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
사르륵. 사르륵.
이 검은 머리카락이 이리도 부드러웠던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익숙했던 이 동작이 새삼스러운 날이 되었다.
“얼른 일어나야지. 제레미.”
목숨은 건졌다고 하나, 제레미의 상처는 아주 깊었던지라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다.
성수를 들이부어도, 그의 특출난 회복력과 정신력에도, 오늘은 제레미에게 아주 힘든 날이었다.
한나는 제레미의 간호를 자처하며 그의 침대 옆을 지키고 있었다. 혹시라도 제레미의 열이 오르면 사용할 협탁 위 가득한 성수들은 온전히 정상적인 것들이었다.
따뜻한 물에 젖은 수건으로 식은땀이 맺힌 제레미의 이마를 닦아 냈다. 이러고 있으니, 꼭 어린 시절 어느 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물론 침대 위의 제레미는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게 큰 어른이 되어 있지만.
“여전히 내겐 그 시절 제레미 같아.”
쭈뼛거리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제게 다가오던 모습부터, 세상모르고 천진하던 모습까지.
무엇보다 제레미는 여전히 가슴속에 따뜻한 선의를 품고 있었다.
“고마워. 제레미.”
우리를 위해서 싸워 줘서, 그리고 의심을 모두 도려내 줘서.
지금 한나는 이안, 마샤, 제레미,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토록 발버둥쳤던 원작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은 결국 그들이 이뤄 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답을 갖고 있었는데.”
그저 믿음이면 충분했던 것을.
“널 아프게 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손가락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을 가득 쥐었다 풀어내기를 반복했다.
“이제 절대 의심하지 않을게.”
한나의 손이 점점 느려졌다. 노곤하게 눈이 감겨 왔다. 아른거리는 초의 불빛이 가물가물해졌다. 스르륵 눈이 감겨들고, 고개가 기울었다. 한나의 손이 완전히 멈추자, 감겨 있던 제레미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그는 이불 속 제 손을 빼내 여전히 자신의 머리카락 옆에 자리한 한나의 손을 편하게 내려 주었다. 그러자 옆구리 옆에 자리 잡았던 한나의 분홍 머리카락이 흩어져 내렸다.
“…….”
제레미는 그 분홍빛 머리카락을 몇 가닥 손가락에 얽었다.
“비우겠다는 사람에게 이렇게 얽혀 오면 어쩌라는 건지.”
그에게서 옅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음…….”
그 소리를 들었는지 한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으음…….”
한나에게 오늘은 그 누구보다도 고된 하루였을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간호를 할 게 아니라, 병상에 누워 휴식을 취해도 충분할 만큼.
그래서인지 한나는 꽤나 깊게 잠에 든 듯했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잔뜩 쓸어내려도 눈치 못 채고 있는 걸 보니 분명했다.
“……행복…… 하자, 제레미.”
하지만 한나는 꿈속에서도 간호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들릴 듯 말 듯 한 잠꼬대에 제레미는 또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의 손에 얽혀 있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손을 빠져나갔다.
따뜻한 공기가 가득한 방의 밤은 그저 평화로웠다.
* * *
황궁의 반란군과 남은 잔당들은 깔끔하게 진압되었다.
대공이 죽자 반란군은 전투 의지를 상실했고, 어린 조카는 그들을 대신 지휘할 수 없었다.
이안은 불쌍한 조카에게 선처를 베풀었다. 그가 원해서 대공에게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고,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난 왜 또 보수 작업인데!”
그날의 일로 황궁은 여러 건물을 잃었다. 덕분에 마샤의 황궁 출장이 무기한 연장되었다.
“응? 선생님? 안 가면 안 돼요? 나만 두고 갈 거예요?”
마샤는 한나의 뒤를 쫄쫄 쫓으며, 불쌍한 눈으로 사정하고 있었다.
“응. 난 이제 할 일이 없거든요.”
마샤에게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도대체, 갑자기 성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가 있어요? 이거, 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그날의 사건 이후, 한나의 성력이 사라졌다.
그것에 대해 한나는 제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성력이 사라진 게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아이들을 살리고, 원작을 비트는 것이 처음부터 자신의 숙명이었던 건 아닐까.
뭐, 단순히 생각하자면 성물로 증폭한 성력이 평생 쓸 양을 한 번에 쓰게 해서 성력이 사라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마샤.”
한나의 부름에 마샤가 눈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몸의 상처도, 정신의 충격도 모두 깨끗이 아물어 상태가 아주 좋았다.
여느 때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잘 생각해 봐. 내가 그런 쇼를 할 이유가 뭐가 있어? 난 1년만 버티면 신전에서 집이 나오는데! 내가 그걸 위해서 여태 피, 땀, 눈물을 갈아 넣어 성수 만드는 공장으로 살았는데!”
“어……. 음…….”
정말 화가 나는 부분은 바로 이거였다!
1년만 버티면 보상이 나오는데, 신관을 포기하게 되는 것!
“내가 그걸 버려가면서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어?”
“……음, 그건 애석한 일이네요.”
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돈과 보상을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그건 가혹한 일이었다. 사직을 자처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딱 숨기고 신전에 더 빌붙어 있으면 있었지……!”
한나는 말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세상에 줬다 뺏는 게 제일 나쁜데, 능력을 뺏어가다니!
그렇게 생각하던 한나는 순간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분명 아이들이 무사한 걸로 감사하기로 해 놓고, 또 속물 근성이!
“흠흠. 하여튼, 나는 소원하던 따뜻한 곳에서 양이나 치며 사는 삶을 살기로 했어.”
한나는 신전과 제도를 떠나기로 결심했고, 어제 그것을 모두에게 통보했다. 할 일은 끝났고, 성력이 사라진 마당에 더 이상 번잡한 제도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솔직히, 아이들도 잘 키웠겠다, 세자르도 무사히 교황이 됐겠다, 더 이상 고생하면서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바라고 바라던 자유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후후후…….”
입술 끝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 * *
“좋은 아침이죠. 여러분.”
한나와 마샤는 즐거운 걸음으로 황제 전용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안과 제레미가 먼저 자리해 있었다.
“어서 와요. 선생님.”
이안이 웃으며 한나를 반겼고, 제레미의 시선도 한나에게 향했다.
“제레미. 몸은 괜찮아?”
“네.”
한나는 자연스럽게 제레미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저런 괴물 같은 회복력을 가진 녀석 걱정은 그만하고, 앉아요.”
자연스럽게 한나의 어깨에 손을 두른 마샤는 한나를 의자로 이끌었다. 그러곤 의자까지 살뜰하게 밀어 넣은 후, 옆자리에 앉았다.
원형의 식탁에 이안과 제레미, 한나와 마샤까지 모두 둘러앉아 있었다.
“다들 건강해서 다행이야.”
한나가 웃으며 말하자 모두 저마다 즐거운 미소를 띠었다.
“이렇게 다 같이 식탁 앞에 모이는 건 오랜만이지?”
그 일이 일어난 후 이안은 황궁을 안정화 시키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제레미와 마샤는 다친 곳을 회복하느라 돌아다닐 여력이 없었었다.
“꼭 예전 레미아 마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아이들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장성했지만, 한나의 기분은 그때와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밥을 먹고 나면, 볕 좋은 동산을 뛰어다니며 한바탕 소란스럽게 굴고 싶은 느낌.
“이번 사건으로 나는 하나 배웠어.”
“어떤 거요?”
마샤가 식탁 위에 올린 제 손에 얼굴을 기대고, 한나를 올려보며 물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못할 게 없다. 뭐 그런 거.”
한나의 말에 마샤의 눈이 곱게 접혀 들었다.
“그럼, 우리 함께 있으면서 대단한 일이라도 모의해 볼까요?”
“응. 수작 부리지 마. 난 떠날 거니까.”
역시 그럼 그렇지.
한나는 마샤의 뻔한 수작을 웃음과 함께 흘렸다.
“야박하셔라.”
마샤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마침 시녀들이 음식을 가지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우리 맛있게 식사나 하자. 역시 남이 차려 주는 식탁은 최고지만, 그중에서도 황궁 음식이 최고라니까.”
음식이 식탁에 놓이자 한나는 작은 감탄과 함께 박수를 쳤다. 이토록 먹음직한 음식들을 만들어 낸 주방장에 대한 찬사였다.
“식기 전에 얼른들 들어. 꼭꼭 씹어 먹는 거 잊지 말고.”
한나의 말에 모두 옅은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어린아이 챙기듯이 하네요.”
제레미의 말에 이안과 마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직도 너희 눈을 마주하면, 그날이 떠올라.”
“어떤 날요?”
“몰래 보육원에서 도망가려던 나를 붙잡던 어둠 속의 눈.”
한나는 그날을 회상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젖은 시선이 기억을 스쳤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지독하게 아이들과 얽힐 줄은 몰랐는데.
“정말 도망가려고 했어요?”
마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앗. 이거 비밀이었는데.”
아차 싶었는지 한나가 작게 손뼉을 쳤다.
절대 아니라고 얼버무렸던 걸 이렇게 스스로 털어놓다니. 무덤까지 안고 가려고 했던 건데!
“와. 상처.”
마샤는 제 가슴을 손으로 쥐며 말했다.
“상처는 무슨. 잠깐 그런 마음 가진 거야. 잠깐.”
“왜 그랬어요?”
“너희가 무서웠거든.”
한나는 대답을 하는 와중에 웃음이 나왔다.
이들이 생각하기에 고작 열 살 어린아이들이 뭐가 무서웠을까, 싶을 텐데.
‘그러고 보니, 정말로 미래가 변했구나.’
자신만 알고 있던 이 세계의 비밀은 이제 사라졌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결국 도달한 미래가 긍정적이라는 것은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다들 내 시간이 헛되지 않게 해 줘서 고맙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고생을 해서 키웠는데 다들 어딘가 이상하다며 눈물이 찔끔 났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이들이 되어 있었다.
“세계 최고 말썽꾸러기들이 안 무섭겠어?”
한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로 답하며 식사를 이어 갔다.
“그래서, 양 키우는 법은 배웠어요?”
“들판에 풀어놓으면 알아서 자라는 거 아니야?”
마샤의 조잘거리는 말은 식사 내내 이어지고 있었고,
“양을 키워서 얻는 수입원은 알아요?”
“음……. 아마 양털?”
제레미 역시 한나의 또 다른 시작을 걱정했다.
“보육원에선 말썽꾸러기인 우리가 무서웠다 치고, 이번엔 떠나려는 이유가 뭐예요?”
제레미가 한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던 다른 이들도 한나의 답을 듣기 위해 집중했다.
“그건…….”
하지만 한나는 눈을 굴리며 그들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곤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비밀.”
김빠지는 대답에 모두가 실망했지만, 그녀가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입을 닫았다.
한나는 이런 질문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떠나는 이유는 그들에겐 말하지 못할 비밀이었기에 난감한 미소로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가 끝나면 잠시 봐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이안이 한나에게 독대를 청했다.
“혼자 선생님을 독차지하려 들지 말라고오.”
마샤의 투덜거림이 더해지면서 분위기는 다시 정상궤도에 올랐지만, 여전히 조금 처진 기류는 회복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모두가 한나를 보내기엔 아쉬움이 많이 남은 탓이었다.
* * *
“자.”
한나가 대화 장소를 이안의 집무실로 잡은 것은 일적으로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뭔가요.”
“광산 소유권.”
지난날 북부 광산에 대한 권한을 약속받았던 문서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을 때가 왔다.
“거기에서 나오는 광물은 어느 곳에도 쓰이지 않게 해 줘. 위험한 거니까. 그리고 그곳에 자리를 잡은 좋은……. 흠, 괜찮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계속 경비 일이나 다른 일로 일자리를 만들어 줘.”
한나의 말에 이안이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문서를 빤히 바라보았다.
“원하던 것인데, 왜 돌려주는 거죠?”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졌어.”
“그곳의 광물은 큰돈이 될 텐데.”
“위험한 걸 계속 쥐고 있으면 탈나.”
그렇게 말하며 한나가 씩 하고 웃었다. 이건 순전히 제 몸의 안전을 위한 결정이었다.
광물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한들, 언제 나쁜 놈들이 노릴지 모르는데 양이나 치면서 살다가 한순간에 쓱싹 당하는 건 사양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보다 네가 더 잘 지켜 줄 거라는 생각도 들어.”
사실 홀랑 넘겨 버리는 거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안에겐 든든한 기사들과 병사들이 있으니 걱정 없지.
이제 제국에서 이안을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망가트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안.”
고개를 끄덕인 한나가 이안의 책상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책상 위로 양손을 짚고는,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좋은 사람이고, 좋은 황제가 될 거야.”
“…….”
이안은 그런 한나를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네가 지켜야 할 많은 것들 중에 자그마한 광산 하나 더하자는 거지.”
한나가 코를 찡긋거리며 웃자 이안은 손가락 끝에 걸리던 문서를 집어 들었다.
“절 믿어 준다는 걸 기뻐해야 할지, 이렇게 다 버리고 떠난다는데 슬퍼해야 할지…….”
이안의 입가에 애매한 미소가 떠올랐다. 손에 들린 문서를 만지작거리던 이안은 그것을 책상 한편에서 타고 있는 촛불로 가져갔다.
일렁이는 불씨에 닿은 종이는 금세 검은 잿가루를 남기며 타들어 갔다. 손에서 떨어진 종이는 초를 받치고 있던 은쟁반 위에서 완전히 먼지가 되었다.
“선생님 말대로 저는 지켜야 할 게 많아요.”
“응. 그렇지.”
한나가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책상 위에 얹어져 있던 한나의 손 위로, 이안의 손이 덮어졌다.
“내가 지킬 것들에 선생님이 속하길 바랐어요. 어떤 것보다 가깝고, 또 중요하게.”
따스한 온기가 손등을 타고 전해졌다.
“말만으로 고맙네.”
한나의 담백한 대답에 이안은 옅게 웃었다. 무거운 마음을 전하건만, 이리도 가볍게 흘려내는 한나의 재주에 웃음이 나왔다.
“이 마음은 오래 변하지 않을 거예요.”
몇 번을 가볍게 흘려보낸다 해도.
한나의 손이 이안의 손바닥을 빠져나갔다.
“네가 지켜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황궁의 사람들도, 제국민들도. 그런 의미에서 이 한 몸 정도는 스스로 잘 지켜볼게.”
해맑게 얘기하는 한나의 말들이 따갑게 심장에 박혀 들었지만, 그는 그저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나의 말처럼, 이제 자신의 손에 담긴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무언가를 더 움켜쥘 공간이 없었다.
* * *
드디어 오늘은 황궁을 나가 신전으로 가는 날이었다. 신전에서도 인사를 할 사람들이 많았다. 신관을 포기하는 절차도 아직 남아 있었다.
덕분에 한나는 거의 오늘이 마지막으로 신관복을 입는 날이라는 생각으로 신관복을 단정히 차려입었다.
“다 챙겼나.”
그리고 남은 짐이 없는지 살피며 방문을 열었다.
“…….”
그곳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이는 제레미였다.
“제레미.”
한나는 얼른 좌우를 살폈다.
“마샤가 있을 줄 알았는데.”
“짐, 이리 줘요.”
제레미가 한나의 손에 들린 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럼. 고마워.”
한나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짐을 맡겼다.
이럴 때 부려먹는 것이야말로, 보람찬 일이지!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는 한나를 보며 제레미가 말했다.
“음, 뭐든 새로운 일을 계획할 땐 신나잖아?”
“선생님은 정말 특이한 사람인 거 알아요?”
“뭐? 이상하게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자존심이 상하는데.”
진심으로 발끈했는지 한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상하기로는 제국에서 손에 꼽힐 만한 제레미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솔직히 자신의 행보가 썩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제레미에게 이런 취급 받는 건 아니라고 생각됐다.
“행복해 보이니, 방해할 수도 없고.”
“날 방해할 생각이었어?”
한나는 놀란 눈으로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너 이제 나쁜 일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 그런 말은 없었던가.
나쁜 짓을 끝낸다는 게 아니라, 첫사랑을 끝낸다는 둥, 사람 난감하게 만드는 말만 하긴 했지만…….
의심의 눈초리가 제레미에게 향했다. 하지만 제레미는 의미 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앞으로 내 걱정은 안 하는 건가요?”
나긋한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내 걱정이 없어도 넌 충분히 바람직하게 살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한나는 뒷짐을 지고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창을 타고 들어온 햇살이 통통거리며 복도를 가로지르는 한나의 몸 위로 눈부시게 내려앉았다.
신나게 앞서가던 한나가 힐끔 돌아보며 제레미에게 말했다.
“뭐, 네가 아쉬워하는 것 같으니 가끔 한번씩은 해 볼게. 걱정 비슷한 것들.”
“조련을 잘하는 걸 보니, 양도 잘 키우겠어요.”
장난스러운 제레미의 대답에 한나는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고, 그렇게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마차로 향했다.
* * *
“허락하지.”
한나의 사직 표명에 세자르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렇게 쉽게요?”
그것도 꽤나 흔쾌히.
신전에 오면서 3번은 잡지 않을까,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강경하게 대응해야 하나, 고민하고 다짐했던 것들이 모두 쓸모없는 일이 되었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기꺼이 받아들여야지.”
세자르는 한나의 사직서를 서랍에 넣었다.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이다니……. 이건 또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이제 성력 없어졌다고 쉽게 팽하는 것인가!
한나는 아주 평온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세자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하얀 신관복에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 밑으로 푸른 눈이 나른하게 반쯤 잠겨 있었다.
“잠이 와서 대충 처리하는 건 아니죠?”
“전혀.”
세자르는 조금 따끔거리는 한나의 시선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아쉬운 건가?”
세자르가 한나에게 물었다. 한나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참나. 아쉽긴요. 사표 쓰는 날만 기다린 건 저였다고요.”
“그대가 원한다면 잠정적으로 보류해 둘 수도 있어.”
“보류요?”
“성력이 없어진다고 한번 신관이 됐던 사람을 가차 없이 내쫓을 정도로 신전이 정이 없진 않아. 거기다 성력은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세자르의 설명에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신관 중에 어느 날 성력이 사라진 케이스가 완전히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마다 쫓아내는 건 너무 비정한 일이지.
하지만 사실 한나에게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붙잡지 않는 게 조금 서운할 뻔하긴 했지만, 애초에 붙잡는다고 달라질 결정도 아니었다.
“전 제 할 일을 다한 것 같아요. 더 이상 미련도 없어요.”
“꼭 그렇게만 보이진 않는데.”
사실 한나 역시 사람인지라, 몇 해를 함께한 신전에 정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교황의 집무실로 향하면서 만난 신관들의 얼굴만 봐도 그들과 함께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한 명, 한 명, 쌓인 관계가 적지 않았다. 하다못해 신전의 복도에도 추억이 깃들어 있으니 말 다 했지.
“사실 다들 정이 많이 들긴 했지만……. 뭐, 이별이란 언제든 찾아오니까요.”
“그런데 도대체 양 치면서 살겠다는 계획은 어디서 나온 거지?”
세자르는 근본 없이 튀어나온 한나의 장래희망이 궁금해졌다.
“보통 평화로운 퇴직 생활을 생각할 때 양 치면서 사는 삶을 꿈꾸지 않나요.”
사직서를 내고 치킨집을 차리겠다거나……. 아, 요즘은 유튜버가 되겠다는 걸로 바뀌었던가.
그런 것들은 이곳엔 없으니 양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혼자 살긴 적적할 테니 뭐라도 키우려는 본능……?”
한나의 말에 세자르가 피식, 웃었다.
“비웃은 거죠.”
“아니. 전혀.”
“아닌데. 방금 완전 비웃음이었는데.”
한나는 세자르의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확신했다.
“사람 꿈을 그렇게! 막! 어? 막! 그렇게 비웃어도 되는 건가요!”
따지듯이 묻는 한나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세자르가 대답했다.
“꼭 꿈도 그대처럼 귀여워서.”
“…….”
그 대답에 한나는 잠시 얼어붙었다. 그러곤 방금 세자르가 뭐라고 했는지 다시 한번 되뇌기 시작했다.
‘귀…… 귀찮아, 귀신, 귀…… 귓밥이 쌓였네, 도 아니고 귀여워?’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귀…… 귀…… 귀여…… 귀하께서 방금 하신 말이……?”
“귀엽다고.”
“…….”
한나는 생각했다. 얼마 전 대공과의 전투에서 세자르는 어딘가를 다친 게 틀림없다.
“전투 후유증인가 봐요. 세자르 님, 정신 상담을 받아 보세요.”
“전혀 문제가 없는데.”
몸을 부르르 떠는 한나의 반응에 세자르의 입꼬리가 더욱 진하게 올라갔다.
“그날 입은 등의 상처는 어때요?”
말이 나온 김에, 한나는 그날 세자르가 다친 것이 다 치료됐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다 나았어.”
“흉이 생기진 않았나요? 성수로는 한계가 있을 텐데.”
저 하얗고 반들거리는 살결에 흉이라니, 그것도 등에 대문짝만 하게 생겼다면 꽤 죄책감이 클 것 같았다.
“확인해 보겠어?”
“네?”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인? 어떻게?
한나가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세자르는 목까지 올라온 신관복의 단추를 하나 톡 하고 풀어냈다.
“그……. 저, 지금 뭐하시는?”
한나는 그의 느릿한 동작을 멍하니 보며 물었다.
“그대 눈으로 확인해 보라고. 내 등에 상처가 있는지, 아프진 않은지, 흉은 또 예쁘게 졌는지.”
“…….”
이번엔 어이가 없었다.
툭.
두 번째 단추가 풀어지는 소리에 한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만, 그만요! 진짜로 다 풀어 헤치려고 하시네! 어디 벌건 대낮에 외간 여자 앞에서 웃통을 훌렁훌렁 까요!”
한나의 외침에 세자르는 고개를 가로 기울이며 답했다.
“그럼 밤은 괜찮다는 건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훌렁훌렁 까는 게 문제지!”
한나가 필사적으로 손을 가로젓자, 세자르는 빙긋 웃으며 다시 단추를 잠갔다.
“그대라면 언제든 확인해 봐도 좋아.”
“……아니요. 그냥 흉 좀 가지고 사세요. 훈장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그게 또 어디 가서 무용담 자랑하기에 딱 좋은……. 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한나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래서 언제 떠나는 거지?”
세자르는 단추를 다시 고정하고서 말했다.
“오늘 다른 신관님들과 간단히 인사만 하고 떠날 생각이에요. 내일 당장 농장 계약도 해야 해서요.”
“바쁜 하루가 되겠군.”
“그렇답니다. 교황 성하의 이런 농담이나 듣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나와도 작별 인사는 해야 하지 않나?”
여태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작별’이라는 말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상하게 입술이 탔다. 한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자, 세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나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내밀어지고, 한나의 흐트러진 분홍 머리카락을 쓸어 어깨 뒤로 넘겼다.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고개가 아래로 기울었다.
“먼 길을 떠날 땐 언제나 축복이 필요한 법이지.”
머리카락을 쓸고 되돌아온 그의 손이 한나의 뺨을 감쌌다. 턱을 받치는 손길에 한나의 시선이 올라갔다. 그에게 대답하려던 한나의 입술이 열리자 세자르의 눈꺼풀이 내려갔다.
“……!”
따뜻한 입술이 닿았고, 숨결이 섞였다. 까슬거리던 입술을 촉촉하고 말랑한 것이 훑고 지나갔다. 깜짝 놀라 크게 뜨였던 한나의 눈이 서서히 접혀 들었다.
숨이 뜨겁게 달아오르자 세자르의 양손이 뺨과 목을 감쌌다. 허공을 배회하던 한나의 손이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하얗고 단정한 신관복에 깊은 구김이 갔다.
꺾어질 것같이 넘어간 목이 불편할 법도 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한나는 ‘축복’의 행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렇게 무례한 축복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 * *
“너 혼자 홀랑 튀겠다고?!”
노성이 섞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핀체프였다. 그는 갑작스러운 한나의 사직 소식에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란 상태였다.
“튀다니. 이 친구, 단어 선택이 아주 상스럽구먼.”
한나는 마치 할아버지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 악마 같은 막시온 대신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니 내가 없어도 살 만하지 않겠어?”
그날의 사건 이후, 막시온은 바로 대공의 성에서 붙잡혔다. 끝끝내 저항하던 그를 처단한 이는 바로 세자르였다.
황궁의 병사들도 물린 채, 그는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행했다.
그가 정말 복수심에 막시온을 죽였는지, 혹은 막시온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다른 사건이 벌어진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복수를 끝낸 그의 기분이 한동안 좋지 않았다는 것만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핀체프는 상관을 잃었다.
“네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어.”
“뭔데?”
궁금하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한나를 향해 그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내 상관은 커티스 님이야.”
“……저런.”
어째서인지, 핀체프에게 깊은 동정심이 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커티스라니!
사실 커티스가 인간성이 나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소문난 일중독에 완벽주의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한나는 핀체프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기운 내. 언젠가 볕 뜰 날이 오겠지.”
아마 이번 생엔 그른 것 같다는 말은 꾹 참았다.
“내가 자리 잡으면 가끔 놀러와. 성공하면 직원으로 써 주던지 할게.”
한나는 핀체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무리 일이 힘들다고 하나, 그 악독한 막시온의 밑에 있었던 때보다는 행복하겠지.
“그래. 너라도 행복해라.”
핀체프가 침통한 얼굴로 답하자 한나는 껄껄 웃어 버렸다.
“여기 있었군.”
그때, 두 사람이 있던 휴게실의 문이 열리고, 유피르가 들어섰다.
“유피르 대신관님!”
“신전을 나간다면서.”
“그렇게 됐어요. 후후. 축하해 주세요. 작별 인사는 절절하지 않게 부탁드려요. 괜히 울기라도 하면 그림이 이상하다고요!”
“전혀 슬퍼할 생각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니 슬퍼야 했나 싶은걸.”
“이상하게 다들 정이 없는 것 같은데.”
한나의 말에 유피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한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아쉽지 않겠어. 너도 내겐 자식 같은데.”
별말도 아닌데 한나는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져 코를 문질렀다.
“오늘 누가 자유의 몸이 된다던데!”
“송별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유피르가 등장한 뒤로, 신관들이 줄을 이어 휴게실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방 안이 시끌시끌해졌다.
“다들 부끄럽게 뭘 이렇게 격렬히 축하를 해요. 누가 보면 여기가 수용소인 줄 알겠어.”
유쾌한 웃음이 뒤섞였고, 신관들은 한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했다.
* * *
“으아아!”
새로운 터전, 새로운 일, 새로운 하루!
신전을 떠난 지 2주가 지났다. 레미아 마을로 내려온 한나는 순조롭게 농장 계약을 마쳤다. 집을 꾸미고 다듬는 일도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항상 신관들과 공동 생활을 하던 한나는 이제 혼자서 하는 것들에 제법 익숙해지고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그걸 다 뜯어 먹으면 어떡해!”
동물을 키우는 것이 이렇게 힘든지 정말 몰랐다. 양을 세 마리 분양받아 농장에 풀어 두었는데, 울타리가 모자란 부분에 임시로 둘러 둔 밧줄이 몽땅 갉아먹혀 있었다.
“다른 걸 물어! 풀이 저렇게 많잖아!”
눈도 부리부리하고 이마에 털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이 양의 이름은 삼양이었다.
일양이, 이양이, 삼양이.
세 마리 양에게 귀여운 이름도 붙여 줬는데, 세 마리 중 특히 이 삼양이가 사고뭉치였다.
그런 삼양이가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사고를 친 것이었다.
“좀 놓아주겠니? 그렇게 잡고 늘어지면……. 으악!”
한나는 삼양이가 물고 있는 밧줄을 당겼지만 삼양이는 기어코 힘으로 한나를 이기려고 밧줄을 물고 뒷걸음질 쳤다.
결국 한나는 줄다리기를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어째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니!”
한나가 삼양이를 노려보자, 삼양이는 의기양양하게 콧방귀를 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건방지고 약이 오르는지.
“꼭 누굴 닮은 것 같기도 해.”
묘하게 말썽꾸러기 같은 모습이 제레미나 마샤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엇! 그거 가지고 가지 마!”
삼양이가 줄을 가지고 튀었다. 보란 듯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뛰어가는 모습에 한나는 황망하게 삼양이를 바라보았다.
“다른 애들 물들이지 마!”
삼양이가 일양, 이양이에게 밧줄을 가져가 함께 놀기를 청하고 있었다. 진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휴……. 울타리부터 빨리 이어야지.”
결국 한나는 밧줄은 글렀다는 걸 깨닫고, 모자란 나무 울타리를 더 세우기로 결정했다.
“옷이 엉망이 됐네.”
지난밤 내린 비 때문에 옷이 엉망이었다. 아침부터 운수가 좋지 않았다. 한나는 손에 묻은 흙부터 털어 냈다.
그런데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동산에 우두커니 있는 농장은 꽤 조용한 편이었다.
마을과 멀지는 않았으나 주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지난 며칠간 들은 소리라고는 양 울음소리가 고작이었던 한나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절로 시선이 동산의 내리막길로 향했다.
“사람들이 올라오네.”
그곳에는 사람들이 큰 수레에 나무와 흙을 싣고 떠들썩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한나는 얼른 손을 털어 낸 뒤, 그들이 오르는 길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울타리의 문을 열려고 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단히 묶어 둔 밧줄이 풀리지 않았다.
한나는 어쩔 수 없이 낑낑거리며 울타리를 타고 넘어갔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한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휴.”
무사히 착지한 한나가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분들인데, 지나가는 길인가요?”
한나의 물음에 가장 선두로 올라오고 있던 남자가 답했다.
“이곳에 건물을 짓게 됐소. 당분간 시끄러울 것 같으니 양해해 주시오.”
“여기, 농장 바로 옆에요?”
한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허허벌판에 무슨 건물을 짓는다는 거지?
“작은 신전이라 농장에 피해 가는 일은 없을 거요.”
“……예?”
인부의 대답에 한나는 순간 멍해졌다.
신전? 작은 신전? 뭐지? 이 찜찜한 기분은?
우연히도 자신이 이사 온 뒤 이곳에 신전이 생긴다고?
“아. 나와 있었군.”
그럼 그렇지. 이게 우연일 리가 없지.
한나는 익숙한 얼굴의 등장에 이마를 짚었다.
“……세자르 님이 왜 여기 계세요.”
세자르가 왜 여기 있냐고!
“그렇게 열렬히 환영해 줘서 고맙군. 앞으로 내 일터가 이곳이거든.”
어디로 보나 환영하는 모습이 아니었을 텐데.
한나는 질린 눈으로 세자르를 보았지만, 그는 뻔뻔했다.
“일터라니요. 교황 성하는 신전에 있어야죠.”
“그렇지. 그래서 짓고 있잖아.”
세자르는 열심히 자재를 나르는 인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여기 신전 말고요! 그리고 교황님은 중앙신전에 있어야죠!”
한나가 펄쩍 뛰며 말했다.
“그런 법은 없어. 교황의 거주지는 직접 정하는 거지.”
“설마, 절 따라오신 거예요?”
“아니라고 우기면, 믿어 줄 건가?”
“당연히 안 믿죠.”
한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렇게 즉흥적으로 막 결정 내리는 성격이셨어요?”
“나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내가 기거할 신전을 짓는 건데? 신전은 아무 곳에나 세워지지 않아. 축복받은 자리에만 세워지지. 이곳은 이미 전에도 신전이 있던 자리이니 마침 알맞게 선정이 된 거거든.”
이곳은 원래 레미아 신전이 있던 땅이었다. 그런고로 신전을 세울 수 있는 장소라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죠.”
어쩐지 사표를 낼 때 군말 없이 넙죽 받아 준다 싶었다. 한나는 지난날 쿨하게 보내 주던 세자르의 행동이 다 이런 날을 계획하고 있어서였던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이런 외진 곳에 혼자 자리를 잡는다는데, 안심하고 보냈을까.”
“제가 여기 오는 것도 알고 계셨어요?”
애초에 농장을 차릴 곳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그걸 세자르가 알고 있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긴 원래 신전의 땅이었어.”
“그럼 저한테 땅을 판 게…….”
“누구일 것 같아?”
세자르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나는 할 말을 잃어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그대가 이곳에 오는 걸 과연 나만 알았을까?”
세자르의 말에 한나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또 누가 안다는 말이에요?”
“두고 보면 알겠지. 또 누가 아는지.”
의미심장한 말에 한나는 불안감이 더욱 증가했다.
“그런데 신전도 지어지지 않았는데 세자르 님은 왜 벌써 오신 거예요?”
미리 와서 약 올리고 염장 지르러……?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부탁할 것이 있어.”
“부, 부탁요?”
한나는 불안한 느낌에 한발 물러섰다. 엉덩이 뒤로 울타리가 그녀를 막아섰다.
“신전이 지어질 때까지 신세 좀 지지.”
신세를 진다는 건…….
“설마, 제집요?”
세자르가 고개를 끄덕였고, 한나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서둘러 이 말도 안 되는 부탁을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안…….”
“그런데 저 양은 원래 저렇게 돌아다니는 건가?”
거절하려는 순간, 세자르가 먼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한나의 고개가 세자르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돌아갔다.
“아! 삼양이 저 녀석이 또!”
기어코 삼양이가 밧줄이 뚫린 곳을 통해 탈출한 것이었다. 삼양이는 인부들이 시끌시끌한 곳으로 신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넌 개도 아닌데 왜 사람을 반겨!”
한나는 급하게 옷자락을 손으로 잡고 삼양이를 잡으러 달려갔다.
“그럼, 여긴 내가 지키지.”
세자르는 그런 한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열심히 뛰어가던 한나는 세자르를 돌아보았다.
지금 단호하게 거절하고 돌려보내야 하는데!
하지만 한나는 멀어지는 삼양이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일단 돌아와서 다시 얘기해요! 막 집에 들어가고 그러면 안 돼요!”
단단히 주의를 준 한나는 얼른 삼양이에게 달려갔다. 그런 한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자르는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허술하게 묶인 울타리 밧줄을 풀어내고 울타리 문을 열었다.
“이렇게 허술해서야.”
조금 더 빨리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세자르는 꼭 붙어서 밧줄을 오물거리는 두 마리 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소스는 이게 다인가?”
세자르는 부엌의 찬장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상당히 뻔뻔하시네요.”
식탁에 앉아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한나가 입을 열었다.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라고. 이 밤에 돌아가는 건 위험하잖아.”
“그러게 해 지기 전에 돌아가셨어야죠.”
“그대가 해가 질 때까지 양 하나 못 잡아서 고전할 줄은 몰랐지.”
“…….”
한나는 할 말이 없었다. 삼양이를 잡느라 온 동산을 뛰어다닌 그녀였다. 어찌나 도망을 잘 치는지 다시 생각해도 치가 떨렸다.
심지어 삼양이는 일부러 놀리는 것처럼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콧김을 내뿜기도 했다.
“분명 그 녀석은 양이 아니에요. 안에 사람이 탈을 쓰고 있을지도 몰라.”
“울타리는 빨리 손봐야겠던데.”
“그러니까요. 오늘 보수하려고 했는데, 하필 삼양이가……. 후, 전 아무래도 양 키우는 데 소질이 없나 봐요.”
한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세자르는 원하는 소스를 찾아 식탁으로 가져왔다. 이미 식탁에는 그가 만든 달걀 요리와 샐러드, 살짝 데운 빵과 고기가 자리해 있었다.
“그런데, 세자르 님은 왜 그렇게 이 집에 익숙해 보이죠.”
마치 제집처럼, 그것도 주인인 자신을 손님 대하듯 편하게 음식을 내어 주다니!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지.”
세자르는 온기가 가득한 한나의 집을 둘러보았다. 그녀를 닮아 소담하고 포근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마음에 들어.”
“잠깐, 잠깐! 세자르 님 마음에 들 필요는 없는데!”
“우선 밥부터 먹지.”
한나는 새삼, ‘밥부터 먹자.’는 말이 마법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포크를 들고 있던 탓이었다. 입으로 포근하게 데워진 오믈렛이 쏙 하고 들어갔다. 맛이 제법 괜찮아 조금 놀랐다.
“흠.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재워드리지만, 내일은 꼭 돌아가시는 거예요. 무슨 생각으로 여길 혼자 왔어요. 커티스 님, 모이세이 님은 그걸 가만 보고 있던가요.”
양 볼에 음식을 가득 담고도 말을 잘하는 한나를 세자르는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괜히 신전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중앙신전으로 돌아가요.”
세자르는 한나의 앞으로 물잔을 밀어 주었다. 한나는 자연스럽게 그 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하여튼 나는 정이 많아서 탈이야.”
투덜거리면서도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키는 한나를 보며 세자르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밥상에서 턱 괴고 뭐하세요. 얼른 드세요.”
세자르에겐 모처럼 달가운 저녁 식사였다.
* * *
타닥타닥.
모닥불이 잔 불꽃을 일으키며 타고 있었다. 소화도 시킬 겸, 밤중에 사고는 치지 않는지 양들도 살필 겸, 농장 마당에 모닥불을 피웠는데 꽤나 운치 있는 밤이 되었다.
불 앞에 마주 앉은 한나와 세자르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오늘 하루를 정리 중이었다.
“해가 뜨면 돌아가요.”
한나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부탁을 하고 있었다. 자꾸만 미꾸라지처럼 화제를 돌리는 세자르 때문에 여태 그러겠다는 확답을 못 받았기 때문이었다.
세자르는 불편할 법도 한 조잡하게 마무리된 나무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 있었다. 손에 들린 잔을 매만지며 그가 한나의 말에 답했다.
“왜 그렇게 날 보내지 못해 안달이지?”
“여긴 세자르 님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한나가 세자르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그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리 쉽게 보낼 때부터 이런 날을 염두에 뒀겠다는 생각도.
“제가 갑자기 제도를 떠나온 이유, 묻지 않으세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세자르의 대답에 한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한나는 이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고, 이제는 자신이 떠나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털어놓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결심은 별이 수놓은 밤과, 모닥불이 만들어 낸 감성적인 마음이 변덕을 부린 탓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어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가 조용히 시작됐다.
“비밀?”
“저는 이곳에 존재해선 안 될 사람이에요.”
“그걸 누가 정하지?”
조금 풀 죽은 한나의 모습에 세자르는 의아해졌다.
“제 성력이 사라진 것도 어쩌면 제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성력이 사라지는 신관은 종종 있어. 그대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나 역시 언제 그럴지 모르는 일이지.”
“그런 것과는 달라요. 저는 점점 두려워지고 있어요.”
한나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다. 등받침에 늘어져 있던 세자르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어떤 게 그댈 두렵게 하지.”
“어쩌면 내가 퇴장해야 할 때가 다가온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두려움요.”
한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돌연 제도를 떠난 것은 정말 아이들의 미래가 바뀌었으니, 속 시원히 걱정 없이 살자! 하는 마음만으로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원작에서 한나라는 인물은 아마 이맘때쯤 죽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미래가 변했다고, 이 몸의 운명도 바뀌었을까?
성력이 사라진 순간, 어딘지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정말로 누군가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 자신을 이 세계로 불러들인 거라면, 할 일을 다 한 지금, 이 몸의 효용가치는 사라진 게 아닐까.
혹은 원작의 수명대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면?
내지는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던 예상과 달리 현실의 몸은 여전히 살아 있다면?
혹시 이 몸의 주인이었던 영혼이 돌아온다면?
아이들의 일이 잘 풀린 이후에는 자신에 대한 걱정이 일었다.
그리고 만약, 어느 날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돌아와서 모두를 알아보지 못한다거나, 정해진 수명에 따라 죽게 된다면…….
주위 사람들은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그래서 부러 제도를 떠난 것이었다.
물론 아무 일 없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면 그만큼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세자르 님은 운명을 믿으세요? 정해진 미래나 정해진 수명, 뭐 그런 거.”
사실 이런 비슷한 질문은 아주 오래전 그의 입으로 답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신관이 되는 것을 신의 뜻이라고 말했었다.
신을 믿는 세자르라면 당연히 신이 만들어 둔 운명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까.
한나는 괜히 나뭇가지를 들어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세자르의 고민이 길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답은 빠르게 나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야.”
“뭔가요.”
순간 한나의 입가에서 웃음이 흘렀다.
세자르라면 그렇다고 답할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런 고민을 하는 건 귀찮다며 대충 답할 것 같기도 한 것이 대답을 기다리는 게 재미있었다.
“그대를 두렵게 할 답은 아니라는 거.”
“……음. 꽤 잘 빠져나가시네요.”
“그대의 답은?”
세자르가 되물었다.
“신이 한가한가요.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정해요.”
그리고 미래를 한번 바꿔 본 입장으로써, 당연히 정해진 운명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불안해하는 거지.”
“저만의 고민이랍니다.”
한나가 싱긋 웃었다.
수명은 또 다른 얘기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이 세계의 운명에 없었어야 할 불순분자이니.
“전생이나 환생, 그런 건 믿으세요?”
“그대가 믿는다면.”
“막 영혼이 바뀌는 건요?”
“그대가 있다면 있겠지.”
“아니, 제가 무슨 성서도 아니고 뭘 자꾸 저를 믿어요.”
한나는 이 사람이 지금, 생각하기 귀찮아서 대충 대답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아무 생각이 없는 거다! 분명해!
“난 그대가 신이 없다고 해도 믿어.”
“와……. 지금, 그 말 신도들이 들으면 기절할 발언이라는 거 알죠?”
한나는 정말 못 말린다며, 모닥불을 뒤집던 나뭇가지를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냥 저 불안하지 말라고 해 주는 말인 거 알아요.”
“진심을 왜곡하고 있는데?”
한나는 세자르의 대답을 한 귀로 흘렸다. 혼자만의 감동을 계속 이어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든든한 기분이네요.”
오늘 같은 날 혼자였다면, 우울한 생각이 더 많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디 가서는 그렇게 말하지 마요. 정말 교황 자리 잘릴지도 몰라요.”
한나는 괜히 쑥스러운 기분에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교황을 그만두면 되지.”
“미쳤어요?”
너무 간단하게 답하는 세자르의 모습에 한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신앙심이라고는 쥐뿔도 없어 보이지 않은가!
“나에겐 신을 부정하는 것보다 그대를 부정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야.”
“나 원 참…….”
한나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구나.
자신이 아직까지도 세자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만사 귀찮다는 얼굴로 아무것에도 큰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세자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닌데.”
“그러게요.”
너무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 무거운 감정을 머금은 눈으로 바라보는데 어찌 농담이나 쉬운 말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이렇게 선명한 감정을 전하는 건 진심이 담기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마치 동물이나 어린아이들이 전하는 사랑을 가득 담은 눈망울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계산도 목적도 없이 오롯이 사랑을 전하는 순수한 감정 말이다.
“전 겁이 났어요. 영원히 이 세계의 사람도 아닌, 그렇다고 어디에 속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로 사라지게 될까 봐.”
“내가 이렇게 그댈 잡고 있잖아.”
한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세자르에게 자신이 책 속에 빙의된 사람이라거나, 다른 세계의 존재라는 걸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세자르는 어떤 이유에서든 상관없다는 듯, 자신을 단단히 잡아 주고 있었다. 몸의 어느 한 곳을 잡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세자르는 정말로 자신이 이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단단히 잡아 주지 않을까?
그는 자신이 한 말은 모두 지키는 사람이니까.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면요?”
“찾을게.”
“내가……. 이 모습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다면요.”
“그래도 찾을게.”
“정말 멀리 사라져도요?”
“그대에게 맹세하지.”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보통 신에게 맹세하지 않나요?”
“말했잖아. 나에겐 신보다 그대가 조금 더 중요한 존재라고.”
말장난 같은 그 말에도 이상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
“그냥 하나만 약속해 줘요.”
“그러지.”
아직 부탁은 하지도 않았는데 긍정의 대답이 먼저 나오면 어쩌자는 건지.
앞서가는 세자르를 정상적인 대화의 흐름으로 끌어들이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일단 듣고 답하시라구요.”
“내 대답은 같을 텐데?”
“그래도 듣고 답해요.”
단호한 한나의 말에 세자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내가 다른 사람이 된다면, 꼭 알아봐 줘요.”
언제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지만, 외로웠다. 누구도 자신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었었다.
혼자 고립된 채로, 불안감을 가슴 가장 깊은 곳에 감추고, 그렇게 지내왔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 세계에서 제 영혼이 사라진다면?
아무도 자신이 사라진 걸 알지 못하고, 또 기억해 주지 못한다면 조금 슬프지 않을까.
“…….”
“너무 오래는 찾지 말고, 그냥 조금 그리워하고, 생각하다 잊어 줘요.”
조금 숙여진 한나의 시선은 여전히 모닥불 속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나 지금, 당신에게 몹쓸 요구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언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는 이방인인 자신이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정말 파렴치하다. 그래서 세자르의 마음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고 있음을 알아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그 작은 불안감, 고작 그 하나 때문에.
자신이 사라진다면 상처받을 누군가가 생기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강한 마음을 가진 세자르라면 스스로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지 않을까?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해도, 혹은 그저 합리화에 불가하다고 해도, 욕심을 부려 보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이 정말 이기적이라는 걸 알지만…….”
튀는 불씨에 머물던 한나의 시선이 세자르에게 향했다.
“그래도 더 이상 외면하고 싶지 않아요.”
큰 결심을 했다.
“세자르 님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묻어 버리려 했던 마음을 전하자고.
“그것도 꽤, 오래전부터.”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할 거라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이나 해 보고 후회하자고.
“당신이 가진 감정이 저와 같나요?”
질문은 던져졌지만, 둘 사이의 침묵이 길어졌다. 세자르는 마치 한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한동안 멍했다.
“난 당신을 이용하려는 것인지도 몰라요. 내가 불안하지 않게 꽉 잡아 달라고. 이런 불순한 마음이라도, 괜찮을까요?”
한나의 금빛 눈동자에 비친 불꽃이 흔들렸다. 넋 놓고 한나를 바라보고 있던 세자르의 입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그거면 충분하지.”
세자르는 두 손을 올려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긴장이 허물어진 것처럼, 식었던 피가 다시 도는 기분이었다.
“아주 충분해.”
여전히 모닥불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은 한 걸음만큼의 거리가 있었지만, 시선이 섞이는 것만으로도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닿아 있는 것 같았다.
한나는 이상하게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그러다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흘렀다.
속이 후련했다.
* * *
혼자 있는 동안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일까?
단순한 충동이었을까.
앞으로도 혼자 삼키며, 고여 있을 줄 알았던 감정의 댐이 무너져 툭 터져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강하게 마음을 다잡아도, 결국 사람은 한없이 약한 존재이고, 또 감정을 막아 두는 것은 한계가 있다.
혼자 터져 쏟아 내는 것보다는 감정이 향하는 길로 흘러가는 것이 좋은 거겠지.
“아. 아무리 그래도 그런 뜬금없는 고백은 영 별로였어.”
한나는 지난밤의 일을 살짝 후회하고 있었다. 다른 것보다, 겨우 고백을 해 놓고 그 뒤에 바로 울어 버렸다는 것이 심히 창피했다.
“무슨 사연 있는 사람처럼 울었다고.”
한나는 이른 아침부터 침대의 이불을 있는 대로 끌어안고 구르고 있었다. 방을 나서면 어제 그 추태를 보였던 세자르가 있었다.
팡팡팡.
베개도 한껏 때린 뒤, 겨우 마음을 추슬렀다.
“아무렇지 않게. 아주 평범하게 인사하는 거야. 그래. 고백 좀 했어. 그게 왜? 아니, 사람이 말하다 보면 감정도 격해지고, 좀 막 눈물도 날 수 있고 그런 거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이라고 몇 번이나 자기 최면을 건 뒤, 한나는 겨우 침대에서 발을 뗄 수 있었다.
“흠흠.”
그래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문밖에 세자르가 있다는 이유로 괜히 엉킨 머리카락을 정리한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사람이 있다고 머리를 신경 썼던가.
신전에서는 세수도 안 하고 눈곱이 낀 채로 활보하고 다녔던 한나에게 이런 모습은 스스로도 어색한 모습이었다.
괜히 이런 모습이 낯간지러워진 한나는 손으로 머리를 빗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흔들었다.
‘평소처럼. 그냥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하지만 정말 평소와 같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세자르는 언제 일어났는지, 아주 말끔한 모습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깨끗한 얼굴과 머리, 심지어 옷도 신전에서처럼 단정하게 입은 모습이었다.
“언제 일어나신 거예요?”
“그것보단 잠은 잤냐고 묻는 게 더 알맞은 질문이야.”
“안 잤어요?”
한나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잠자리를 가리나?
아, 이건 말이 안 되지. 길바닥에서도 잘만 자는 위인인데.
“그런 고백을 듣고서도 잠이 올까.”
“아니…….”
잠깐.
그럼 어젯밤 딥슬립을 했던 자신은 뭐가 되는 거지.
그런 고백을 해 놓고 잠만 잘 자는 사람?
“흠. 그렇죠. 잠이 안 오죠.”
한나는 괜히 감성이 제로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급하게 답했다.
“그댄 잘 자던데.”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설마 자는 사이에 몰래 문이라도 열어 본 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방에 들어가자마자 코 고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많이?”
“많이.”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었다.
“삼양이 잡으러 다니느라 많이 피곤…… 했거든요.”
괜히 시선이 먼 허공으로 옮겨졌다. 그러는 사이 세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나에게 다가왔다. 한나는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침부터 반짝반짝 빛이 나는 누구와 달리 아주 자연인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난 그런 그대의 성격이 좋아.”
세자르가 한나의 엉킨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었다. 갈라진 손가락 틈 사이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제가 정리할게요.”
한나는 이 어색한 기류를 견디지 못하고 세자르의 손을 떼어 내며 제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훔쳤다.
“그래서, 오늘 우리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 우리…… 요?”
한나는 손가락으로 자신과 세자르를 번갈아 가리켰다. 고백 좀 했기로서니 막 ‘우리’로 묶이는 건가.
“연인끼리 어떤 걸 하더라.”
“예? 아니, 방금 뭐라고…….”
“연인?”
“…….”
한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연인’이라는 말이 썩 틀린 말은 아닌데…….
“진짜 이상해…….”
괜히 얼굴이 빨개지고 난리냐고! 한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말로 세자르와 ‘연인’이 되다니!
“난 그대와 하고 싶은 게 많아.”
“아니. 잠깐만요! 좀 천천히 해요! 천천히!”
이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꽁냥꽁냥 그런 상황이냐고.
“그런 대사는 어젯밤 참지 못하고 저 문을 열었을 때나 어울리는 말 같은데.”
“허. 그런 생각 했어요?”
한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세자르를 올려다보았다.
“뭐. 상상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세자르가 여전히 제 뺨을 감싸고 있는 한나의 손을 잡아 치워 냈다. 한나의 양손이 세자르의 손에 잡혀 버렸다.
쪽.
여전히 붉게 물든 뺨에 세자르의 입술이 스쳤다. 한나의 눈이 크게 부풀었다.
“이 정도에도 놀란 토끼 눈인데, 까마득하지.”
세자르는 옅은 웃음과 함께 한나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풀어냈다. 그러곤 신관복 목깃을 다듬으며 문으로 향했다.
“신전 건축 인부들을 만나고 올 테니, 차라도 한잔 마시고 있어.”
한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르는 이 공간에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꼭 출근하는 이 집주인 같기도 한 것이…….
“참, 적응력도 뛰어나지.”
한나는 머리를 긁으며 창가로 향했다. 오늘은 세 마리 양들이 잘 있는지 살짝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음. 다행히 밤새 탈출은 안 했네.”
양 세 마리가 오손도손 볏짚 위에 붙어 있었다. 얼른 나가서 울타리 보수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음? 그런데 저건 뭐지.”
한나는 눈을 비볐다. 뭔가 이상하게 보여서였다.
“내가 드디어 노안이 시작된 건가.”
이상하게 끝없이 초록 들판이 펼쳐져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하지만 눈을 아무리 비벼도 빨간 건물 벽이 사라지질 않았다. 창문에 얼굴을 딱 붙이고 봐도, 여전히 빨간 벽이 존재했다.
“저게 뭐야!”
한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대로 문밖으로 달렸다.
* * *
“아니……. 아니! 아니!”
세상에 건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면 믿겠는가?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분명 어제 늦은 밤까지 반짝이는 별을 보던 하늘이 웬 놈의 지붕에 떡하니 가려져 있었다.
혹시나 신전이 하루아침에 뚝딱 지어졌나 싶어 옆을 보았는데, 신전을 짓기 위해 자재를 쌓아 둔 곳은 이 건물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었다.
한나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이 왜 하루아침에 생긴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으리으리하기까지 해…….”
자신의 소박한 농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려함이었다.
꼭 커다란 황궁의 궁 하나를 똑 떼다가 놓은 것처럼…….
“……에이, 설마.”
아무렴 황궁 하나가 날아서 여기를 왔겠어…….
―라고 생각하던 한나는 갑자기 얼굴이 굳었다.
“오! 선생님!”
익숙한 빨간 머리.
그리고 그 뒤로 손을 흔드는 금빛 머리카락의 주인은…….
“마샤, 이안……. 너희가 왜 여기에……?”
한나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에 이안은 간단하게 답했다.
“제 별장이에요.”
“…….”
별장이라 함은, 그 돈 많은 귀족들이 가끔 쉬러 가기 위해 지어 놓은 집?
“아니, 네 별장이 왜 여기에……. 그것도 하루아침에…….”
“여긴 제 고향 같은 곳이니, 황제의 별장을 만들기엔 안성맞춤이죠.”
“……그럼 어떻게 하루아침에 생긴 건지…… 는 말 안 해도 알겠다.”
들을 필요가 없었다. 이안의 옆에서 마샤가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듯이 눈을 빛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나는 이마를 짚었다. 어째, 익숙한 얼굴을 볼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은 기분인데.
“아니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별장을 지었어?”
도대체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선생님 혼자 이런 위험한 곳에 둘 수 없잖아요. 별장이 생기면 별장을 호위하는 경비병들이 상주할 거예요. 그럼 덩달아 이곳의 안전도 걱정할 필요 없겠죠.”
“……차라리 내 집을 보호하지 그랬니.”
“그러면 싫어할 거잖아요.”
이안이 다 안다는 듯 웃었다.
“혹시 이 별장이 생기면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
한나는 억지 미소를 띠며 물었다.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요.”
이안 또한 웃으며 답했는데, 한나는 그의 이런 미소가 아주 가증스러웠다. 머리 좋은 이안이 그 정도도 눈치가 없었을 리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마샤 때문에 더욱 약이 올랐다.
“마샤 너라도 말렸어야지.”
“하하. 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아 참, 선생님.”
“왜.”
“전 선생님 농장에 취직하러 온 거예요. 일전에 한 약속 잊지 않았죠?”
“약속?”
한나는 과거의 자신의 발언들을 곰곰이 떠올렸다. 이를테면, ‘양이나 키우며 살 생각 있으면 와!’ 같은 말을 했던 과거를 말이다.
“……너 그걸 진짜…….”
“진짜로 지키러 온 건데요.”
“재능 낭비야.”
그리고 이제 넌 제도에 있어도 된단 말이다!
한나는 속이 답답했다.
“그러지 말고 일 잘하는 마법사 하나 거둬 줘요.”
마샤가 한나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매달렸다.
“고작 양이라고는 세 마리 키우는데 직원은 무슨 직원이야!”
한나는 아직도 볏짚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양을 가리켰다. 양들이 세 사람을 빤히 보고 있었다.
“쟤들은 왜 꼭 말 알아듣는 사람처럼 저렇게 지켜보고 있지?”
“지금 양에게 화풀이하는 거예요?”
마샤가 조금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
“와. 저 양은 꼭 제레미를 닮았네. 눈매가 부리부리한 것이…….”
마샤가 삼양이를 콕 집어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날 닮았다고?”
그리고 그 순간,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인가 싶어 뒤를 돌아본 한나는 정말 뒷골이 당겨 왔다.
“넌 또 왜 여기 있는데!”
제레미가 웃으며 농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저만 빠지기에는 아쉬운 자리 같은데요?”
제레미가 이안과 마샤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너희 놀러온 거니……?”
그냥 차라리 잠시 놀러온 거라고 말해 줬으면.
“전 정말 취직하러 온 건데요.”
“선생님이 이 험한 세상에 양털이나 제대로 거래할까 싶어 도우러 왔죠.”
마샤와 제레미가 각각 말했고,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별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
이래서야, 제도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한나는 잠시 어디서부터 계획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게 정말 현실이 맞는지 한차례 더 별장과 아이들을 둘러본 한나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그런 한나에게 조용히 다가온 이가 있었으니.
“이게 다 누구야.”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세자르가 한나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의 다정한 손길에 세 사람의 시선이 따갑게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동시에, 그런 살가운 기류의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한나에게도 그들의 눈길이 스치고 지나갔다.
“반갑지 않은 얼굴들이 모여 있군.”
세 사람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그중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마샤였다.
“뭐죠. 이 분위기? 상당히 기분이 껄끄러운데.”
마샤는 한나와 세자르의 코앞까지 다가와 세자르의 손을 바로 앞에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자연스럽게 얹어진 손은 뭘까?”
마샤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하며, 그의 금빛 눈동자가 촘촘히 빛났다.
“그런데 교황님은 언제 여기 오셨어요?”
마샤는 자신보다 한발 빨리 자리를 꿰어 차고 있는 세자르에게 불퉁한 어투로 물었다. 하지만 답을 한 건 세자르가 아니라 이안이었다.
“교황직을 아예 그만두신 건 아닌가 봅니다.”
이안이 그의 신관복을 보며 말했다. 그에 세자르가 답했다.
“뭐, 이게 벗는다고 해서 쉽게 벗어지고 그런 게 아니더라고.”
그 말을 들은 한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세자르 님, 설마 신전에 옷 벗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관둔다고?”
그런 한나의 눈을 피하며 세자르가 대답했다.
“뭐……. 비슷하게?”
“아니! 이 사람이!”
깜짝 놀란 한나가 펄쩍 뛰며 말했다. 그가 교황직도 내놓을 수 있다고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정말 미치셨어요?”
한나가 세자르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혹시 세자르가 커티스나 모이세이에게 교황직을 그만두겠다는 이유로 자신을 따라가기 위해서라고 말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동시에 창피함이 몰려왔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냐고!’
그렇다고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 왜 그랬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왜 말 안 했어요?”
“결과적으로 그만두진 못했으니까? 내가 하는 일은 없어도 신전의 홍보에는 기여하는 바가 많은 모양이라.”
영웅이라 불리는 세자르가 교황의 자리에 있는 것은 신전에게 아주 큰 홍보 효과가 있다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기에 세자르의 사직은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문제였다.
그 때문에 그는 여태 중앙 신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쓰는 업무는 커티스에게 일임하고 명예 교황이나 다를 바가 없는 애매한 신분으로 남은 것이었다.
“하는 일이 없다는 걸 웃어야 할지, 커티스 님이 불쌍해서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한나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이안이 뒤늦게 못다 한 말을 이었다.
“원래 그런 자리에 관심도 없는 분이니.”
이안은 이런 세자르의 성격이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천적으로 욕심이 없는 것인지, 혹은 애착이 없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가 그것들을 하찮게 만들 만큼 소중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온 것일 테고.
어떤 이유에서든, 세자르의 행보는 이안에겐 놀라운 일이었다.
실제로, 신전과 관련된 보고를 받고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빠졌었던 이안이었다.
“결국 답은 이곳이었네요.”
이안은 그리웠던 언덕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혹시 이곳으로 더 빨리 달려왔다면 지금 상황과 달라질 것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옅은 웃음과 함께 부질없는 생각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애초에 제 손에 쥔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사람과 자신은 게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제레미와 마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거 한 방 먹었네.”
마샤는 푸스스 웃으며, 세자르의 손을 툭 건드려 치워 냈다. 그러곤 한나의 팔에 팔짱을 꼈다.
맞지 않는 팔의 높이에 그는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여야 했지만, 찰싹 달라붙은 모양새가 어색하지 않았다.
“이렇게 멀뚱거리면서 서 있지 말고 농장 구경이나 시켜 줘요.”
하지만 이렇게 마샤가 양으로 관심사를 돌린 것은 한나에겐 반가운 일이었다. 여기서 주절주절 어깨에 올라간 손에 대해 어젯밤 일을 설명해야 하는 건 몹시 낯간지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키우는 건 양뿐이에요?”
마샤는 옹기종기 귀엽게 모여 있는 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은 종종걸음으로 양들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제레미는 언짢은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세자르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세자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 눈빛으로 보면 얼굴에 구멍 뚫리겠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제레미가 냉랭한 어투로 답했고, 세자르는 슬그머니 뒷짐을 진 채 원래 향하려던 신전 공사장으로 발길을 뗐다.
눈치껏 이 가시방석을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자르까지 자리를 뜨자 이안이 제레미에게 말했다.
“바로 돌아갈 건 아닌 것 같은데, 묵을 곳은?”
“마을에 준비했습니다만.”
제레미가 다소 쌀쌀맞은 어투로 답했다.
“이렇게 된 거, 마음 아픈 사람들끼리 함께 밤을 보내는 건 어때?”
이안이 별장을 눈짓하며 말했고, 그에 제레미의 시선이 으리으리한 별장으로 향했다.
보육원이 있던 자리에서 셋이 함께 보내는 밤이라.
제레미는 이안이 어떤 의도로 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정도는 그날로 돌아간 기분을 만끽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루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결국 제레미 역시 그리운 향수에 같이 발을 담그기로 결정했다. 멀리, 한나와 마샤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깔깔거리면서 양을 보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 순간 제레미의 눈에는 해맑게 웃는 마샤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드레스를 나풀거리던 마샤의 모습이 겹쳐졌다.
“저렇게 순수하게 감정을 내보일 수 있는 존재는 선생님밖에 없겠지. 마샤도, 그리고 우리도.”
마침 이안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마샤와 한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 중에 제대로 된 부모가 있는 사람도 없으니, 그런 존재가 없을 수밖에.”
이제 이들이 가족에게 하듯이 허물없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한나 하나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릴 적의 해맑았던 아이들은 이제 사람을 믿지 않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마음의 빗장은 선택받은 몇에게만 열려 있다.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란 이들에게 그 범주 안에 사람을 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오로지 믿음으로 해낸 이가 한나였다. 멍하니 한나를 바라보던 제레미가 조용히 읊조렸다.
“……포기라는 거, 쉬울까.”
그의 말에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내 평온하던 일상이…….”
한나는 아이들을 만난 지 2시간도 안 되어 기운이 쭉 빠져 집으로 피신하게 됐다.
마샤야 원래 성격이 삽살개처럼 엉겨붙는 경향이 있어 가끔 사람을 지치게 했지만, 오늘은 제레미와 이안도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마샤와 함께 졸졸 붙어 다녀 피로도가 곱하기 3배였다.
제레미는 주로 농장의 시설이 부족한 부분을 계속 지적했고, 이안은 말없이 웃고만 있으면서도 특유의 황제 아우라가 존재 자체만으로 사람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특히 한나는 그의 호위 기사들이 풀숲과 나무 뒤에서 어찌나 저를 뚫어져라 보는지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겨우겨우 좋은 별장에서 휴식이나 취하라며 그들을 돌려보낸 후, 도피하듯 집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갑자기 10년은 늙은 기분이야.”
제도를 떠나오고, 또 잠시 혼자 있는 시간 동안은 그렇게도 정적으로 흘러가던 시간이, 세 사람이 더해지니 시끌벅적하게 흘러갔다.
힘든 일이 한차례 지나가서인지, 아니면 보육원이 있던 동산에 있다는 것 때문인지 이상하게 오늘의 그들은 유독 느낌이 과거 어린 시절 같았다.
“황궁에서 보면 다들 조금씩 이상한데 말이야.”
한나는 평소 쉬면서 차를 마실 때 이용하던 테이블로 향했다. 나른한 햇살이 창을 통과했다.
몸이 금방 녹아내렸다. 한나는 나른한 기분에 테이블 위로 스르륵 몸을 엎드렸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네.”
아주 잠깐은 갑자기 찾아와서 자신을 난감하게 만드는 그들이 애물단지 같기도 했지만, 막상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더불어 이제는 자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스스로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나만 걱정하면 된다니까. 정말…….”
이렇게 말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생기는 걸 보니, 정말 그들에게 지독히도 정을 준 모양이다.
톡톡.
기분 좋게 눈꺼풀이 내려앉으려던 그때,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한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조금 놀라 눈을 끔뻑이던 한나가 스르륵 손을 뻗어 창문의 잠금장치 고리를 돌렸다.
고리가 돌아가자 세자르는 창문을 열었다. 환하게 열린 창문 사이로 조금 따뜻해진 공기가 밀려들었다.
‘봄이 오려나.’
따스한 공기, 햇살, 초록 잎, 거기에 보통 사람들보다 한 템포 느긋한 세자르의 모습까지.
이상하게 눈에 담긴 한 장면이 봄을 연상시켰다.
“일은 다 본 거예요?”
한나는 고개를 일으킬 생각도 없이 비스듬한 자세 그대로 세자르에게 물었다.
“내가 할 일은 그다지 없어서. 난 또 여기서 한량이지.”
창문 틀에 세자르가 몸을 기댔다. 그의 몸이 절묘하게 따가운 햇살을 가렸다. 한나는 해를 등져서 그늘진 세자르의 옆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밝은 곳에 있으면 빛이 나고, 그늘이 지면 꼭 그림자처럼 차분하게 녹아드는 이 사람.
그는 꼭 물이나 바람 같은, 사람이 아닌 자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자르 님은 참 신기해요.”
사실 한나는 잠이 와서 비몽사몽인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의식의 흐름대로 말이 나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나 말고도, 누구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 않나?”
“이렇게 맞는 말만 해서 얄밉기도 한데…….”
“싫어하지는 말아 줘.”
세자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미워할 구석은 없고.”
거의 무의식이긴 하지만, 스스로가 하는 말이 어이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챘는지 한나가 세자르를 따라 웃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도움은 되고……. 지인짜……. 이상한 사람이야.”
그런 한나의 잠꼬대를 세자르는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스르륵, 한나의 긴 속눈썹이 휘청거리며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세자르는 한참 동안 자신의 그림자가 내려앉은 한나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일상이 불안하다고 말하던 사람이, 태평스러운 낮잠을 자는 모습이 썩 달가웠다.
밤새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했던 세자르는 답을 찾지 못했었는데, 일단은 그냥 이렇게 따가운 해를 막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자르의 상체가 창을 넘어 한나에게로 기울었다. 그의 입술이 하얗고 동그란 한나의 이마에 닿았다. 그는 그녀에게 잠깐 들렀다가는 꿈에도 축복이 깃들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다시 몸을 일으킨 세자르는 하릴없이 평화로운 농장과 양들을 구경하며 어느 때보다 값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날이 너무도 좋았고, 곁에 있어서 행복한 오후였다.
* * *
한바탕 소란한 꿈을 꾼 것 같다.
무거운 눈을 뜨자, 창밖이 늦은 오후의 온기로 물들어 있었다.
“얼마나 잔 거야.”
성력이 사라진 뒤로는 아무 곳에서나 자는 버릇을 완전히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졸음이 오면 잠자리를 가리지 않는 건 여전했다.
“으어아아.”
한나는 요란하게 기지개를 켰다. 문득 잠들기 전 상황이 생각이 나 서둘러 창문 밖을 살폈다.
“어……. 꿈이었나.”
세자르와 대화를 나눈 것 같았는데, 까무룩 잠이 들어 버리는 바람에 그를 본 것이 꼭 꿈같았다. 한나는 조금 불편했던 목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하게 조용한 이 상황이 거슬렸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평생 이렇게 단조롭고 고요한 일상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들을 다시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소란스러움에 몸이 적응해 버렸다.
몹시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한나는 양들을 핑계 삼아,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 염탐할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짹짹. 메에― 새는 지저귀고 양은 뒹굴거렸다. 지나치게 평화로운 기류. 이럴 때면 불안하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사건이 시작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니까.
“선생님!”
그리고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하는 순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라니.
한나는 이상하게 설레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너희가 무슨 사고를 어떻게 쳤는지 보자!
이런 생각은 거의 직업병 같은 건가?
한나가 자신을 부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황제의 으리으리한 별장 앞마당이 소란했다.
“너희 뭐하니?”
한나는 옆집과 분리된 울타리 안에서 마샤에게 물었다.
“모처럼 여기서 모였는데, 파티해야죠.”
“응?”
모름지기 파티라고 하면, 그것도 황제의 별장 앞마당 파티라면, 주렁주렁 장식도 달고 호화스러운 음식도 차려 놓고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데…….
“통구이?”
이 소박한 스케일의 장작과 통구이라니.
“제레미가 앉기 좋은 통나무도 구해 왔어요.”
“너희 취향도 참…….”
한나는 문득 이 언덕에 이런 통구이를 하는 모습이 과거의 날들과 겹쳐졌다. 아이들이 어릴 때 언덕에서 고기를 구우면, 그야말로 성대한 파티 같았는데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대의 물이 덜 빠졌던 한나는 언덕에서 캠핑을 온 기분을 만끽하는 것이 아주 좋았다.
낭만 그 자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 세계 물을 먹을 만큼 먹지 않았는가?
“다음엔 차라리 출장 뷔페로 부탁해.”
한나의 말에 마샤가 크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울타리 너머로 마샤의 손이 건네지자 한나는 그 손을 잡고 지지해 울타리를 폴짝 넘었다.
이안은 평소 궁에서 있던 모습과 달리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얀 정복 대신 갈색의 튜닉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편해 보이는지 10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느낌이었다.
한나가 통구이의 불을 보고 있는 이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고기야?”
이안은 한나를 부드러운 미소로 반기며 답했다.
“양고기요.”
“양……?”
하필 많은 고기 중에 양……?
“여기 있는 게, 양밖에 없더라고요.”
그의 말에 한나의 동공이 부풀었다.
“뭐, 무슨, 뭐어?!”
깜짝 놀란 한나의 고개가 농장으로 휙 하고 돌아갔다. 귀여운 일양이, 이양이, 삼양이가 무사한지 확인한 것이었다.
“하하하. 선생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마샤는 그 모습을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 한나는 양 세 마리가 아주 멀쩡히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즉시 이안을 보았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가 있었다. 저를 놀린 것이었다.
“하……. 놀랐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안이 하면 농담이 농담 같지 않았다.
“넌 앞으로 그런 농담 금지야.”
한나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평범한 고기니까 걱정 마요.”
이안의 말이 끝나자 쿵 소리와 함께 장작불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통나무가 놓였다. 큰 소리에 놀라 통나무를 본 한나가 깜짝 놀라 제레미에게 말했다.
“이걸 맨손으로 들고 왔어?”
사람 몸통만 한 나무를 번쩍번쩍 드는 제레미의 모습이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앉아요.”
제레미가 한나에게 먼저 자리를 권했고, 한나는 얼떨결에 통나무 한쪽에 앉았다. 한나의 엉덩이가 통나무 한쪽을 차지했지만 아직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이안과 마샤, 제레미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여기 한 명 더 앉을 수 있…….”
한나가 통나무 옆자리를 손으로 탕탕 두드렸다. 누군가 그 손을 걷어 내고 자리에 앉았다.
“여긴 내 자리.”
어째 이 사람은 항상 소리소문없이 나타나는 걸까. 한나는 옆자리에 앉은 세자르를 올려보았다.
“유령이세요?”
“무슨 소리지?”
세자르는 보란 듯이 한나의 옆에 꼭 붙어 앉았다.
“……누구, 저 교황님 초대하신 분?”
마샤가 자리를 빼앗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다른 이들에게 물었지만 이안과 제레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어쨌거나 다 모인 것 같네.”
제레미가 털썩 바닥에 앉았다.
“나는? 나는 통나무 없어?”
마샤는 아무도 챙겨 주지 않는 자신의 자리를 못마땅해하며 제레미에게 물었다. 그런 마샤를 바라보는 제레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고, 마샤는 조용히 입을 닫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안락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
이안은 장작만 뚫어져라 보며 마샤의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때 한나가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와. 이렇게 있으니까 정말 옛날 생각난다. 좋은 일만 있으면 우리 이렇게 불피웠었는데.”
타닥거리는 불꽃에 모두 과거의 추억에 젖어 갔다. 마샤는 조용히 제레미의 옆에 앉았고, 결국 모두가 통구이 장작을 중간에 두고 둘러앉게 되었다.
“돼지 같은 제레미가 익지도 않은 고기를 들쑤시곤 했죠.”
마샤가 제레미의 팔을 툭 치며 웃었고, 제레미도 입을 열었다.
“잘 익고 나면 귀신같이 대신관님이 숟가락 얹었고.”
제레미의 말이 끝나자, 이안이 마샤와 제레미의 과거를 떠올리며 덧붙였다.
“너희는 얼굴이며 옷이며 엉망으로 고기를 뜯어 먹다가 손에 화상 물집도 생겼지.”
“정말, 말썽꾸러기들이 따로 없었지.”
한나는 재미있었던 그때를 웃음으로 추억했다.
“지금도 내 눈엔 다르지 않지만.”
따스한 시선이 모두에게 닿았다.
“뒤집어야겠는데.”
이안의 말에 마샤가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넌 여기서도 황제 노릇 할 거야?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우릴 부려먹어?”
“내 집 앞마당을 쓰게 해 줬잖아.”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만 의자에 앉은 것도 치사하잖아!”
마샤가 제레미에게 자기 편을 들라며 팔을 흔들자, 제레미는 마샤에게 말했다.
“침 튀어.”
“와! 내 편 없어! 선생님!”
“왜 또 싸우려고 그래. 너희 다 큰 어른이라는 거 잊지 않았지……?”
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저 교황님도 그래. 왜 홀랑 그 자리에 앉아요?”
“어떻게, 여기라도 앉겠나?”
세자르가 자신의 무릎을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 교황님이!”
마샤는 그 모습에 결국 뚜껑이 열렸고, 옆에서 점점 마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제레미가 귀를 막으며 몸을 일으켰다.
“고기는 내가 뒤집지.”
이안은 과거에도 그랬듯, 그들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조용히 구경했고, 한나는 이 정신없는 상황이 우스워 깔깔거리며 웃었다.
“진짜, 다들 여전하네.”
몸만 컸지 변한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소란스러움이 점점 커져 갔다. 그들의 목소리가 하늘에 채워지는 것처럼, 파랗게 비어 있던 하늘에 붉은 노을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한나는 흐뭇하게 모두를 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모른 척 하려고 했을까.”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처럼, 이들은 자신의 영혼에 물든 사람들이었다. 밤이 오고, 별이 빛나도 결국은 어느 한편에 존재하고 있음은 굳이 증명이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득, 이 순간을 즐기고 있자니,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한나의 어깨에 세자르의 신관복 외투가 내려앉았고, 그의 손이 단단히 팔을 감쌌다.
한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더없이 포근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한나는 기도했다.
지금처럼 시끌벅적한 소란이 영원하길.
“선생님!”
언제나 이 벅찬 부름에 기쁨으로 답할 수 있기를.
<곱게 키운 악당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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