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9. (20/23)

Chapter 19.

“이게 뭐야?”

마샤가 한나에게 종이봉투를 건넸고, 한나는 그것을 얼떨결에 받아들며 물었다.

“편지요.”

“네가? 나한테?”

한나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엎어지면 코 닿을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편지를?

“아뇨. 선생님 부하들에게 왔어요.”

“부하?”

오랜만에 들어 보는 그 명칭에 한나는 몸이 움찔했다.

그래. 그렇게 낯간지러운 놀이를 했었지.

“사람을 보내서 급하게 온 걸 보면, 중요한 내용이지 싶은데요.”

“음.”

하얀 편지지가 어딘지 불안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한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었다.

“같이 봐요.”

마샤 역시 내용이 궁금했던지라 한나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 너무 붙지 마.”

손으로 마샤를 밀어내다가, 그럴수록 더 찰싹 달라붙는 마샤의 모습에 한숨을 작게 내쉰 한나가 편지를 펼쳤다.

두 사람의 눈이 빠르게 글자를 훑고 내려갔다.

“악필이네.”

“알아만 보면 됐지.”

지렁이 기어가는 글자 때문에 읽어 내는 데 조금 어려움은 있었지만, 어쨌거나 내용 전달에는 무리가 없었다.

“……어.”

“흠.”

편지를 거의 다 읽은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충격적인데요.”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갑자기 꾸지도 않은 꿈자리가 사나웠던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이 소식은 아주 좋지 못했다.

“그래서, 광산이 털렸다는 말이죠?”

“이게 말이 되냐고!”

한나는 편지를 쾅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어째 일이 잘 풀리나 싶었지. 아니나 다를까, 광산이 털렸다는 소식이었다. 심지어 탈탈, 털리셨단다.

혈압이 올라 한나는 목덜미를 손으로 받쳤다.

“어떻게 꼬꼬를 재웠을까요.”

“수면 향을 쓴 것 같다는데. 주위에 타고 남은 재가 가득했다네. 꼬꼬가 어떻게 버텨.”

“영리하네요.”

마샤는 꼬꼬를 무력으로 상대하지 않은 미지의 적을 칭찬했다. 이로써 범인은 꼬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준비성도 철저한 것 같고.”

“지금 나만 이렇게 불안한 기분 드는 거 아니지?”

한나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리가 달달, 경망스럽게도 떨렸다.

“제레미를 의심하는 거죠?”

마샤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진짜 수법이 절묘하잖아. 그곳에 꼬꼬가 있다는 걸 안다는 자체가.”

“그렇죠.”

“포기를 모르는 건지.”

“애초에 포기할 생각이 없는 거겠죠.”

“하.”

어쩌면 한나는 성물 검을 이용하는 건 포기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이 없어도 해독하는 성물이 있다면 이용은 가능할 테니.

“이러다 내 발로 찾아가게 생겼네.”

마샤는 탁자 위의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래도 다들 잘 지내고 있나 보네요. 조금 있으면 축제도 한다는데요.”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적응한 걸까.”

아주 터를 잡고 행복하게 살 작정인가.

“어차피 찾는 게 제레미라면, 제가 나서 볼까요?”

마샤가 싱긋 웃으며 한나에게 물었다. 좋은 제안이었지만, 한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라도 말썽부리지 말고 옆에 잠자코 있어 줘.”

이건 진심이었다. 괜히 돕겠다느니 하면서 나서서 안 보이는 곳에 있으면 마음만 더 불안해진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편지 말고 전할 말이 있었는데.”

“응?”

또 무슨 소식일까.

이제 한나는 오는 소식마다 심장이 철렁할 지경이었다.

“대공 저하를 봤어요.”

“그게 왜?”

그 사람이라면 요즘 뻔질나게 황궁을 드나들고 있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는데.

“황궁 밖에서 본 건데, 그 옆에 신관이 따라붙더라고요.”

“신관?”

“초록 눈을 가진 신관.”

“초록……?”

“우리가 아는 누군가랑 닮지 않았나요.”

한나의 눈이 번뜩 뜨였다.

“설마?”

“어쩌면 이번 일이 암흑 길드와 신전, 혹은 황궁까지 복합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의심이 들 만한 소식이죠.”

“황궁까지…….”

한나가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제레미가 연관된 이 일에 신전도, 황궁도 개입하고 있다면 너무 판이 커지지 않나.

“혹시 마탑은 뭐 없니.”

갑자기 조용한 마탑이 오히려 이상해 보이기까지.

“이거 왜 이래요. 선량한 마탑을.”

“온통 분위기가 이상해.”

“갑자기 양 치러 가고 싶지 않아요?”

이 와중에 마샤는 눈치 없이 농담을 던졌다.

“그냥 이민을 갈까 봐…….”

양이고 뭐고, 이 나라를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역시 답은 제레미를 잡는 것뿐이네요.”

“제레미는 가만히 있어도 굴러들어올 거야.”

“전부터 왜 그렇게 자신하는 거예요?”

“그런 게 있어.”

한나는 옷을 더욱 단단히 여미며 대충 말을 흘렸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기나 하자고.”

그게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어쩌면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러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가자. 마샤.”

“어딜요.”

“성수 만들러.”

“성……. 잠깐, 또 그 폭탄 제조하는 건 아니죠?”

마샤의 물음에 한나는 천진한 얼굴로 답했다.

“왜 아니겠어?”

호호, 웃음소리가 뒤따르자 마샤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저럴 땐 악마 같다니까.”

성수의 효과에 누구보다 치를 떠는 마샤였다.

* * *

“으음…….”

몇 시지. 아직 어두운 걸 보니 밤이 꼴딱 새진 않은 모양인데…….

한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릴지 말지 고민했다.

이대로 엎어져 있으면 분명 아침에 목이며 허리며 아침에 아우성을 칠 것이 뻔하다는 걸 알지만, 성수를 만드느라 바닥난 체력 때문에 눈이 뜨이질 않았다.

‘조금만 더 잘까…….’

그냥 포기하고 잠을 이어 갈까 하던 그때, 지난날 이렇게 엎드려 자다가 몇 날 며칠을 앓았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또 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지!

자더라도 폭신한 침대에서 자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번쩍 올렸다.

“악!”

그리고 동시에 깜짝 놀랐다. 어찌나 놀랐던지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너, 너 왜 여기서 그러고 있어!”

급하게 마련한 황궁의 작업실은 정말로 성수를 만드는 용도가 아니라면 볼품이 없었다. 텅 빈 방에 커다란 작업대와 의자 몇 개가 고작인 이곳은 휴식을 취한다거나 머무는 것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일어났어요?”

하지만 그런 곳에서 이안은 마치 그림자처럼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분명 딱딱하기 그지없는 의자일 텐데, 이안이 앉아 있으니 포근한 소파처럼 안락해 보였다.

“왜 여기 있는 거야?”

혹시 다른 사람이 또 있나 싶어 한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혼자야?”

“황궁 안에서 제가 혼자일 수 있을까요.”

부드러운 얼굴로 이안이 대답했고, 동시에 한나의 시선이 문밖으로 향했다. 아마 저 밖에는 호위 기사들이 빽빽하게 지키고 서 있을 것이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아니면 저 모르게 여기가 침실이 된 거예요?”

“잠깐 쉰다는 게 잠들어 버렸어.”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두 손으로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던 한나가 대답했다.

“머무는 방이 마음에 안 들어서라면, 지금이라도 궁을 비워 볼까요?”

“궁을 왜 비워.”

“왜겠어요.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엔 그것도 있으니까, 라고 할 수 있으려나.”

“참 나.”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은.

한나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나저나 이안은 왜 여기에서 책을 보고 있는 걸까.

심지어 잠들기 전보다 방의 불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안의 바로 옆에서 빛을 내뿜고 있는 등불이 아니라면, 잘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정말 그냥 나 보러 온 거야?”

한나는 이 밤에, 그것도 자신이 잠들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옆을 지키고 있을 만큼 급한 볼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했다.

“혹시 무슨 일 있어?”

이런 경우, 보통은 안 좋은 소식이 많던데…….

“그냥 보고 싶어서.”

한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 별 의미 없이 던질 수 있는 말이지. 암.

친구도 보고 싶을 수 있고, 가족도 보고 싶을 수 있고, 하다못해 그냥 직장 동료도 보고 싶을 수 있지.

그런데…….

“흠. 흠.”

그렇게 눈빛이 그윽하면 또 이상하게 받아들여진단 말이지.

“뭘 또 매일 보는데, 새삼스럽게.”

한나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이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었다.

“…….”

그의 손에 펼쳐져 있던 책은 어느새 곱게 접혀 있었다. 한나는 책갈피조차 끼우지 않고 덮인 책이 결말까지 읽힐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됐다.

애초에 끝까지 읽을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닐까.

한나가 이런 딴생각을 하던 와중에 이안에게서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고 있어도 그리운 기분 알아요?”

“응?”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가까이 갈수록 외로워지는 마음 같은 거.”

“그건 또 뭔데.”

한나의 눈에 황당함이 서렸다.

여기서 갑자기 수수께끼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 이렇듯 이안이 묘한 말을 할 때면 그 뜻을 유추하느라 머리가 팽팽 돌아가곤 했다.

“흠…….”

미간을 찌푸린 채 곰곰이 생각에 빠진 한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이안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창문을 통해 불어온 바람에 의해 그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대공에게 서신을 보냈어요.”

“응?”

“일전에 얘기했던 그 일에 대한 답을 줬죠.”

“아…….”

한나는 잠시 생각을 접고, 이안의 표정을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일이 마음에 들게 진행되는 모양이야.”

“그래 보이나요.”

“응. 이제야 피가 도는 것 같은데?”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의 그 위태위태해 보이던 눈빛은 사라져 있었고, 혈색이 도는 것 같았다. 조금 홀가분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안 물어봐요?”

이안의 말에 한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과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네가 하는 결정을 꼭 누군가에게 검증받을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이안보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 사람은 없을 텐데, 옳다 그르다를 판가름해 줄 수가 없지 않은가.

“여전히 마음에 남은 짐이 있어?”

“그런 건 아니에요.”

이안의 대답에 한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럼 됐어. 혹, 일 못한다고 누가 쫓아내거든 나한테 달려와 버려.”

한나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그럼 선생님이 방 한편을 비워 주는 건가요.”

나른한 미소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네가 궁을 비워 주는 것보다는 약소한 일이겠네.”

한나의 말에 이안은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가 황궁에서 소리내 웃는 일을 만드는 이는 한나가 유일했다.

“그것도 괜찮네요.”

“누추한 방이라도?”

“좁을수록 좋을지도 모르죠.”

“이상한 데서 검소하시네.”

이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삐그덕거리는 의자 소리가 울렸다.

“여기서 밤을 새울 게 아니라면, 이제 갈까요?”

“아, 응!”

한나는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중에 만난 이안은 어느 날 만난 그보다 활기차 보였다.

정말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한나는 이안을 따라 방을 나섰다.

* * *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공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의 참모이자 오른팔인 렉스 백작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저도 이런 소식이 오리라곤 예상도 못 한지라…….”

이미 대공의 군대와 백작은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공은 자신이 세워 둔 허수아비가 제 입김에 쉬이 흔들릴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오르면 겁이 많아지는 건 유전인가.”

대공이 중얼거렸다. 그를 선택한 건, 그가 가장 쓰기 좋은 말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온순히 제 말만 듣는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서로에게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하는 관계가 되리라 확신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얌전한 고양이가 제 머리 위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대공의 눈빛이 변했다.

“대, 대공 전하께서 다시 한번 설득을 해 보심이…….”

백작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말했다. 대공은 늘 그렇듯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좋은 의미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제 아비를 닮아 은혜를 모르는 건지.”

미운 오리 새끼를 그 찬란한 자리로 올려 준 것이 자신이거늘.

대공은 다른 이도 아닌 지금의 황제가 자신을 등지려 한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갑자기 나를 배신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야만족들을 동정하는 것도 아닐 테고, 제국을 생각한다면 더욱이 나를 지지해야 마땅하지.”

대공은 그동안의 흐름을 다시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놓친 게 무엇인지에 대해.

“요즘 황제께서 따로 어울린 귀족들이 있나.”

“아시다시피 황제 폐하께서는 대신들을 가까이하는 성격이 아니신지라…….”

“대신들과 접촉한 일은 없다는 건가.”

대공의 중얼거림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은 잠시 고민하더니, 곧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얗고 말간 얼굴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던 한 신관을.

“…….”

그녀가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극도로 사람을 믿지 않는 제 조카가 눈에 띄는 호의를 보이는 인물이라는 것도 호기심을 자아냈지만, 자신을 마주한 태도가 황궁의 어떤 이보다 곧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자신의 배경이나 혹은 기세에 눌려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비일비재했으니.

“그 신관…….”

대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시엔 고작 새파란 신관이 자신을 맑은 눈으로 마주하는 것이 무지에서 나온 용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전하?”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 골치 아픈 상황을 만든 주역이 그 새파란 신관이라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대공이 백작에게 말했다.

“그대가 알아봐야 할 사람이 생겼네.”

“누구…….”

똑똑.

하지만 그 답을 듣기 전,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고, 이내 부드럽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시오. 마시온 대신관.”

대공이 미소를 띠며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반겼다.

“어서 오시오. 마시온 대신관.”

검은 로브로 몸을 가린 남자는 대신관 막시온이었다. 순식간에 안색이 바뀐 대공이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지 않소? 대신관은 여전히 얼굴이 좋군.”

“대공 전하께서도 여전하십니다.”

두 사람은 익숙한 듯 살갑게 인사를 나누며 마주 앉았다. 방 한편에 서 있던 백작이 막시온 대신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대공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백작이 허리를 굽힌 채 대공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백작의 귓가에 속삭였다.

“황궁에 있는 분홍 머리 신관을 감시해.”

“예. 그럼 그 일은…….”

“이 일은 그에게 맡기지.”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물렸다. 날렵하게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몸이었지만, 그는 대공의 옆에서는 언제나 빠릿빠릿하게 행동하는 편이었다.

“하하, 그럼 우리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대공과 대신관의 은밀한 대화가 시작됐다.

* * *

“……그러니까, 이 사람을…….”

검은 옷의 남자는 손에 든 한 장의 종이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길 바란다는 뜻이죠.”

비가 내리는 날씨, 눅눅한 날씨 때문인지 남자의 머리카락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굽실거리는 머리카락 밑으로 붉은 눈은 반쯤 눈꺼풀에 잠겨 있었다.

남자의 물음에 백작이 답했다.

“샅샅이 뒤를 캐라는 거지. 눈치껏 귀찮아질 것 같으면 처리해 버려도 좋고.”

백작은 대공의 앞에서와는 달리 한껏 고양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려 있던 다 타 버린 시가를 바닥으로 툭 던졌다.

“……처리.”

제레미는 떨어지는 시가를 눈으로 좇으며 익숙하고도 껄끄러운 단어를 입안에 굴려 보았다. 여전히 손끝을 스치는 종이의 단면을 손가락으로 훑자, 종이가 서늘하게 살을 긁고 지나갔다.

만약 종이가 조금 더 예리했거나, 손에 굳은살이 얕았다면 베여 버렸을지 모를 만큼 꽤 위험스러운 스침이었다.

제레미의 시선이 백작에게 닿았다. 백작은 여전히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황궁 굴러가는 게 대공 전하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어. 이대로는 우리가 계획했던 일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백작은 야만족을 정벌한 뒤 자신에게 떨어질 콩고물에 눈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자네 길드도 마찬가지지 않나? 이번 일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제레미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어떤 것도 우리 일에 걸림돌이 되어선 안 돼.”

남자의 말에 제레미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럼 이 건은 제가 알아서 하죠.”

제레미가 테이블 위의 종이를 손에 쥐었다. 그의 손에 구겨진 종이가 들렸고, 의자가 끼긱 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백작의 시선이 자리에서 일어난 제레미 쪽으로 올라갔다.

“성물은 잘 관리되고 있는 거겠지? 여차하면 대공 전하께 맡겨도…….”

백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일으킨 제레미가 건조하게 답했다.

“지키는 건, 누구보다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

제레미의 서늘한 시선이 의자에 늘어진 백작에게 내리깔렸다. 백작은 다시 새로운 시가를 꺼내기 위해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머저리같이 빼앗기는 건 제가 제일 질색하는 일이니까요.”

제레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그래야 자네답지. 자네는 큰일을 하게 될 거야. 이번 일이 끝나면 돈과 권력 모든 걸 얻을 수 있겠지.”

차륵―

백작의 새로운 시가에 불이 붙었다. 걸음을 옮겨 그의 발치 앞까지 다가간 제레미가 조금 전 백작이 바닥에 던진 시가를 발로 밟았다. 그러고는 발에 힘을 주어 비벼 껐다.

“태우고 버릴 땐, 조금 더 신경을 쓰세요. 이 하찮은 쓰레기가 언제…….”

빠득. 그의 발이 닿은 곳에서 바닥재인 나무가 일그러졌다.

“큰불을 일으킬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제레미는 분명 웃는 얼굴이었는데, 참 이상하게도 백작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 그러지.”

저도 모르게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레미는 간단하게 목을 까딱이곤 등을 돌렸다. 백작은 그런 제레미의 거대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체구에선 자신도 밀리지 않건만, 이상하게도 제레미에게선 공간을 가득 메우다 못해 숨 막히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백작은 천한 심부름꾼에게 긴장한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제레미가 방에서 나서자 백작은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저놈은 볼 때마다 기분 나쁘단 말이지.”

그가 밟고 간 시가 꽁초는 잿가루가 으깨져 흩어져 있었다.

“쓰레기 같은 범죄자가 불조심은 살뜰하구만.”

백작은 언제 제레미에게 기선 제압 되었냐는듯, 비아냥과 함께 시가를 입에 물었다.

* * *

달칵.

문을 닫고 나온 제레미의 표정은 마치 살얼음판 같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제레미의 부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부하의 시선은 제레미의 손에 들린 구겨진 종이에 닿았다.

“조용한 아이들로 몇 추려. 은밀하게 뒤를 밟아야 하니.”

“누구를…….”

제레미의 눈이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로 향하다가, 이내 거두어졌다.

“대공.”

“예?”

부하는 대공이라는 말에 몸이 흠칫했다.

“하나도 놓치지 말고, 모두 보고해.”

“예, 예.”

품은 뜻은 모르겠으나, 부하는 제레미의 명령에 순응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대로 복도를 가로지른 제레미는 백작저의 입구로 향하는 정원에 위치한 연못에 제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던져 버렸다.

꼬르르륵.

한나의 이름과 정보가 적혀 있던 종이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 * *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하루였다.

틈만 나면 시끄럽게 종알거리는 마샤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고, 볼 때마다 마음 쓰이는 이안 역시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또 적응이 안 되는데.”

황궁의 묘미라면 역시, 우당탕탕인데 말이지.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한나가 고개를 까딱이며 팔짱을 꼈다.

오히려 이제는 조용한 하루가 불안했다. 마치 보육원에서 지내던 날들처럼 말이다.

“한번 둘러보러 나가 볼까.”

사실 너무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심심해진 이유도 있었다. 한나는 얼추 완성된 성수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툭 벗었다.

참고로 장갑에서는 이 고문용(?) 성수를 막아 주는 효과는 없었다. 그냥 기분상 착용하는 것이었다. 하얀 장갑이 벗겨지자 손이 해방감에 꿈틀거렸다.

“마샤는 어디서 일을 하고 있으려나. 아니, 일을 하고는 있는 건가.”

일 안 하고 다람쥐처럼 도망가서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을 뿐인데, 어쩌면 이렇게까지 잘 어울리는지!

“이안은 또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을 테고.”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사실 한나는 자신이 정말로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기억났다.

그건 바로…….

“제레미 녀석은 정말 뭐하고 있는 거지.”

이쯤 되면 보석이라도 찾으러 나타날 줄 알았는데 깜깜무소식이니 더 불안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아이를 둔다면 꼭 이런 기분일까.

“매를 들 수는 없으니 성수를 준비한 건데, 어째 보이기나 해야지.”

역시 사고를 쳐도 보이는 곳에서 치는 게 낫다. 한나는 이렇게 된 거, 황궁이나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곧장 작업실 밖으로 나서자 너른 복도가 나왔다.

“오. 안녕하세요. 잘 지내죠?”

황궁 밥 먹은 지도 꽤 됐다고, 이제는 알음알음 익숙한 얼굴도 생겼다.

“요즘 감옥은 어때요. 아직도 말 안 하고 그래요?”

한나는 감옥에서 만났던 간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거긴 3교대인가? 야간 근무 끝난 거예요? 얼굴이 많이 푸석하시다.”

한때 간수였던 초보병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나가고 난 뒤로는 다른 손님은 없죠?”

손님이란 죄수를 뜻했다.

“예……. 뭐…….”

“정말, 그런 곳에 갇히는 건 끔찍하다니까요. 아 참, 저 무고함이 밝혀진 건 아시죠?”

그 억울했던 날이 다시금 떠올랐는지 한나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하여튼 이제 죄수 오면 대화도 좀 나눠 주고 해요. 거기 너무 인간미가 없다니까요.”

그런 한나의 말에 보초병이 허허, 웃었다.

“어라. 저기 또 아는 얼굴. 하여튼 보초병님, 수고하셨어요. 얼른 들어가서 푹 쉬세요!”

또 아는 다른 사람을 발견 한나는 보초병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인사를 했다. 보초병은 본 적 없는 친화력의 한나를 바라보며 어색한 손인사를 건넸다.

“요즘 말들은 잘 지내요? 칼립……. 칼렙? 클립?”

그는 바로 황궁의 말들을 관리하는 관리사였다.

“클락입니다. 안녕하세요. 신관님.”

“오, 클락 님! 날이 참 좋죠. 그때 그 말은 이제 풀 잘 먹나요.”

일전에 아주 귀한 몸이라는 말 한 마리가 정체불명의 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했다고 성수를 얻으러 온 적 있었던지라 한나는 일단 말에 대한 소식을 물었다.

“예. 덕분에 아주 좋아졌습니다. 감사 인사를 전하러 진작 갔어야 했는데, 간호하느라, 다른 말들 챙기랴 여유가 없어서…….”

“에이, 다 이해하죠. 일하다 보면 다 정신없죠. 말이 나아서 다행이네요.”

한나는 이번에도 아까처럼 관리사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그를 격려했다.

“그럼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찾아와요. 오늘도 수고하세요!”

뿌듯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 황궁에 지나치게 잘 적응한 기분인데.”

역시 사람은 사고도 치고, 구르면서 적응하는 건가.

“갑자기 신전 사람들도 보고 싶네.”

팔짱을 푼 한나가 두 팔을 위로 벌려 기지개를 쭉 켰다. 살면서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어째 오늘은 사람이 그리운 날인가 싶기도 했다.

“마샤는 정말 황궁에 없나.”

늘 어슬렁거리던 공사 중인 궁 근처에도 마샤는 보이지 않았다. 한나는 진한 아쉬움이 담긴 발걸음을 이안의 집무실 쪽으로 돌렸다.

“흥흥~”

그래도 산책이라고 콧노래를 부르며 나아가던 한나는 또 한 명의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흔한 갈색 옷의 시종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일까 싶어 그를 유심히 살피던 한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흐음.”

남자는 평범하게 복도 벽에 걸려 있는 액자를 정비하고 있었는데, 한나의 눈에는 그 모습이 뭔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손이라든지,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모습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말이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이 워낙 소문난 똥촉이니 금방 의심을 거두었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의심의 눈으로 그를 관찰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한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라. 저 사람은…….’

어쩐 일로 촉이 귀신같이 맞아떨어진 상황을 겪게 되는 건가!

그는 바로, 지난날 꼬리를 놓쳤던 바로 그 녹색 눈의 신관이었다.

이렇게 반가운 얼굴이 또 있을까!

* * *

솔직히 이렇게 몰래 누군가의 뒤를 밟는 건, 정말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자연스럽게 뒤를 밟게 되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참 나. 살다 살다 미행이 익숙해지는 날도 오는구나.’

그동안 마샤와 함께했던 잠복이나 여러 가지 일들로 쌓은 능력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나는 반가운(?) 얼굴인 초록 눈의 신관의 뒤를 은밀히 밟고 있었다. 그는 여느 신관들처럼 치료 일을 하러 온 것처럼 황궁을 누비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여느 신관들과 달랐다.

‘벌써 일곱 명째 접촉이잖아.’

남자는 마치 뿌려 놓은 정보책들에게 보고를 받듯이 여러 명의 시종, 시녀, 혹은 기사들까지 말을 섞고 있었다.

누군가 지나가다 본다면 그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 같겠지만, 한나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접점도 없어 보이는 일곱 명의 황궁 사람들을 연달아 만나서 저렇게 일정한 대화를 나눈다는 게 결코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역시, 저 신관이 이번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거야.’

마샤는 신관이 대공과 접선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저 신관은 제레미의 길드와 연관이 있으며, 대공과도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는 건, 대공과 제레미의 사이에도 접점이 있다는 뜻일까. 순간 한나는 이안에게 들었던 대공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초월적인 존재이면서, 전쟁광이라고 했다.

‘위험한 사람이 제레미와 연관되어 있다는 건 정말 징조가 좋지 못한데.’

그런데 그 사이에 낀 사람이 하필 신관이라니. 이렇게 수상한 모양새가 있을 수 있나.

“어. 또 어디 가는 거야.”

심지어 신관은 엄청나게 외향형 인간인 건지 또다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한나는 혹시 오늘도 놓칠까 싶어 얼른 그를 따라갔다.

다행히 황궁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한나는 오늘 신관복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 있었던 것을 스스로 칭찬했다.

이 정도면 눈에 띄지 않고 미행이 가능하겠지.

―라고 생각했던 믿음은 불과 5분이 지나지 않아 와장창 깨졌다.

“누구요.”

동쪽 계단으로 연결된 모퉁이를 돌자마자 한나는 청록색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헉!”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 자시……. 아니, 이 신관 언제부터 눈치를 챈 거지?

한나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누군데 나를 미행하는 거지.”

끔뻑끔뻑.

한나는 눈을 굴리며 뭐라 변명할지 생각했다. 여차했다가 도망이라도 가 버리면, 애써 얻은 기회가 날아가 버릴 것이다.

‘하필 이럴 때 마샤도 없다니. 돌발 상황에는 마샤가 잘 대처하는데.’

“저, 저는…….”

이럴 때 우물쭈물하면 더 의심을 사는 거다!

당당하게 나가자. 당당하게!

한나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다행히 위기상황 대처능력이 조금 발달됐는지 잔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 저희, 어디서 본 적 없나요?”

한나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웃었다. 미세하게 입꼬리가 씰룩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아니, 지나가다가 보니 아는 얼굴이 있길래 알은체 좀 하려고 따라왔는데 글쎄, 도저히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저희 신전에서 자주 봤잖아요. 그렇죠?”

자연스러운 연기와 함께 호호,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저 모르세요? 신관이잖아요. 중앙 신전 신관님 아니에요?”

어차피 들킬 거라면, 정체를 스스로 드러내고 당당하게 미끼를 던지자!

한나는 자신의 소개를 하면서, 은근히 원래 아는 사이였던 척, 상대의 정체를 캐묻고 있었다.

“아……. 예.”

걸려들었다.

한나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행히 중앙 신전 신관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저희가 분명히 자주 보던 사이였는데. 제가 정말 사람 이름을 기억을 잘 못해요. 워낙 정신이 없는 편이라. 그, 이름이 뭐였죠. 주드……. 아, 아닌데. 윌턴……. 도 다른 사람이고, 정말 이놈의 건망증이란.”

한나는 그의 어깨를 손으로 팡팡 두드리며 웃었다.

어째 연기력에 물이 오른 것인지 거짓말도 술술, 표정 연기도 술술 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몰입하느라 정말 아는 사이인데 이름이 기억 안 나는 것 같은 답답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게 바로 메소드 연기?!’

스스로의 엄청난 연기에 감탄하던 그때 신관의 입이 열렸다.

“제로드입니다.”

“아! 제로드! 그러니까요. 제가 제일 처음에 그 이름 비슷하게 얘기했죠? 거의 다 맞았는데. 참.”

제로드.

사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워낙 중앙 신전에는 워낙에 많은 신관들이 있었으니, 한번쯤은 스쳤겠지만 모두의 이름을 외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기억력이 아니라 연기력이었다.

“음……. 그, 그분이랑 같이 봤잖아요. 누구더라, 늘 붙어 다니시는……. 그……. 아아, 정말 기억력이 이렇게 말썽이랍니다.”

한나는 눈을 찡긋거리며 곤란하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기억이 안 나서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그으……! 아, 이것 참. 그분요. 그분!”

한나의 알 듯 말 듯 애타는 ‘그’ 소리에 제로드 역시 덩달아 답답해져 절로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옳다구나!

역시 이건 걸려들 줄 알았다니까.

한나는 삐져나오는 음산한 미소를 보이지 않게 숨겼다.

“네네. 대신관님인데, 참 그분 이름은 늘 헷갈려서.”

조금만 더 긁으면 고맙게도 혼자 술술 불어 줄 것 같았다.

“막시온 대시관님 아닙니까.”

“……아. 맞아. 맞아. 그러니까요. 내 정신 좀 봐. 막시온 대신관님과 그렇게 자주 봤었는데. 저 기억 안 나세요?”

“……기억납니다.”

이 사람은 앞서 말했던, 신관 모두의 이름을 외우지 못한다던 그 일이 가능한 사람인 걸까.

아니면 유독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인 걸까.

‘날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지?’

한나는 미심쩍은 마음을 숨기며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죠. 분명히 마주친 적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최대한 동요하지 않은 척, 생긋 웃자 남자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만남이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며칠 전에도 길에서 만났는데, 그 맛있는 빵집이 있는 곳 근처에서요. 제가 그 집 빵을 좋아해서 자주 가는데, 마침 지나가시더라고요. 호호. 맞죠?”

“유스단 거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쯤 되면 이 사람은 아주 순진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이렇게 콕 찌르면 툭 하고 다 내뱉는 거지?

혹시 정말 제레미의 길드에 드나들었던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까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네네.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요. 신전 사람들을 밖에서 만나는 건 신기하다니까요. 새삼스럽죠?”

이제 대충 얻어야 할 정보는 다 얻었다. 그가 왜 여기 와 있는지까지는 알아낼 자신은 없었다.

그나마 눈치가 없어서인지, 혹은 당황해서인지 자신에게 정보를 술술 불긴 했지만 조금 더 파고들었다가는 의심받을 게 뻔했다.

굳이 위험을 자처할 필요는 없겠지.

“만나서 반가웠어요. 인사만 드린다는 게 말이 길어졌네요.”

한나는 손을 내밀며 자연스럽게 악수를 권했다. 신관은 얼떨결에 그 손을 잡았고, 둘은 마치 반가운 만남이었던 것처럼 인사를 끝냈다.

“그럼, 길 잃지 마시고 황궁에서 일 잘 보고 가세요! 저는 저쪽으로 가는 길이라.”

한나는 의심받지 않게 지나가는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예.”

신관은 자신이 언제 한나를 미행으로 의심했는지도 잊어버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돌렸다.

그제서야 한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휴. 안 들켰다.’

이거 뭐, 이제 연기도 완벽하구만?

이 모습을 마샤가 봤어야 했는데!

기분 좋게 몸을 돌린 가벼운 발걸음.

하지만 세 발자국을 옮긴 한나의 표정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발걸음이 평소와 달리 급하게 옮겨지고 있었다.

* * *

“어디 있는 거야.”

황궁에서 제로드를 만난 후 한나는 곧장 황궁을 나왔다. 그리고 향한 곳은 바로 신전이었다.

한달음에 신전에 도착한 한나는 세자르를 찾고 있었다. 제로드와의 정신없는 대화 속에서 건진 것이 많았다. 그는 단순히 지나간 만남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것들이 뜻하는 바가 꽤 충격적이었다.

‘막시온 대신관.’

그가 막시온 대신관의 사람이라는 것.

암흑 길드에 드나들면서 대공과도 접촉하는 그가 대신관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건 정말 의심스러운 부분이었다.

다른 때도 아니고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의 신전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대신관도 아닌 막시온 대신관이라는 게 한나를 불안하게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

언제나 찜찜한 사람이었던 막시온의 이름을 듣자마자 등골에 소름이 돋았었다.

“이건 정말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정말 자신이 추리한 게 맞는지 아닌지는 막시온을 탈탈 털어 보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은 세자르에게 꼭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막시온이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가 원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세자르의 자리를 빼앗는 것일 테니.

지금 조심해야 할 사람은 교황인 세자르였다.

“어딜 간 거야.”

한나는 열심히 신전을 가로질러 세자르의 방으로 향했지만, 그곳에 세자르는 없었다. 커티스나 모이세이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런 중요한 때에 어디 외출 나간 건 아니겠지.”

하필 지금 길이 엇갈리는 건 싫은데.

평소엔 나가지도 않는 사람이 하필 오늘 안 보인담.

하지만 한나는 다른 곳을 찾아보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 길에서 세자르를 찾아냈다.

“…….”

그것도 꽤, 충격적인 모습으로.

“……이게 뭐야.”

막시온 대신관의 방에서 말이다.

처음엔 열린 문틈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간 것이었다. 그곳이 막시온 대신관의 방인지도 몰랐다.

열린 문틈으로 반짝이는 모이세이의 갑옷이 보였고, 이내 그 옆으로 갈색 머리의 커티스가 보였다.

눈을 조금 돌리자 그곳엔 세자르가 등을 진 모습이 보였는데, 창문 밖을 보고 있는 세자르의 뒤로 어떤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막시온.’

그는 분명 막시온이었다!

‘무, 무슨 일이지? 저 사람이 왜 무릎을 꿇고 있어? 설마,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을 벌인 건가?’

놀란 한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슨 일이에요?”

적막하던 방에 한나의 목소리가 또랑또랑 울렸다. 커티스와 모이세이, 심지어 입구를 등지고 있던 세자르의 몸도 돌려졌고, 모두가 한나를 보았다.

세 사람은 각각 놀란 얼굴로 변했다.

“한나.”

“선생님이 여긴 어떻게…….”

세자르와 커티스가 입을 열었고, 그중에 가장 기민하게 움직인 사람은 모이세이였다. 모이세이는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막시온을 바라보는 한나의 시야를 막았다.

“무, 무슨 일이죠?”

언뜻 보기로 막시온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마치 강제로 붙잡혀 온 사람처럼.

‘진짜 무슨 일이 있긴 했나 봐. 세상에.’

“그댄 무슨 일이지. 황궁에 있는 줄 알았는데.”

세자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어색하기 그지없다는 걸 한나는 이미 눈치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 줘요.”

답답하게 왜 아무도 대답을 안 해 주냐고!

한나는 세자르를 닦달했다.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뭐라고요?”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조금 발끈했다.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 누구 때문에 황궁에서 신전까지 버선발로 달려왔는데!

이건 아주 서운한 부분이었다.

“아마 내가 오늘 전하려던 소식이 지금 상황과 아주 상관이 있을걸요.”

“소식?”

세자르가 되물었다.

“안 그래도 전 막시온 대신관의 일로 교황 성하를 찾고 있었어요.”

한나는 일부러 세자르의 이름 대신 ‘교황 성하’라고 호칭했다. 서운함을 드러내는 표시였다.

“막시온 대신관에 대한 일?”

세자르가 의문 섞인 눈으로 한나를 보았다. 커티스와 모이세이 역시 한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한나는 막시온을 힐끗 바라보고 말했다.

“……그런데 이미 이렇게 된 꼴을 보니, 제가 굳이 말을 안 해도 될 것 같기도 해서…….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왜 저분이 저러고 있는지.”

한나의 말에 커티스와 모이세이의 시선이 세자르에게 돌아갔다.

“이자는 성물 절취와 교황 성하 살해 용의자가 되었어.”

“컥.”

세자르의 말에 먹은 것도 없는데 사레가 들렸다.

어우.

막시온의 비리나 혹은 음모에 대한 의심만 가지고 온 자신보다 훨씬 충격적인 일이 펼쳐지고 있다니!

기껏 여기까지 뛰어왔다고 거들먹거릴 깜냥도 안 되는구나!

“……그, 어……. 음. 많이 바쁘시겠네요. 그럼 저는 방해하지 않고…….”

“그대가 전하려던 소식은 뭐지?”

“아?”

민망해질까 서둘러 이 자리를 뜨려던 한나는 얼뜨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분명 엄청나게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를 전하러 온 거였긴 한데…….

교황 성하를 죽이고 성물을 가져갔다는 혐의 앞에서는 어떤 의심도 상대가 안 되는데?

“뭐, 비슷한 맥락이었어요.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셔서 의심스럽다……. 뭐, 그런 얘기. 이미 다 알고 있는……. 아니, 저보다 잘 아시는 것 같네요.”

“그대에게까지 들킬 정도면 여기저기 흘리고 다닐 만큼 많은 일을 했나 보군.”

세자르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한나는 그제서야 세자르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폈다. 분명 그가 설명한 상황이라면 세자르는 엄청난 분노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평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니.

새삼 대단한 정신력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막시온 대신관 멱살을 잡고 탈탈 털고 있을 텐데.’

어쨌거나,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던 것이었다.

‘내 예상보다 다들 일을 잘하는구나…….’

특히 커티스일까.

대단한 정보를 자신만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세자르는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머쓱한 기분이 들면서 세자르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괜히 방해가 됐네요.”

한나는 다소곳이 손을 포개고 꾸벅 인사를 했다.

괜히 멋있어 보이는 등장을 했지 말입니다.

“후……. 후후.”

그때, 모이세이에게 제압당해 조용히 무릎 꿇려져 있던 막시온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모두의 시선이 막시온에게 향했다.

막시온의 잔뜩 헝클어진 옷과 엉망인 머리카락에서 강렬했던 저항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정말 막시온이 교황 성하를 해쳤을까.’

한나는 아무리 그래도 같은 신전 밥을 먹은 사이에, 그것도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한 대신관이 교황 성하를 해치고 성물을 빼돌렸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끽해야 성수나 빼돌리면서 뒷돈이나 받고, 대공과 으쌰으쌰해서 또 새 사업이나 하려나 싶었던 건데.

막시온 대신관의 웃음소리가 소름 끼치게 맴돌았다.

“너희들은 다 멍청한 짓을 하는 거야.”

“말을 조심하시지요.”

막시온의 말에 커티스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저지했다. 한나의 마음도 커티스와 같았다. 괜히 입방아 떨어서 더 화를 돋우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이렇게 날 잡는다고 너희가 뭘 얻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이쯤 되면 자백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하나. 한나는 막시온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묵비권을 행사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었던가?

“막시온.”

세자르가 그를 불렀다.

“자네의 처우를 고민 중인데, 이렇게 재수 없게 굴어 준다면 나로선 고마운 일이군. 눈을 파낼지, 혀를 자를지, 뼈를 부술지 고민할 것 없이 목을 조를 수 있다면 나에겐 가장 좋은 일이거든.”

아니, 방금 이 말, 세자르가 한 게 맞나?

한나는 놀란 눈으로 세자르를 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웃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면 미쳐 버린다더니, 이 남자의 상태가 딱 그런 것일까.

도대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세자르의 분노에 광기가 섞여 있었다. 놀라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자르가 이해가 됐다.

‘나라도 아버지 같은 분의 원수라면…….’

당장 목을 조르고 싶었겠지. 게다가 세자르는 그럴 힘이 있으니 더욱.

“하지만 지금은 성물이 있는 곳을 알아내는 게 우선이겠지. 내겐 아주 애석하게도 말이야.”

“하하. 네놈이 교황 자리에 올랐다고, 뭐라도 된 줄 아는군.”

막시온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네가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해야지.”

막시온의 물음에 세자르는 덤덤히 답했다.

“마물들 틈에서나 구르고 온 너희는 진짜 무서운 게 뭔지 몰라.”

“대신관께서도 지금 진짜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모이세이가 막시온의 언사를 저지하려 했다. 한나는 모이세이의 의견에 동의했다. 모르긴 몰라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마당에 쓸데없는 말까지 얹을 필요는 없지.

“신전은 산산조각이 날 거다. 평화나 부르짖는 멍청한 것들의 이용가치는 사막에서 끝났어.”

“누가 누굴 이용한다는 거지.”

커티스가 막시온에게 물었지만, 막시온은 껄껄거리며 커티스의 질문을 무시했다.

“너희야말로 누가 누굴 심판하겠다는 건지. 우습기 짝이 없어.”

순간, 막시온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이세이가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막시온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제 책상으로 달려들었다.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막시온은 책상의 서랍을 열었고, 어떤 종이를 꺼내 들었다.

“마법 스크롤입니다. 교황 성하, 물러나십시오.”

모이세이는 막시온을 저지하는 대신 세자르를 보호하는 쪽을 택했다. 그는 몸으로 세자르를 막시온의 시야에서 차단했다.

“그렇게 교황의 개처럼 굴어 봐야 너희도 얻을 거 하나 없을 거다.”

자신의 과거를 덧대는 것일까.

그의 말이 한나는 어이가 없었다.

“후…….”

마법 스크롤을 든 채로 막시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스크롤인지 알아차릴 수 없으니 모두 긴장 상태였다.

혹시 폭발이나 살상용 주문이 담겨 있을지 모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필요한 건 이미 다 얻었어. 네놈의 그 자리까지 얻었다면 탐스러운 트로피가 됐겠지만, 없어도 상관없지. 이 신전을 송두리째 뽑아내고, 새로운 신을 받들면 그만이니까.”

“불경스러운 말이군.”

새로운 신이라는 말에 세자르가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너희들은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지금 이 판국에도 불경스러움이나 논하고 있다니.”

쯧, 막시온의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움직였다.

“무슨 짓을 하려는……!”

커티스가 스크롤을 찢으려는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막시온의 행동이 한발 빨랐다.

“평생 잠겨 죽는지도 모르고 우물 안에서 썩어 가라고!”

찌직―

스크롤이 찢어졌고, 한나는 급히 눈을 질끈 감고 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했다.

뭐가 터질지도 모르니까.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스크롤이 찢어진 뒤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모이세이의 목소리에 한나도 꾹 감았던 눈을 떴다.

“뭐야. 막시온 대신관은 어디 갔죠?”

방금까지 책상 앞에서 폭탄이라도 터트릴 것 같았던 막시온이 보이지 않았다.

“워프 스크롤이었나 봅니다.”

커티스는 그가 사라진 책상의 서랍을 살폈다. 그곳엔 여러 가지 마법 스크롤들이 있었다.

“순간 이동?”

“많이도 가지고 있는 걸로 봐선, 평소에도 곧잘 사용한 모양입니다.”

커티스는 서랍에 빼곡한 갖가지 스크롤을 손으로 쓸었다.

“어디로 갔는지 추적할 수 있나.”

“능력이 좋은 마법사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능력이 좋은 마법사라.”

순간 세자르의 시선이 한나의 시선과 얽혔다.

“……왜 절 보세요.”

세자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전 아주 평범한 신관인데요.”

하지만 한나도 세자르의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아. 마샤, 이런 건수는 며칠을 거들먹거릴 텐데.’

결국 오늘도 필요한 이는 마샤였다.

* * *

질질질.

넝마처럼 찢어진 신관복이 흙바닥에 끌렸다.

“윽. 더럽게 걸렸어. 하필 그놈이…….”

막시온은 오늘의 일을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필 꼬리가 밟혀도 세자르의 부하에게 밟히다니.

물론 이번 일이 그가 빼돌린 성수와 신전의 자원을 추적하다 보면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일이긴 했다.

그동안은 신전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이용해 그런 추적을 피할 수 있었지만, 세자르가 신전에 돌아와 교황이 된 이상, 눈 가리고 아웅은 끝이었다.

막시온 역시 이런 날을 아예 예감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을 뿐.

조금 더 신전에서 취할 수 있는 이득에 눈이 멀어 하루, 이틀, 미적거렸던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이렇듯 무사히 탈출한 이상 더 이상 거리낄 것은 없었다. 막시온은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해 도착한 성의 입구에서 경비병에게 손을 흔들었다.

“후……. 대공 전하께선 계신가?”

“예. 바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경비는 막시온의 등장에 얼른 동료에게 상황을 전했다. 한시름 돌린 막시온은 그제야 제 꼴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되짚어 보게 되었다.

“이렇게 대공 전하를 뵐 수는 없지. 우선 씻을 물과 옷을 준비해야겠어.”

“집사님을 호출하겠습니다.”

경비가 바삐 움직이자, 막시온 역시 저택으로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들어갔다.

* * *

“꼴이 말이 아니군.”

대공은 막시온의 상처 가득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신관들이라고 마냥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진 않나 봐.”

대공의 농담에도 막시온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신관이라고 다 점잖고 고상하지 않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마물이나 잡던 폭력적인 패거리니까요.”

막시온은 대답을 하면서도 언짢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긴, 이 제국에서 그만큼 전투에 특화된 이들도 없겠지. 신전의 고리타분한 교리에 얽혀 있지 않다면 참으로 탐나는 인재들인데 말이야.”

대공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천적으로 무력과 힘을 숭고하게 여겼다.

힘이라는 건 그 자체로 아름다운 형질이었다.

그것이 강한 힘이라면 더더욱.

그는 그저 강한 이들을 사랑했고, 그 능력을 높이 샀다. 그것이 적이든, 아군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

“그들은 더 오래 사막에 발이 묶여 있었어야 전하의 일에 도움이 됐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신전은 본질적으로 전쟁이나 분쟁을 막고 싶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대공이 막시온을 이용해 사막으로 가는 물자 조달에 문제가 생기도록 계획해 그들의 일정이 미뤄지게 한 이유였다.

다만 그의 계획에 문제라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유능한 신관들이 악조건 속에서도 일을 빨리 마무리 지은 것이었다. 오히려 그의 방해가 얼른 일을 끝마치고 돌아가고 싶게끔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걸,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도 신전의 발목을 잡는 것들은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지금만 해도 저희가 빼돌린 전투 신관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여야 할 겁니다.”

“듣기로는 교황이 된 그자가, 일당백을 넘어 군대도 거뜬히 상대할 거라던데.”

농담기가 빠진 얼굴로 대공이 중얼거렸다. 그의 유능한 참모들은 사막에 빼곡하던 마물을 상대한 세자르의 능력을 치밀하게 분석해 알려 주었다.

“우리가 괜히 벌집을 건드린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차분하게 말하긴 했지만, 대공의 음성에는 예리하게 벼려진 신경이 여실히 드러났다.

“신전이 아무리 눈이 돌아도, 감정으로 움직이는 집단이 아니니까요. 사실상 공식적인 적을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요. 복수보다는 용서를 택하는 게 그들의 방식 아닙니까.”

막시온의 입술이 뒤틀렸다. 그가 평생을 답답하게 여기던 신전의 자비로움에서 발을 빼자, 이리도 속이 뻥 뚫릴 수가 없었다.

“황궁 쪽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막시온의 물음에 대공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진 않는 법이지만, 이번 일은 내게 큰 상처를 줬어.”

“황제가 대공 전하의 뜻을 거스른 겁니까?”

막시온은 대공이 만들어 주다시피한 황좌에 앉은 황제가 대공의 뜻에 반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배신이 아닙니까? 어찌 대공 전하의 힘을 이용해 놓고! 이제 와서!”

막시온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대공은 희미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던 거겠지. 기껏 동아줄을 건넸더니 돌아온 건 끊어지다 못해 썩어 빠진 밧줄이라니.”

“신의가 없는 자입니다.”

“하지만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라네. 원래 짐승도 배가 부르면 위험을 감수하고 사냥을 하진 않거든.”

“은혜를 갚아야지요!”

대공은 막시온의 그 말이 조금 우스웠다.

은혜를 갚는 인간이라……. 그게 가능한가 싶기도 했다.

지금만 해도 제 앞에 앉은 막시온은 교황의 은혜를 입고 신관이 되었지만 결국 그의 등에 칼을 꽂아 넣었지 않은가.

역시 인간은 자신의 과오는 이리 쉽게 잊곤 했다.

“아무래도 황제의 마음을 흔드는 자가 황궁에 있는 것 같더군.”

“누굽니까 그게.”

“분홍 머리의 신관.”

“한나 신관 말입니까?”

“아는 자인가?”

대공의 말에 막시온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 신관이 황제가 어릴 때, 그를 키웠습니다.”

“확실히 유대관계가 남다르겠군.”

“……차라리 그쪽을 제거를 하심은…….”

막시온의 조심스러운 말에 대공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쉽게도, 황제는 멍청이가 아니라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에게 더 반발심을 가지겠지.”

“그, 그렇다면…….”

“한번 변한 마음을 돌리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라네. 심지어 이제 그의 마음은 꽤 값이 비싸졌거든.”

대공의 말에 막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면, 나는 전쟁터를 구르며 온갖 인간군상을 접했다네. 그래서 사람을 믿지 않지.”

“그 말씀은…….”

“내가 도르핀 평야의 전투에서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사람들은 내가 패배했다고 했지. 실제로 난 궁지에 몰려 있었다네. 나에겐 선택지가 있었어. 패배를 인정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느냐, 마지막 발악을 하느냐.”

“하지만,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왜 승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나는 절대적으로 불리했고, 패색이 짙었다네.”

“그, 글쎄요…….”

막시온이 말끝을 흐렸다. 딱히 신경이 쓰이진 않는지 대공이 피식 웃었다.

“두 가지 이유지. 첫째는 내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두 번째는 극악한 확률이라도 승리할 수 있는 수를 쥐고 있었다는 것.”

“역시 대공 전하이기에 가능한 기적이지요.”

막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공을 칭송했다.

“난 그래서 항상, 한 가지 일을 진행할 땐, 부러 여러 가지 수를 만들어 놓는다네. 그건 황제를 만드는 일에도 예외가 아니었지.”

대공의 말에 막시온의 눈이 번뜩였다.

“그, 그 말씀은…….”

“잘못된 전술은 빨리 접어야지. 나에겐 얼마든지 다른 수가 있다네. 실제로 한번 했던 일을 또 못 할 것도 없고.”

대공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 그건……. 황제를……?”

“썩은 싹이 더 뿌리를 내리기 전에 뽑아내야지. 그에겐 애석하지만, 황가의 핏줄은 널리고 널렸다네.”

대공의 말에 막시온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말은 황제를 또 바꾸겠다는 뜻이었다.

황제가 바뀐 지 고작 얼마나 되었다고…….

하지만 대공은 허튼 말을 흘리는 허언가가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는 것은, 그것을 이루어 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겁쟁이들을 싫어해.”

대공의 시선이 자신의 집무실 밖,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병사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언제 출격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잘 훈련된 병사들이 가득 차 있었다.

* * *

“폐하!”

신전에서의 사건 이후, 한나는 다시 황궁을 찾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슨,

“이 문양, 황실 문양 맞죠?”

마법 스크롤의 황실 문양을 확인함과 동시에 마샤를 찾기 위해서였다. 한나의 손에 스크롤이 달랑거렸다.

한창 보좌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안이 놀란 듯 한나를 보았다.

“아. 일하는 중이셨군요. 죄송…….”

“아니에요. 들어와요.”

이안의 말에 보좌관 알렉스는 하던 대화를 멈추고 방을 나서려 했다.

“아니, 전 방해하러 온 건 아니고……. 계속 일하셔도…….”

“다 끝나 가던 대화였어요.”

이안이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하지만 그의 말과 다르게 보좌관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아무래도 쉬운 일을 처리하던 중이 아닌 것 같은데…….

“어서 와요.”

어느새 이미 가까이 다가온 이안이 한나의 손을 잡아 제 곁으로 이끌었다.

“그럼.”

보좌관이 방을 나섰고, 한나는 얼떨결에 이안의 손에 이끌려 책상으로 갔다. 심지어 이안은 한나를 자신의 의자에 앉혔다.

“아니, 이 자리는…….”

감히 신관 나부랭이가 앉을 자리가 아니라고!

놀란 한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이안이 한나의 어깨에 팔은 얹으며 그 동작을 막았다.

“어디 봐요.”

이안은 한나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 전에 한나의 손에 들린 스크롤을 손으로 만졌다.

어깨를 감싼 팔과 제 손을 겹치듯 스크롤을 만지는 손.

한나는 그의 품에 쏙 들어가 있었다.

“어…….”

당황할 틈도 없이 이안은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황가의 문양이 맞군요.”

“이런 건, 황제만 갖고 있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말 그대로 황가의 문양이니 황족들은 쉽게 구할 수 있죠.”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있어?”

“그건 어렵겠어요. 이건 황실용으로 마법사가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요.”

이안의 설명에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게 어디로 통하는 건지는 마법사들이 알 수 있겠지?”

“그렇지 않을까요.”

이안의 눈매가 휘었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닌데, 그저 한나와 밀접해 있다는 데에서 오는 기분 좋음이었다.

한나는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 이안에게 얻을 정보가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난 마샤를 찾으러 가야겠다!”

그 당당한 외침에 이안의 표정이 조금 묘하게 일그러졌다.

웃는 것도 아니고, 찌푸린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

“그렇게 제 앞에서 다른 남자를 찾으러 가겠다고 하면…….”

그리고 장난기 섞인 목소리.

여전히 장갑이 덮인 이안의 손이 한나의 손목과 손을 단단히 감쌌다.

이안의 상체가 숙여졌고, 한나의 귀에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내가 상처 받잖아요.”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였음에도 이상하게도 한나는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었다. 이안의 긴 손가락이 한나의 턱 끝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상처는 무슨!”

한나가 이안의 손을 치워 내며 말했다. 멀쩡하던 얼굴에 열이 올랐다. 괜히 방금까진 느껴지지 않던 체향이 훅 밀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냄새일까, 꽃향과 나무향이 섞인 것 같은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알다시피 감성이 여린 편이라.”

자잘한 웃음소리가 이안의 말끝에 뒤따랐다.

“참나. 여리긴 누가 여려. 그렇게 치면 상처받은 내 감성은 벌써 넝마다!”

한나는 괜히 이안의 손이 닿았던 곳을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어느새 겹치고 있던 손이 떨어지고, 그가 스크롤을 움켜잡았다.

“누구 거예요?”

이안이 책상에 걸터앉았고, 한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손에서 스크롤이 흔들리고 있었다.

“막시온 대신관.”

“무슨 일로 추적하는 건데요.”

“그 사람이 교황 성하의 타살 용의자거든.”

한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안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의 손이 나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래도 생각에 빠진 모양이었다.

“그자가 도망을 가 버려서 마샤에게 마법 발동된 곳에 남은 마력으로 어디로 갔는지 추적하려고.”

“흠…….”

이안은 여전히 한 손으로 스크롤을 굴리고 있었다. 허공을 떠돌던 그의 시선이 제 손에 들린 스크롤로 향했다. 말없이 한참을 그것을 응시하던 이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을 할 신관이 선생님밖에 없나요.”

“나만큼 강심장이 또 없거든.”

“위험한 일에서 손 떼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였어요.”

오. 이런. 눈치가 없었구나.

한나는 아차 싶었다.

“우리 폐하께서 걱정이 되나 봐.”

“아무래도 제가 그런 입장이라.”

옅은 미소와 함께 입꼬리가 휘었다.

다정……. 이건 다정이다. 다정하게 눈치 주고 있음이야!

한나의 두 눈이 흔들렸다.

“마음이 무거울수록 걱정도 많아지죠.”

이안이 스크롤을 한나에게 내밀었다.

“안전한 곳에 얌전히만 있어 준다면 참 좋겠지만…….”

사르륵, 종이가 손에서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나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건 또 선생님답지 않으니까.”

이안이 웃자, 그의 주위가 환하게 빛났다.

타이밍이라는 게 꼭 그렇다. 이런 장면에서 때마침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드는 이유가 뭘까.

이안의 머리카락이 이토록 눈부신 금빛인 이유는?

왜 얼굴은 수려하고 피부는 고와서 그냥 웃는데 하이틴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 같냐고!

한나는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상황에 멍하니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어서 가 봐요. 급할 것 같은데.”

“어, 아. 응.”

이안의 말에 한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후, 하마터면 냅다 조용히 가만히 있겠다고 고개 끄덕일 뻔.

그리고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끼익.

무거운 문이 열리고, 슬쩍 이안을 돌아본 한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총총 복도를 달려나갔다.

“…….”

한나가 떠난 후, 여전히 책상에 기대어 있던 이안은 책상을 짚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그의 팔 옆에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몸으로 막고 서 있던 서류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것은 모두 칼리시안 대공에 대한 정보였다.

그의 군대, 그의 세력,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한 모든 자료들.

이안이 깃펜을 집어 올리고는, 수많은 서류 중 여백이 남은 서류의 귀퉁이에 까만 글씨를 써 내려갔다.

‘막시온 대신관, 성물.’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미소는 팽팽하게 드리운 긴장감에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알렉스.”

“예. 폐하.”

“근위대장을 불러 줘.”

황제의 말에 알렉스의 얼굴에 사뭇 비장감이 감돌았다.

* * *

“몰라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고,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넌 최고의 마법사라며!”

“마법 역추적은 제 특기가 아니라서.”

마샤는 뒷짐을 지고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잖아.”

한나는 그런 마샤의 모습을 뾰족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오후 낮잠을 자야 한다는 마샤를 굳이 끌고 나오느라 온갖 좋은 말로 그를 구슬리기까지 했는데, 결국 남은 건 허탈감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커티스와 모이세이 역시 기운이 빠지긴 마찬가지였다.

“흐음. 하겠다고 몇 날 며칠을 매달린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마샤는 막시온 대신관의 방을 구경하듯 한 바퀴 크게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서재의 책 표지를 투둑투둑, 긁고 지나갔다.

막시온 대신관의 의자에 편히 기대어 앉아 있던 세자르의 시선이 마샤의 움직임을 좇았다.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

세자르가 마샤에게 물었다. 그의 말에 마샤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굳이 확실한 증거를 위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요.”

“짐작하는 바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군.”

세자르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한나의 생각은 그와는 달랐다.

“너 지금 아무 생각도 없는 거지.”

한나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어 하는 것 같은데.

그러자 마샤가 검지를 까딱까딱 저은 후, 그 손가락으로 대신관 책상의 서랍으로 가리켰다.

“……?”

모두의 시선이 그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그 서랍에는 남은 스크롤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대신관은 도망에는 익숙하지 않았나 보네요.”

“왜?”

“허술해도 너무 허술하잖아. 나라면 비상용 스크롤을 찢으면 이곳이 폭파되게끔 장치를 만들었을 텐데.”

“……그건 너무 무서운 말이잖아.”

마샤의 말에 몸이 절로 흠칫했다.

그럼 우리 다 죽었다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대신관은 치명적인 힌트를 남기게 됩니다.”

“뭔데?”

가장 먼저 한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서랍을 열심히 보았지만, 여전히 여러 장의 스크롤만 굴러다닐 뿐이었다.

“이 사람은 정리벽이 있어요. 저기 책장을 봐도 연도별로 책이 정리돼 있고, 책의 높이가 튀지 않게 같은 것들만 강박적으로 모아 놨잖아요.”

마샤의 말에 대신관의 책장으로 눈길이 갔다. 그러고 보니 정확하게 같은 높이의 책만 있는 게 보였다.

보통 책은 다양한 크기로 나오기 마련인데…….

그것에서 위화감을 느끼진 못했었는데,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다는 말과 덧붙여 책장에는 먼지 한 톨 없다는 것도 서서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나치게 깔끔하죠?”

앞에 놓여진 책상은 여전히 반들반들했다. 그 난리통 속에서도 이렇게 말끔하게 보존되다니…….

“그게 무슨 상관인데?”

“봐요. 여기엔 스크롤이 다섯 개 남아 있네요. 대신관이 하나를 썼을 테고, 원래는 여섯 개였다는 얘기죠. 지금은 이렇게 공간이 남지만 여섯 개라면 정확히 빈틈없이 서랍에 맞아 떨어졌겠죠.”

“으음. 그렇지.”

“파란 끈이 두 개, 노란 끈이 두 개, 그런데 빨간 끈은 한 개가 있네요.”

마샤가 서랍 속에서 빨간 끈의 스크롤을 집어 들었다.

“설마…….”

한나의 눈이 커졌다.

“아마 평소 성격이 중요한 건 2개씩 가지고 있어야 했을 거예요. 저 깊은 책장이 같은 책들이 두 줄로 만들어진 이유와 같겠죠.”

마샤의 말에 한나는 얼른 책장으로 뛰어가 책을 하나 꺼내 보았다.

가로길이에 정확하게 맞게 꽂혀 있는 책은 뻑뻑해서 잘 빠지지 않았지만, 있는 힘껏 책을 뺐다.

“오!”

책을 들어내자, 뒤편에 정확히 같은 제목의 책이 하나 더 있었다.

“너……. 너 천재야?”

갑자기 분위기 셜x 홈즈……!

“이날을 위해 각종 탐정 소설을 섭렵했죠.”

마샤는 스크롤을 제 이마에 붙였다 떼며, 명탐정 주인공 같은 미소를 찡긋 날렸다.

마치 명탐정이 사건을 풀고 난 뒤, 멋진 미소를 날리는……. 그런 모습?

한나는 그 오글거리는 장면에 눈을 감아 버렸다.

“확실히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요.”

커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뭔 똥 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끼워 맞추면 딱 들어맞는 탐정들의 ‘어거지로 끼워 맞춘 것 같지만 딱 맞아 떨어져!’ 추리 그 자체……!

“이 스크롤이 어디로 향할지도 맞춰 볼까요?”

마샤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그런 것까지 추리가 가능하다고?!

정말 희대의 천재 탐정……?

“칼레시아 대공의 성.”

마샤의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숨을 삼켰다. 커티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마샤에게 닿았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대신관의 뒷배가 대공이니까요.”

마샤의 말에 한나를 포함한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들리는군.”

“오늘에서야 모든 실마리를 이어 붙였다고 할 수 있죠.”

마샤는 제 손에 들린 스크롤에 묶인 매듭을 풀었다. 그러곤 종이에 그려진 마법진을 유심히 살폈다.

그사이, 세자르의 시선은 한나에게 향했다.

“그대도 알고 있었던 일인가.”

대공과 대신관의 사이를 묻는 말이었다. 한나가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도 여기 오고부터는 그 둘의 사이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긴 했지만…….”

황궁에서 만났던 신관이 대공과도, 그리고 대신관과도 접점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전 아직 단정 짓는 단계는 아니었는데. 그, 무죄 추정의 원칙이랄까요.”

이렇게 한 명 한 명 다 의심하자면 결국 대공과 맞닿아 있는 이안까지 의심이 타고 올라가지 않는가?

평소 그녀는 확실히 드러난 정보만 믿자는 주의였다.

지금 같아선 의심 가는 인물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머리가 과부하였다.

“아니, 마샤 네 말이 맞다고 쳐도 어느 바보가 이런 상황에 티나게 홀랑 본진으로 튀겠어?”

“아마……. 대신관?”

마샤가 어찌나 진하게 웃는지, 그의 볼에 보조개가 쏙하고 들어갔다. 마치 이 상황이 놀이인 것처럼 즐거운 웃음이었다.

“에이. 그런 바보는 아니라고 확신해.”

한나의 말에 마샤는 손에 들린 스크롤을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그럼, 확인해 볼래요?”

두근두근.

한나는 그 말에 자동으로 심장이 뛰었다.

‘잠깐만. 나 설마 추리 놀이에 완전 맛 들린 거야?’

아주 큰일인데?

하지만 다행일지, 불행일지, 마샤의 도발(?) 후 스크롤을 찢고 당장 ‘신나는 모험!’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바로, 세자르의 손이 스크롤을 부드럽게 가로챘기 때문이었다.

세자르는 마샤의 손에서 빼낸 스크롤을 다시 돌돌 말아 접었다.

“위험한 일을 자처하는 게 퍽 익숙해 보이는군.”

세자르의 시선이 한나에게 못 박혀 있었다.

한나는 은근슬쩍 눈을 피했다. 사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죠. 요 근래, 위험을 자처하는 일이 참으로 많았지요.

“그럴 리가요.”

그러나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잡아떼는 게 급선무였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숨기는 게 참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세자르나 신전에는 말이다.

“비밀이 많은 건 힘든 일이지.”

세자르는 스크롤을 제 품속에 넣었다. 한나에게는 그게 꼭 말썽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메세지로 느껴졌다.

‘이쯤하고 손 떼라는 의미겠지.’

그 순간, 한나와 마샤의 시선이 맞닿았다. 웃고 있는 마샤의 눈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저, 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친구 좀 보시오!

마치 ‘우리 같이 사고 쳐요.’라고 눈치 보내는 것 같잖아!

한나가 어이없어 하던 그때, 세자르가 한나를 스쳐가며 말했다.

“그대가 지금 저 친구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

그에 한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랬구나. 똑같았구나……. 거참, 머쓱하여라.

세자르와 커티스, 모이세이가 방을 나갔다. 둘만 남은 마샤와 한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마샤가 눈썹을 까딱이자 한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넌……. 정말……. 대단하다.”

포기를 모르는 정신, 누구에게 배운 건지 정말 훌륭하지 않은가.

살짝 고개를 저은 한나가 낮게 탄식을 뱉었다.

* * *

“으악!”

“그렇게 버둥거리면 정말 떨어져요.”

하지만 비명을 안 지를 수가 없다.

“높아! 높다니까?”

“그럼 하늘을 나는데, 높죠.”

지금 한나는 하늘을 나는 중이었다.

결국 마샤의 꼬임에 넘어가고 만 그녀는 대공가의 염탐을 나서기로 했다.

“정말 이렇게 해서 갈 수 있는 거야? 떨어지는 건 아니지?”

“절 못 믿어요?”

“못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제 목숨을 하늘에서 저당 잡혀 있는 마당에, 못 믿는다는 말이 나오겠냐고!

“걱정 마요. 이대로만 가면 대공의 성이 나올 테니.”

“으악! 천천히 가! 뭐가 바빠! 여유를 가져. 마샤.”

대공가까지 어떻게 갈지 고민하는 한나에게 마샤는 텔레포트를 권했지만 사실 한나는 마법 이동의 후유증이 심한 편이었다.

‘굳이 그 지독한 멀미 같은 것을 피하겠다고 까마득하게 이 높은 하늘을 날고 있다니. 이럴 거면 차라리 멀미를 하는 게 낫지 않나?’

다시 느껴지는 공포에 한나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냥! 마차나 타고 가는 걸 상상했다고!”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가요.”

그에 마샤는 개구진 미소로 답했다.

능글거리는 미소에 순간 한나는 팔뚝이라도 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마샤의 품에 일명 공주님 안기 포즈로 이동되고 있는 마당에 그의 팔을 때렸다간 바닥과 얼굴로 인사하기 딱 좋은 상황이지 뭐.

심지어 꽉 붙들고 있는 손을 떼어 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아이고, 무서워 죽겠네!

“그래서 얼마나 남은 건데. 이제 다 왔어?”

“그거 알아요?”

“응?”

갑자기 불안하게 왜 이래.

한나는 꽉 쥐고 있던 마샤의 팔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하늘에선 길 찾기가 힘들어요.”

“땅을 봐! 보라고! 완전 지도잖아! 아까는 이대로만 가면 된다며!”

위성 내비게이션이 따로 있나. 밑을 보면 알지 않니?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

어이가 없어진 한나가 침묵했다.

“네가? 고소……. 뭐?”

“제가 겁이 많잖아요.”

“…….”

됐다. 말을 말아야지.

한나는 그의 눈을 외면했다. 마샤는 그냥 한나를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 부러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바람을 가르던 두 사람의 몸이 허공에 멈췄다. 둥둥 떠 있는 모양새가 지나가던 사람들이 본다면 까무러칠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마샤는 모습을 숨기는 마법을 잊지 않았다.

“음.”

“왜?”

무려 고소공포증이 있다던 마샤는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를 빤히 보는 그의 모습에 한나는 덩달아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자신이야말로 정말 무서워서 밑을 볼 수가 없었다.

“뭔데. 왜 그러는데. 도착했어?”

살랑살랑 바람이 불 때마다 마샤의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우리가 갈 필요가 없어진 것 같네요.”

“응?”

무슨 소리인지, 정말 답답해진 한나는 결국 눈을 가늘게 뜨고 땅을 내려다보았다. 꽉 붙든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본 한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게 뭐야?”

붉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길을 따라 빼곡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이미 그 끝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게 많은 행렬이었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네요.”

마샤의 시선이 저 멀리, 황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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