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0. (21/23)

Chapter 20.

탁.

“이런. 제가 져 버렸습니다.”

칼레시안 대공이 이안에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느 때처럼 그들의 평범한 만남이었다.

늘 그렇듯 평범한 이야기와, 조금 예민한 신경전, 그리고 그것을 가리기 위한 사소한 게임.

“하나의 나쁜 수가 좋았던 많은 수를 헛수고로 만들곤 하지요. 오늘이 꼭 그런 날인가 봅니다.”

대공은 게임에서 졌지만, 그렇다고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

“폰을 많이 희생시켰습니다. 보통 이런 전략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두 사람은 게임을 하고 나서는 서로 격의 없이 경기 내용을 나누곤 했다. 그건 지금처럼 껄끄러운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이안의 말에 대공은 조용히 웃으며 자신의 체스 말들을 손으로 끌어 나무 상자에 쏟아 넣었다.

투두둑.

흑색과 백색의 말들이 상자로 뒤섞였다. 그곳엔 폰도 킹도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었다.

“판이 끝나면, 말들은 다 같은 상자에 담기지요.”

“모양이 다를 뿐, 같은 도구에 불과하니.”

이안이 그의 말에 덧붙였다.

“꼭 인생이 체스판 같지 않습니까.”

대공의 말에 이안이 몸을 깊게 의자에 묻었다. 그의 눈이 대공을 탐색했다.

“다른 게 있다면…….”

대공의 손에 들려 있던 체스 말이 담긴 상자가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탕! 차르륵.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들이 바닥을 굴렀다. 이안의 시선이 바닥을 구르는 검고 흰 것들로 향했다.

“나는 실패한 말은 다시 쓰지 않다는 거죠.”

“재미있는 징크스라도 생긴 모양입니다.”

이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말하는 ‘말’이 고작 체스 게임의 말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작 눈치챘다.

하지만 그의 이런 비유가 우스웠다.

“체스에선 킹을 본인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저는 조금 다릅니다.”

대공이 제 손바닥을 펼쳐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는 판을 만드는 사람이죠.”

이안은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했다. 바깥에서 조금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졌지만, 이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뜰 뿐 동요가 없었다.

“망쳐 버렸다면 새 판을 깔고, 또 새로운 말을 찾아 앉혀야겠죠.”

“그대가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리는군.”

이안의 목소리에 대공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신이 만든다는 황제를 둘씩이나 이 손으로 만든다면 저도 반쯤은 그분들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대공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

“둘씩이나.”

이안은 그의 입에서 나온 ‘둘’이라는 말에 집중했다. 제 손으로 만든 황제는 자신이 유일했다. 그런데 이렇듯 당당하게 둘이라 칭하는 것은 절대 실수가 아닐 것이다.

쾅―!

폭발음과 동시에 대공과 단둘이 마주하고 있던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비릿한 피냄새가 훅 밀려들었다.

“……대, 대공 전하.”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이안도 아는 얼굴이었다.

“레치헨.”

그는 이안의 먼 조카였다. 황실의 계보로 따지자면 멀고도 먼 사촌이었다.

황가를 상징하는 빛나는 금발을 가진 아직 소년이라고도 부를 수 없을 만큼 어린 나이의 아이.

고작해야 장난감 병정이나 들고 있어야 할 아이의 품에는 제 몸통만큼 긴 검이 안겨져 있었다.

“폐, 폐하…….”

아이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눈망울이 젖어 있었다.

지금 황궁은 어린아이가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길을 제 발로 지나온 아이는 당연히 공포에 절여져 있었다.

“많이 급하셨나 보군요. 저 어린 것을.”

“승리는 적절한 타이밍이 결정짓지요. 이 판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않으면 내가 불리해지니 서두를 수밖에요.”

숱한 전쟁을 겪어 온 대공은 이번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실행해 옮겼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기 위해 빠르게.

이안은 그의 이런 전략에 허를 찔린 것을 인정해야 했다. 선황제를 끌어내리기 위한 준비가 6년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방심했을지도.

‘전쟁을 명목으로 모은 병사들이 이렇게 쓰이는군.’

그가 빠르게 반란을 준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야만족을 치겠다던 전력을 그대로 황궁으로 진격시키다니.

이안이 생각에 잠긴 사이, 대공은 저벅저벅 걸어 어린 조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제 새로운 말이.”

아이의 눈동자에 이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작은 것에 제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다.

붉은 황제의 망토를 두른 채 꼿꼿하게 앉아 있는 자신이.

이안은 그 투명한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언제나 좋은 말을 구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건 참 칭찬해 마땅한 일입니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침착한 태도에 대공은 생각했다.

이렇게 허를 찔린 이상, 사태 파악을 단번에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어쩌면 정신이 나가 버려서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하는가 싶기도 했다. 이안은 급하지 않게 걸어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무슨 수를 쓰려고 한들, 소용없을 겁니다.”

대공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열린 문으로 대공의 군대가 들어왔다. 이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공의 군대가 황궁의 병사들과 격돌하고 있었다. 그 상황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조금 방심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안 역시 상황 판단이 느린 것은 아니었다. 대공이 서두를 것이라는 예상도 충분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3일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변심하는 게 고작 3초로 결정되는 일이라 해도 반역을 고작 3일 만에 준비한다는 건 범인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아무리 대공이라 한들,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자신에게 일주일의 시간이 있다면 먼저 대공을 칠 생각이었다.

어떤 명목으로 묶든 그의 사지를 묶어 놓을 방법은 꿈에서까지 고민했기에 수백 가지는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전쟁판을 누비던 대공의 결정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패를 버림과 새로운 도전을 하는 데 일말의 망설임이 없는 그의 모습은 단연 수많은 전투 속에서 터득한 능력이었다.

“후회하십니까?”

칼레시안 대공이 이안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이안은 대공의 저런 악질적인 취미를 잘 알고 있었다.

“숙부를 기쁘게 해드리려면, 그렇다고 답해야 할 텐데……. 전 그리 좋은 조카는 아닌가 봅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주기엔, 이안 역시 마냥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원하시던 판은 깔아드리죠. 하지만 이번엔 스스로를 담보로 해 보세요. 대공.”

이안의 눈매가 조금 휘었다.

“더 재미있을 겁니다. 진짜를 거는 건.”

이안은 그 말을 끝으로 제 망토를 고정하고 있던 브로치를 손으로 잡아 뜯었다.

투툭―

뜯어져 나간 브로치를 이안은 그대로 벽으로 내다 꽂았다.

쿵! 파앗―!

브로치의 보석이 산산조각남과 동시에 빛이 일렁였다.

“으읏!”

이안의 몸 주위로 돌풍이 불었다. 주위에 검은 공기가 벽을 갉아 내듯 뚫어 버렸다.

“당장 대공 전하를 보호하라!”

대공의 병사들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진을 펼쳤다.

하지만 대공은 이미 그 자체로 한계를 초월한 인간.

그들의 보호는 대공의 새로운 어린 왕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검은 바람이 불고, 벽이 허물어진 후, 뻥 뚫린 하늘이 그들을 반겼다.

꼿꼿하게 선 대공이 이안과 정면으로 대치했다.

“저를 잡기 전까진 게임이 끝나지 않는다는 건, 아시지요?”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대공을 보며, 이안이 웃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벽이 사라지고 드러난 허공으로 사뿐히 물러섰다.

“……!”

대공은 순간적으로 놀랐다.

아무리 급해도, 스스로 밖으로 몸을 던진다?

대공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의 눈에 검은 무언가가 펄럭였다.

“……마수?”

검은 털을 가진 거대한 마수가 이안을 등에 태우고 있었다. 괴기스러운 붉은 눈이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륵―]

마치 그를 위협하는 듯한 울음소리.

“너무 전쟁만 생각하시느라, 생각보다 적을 많이 만드셨더군요. 저로선 고마운 일이지만.”

이안이 조소했다.

휘익―

거센 날갯짓에 바람이 일었고, 이안은 검은 마수의 등을 타고 안락하게 1층 야외로 향했다. 그곳엔 황궁 근위대와 마법사들이 있었다.

처음 대공의 군대가 황궁을 에워쌌던 모습처럼 이번엔 황실 군대와 마법사들이 황궁을 에워싸고 있었다.

“고마워. 꼬꼬.”

바닥에 내려선 이안이 꼬꼬에게 말했다.

[그르륵.]

꼬꼬의 울음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렀다. 이안은 제 손에서 부숴진 브로치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며칠 전, 마샤가 자신에게 전해 준 것이었다.

한나를 쫓아다니며 이 모든 일의 실마리를 이어붙인 마샤는 누구보다 빠르게 이안을 찾았고, 그 결과 그에게 힘이 된 것이었다.

위급상황에 꼬꼬를 소환해 몸을 지키라며 전해 준 브로치는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꼬꼬의 등장과 함께 마법사들이 곧장 집결하게 된다는 마샤의 말은 정말이었다. 이안은 그 허당스럽고 장난기 많은 마샤가 이런 일을 예견하고 대비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이 시간부로 칼레시안 대공을 주적으로 공표한다. 전군, 반란군을 진압하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하지만 대공의 일을 예견한 것은 마샤뿐만은 아니었다.

이안 역시 대공에게 편지를 보내던 그날부터 착실하게 반란을 대비하고 있었다. 황실을 상징하는 갑옷을 입은 병력들이 점점 불어나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 독 안에 든 쥐는 제가 아니라 대공이 된 것 같습니다.”

이안이 자신이 있던 2층 응접실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선 대공은 자신의 검을 쥔 채, 이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듯, 꼭 닮은 두 사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성물은.”

검은 옷으로 몸을 둘둘 감싼 제레미가 팔의 소맷단을 검은 천으로 둘러 감으며 부하에게 물었다.

“모두 챙겼습니다.”

제레미의 시선이 부하의 손에 들린 신전의 성물로 향했다.

“살면서 나보다 미친 인간은 처음 봐.”

제레미의 말에 부하가 깜짝 놀랐다.

“언사를 가려 하셔야…….”

그가 말하는 ‘미친 인간’은 대공을 뜻했다. 세상에 반역을 하루아침에 뚝딱 결정하는 정신 나간 인간은 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제 손으로 황제의 자리에 앉힌 혈육을 끌어내다니.

“황제 하나 말로 구슬리는 게 어려운가. 타협이라는 걸 모르나?”

뒷골목 잡배인 자신도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귀족들은 가진 게 많으니 겁 많고 방어적이라는 편견이 깨졌다.

오히려 저런 무모한 자들이 힘과 권력을 갖고 있으니,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한배를 탄 이상 저희 길드의 명운도 이번 일에 달렸습니다.”

“누가 몰라. 그걸.”

제레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바란 그림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은 그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대공의 병력은 어느 정도지.”

“전쟁을 대비하던 모든 병사들이 황궁으로 집결했습니다. 황궁 주위를 빼곡하게 대공의 병사들이 둘러쌌습니다.”

제레미는 대공의 성에서 보았던 수많은 병사들을 생각해 냈다.

“황궁은 봉쇄됐겠군.”

“예.”

사냥을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공께서는 왜 이렇게 일을 서두르셨을까요.”

제레미를 따르던 부하가 그에게 물었다.

“난들 아나. 확실한 건 황제가 가장 약한 순간은 지금이 맞다는 거지. 다른 세력을 모으기 전에 얼른 쳐 버리는 게 그에겐 안전한 길이니까. 언제 자기가 제거당할지도 모르니.”

“살벌합니다. 핏줄끼리도 서로 죽고, 죽이고.”

부하가 몸을 떨자, 제레미는 피식 웃음을 흘린 뒤 제 손목의 매듭을 완성하고 허리춤의 검을 확인했다.

“가지.”

“예.”

그렇게 그들은 황궁으로 향했다.

* * *

“그게 말이 돼?”

“왜 못 믿어요.”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마샤의 말을 한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안은 그의 조카야!”

“죽은 선황은 그의 형제였죠.”

마샤의 말에 한나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형제까지 죽였던 대공이 아닌가?

“그렇다고 황제가 바뀐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오히려 지금이 선황을 죽이고 자리를 갈취한 황제를 처단했다는 죄목을 붙이기 용이하겠죠.”

“이안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고작 그런 이유로?”

한나는 지난날, 이안이 자신에게 고민을 말했던 때가 떠올렸다.

“모든 분쟁이 그래요. 고작, 어떤 이유 때문에 일어나죠.”

한나는 불안감이 스쳤다. 설마 자신이 했던 말이 이 엄청난 일의 시발점이 된 것은 아닐까.

정치라곤 하나 모르는 자신이 이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자면, 짧은 순간에도 정말 엉망인 말을 아무렇게나 했던 것 같다.

그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만들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고작 양심이나 선의로 움직이라는 말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잘못한 것 같아.”

“선생님이 왜요.”

“이안을 흔들어 놓은 게 나인 것 같아.”

“고작 말 몇 마디에 흔들린다면 그 녀석이 잘못이죠.”

황궁으로 돌아가던 마샤가 땅으로 내려갔다. 마샤에게 꼭 안겨 있던 한나의 몸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발이 땅에 닿자, 현기증이 일었다. 비행 때문이 아니라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었다.

“여기서부턴 오지 마요.”

“왜? 내가 가야 해.”

“황궁에 피바람이 부는데 선생님이 어딜 가요.”

마샤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눈동자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내가 누구라도 치료할 수 있겠지!”

“선생님은 얽히지 마요. 고작 소식만 접해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너는 갈 거잖아.”

“신전까지 곤란하게 할 셈인가요?”

“…….”

마샤의 말이 맞았다.

신전은 황실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나의 생각은 달랐다.

“신관을 그만둬도 너희를 버릴 수는 없지.”

“선생님 뜻은 알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마샤가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안 돼요. 선생님을 위험한 곳으로 데려가는 건.”

한나는 침묵했다. 이상하게 마샤가 물러서는 이 순간이 슬로모션처럼 느릿하게 느껴졌다.

불안하게 간질거리는 심장이 멀미를 일으켰다.

“신전으로 가요. 지금 제도에선 그곳이 제일 안전할 테니.”

“마샤!”

마샤가 그대로 뒤를 돌았다.

“마샤, 안 돼!”

한나의 외침에 마샤의 몸이 잠깐 멈칫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그대로 사라졌다.

“……진짜! 내 말은 더럽게 안 듣지!”

텅 비어 버린 허공에 시선을 준 채, 한나는 부글부글거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단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황궁에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이안이 있고, 마샤 역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황궁으로 갔다. 그리고 분명 제레미 역시 그곳에 있을 거라는 불안감이 스쳤다.

대공과 함께 일을 벌인다면…….

그가 이 일에 어떤 마음으로 가담했을까. 정말로 이안을 죽이려는 생각까지 한 걸까?

“……그럴 리 없어.”

최악의 상상이었다. 그들끼리 칼을 겨누는 건 원작과 달라진 게 없다는 말이잖아. 그 장소가 북부에서 황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 똑같은 상황이었다.

“원작을 바꾸긴 바꿨네.”

오히려 더 안 좋은 쪽으로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분명 누군가를 잃는다.

심장이 격하게 요동쳤다. 한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살과 맞물린 자리가 하얗게 질렸다.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너희를 잃으려고 그 고생을 한 줄 알아?”

불안감에 울렁거리던 속이 갑자기 끓어올랐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미친 원작의 굴레야!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한나는 소매를 걷고 빠르게 걸어나갔다. 다행히 길은 익히 아는 곳이었다. 황궁까지 한달음에 갈 수는 없겠지만 늦지 않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깨알 같은 마샤의 배려로 신전이 그리 멀지 않았다. 한나는 심장이 터지도록 신전을 향해 달렸다.

* * *

“폐하! 이리로 피하십시오!”

황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제를 지키기 위해 기사들은 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의 사람들은 궁의 내부에도 많았다. 아군과 적군이 불분명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안전장소를 찾던 기사들과 이안의 앞을 붉은 갑옷의 무리가 막아섰다.

“적이다! 적을 처치해라!”

근위대장의 말에 기사들이 대공의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폐하, 얼른 이동을……. 윽!”

콰앙―!

폭발에 의해 창문이 깨지고, 파편이 튀었다.

“괜찮으십니까?”

이안은 따가운 제 뺨을 손으로 만졌다.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면 마법 방어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성물과 마법 물품들이 있는 보물창고였다. 그곳엔 비밀스러운 황실의 안전 요새도 있었다.

근위대장은 밀려드는 적을 검으로 베어 내며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이안을 둘러싼 기사들은 점점 부상을 당하거나 지치고 있었다.

“여기서 오래 발이 묶여 있으면 곤란합니다. 빨리 이동을 해야 합니다.”

그 말에 이안이 근위대장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특히 성의 내부에 있던 대공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기사들 중에도 변절자가 있으니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지침도 무용지물이었다.

“궁 외부의 병사들도 집결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버틴다는 말에서 이미 상황이 극악으로 치달았다는 것을 뜻했다.

“불! 화염구가 다가옵니다!”

기사 중 한 명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화염구를 보며 외쳤다.

“젠장!”

대공의 병력은 애초에 이안을 생포할 생각이 없었다. 속전속결, 아군의 피해를 보더라도 빠르게 일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공격에 주저함이 없었다.

“황제 폐하를 보호해!”

근위대장의 외침에 기사들이 황제를 더욱 에워쌌다. 이안의 시선이 화염구로 향했다.

이건 위험하다.

이안은 이 고비는 하늘의 운에 달렸음을 직감했다.

콰앙―――!

하지만 그 순간, 하늘의 도움이 있었다.

“괜찮아요. 폐하?”

익숙한 목소리에 이안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마샤.”

화염구는 공중에서 격파되어 사라졌다. 마샤는 제 손목을 빙빙 돌리며 이안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마샤는 답지 않게 조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힘껏 달려온 모양새였다.

“황제 폐하가 조심성 없이 마법 보호막은 어디에 팔아먹었어요?”

“화염구에 번개에 돌무더기까지, 진작에 명을 다하고 부서졌지.”

이안의 말에 마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보호막 기능이 있는 마법석이었다.

“어디서 싸구려를 구해서는.”

마법 보호막은 대개 큰 공격을 몇 차례 받으면 능력이 상실된다. 아무리 마력을 눌러 담아도 물건에 실리는 마법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 생각은 있는 거지?”

마샤가 많이 흐트러진 이안을 보며 말했다.

“날 살리러 온 건가?”

이안의 물음에 마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황궁 일에는 관심 없지만, 네가 죽으면 어떤 사람이 슬퍼지거든.”

‘설마 네가 이뻐서 달려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라는 말이 뒤따랐지만 이안은 그 말은 흘려 들었다.

“고맙군.”

이안의 말에 마샤는 피곤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근데 저 자식들은 기껏 내가 고쳐 놓은 궁 다 때려 부수네!”

마샤는 지난날 자신이 열심히 고쳤던 궁의 기물들이 우수수 쓰러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펄쩍 뛰었다.

그런 마샤의 모습에 이안은 작게 터지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에게 힐끗 시선을 준 마샤가 중얼거렸다.

“살아. 죽어도 살아.”

“말에 어폐가 있는데.”

“어쨌거나 살라는 말이지. 황궁 밖으로 나갈 건가? 그럴 거면 여기서 나가야 해. 이 건물 안에서는 텔레포트 마법이 불가능하니까.”

황궁은 보안을 위해서 텔레포트가 불가능한 곳이 많았다. 덕분에 마샤는 이안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발로 뛰어야 했었다.

“조금만 버티면 공작과 후작의 사병들이 와. 흩어져 있던 황궁의 병력도 집결할 테고.”

“설마 황궁에 남아 있겠다는 말은 아니지?”

마샤는 믿기 힘든 그 말에 경악했다.

누가 봐도 지금 목숨이 간당간당한 마당에 궁에 남겠다니.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이대로 물러섰다간 다시는 대공을 처치할 기회를 얻지 못해.”

황궁을 벗어나는 순간 권력의 흐름이 황궁을 장악한 대공에게 흐를 것이다.

그런 상황은 이안에게 위험했다.

“황제 관을 쓰고 있을 때, 결판을 내야지.”

뱀처럼 교활한 대공은 자신이 떠나자마자 어린 조카를 황제로 추대할 것이다.

온갖 이유를 갖다 붙여 자신을 황좌에서 끌어내리겠지.

될 수 있다면 이안은 오늘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공의 군대가 얼마나 많은지 알기는 하는 거야?”

“물론.”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을 뿐.

하지만 북부와 해안지역, 자신의 편에선 대신들의 사병들의 도착이 머지않은 시점이라 이안은 위험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미치겠네. 구하러 왔다가 같이 땅에 묻히게 생겼어.”

마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전한 곳이 어딘데.”

마음 같아서는 기절이라도 시켜서 데려가고 싶었지만, 마샤는 일단 이안의 결정을 따라 보기로 했다. 여차하면 도망갈 계획은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떠돌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최고 결정권자가 몸을 숨기는 곳이 있어. 그곳으로 내가 가고 있는 거고.”

“지하인가?”

마샤는 소문으로 황궁 지하에는 비밀공간이 있다는 것이 진짜인가 궁금해졌다.

“난 어두운 곳은 싫어하는 편이라.”

이안 역시 항간의 소문을 알기에 웃으며 앞장섰다.

“폐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적을 정리하고 있던 근위대장이 소리쳤고, 이안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이안의 한발 앞 복도의 허리가 날아갔다.

“…….”

한 걸음만 더 내디뎠어도 건물 잔해와 함께 날아갔을 거리에 모두 경악했다.

“폐하!”

놀란 기사들이 이안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마샤 역시 이안에게 다가갔다. 이안은 제 발 앞을 구르는 돌들을 눈으로 훑었다. 흙먼지로 뒤덮여 숨쉬기가 힘들었다.

기사들 역시 기침을 쏟아 냈다. 그리고 그때, 뚫린 벽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여우 사냥은 취미에 없는데 말입니다.”

돌무더기를 발로 차며 들어서는 이는 대공이었다.

“…….”

이안의 서늘한 시선이 대공에게 닿았다.

“이렇게 금방 잡힐 숨바꼭질은 시시한데.”

그의 손에는 날이 바짝 선 검이 들려 있었다.

“애달픈 일이지요. 내 손으로 키워 낸 아이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건.”

대공이 검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복도로 들어선 그의 뒤로 병사들이 뒤따랐다. 칼레시안 대공이 멀리, 이안이 가려고 했던 곳의 문을 힐끗 바라본 뒤 말했다.

“저곳으로 숨어들었으면 조금은 더 버텼을 텐데. 제가 이렇습니다. 언제나 한발 빠르지요.”

짙은 비웃음이 뒤따랐다. 언제나 넌 내 손 위에 있지 않느냐는 그의 도발에 이안의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맞는 말이다. 그는 언제나 한발 빠르게 행동하곤 했다. 오늘만 해도, 충분히 느낀 바가 많았다.

“저 양반만 없으면 되는 거야?”

마샤가 이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자는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존재야.”

수천, 수만의 피를 보면서 일구어 낸 그의 무력은 결국 인간의 경지를 초월했다.

심지어 그는 늙지도, 병들지도 않았다. 아니,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제국에 존재하긴 할까.

대공이 한 발 내딛자, 기사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나는 아까운 인재들이 희생되는 걸 원치 않는다네.”

대공이 근위대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기사들은 위태로운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마샤가 다시 이안에게 속삭였다.

“정면 돌파는 어려울 것 같은데, 뒤로?”

이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도망갈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후퇴라고 쉬울 리 없었다.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폐하.”

대공이 한 걸음 더 내딛자, 기사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쇠붙이가 맞닿는 소리와 함께, 대공의 병사들도 움직였다. 날카로운 소음과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

하지만 그 소음을 뒤덮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있었다.

“다들 그만!”

모두의 시선이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따라갔다.

“신관 건드리면 3대가 신의 저주를 받습니다! 검 내려놓으세요!”

하얀 신관복을 입은 한나가 아비규환 속으로 제 발로 들어왔다. 그의 뒤로, 세자르가 따라 걷고 있었다.

“교황?”

대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전이 황궁의 일에 관여하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대공이 세자르를 향해 말했다.

“아…….”

세자르가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제 옷이 안 보이십니까?”

세자르는 신관복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말장난을 치냐는 듯, 대공이 날카롭게 답했다.

“저는 오늘 교황이 아니라 보호자로서 온 겁니다만.”

“보호자?”

“한때 저 아이들이 내가 보호하던 아이들인지라.”

세자르의 시선이 이안과 마샤에게 닿았다.

그 옛날, 레미아 마을 신전에서 그는 대신관이었고, 보육원은 그의 보호 아래에 있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으나, 모든 것이 변한 지금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

검을 쥔 채 세자르를 응시하던 대공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잘못된다 해도 신전과는 관계없는 일이겠군.”

“아……. 예. 뭐…….”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교황을 해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대공은 자신의 계획에 장애물이 된다면 세자르를 베어 내겠다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세자르의 입술이 비뚜름히 말려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워워! 누가 누굴 잘되고 못되고 그렇게 만들어요?”

대공과 세자르의 위태로운 기류를 끊어 내며, 한나가 세자르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저 안 보이세요? 왜 다들 이쪽으로 시선이 가 있지? 제가 지금 방해하고 있는 거거든요?”

한나는 손을 허공에 붕붕 저으며 말했다.

아니, 여기서 영웅처럼 등장하는 건 자신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는데 따라온 세자르에게만 시선이 집중되니 배가 꼬일 지경이었다.

“이건 또 뭐지.”

대공의 말에 한나의 이마가 곱게 접혔다. 분명 이 말은 그녀에게 기분이 나빴다. 어디 굴러 들어온 돌멩이 대하는 태도 같지 않은가.

“쩌리 취급하지 말라고요!”

* * *

침착하게 생각을 해 보자.

우선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반란이었다. 우리는 가끔 살면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손만 대면 일을 크게 만든다든가, 혹은 잘 굴러가고 있는 일을 굳이 나서서 망치는 사람 등등…….

‘그게 나인가.’

한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원작을 틀어지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결과를 원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심지어 더 난리가 났어!

그 와중에도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마샤와 이안의 아름다운 우정……. 정도이려나.

한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적어도 저 둘은 물고 뜯고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며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어마어마한 공공의 적이 생겨 버렸다는 게 문제지.

“이런 일에 휘말리면 신관도 무사하기 힘들다네.”

대공이 말했다. 한나는 대공과 불과 세 걸음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달려올 땐 몰랐는데, 검이 상당히 날카롭네. 꽤 무거워 보이는데…….’

짐승이고 사람이고 잘하면 돌도 베어 낼 것 같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나는 슬그머니 손을 모았다.

“서로 감정적인 문제가 있다면 대화로 풀어 나가는 것은 어떨까요?”

제발. 여지가 있어라. 제발. 제발.

당신도 여기서 개죽음당하고 싶지는 않잖아요!

계속해서 한나가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대공의 얼굴은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탐탁지 않으시군요. 그럼…….”

한나의 시선이 힐끗, 세자르에게 향했다.

“싸워야 하나요?”

누가 누구더러 묻는 건지.

세자르는 분위기 파악이 아직 덜 된 한나를 보며 손을 까딱였다. 괜히 설치지 말고 제 옆에 딱 붙어 있으라는 신호였다.

한나는 대공을 피해 슬금슬금 세자르와 이안, 마샤의 곁으로 향했다.

“저 사람, 많이 강하니?”

일단 한나가 대공이 어마어마하게 강할 것이라고 짐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저 많은 병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떡하니 가장 앞에 서 있는 자신감!

그것만 봐도 대공은 예사 능력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물음에 이안이 대답했다.

“그는 초월자고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아요.”

“마샤의 마법도?”

“한참 모자라죠.”

“그럼 세자르 님 성력은?”

이안이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마수들에게나 극대화되지 않나요.”

한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세자르의 힘이 강하다 한들, 그것은 마기를 가진 마수들에게 극대화되는 것이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이미 어느 경지를 넘어선 세자르의 힘이라면 대공에게 견줄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 그런 격돌을 벌였다가는 다른 이들이 죽어날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럼 우리가 와 봐야 같이 목숨만 위험해진 거네.”

“그렇죠.”

이안은 이제야 그걸 눈치챘느냐며 헛웃음을 뱉어 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는 작위를 받으면서 충성 서약을 했어요.”

“그게 왜?”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서류 사인 같은 건가 하고 한나는 생각했다.

설마 지난날의 약속을 지키라고 떼쓰는 건 아닐 테고.

“보통 귀족의 충성 서약은 형식적인 것이지만 황족은 달라요.”

“어……. 어떻게?”

“반역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명을 저당잡죠.”

그 말에 한나는 깜짝 놀랐다.

그런 좋은 것이 있었으면 왜 이 꼴을 당하고 있는 거지?

“아니, 그럼 선황은…….”

선황 역시 그것을 이용해 대공을 막을 수 있지 않았나?

“그러니 저를 앞세운 것이죠. 그리고 황실이 알 수 없게 허를 찌르는 공격을 하는 것이고. 이번 일이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벌어진 것도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겠죠.”

이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대공에게 향했다.

충성 서약에 대한 것을 이안이 알고 있는 이상, 대공은 아주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거나 일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는데?”

“안전 장소에 있어요. 그곳으로 가야 하는데 보다시피 길이 막혔고.”

아니, 그런 건 좀 몸에 품고 다니면 안 되나!

‘……하긴, 대공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배신할지 어떻게 알았겠어.’

한나가 중얼거렸다. 이안은 신이 아니었다.

“뭘 가져오면 되는데?”

“내가 가야 해요. 내가 아니면 그곳은 열리지 않으니까.”

이해했다는 듯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작전을 짜는 건 어때요? 세자르 님과 마샤가 대공을 맡고 있으면, 호위 기사님들은 대공의 병사들을 막고, 폐하와 저는 안전 지대로 가서 그 서약인가 뭔가 그걸 찾아오는 거죠.”

목숨이 경각에 달려서인지 한나의 머리가 평소보다도 더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

“두 사람, 상대가 될까?”

“나는 이런 좁은 곳에선 제한적인 힘밖에 쓸 수 없어.”

혼잣말 같은 한나의 말을 들었는지 세자르가 대답했다.

사막처럼 공간이 텅텅 비어 있고, 주위에 사람이 없다면야 하늘에서 낙뢰가 내리치든 펑펑 터트리든 상관이 없었지만, 아군이 있는 이런 싸움에서 그는 제약이 많았다.

“어쨌거나 지금은 방법이 없으니까, 이 계획대로 가죠.”

“그럼, 제가 먼저 나서죠.”

마샤가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벗어 내며 말했다. 그는 어깨에 걸쳐져 있던 망토의 금색 끈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차르륵, 소리와 함께 망토의 천이 뜯어지면서 그가 잡아당긴 끈에 갖가지 보석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나왔다.

“…….”

한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마법석.”

한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인 마샤가 마법석이 달린 끈을 제 목에 감았다. 순간 한나는 과거 마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능력이 출중해서 보석이 필요가 없다며……. 그런데 그렇게 잔뜩 감춰 두고 다녔던 거냐.’

정말 깜찍한 녀석.

하도 어이가 없어 한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절대 다치지 마. 두 사람 다요!”

이안의 팔목을 덥석 잡은 한나가 마샤와 세자르에게 말했다.

“야생 곰 앞에 토끼를 던져 두면서 다치지 말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뭐 노력은 해 보지.”

“하여튼 그냥 알겠다고는 절대 안 하지.”

세자르의 대답에 한나가 짧게 툴툴거렸다. 그러고는 심호흡과 함께 세자르와 마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사인이었다.

한나의 사인을 받은 마샤는 바로 대공을 향해 마법 공격을 퍼부었다.

퍽― 푸악―!

물인지 불인지 모를 온갖 것들이 뒤섞인 구체가 허공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공과 병사들이 마법을 막거나 피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나와 이안은 빠르게 달렸다. 대공에게 들키지 않게끔 병사들의 틈새에 숨어 이동했다.

“마법사들은 질색인데.”

대공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법구들을 검으로 쳐 냈다. 그의 검에는 어느새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인 그가 다루는 검기였다.

파앗― 챙!

하지만 대공 역시 마법을 상대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차근차근 마법을 막아 냈다.

마법사들을 상대할 때는 일단 공격 자체를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수였는데, 보통 마법사들은 마법을 캐스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때 얼른 처리한다면 귀찮은 일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샤는 그런 사전 과정이 필요 없는 마법사였다.

그렇다면 마법사의 마력이 고갈될 때를 기다리며 방어에 집중하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도 연속해서 마법을 계속 쓸 수는 없다.

마력을 갈무리하는 시간이 중간중간 필요한데, 그때를 노려서 일격을 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마법구를 막아 내던 대공의 시선이 세자르에게 향했다. 그는 마샤의 마법을 구경하면서 아직 미동도 없는 상태였다.

‘둘이 한 번에 얽히면 확실히 곤란하겠군.’

자신이 불리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대공은 심장이 울렁거리며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얼마 만에 느끼는 긴장감인가!

짜릿한 전율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교황이 된 세자르라는 존재와 겨뤄 보고 싶었다.

강한 상대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야말로 대공이 갈망하는 일들 중 하나였으니.

“풋내나는 마법사가 꽤 귀찮게 하는군.”

하지만 우선은 마법사가 문제였다.

“슬슬 느려지는군.”

있는 대로 마법을 사용했으니, 슬슬 몸속 마력을 제자리로 돌리는 잠깐의 짬이 필요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법사를 해치워야 했다. 하지만 마법이 잠시 끊어진 순간, 대공의 시선은 마샤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콰악―――!

“엄마야!”

“으아악!”

“조심!”

쥐새끼처럼 슬금슬금 이동하던 이안과 한나를 발견한 대공이 검기를 응축한 검강을 날렸다. 푸른 검강이 한나와 이안의 코앞에 떨어졌다.

“헉……. 헉.”

앞서가던 근위대가 다쳤고, 한나는 아슬아슬하게 검강을 피했다.

“괜찮아요?”

이안이 한나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대공이 여전히 우리를 주시하고 있어. 얼른 가자.”

마음이 급해진 한나는 놀란 심장이 진정되기도 전에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한나가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대공을 살폈다.

대공의 주위로 폭발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마샤는 제 세상인 양 마법을 퍼부었으며, 세자르 역시 신성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어쩌면 예상보다 쉽게…….’

쉽게 해결이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한 그 순간, 마법구들과 떨어지는 낙뢰를 무려 검으로 베어 내는 대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저게 사람이야 괴물이야? 저런 게 가능하면 나도 검사가 될 걸 그랬지!’

한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대공의 몸에 상처조차 나지 않은 것 같았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세자르와 마샤가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셋 세면 다리가 부서져라 뛰는 거야.”

한나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ㅅ……!”

하지만 힘차게 숫자를 세던 한나는 셋을 외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 버렸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그들 앞에 나타난 한 존재 때문이었다.

“반가워요.”

낮게 울리는 목소리.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찢어지는 비명 사이에서도 홀로 시간과 공간을 비껴간 듯 여유롭게 걸어온 사람은…….

“선생님.”

다름 아닌 제레미였다. 그는 한나가 이곳에서 제발 보지 않길 기도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제레미.”

한나의 손에 차가운 땀이 고였다. 주먹을 꽉 쥐어 봐도 손발에 피가 돌지 않는 느낌.

최악이었다.

* * *

다급한 마샤의 목소리가 세자르를 불렀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어요.”

마법과 검기를 사용하기에 실내는 적합하지 않았다. 마샤에 이어 세자르의 힘까지 뒤엉키자, 황궁의 벽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건 당연히 예견된 일이었다.

“더 이상의 충격은 위험해요. 장소를 옮겨야 해요.”

마샤는 뒤엉킨 마력을 추스르며 전체적인 상황을 살폈다. 대공의 정신이 이안과 한나에게 쏠려 있다는 건 썩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제가 대공을 유인할게요.”

“대공도 바보가 아니야. 너 혼자서는 어려워.”

세자르는 마샤의 계획에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쩌적거리며 금이 가던 건물의 기둥이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하필 그곳은 병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콰드득― 쿠쿵.

“거, 건물이 무너진다!”

“으악!”

지붕이 무너지자 병사들은 겁에 질렸다. 그 모습을 가장 먼저 포착한 세자르가 성력을 이용해 방어막을 펼쳤다.

애초에 세자르는 전투신관이었기에 이런 상황에 사람들을 보호하기보단, 쓰러지는 지형지물까지 이용해 공격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애초부터 그가 이곳에 온 목적부터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니.

“아무래도 네 계획대로 해야겠군.”

성력으로 내부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손이 묶여 버린 세자르가 마샤에게 말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제 말 들으시라니까.”

마샤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필이면 건물의 붕괴로 인해, 세자르의 손이 묶인 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이봐요. 정신 나간 아저씨!”

뜬금없이 마샤가 대공을 도발했다. 대공의 시선이 이안에게서 거두어지고, 마샤에게 향했다.

마샤는 팔을 크게 돌리며, 어깨를 풀었다. 그러곤 대공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날 상대하면서 한눈을 팔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요. 내가 이래 봬도, 관심을 못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마샤의 장난 섞인 말에 대공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넨 내 상대가 안 된다네.”

대공이 가벼운 말투로 마샤에게 말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는 말 몰라요?”

마샤가 자연스럽게 발길을 틀었다. 외부로 대공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교황의 손은 묶였고, 마법사는 내 상대가 안 되지. 그걸 모를 리도 없어 보이는데 이렇게 나를 자극하는 건 얕은 술수겠지.”

“오.”

마샤는 그의 말에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대공의 몸이 틀어지고, 그의 손이 움직였다. 동시에 그의 검이 예리한 빛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대화하는 중에 공격이라니! 이런 건 삼류잡배나 하는 거라고요!”

마샤는 빠르게 구르며 그의 검강을 피했고, 날카롭게 외쳤다.

“나를 유인하려는 거겠지.”

눈치 빠른 대공은 마샤의 수를 이미 읽고 있었다.

세자르의 손이 묶인 이때에 자신과 1대1 상황을 유도한다는 건 풋내기 마법사의 멍청한 수라고 생각하고 있던 대공이 중얼거렸다.

“목숨을 걸어야 할 텐데.”

“여기에 목숨 하나쯤 안 걸고 있는 사람 있어?”

마샤는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가는 병사들을 흘깃 보며 말했다. 대공의 욕심 때문에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그의 눈에 보이는 것만 한가득이었다. 건물 밖에는 더 많은 사상자가 있을 터였다.

“그럼.”

대공은 차라리 이 마법사를 먼저 무력화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소원이라면, 먼저 죽여 주지.”

대공의 몸이 마샤가 있는 쪽을 향해 튀어 나갔다.

* * *

“네가 왜 여기 있어.”

서늘한 시선이 붉은 눈동자로 날카롭게 향했다.

“선생님은 왜 여기 있을까요. 항상 사건의 중심에 있네요.”

제레미가 손에 들린 검의 검집을 손가락으로 쓸며 한나에게 답했다. 그와 동시에 한나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이 모습이 네 뜻이니.”

“제 모습이 어떤가요.”

나른한 눈길이 한나에게 향했다.

“대공을 따르고, 네 친구들을 배신하고, 그리고…….”

한나의 붉은 입술이 단단한 이에 짓씹혔다.

“나를 배신하는 것.”

그 말에 제레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한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어 삼켰다.

“나를 한 번이라도 믿은 적 있나요.”

제레미는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한나는 그에 답하는 것을 머뭇거렸다. 제레미를 정말로 믿은 적이 있냐고?

“…….”

침묵보다 적절한 답은 없을 것이다.

“알을 깨고 처음 본 것을 따르는 짐승처럼, 내겐 선생님이 그런 존재였어요.”

“그만.”

한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자신을 탓하는 말을 듣는다면 정말로 무너져 버릴지도 몰랐다.

“나를 믿어 주지 그랬어요.”

“노력했어. 하지만 넌 한 번도…….”

“단 한 번의 믿음조차 주지 못했겠죠.”

제레미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이 암흑길드에 대해 숨긴 것부터 모든 게 어그러져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믿어 주지 그랬어요. 나는 정말로 그 하나면 충분했는데.”

제레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만 같아서 한나는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듣지 마세요. 선생님.”

멍해진 한나의 팔을 이안이 붙잡으며 말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한나가 여전히 침묵했다. 그도 그럴 게, 이안의 말은 한나에게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우습게도 눈앞에 서 있는 제레미의 상처받은 눈은 전혀 다른 답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요. 선생님 탓이 아니죠. 나를 탓해요.”

제레미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안은 그런 그에게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나를 방해할 거라면 상관없지만 적어도 은혜를 안다면 선생님에게 해를 끼치진 말아야지.”

그때였다. 내내 한나에게 못 박혀 있던 제레미의 시선이 순식간에 이안에게로 향했다.

“내가 널 방해한다고?”

“넌 나의, 그리고 제국의 적이다.”

이어지는 이안의 말에 제레미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너에게 광석을 준 게 무슨 뜻이라 생각했지?”

그의 말대로 이전에 제레미는 이안에게 광석을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한나는 그건 비단 암흑길드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 사건으로 이안이 쓰러지는 바람에 얼마나 심장이 철렁했던가.

“그때부터 광석의 힘을 얻었어야지. 그랬으면 그렇게 겁쟁이처럼 숨어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

“그게 다 나를 위한 일이었다는 말인가?”

이안이 조소했다.

“믿는 대로 보이는 법이지.”

제레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언제나 똑똑한 척 하지만 결국 중요한 순간엔 내빼 버리는 것밖에 못 하는 애송이, 그게 너 아닌가?”

제레미가 이안을 향해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입으로 지껄인다고 다 말은 아니지.”

이안의 분노가 한계치에 다다랐다. 그는 기꺼이 제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렸다.

“위선자.”

제레미의 한마디에 이안의 손이 결국 검을 뽑아냈다.

“난 네가 그렇게 화난 모습을 보고 싶었어.”

하지만 제레미는 이안의 위협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적어도 검을 들고 겨룬다면, 이안은 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항상 그런 네가 싫었거든.”

제레미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눈 깜짝할 새 제레미는 이안에게 다가갔다.

“이안!”

자신의 옆을 바람처럼 스치는 제레미의 행동에 놀란 한나가 뒤돌아 이안을 보았다.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에 이안과 제레미의 모습이 담겼다.

“……!”

한나는 깜짝 놀랐다.

“……제레미?”

예상과 달리 제레미는 이안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는 이안의 뒤로 접근해 온 대공의 사병과 검을 섞었다.

검이 마찰하는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 퍼졌다. 제레미는 간결한 동작으로 사병 두 명을 베어 냈다. 그리고 그들이 쓰러지자, 자신의 얼굴에 튄 피를 닦아 냈다. 그의 검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왜…….”

한나는 순간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제레미가 왜 이안을 지켜 준 거지? 그는 대공과 한패가 아닌가?

“여기서 대공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무슨 소리야?”

“그는 이미 광석으로 자신의 힘을 증폭시켰어요. 성물까지 가진다면 그 힘은 더 걷잡을 수 없겠죠.”

“이런 걸 말해 주는 이유가 뭐야? 넌 그의 편이잖아.”

“나는 한 번도, 선생님을 배신했다고 한 적 없어요.”

“하지만……!”

한나가 숨을 들이마셨다.

다른 것들은 자신의 착각이라고 쳐도 그럼 마차에서 했던 이상한 말들은 다 뭐였단 말인가.

“넌 마차에서도…….”

“꼬인 성격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해 두죠. 심술이 날 대로 나서.”

제레미가 뒤를 돌아 한나에게 검이 들리지 않은 손을 뻗었다.

“줘요.”

“뭘.”

“보석.”

“…….”

한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괴물을 상대하려면, 괴물이 필요하죠.”

제레미는 스스로 괴물이 되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들처럼 선생님에게 의지가 될 수 없으니 나에겐 이런 역할이 고작이에요.”

“제레미!”

제레미가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이번엔 날 믿어 주면 안 되나요.”

한나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제레미의 눈이 왜 이리도 슬퍼 보이는 걸까.

“한 번만 나를 믿어 줘요. 다시는, 이런 부탁할 일 없을 테니.”

한나의 꽉 쥐어져 있던 주먹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했고, 그의 말에 의심이 들기도 했다.

혹시 보석을 얻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거라면? 보석을 얻고 나서는 태도가 바뀌는 거라면? 

아니, 애초에 제레미가 이렇게 부탁을 할 필요가 있나? 그냥 검을 목에 드리우고 보석을 가져가면 그만이 아닌가.

만약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제레미는 지금, 위험을 홀로 감수하겠다는 뜻인가.

이건 말도 안 되는 부탁이다. 이안을 살리기 위해, 제레미가 죽는 길을 택하라고?

한나의 두 눈이 잘게 흔들렸다.

“믿지 말아요.”

이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단 한 번이에요.”

제레미의 목소리도 머릿속을 메아리쳤다.

누굴 믿어야 하지.

“나는…….”

머릿속에 파도가 일었고, 검은 바다가 범람한다. 한나는 아찔한 선택의 기로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난…….”

누군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주 지독한 시험을.

끔벅. 끔벅.

눈꺼풀이 감겼다 뜨일 때마다 현기증이 일었다. 주위의 비명 소리와 마법이 터지는 소리가 점점 느릿하게 재생됐다.

‘정신 똑바로 차려.’

한나는 도리질을 치며 정신을 추슬렀다.

“……하.”

막혔던 숨이 겨우 트였다. 한나는 이안을 한번 바라본 후 제레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제레미.”

누구라도 베어 버릴 것처럼 사나운 얼굴을 하고선, 그는 어울리지 않게 눈망울이 잔뜩 젖어 있었다. 톡 건드리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 순간, 벽이 허물어지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바닥을 굴렀다.

‘마샤!’

대공의 공격에 마샤가 크게 튕겨져 나갔고, 세자르는 그런 마샤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 순간 세자르가 유지하고 있던 내부의 보호막이 일그러졌다.

쿠궁. 쿵!

한나와 이안, 제레미의 주위로 건물 잔해가 떨어졌다. 그 위급한 상황에 한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널 한 번도 믿은 적이 없다고 했지.”

어쩌면 그의 말이 맞았다. 말로만 너희를 믿는다고 했지 한 번도 진심으로 모든 일들이 쉽게 풀릴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

그건 이안이나 마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한나는 제 품에서 보석을 꺼냈다. 제 손으로 꺼내어 제레미에게 건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그 보석을.

“가져가.”

손바닥을 펼쳐 제레미에게 보석을 건넸다.

“겨우 이걸로 답이 된다면.”

제레미는 자신이 요구했던 보석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빤히 바라만 볼 뿐, 움직이지 못했다.

“이게 너에게 믿음의 증거가 된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못 줄 것 없지.”

한나가 펼치고 있던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이걸 너에게 건네는 건 지독하게 잔인한 일이지 않니.”

그건 다른 아이들을 위해 너를 희생시킨다는 말과 같았다.

한나는 결국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것을 받아든 제레미가 모두를 배신한다면, 그것대로 슬픈 일이고 배신하지 않고 정말 저를 희생한다면 그건 더 슬픈 일이었다.

“차라리 네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럼 모두가 죽을 텐데요.”

“너, 그러지 못하잖아.”

한나의 시선이 제레미의 떨리는 손에 닿아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큰 손이 어찌 이리 가엽게만 보이는 건지.

어찌 이런 아이가 모두를 배신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넌 내게 아픈 손가락이야. 그러니…….”

한나가 제레미의 앞에서 무너졌다. 그의 팔을 손으로 쥔 채 무릎이 땅에 닿았다.

“……이번엔 아프지 마.”

제레미의 떨리던 손이 멎었다. 한나를 내려다보던 제레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투박한 손이 뻗어졌다. 그러고는 한나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 냈다.

“선생님 믿음만으로 나는 충분해요.”

어떤 것이 충분하느냐는 말이 목구멍을 가르고 나오지 못했다. 한나는 둑이 터진 듯 넘치는 제 울음을 삼키기 급급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것까지 지켜 주고 싶었어요.”

제레미의 손이 한나의 꽉 쥐어진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손가락이 떼어지고, 보석이 드러나자 제레미는 묵묵히 그것을 가지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이안이 한나에게 다가와 어깨를 감쌌다. 제레미를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그는 손에 들린 보석을 원래 있던 장식된 자리에 꽂아 넣었다.

“선생님을 잘 보호해.”

제레미는 제 품에서 광석들을 꺼냈다.

“너……!”

이안은 많은 양의 광석에 놀라 제레미를 불렀지만, 제레미의 손에 들린 광석은 이미 그가 가진 성물에 의해 오색으로 발광하고 있었다.

제레미는 갑작스럽게 날뛰는 힘의 파동에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이를 악물고 참아 내고 있었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서 가.”

제레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제…….”

“가.”

제레미가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쓰러진 마샤를 보며 다시 내부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안 역시 대공을 발견했다.

“저랑 전력으로 뛰어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이안이 한나에게 물었고, 한나는 제 뺨을 손으로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이안이 제레미에게 말하자, 제레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때까진 살아 있으라는 뜻이겠지.

“후.”

한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손끝, 하나라도, 다치지 마. 진짜 금방, 올 거니까.”

덤덤하게 말하려 했지만, 한나의 목소리는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뚝뚝 끊겼다.

“믿어요.”

제레미의 믿는다는 말에 한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러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조차 아까워져 몸을 돌렸다.

“가자.”

처음의 기운 넘치던 모습 그대로 이안의 팔을 잡았다. 앞은 병사들로 빼곡했지만 처음보다 상황이 나아져 있었다.

대공의 사병들이 밀리는 추세였다. 한나는 더 볼 것 없이 냅다 달렸다. 이안의 호위 기사들 역시 그들을 따랐다.

멀어지는 한나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제레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뭐하는 짓이지?”

대공은 이안을 찾아 눈을 돌리다 제레미의 상태를 발견하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보시는 대로.”

제레미는 성물인 검을 허공에 휘저으며 손을 풀었다. 몸속에서 휘몰아치는 힘이 쉬이 길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진동하는 팔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계속 움직임을 크게 했다.

대공이 물었다.

“나를 배신하는 건가?”

“애초에 우리가 한 편인 적이 있었습니까?”

제레미는 크게 웃었다.

“박쥐 같은 놈.”

그 순간, 대공의 눈에 분노가 번뜩였다.

“일을 너무 서두르셨습니다. 등잔 밑도 못 살필 정도로.”

제레미의 말에 대공은 제 검을 고쳐잡았다. 다른 것도 아닌 일개 하수인 따위가 제 일을 방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물을 내놓아라.”

“아. 이것 말입니까?”

제레미가 검을 휙 돌리며 대꾸하자, 대공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뺏을 수 있으면, 가져가시지요.”

대공의 몸에 검기가 푸르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기운은 이내 검고 탁하게 변했다.

* * *

“윽…….”

마샤는 옆구리를 손으로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가.”

세자르가 마샤에게 물었고, 마샤는 남은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갈비뼈가 나간 것 같지만, 아직 살아는 있습니다.”

“마력으로 뼈가 장기를 찌르지 않게 보호해.”

“와. 아주 힘든 걸 쉽게 요구하시네.”

마샤의 대답에 세자르는 순간 한심함을 담은 눈빛을 보낼 뻔했다.

“대신관님이……. 아니, 교황님이 할 줄 안다고 다 할 줄 아는 게 아니라고요.”

“난 치료는 못 해.”

세자르는 뼛속까지 전투신관이었다.

“기대도 안 했……. 그런데 저건 무슨 상황입니까?”

꾸역꾸역 몸을 일으키던 마샤가 뒤늦게 제레미와 대공을 발견하고 놀라며 물었다.

“제레미입니까?”

“보이는 그대로.”

“허……. 이게 무슨.”

상체를 일으킨 마샤가 황궁 기둥에 몸을 기댔다. 그의 허리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으윽.”

“허리춤에 있는 건, 성수 아닌가?”

“아…….”

마샤가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게, 이 성수는 조금…….”

마샤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차라리 뼈가 부러지는 게 낫지, 이 폭탄 성수를 제 몸에 붓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도 지금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는 중이니까.”

세자르는 이런 위험한 상황에도 어딘지 모자란 웃음을 흘리고 있는 마샤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또 다른 이에게 향했다.

“제레미.”

저 아이는 어찌한다.

“다행이네요.”

“뭐가.”

“제레미가 배신한 게 아니라서요.”

마샤는 아픈 와중에도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한시름 놓은 듯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을 본 세자르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제일 툴툴거려도 마음은 따뜻한 녀석이었어요.”

“섣부른 판단은 좋지 않다네.”

“꼰대.”

마샤의 말에 이번엔 그의 이마가 구겨졌다. 이 꼬마들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얼른 성수를 부어야겠군.”

“아……. 그건 정말 싫은데.”

“네 친구 숨넘어가기 전에 서둘러야지.”

그렇게 말한 후, 세자르는 여신의 가호를 손으로 그렸다. 황궁 전체를 지지하다시피 두르고 있던 보호막이 한층 두터워졌다. 더 이상 얇은 보호막으로는 내려앉는 황궁을 버텨 낼 수 없었다.

“내 정신이 무너지면 여기 있는 모두가 죽어. 전투에 합류할 수 없다는 뜻이지.”

“결국 제가 또 나서야 한다는 거죠.”

세자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샤는 이를 악물고는 허리춤의 성수를 뜯어냈다.

“영웅의 숙명이란 이렇게도 아픈 값을 치른답니다.”

세자르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긴박한 와중에도 농담을 내뱉는 마샤가 신기해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 대공과 제레미의 사이에서 거대한 파동이 일었다.

“읏.”

“뭐죠?”

검은 바람이 휘몰아쳤고, 그들이 서 있는 땅이 움푹 파였다.

“……좋지 않은 전조.”

세자르는 위태로운 제레미의 상태를 발견했다. 충격의 여파로 제레미의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고, 그의 눈은 이지를 잃은 듯 공허했다.

세자르는 그런 눈빛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기에 중독됐군.”

익숙한 힘의 정체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대공과 비등하게 검을 맞댈 수 있었던 제레미의 검도 이제야 설명이 가능했다.

“인간이 아닌 힘을 다루는데, 정상일 리가 있나.”

“위험한 건가요.”

“이미 마기에 잡아먹히기 시작했어.”

세자르의 안타까운 시선이 제레미에게 향했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졌든, 저건 무모하고 잔인한 선택이야.”

“잔인?”

“마기에 잠식되면 결국 우리는 저자를 처단해야 하지. 그가 아무리 우리를 위했다고 해도.”

세자르의 말에 마샤는 깜짝 놀랐다.

“제레미를 죽이겠다는 말입니까?”

“……마기에 잠식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 그 역시 이지를 잃고 우리를 공격할 테고.”

“…….”

마샤는 허망하게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성물! 성물부터 빼앗으면……!”

마샤가 아픈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세자르가 그를 저지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폭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손 놓고 있습니까?”

“일단 지켜보자고. 최후의 수단은 정말로 최후일 뿐이니.”

세자르는 이안과 한나가 지나간 자리를 보았다.

“때를 기다려 보지.”

복잡하게 맞물린 톱니바퀴들도 차례를 기다리는 법이니.

* * *

어린 아이들의 순수하고 투명한 혐오는 지나치게 잔인하다.

‘소름 끼치는 눈깔 하고는!’

더럽고 끈질긴 것들이 기어 다니던 물냄새에 젖은 뒷골목.

그곳에는 언제나 오물이 뒤섞여 있었다. 다 헤진 천 신발을 적시던 검은 진흙은 죽은 것들의 냄새가 났다.

어릴 적, 그 검은 진흙 아래에는 괴물이 또아리를 틀고 있지 않을까 상상했었다.

‘저 진흙에 발을 잘못 디뎠다간, 빨려 들어가 잡아 먹히고 말 거야.’

지금 기분이 딱 그러했다.

그 탁하고 구역질나는 진흙 속에 가라앉고 있는 기분.

그 끔찍한 느낌.

“감당하지 못할 힘을 탐내다니. 네 몸은 버티지 못할 거다.”

맞닿은 검 너머로 대공이 말했다.

그 순간, 제레미는 번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현재, 대공과 제레미는 수차례 검을 섞으며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이 부딪힐 때마다 주위의 기물들이 부서졌고, 딛고 있는 땅마저 갈라지고, 움푹 파였다. 흙먼지가 감도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 숨이 닿을 듯 가까이 마주했다.

“…….”

제레미는 맞닿은 검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구역질 나는 진득한 느낌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초월자라더니, 별거 없군.”

제레미가 그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검을 잡은 대공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건방진 것.”

아무리 대단한 대공이라 한들, 광석과 성물의 힘이 합쳐진 제레미를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닿아 있던 검이 떨어지는 찰나, 제레미는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 더. 피. 붉은 인간의 피.’

동시에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밀려왔고, 정신이 흐릿해졌다. 환청을 무시하려 하자, 이내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세상이 붉은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혼자 물에 잠긴 듯,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서서히 밀려왔다.

“빌어먹을.”

상태가 좋지 않음을 직감한 제레미는 초조해졌다. 정신을 붙들고 있는 동안 대공을 처리해야 한다.

“으아악!”

제레미는 있는 힘을 다해 대공을 공격했다. 검은 옷이 새처럼 쏘아져 나갔다. 대공은 자신의 검으로 그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막아 냈고, 제레미의 상태를 살폈다.

탁하게 풀린 눈, 쏟아지는 땀, 불안정한 숨.

금방이라도 마기에 잠식될 제레미의 모습에 대공은 마지막 남은 그의 정신과 감정을 파고들어 헤집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날 배신한 게 그 여자 때문인가?”

“닥쳐.”

“그 여자가 목숨을 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닥쳐! 닥치라고!”

“너 같은 건, 이렇게 개죽음을 당해도 금방 잊힐 거야. 여태 그랬던 것처럼.”

대공의 말에 제레미의 퍼붓던 공격이 주춤했다.

‘금방 잊힐 거야. 여태 그랬던 것처럼.’

대공이 자신을 도발해 흔들려는 얕은수를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레미는 점점 이성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나마 남은 감정의 잔여물들이 그의 아픈 곳을 비집고 들어와 파헤쳤다.

“그 여자는 이런 너를 버리고, 황제와 함께 도망갔잖아?”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린 대공의 모습에 제레미의 머리가 순간 핑 돌았다. 그가 작게 비틀거리는 순간, 대공은 그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잘 가라! 그래도 옛정이 있으니 네놈 무덤 옆에 그 여자의 시신도 묻어 주마.”

대공이 제레미의 가슴을 노리며, 일격을 날렸다.

“아, 물론 시체라도 남아 있다면 말이지!”

뚝.

간신히 붙들고 있던 제레미의 정신줄이 끊어졌다.

* * *

안전지대에 들어선 이안은 정신없이 금고를 뒤졌다.

“찾았어요.”

드디어 서약서를 찾아냈다.

그것은 특수 고대 마법이 걸려 있기에, 대공이 피로 맹세한 이상 서약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안이 서약서를 들고 한나의 팔을 잡았다.

“가요.”

이안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안전지대에서 스스로 나섰다. 기사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그들의 의견은 굳건한 결정 앞에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올 때만큼 멀게만 느껴지는 길이었다. 숨이 차서인지, 혹은 두려움 때문인지 한나의 심장은 펌프질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뛰어 대고 있었다.

‘제발 무사해 줘.’

마음은 급하건만, 발은 모래밭을 내딛는 것처럼 무거웠다. 식은땀을 흘리며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도착한 한나는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했다.

“제레미!”

대공의 검이 제레미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 쓰러진 그의 몸 위로 대공은 검을 찔러넣고 있었고, 제레미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에 꽂힌 검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고 있었다.

“제, 제레미……!”

한나가 제레미에게 가기 위해 발을 내딛자, 이안이 한나의 허리를 낚아챘다.

“위험해요.”

“제, 제레미가! 제레미가 검에 찔렸어! 놔! 치료를 해야 해!”

이안은 버둥거리는 한나를 꽉 붙들었다.

“기다…….”

“가야 해.”

하지만 한나는 그런 이안의 손을 순식간에 벗어났다.

“선생님!”

날랜 동작으로 이안에게서 벗어난 한나는 곧장 제레미를 향해 달렸다.

“칼레시안 대공! 멈춰요!”

한나가 소리쳤다.

제발. 제발 죽지 마. 제레미.

끝없이 가슴 한구석을 갉아먹던 불안함의 이유가 이것이었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눈에 새기며 한나는 나아갔다.

“이건 또 뭐야.”

대공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한나를 발견하고 제레미의 가슴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냈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그는 한동안 자신을 거슬리게 했던 이 신관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검이 큰 궤적을 그리며 한나를 향해 뻗어졌다. 피 묻은 검이 내밀어지자, 한나는 숨을 들이켜며 멈춰 서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

찔린다고 생각한 그 순간.

“위험해!”

하얀 것이 눈에 스쳐 지나가며, 몸이 휘청 넘어갔다.

소름 끼치는 살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당혹감이 서린 눈으로 비치는 무너진 건물과 파란 하늘, 그리고 피.

“아…….”

풀썩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한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당신…….”

한나는 더듬더듬 자신을 몸으로 감싼 누군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자꾸만 손에 뜨거운 것이 젖어 들었다.

“세, 세자르 님……?”

등을 길게 베어 나간 자리를 따라 검붉은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세자르 님!”

놀란 한나가 몸을 일으켰고, 세자르의 몸이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정신 차려요!”

한나는 세자르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세자르의 감겨 있던 눈이 파르르 떨리며 푸른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게, 조심 좀, 하라……. 니까.”

대공이 한나를 공격하려는 순간 이안과 마샤, 세자르는 놀라며 나섰지만, 결국 그녀의 몸을 보호하게 된 것은 세자르였다.

“윽!”

세자르와 함께 다가온 마샤가 대공을 향해 남은 마력을 쥐어짜 공격하며 제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세, 세자르 님. 정신 차려요.”

한나는 그 난장판 속에서 세자르를 치료하기 위해 성력을 발현했다.

“이것들이 도대체 무슨 수작들이야!”

대공은 분노에 차 마법에 맞고 쓰러졌던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이제는 몸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멈추시오. 대공. 당신은 이제 끝났어.”

이안이 그의 눈앞에 서약서를 보였다. 그리고 양손으로 서약서를 쥐고, 당장이라도 찢어발기려 하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당장 그것을 내놓지 못해!”

대공은 서약서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혔다. 그는 검을 움켜쥐고 이안에게 달려들기 위해 발돋움했다.

푹―

하지만 대공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

대공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쿨럭.”

그의 입에서 각혈이 쏟아졌다. 벌겋게 충혈된 눈은 마치 달궈진 쇳덩이 같았다.

“컥…….”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몸으로 내려갔다. 날카로운 칼끝이 몸을 관통해 뚫고 나와 그를 반겼다.

“그러게, 마무리를, 윽……. 흐……. 잘하셨어야지.”

대공의 목이 삐그덕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곧 숨이 넘어가리라 생각했던 제레미가 검을 잡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름 끼치는 소리가 대공은 물론이고, 모두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찌익―

종이가 찢어졌다.

“으아아아악!”

“마무리는 확실히 해야 한다는군.”

이안이 서약서를 찢자, 대공은 심장이 뒤틀리는 고통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컥, 크억…….”

배와 입, 눈, 코. 구멍이란 구멍으로 피가 철철 흘렀다.

“끄……. 윽.”

그의 처절한 증오가 섞인 눈길이 이안에게 닿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큭……!”

초라한 죽음이었다. 대공의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완전히 꺼져 버렸다.

풀썩.

그리고 제레미의 몸 역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는 마기가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

한나는 세자르를 치료하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쓰러진 제레미. 고통에 배를 움켜쥔 마샤와 처참하게 일그러진 이안의 얼굴, 그리고 죽거나 다친 기사들과 사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끔찍한 참상이다.

지독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숨이 막히고 머리가 핑 돌았다.

힘없이 고개가 뒤로 젖혀짐과 동시에 한나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툭. 투둑.

뚫린 건물 천장으로 구름이 드리웠고, 빗방울이 뺨을 때렸다.

* * *

“으…….”

그 순간 세자르의 정신이 돌아왔다. 세자르의 몸이 꿈틀거리며 미동하자 한나는 그를 불렀다.

“세자르 님. 괜찮으세요?”

“하……. 죽을 정도는 아냐.”

잔뜩 일그러진 얼굴, 얕게 내뱉는 숨, 땀범벅이 된 하얗게 질린 피부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었……. 잠시만요. 저 제레미 좀…….”

한나는 세자르가 다행히 죽을 정도가 아니란 것을 확인한 후 곧장 제레미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지만, 팔을 붙잡는 세자르에 의해 행동을 저지당했다.

“안 돼.”

“무슨…….”

세자르는 치료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번뜩이며, 제레미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한나의 시선도 그에게 향했다.

그때, 제레미의 눈이 뜨였다.

“제레미!”

한나가 그를 부르자, 제레미가 한나를 바라보았다.

“……제레미?”

하지만 그의 눈빛이 이상했다. 어딘지 공허하고, 탁한…….

“마기에 잠식됐어. 더 이상 그대가 알던 제레미가 아니야.”

세자르는 본능적으로 익숙한 기운을 알아차리고 한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제레미잖아요. 제레미라고요!”

“저 말도 안 되는 재생력을 보고도 그대가 아는 그 꼬맹이라고 할 수 있겠어?”

“……!”

한나가 제 눈을 의심했다. 제레미의 가슴에 생겼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있었다.

“지금, 완전하지 않을 때 죽여야 해.”

세자르의 말에 한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죽이다니요? 누구를? 제레미를요? 어째서…….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정신 차려. 마기에 잠식되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공격할 거라고.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

그리고 동시에 세자르가 제레미에게로 다가가려 하자, 한나가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아 막았다.

“안 돼요.”

세자르의 입술 새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행동은 저 아이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거야.”

“제레미는 내가 키운 아이예요. 훈육도 내가 해요.”

한나의 그러한 말에 세자르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한나와 마주했다.

“그럼, 그대의 손으로 저 아이를 죽이게 해야 하는 건가? 나는 더 잔인해지고 싶지 않아.”

어느새 한나의 눈이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또르륵 흐를 것처럼 그렁그렁 애처롭게 매달렸다.

“으악!”

순간 제레미의 비명 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끊어 냈다. 모두의 시선이 제레미에게 향했다.

저벅. 저벅. 끼이익―

제레미가 검을 바닥에 늘어뜨린 채, 구부정하게 한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피해.”

세자르는 한나를 보호하듯 팔로 숨겼지만 한나는 그의 팔을 손으로 치워 냈다. 그녀의 시선은 제레미에게 못 박혀 있었다.

‘분명 나를 보고 있어.’

한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을 내디뎠다. 세자르가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마치 손가락 사이로 물길이 지나가듯, 한나는 그의 손을 스쳐갔다.

“……제레미.”

“…….”

“제레미.”

“…….”

한나의 부름에도 제레미는 대답 없이 그저 느릿느릿 앞으로만 전진하고 있었다.

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죽이기 위해? 혹은 살려 주길 바라서?

한나는 순간 자신의 이런 생각이 끔찍했다.

‘이 순간조차, 나는 제레미를 의심하는구나.’

한 번도 자신을 믿어 준 적 없다며 슬퍼한 제레미는 결국, 모두를 위해 자신을 던졌다.

“내가 치료해 줄게. 제레미. 내가……. 내가, 언제나 널 치료했잖아.”

한나의 뺨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작은 꼬마일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제레미의 크고 작게 다친 모든 상처를 치료해 주었었다.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할 수 있어야 한다.

제레미의 몸을 치료해야, 그의 곪아 터진 마음의 상처도 치료해 줄 수 있지 않은가.

“이리 와.”

한나가 그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하지만 제레미는 그 순간 검을 들었다. 순간 한나는 덜컥 겁이 났지만, 침착하게 마음을 달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섭지, 제레미. 어서 이리 와. 선생님이……. 선생님이 치료해 줄게.”

손끝이 떨렸다. 그의 검에 죽을까 봐서가 아니라, 이대로 제레미를 잃을까 봐 겁이 났다.

한나의 발갛게 부어오른 눈에서는 끝없이 뜨거운 것이 흐르고 있었다. 빗물과 섞인 그것은 쉴 틈 없이 턱 끝에서 떨어졌다. 마치 세상에 단둘만 남은 듯, 서로를 마주하는 시간.

그 순간, 제레미의 탁하게 잠겨 있던 눈동자에 익숙한 기운이 스쳤다.

‘제레미다.’

한나는 그것이 평소의 제레미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곧장 이어진 제레미의 행동에 한나는 팔을 거두고, 그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제레미!”

제레미가 검을 고쳐 쥐고, 자신의 심장을 겨누었기 때문이었다.

“멈춰! 윽!”

한나는 늦지 않게 그의 행동을 막아 냈다. 작고 하얀 손이 검의 날을 꽉 쥐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손에서는 피가 흘렀고, 불에 데인 듯한 끔찍한 고통이 일었다.

한나는 제레미와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고통스러운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런 한나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파고들었다.

“당신을 다치게 할 거라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어요.”

제레미는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었다. 마기에 잠식되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것도.

“안 돼. 넌 내가 치료해.”

한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제레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알아요?”

“…….”

“선생님을 보고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넌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이번에는 제레미가 고개를 살래살래 가로저었다.

“다음에. 이다음에는……. 그렇게 할게요. 이번엔 선생님이 용서해요.”

제레미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한나는 이것이, 이별의 인사임을 직감했다. 언제나 제멋대로 굴더니, 이제는 이런 작별인사도 제멋대로 하겠다니.

그건…….

그건 절대 용납할 수가 없어.

한나가 검의 바로 옆으로 까치발을 들고 섰다.

“네 손에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너도 죽고, 나도 죽게 되는 거야.”

번들거리는 검이 한나의 목 바로 옆에 위치하게 됐다. 제레미는 그대로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손에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손 떼.”

한나의 말이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인 것처럼, 제레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말에 복종했다. 제레미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한나는 검을 오롯이 제 품으로 가져갔다.

그러곤 검을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

“이게 증폭 효과가 있다고 했지.”

제레미는 한나의 말에 답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온전한 정신이, 다시 가라앉고 있었다.

비틀, 비틀, 한 걸음, 두 걸음.

제레미가 멀어지다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에 한나는 검을 양손으로 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대단한 성물이라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내내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일이었다.

이 성물이, 성력을 한 번만 증폭시켜 준다면…….

한나는 기도했다.

신이든 정령이든, 혹은 조상이나 아무 미신, 어느 것이든 좋았다.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간절함을 담아 한나는 성력을 손끝에 집중시켰다.

‘……안 되는 건가.’

아무런 변화가 없어 실망하려던 그때.

우웅― 웅―

검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설마.”

혹시나 하는 기대는 있었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이게 뭐야?”

“하, 하늘에서 성수가!”

“상처가 치료되고 있습니다!”

“고통이 사라져!”

“사, 살았다!”

기사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웅성 환희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처가, 치료되잖아.”

마샤 역시 자신의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뚫린 천장 사이로 빗물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갑자기 금빛으로 빛났다.

상처가 치료되고, 정신이 맑아지는 신비한 성수가 내리고 있었다.

“신의 은총이야!”

“여신님께서 우리를 살리신 거야!”

병사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헉……. 헉…….”

한나는 갑자기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듯, 현기증이 일었다. 마치 밤새 성수를 만들었을 때의 피로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흐린 시야 너머로 반짝이는 것들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았다! 우린 살았어!”

……살았다. 정말로, 살았어.

한나는 겨우 남은 기력을 쥐어짜 쓰러진 제레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무릎 위로 안아 들었다.

“괜찮아? 제레미, 정신 차려 봐!”

제레미의 몸을 흔들며, 그를 깨웠다. 축 늘어진 몸이 한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제게 안긴 제레미의 검은 머리카락과 찢어진 옷이 물에 젖어 늘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애처로워 절로 눈물이 났다.

이상하게도 제레미의 몸에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심장이 뛰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제레미이…….”

한나가 재차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레미의 가슴을 손으로 두드리며, 성력을 써 보려 했지만, 성물을 사용할 때 성력이 고갈된 것인지 성력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흑……. 흐윽. 제레미, 제레미!”

제레미가 죽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가 버려!”

한나는 더 이상 제레미의 가슴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저 얼굴을 묻었다. 이 모든 것이 제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쭙잖게 원작을 틀어 버리려 했던 것도, 제레미를 믿어 주지 못한 것도, 오늘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것도.

차라리, 그날,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제레미는 죽지 않았을까.

“……흑.”

제레미에게 한 약속은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한나가 오열하자, 세자르와 마샤, 이안이 곁으로 다가왔지만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마샤는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안은 아랫입술을 짓씹었고, 세자르는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두근.

제레미의 몸 위로 엎드려 있던 한나는 꿈틀거리는 어떤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두근. 두근.

“심장……. 심장 소리……!”

한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혹시…… 혹시?

“제, 제레미?”

떨리는 한나의 부름에 눈을 감은 제레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이내 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나 때문에 울어요?”

그 물음에 한나는 더욱 눈물샘이 터졌다. 제레미는 한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엉망으로 젖은 얼굴과 퉁퉁 부은 눈, 여전히 피가 들러붙은 손.

얽히고설킨 머리카락이 그런 한나의 얼굴을 드문드문 가리고 있었다.

제레미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그러곤 한나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가까이.”

제레미의 힘 빠진 쉰 목소리에 한나가 제레미에게 고개를 숙여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한나의 뺨에 머물던 제레미의 손이 머리카락을 스치며 한나의 목 뒤로 이동했다.

동시에 제레미가 말했다.

“나, 이제 첫사랑을 끝내 볼까 해요.”

제레미는 그대로 팔을 당겼다. 뜨겁고, 촉촉한 것이 입술에 닿았고, 피냄새가 훅 밀려들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한나는 너무 놀라 눈도 감지 못했다. 덕분에 파르르 떨리는 제레미의 속눈썹이 보였다.

제레미의 눈에서 반짝이는 물방울이 또르륵 흘렀다. 한나는 그것이 눈물인지, 빗방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말하는 첫사랑은 슬픈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는 건 아닐까.

짧게 섞인 숨결이 떨어졌다. 닿았던 입술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한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자, 제레미가 말했다.

“지독하게도 앓았거든요.”

제레미는 그 어떤 때보다 후련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건 아니지!”

당황스러움에 굳어 있던 한나와 여전히 그녀의 목에 손을 감고 있던 제레미를 떼어 낸 이는 바로 마샤였다. 두 사람 사이를 그대로 파고든 마샤가 한나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꿰찼다.

“감동적인 순간을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누구한테 주둥이를 들이밀어?”

마샤의 뾰족한 말에 제레미가 낮게 웃었다.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도 질투를 하는 것이 우스워서였다.

“윽.”

웃느라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꿰뚫린 장기에 무리가 간 제레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마음 같아선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데, 진짜 죽어 버릴까 봐 참는 거야.”

마샤는 그런 제레미를 부축하며 자신의 어깨에 제레미의 팔을 둘렀다.

“아이고. 뭘 먹어서 이렇게 무거워.”

투정 어린 목소리였지만, 제레미를 부축하는 손만큼은 빈틈이 없었다. 여전히 입을 삐쭉 내민 채 마샤는 발길을 서둘렀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장하네.”

늘 걱정시키는 데에는 1등이라며 투덜투덜 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제레미는 그런 투덜거리는 소리가 밉게만 들리지 않았다.

마샤와 제레미가 치료를 위해 자리에서 떠나자, 이안이 한나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이안은 한나의 몸에 다친 곳은 없는지, 살뜰히 살폈다. 그런 그의 몸도 여기저기 상하지 않은 곳이 없었음에도.

“난 완전 괜찮지.”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는 한나의 모습에 이안은 한시름을 내려놓았다. 이안의 손이 한나의 양어깨를 잡았다.

“다시는 나 때문에 위험해지지 마요. 내가 아니라, 그 누구 때문이라도.”

“너희가 모두 무사하니 됐지.”

내내 긴장으로 굳어 있던 한나의 몸 역시 천천히 풀리고 있었다. 위험이 사라진 지금, 더 이상 두려운 것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떨리는 손은 여전했다.

“너도 얼른 황궁을 수습해. 네가 해야 할 일이 많잖아.”

한나는 아비규환이 된 황궁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안이 있어야 반란 진압의 마무리가 될 테니.

“더 이상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서둘러 줘.”

한나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닿아 있던 그의 한쪽 무릎이 벌떡 일어섰다.

“그럼, 부탁합니다.”

이안이 세자르에게 눈인사를 하며 한나를 부탁했다. 세자르는 그런 그에게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안은 기사단을 이끌고 급한 발걸음을 뗐다.

기사단들은 곧장 무너져 내릴 궁내부의 사람들을 바깥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이안까지 멍하니 바라보던 한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야…….”

한나는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지금도 눈감으면 아찔했던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안이 위험했던 순간, 마샤가 다쳐 피를 흘리던 순간, 제레미가 죽을 뻔했던 고비까지.

모든 것이 순식간이라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짧은 낮잠에 악몽을 꾼 것처럼.

‘그래도 원작은 모두 어그러졌어. 악당들이 된 아이들도 없고, 원작에서 그들을 조종하던 대공도 처단했어. 정말로 끝이야.’

오랜 시간 동안, 마음에 못 박혀 있던 의심과 불안들이 모두 사라졌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한 기분이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어깨를 감싸는 손이 따스했다. 한나는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감사해요. 세자르 님은 언제나 저와 아이들의 의지가 되네요. 보육원에서도, 이곳에서도.”

한나는 세자르에게 감사를 표했다. 언제나 그에겐 큰 빚을 진 느낌이었다. 오늘도 그가 아이들을 위해 교황이라는 지위까지 잊은 채 자신과 함께 황궁으로 달려와 준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손 잡고 일어나.”

세자르는 반대 손까지 아낌없이 내밀며, 한나를 일으켰다. 그의 손에 의지하며 한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이 빠진 다리 때문에 몸이 비틀거렸지만, 세자르의 손이 단단히도 몸을 지지하고 있었다.

“급할 것 없어. 천천히 가면 돼.”

세자르의 느릿한 목소리가 안정감을 선사했다.

“그대를 위협하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어.”

그의 말에 한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지금 우리가 무너져 내리는 건물 안에 있다는 건 알고 하는 말이죠?”

장난스러운 한나의 대답에 세자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가 여기 있는데, 내가 무너지게 둘까.”

이 말이 무어라고, 이리도 든든한지.

한나는 참상이 펼쳐진 끔찍한 길을 걸으면서도 하나 두렵지 않았다. 세자르의 말처럼, 급하지 않게 천천히 걸어 두 사람은 건물을 나섰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