온 거예요?”
“이런 말을 여인들이 좋아한다던데.”
“달콤한 말이라면, 성별을 불문하고 좋아하겠죠.”
한나는 세자르의 이런 장난스러운 말이 밉지 않았다.
“성별까지 갈 것 없이 내 이런 간지러운 말들은 오직 그대에게만 가능한데.”
오히려 귀엽기까지 할 정도니.
평소 그답지 않게 열기가 담긴 숨결이 살결에 흩뿌려졌다. 예민해진 피부 위로 솜털이 촘촘히 일어났다. 발끝까지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졌다. 살며시 닿았다 떨어지는 그 짧은 입맞춤들이 한나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다.
“잠깐…….”
어느덧 밀려난 몸이 거실 한편의 폭신한 의자에 닿았다. 털썩 소리와 함께 한나의 몸이 착 달라붙어 있던 세자르의 품에서 멀어졌다.
한나의 시선이 올라갔다. 세자르의 시선과 한나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언젠가는 세자르 님의 파란 눈이 얼어붙은 냇물을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시리고, 차가운.”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나?”
세자르의 몸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의 무릎이 바닥에 닿으며, 하얀 신관복이 바닥에 흩어졌다. 누가 보면 기도에 앞서 경건하게 몸을 낮춘 것으로 착각할 만한 몸짓이었다.
“눈동자에도 온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지금 내 온도가 어떤지 궁금한데.”
세자르의 손이 다시 뻗어졌고, 그 손은 자석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한나의 머리칼 사이로 얽혀 들었다.
이제 올려다보는 이는 세자르가 되었다. 한나는 공손히 답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옅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뜨거워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자르는 다시 한나의 입술을 삼켰다. 마치 그 한마디가 발화점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이렇게 조급했던 적이 있었던가.
순서 없이 벗어 던진 옷과 늘 단정하던 신관복의 뜯어진 단추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얀 시트에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두 사람의 무게에 시트가 푹 꺼졌다. 하얀 손이 은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얽으며, 가지고 놀았다.
“당신, 가끔 그렇게 허기진 얼굴로 날 보는 거 알아요?”
웃음기 스민 그녀의 말에도 세자르는 웃지 못했다.
“한입에 뜯어 먹고 싶다고 답하면, 날 짐승처럼 볼 텐가?”
옅게 서린 흥분이 떨리는 목소리를 타고 전해졌다.
“교황 성하께 이런 모습도 있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알면 까무러칠 텐데.”
둘 중에 아직 여유가 남아 있는 쪽은 오히려 한나였다.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는 그대뿐인데.”
한나의 손가락이 세자르의 얼굴선을 타고 내려갔다. 목울대를 지나 쇄골 사이를 스치며, 그의 가슴 한쪽의 흉터에 닿았다.
얼굴만 보자면 피부도 곱기만 할 것 같았던 세자르의 단단한 몸에는 크고 작은 흉터들이 빼곡했다. 그가 살아온 날들이 단정한 얼굴만큼 순탄치는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나는 옅은 흉터를 손끝으로 누르며 물었다.
“이건 어디서 다친 건가요.”
“사막에서.”
한나의 손이 어깨의 조금 옅은 흉터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이건?”
“어릴 적, 마을의 건물이 무너지면서 찢겼던 상처.”
그러다 한나는 세자르의 허리로 이어진 옆구리의 선명한 상처를 조심스럽게 가리켰다.
“이건, 황궁에서 얻은 상처겠군요.”
손가락이 상처를 스치자, 세자르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의 큰 손이 한나의 손을 덮었다.
“낫게 해 주고 싶은데.”
한나는 상처를 치유해 줄 성력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나는 이 상처가 마음에 들어.”
“세상에 흉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한나는 세자르가 자신을 위해 둘러대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대를 위해 생긴 것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훈장처럼 받아들일 수 있거든.”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중증이에요.”
“미쳐 있다고 해도 부정하지 못할 정도지.”
세자르는 한나의 반응에 긍정으로 답했다. 자신이 중증이라는 것은 굳이 그녀가 집어 주지 않아도 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리 나를 잘 알고 있으니, 지금부터 있을 일에도 많이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
세자르의 손이 한나의 손을 끌어, 제 뺨으로 가져갔다. 이내 손은 그의 입술 위로 옮겨졌고, 짧은 입맞춤과 함께 스르륵, 떨어졌다.
“축제의 열기가 아직 남은 걸까요.”
한나는 은근히 열이 오르는 제 상태에 대해 축제 핑계를 댔다.
“평생을 축제처럼 살게 해 줄 수도 있어. 말만 해. 신전의 축제를 3일 간격으로 열지.”
한나는 그의 말에 웃어 버리고 말았다. 옅게 서렸던 긴장감이 허물어지고, 세자르의 손이 움직였다. 천이 부대끼는 소리와 함께, 드레스를 단단히 여미고 있던 매듭이 풀려 나갔다.
매듭은 하얀 시트 한쪽으로 던져졌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천들이 모두 흩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일었지만, 한나는 이 시간을 그런 감정에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솔직하고 순수한 감정을 전하는 데에도 아까운 짧은 밤이니까.
뜨거운 손이 한참을 고운 피부를 유영했고, 세자르의 입에선 끝없이 사랑을 속삭이는 말들이 쏟아졌다.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몽롱하게 젖어 든 한나의 시야에, 제 손가락에 세자르의 손가락이 꽉 얽혀 드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피부가 맞닿아 있는데도, 혹 떨어질세라 간절히도 꽉 틀어쥔 그 손이.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지고, 제 손을 집어삼킬 듯 꽉 움켜쥐었다.
“읏…….”
자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색정적인 소리가 방 안에 가득 메워졌다.
뜨거운 공기, 단단히 감싸는 몸,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백과 피부에 뿌려지는 키스.
새벽이 오기까지, 한나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기억에 새겼다.
* * *
메에― 메에―
저 차분한 울음소리는 일양이다.
메에엑―
조금 발랄한 울음소리는 이양이.
메에에에엑!
……삼양이는 오늘도 기운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으음……”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양들은 기운이 넘친다니까.”
한나는 찌뿌둥한 몸을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을 할지 생각을 정리하며 창문 밖을 보자, 삼양이가 앞발을 들고 창문에 달라붙어 있었다. 삼양이의 콧김이 뿌옇게 창을 물들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뭐야!”
간 떨어질 뻔했다. 한나는 가슴을 쓸며 창문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왜 그러고 있어.”
정말 양인지 사람인지 의심스럽다며, 한나는 가자미눈을 뜨고 창문의 잠금장치를 열었다. 창문틀에 걸터앉아 창을 열자, 삼양이가 신이 나서 머리를 디밀었다.
“내가 일어나긴 했어도, 아직은 침대에서 더 뒹굴거리면서 오전 시간을 마음껏 낭비할 생각이었다구.”
한나는 삼양이의 머리를 손으로 슥슥 쓸었다.
“메에에에―”
삼양이는 그런 한나의 말에 대답하듯 울었다.
“꼭 내 말 알아듣고 대답하는 것 같잖아.”
심지어 타박하는 말투처럼 들리기도 했다.
“메엑!”
“알았어. 알았어. 이제 나가려고 했어. 나가서 놀아 줄게. 세수는 해야 할 것 아니야.”
한나는 꼬불꼬불 엉킨 삼양이의 머리털을 손가락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밤새 농장은 잘 지켰어?”
“메엑!”
“하긴, 우리 농장에 불청객이 있는 게 더 신기한 일이지.”
한나는 좌측으로 황궁의 별장을 지키는 병사들을, 우측으로 신전을 지키는 성기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흰 정말 치안이 좋은 곳에서 사는 줄 알아.”
한나는 삼양이 머리를 토닥거린 뒤, 삼양이의 이마를 슬금슬금 밀었다.
“이제 머리 좀 빼 주겠니. 그러다 내 방까지 들어오겠어.”
하지만 삼양이는 머리를 빼기 싫은지 힘으로 버텼고, 한나는 양손으로 삼양이의 머리를 꾹꾹 밀었다.
그러던 와중 한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시선?’
누군가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음?”
하지만 주위에 사람은 없었다.
괜히 예민했던 건가.
한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삼양이의 머리를 미는 것에 박차를 가했다.
* * *
“어휴! 무거워라.”
한나는 양 우리를 치우고, 새 짚단을 꺼내 풀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고단한 일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메에에에.”
“그래. 그래. 착하지. 잠깐만 기다려.”
옆을 어슬렁거리는 일양이를 엉덩이로 밀어내며 한나는 서둘러 짚을 깔았다.
“이거 다 깔고, 물통 채우고, 음. 얼른 서두르면 점심 전에 끝나겠어.”
빨리 일을 끝내면 세자르와 점심을 함께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흥~흥~ 잘 펴져라~ 내일이면 똥 범벅이겠지만~”
신나게 볏짚을 깔던 그때, 한나는 또다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휙.
짚을 뿌리다 말고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훑어보았다.
“……자꾸 이상하네.”
자꾸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예민해진 게 아닌가 싶어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한나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엄마야!”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다행히도 열심히 깔아 둔 짚이 엉덩이를 지켜 주었다.
“……누, 누구니?”
입구의 빛을 등지고 서 있는 한 아이.
끽해야 열 살은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 어려 보였다. 그의 발끝에 긴 그림자가 늘어져 있었다.
“…….”
“여긴 어떻게 왔니? 신전에 왔다가 길을 잃었어?”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눈과 머리의 진한 색소와 달리 하얀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아이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한나는 손에 들고 있던 볏짚을 대충 탈탈 털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갔다.
“귀여운 친구,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멀리 신전 쪽을 바라보며 혹 아이의 부모님이 찾고 있지 않나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여느 때처럼 썰렁한 신전의 모습이었다.
어느새 아이의 앞에 도착한 한나는 무릎 위 허벅지를 양손으로 짚으며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응?”
하지만 한나의 질문에도 아이는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재차 물어도 대답이 없는 아이의 모습에 한나는 혹시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당신은 뭐야?”
“어, 응?”
다행히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질문의 주인이 바뀐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할 질문인데.’
한나는 자신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반문하는 아이를 보며 난감함에 이마를 긁었다.
“나는 이 농장의 주인이란다. 넌 신전에 왔니?”
한나가 손가락으로 신전 방향을 가리키자 아이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갔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아이의 눈이 침착했다.
‘전반적으로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은 아닌데.’
뭔가 묘한 아이였다. 보통 길을 잃거나 낯선 곳에 혼자 있으면 불안해하기 마련인데.
“길을 잘못 들었으면, 내가 도와줄게. 이리 와.”
한나는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이는 멀뚱멀뚱 한나의 손바닥을 한참 바라보았고, 그에 한나는 다른 손으로 아이의 손을 끌어 제 손 위에 올렸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지만, 또 길 잃으면 안 되니까.”
아이의 손을 꽉 쥐며 한나가 말했다.
“일단 신전 쪽으로 가 보자.”
아무렴 방문객이라고는 없는 황제의 별장이나 자신의 농장에 오려고 했을 리는 없다는 판단에 한나는 신전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때마침, 그곳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세자르 님!”
한나가 손을 흔들자, 길을 따라오던 세자르가 덩달아 손을 올렸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곤 한나의 옆, 꼬마 아이의 존재를 확인하고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은 한가한가 봐요.”
대화가 가능할 만큼 가까워지자 한나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야 뭐, 늘…… 그런데 이 꼬마는 누구지?”
세자르는 한나의 손을 꼭 쥐고 있는 낯선 아이에 대해 물었다. 그에 한나는 세자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길을 잃었는지 저희 농장에 있더라고요. 부모님이 신전에 있나 해서 찾으러 왔어요.”
한 손으로는 입가를 가리고 있지만, 한 손은 여전히 아이의 손을 꽉 쥔 상태였다.
“그런데 그건 왜 속삭이는 거지?”
세자르는 소곤거리는 한나의 행동에 대해 물었고, 한나가 즉각 답했다.
“자꾸 잃어버렸다고 하면 애가 불안할까 봐 그러죠!”
“그런 거면 소리는 안 지르는 게 낫지 않을까.”
“흠흠. 아무튼 그렇다는 거예요.”
한나는 아이의 눈치를 보며 세자르에게 답했다.
“흠.”
세자르는 아이의 외양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오늘 신전에 다녀간 사람이 많나요?”
“두어 명 있긴 했지만…….”
세자르는 그들 중 아이를 데려올 만한 사람이 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답을 찾지 못했다.
세자르가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눈을 맞췄다.
“부모님을 찾고 있나?”
“없어.”
“응?”
아이의 대답에 흠칫 놀란 사람은 한나였다.
“없다? 그럼, 집은?”
“없어.”
“돌봐 주는 사람은?”
이번에는 아이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도대체, 다 없다고만 하니 두 사람은 슬슬 답답해졌다.
“돌봐 주는 사람도, 집도 없다…….”
세자르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헛! 설마……!”
갑자기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손으로 막았다.
세자르와 아이의 시선이 한나에게 향하자, 한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 상실……?”
한나의 말에 세자르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아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눈을 말똥거릴 뿐이었다.
한나는 조금 흥분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 왜, 막 기억을 잃어서 난 어디? 여긴 누구? 하는…….”
“난 누구, 여긴 어디겠지.”
“아! 그래요! 그거!”
한나가 박수를 짝, 하고 치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러곤 몸을 굽혀 세자르의 옆에 무릎을 감싸 안고 앉았다.
“혹시 기억이 없니? 이름, 본인 이름은 알아?”
“파렐톤.”
모든 질문에 모른다고 답하던 아이가 자신의 이름만은 또렷하게 답했다.
“기억 상실은 아닌가.”
한나와 세자르는 나란히 파렐톤의 앞에 앉아 고민을 시작했다. 다시 한나가 세자르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정말 집이나 부모님이 없는 걸까요.”
세자르는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기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말끔해서였다.
거리의 아이라면 옷이라도 더럽고 해져 있을 텐데, 아이가 입은 검은 옷은 마치 갓 구매한 것처럼 깨끗했다.
“그거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니?”
한나가 파렐톤에게 재차 묻자, 그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허공을 응시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
“…….”
“…….”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두 어른이 파렐톤의 입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길 수 분.
드디어 조그마한 입이 떨어졌다.
“없어.”
허무한 대답에 한나는 괴고 있던 팔을 삐끗했다.
“정말, 하나도? 여기에 어떻게 올라온 건지도 기억이 없어?”
파렐톤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거참, 미스터리한 친구네.”
한나는 허허, 웃음이 나왔다. 옷 부대끼는 소리와 함께, 먼저 몸을 일으킨 사람은 세자르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어쩔 수 없지. 일단 신전에서 위탁하도록 하지.”
세자르는 이 묘한 아이를 일단 신전에서 돌보게 할 생각이었다.
“싫어.”
하지만 아이는 그의 말에 단호하게 답했다.
“싫다니?”
세자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난 여기.”
파렐톤이 한나의 옷소매를 느슨하게 잡았다. 한나는 아이의 행동에 조금 놀란 듯 멍하니 자신의 옷을 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있을래.”
“나?”
조금 어리둥절해진 한나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세자르가 아이를 향해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여기가 좋으니까.”
아이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곧은 시선으로 세자르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치열하게 얽혔다.
“……흠. 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나가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것 참. 내가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은 편이긴 한데…….”
하루아침에 모르는 아이를 맡아야 한다니.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인 것 같기도 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곁에 둘 수는 없어.”
한나의 고민하는 마음을 읽은 세자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어떡해요. 신전은 싫다는데 야외를 떠돌게 할 수도 없잖아요.”
한나는 이미 몸을 일으키면서 생각을 마친 상태였다.
“뭐, 요 작은 아이 하나 돌본다고 별일이야 있겠어요? 제가 돌보는 동안 마을에 수소문이나 좀 해 주세요.”
아이가 가출을 한 것인지, 기억 상실인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며칠 정도 맡아 주는 것은 한나에게 큰일이 아니었다.
“입 하나 는다고 굶어 죽지도 않는데요.”
한나는 웃으며 아이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너, 뭐든 기억나는 건 나한테 말해 주기로 약속하면 우리 집에 머물게 해 준다!”
한나의 말에 아이의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여졌다. 파렐톤을 만나고 처음으로 본 긍정적인 끄덕임이었다.
“은근히 귀여운데.”
검은 머리가 어릴 적 제레미를 생각나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
그런 한나의 결정에 세자르는 이의가 있었지만, 그녀가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아이 손을 잡고 등을 돌려 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말리지도 못했다.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언제나 내키는 대로 사는 한나라지만,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알지도 못하는 아이를 덥석덥석 맡는 건지.
세자르의 걱정이 커졌다.
“같이 가지.”
그럼에도 그는 착실히 한나의 뒤를 따라나섰다.
* * *
손님과 불청객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한나는 생각했다. 어느 날 뚝 떨어진 아이를 보면, 그건 참 옳은 마음가짐이었다.
“너, 정말 똑똑하구나?”
아이가 나타난 지 벌써 이틀이 지났고, 둘은 어느새 조금쯤은 친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내 이름, 다시 써 볼래?”
한나는 아이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흙바닥에 슥슥 써 준 파렐톤 자신의 이름을 곧잘 외우길래 제 이름도 알려 줬더니 그것 또한 바로 외웠다.
심지어 세자르나, 이안, 제레미, 마샤의 이름도 그들의 이야기와 함께 알려 주었는데, 바로 습득해 버렸다.
“제레미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머리는 이안이랑 닮았나 봐. 혹시 마샤를 닮은 점도 있나.”
한나는 파렐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두 사람은 볕 좋은 농장 귀퉁이 나무 밑에서 한낮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저건 뭐지?”
아이가 농장 구석의 공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 저 긴 건 톱이고, 나무를 자를 때 써. 그 옆에는 망치. 못을 박을 때 쓰고…… 저기 넓적한 건 삽이야. 땅을 팔 때 써.”
아이는 호기심이 많았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꼭 평범한 것들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처럼 공구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그렇지만, 어제는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에 대해 설명을 해 줬다고 봐도 무방한 하루였다.
그래서 한나는 아이가 기억 상실을 겪고 있다는 가설에 무게를 실었다.
“톱, 망치, 삽.”
파렐톤은 마치 스펀지처럼 한나가 하는 말을 거침없이 흡수했다. 한번 가르쳐 주면 긴 설명이 없어도 스스로 이치를 깨닫는 것처럼, 금방 원리를 이해했다.
“저 빨간 건 산딸기인데. 먹어 볼래?”
한나는 눈에 들어온 수풀의 빨간 열매를 보며 말했다.
아이는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수풀로 다가갔다. 잘 익은 산딸기를 골라 손에 몇 알 올린 뒤, 파렐톤에게 손을 내밀었다.
“먹어 봐.”
“…….”
파렐톤은 그중 하나를 쏙 집어 제 입으로 넣었다. 한나는 오물거리는 파렐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단지, 신지, 표정에 드러나질 않네.’
파렐톤은 그 맛을 유추할 수 없게 예의 무표정하게 산딸기를 먹었다. 그에 한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산딸기 하나를 제 입으로 넣었다.
“오. 맛있네.”
생각보다 달달한 맛에 한나는 흥얼거리며 하나를 더 입에 넣었다. 그리고 파렐톤의 입에도 하나를 더 쏙 넣어 주었다.
“이러니까, 아기 새한테 먹이 주는 어미 새가 된 기분이네.”
“어미 새?”
파렐톤이 물었다.
“아, 음…… 새의 엄마? 부모를 말하는 거야.”
“부모라는 건, 뭐야.”
이어진 파렐톤의 질문에 한나는 산딸기를 씹으며 부모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음…… 글쎄. 보호자? 지켜 주는 사람 내지는 함께하는 사람인가.”
꼭 피가 섞여야 한다고 정의하기엔 다른 형태의 가족들도 많았다. 이 세계에서도 입양은 더러 있는 일이었으니.
낳아 준 것만이 부모라고 칭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사랑을 주는 데 이유가 필요 없는 사람일까.”
“사랑하는 사람?”
“뭐, 그렇게도 부를 수 있고.”
한나는 자신의 정의에 대해 내심 만족스러웠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
“많지. 소중한 내게는 소중한 사람이 많이 생겼어. 이 평화가 깨지는 게 두려울 만큼.”
“두려움?”
파렐톤이 다시 고개를 기울이자 한나는 또 설명을 하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무서운 거랄까. 생각해 봐. 이 맛있는 산딸기를 다 먹으면 슬프잖아? 꼭 그런 거야. 소중한 게 많아지면, 그게 사라질까 두렵기도 해.”
오물오물.
산딸기를 씹으며, 한나는 어째서 이런 얘길 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자신의 설명을 파렐톤이 잘 알아듣고는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초롱초롱 빛나는 파렐톤의 눈이 귀엽기만 했다.
“풉.”
웃음이 나올 만큼.
“산딸기나 얼른 먹자.”
어린애한테 무슨 어려운 얘기를 한 건지, 한나는 그냥 깔깔 웃어 버리고 말았다.
* * *
세자르는 한낮의 태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눈이 부신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집무실에 달린 두툼한 2중 커튼을 걷어 냈다. 굳이 해가 잘 드는 이 방을 집무실로 선택한 건, 이 방의 큰 창이 자신이 보고 싶은 방향으로 향해 있어서였다.
“아주 찰싹 붙어 있군.”
농장 일이 주로 바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이득이 있었다.
특히, 이렇게 집무실에서도 한나를 볼 수 있다는 점이.
하지만 요즘은 보기 좋은 분홍 머리 옆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검은 머리의 아이가 꽤나 신경이 쓰였다.
“도대체 어디서 떨어진 건지.”
세자르는 한나의 말대로 마을에 파렐톤에 대해 수소문을 해 보았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흔하지 않은 검은 머리의 아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사돈의 팔촌까지 얼굴을 알고 사는데도 말이다.
세자르는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분명 아이인데, 그 눈을 빤히 보고 있자면 껍질이 여러 겹 둘러진 대신관들을 상대할 때나 느끼는 벽이 느껴졌다.
아이답지 않게 속내를 알 수 없는 점도 그렇고.
“하.”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한나에게서 떼어 놓을 수도 없었다. 그녀가 어린아이들에게 약하다는 건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도 달고 있는 건지.”
도대체 어디서, 그것도 하나같이 특이한 녀석들만 얽히는 건지.
세자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눈에 깔깔거리며 웃는 한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찌나 호쾌하게 웃는지, 조금만 가까웠으면 활짝 열린 입안으로 목젖까지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신나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더 기분이 상했다.
“…….”
스스로 속이 좁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한나의 앞에서는 예외였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들떠 있던 세자르의 일상에 찬물이 끼얹어졌으니, 그로서는 유쾌할 리 없는 게 당연했다.
“아무튼, 얼른 가족을 찾아야겠어.”
세자르는 괜히 더 보고 있다간 죄 없는 꼬맹이를 시기 질투할 것 같은 생각에 서둘러 커튼을 닫았다.
차르륵.
빛이 차단되었다.
* * *
언덕 위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주위를 밝히는 건물은 신전이 고작이라, 신전이 문을 닫으면 농장에도 어둠이 짙게 깔렸다.
오늘도 그런 여느 날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톡. 톡. 세자르의 손가락이 책상을 간헐적으로 두드렸다.
“어딜 간 거지.”
한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주변인의 아침, 점심, 저녁, 특히 저녁 식사를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챙기던 한나가 저녁 시간이 훌쩍 넘도록 보이지 않는 일은 아주 낯선 광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자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미 두 차례나 돌아보았던 농장 주위를 한 번 더 살펴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는 피부와도 같이 익숙한 신관복이건만, 이상하게도 목을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부드러운 원단이 꺼끌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세자르는 촉이 좋은 편이었다. 특히 한나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 그랬다. 언제나 관심이 지대하니, 절로 그녀에 대한 감이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런 그의 감각이 불안을 예기하고 있었다. 평소 느릿하기로 유명한 그의 몸짓이 다급해졌다.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 한나의 온기에 초조함이 밀려왔다.
타닥. 타닥.
농장 귀퉁이의 창고에도, 양 우리에도, 그녀가 평소 깜빡 잠들곤 했던 나무 밑에도, 울타리 너머 경치 좋은 어느 곳에도 한나는 없었다.
“…….”
한나를 찾느라 급히 움직여서인지, 불안으로 인한 것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게 주위를 한참 배회한 세자르는 집 앞에서 잠깐 고민에 빠져야 했다.
마을로 내려가 찾을 것인가, 엇갈리는 일 없이 가만히 이곳에서 기다릴 것인가.
“음.”
몸을 움직이는 편이 마음을 잠재우는 데에는 더 나은 결정이다. 하지만 세자르는 가만히 남는 것을 택했다.
언제나 조급한 마음은 일을 그르친다. 그는 한나에 대한 일이라면, 뭐든 더 나은 선택만 하길 바랐다.
마음이 가시밭 위를 뒹군다 해도.
하지만 그 애타는 기다림에도 날이 저물고 또 해가 뜰 때까지 결국 한나는 오지 않았다.
밤새 차게 식은 바깥의 온도처럼, 세자르의 얼굴도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 * *
“무슨 일입니까?”
새벽부터 급한 전갈을 받고 달려온 모이세이와 커티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세자르가 이렇게 긴급 신호를 보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한나가 사라졌어.”
“예에?”
“사라지다니요.”
그들은 어마어마한 값의 상급 텔레포트 스크롤을 쓰면서 달려온 일이 가벼운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나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예상대로 그 쓰임이 절대 아깝지 않은 소식이었다.
자신들의 주인인 세자르에게 이보다 큰 봉변이 없을 테니.
“말 그대로, 사라졌어.”
세자르는 집무실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댄 채였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의자의 방향이 원래는 등지고 있어야 할 창문으로 향해 있다는 것이었다.
세자르는 밤새 지켰던 그곳을 아직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잠은 잔 겁니까?”
커티스는 퀭한 세자르의 얼굴을 보며 그를 걱정했다.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하지만 세자르의 대답은 그의 질문과는 상관이 없었다.
“뭔가 전조라도 없었습니까? 어딜 다녀오겠다고 한 걸 잊으신 건 아닌지…….”
말을 하던 커티스는 서늘한 세자르의 눈과 마주치자 헛기침을 토했다.
“흠흠. 하긴, 저희 이름이나 얼굴은 잊어도 한나 님에 대한 걸 잊을 리가 없겠죠.”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세자르의 눈빛을 받고서야 커티스는 세자르가 어떤 인간인지 다시 한번 상기했다.
“혼자 사라진 겁니까.”
모이세이의 물음에 세자르는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내 키의 반만큼도 안 오는 꼬맹이 하나가 함께 사라졌지.”
“꼬맹이요?”
“어디서 온 아이입니까?”
“몰라.”
그래서 답답했다.
그 꼬마가 어디서 떨어진 건지, 그것이라도 알았다면 조금 덜 답답했을 텐데 말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문제야.”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던 그 아이가 찜찜하기도 했으나, 비단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가 언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느낌은 어떨 거라 생각해?”
갑작스러운 세자르의 물음에 커티스와 모이세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모이세이의 물음에 세자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라질지 모른다고 했어.”
“한나 님이 말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거나, 다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를 정말 불안하게 만든 건, 지난날 한나가 했던 일련의 말들이었다.
그것들은 우스갯소리로 나올 법한 이야기가 절대 아니었다. 불안을 담은 그 눈빛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세자르가 아니었다.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들어.”
단 한순간의 방심에 한나를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세자르를 괴롭혔다. 조금 더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다는 자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당연히 곁에서 그녀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이 기어코 무너져 내렸다.
“신전의 인력을 이용해야겠어. 할 수 없다면, 자네들이라도.”
평소의 세자르라면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신전의 힘을 개입시키지 않을 테지만, 지금은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작은 힘에라도 의지하고 싶었다.
그런 세자르의 조금 다른 모습에 커티스와 모이세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위해서 욕심을 내는 건 누구나 당연한 일이었다.
세자르는 이번에도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한 욕심에 가깝지만, 그런 세자르의 변화에 두 사람은 조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제 행복을 쟁취하며 살 것이라는 뜻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평소와 달랐던 건 그 아이의 존재이니 그쪽으로 알아보죠.”
커티스는 재빠르게 행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눈에도 선연하게 보이는 세자르의 불안에 그도 덩달아 긴장감이 생겼다.
그리고 그 순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것을 느낀 세 사람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건…….”
눈이 밝은 모이세이가 가장 먼저 놀랐다.
“황실의 깃발이군요.”
“황제가 지금 여기에 온 게 어째,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커티스는 새벽의 서신이 자신들에게만 전해진 게 아니라는 답을 내렸다.
“하늘이 번쩍이는군요.”
황제의 등장만으로 이 고요한 동산이 시끄러워지는데, 이제는 하늘이 번쩍이며 마법의 소용돌이가 생겼다.
“등장조차 평범하지가 않네요.”
그나마 말을 타고 달려오는, 악명이라면 어디서도 내로라하는 검은 머리의 존재가 평범해 보이는 이 장면이 참 기가 막혔다.
세자르는 그 요란한 등장을 보며 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녀를 찾는 데는 가장 적격인 존재들이라.”
그는 지금 누구의 도움이든 가릴 생각이 없었다.
목표는 오직 한나를 찾는 것.
“약속했어. 나는 그 약속을 위해서 못 할 일이 없고.”
그는 지난날 자신이 한나에게 했던 약속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어디에 있든, 자신이 기필코 찾겠노라 했던 다짐을.
그는 살면서 누군가를 실망시켜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특히 그것이 제게 가장 소중한 존재와의 약속이라면.
* * *
반가운 만남일 텐데, 그들의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삭막한 분위기를 끌어낸 일등 공신은 제레미였다.
“사라졌다, 라니. 그런 말랑한 단어로 선생님의 실종을 말하는 겁니까?”
제레미는 당장이라도 세자르를 씹어 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그에 마샤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내며, 제레미의 어깨를 꾹 짚어 그의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려는 몸을 막았다.
“자, 우선 설명이나 들어 보자고. 지금 나온 말은 선생님이 사라졌다는 한마디밖에 없잖아.”
마샤의 말에 집무실 한편에 얌전히 앉아 있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들어설 때부터 쭉 무표정했다.
“일단 침착하지.”
이안의 말에 제레미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겨우 의자에 붙였다.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게 지금 현실이야. 어디서, 왜, 무엇 때문에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모를 노릇이고.”
세자르는 이미 한 차례 편지에 적은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하며 시간 낭비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아이는 이상한 점이 없었습니까.”
이안이 편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세자르에게 물었다.
“이상한 거야 많았지. 하지만 기억을 잃은 코흘리개 꼬맹이를 경계할 생각은 못 했던 거지.”
“그 아이와 관련된 누군가가 아이와 선생님을 납치했다는 가정은 어떻습니까.”
이안의 말에 세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했던 수십 가지의 가정 중에는 그것도 있었다. 그나마 현실성 있는 추리였다.
“그렇다면 아이에 대해 전국으로 수배지라도 뿌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수배지라니. 누가 암흑가에 있는 거 모를까 봐, 살벌하네.”
제레미의 말에 마샤가 몸을 떨었다.
“뭐든 수소문을 위해 전단을 돌리는 것도 괜찮겠지.”
일단 이 사건의 실마리라면 그 아이가 맞았다.
아이의 정체를 알아내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이안은 손짓으로 시종을 불렀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재빠르게 그에게 몸을 숙이자, 이안은 그의 귓가에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
“이 동네는 다 찾아본 건가요. 이 넓은 제국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야.”
마샤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도 아니고, 이렇게 아무 정보도 없냐며 타박했다. 그는 이럴 거면 여기 오는 시간에 제도에서부터 찾기 시작하는 게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사이 이안의 지시를 받은 시종이 허리를 꾸벅 숙이곤 방 밖으로 나갔다.
“만약에 말이야.”
그때 세자르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세자르에게 향했다.
“만약, 그 아이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혹, 다른 일로 스스로 사라진 거라면 어떻게 생각하지.”
머뭇거림이 담긴 세자르의 물음에 세 사람은 각각 표정이 변했다. 그중 가장 날이 선 것은 제레미였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잠깐, 제레미.”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제레미의 팔을 마샤가 잡았지만, 그의 손은 강한 힘에 튕겨져 나갔다. 제레미의 몸이 세자르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고, 그는 쾅! 소리를 내며 책상을 양손으로 짚었다.
“당신, 뭘 알고 있는 거야.”
제레미의 날카로운 물음에 세자르의 시선이 천천히 그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그녀에게 다른 세계에 대해 들은 적 있나.”
“다른 세계?”
제레미와 마샤, 이안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보통 사람은 ‘돌아간다.’라는 표현을 어디에 쓰지.”
“집? 고향?”
마샤가 답을 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에 세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나가는 말로 그녀는 말했어.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그게 무슨.”
순간 제레미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이상한 얘기를 하곤 했어.”
“말해 봐.”
제레미의 말을 부추긴 것은 잠자코 있던 이안이었다.
“날아다니는 마차라거나, 희한한 얘기를 할 때 세상은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고.”
“아.”
그에 마샤는 뭔가 생각이 난 듯 입을 뗐다.
“가끔 이방인처럼 굴 때가 있었지. 어릴 땐 ‘이곳’이나 ‘이 세계’라는 말을 달고 살기도 했고.”
마샤는 흐릿한 기억을 이 잡듯 뒤져 가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에 이안도 말을 보탰다.
“그리운 곳이 가까이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도 했지.”
“…….”
“…….”
집무실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스스로 사라졌을 확률이 있을까요.”
이안의 목소리는 단조로웠지만, 질문은 날카롭게 세자르에게 꽂혔다. 만에 하나라도, 자의적으로 떠나고 싶게 만든 거라면…….
“이래서 내가 곁에 있으려고 한 건데!”
제레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외쳤다.
“후. 다들 괜한 추측은 지양하자고.”
여기서 그나마 서슬이 퍼렇지 않은 사람은 의외로 마샤였다.
“선생님 성격을 생각해 봐. 여기 있는 모두를 하루아침에 등지고 사라질 사람이야?”
“애초에 이곳으로 떠나겠다는 결정을 했을 때도 그러지 않았나?”
제레미의 대꾸에 마샤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정말 우리가 싫었다면 레미아 마을에 정착하지도 않았어.”
“그래. 억측은 자제하지. 지금은 찾는 게 우선이니.”
이안은 겨우 마음의 불길을 잡은 듯,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황 성하께선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안의 물음에 세자르는 마른세수를 하며 답했다.
“찾으러 나서야지.”
이어 마샤가 질문했다.
“어디로요?”
“밟아 봤던 땅이든, 본 적도 없는 땅이든…… 어디라도.”
한숨이 섞인 그의 말에 세 사람은 더 이상 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가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막막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 * *
한나와 파렐톤의 얼굴이 그려진 전단지가 제국 전체에 뿌려졌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곳이라도, 그 전단지는 필히 존재했다.
한나가 사라진 지 꼬박 2주가 지나가는 날이었다.
“세자르 님, 잠이라도 조금 청하십시오.”
모이세이는 이제 세자르의 건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
세자르는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곳은 그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제국의 북부, 사막의 경계.
그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뜻이었다.
“사막까지 뒤질 필요가 있을까요. 여기는 사람도 없는 곳인데.”
모이세이의 말에 세자르가 답했다.
“꿈에 이곳이 나오더군.”
그는 이제 고작 꿈에까지 의지하게 된 것이었다. 그 간절함을 알기에 모이세이는 더 사족을 붙이지 못했다.
“그 아이의 정체도, 한나의 발자취도 찾지 못했어. 그 많은 인력을 쓰고도.”
“정말 하늘로 솟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신전과 황실, 마탑과 어둠의 경로까지 인간의 손이 뻗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수소문했지만, 그들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본 사람이 없었다.
이쯤 되니 세자르는 육체적인 고단함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기다린다는 건 힘든 일이군.”
“한나 님께서도 모두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린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모이세이의 말에 세자르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벽면에 자리한 벽난로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작은 장작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모를 리 없지. 그러니 더 걱정되는 거고. 내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이 수많은 걱정들이 발목을 잡아서라도 돌아오려고 애쓰고 있을 텐데 말이야.”
시간이 간다는 것이 이렇게 야속했던 적이 없었다.
매일같이 레미아 신전에서 오는 연락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에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혹여 오늘은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릴까, 혹 어디선가 보았다는 소식이 들리진 않을까, 하루를 긴장으로 시작하는 건 그 옛날 사막의 전쟁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진 이후, 세자르의 하루는 마치 살얼음판 위의 전쟁터 같았다.
“이제는 살아 있다는 확신만 가질 수 있다면 팔 한 짝, 다리 한 짝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아.”
“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모이세이는 너무도 진심처럼 들리는 그 말에 펄쩍 뛰었다.
“우리가 사막에 있을 때, 기다리던 사람들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
그들은 기다리는 것보다, 기다리게 하는 삶을 살았었다.
“아마 그랬겠죠.”
그 벌을 받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가족이 있다는 거,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애타는 일인지 이제 알겠어.”
자신을 숭배하다시피 하는 제국민들의 마음도 역시 그런 게 아닐까.
자기 자신을 지켜 준 것보다, 소중한 이들을 지켜 준 것에 대한 고마움.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용감하지 않나. 나는 고작 이 하나를 지키는 데에도 속이 문드러지는데.”
격변의 시기를 겪어 낸 모든 이들이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닥타닥.
마른 장작에 불씨가 옮겨붙으며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이곳에서는 찾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불쏘시개를 뒤적거리며 세자르는 애써 머리를 비워 내고 있었다. 요즘 그는 기도하는 것보다 머리를 비워야 그나마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
모이세이는 요즘 침묵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에 답하는 건 그에겐 항상 힘든 일이었다.
똑똑.
그리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두 사람의 침묵을 깼다. 모이세이가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나무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고, 문 앞에는 로브를 입은 마탑의 전령이 있었다.
“밤중에 무슨 일입니까.”
“급한 소식입니다.”
전령은 마탑의 각인이 찍힌 서신을 건넸고, 모이세이는 마른침을 삼키며 얼른 그것을 세자르에게 전했다.
서신이 다가오자 세자르는 불쏘시개를 던지듯 내동댕이쳤다. 그의 떨리는 손이 다급하게 종이에 묶인 끈을 풀어냈다.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눈에 담은 세자르가 편지를 모이세이에게 전했다. 모이세이는 쉽게 읽히지 않는 세자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자르는 말없이 자신의 신관복 외투의 단추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본 모이세이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신관복은 왜…….”
갑자기 밤중에 옷을 벗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어느새 세자르의 신관복 외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탁.
세자르는 이제 신전을 표시하는 어떤 것도 걸치고 있지 않게 되었다. 그저 평범한 일상복 차림을 한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죄를 짓게 될 것 같아서.”
희미한 웃음이 뒤따랐지만, 누구도 함께 웃지 못했다.
* * *
“너, 편의점에 새로 나온 라면 먹어 봤어?”
듣기 좋은 높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웅얼거렸다. 한나는 몽롱한 상태로 옆을 돌아보았다.
“지아?”
옆에서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사람은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 지아였다.
“뭘 그렇게 멀뚱멀뚱 보고만 있어? 안 먹어 봤으면, 오늘 먹자. 응?”
지아는 한나의 팔을 흔들며 물었고, 순간 한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친구와 떠들며 걷는 동네의 풍경은 아주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얘는, 왜 이렇게 정신이 빠져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이 모든 현실에 기시감이 들었다.
뭔가 이상해.
하지만 찜찜한 기분의 근원을 콕 집어서 찾지 못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은 들었지만, 워낙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기에 오히려 지금 이렇게 이상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벌써 봄이 오다니. 이런 날은 편의점이 아니라 도시락 싸 들고 뒷산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지아가 멀리, 꽃나무가 만개한 동산을 가리켰다. 순간 다시 머리가 욱신거렸다. 그러자 지아가 그런 한나의 상태를 눈치채고 눈을 깜박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안색이 안 좋은데.”
얼굴 앞에 손을 흔드는 지아를 보며 한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두통이 있나 봐. 자꾸 머리가 지끈거리네.”
불쾌한 감각이었다. 뭔가 기억이 날듯 말듯 답답하기도 했다.
“꿈자리가 사나웠나?”
지아가 웃었다.
“……그랬을지도.”
한나는 대충 긍정의 말을 건네며 걸었다.
모퉁이를 돌자 편의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다른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역시 한나의 오랜 친구들인 시연과 예나였다.
동시에 한나를 발견한 친구들이 먼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거 봐! 맥주 먹자고 꼬시면 금방 튀어나올 거라고 했지?”
서연이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나처럼 익숙한 광경.
“너희끼리 벌써 맛있는 거 먹고 있었어?”
“얘는, 당연히 너 줄 건 남겨 놨지! 마음껏 먹어라!”
“쟤가 얼마나 많이 먹는데,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익숙한 소란.
“뭐 해? 얼른 여기 와서 앉아.”
먼저 편의점 의자로 달려간 지아가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퉁퉁 두드리며 한나를 불렀다. 하지만 한나는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
이런 자연스러운 일상에 왜 개운하지 못한 기분이 드는 걸까.
마치 외출할 때 가스 불을 켜 놓고 나온 것처럼 중요한 일을 실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꼭 꿈속에서 이게 꿈이라는 걸 자각했던, 어느 날의 신기한 경험처럼.
하지만 한나는 애써 찜찜한 마음을 삼키며, 지아의 옆자리로 갔다.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친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우리 맨날 가던 그 떡볶이집에 떡볶이 메뉴가 없어진 거 알아? 어떻게 간판이 떡볶이집인데 떡볶이가 없을 수가 있지?”
시시콜콜한 단골 가게의 메뉴 이야기부터,
“이거 신상 휴대폰인데, 어때?”
새로 산 아이템 자랑,
“그래서 걔가, 4년 만나고 헤어졌다는 거 아니야!”
SNS로만 안부를 전하는 동창의 결별 소식까지.
언제나 그렇듯, 별것 아닌 소식에도 호들갑은 기본이었다.
“아 참. 너 해리 소식 들었어?”
순간, 예나가 뱉은 말에 한나는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슨 소식?”
한나는 이 소식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마, 예나는 해리의 사고 소식을 전할 것이다.
“해리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있대. 아무도 모르다가 며칠 전에 그 병원에서 실습하는 친구가 중환자실에서 해리를 봤다는 얘길 했어.”
“…….”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한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한 명씩 빤히 보았다. 그러던 중, 예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자살 시도라고?”
하지만 그에 답한 것은 한나였다. 그러자 예나는 놀란 표정으로 한나를 보며 말했다.
“알고 있었어?”
물론, 알고 있다.
해리는 어릴 적부터 친했던 친구였다. 그런 그녀와 고등학교 시절 크게 다툰 후 만난 적이 없었는데, 그녀를 다시 재회하게 된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
물론, 만나게 된 친구의 모습은 영정 사진이었지만.
“알다마다. 난 그 해리가 죽은 뒤에도 3년을 더 살았는걸.”
계속해서 이 상황이 찜찜했던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지난 과거의 어느 장면일 뿐.
해리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억은 절대 잊히지 않거든.”
이 모든 일들이 내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
“너희, 뭐야?”
던진 질문과 함께, 한나의 주위 소음이 일순간 사라졌다. 고요해진 공간에서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친구들의 입매가 올라갔다.
동시에 입꼬리를 올리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소름 끼쳤다. 한나는 자신이 지독한 악몽에 사로잡혔음을 직감했다.
‘꿈은 자각하면 깬다더니.’
하지만 분명 이게 꿈이라는 걸 자각했음에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때, 소름 끼치게 웃고 있던 친구 지아가 입을 열었다.
“기억이라는 건 우습잖아. 너도 까맣게 우릴 잊고 살았는걸.”
“……난 잊지 않았어.”
한나가 지아에게 답하자, 지아는 한나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 대며 속삭였다.
“잊지 않았다고? 넌 지금도 잊고 있잖아.”
지아의 말과 함께 다시 두통이 시작됐다. 불쾌한 감각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내가 뭘 잊고 있는 거지.”
줄곧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순간 지아의 말에 뭔가 중요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잊지 않아야 하는 것.
한나는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 어떤 단편적인 기억들이 뇌리를 스쳤다.
“소중한 사람들…….”
초록의 동산, 이곳보다 뜨거운 태양, 그리고 사건과 사고들.
분명 엄청난 것들이 가슴 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건 기억이나 기록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것들.
잊으면 안 돼.
기억해.
사랑하는 것들은 그곳에 존재해.
한나는 계속해서 제 안의 감정에 집중했다. 누군가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지만, 이내 흐릿하게 사라졌다. 머리는 깨질 듯 아프고,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이것이 현실이면 편하지 않을까?
꼭 뭔가를 기억해 내야 하나?
한나는 순간 그런 나약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털었다.
이건 절대로 현실이 아니야.
강한 확신을 가지자, 이내 한 이름이 떠올랐다.
“파렐톤!”
그 외침과 함께 눈앞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웃고 있던 친구들도, 네온사인이 빛나는 편의점 간판도, 길목의 전봇대와 자전거, 그리고 지나다니던 자동차들이 파도에 쓸려 가는 모래 알갱이처럼 흩어졌다.
순간 한나의 시야가 점멸했다.
* * *
‘세자르……. 마샤, 이안, 제레미…….’
마치 막혔던 댐이 뚫린 것처럼 저장되어 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어떻게 그들을 잊을 수가 있지?
한나는 잠시나마지만 꿈속에서라도 그들을 잊었었다는 것이 황당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원인이 파렐톤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먹어도 돼?’
파렐톤의 물음에 한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가 먹는다는 것이 당연히 제 손에 들린 산딸기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일이 벌어졌다.
파렐톤이 어떤 말을 작게 읊조림과 동시에 한나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마치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한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랄 틈도 없이 그대로 잠들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파렐톤의 몸이 그림자처럼 검게 물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엔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꿈을 꾸었고.
얼마나 꿈속에 갇혀 있었던 걸까.
한나는 자신이 꾼 꿈이 비단 짧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자신이 편의점 앞 친구들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수많은 과거의 시간을 계속해서 떠돌았다는 게 기억났다.
그러자 불쑥 화가 치밀었다.
“파렐톤!”
한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고, 이내 눈이 번쩍 뜨였다.
* * *
“헉……. 헉.”
얼마나 꿈에서 감정이 격해졌던지, 눈을 뜨자마자 가쁜 숨이 내쉬어졌다. 한나는 눈을 떠도 어둑한 시야에 두려운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조금 찌뿌둥한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헉 소리가 절로 나올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세, 세자르?”
흉흉하게 일렁이는 눈빛의 세자르가 어린 파렐톤을 바닥에 깔아뭉개고, 그의 목에 서슬 퍼런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마치 살해 직전의 모습처럼 보였다.
“뭐, 뭐하는 거예요!”
깜짝 놀란 한나가 그대로 세자르에게 달려갔다. 달린다고 하기엔 두 팔과 두 다리를 모두 땅에 짚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한나는 최대한 빠르게 그를 말리러 튀어 나갔다.
한나의 손이 검을 쥔 세자르의 팔목을 붙들었다.
세자르는 파렐톤의 하얀 피부를 정말로 꿰뚫을 것처럼 강한 악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결국 한나는 그의 팔을 온몸의 힘을 끌어모아 당겼고, 그제야 세자르의 시선이 한나에게 향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일련의 상황에 많이 놀란 한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나.”
세자르 역시 평소의 평온한 어투는 아니었다. 다소 격앙된 그의 목소리엔 물기가 스며 있었다.
“왜…… 왜 이러고 있어요? 일단 손에 든 칼부터 치워요!”
아직도 아슬아슬하게 파렐톤의 목덜미에서 빛나는 검을 보며 한나가 말하자, 그제야 세자르의 팔에서 조금 힘이 빠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한나가 세자르의 손에서 검을 떼어 냈다.
툭.
검이 잔디와 흙바닥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세자르가 강하게 한나를 안았다. 숨이 턱 막힐 만큼 강한 힘으로 안아 오는 세자르의 행동에 한나는 조금 놀랐다.
“컥. 왜, 왜 이래요!”
당황 섞인 질문에도 세자르는 더욱 한나의 품을 파고들 뿐이었다. 한나는 당황스러운 시선을 파렐톤에게 옮겼다.
바닥에 누워 있던 파렐톤이 상체를 일으켰고, 이내 한나와 눈을 마주쳤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나는 도통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설명 좀 해 줄래요……?”
한나가 이 말을 한 뒤에도 한참이나 세자르는 묵묵부답이었다.
한참 동안 한나를 꼬옥 안고서,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한나가 저도 모르게 그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까지 느끼고서야 그가 몸을 떼어 냈다.
한나는 이제 조금 진정된 듯한 세자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상하게 세자르의 얼굴이 많이 초췌해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한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세자르는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작 스무 걸음이었는데.”
“음?”
세자르가 한나는 찾아낸 곳은 정말 어이없게도 한나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나무 밑이었다. 그가 그토록 한나를 찾아서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닐 동안, 그녀는 제집 앞마당 나무 그림자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어떻게 사람이 그림자 속에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했던 건 바로, 파렐톤 때문이었다. 세자르가 파렐톤을 눈짓하며 말했다.
“저건 인간이 아니야.”
“네?”
한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자르와 파렐톤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세자르는 한나에게 자신이 받았던 편지를 내밀었다.
“……?”
한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읽었다. 편지에는 파렐톤의 정체에 대한 것이 적혀 있었다.
축약하자면 내용은 이러했다.
파렐톤의 인상착의를 고대 문서에서 찾아본 결과, 그는 ‘악몽’이라는 이름을 가진 악신이었다.
그 외에도 그가 장난을 즐긴다는 설명과 함께, 그가 사람들의 두려움과 악몽을 먹고 산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
한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제 하다 하다 신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갑자기 신을 마주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한나는 자신이 과거 꿈을 꾼 것이 파렐톤의 능력이라는 게 더 황당했다.
“그럼, 나한테 장난을 친 거야?”
그리고 그것이 겨우 장난이라면 화를 내야 마땅했다.
이제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그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낸 것도, 그리고 지금의 자신에게 소중해진 존재들을 꿈에서라도 잊어버리게 만든 것도.
“자, 잠깐만…….”
그러다 한나는 문득, 이 상황이 아주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이상한 점을 손에 꼽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쓰이는 건…….
“그럼 세자르 님, 신을 해치려고 한 거예요?”
한나는 바닥을 구르는 검과 세자르를 번갈아 보았다. 세자르는 그런 한나의 물음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누군가 듣는다면 불경이라고 할 만한 대답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졌다.
“난 어떻게든 그대를 찾겠다고 약속했고, 내겐 이딴 신보다 그대가 중요해.”
“아, 아니……. 흠흠.”
한나는 낯부끄러운 말에 헛기침을 했다.
“뭘 또, 그렇게 뱉은 말을 잘 지키고…… 뭐, 그래요.”
볼이 달아올랐다. 물론 한나는 지금 얼굴이나 붉히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자르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했는지, 수척해진 얼굴에 훤히 드러나 마음이 무척 간질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굴빛은 왜 이래요.”
한나는 손을 들어 세자르의 뺨을 쓸었다. 그에 세자르가 한나의 손길에 가만히 얼굴을 맡겼다. 지그시 감은 눈 밑으로, 드디어 평온이 찾아왔다.
“꼬박 2주를 그대를 찾아 헤맸어.”
“그, 그렇게나 오래요?”
긴 꿈을 꾼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2주씩이나 잘 수는 없었다.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파렐톤에게 뾰족한 눈빛을 보냈다.
“후……. 일단, 침착하고 이 잔디 바닥에서 일어나죠. 다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상황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한나는 몸을 일으켜 발로 위험해 보이는 검을 슥슥 멀리 밀어 버렸다.
그러곤 세자르와 파렐톤에게 각각 한 손을 내밀었다.
“뭐 해요? 둘 다 얼른 일어나요.”
마치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태연하게 내미는 손에 세자르의 심경이 많이 복잡해졌다.
* * *
“자. 두 사람 다 침착하고 냉수 좀 마셔요.”
2주씩이나 사라졌다 돌아온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내미는 물 잔에 세자르의 시선이 닿았다. 세자르와 파렐톤은 한나의 집 안으로 들어와 마주 앉아 있었다.
햇살이 좋은 창가에 마주 앉으니, 꼭 즐거운 티타임이라도 가지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상황을 정리하자면 제가 2주씩이나 사라졌고, 파렐톤은 사람이 아니며, 세자르 님은…… 음. 거의 폐인이 되어 있으시네. 밥은 챙겨 먹은 거예요?”
앞의 두 가지가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한나는 세자르의 거칠어진 얼굴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세자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나는 짧게 혀를 찼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한나는 스스로도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렇게 투명한 눈망울을 깜박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파렐톤이 정말 나쁜 녀석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우선은 파렐톤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네가 이 일을 벌인 게 맞는 거지?”
한나의 물음에 파렐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뭐야? 나쁜 마음이 있었던 거야?”
파렐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두려워하는 걸 알고 싶었어.”
“내가 두려워하는 거?”
파렐톤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나는 그런 파렐톤의 눈을 마주 보며 눈을 좁혔다.
진실을 가늠해 보려 파렐톤을 뚫어져라 보았지만, 정말 파렐톤은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어딘지 눈빛이 공허해 보였다.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오싹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걸 알아서 뭘 하려고 했는데?”
“먹으려고 했어.”
“머, 먹어?”
약점을 캐낸다든지, 그냥 악질적인 장난이었다든지, 그런 부류의 의심을 했던 한나는 그저 먹는다는 말에 조금 당황했다.
“그걸…… 먹어서 뭘 하는데?”
한나는 자신의 꿈이 파렐톤의 한 끼 식사가 되는 건가, 하는 상상을 하며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 팔을 따뜻한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배가 불러져.”
“그러니까…… 그걸 먹고 산다는 거지?”
한마디로 인간이 살기 위해 먹는 양식 같은 것이라고 추측해 보았다. 예상대로 파렐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먹고 살려고 그랬다면 탓할 수도 없…….”
한나가 말을 이어 가던 그 순간, 벌컥 요란스럽게 문이 열렸다.
“탓을 할 수 없긴 왜 할 수 없어요.”
“마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마샤였다. 오늘도 붉은 제복을 풀럭이며 마샤는 평소답지 않게 찌푸려진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너는 왜 갑자기…….”
“괜찮아요?”
어느새 한나의 코앞까지 다가온 마샤가 한나의 양어깨를 잡고 좌우를 살뜰히 살폈다.
“내가 안 괜찮을 일이…….”
“일단 저것부터 사라지게 하죠.”
마샤가 한나를 제 등 뒤로 감추며, 파렐톤을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았다.
“너 파렐톤을 알아?”
한나의 질문에 마샤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고는 있어요? 저건 위험해요. 왜 저런 것과 얽혔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꺼지지 않겠다면 내가 쫓아내죠.”
“아, 아니. 너 왜 이렇게…….”
한나는 강경한 마샤의 행동에 조금 놀라 그를 말리려 했다. 마샤의 팔을 잡아 시선을 잡아끌려는 순간 잠자코 있던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해.”
“세자르 님까지 왜 이래요?”
솔직히 말하자면, 한나는 다소 찜찜한 꿈을 꾸긴 했지만 고작 잠시 자고 일어난 상황일 뿐이었다.
자신이 사라졌던 동안 다른 사람들 속이 다 타들어 갔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해하기엔 지금 닥친 상황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위험한 존재야. 실제로 그댈 2주나 사라지게 했고.”
“이렇게 잘 돌아왔잖아요? 그리고 전 사라진 게 아니죠. 내 집 앞마당에 있었는걸요.”
물론 파렐톤의 능력으로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지만, 어쨌든 한나는 줄곧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주위 사람들은 전국을 헤매고 다녔지만.
하지만 그런 한나의 말에도 세자르와 마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 다들 놀란 건 알겠는데……. 그래 봐야, 어린애잖아요. 갑자기 쫓아내면 이 작은 애가 어디로…….”
“겉모습에 속지 마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시간을 살아온 존재예요.”
“하지만…….”
한나가 반박하려 입을 떼자, 마샤는 그녀의 말을 자르고 파렐톤에게 질문했다.
“봉인됐다고 들었는데, 왜 버젓이 세상을 활보하고 다니는 거지?”
봉인?
한나는 마샤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이 세계에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을 만큼 알 거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한나는 신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작고, 또 평범하다는 점과, 신도 봉인될 수 있다는 점이 아주 흥미로웠다.
“나는…… 사라지지 않아. 누군가가 나를 강제할 수도 없어.”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할 것 같이 생긴 파렐톤이 너무도 평이한 어조로 답하는 모습은 한나에게 아주 신기한 광경이었다.
정말로 모두의 말처럼 제 앞의 아이가 신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니, 갑자기 없던 거리감이 다 생기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라졌다면, 그건 내가 원해서야.”
다소 오만하기까지 한 파렐톤의 대답.
“넌 왜 이곳에 있지? 그것도 네가 원해서인가.”
세자르가 파렐톤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나를 깨웠어.”
파렐톤의 대답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한나에게 향했다. 한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나……? 나요?”
솔직히 한나는 억울한 입장이었다.
“제가 누구를 막 함부로 깨우고 그러지 않는 사람인데요……?”
한나가 어색하게 웃어 보았지만, 아무도 따라 웃어 주지 않았다.
이런 꽉 막힌 사람들을 보았나, 한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를 친 게 아닌지 세자르와 마샤의 눈치를 보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진짜 억울한데.”
하지만 짚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당신은 이곳을 부유하는 영혼이야.”
파렐톤의 말에 한나는 순간, 기분 나쁜 점을 찾아냈다.
그의 말과는 전혀 상관없는 점이긴 했지만…….
“그런데 너, 왜 갑자기 언변이 능숙해졌지? 간단한 단어도 모르더니!”
“라면, 편의점, 휴대폰, 과제, 맥주.”
“헉.”
한나는 자신만 알고 있어야 할 단어들이 파렐톤의 입에서 나오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당신의 꿈에서 배웠어.”
“……내, 내 꿈을 훔쳐봤다고?”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
“아니! 그런 건 안 물어봤거든!”
파렐톤의 생뚱맞은 호감 선언에 한나가 펄쩍 뛰었다.
“그래. 네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전혀 상관없어. 넌 여기서 사라져야 하니까.”
동시에 세자르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파렐톤에게 말했다. 그는 지금 이 말장난 같은 상황이 점점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나도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어.”
마치 수줍은 고백을 하듯, 파렐톤이 말했다.
“무, 무슨……!”
한나가 어버버, 말을 잇지 못하자 보다 못한 세자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렐톤의 멱살을 잡았다.
그의 큰 손이 작은 몸을 끌어당기자 한나는 저도 모르게 몸이 튀어 나갔다.
한나의 작은 손이 세자르의 손 위로 겹쳐졌다.
“또 왜 이래요! 놓고 얘기해요!”
“그댄 아직도 이걸 어린아이로 보고 있나? 잘 봐. 이건 인간도, 우리에게 이로운 존재도 아니야.”
“해코지한 건 없잖아요! 그, 그렇지?”
괜히 눈치를 보게 되는 상황.
한나가 진땀을 흘리자 파렐톤은 그저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보았다.
“애초에 나쁜 마음으로 나를 재운 건 아니잖아. 맞지? 맞다고 해.”
여기 성질 나쁜 사람 두 명이 있다고!
한나의 내적 외침을 알아들은 것인지, 정말인지 모르겠지만 파렐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아. 난 이 인간이 마음에 들어. 해치지 않아. 그냥, 두려움을 먹어 주려고 했어.”
“그러고 보니, 두려움을 먹는다는 건 뭐야?”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궁금증이 생긴 한나가 물었다.
“나는 악신이 아니야. 내가 악몽을 먹어 치우면 그 두려움은 사라져.”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그럼 좋은 게 아닌가?
한나는 왜 두려움을 없애 주는 파렐톤이 악신으로 불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파렐톤의 멱살은 잡혀 있었지만, 그럼에도 대화는 계속됐다.
“기억도 지워지니까.”
“……뭐?”
한나는 파렐톤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먹은 기억은 사라진다고?”
순간, 한나는 자신이 두렵다고 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꿈속에서 이 세계의 존재들이 기억나지 않았던 것도 생각났다.
“무섭다고 했잖아. 난 그 모든 걸 잊게 할 수 있어.”
“……그, 그런…….”
한나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렵다고 해서 지우는 기억이라니.
어쩌면 기억나지 않아서 좋을 나쁜 일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기억해야 하는 기억도 있다.
아주 슬프더라도 꼭 품고 있기에 비로소 나를 완성할 수 있는 기억들.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혹시 지금 자신이 뭔가를 잊게 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 순간부터 말이다.
“내 기억에 지워진 게 있니?”
파렐톤은 한나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한나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서운 건 잊으면 좋지 않아?”
“아니. 절대 아니야.”
슬프고 두려운 감정이 모두 독이 되는 건 아니다. 그것들이 자신을 단단하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니까.
삶의 깊이는 그런 감정들까지 포함될 때 비로소 완성되니까.
그제야 한나는 어떤 확신이 들었다.
“넌, 그냥 아이구나.”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라고 하더니, 결국 생각의 수준이 어린아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처음에 단어조차 몰라서 되묻던 모습부터, 지금의 이런 행동까지 보고서 내린 결론이었다.
“미숙할 뿐이야. 그렇지?”
한나는 세자르의 손을 감싸 쥐며, 파렐톤의 멱살을 풀어냈다.
“아이한테 뭘 그리 날을 세워요.”
“아니래도.”
세자르는 항의하는 눈빛으로 말했지만, 한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무릎을 접어 파렐톤과 눈높이를 맞췄다.
“너, 그럼 가족이 없는 거야?”
파렐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한나는 문득, 산딸기를 먹으며 아무 생각 없이 소중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쩌면 파렐톤이 한 행동은 모두 악의 없는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넌 우릴 해칠 생각이 없는 거지?”
파렐톤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만족한 한나가 손을 들어 파렐톤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다 했더니…….”
한나는 파렐톤에게 과거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파렐톤이 하필, 처음 아이들을 만났던 그때의 나이 또래로 제 앞에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닌 걸까.
자기가 가장 약해지는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너 내가 좋아?”
파렐톤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나는 웃으며 세자르와 마샤를 바라보았다.
“안 돼요.”
마샤가 먼저 선수 쳐 대답했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든 안 된다는 말이에요.”
“자기가 무슨 독심술사야 뭐야.”
한나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자 세자르도 한마디 거들었다.
“위험해.”
위험. 위험이라.
한나는 그 말을 다시 입안에 굴려 보았다. 또 웃음이 나왔다.
“요즘 내 일상이 왜 이리 무료한가 했더니. 그게 없어서였나 보네.”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늘 함께했던 그것!
위험!
우당탕탕 위험한 줄다리기가 끝나자, 마치 번아웃이 온 것처럼 무료하고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는데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너랑 함께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아.”
세 명의 악당들만큼, 아니 어쩌면 더 어마어마한 사건과 사고를 일으키고 다닐지 모르는 폭탄!
“선생님이 데리고 있겠다는 뜻은 아니죠?”
마샤가 불안하게 질문했다.
하지만 한나는 으쌰,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며 제 옷을 털 뿐, 대답이 없었다. 그에 답답해진 마샤가 한나의 팔을 잡자, 한나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 흔들림 없는 눈으로 답했다.
“그럼, 얘를 어디로 보내? 봐 봐.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인격이잖아.”
한나의 말에 마샤의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 그래. 매정하게 얘를 내친다고 하자, 그럼 이 친구가 삐뚤어진 마음으로 어디 가서 대형 사고라도 치면 어떡할 건데?”
“그런 것까지 선생님이 걱정할 필요는…….”
“너, 아주 무책임하구나? 원래 이런 일에는 최초 발견자가 책임을 져야지.”
“궤변이에요.”
“그럼, 민주적으로 본인 의사를 들어 볼까?”
한나가 파렐톤을 턱짓하며 말하자 마샤는 말문이 막혔다.
“아무래도 난 돌보는 게 천직인가 봐.”
어딘지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내뱉는 한나의 말에 두 남자의 입에서 탄식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음음~.”
한나는 오랜만에 반짇고리를 꺼내 뜯어진 옷을 꿰매고 있었다.
낮 내내 마샤가 졸졸 쫓아다니며 귀찮게 구는 바람에 귀가 먹먹했는데, 조용히 바느질을 하는 시간은 고요해서 좋았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하지만 덕분에 마샤가 왜 걱정하는지는 잘 알게 되었다.
파렐톤이 위험한 존재라는 신화 속 이야기부터, 원래 악마는 천사의 얼굴로 다가오는 거라느니, 저러다 뒤통수를 칠 거라느니.
마샤가 오늘 한 이야기를 옮겨 적으면 소설 한 권은 나올 법한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하고 갔다.
그 정도로 노력을 했으니, 파렐톤에 대해 위험하다는 편견이 생길 법도 했으나, 한나는 그런 부류에 내성이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자기들도 한때는 어마어마한 악당이 될 운명을 타고났었다는 걸 모르는 마샤가 마냥 귀여울 뿐이었다.
“그나저나, 걱정은 되는데.”
그래도 앞으로 파렐톤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해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 대해 걱정하다 보니 한나의 손이 조금 느려졌다.
똑똑.
그리고 마침, 늦은 밤의 정적을 깨고 낮보다 말끔해진 얼굴의 세자르가 창문을 두드렸다.
얼른 창을 열자 조금 차가운 바람이 한나를 반겼다.
“밤중에 무슨 일이에요?”
한나의 물음에 세자르는 익숙하게 창틀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는 한나의 5시간 이상 자고 오지 않으면 대화도 없다는 엄포에 억지로 잠을 청하고 오는 길이었다.
“잠든 와중에도 그대가 보고 싶어서.”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픽 웃음이 터졌다. 이런 오글거리는 말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간지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잠은 좀 잤어요?”
낮보다는 반질반질해진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은데…….”
하지만 한나의 눈에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모습.
“내가 없는 동안 많이 걱정했어요?”
“대답이 무의미한데.”
사실 그건 그랬다.
고작 2주 만에 사람이 반쪽이 될 정도면 얼마나 마음고생을 한 것인지 안 봐도 훤했다.
“그 녀석은?”
세자르가 집 안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 신도 잠을 자는 게 신기하네요. 역시, 알고 보면 그냥 사람 아닐까요?”
몇 시간 전. 마샤가 한창 떠들고 있던 와중에 파렐톤은 소파에 앉은 채 잠들어 버렸다.
그 모습에 한나가 마샤에게 목소리를 낮추게끔 하자, 마샤는 잠시 복잡한 심경이 된 듯 파렐톤의 자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마 그도 한나처럼 파렐톤이 그저 잠든 어린아이로 보였던 것 같다고 한나는 추측해 보았다.
결국 제 손으로 파렐톤을 침대로 옮긴 마샤는 온갖 감정이 뒤엉킨 복잡한 표정으로 집을 떠났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세자르가 한나에게 물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는 낮의 불안함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평소 알던 차분한 얼굴에서 한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제가 또 딱히 촘촘하게 인생을 설계하는 편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쉽게 인정하는 모습은 얄미웠지만, 한나는 그 또한 세자르답다고 느꼈다. 어느새 한나의 손에 들려 있던 바늘이 멈췄고, 손은 꿰매는 것을 마무리하기 위해 매듭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든 꿰어 나가다 보면, 그럴듯한 길이 보이겠죠.”
한나는 잘 묶은 실을 이로 톡 하고 뜯어냈다. 실이 끊어지고, 찢어져 있던 옷감은 조금 어눌해도 완벽하게 이어 붙여졌다.
“난 언제나 그대 선택을 존중하고자 했어.”
“이번에는 아닌가요?”
세자르 역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까 하는 생각에 한나는 조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러겠지. 그대는 하고 싶은 걸 해. 난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 테니.”
“…….”
한나는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세자르는 항상 자신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했다.
“다만 겁이 날 뿐이야. 내 한계가 생기는 것에 대해.”
세자르는 이번 일로 자신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어떤 것도 실패해 본 적이 없던 그였기에, 지키고자 하면 지키고, 찾고자 하면 찾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힘든 일이라도 노력으로 안 될 것은 없다고.
하지만 정말로 한나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무력함을 한차례 겪고 나자, 그의 단단한 세상에 금이 갔다.
덕분에 잠을 자는 잠깐의 시간에도 불안으로 눈뜨게 되었고.
“하지만 당신은 결국 날 찾아냈잖아요.”
바늘을 놓은 한나의 손이 세자르의 팔 위로 겹쳐졌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구나 싶었다니까요.”
한나가 조금 웃자, 세자르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그것은 세자르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옮아오는 감정의 동요였다.
한나가 웃으면, 그도 웃는다.
“고맙다는 말, 하고 싶었어요. 낮에는 정신이 없어서…….”
“그것도 입 아픈 말이지.”
“나를 이렇게 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한나는 순간 울컥했다. 세자르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 준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하지만 이번에 배운 게 있어요.”
한나의 말에 세자르가 따스한 눈빛으로 한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몸이 창틀에 기대어져 있어서 나오는 각도였다.
“낯선 아이를 조심하자?”
갑자기 끼어든 세자르의 장난 섞인 말에 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아니라, 세자르 님에게 했던 부탁은 취소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세자르는 한나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고 자신을 찾아 달라고 했던 약속을 취소한다? 그것은 딱히 좋은 방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 자신을, 그리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두를 지키기 위해선 내가 노력해야 해요. 누군가 찾아 주길 바라지 않고, 기필코 내 스스로 이곳에 붙어 있을 거예요.”
한나는 스스로 명쾌한 답을 내렸다.
“멀리 간다고 해도 돌아올 테고, 누구도 나를 이곳에서 떼어 놓을 수 없게 할 거예요.”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싸웠던 꿈속의 자신처럼.
“그러니까, 무거운 짐을 세자르 님 혼자 짊어지게 하진 않을게요.”
한나가 창가로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세자르의 얼굴 코앞까지, 얼굴이 다가갔다. 분홍 머리카락이 세자르의 볼을 스치며 간질였다.
“나도 항상 세자르 님을 찾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랍니다.”
한나의 눈이 접혀 들자, 세자르의 손이 한나의 뺨에 닿았다. 따스한 온기가 피부로 전해지자 한나는 살며시 얼굴을 기댔다.
“평생 세자르 님 옆에 딱 붙어 있을게요.”
세자르에겐 2주간의 시름이 녹아 없어지는 말이었다.
“좋은 생각이야.”
“전 꽤 괜찮은 생각을 가지고 사니까요.”
한나가 찡긋, 한쪽 눈을 깜빡이자 세자르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 모든 상황에 가장 이상적인 답을 방금 내렸어.”
“뭔데요?”
한나가 눈을 깜박이며 묻자, 세자르가 한 차례 숨을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결혼하지.”
“……?”
한나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나와 결혼해서, 저 아이를 함께 키우기로 하자는 얘기야.”
“아…… 예?”
한나는 순간 이 세계에 호적 문화가 있나, 아버지가 없으면 시민권을 얻을 수 없나…… 하는 온갖 상상을 했다.
“내가 아는 그댄 저 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고, 저 존재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어.”
“……그, 쉬운 일이 아니실 텐데.”
세자르가 어떻게 자신의 고민을 이렇게 잘 알고, 또 해결책까지 가지고 온 건지 한나는 어안이 벙벙하면서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세자르는 이 복잡한 상황에서 최대한 한나가 만족할 결과를 보여 주고 싶었고, 한나를 위한 그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은 문제를 가장 단순하게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 상황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청혼은 언젠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장소에서, 눈부신 날씨에 하고 싶었는데.”
세자르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말했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로 꾸미고 싶었던 청혼의 순간이 이렇게 고작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급했다.
한순간도 한나를 위험이 될 만한 상황 속에 홀로 두고 싶지 않으니.
“……아?”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한나가 놀라자 세자르가 움직였다. 서로의 호흡까지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난 이렇게 얼간이처럼 그대를 사랑해.”
“누, 누가 얼간이래요?”
한나는 더욱 강력하게 세자르의 말을 꼬집으려 했지만 이내 닿아 오는 뜨거운 입술에 입이 막혀 버렸다.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금은 그냥 이렇게 이 사람의 온기를 더 느끼기로 했다.
* * *
“음. 초대할 사람이 이렇게 없던가.”
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창가에 앉아 한나는 초대 목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단 말이지.”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결혼식 초대 명단이었다.
“파렐톤, 그걸로 장난치는 거 아니야.”
그런 한나의 맞은편에는 파렐톤이 초대장 봉투를 접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런 건 왜 하는 거야?”
파렐톤의 질문 폭탄이 또 시작됐다.
“가족이 되기 위해서 하는 거야.”
“소중한 사람.”
“응. 맞아.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한나는 요즘 파렐톤이 하나하나 사람들의 언어를 습득해 가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파렐톤이 어쩌다가 백지처럼 투명한 상태의 아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악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세자르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은 어쩌면 운이 좋았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혹, 나쁜 사람들이 발견했다면 파렐톤을 어떤 식으로 이용했을지 모르지 않는가.
“당신은 왜 이곳에 가족을 만들기로 했어?”
“내가 사는 곳이 여기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며 한나가 웃자 파렐톤은 눈을 감고 잠시 뭔가를 회상했다.
“당신 기억 속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았어. 반짝반짝 빛나고 신기한 것들.”
“흐음…… 그건 그렇지.”
“나는 그것들이 좋아. 새로운 것.”
이곳에서 너무 오래 지내서인지, 꿈에서 보았던 한국은 한나에게도 신기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그리워하고 있었잖아.”
“내 감정도 느낄 수 있어?”
한나가 신기한 듯 눈을 번쩍 뜨자 파렐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목록을 작성하던 한나의 손에 들린 펜이 떨어져 나갔다.
한나는 기지개를 켜며,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립지 않느냐?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잠시 꿈을 꾼 그날 이후로 처음 이곳에 왔던 때만큼 그곳이 그리워졌다. 모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강렬한 그리움이었다.
하지만…….
“그리움에도 순위를 매겨야 한다면…… 아마 난 이곳을 잃는 쪽이 더 두려울 것 같아.”
“왜?”
“글쎄. 아마 내가 현재를 사는 사람이라서일까.”
언제나 희미한 과거보다는 손에 잡히는 현재에 집중했다. 그게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을 떨치려는 몸부림으로 시작됐을지라도, 결국 한나에게 중요한 건 지금의 순간이었다.
“줄곧, 그랬어.”
한나가 웃자 파렐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더 소중한 게 많아서라고 해 두자.”
한나는 손을 뻗어 파렐톤의 정수리를 마구 헝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의 질문은 가슴을 찌르는 뭔가가 있다.
* * *
결혼식 하루 전.
거의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나 있었다. 한나가 뭔가를 고민하기도 전에 세자르가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자르보다는 신전이 바빴지만.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파, 파렐톤!”
한나의 침실에서 시작된 다급한 외침이 건너편 방에 있는 파렐톤의 귀에까지 쩌렁쩌렁 꽂혔다.
파렐톤은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고, 잠에서 덜 깬 눈을 비비며 목소리의 주인공인 한나를 바라보았다.
“너, 너 이거 뭐야!”
한나는 자신의 잠옷을 흘러내리지 않게 양손으로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내가 왜 어려진 거냐고!”
그 이유는, 몸이 작아져서였다.
마치 열 살 아이처럼.
그 모습을 본 파렐톤은 놀라지도 않고 덤덤하게 답했다.
“어려지고 싶다고 했잖아.”
여전히 그는 졸린 눈을 비비기 바빴다. 파렐톤의 말에 한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언제?”
“밤에.”
한나가 곰곰이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오랜만에 농장 단장을 하고 들어온 한나는 파렐톤의 물음표 살인마 같은 질문 세례를 받으며 ‘아이고. 나도 열 살 아이처럼 그렇게 하루 종일 쌩쌩했으면 좋았겠다.’ 같은 소리를 했었다.
솔직히 에너자이저 같은 열 살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말 많이 하지 않던가?
한나는 고작 그런 말을 한 결과가 하루아침에 아이가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못 해!
“돌려놔!”
한나의 외침에 파렐톤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했다.
“못 해.”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도 정확히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저, 한나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한나가 어려진 것이었다.
“이런……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보냐고!”
한나는 눈앞이 깜깜했다. 심지어 세자르에게는 뭐라고 한단 말인가.
‘내가 20년쯤 어려진 것 같아요. 우리 결혼은 10년은 더 커서 하시죠.’
뭐 그런 말을 해야 한다고? 아니, 결혼할 수나 있는 건가?
“도대체…….”
이걸 어떻게 되돌려 놓는단 말인가.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하지?
눈이나 끔뻑거리는 파렐톤을 믿고 기도나 해야 하나?
이쯤에서 한나는 진지하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세자르에게 말했다가는 그가 얼마나 걱정을 할지 눈에 선했다.
그렇다고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마샤 정도이려나.”
그나마 그가 마법에 조예가 깊으니 이 일을 수습할 능력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제레미가 몰래 수집한 고대 보물 같은 걸로 도움을 줄지도 몰라.”
제레미가 신기한 물건 수집에는 또, 일가견이 있지 않은가.
“혹시 황실이라면 이런 문제도 겪어 보지 않았을까.”
불로장생을 꿈꾸는 어느 황제가 연구를 했다거나.
“끄응…… 으으. 에라! 모르겠다! 누구라도 찾아가 보자.”
혼자 마음이 급해진 한나와 달리 파렐톤은 그런 한나를 보곤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뒷덜미가 한나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어딜 가? 넌 나랑 딱 붙어 다녀야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파렐톤이 저지른 일인데, 그를 떼 놓고 가 봐야 소용이 없었다.
“난 지금부터 편지를 쓸 거야. 넌 가서 세수하고 와!”
한나의 외침에 파렐톤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모습에 한나는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나쁜 아이는 아닌데, 말썽이 많다.
씻으러 향하는 파렐톤을 보며 한나는 줄줄 흐르는 잠옷을 치켜올렸다.
“……후, 일단 파렐톤 옷을 빌려 입자.”
* * *
덜그럭거리는 마차에 탄 지 꽤 오랜 시간.
“편지는 도착했으려나.”
한나는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샤, 제레미, 이안을 한 명씩 찾아갈 시간도 없으니 한 방에 만나기 위해 그들에게 전서구를 날렸다.
지금 갈 테니, 셋 다 황궁에 딱 모여 있으라! ―는 급한 메시지를 담아서.
마차는 어느새 제도의 중심인 황궁 근처까지 당도했다.
“세자르 님이 걱정할 텐데…….”
물론 한나는 세자르가 걱정하지 않게 집 문 앞에 떡하니 편지를 붙여 놓고 오는 길이었다.
잠시 결혼식에 필요한 것이 있어 제도에 다녀온다는 내용이었다.
급한 마음에 그렇게 적어 놓기는 했지만, 혹여 일이 잘 안 풀리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마차에서의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이렇게 심란한 와중에도 한나는 파렐톤에게 주의를 잊지 않았다.
“파렐톤, 황궁으로 가면 아무나 따라가면 안 되는 거 명심해. 이상한 말도 하면 안 돼. 아무나 막 재워도 안 되고, 어려지게 만드는 것도 안 돼.”
파렐톤은 알아들은 건지 아닌 건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냥 가만히만 있어 줘.”
한나는 양 손바닥을 모으고 제발 부탁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고, 마차가 덜컹거렸다.
“도착했나 보다!”
한나는 반색하며 얼른 창을 열어 보았다. 언제 봐도 으리으리한 위용을 뽐내는 황궁이 눈에 들어왔다.
한나와 파렐톤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돕기 위해 마부가 달려왔지만 한나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손 꼭 잡고 내려!”
마부가 보기엔 똑같이 어린 아이들인데, 분홍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린 한나가 마치 보호자처럼 검은 머리의 아이를 챙기고 있었다.
마부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분홍 머리가 누나인가…… 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얼른얼른!”
그 생각은 이내 성질 급한 누나인가로 고쳐졌다.
* * *
“…….”
“…….”
“…….”
황제의 응접실에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침묵이 감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 말을 잃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라도 말을 해 봐.”
한나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안과 마샤, 제레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장 먼저 충격에서 벗어난 사람은 이안이었다.
“……그러니까, 자고 일어나니…… 어려졌다는 말이죠.”
평소 침착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안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들 황당할 거란 거 알아. 하지만 내가 이런 모습을 또 누구에게 말하겠어. 도움……받을 만한 게 있을까? 사소한 정보라도 좋은데.”
분홍 머리, 똘망똘망 커다란 눈, 눈물이 맺힌 건지 원래 눈이 촉촉한 건지, 눈까지 반짝이는 모습은 누가 봐도 귀여운 10살 아이.
심지어 대충 올려 묶은 머리는 곱슬머리 덕에 몽실몽실 동물 꼬리처럼 귀여웠다. 그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던 마샤가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한나에게 다가왔다.
마샤가 한나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의자에 앉아 달랑거리는 다리가 멈췄고, 마샤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한나는 순간 마샤가 우는 건가 싶었다. 정말 상황이 심각하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왜, 왜? 그렇게 심각해? 나 못 돌아가?”
두려운 마음에 제레미를 바라보았지만, 제레미 역시 어색하게 눈길을 피하는 것이 아닌가?
“이, 이안?”
그나마 이성적인 이안을 바라보며 구원의 손길을 부탁하려 했는데, 마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놀래라!”
마샤는 놀란 한나의 손을 꽉 잡았다.
“미쳤다. 어떻게 이렇게 귀여워요?”
“……?”
한나는 마샤가 콧김을 뿜으며 하는 말에 고개를 기울였는데, 그 모습마저 깜찍해 마지않았다.
“깨물어 주고 싶잖아. 아. 어떡하지. 한 입만 물어 봐도 돼요?”
미친.
한나는 순식간에 상황 파악이 되었다.
불쑥 튀어나오려는 욕을 삼키며 제레미와 이안을 살폈는데, 그들의 상황도 마샤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 궁금하긴 한데……. 아. 이건 조금 충격인데.”
제레미가 제 턱을 쓸며 슬금슬금 다가왔고, 이안은 시종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다가 한나와 눈이 마주치자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초상화 한 장만 그려도 될까요. 가만히만 있으면 궁정 화가가 빠르게 그릴 거예요.”
“…….”
한나는 저 녀석이 제일 독한 녀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종이 헐레벌떡 문밖으로 나가자 한나는 제 어깨를 잡고 있는 마샤의 손을 떼어 냈다.
손이 떨어지자 마샤는 아쉬움이 그득한 눈빛으로 한나를 보며 그녀의 키를 손으로 가늠해 보고 있었다.
“내 반 토막인가? 손가락 만져 봐도 돼요? 아니면 발이라도?”
“하지 마.”
“드레스를 입는 건 어떨까.”
한나는 파렐톤의 일상복을 빌려 입고 있었는데, 제레미가 옷을 보며 뭔가 아쉽다는 생각에 제안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가장 먼저 행동한 사람은 이안이었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이안에게 다가가 또 무언가를 지시받았다. 시종은 이내 쏜살같이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내가 머리카락 묶어 봐도 돼요?”
이어진 마샤의 제안에 한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너희, 이 상황이 재미있니?”
“설마요.”
“그럴 리가요.”
“전혀요.”
답은 정확히 부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시피 한 이안마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웃겨 죽겠는 건 알겠는데…… 난 지금 아주 심각하거든?”
한나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는데, 그 모습마저 마샤의 입을 틀어막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이안은 시종에게 눈짓으로 궁정 화가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의 그 꼬맹이는 왜 달고 다녀요?”
제레미는 지난날의 사건으로 인해 파렐톤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 한나의 결정에 대해 들었기에 강하게 거부감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 한나는 제레미의 질문을 간단하게 일축했다.
“이제 내 아들이야.”
“……?”
그에 제레미와 이안이 물음표를 던졌다. 입양이라는 내막을 알고 있는 마샤만 혀를 찼다.
“뭐 그렇게 됐어.”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
이안은 역시 선생님이라며 작게 웃었다.
“말 안 듣게 생겼는데.”
제레미가 팔짱을 끼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하자 한나는 풉,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런 말 하는 건…….”
반박하려던 한나는 제레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자 곧장 입을 닫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내 상태에 대한 도움은 줄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다시 이곳에 온 목적의 답을 구하자, 세 사람은 각자 생각에 빠졌다.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했고, 탄식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건 꼭 어려워서만이 아니라 작은 아쉬움이 섞인 반응이라는 걸 다행히 한나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 * *
“그러니까…… 하.”
“잠시, 잠시만 그대로 계십시오.”
모두에게 푸념 섞인 상황 설명을 하던 한나는 황궁 화가의 요구에 몸을 굳혔다. 그러곤 눈치를 보며 거의 복화술에 가깝게 말을 이어 갔다.
“내일이 당장 결혼…….”
“고개, 다시 오른쪽으로 조금 더.”
화가의 요구에 따라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결혼식 전까지 난 원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야.”
이 우울한 와중에 초상화를 그린다고 또 협조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었지만, 한나는 저렇게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세 남자들의 소원 아닌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옷은 적당히 드레스로 그리게.”
“예. 폐하.”
“배경은 조금 환하게.”
“예.”
이야기를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세 사람은 화가의 뒤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훈수 두기 바빴다.
“머리에 리본 하나 올리는 건 어때?”
마샤가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리본을 머리를 묶은 곳에 얹었다.
“괜찮군.”
한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러다간 문제 해결은 하지도 못하고 날이 지게 생겼다.
“너희 내 문제에 관심이 있긴 한 거지?”
한나의 질문에 제레미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여기 그 문제가 안 풀리길 바라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요?”
“뭐?! 왜? 그건 배신이지!”
한나가 버럭 언성을 높이자 제레미는 이젠 아주 통쾌하게 웃기까지 했다.
“결혼식이 엎어지면 파티라도 열고 싶은 사람이 많을 텐데.”
“이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건가.”
한나의 뾰족한 눈초리에 제레미는 웃으며 눈을 피했다.
“초안이 완성됐습니다.”
그때 황궁 화가가 초안의 완성을 알렸다. 그가 이렇게 빨리 초안을 뽑아 낸 데는 성격 급한 세 사람의 영향이 컸다.
이안은 팔짱을 낀 채, 한참 초상화를 바라보다 한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나는 여전히 애타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에 이안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우리가 선생님이 곤란한 걸 좋아할 리 없잖아요.”
“역시! 뭔가 알아낸 게 있는 거지?”
한나의 안색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여태 힘없이 흔들리던 딸랑 올라간 발이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린 일개 인간인걸요. 그런 방법을 어떻게 알겠어요.”
방법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럼 여태 자신을 붙들고 그림을 그리고 인형 놀이를 하는 것처럼 리본을 달고 있었던 건 다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나를 놀리고 있었구나.”
한나는 으스스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 위에 달랑거리는 리본을 손으로 떼어 냈다.
순식간에 방 안의 온도가 내려갔다.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해요. 마법이 풀리길 기다렸다가 하면 되는데. 정 안되면 10년쯤 기다리면 성인이 되겠죠. 아! 그때쯤이면 교황 성하는 할아버…….”
소파에 눕듯이 기대 이안의 말에 동조하던 마샤는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진 널어진 건어물처럼 흐물거리던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샤, 제레미, 이안.”
한나가 작은 손으로 미간을 꾹 누르며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세 사람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한나의 말에 집중했다.
“내 인생에 중요한 순간 중 하나야. 난 이번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아.”
한나는 자기가 누군가에게 화를 낼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자기 힘도 모르는 파렐톤을 탓하기도, 그렇다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도 말이 안 됐다.
“도움이 필요해.”
속은 좀 상하지만 믿을 사람이라고는 이들뿐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한나의 작은 어깨가 축 늘어졌다.
기분이 안 좋은 와중에도 바닥에 닿지 않아 달랑거리는 발은 여전히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솔직히 이안과 마샤, 제레미의 눈에는 화를 내는 한나의 모습도 그저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을 뿐이었다.
제레미가 한나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딱 맞는 눈높이에 제레미는 숙어진 한나의 얼굴 밑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한나의 눈이 뜨이자, 제레미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걱정할 게 뭐 있어요. 선생님이 이런 모습이라고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 그건…….”
맞는 말이라 해도, 결혼은 다른 문제였다.
“그깟 결혼식이 늦춰지는 것보다 그분은 선생님의 잠시간의 부재가 더 심장이 철렁할걸요.”
제레미의 어깨너머로 책상에 걸터앉아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겉모습이 변해서 변할 사람이라면 지금 제가 사막에 묻어 버리고 올게요.”
제레미가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의 농담에 한나는 어째서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선생님에게 곤란한 일이라면 어떻게든 우리가 바로잡아요.”
나긋한 목소리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키워 놓고 지켜 놨더니 다 소용없는 거였다며 가슴을 두드렸던 것이 미안해졌다.
이내 꾹꾹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눈물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안고 있었던 불안감, 그리고 제 편이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들이 마구 뒤섞였다.
“몸이 어려지니까, 눈물샘도 퇴화했나 봐.”
괜히 민망해진 한나가 작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자 마샤가 다가와 의자 뒤에서 한나를 꼭 껴안았다.
“우는 것도 귀여워서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네.”
말랑한 한나의 뺨에 마샤의 볼이 비벼졌다. 한나는 그런 마샤를 떼어 놓으려 버둥거렸다. 그때, 가만히 그들을 구경하던 파렐톤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저 쪼끄만 녀석이, 지금 나 보고 얼굴 구긴 거 맞지?”
마샤가 그런 파렐톤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애한테 자꾸 그러지 마.”
“아. 우리 선생님은 여전히 이렇게 마음이 약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파렐톤을 탓하지 않는 한나의 모습이 그녀답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샤는 걱정이 되었다.
“감당이 되겠어요?”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파렐톤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이안의 물음에 한나는 울다가 웃었다.
“아무렴. 너희 셋보다는 쉽지 않겠어?”
그러자 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요. 상황 파악은 끝났고, 즐길 것도 즐겼고, 이제 해결해 보죠.”
이안이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 냈다.
그의 손짓에 문이 열리고 황궁의 고서를 해석할 사람들과 마탑의 마법사들, 그리고 여러 보물들을 든 사람들이 방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순식간에 몰려든 인원들에 한나가 놀랐지만 세 사람은 침착하게 일을 진행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을 하는 것처럼.
“목표는 하나. 내일까지 선생님을 가장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 놓을 것.”
그렇게 셋……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고군분투가 시작되었다.
* * *
째깍째깍 돌아가는 초침을 보며 하얀 턱시도를 차려입은 세자르가 마른 입술을 손으로 매만졌다.
중요한 준비를 하고 오겠다며 떠난 한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신전은 예식 준비로 한껏 고조되어있었지만, 한나가 없으니 준비에 문제가 있었다.
“한나 님은 아직입니까?”
커티스는 예식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보이지 않는 주인공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쩌면 신랑인 세자르보다 더 예민한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하셨길래 예식 날 소박을 맞습니까?”
커티스는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세자르는 마냥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얼마나 남았지.”
“이미 하객들이 거의 다 왔습니다.”
레미아 신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온 것이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소소하게 채운다고 추린 목록이지만, 아무렴 교황의 결혼식이 한산할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것이길래…….”
이렇게 결혼식 당일까지 사람을 애태우는지, 세자르는 그것의 정체를 꼭 물어보리라 다짐하며 언덕길을 목이 빠져라 보고 있었다.
“전 모르겠습니다. 예식 진행하러 가 보겠습니다. 혹시 정말 소박맞거든 조용히 귀띔해 주십시오. 그래도 체면에 먹칠하지 않도록 상황 정리를…….”
“가.”
그놈의 소박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려는 건지.
세자르는 불편한 심기를 꾹 누르며 커티스에게 손을 저었고, 커티스는 얼른 예식이 있는 신전 정원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세자르는 이제 한나가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슬그머니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일단 늦어진다고 알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모이세이가 세자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자르 역시 임박한 시간에 맞출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결국 그는 옅은 숨을 내쉬며 창에서 몸을 돌렸다. 그러곤 커티스가 앞서 지나간 길로 향했다.
* * *
나무와 나무를 잇는 하얀 천들이 따가운 햇살을 가리며 나풀거리고, 초록의 정원 옆으로 아름다운 꽃들이 줄을 이어 장식된 예식장.
중앙의 웨딩 로드는 신랑 신부를 위해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커티스는 홀로 등장한 세자르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역시나 일이 잘못된 거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세자르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덤덤한 표정으로 하객들을 가로질러 단상으로 갔다.
커티스는 빠르게 다가오는 세자르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알릴 말씀이 있습니다.”
잔잔한 정원에 세자르의 목소리가 울렸다.
커티스는 순간 모이세이와 눈이 마주쳤고, 모이세이가 고개를 가로저음과 동시에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할지 하객을 어떻게 돌려보낼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멀리서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신전의 복도를 가로질러 중앙 정원으로 달리고 있는 다섯 사람.
세자르는 하던 말을 멈추고, 다급히 뛰어오는 한나와 이안, 제레미, 마샤, 그리고 파렐톤을 보았다.
“신부 왔어요!”
스스로 왔다고 저렇게 당차게 알리는 신부가 또 있을까.
세자르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마치 갓 뽑아낸 천사의 깃털로 만든 것 같은 하얀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달리는 한나의 뒤에는 세자르와 비슷한 턱시도를 입고 꽃바구니를 든 파렐톤이 함께 달리고 있었다.
“챙겨 올 것이 아니라, 챙겨 올 사람이었나.”
세자르는 그녀의 손을 부축한 이안, 드레스 자락을 잡고 따르는 마샤, 면사포를 머리에 덮는 제레미를 보며 그녀가 챙겨야 했던 것이 혹시 저들이 아닐까, 추측했다.
잠시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결국 한나가 왔다.
“어서 와.”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부로.
세자르는 달려오는 한나에게로 발걸음을 옮겼고, 이내 손을 내밀었다.
한나는 자신이 늦었음에도 환하게 웃어 주는 세자르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숨이 찬 게 열심히 뛰어서인지, 결혼의 설렘 때문인지 분간은 가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벅찬 순간이었다.
“나의 신부님.”
한나의 손이 세자르의 손바닥 위로 얹어졌다.
동시에 한나를 무사히 데려온 세 사람은 조용히 웨딩 로드 밖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자 하객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나는 어떤 날보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세자르를 올려다보았다.
파렐톤의 손에서 뿌려진 꽃이 팔랑팔랑 날려 길을 장식했다. 때마침 부는 바람에는 꽃 내음이 가득했다.
한나는 하객들을 바라보았다. 밤을 꼬박 새워서 무사히 자신을 돌려놓은 세 명의 천사들,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해 있었다.
세자르가 한나를 에스코트하다 그녀에게 물었다.
“기분은 어때?”
한나는 감격에 목이 메어 겨우 목소리를 냈다.
“더없이 행복해요.”
그들이 말한 대로, 한나는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되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곱게 키운 악당들>,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