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Chapter 18. (19/23)

Chapter 18.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그리고 방금 그 소란은 도대체…….”

“전 일을 하러 왔어요.”

“일?”

“선생님이 가진 물건이 필요하게 됐거든요.”

한나는 제레미의 시선이 제 품에 못 박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설마…….”

“맞아요. 그 성물을 노리고 온 거.”

한나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게다가 갑자기 나타난 제레미는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이런 껄끄러운 상황을 예상이나 한 듯, 여유롭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이게……. 왜 필요한데.”

흘러나오는 한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제레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광산과 관련된 일에 어느 정도로 발 담그고 있는 거지.

순간, 한나는 진한 두려움이 치밀었다. 설마, 이 일이 교황 성하를 살해한 일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많이 놀라지는 말아요.”

제레미의 긴 팔이 뻗어졌다. 하얀 천에 덮인 검의 손잡이에 제레미의 손이 닿았다.

“잠깐!”

양팔로 막으려 했지만, 당연히 한나가 무력으로 제레미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했다. 지체 없이 성물은 한나의 품을 떠나게 되었다.

검을 강탈한 제레미는 낮은 천장 때문에 허리를 다 펴지 못한 채, 한나의 옆 손잡이를 손으로 짚었다.

덕분에 그를 올려다보게 된 한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놀란 눈이네요.”

좁은 공간 때문에 두 사람은 몹시도 가까워져 있었다. 제레미는 속이 훤히 보일 것 같은 옅은 한나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상처를 받은 건가. 아니면…… 두려움?”

제레미는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한나의 모습을 관찰했다. 분명 할 말이 많을 텐데.

하지만 한나는 선뜻 말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는 목적이 뭐야.”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한나의 반응에 제레미는 김빠진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난 그런 선생님 모습이 좋더라. 위기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는 모습.”

“장난하자는 거 아니야. 그게 왜 필요한 건데!”

한나는 사실 지금 절박한 마음이었다. 제발 제레미가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대답을 내어 주길 바랐다.

“쉽게 생각해요. 난 언제나 악동이었고, 지금은 악당이 된 거라고.”

“넌 그런 사람 아니잖아.”

“날 의심하던 선생님은 다른 사람이었나?”

제레미의 말에 한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날, 자신이 의심한 것 때문에 이렇게 비뚤어진 것일까.

“알잖아요. 난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놈인 거.”

“하, 너…….”

한나가 반문하기도 전에 제레미가 말을 이었다.

“난 나 때문에 선생님이 많이 속상하길 바란다고 하면, 날 미친놈으로 볼 거예요?”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사람은 누구나 홀린 것처럼 이상한 일을 하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한나는 지금의 제레미도, 잠시 뭐에 홀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제정신이 아닐 만한 사연이 있으니, 그러려니 해요.”

“제레미!”

한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리고 그때, 제레미의 손이 한나의 턱 끝에 닿았다.

“뭐든 최선을 다하려면 내가 잘하는 것부터 알아야죠.”

한나는 제레미의 팔목을 손으로 잡았다. 손의 위치를 옮기려 했지만, 단단한 손은 미동도 없었다.

“이제 내 방식대로 멋대로 굴 테니, 계속 지켜봐요. 동정이든 걱정이든, 다 내가 먹어 치울 테니.”

“너 지금 이상해.”

“제정신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원래 사람은 그래요. 상처받으면…….”

제레미의 얼굴이 한나의 귓가에 다가왔다.

“미쳐 버리기도 하거든요.”

낮은 목소리에 털이 쭈뼛 선 그 순간, 제레미의 몸이 한순간에 멀어졌다. 그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뜯어져 나간 문으로 몸을 돌렸다.

“제레미!”

한나가 다급히 제레미를 불렀지만, 그는 가볍게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금방 다시 보게 될 거예요.”

휙.

제레미는 가벼운 동작으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한나는 여전히 혼이 빠진 듯 멍한 상태였다.

“……제레미.”

이미 떠나고 없는 제레미를 불러 볼 뿐.

* * *

한동안 멍했던 한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괜찮으세요?”

가장 먼저 마부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부는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마차의 문짝이 뜯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위협용으로 뭘 날린 건지 주위의 풀과 흙만 많이 상해 있었다.

“나는 괜찮은데, 아가씨는 괜찮으시오?”

“전 괜찮아요. 그것보다…….”

한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저희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요?”

검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레미아 마을에 갈 이유가 없었다.

“이 고생을 하고 다시 돌아간다고?”

“그게…… 그렇게 됐어요.”

엉덩이는 다 갈리고, 검은 도둑맞고, 소득 없이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알겠수다. 일단 들어가서 앉으쇼. 내 저 문짝만 챙겨서 다시 말을 몰 테니.”

한나는 굳이 문짝을 옮기는 것까지 도와준 뒤 마차에 올라탔다. 얼떨떨한 감정이 조금 진정되자 그제야 긴 한숨이 나왔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었지.”

갑자기 몰려오는 피곤에 마른세수를 해 보았지만, 눈을 감아도 떠도 앞이 깜깜하긴 매한가지였다.

* * *

결국 한나는 황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의기양양하게 떠났던 것 치고는 허무한 귀환이었다.

그런 한나가 가장 먼저 찾은 이는, 다름 아닌…….

“마샤!”

마샤였다.

“선생님?”

마샤는 휴일을 보내고 온다며 아침부터 손을 흔들며 떠났던 한나가 이곳에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황궁에서 나간 거 아니었어요? 얼굴은 또 왜 그래요.”

어딘지 화가 난 표정의 한나를 보며 마샤가 물었다.

“회의하자.”

“네? 회의요?”

다짜고짜 회의를 요청하는 한나를 보자, 마샤는 어이가 없어졌다.

무슨 같이 일하는 동업자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람.

“우리 아직 북부 패밀리잖아.”

“……무슨…….”

이미 다 지나간 갈라티아 마을 얘기가 왜 나오는 건지.

마샤는 어리둥절했지만 일단은 씩씩한 기세로 걸어나가는 한나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궁 외벽이나 고치는 일보다는 이쪽이 훨씬 재미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오늘은 무슨 사건을 가지고 왔을지, 내심 기대도 되었다.

“우리가 할 일이 생겼어.”

“우리가?”

마샤는 한나와 함께하는 일이라면, 뭔지 듣지 않아도 그러겠다고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제레미 계도하기’야.”

“제레미?”

어느새 마샤는 한나의 옆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넌 친구의 의리로, 나는 한때 양육자였던 책임으로 제레미를 갱생시켜야 해.”

“뭘…… 갱생시키는데요?”

마샤의 물음에 한나는 걸음을 멈추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레미가 나쁜 길로 빠진 것 같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샤의 입술이 씰룩였다.

“반응이 왜 그래?”

“설마 여태 제레미가 ‘나쁜 길’에 안 빠져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마샤는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한나의 이런 모습은 너무 생뚱맞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암흑길드 수장이라는 걸 알았을 때 이미 나쁜 일을 한다는 걸 눈치챘어야 정상이 아닌가?

“세상에 돈 만지는 일이 무결한 일이 어디 있어. 나는 그 정도로 꽉 막히진 않았다고. 특히 너희 때문에 깨우친 게 많지.”

“아니, 너희라니요.”

마샤의 반박을 가볍게 묵살한 한나가 말을 계속 이었다.

“하여튼, 이번엔 그거랑 달라. 제레미가 정말 흑화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인 마샤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음……. 도를 넘어선다는 말?”

“도만 넘어서겠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마……. 세계 정복쯤 되려나.”

세계 정복.

장난스러운 마샤의 모습과는 다르게 한나는 퍽 진지한 얼굴이었다.

광석을 가진 악당들은 고작 돈을 벌고자 함이 아니라, 세계를 피로 물들이겠다는 광기에 사로잡히고 만다.

제레미가 자신의 우려대로 광석의 힘을 빌리려 하는 거라면 정말로 원작의 사건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한나와 달리 마샤는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선생님, 상상력이 지나친 거 아닌가요. 세계 정복? 애들 동화도 아니고.”

마샤는 살래살래 손을 저었다.

“네가 좋아하는 북부의 광석을 제레미가 싹 쓸어 갈 예정이라면?”

“어떻게요?”

아무리 제레미라고 해도, 고대 마수인 꼬꼬를 상대하고 광석을 갈취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마샤의 생각을 무 자르듯, 한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큰 힘이 생길 거야.”

“흐응.”

“그리고 이제 광석은 그 광산이 아니라도 사막에서 우후죽순 생겨 날 테고.”

“음……. 계속해 봐요.”

“근래에 사라진 성물들이 제레미의 손에 있을지도 몰라.”

“성물들?”

한나의 이야기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하자 마샤도 덩달아 집중하게 되었다.

“지금은 내 손에 있던 성물을 가져간 거지만…….”

“선생님 걸 가져가다뇨.”

“내가 지금 네가 어렵게 훔쳐다 준 검을 도둑맞고 왔거든.”

그와 동시에 한나는 마샤의 눈앞에 빈손을 흔들어 보였다.

“제레미가?”

마샤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만에 하나…….”

“만에 하나?”

자신을 따라 진지해져 가는 마샤의 모습에 순간 한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그녀는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마샤에게 바짝 다가가 발뒤꿈치를 들고 귓가에 속삭였다.

“신전의 성물까지 제레미의 손에 있을 수도 있어.”

“……!”

마샤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한나는 한 걸음 물러났고, 마샤는 눈을 끔뻑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뭐……. 아무래도 큰 사고를 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만약 이걸 신전이 알게 된다면 교황 성하를 해친 용의자 물망에 오를지도 몰라.”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 검이 어제 내 것이 되지 않았다면 황궁의 성물도 훔친 격이고.”

“그도 그렇네요.”

“모두의 적이 되는 거지.”

마샤는 그제야 한나가 왜 그리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는지 이해하게 됐다.

“솔직히 이렇게 들어 보면, 그가 범인이 맞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끼리 의심하지 말자.”

“실컷 의심할 정황을 다 알려 줘 놓고.”

“제레미가 처음부터 성물에 관한 일에 얽혀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아.”

한나는 이곳에 오는 동안 많이 고민했다. 마샤처럼 제레미가 처음부터 모든 일의 배후가 아니었을까, 의심도 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그를 변하게 만든 것 같아.”

지난날, 자신을 의심하는 제 행동에 제레미가 변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상처를 줘서.”

한나의 목소리에 풀이 죽자 마샤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사춘기 애도 아니고, 상처받았다고 흑화하는 건 뭐예요.”

“걔가 그렇게 보여도, 사춘기라고 한번 속 썩이는 것도 없이 지나갔거든.”

“그럼 이제 와서 늦은 사춘기다?”

“뭐,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마샤가 낮은 한숨을 내쉬고, 한나의 양어깨를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그러자 방황하던 한나의 시선이 마샤에게 향했다.

“정신 차려요. 선생님. 고작 선생님 말에 휘둘리는 그 녀석도 문제지만, 이렇게 말랑한 마음으로 그 녀석을 대하는 선생님도 문제예요.”

“내가……?”

“언제까지 오냐오냐할 건데요. 그가 정말 교황을 죽인 범인이라고 해도 선생님은 제레미 편을 들 거예요?”

“…….”

한나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고, 마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일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그 녀석이 선생님의 검을 가져간 건 맞잖아요.”

“그렇지.”

“그 녀석, 열 살의 어린애 아니에요.”

“그걸 누가 몰라.”

마샤가 한나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나한테 했던 것처럼, 제대로 교육시키라고요.”

“너한테?”

마샤에게 뭘 했더라.

한나는 북부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아.”

“비 오는 날 먼지 날리게 후드려 패면 정신이 좀 들겠지.”

마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너를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때렸어!”

“비슷한 충격이긴 했어요.”

“너 완전 허풍이 심하다.”

한나의 뾰족한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마샤는 계속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신전에나 황궁에 말하기 싫은 거죠? 이 상황.”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읽힌 한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우리가 해결해 보죠.”

“드디어 마음이 통하는구나. 그럼 뭐부터 하지?”

“뭐긴 뭐예요. 회의지.”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회의하자고 했잖아!”

“아. 그랬나요?”

처음 한나가 그랬던 것처럼, 마샤는 사람들이 없을 만한 곳을 생각하며 황궁 복도를 걸었다. 한나는 긴 다리로 척척 걸어나가는 마샤의 뒤를 재빨리 따라갔다.

“그런데 왜 네가 의욕적이니까 또 불안하지?”

“의심도 병이에요.”

“순수하게 도와주려는 거 맞지?”

“자꾸 그러면, 나도 삐뚤어져 버릴까 봐요.”

“그런 농담하지 마.”

“얼굴은 사춘기 소년 같지 않나?”

“뭐라는 건지.”

한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샤의 농담에 잔뜩 드리웠던 마음속 먹구름이 조금은 걷혀 나가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마샤가 꽤 의지가 되는구나.’

그동안 아이들이라고 노심초사 걱정하기 바빴는데, 이렇듯 위기의 상황에 도움이 되는 마샤를 보고 있자니 어딘지 마음이 찡하게 울렸다.

적어도 한둘 정도는 제대로 자란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제레미가 진짜 범인이면, 존경스럽겠는데요.”

하지만 찡한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건 무슨 소리야.”

웬 개풀 뜯어 먹는 소리인지.

“적어도 꿈은 이룬 거잖아요. 그 녀석 어릴 때 꿈이 세계정복하는 마왕이었는데.”

“……그게 말이 되니?”

“마왕은 아니라도 비슷하게는 된 거 아닌가.”

아주 재미가 있다는 듯 껄껄 웃는 마샤를 향해 한나가 조용히 등짝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아! 아프잖아요. 때릴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니었어요?”

“너부터 정신 교육 시켜야겠어.”

마샤는 입을 쭉 내밀면서도 끝까지 시답잖은 농담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 긴장이 풀린 한나의 얼굴을 보며,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바스락. 바스락.

한나는 제 머리에 두른 보자기를 고쳐 매고 있었다.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굴 거예요?”

평소 제복을 입고 다니던 마샤는 오늘 검은 옷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너야말로 진짜 부자연스럽거든. 온통 검은 옷이 뭐야. 수상한 사람이라고 티내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은 작은 빵집 한편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살피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옷이 많거든요? 하지만 그 보자기는 아닐걸요.”

마샤는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를 마시며 한나의 머리 보자기를 손짓했다.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한나가 정수리부터 턱까지 두른 보자기는 의도와 달리 조금 튀었다.

“꽃무늬라도 피하지 그랬어요.”

그냥 평범한 천이라면 그나마 낫지. 보자기엔 꽃이 예쁘게도 수놓아져 있었다.

“가진 게 이것밖에 없었어. 급하게 나오느라.”

한나도 자신의 모습이 조금 튄다고 생각되긴 했기에 머쓱하게 보자기를 손으로 쓸었다.

“이게 무슨 염탐이에요. 그냥 놀러 나온 거지. 선생님은 왜 꽃무늬 하나만 더해져도 그렇게 튀는 거예요?”

마샤가 신기하게 한나를 살폈다. 일단 한나는 머리색부터가 평범하진 않았다.

옅은 색의 분홍 머리카락은 반짝거리기까지 해서 하얀 피부, 금빛 눈동자와 더해져 조금만 뭔가를 더해도 사람을 튀어 보이게 만들었다.

새하얀 신관복만 입어도 사람들은 한나를 귀신같이 구분해 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음이었다.

“나라고 이렇게 튀고 싶은 줄 아니.”

“다음엔 어두운 수건으로 해요.”

“참고할게.”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도 나 못지않게 튀거든?”

“잘생긴 얼굴을 어쩌겠어요. 가려도 빛이 나는데.”

“…….”

한나가 질린 눈으로 마샤를 보았다.

“아니에요?”

얄밉게 비죽 올라간 한쪽 입꼬리를 손으로 내려 주고 싶다는 충동을 참으며 시선을 돌렸다. 저렇게 당당한 것도 탐탁지 않았지만, 그에 반박할 수 없는 처지가 더 약올랐다.

“아니. 머리카락 색이 튀는 건데.”

그래서 괜히 다른 트집을 잡았다.

“붉은 머리카락은 제도에 흔하죠. 난 그들과 다른 한 스푼의 조미료가 있는 거고.”

고작 데운 우유를 먹는데도 고급진 느낌이 드는 걸 보니, 더 이상 반박은 의미가 없었다.

“많이 먹어라.”

한나는 이내 마샤에게 관심을 끊고 창밖을 보았다.

이곳은 다름 아닌, 제레미의 은신처가 있는 곳 주위의 빵집이었다. 보통 형사 드라마를 보면 차 안에서 잠복을 하고 하지만 이곳엔 자동차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차를 세워 두기엔 워낙 눈에 띄고, 결국 선택한 곳이 가까운 빵집이었다. 그나마 몸을 숨기기에는 낫지 않을까 싶어 들어온 것이었다.

“이러고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언제 오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뭐 그런 당연한 말을.

“근데 우리 오래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한나는 힐끗, 빵집의 계산대 쪽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오늘 남은 빵 다 계산하기로 했어요.”

“와. 마샤 너, 마탑에서 월급 많이 주나 보다?”

한나는 마치, ‘이 빵집 통으로 빌렸어요.’ 같은 말에 조금 놀랐다. 마탑은 신전과 달리 월급이 따뜻하고 넉넉한가 싶기도 하고…….

“선생님 황궁 출장 수당 대신 받아왔어요.”

“응?”

크림이 가득 든 빵을 베어 물던 한나는 방금 들은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궁에서 주는 수당.”

“……잠깐만. 네가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누구 수당?”

“선생님 수당.”

다시 한번 짚어 주는 마샤의 말에 한나의 손에 들려 있던 빵에서 크림이 푹하고 튀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었다.

“……그걸……. 그걸 왜!”

“목소리 줄여요. 그러다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여기 있는 거 다 알겠네.”

태연한 마샤를 바라보며 한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묶어 두고 있었다. 이대로 크림 범벅된 손으로 마샤의 검은 옷깃을 쥐고 탈탈 흔들 것 같아서 인내해야겠다.

“설마, 제 돈으로 했어야 했나요?”

하지만 이 계획이 전부 자신 때문에 시작된 일이라는 걸 알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다음엔……. 다음엔 이럴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상의를 좀 해 주겠니.”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한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피 같은 내 돈.’

“어쨌거나, 선생님 돈은 제레미를 위해 알차게 쓰고 있는 걸로.”

“혹시 좀 깎아 주신다고 하진 않았어?”

한나는 일말의 희망을 걸고 마샤에게 물었다.

“정가.”

방금까지 맛있게 먹고 있던 빵의 크림이 입안에 쓰게 감돌았다.

* * *

“하암.”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다. 시시콜콜한 농담도 하다 보니 지쳤고, 두 사람은 종이에 빙고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밖 좀 살펴.”

“목 아파요. 개미 새끼 한 마리 드나드는데.”

“저기가 맞는 거야? 네가 정보를 잘못 입수한 거 아니야?”

“마탑 정보가 그리 허술하진 않아요.”

마샤의 확언에도 한나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암흑길드 아지트라더니 그곳에 드나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제레미가 오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이라도 드나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러다 해지겠네.”

“그 정도 각오도 안 하고 왔어요?”

마치 애송이를 보는 듯한 마샤의 눈길에 한나는 발끈했다.

“무슨 소리. 3박 4일 예상했거든.”

“오……. 전 그렇게까진 아닌데. 그럼 선생님이 좀 더 수고해요.”

“참 나.”

하여튼 얄미워 죽겠다니까.

한나는 거의 테이블에 엎드리다시피 몸을 앞으로 쭉 늘어뜨렸다.

“교대로 감시하자.”

“자는 건 아니죠?”

마샤는 엎어진 한나의 뒤통수를 손으로 콕콕 찌르며 물었다.

“건드리지 마라.”

“진짜 피곤한가 보네.”

“이렇게 앉아만 있으려니까 더 힘든 것 같아. 나가서 체조라도 하고 올까.”

“그럴 거면 차라리 저기 아지트 앞에서 하지 그래요. 나 여기 있다고 티내면서.”

“얄미워.”

한나가 구시렁거렸다. 맞는 말이라도 마샤가 하면 괜히 얄미웠다.

“자꾸 나 찌르지 말고, 바깥이나 잘 살피라구.”

“잘 살피고 있어요.”

마샤는 한나의 머리에 쓰인 보자기 무늬를 손으로 톡톡 긁어 내려가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수상한 사람 나타나면 말하고.”

한나의 목소리가 점점 잠겼다.

“자는 거 아니죠?”

“설마. 그냥 눈 감고 생각만 하는 거야.”

“눈을 감았어요?”

“아니. 아니. 전혀.”

한나의 비몽사몽한 말에 마샤가 조금 웃었다.

“혹시 그 수상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제레미나, 제레미 동료 같은 사람들.”

“음…….”

마샤는 아지트의 앞을 빤히 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 ‘수상한’ 범주에 신관도 포함되나요?”

“응?”

거의 가물가물 잠에 빠질 뻔했던 한나가 고개를 들었다. 졸음이 서린 황금빛 눈동자가 마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관이라니?”

“신관 자체는 의심스럽지 않지만……. 저 아지트로 들어가는 건 꽤 이상한 광경이라.”

마샤의 말에 한나는 재빨리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뭐야! 그런 건 빨리 말했어야지!”

“그래서 물어봤잖아요. 수상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저기 들어가는 신관이라면, 암흑길드 일원보다 더 의심스럽지!”

한나는 아지트의 입구를 매의 눈으로 살폈지만, 이미 문은 굳게 닫혔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저 문이 열리긴 한 거야?”

“네.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네요.”

“누군지 얼굴은 봤어?”

“제가 본다고 알까요.”

“신관복을 입고 있었어?”

나쁜 짓을 할거라면 신관복 정도는 벗고 다닐 것이지.

바보도 아니고.

“검은 로브로 꽁꽁 감추고 있었지만 제 눈썰미가 어디, 보통 눈썰미인가요.”

“세상에. 누구지? 나오는 거라도 봐야겠어.”

한나는 창틀과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바짝 달라붙었다.

“제레미는 여전히 안 보인 거지?”

“그러네요. 다른 통로가 있나.”

마샤는 이쯤 되면, 암흑길드 일원들이 따로 쓰는 비밀통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만큼 사람의 왕래가 없을 수도 없거니와, 손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문을 이용한 일이 없었으니까.

“우선 조금 더 지켜보죠.”

“맞아. 저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밤에 왕성한 활동을 할지도 몰라.”

정체 모를 신관의 등장과 함께 갑자기 둘의 잠입 모드가 활기를 되찾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가슴이 뛰지.”

“원래 그래요. 몰래 하는 건 뭐든 재밌지.”

끄덕끄덕,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샤의 말처럼, 슬슬 재미있어지려 하고 있었다.

* * *

“짜증나.”

두 시간이 지나도록 한나와 마샤는 문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진짜 눈에서 레이저가 나와서 저 나무문을 태워 버릴 정도로 대단한 기세였다.

하지만 두 시간째, 안으로 들어갔다던 신관은 고사하고, 아무도 나오질 않았다.

“제대로 본 거 맞아? 나 못 자게 하려고 괜한 소리 한 거 아냐?”

“진짜라니까 그러네.”

“그럼 왜 안 나오는 건데.”

“긴 얘기를 하는 중인가 보죠. 뭐 아니라면, 신관이 저곳에 살던가.”

“뭐?”

마샤의 말에 한나는 머리가 띵했다. 생각해 보니 그의 추리가 영 엉터리라고만은 할 수가 없었다. 제도의 신관들은 대부분 신전에서 생활하기는 하지만, 본인의 집이 있어 출퇴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혹시 처음부터 암흑길드의 출신인데 신력이 발현되어서 신관이 됐다거나 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일리가 있어.”

“아무래도 전 탐정으로 나서야 할까 봐요.”

“이번 일이나 제대로 하고 그런 생각을 하지 그래.”

“좋아요.”

이 일도 꽤 흥미롭긴 하지만, 한나와 오붓하게 붙어 있는 시간도 꽤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마샤가 빠르게 긍정했다.

“내가 탐정이 되면, 선생님이 보조하는 거 어때요?”

“미쳤니.”

그리고 예상했듯 한나는 부정했다.

“신전 월급 두 배로 주면 생각해 볼래요?”

“참 나.”

한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잠시나마 상상은 해 보았다. 월급이 두 배라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진짜 고민하네.”

마샤는 그런 한나의 낌새를 눈치채고 작게 웃었다.

“……상상도 못 하니.”

“아마 양치고 사는 것보다는 이쪽이 선생님 적성에 맞는 것 같은데.”

“그걸 또 기억하고 있니.”

순간 한나는 양이나 치며 살겠다고 튀어 버리려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진짜 튀었어야 했는데.”

다시 한번 그날은 후회하는 와중에, 드디어 아지트의 커다란 문이 열렸다.

“누군가 나오네요.”

한나는 있는 시력, 없는 시력 긁어모아 아지트의 문을 응시했다.

그곳에서 나온 이는 신관이었다.

마샤의 말처럼 그는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신관의 의복에 대해 해박한 이라면, 신발의 재질과 바짓단의 자수 같은 디테일을 통해 로브 아래에 있는 옷이 신관복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저렇게 새하얀 천으로 옷을 만드는 것부터가 흔한 일은 아닐 테니.

“정말 신관이잖아.”

하지만 신관은 2% 부족한 변장과 달리 얼굴만은 아주 꽁꽁 감추고 있었다.

“아, 조금만 옆으로…… 그렇지, 그렇지.”

신관이 주위를 살피는 찰나,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한나는 애가 탔다. 하지만 애타는 마음과 달리 그는 얼굴의 로브를 더욱 단단히 갈무리하며 빠른 걸음으로 아지트 앞을 벗어났다.

“무슨 눈동자밖에 안 보이냐!”

답답했던 한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급한 목소리로 마샤에게 말했다.

“가자.”

“어딜요.”

“어디긴, 따라가야지.”

한나는 멀어지는 신관을 보며 마음이 급했다.

“이렇게 잠복을 끝낸다고요? 저 사람이 이 일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아냐. 완전 관련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단순히 다른 목적으로 방문했을 수도 있죠. 저곳에 빚을 졌다든가, 의뢰를 하러 왔다든가.”

마샤의 말에 한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느낌이 왔어. 쫓아가자.”

그에 마샤가 답했다.

“그냥 잠복이 힘들어서 그러는 건 아니죠?”

“아니면 다시 오지 뭐.”

어쨌거나 저 신관이 아지트를 드나드는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하니, 그가 이번 일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 한들, 이용할 가치가 있었다.

“가자!”

사실 마샤의 말처럼 잠복이 지쳐서라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 * *

“자. 이제 찾아봐요.”

복면의 신관을 쫓다보니 어느새 신전까지 도착했다.

“그러게, 네가 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으면…….”

“달리기에 소질 없는 건 선생님이었는데요.”

두 사람은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난감해졌다.

“음……. 저 정도 키였나?”

“제가 보기엔 키가 다 고만고만한데요.”

여기도 하얀 신관복, 저기도 신관복, 심지어 키도 고만고만한 신관들이 신전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눈동자색이……. 파랑?”

“초록 아니었어요?”

“그럼 청록색……?”

한나의 자신감이 잔뜩 꺾여 버렸다. 분명 로브 밑으로 눈동자를 보았던 것 같은데,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이렇게까지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나?

한나는 난감함에 머리를 긁었다.

“아니. 어떻게 신관이 그렇게 발이 빠르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투 신관 아닐까요.”

“음. 전투 신관도 딱히 발이 빠르고 그러진 않던데. 신전 사람들은 좀 굼뜬 느낌이었는데.”

“편견이 심하시네요. 본인도 신관이면서.”

마샤의 말에 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 나 포함이지.”

“자기객관화가 훌륭하셔.”

마샤가 능글맞게 대꾸했다. 한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 따먹기나 할 때가 아니야. 우리 이러다 종일 잠복하고 허탕치게 생겼어.”

“그러게요.”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한나와 다르게 마샤는 딱히 아쉬울 것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한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찾자.”

“어떻게요.”

마샤의 물음에 한나는 손바닥을 활짝 펼쳐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손으로 코 밑으로 하관을 가린 채, 눈을 가늘게 떴다.

“뭐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눈만 잘 보이니까, 한 명씩 대조해 보는 거야.”

“파란 눈인지 녹색 눈인지도 모르면서?”

“아냐. 색만 흐릿할 뿐이지 대충 느낌은 기억나.”

그 말을 끝으로 한나는 척척 앞으로 걸어나갔다. 다행이라면 이곳이 한나에겐 아주 익숙한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까짓 거, 찾다 보면 나오겠지.”

한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신관 무리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다들 오랜만이에요!”

반갑게 신관들에게 인사를 한 한나가 대뜸 손으로 그들의 코와 입을 가리기 시작했다. 물론 상대방의 피부에 닿는 것이 아닌 제 시야에서만 가리는 것이라 신관들은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허공을 붕붕거리며 관찰하는 한나의 모습이 의아하긴 했지만.

“다들 얼굴들이 많이 상하셨네요. 요즘 신전이 많이 바쁘죠?”

한나는 시시콜콜한 농담을 덧붙여 가며, 한 명, 한 명, 꼼꼼하게 살폈다.

“……저렇게 해서 언제 찾아.”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샤는 차라리 잠복이 피곤이 덜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 * *

한나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신전에 이렇게 많은 신관들이 있었던가.

신관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늘 보던 사람들이나 상대했으니 이렇게 바글바글 수가 많은 걸 몸으로 느끼진 못하고 살았었다.

“……아, 이제 팔도 아프네.”

고작 손 좀 들어서 가리는 게 이렇게 팔이 아플 일인지.

어느새 지쳐 버린 한나는 잠시 신전 구석의 창가에 몸을 기대며 쉬고 있었다.

“찾을 수는 있는 거예요?”

너무 많은 사람들의 눈을 보느라 피로도가 쌓인 상태에서 마샤의 놀리는 듯한 말에 더욱 기운이 빠졌다.

“좀 도와주기라도 하든가!”

“선생님이 바로 알아볼 수 있다고 자신을 하길래.”

어디서 구해 왔는지, 마샤는 사과 말린 것을 과자처럼 씹고 있었다.

“…….”

한나가 그런 마샤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한배를 타 놓고 저렇게 노닥거리고 있다니.

이거 동료애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먹을래요?”

“됐어. 입이 쓰다.”

마샤의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러다 또 잠복이나 하게 생겼네.”

“진짜 잠복이 싫었던 거구나. 그냥 마법으로 때려 부수고 들어가는 건 어때요?”

마샤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한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아주 선전포고하고 들어가지 그러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요?”

“나빠. 아주 나빠.”

손을 휘휘 저은 한나가 찌뿌둥한 어깨를 휘휘 크게 저으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핀체프?”

오랜만에, 그것도 이렇게 지친 상황에 보니 참으로 반가운 핀체프였다.

“핀체프!”

한나는 방긋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길을 돌린 핀체프 역시 한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니, 오히려 못 본 척 시선을 돌리며 발길을 은근히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야, 야! 어디 가! 나 여기 있어!”

그 모습을 본 한나가 크게 소리쳤다.

“너 나랑 눈 마주친 거 다 알거든? 얼른 이리 오지?”

“…….”

쐐기를 박는 그 말에 핀체프는 그제야 한숨과 함께 한나에게 다가갔다.

“왜 또.”

사실 핀체프는 한나와 엮이기만 하면 함께 고생길에 휩쓸려 가곤 했으니, 피할 수 있으면 그녀를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히 요 근래에는 저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한나가 제 이름을 부르며 채찍질을 하는 꿈까지 꿀 정도로 그는 한나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

“너 방금 나 피하려고 했지.”

한나가 의심 섞인 눈빛으로 물었다.

“설마.”

핀체프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너 나랑 얽히면 힘든 일 생기니까 그러는 거야?”

“서얼……. 마.”

정곡을 찔린 핀체프가 한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괜히 방어적으로 팔짱을 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서운하다. 서운해.”

한나가 상처받은 눈을 내리깔고 눈물을 훔치는 흉내를 냈고, 제 발이 저렸던 핀체프가 입을 열었다.

“참 나. 너도 양심이 있어라! 상처는 무슨! 누구라도 나처럼 당하면 그럴 만하지. 그리고 그 수상한 차림새는 뭔데!”

물론 그런 핀체프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지금 한나는 누구라도 그 꽃무늬 보자기를 본다면, 수상하게 여겨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동료애가 이렇게 얄팍할 줄이야. 그동안 너를 위해 밤샘 작업하던 나의 과거가 다 헛수고였구나.”

한나가 서운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쓰레기 같잖아.”

다급히 핀체프가 답하자,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마샤의 입이 열렸다.

“쓰레기네.”

“하?”

결국 핀체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단히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냈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뭔데.”

“이번엔 뭐냐니.”

“부탁이라거나, 심부름이나, 요청이라거나 뭐든 필요하니까 부른 거 아냐.”

“귀신이네.”

확실히 핀체프를 이렇게 반갑게 찾는 일이라곤 부탁할 때뿐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뭔데 그래.”

빨리빨리 용건만 간단히 하라는 핀체프의 기색에 한나를 얼른 입을 열었다.

“내가 찾고 있는 신관이 있어.”

“누구?”

“키는 너만 하고, 눈동자색이 탁한 파랑? 내지는 청록색이야. 체형은 호리호리한 것 같고……. 남자는 확실해. 눈매는 조금 내려간 편.”

“그렇게 설명하면 아는 사람이라도 못 찾겠는데. 뭔가 더 없어?”

“아는 게 이거뿐이야.”

“이름도 몰라? 머리색은? 나이라도 알 거 아냐.”

한나는 전혀 모른다는 의미를 담아 어깨를 으쓱였다. 핀체프는 무슨 그런 정보로 사람을 찾는다는 건지, 구시렁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푸른 눈이라면……. 음. 저기?”

잠시 고민하던 핀체프가 한나의 등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에 한나와 마샤의 시선이 복도 반대편으로 향했다.

“……장난하냐.”

“그러게요.”

동시에 한나와 마샤가 정색했다.

“왜? 얼추 맞잖아.”

한나는 질린 눈으로 핀체프를 보며 혀를 찼다.

쯧, 저런 것도 눈이라고 달고 다니다니.

“교황님이잖아.”

그가 가리킨 이는 다름 아닌 세자르였다.

세자르는 어디서 귀신같이 한나를 발견한 것인지 온화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그 질타 섞인 눈빛은.”

핀체프가 입을 쭉 내밀었다.

“너한테 뭔가를 기대한 내 잘못이다.”

한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깨에 따스한 손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실망한 눈으로 날 보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어느새 다가온 세자르가 말했다.

그는 한나의 머리에 둘러진 보자기가 신기한지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하하하…….”

그 돌발행동에 한나는 어색하게 세자르의 손을 치워 냈다.

이놈의 보자기 어지간히 튀는 모양이구나.

신전을 나서면 당장 버려야지.

“응? 내가 박대에는 익숙하지가 않아서 말이야.”

세자르는 마치 상처받은 사람처럼 구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그의 좋은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지만.

“우리 신관님께서 왜 여기 있을까?”

“그을쎄요……?”

한나는 이제야 황궁에 있어야 할 자신이 신전에 있는 것이 조금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누굴 찾고 있다는데요.”

눈치도 없이 술술 불어 버리는 핀체프의 모습에 한나가 깜짝 놀란 눈으로 핀체프를 보았다.

황궁에서 나와서 엄한 잠복 따위나 하고 있었다는 걸 세자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나는 재빨리 핀체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역시나 눈치도 없이 찔린 티를 낸다.

“……도움이 안 돼.”

“그래서, 무슨 일이길래 그래. 나에게도 알려 주면 안 되나?”

세자르가 마치, ‘우리 함께 놀면 안 될까?’ 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뭐, 조금 찾을 사람이 있어서요.”

“누군데. 내가 찾아 주지.”

한나가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핀체프보다 더 믿음이 안 가는 말이었다.

세자르는 본디 남에게 관심이 없고 사람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심지어 사막에서 오래 있다 이제 돌아온 그가 아닌가?

자신이나 핀체프보다 신관들을 더 잘 안다는 게 이상한 일이지.

이 사실을 세자르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한마디로 세자르는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게 확실했다.

“청록색 눈에 저와 비슷한 키의 남자 신관을 찾는다던데요. 이름도 몰라, 머리색도 몰라, 아는 거라곤 고작 이게 다라네요.”

그래. 불어라. 다 불어.

한나는 이제 핀체프 입단속을 포기하기로 했다.

“흔한 색인데.”

“은근히 없던데요.”

한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여태 한 명씩 대조해 본 바로는 신관중에 청록색 눈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체형까지 딱 들어맞기는 더 희박한 확률이었다.

“나도 찾아보도록 하지.”

“아뇨. 뭐 그렇게까지…….”

한나가 말을 흐렸다. 어차피 도움도 안 될 텐데, 관심은 접어 두시라는 말이 턱 밑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그렇게 변변찮은 정보만 가진 사람은 왜 찾고 있는 거지?”

그래, 이렇게 물어볼 줄 알았어!

한나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 마샤에게 닿았다.

너라도 팔아먹자.

“마샤의 오랜 친구…….”

“친구의 이름도, 머리색도 모른다고?”

“……의 사촌의 원수…….”

역시 친구는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 적당히 알아도 아는 게 아닌 애매한 사이의 가상 인물을 만들어 냈다.

“…….”

“……오랜 친구의 사촌의 원수…….”

“복잡…… 한 사이네.”

나름 머리를 굴린다고 굴린 건데, 세자르는 물론이고 마샤, 핀체프까지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한나는 멋쩍게 마른기침을 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친구의 사촌의 원수까지 찾아 주려 하다니. 대단한 오지랖인데.”

“그러게요.”

왜인지 세자르와 핀체프가 죽이 척척 맞았다.

“그댄 사연이 꽤 많은가 보네.”

세자르가 마샤에게 물었다.

마샤는 정말 이 바보 같은 변명에 동조해 주고 싶지 않았지만, 한나의 불쌍하게 내려간 눈꼬리와 애처로운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제가 사연이 좀 많은 편이죠.”

친구의 사촌의 원수, 그런 걸 갚고 다니는 사연.

“흠흠.”

한나는 더 이상 여기서 시간을 끌다간 의심만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희는 가 볼게요.”

“갑자기?”

“황궁에서 잠깐 나온 거라 이제 가야죠.”

또 뭘 더 묻기 전에 얼른 도망가야지. 한나가 마샤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어느새 창밖은 이미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결국 하루를 의미 없이 날렸다는 생각에 한나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럼! 안녕히!”

한나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려 손을 흔들며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런 한나의 손목에 세자르의 손이 감겨왔다.

“왜……?”

손이 붙들린 한나가 경계 어린 눈으로 세자르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어, 음. 어…… 없는데요.”

평소엔 느려터졌으면서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단 말이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만 한나가 속으로 혀를 찼다.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지는 상관없지만, 몸 상하는 일은 하지 마.”

세자르의 손이 한나의 손목을 쓸었다. 그의 차분하고 따스한 음성에 걱정이 서려 있었다.

“그댄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겠으니, 늘 걱정이야.”

“……예?”

뭘 또 그걸 이렇게까지 아련하게 말씀을 하시나요.

한나는 몹시 이 상황이 어색하고 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라.

이렇게 어린애 다루듯 걱정하는 소리를 핀체프와 마샤 앞에서 듣다니.

하지만 감옥에서 조우했던 전적이 있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냥 당당하기에는 지은 죄가 많다.

“……예에.”

그걸 처신 잘하고 다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표정은 결연하기까지 했다.

‘역시 이번 일은 들키지 말고 조용히 처리하자.’

굳은 다짐과 함께.

* * *

“교황 성하.”

“들어와.”

한나가 돌아간 뒤에도 세자르는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유는 밀린 업무였다.

세자르의 말이 끝나자 교황 집무실 문이 열렸다.

“막시온 대신관님의 전달 서류입니다.”

“이리 두고 가지.”

세자르는 여전히 손에 든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턱짓으로 책상 귀퉁이를 가리켰다. 심부름을 온 신관은 조심스럽게 책상으로 가다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툭.

두툼한 서류가 떨어지는 소리에 세자르의 눈길이 잠시 그의 손에 닿았다. 그리고 무심코 얼굴을 확인했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눈동자가 청록색이군.”

“아……. 예! 그렇습니다.”

평소 말이 없기로 유명한 세자르가 자신의 눈동자색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에 깜짝 놀란 신관이 서둘러 답했다.

“비슷한 색의 눈동자를 가진 신관이 많은가?”

“한둘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긴. 흔한 색이니까.”

“음……. 예. 그렇지요.”

세자르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눈이 다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로 향했다. 그러곤 휙휙, 손짓했다.

“그래. 그럼 나가서 일 봐.”

세자르의 말에 신관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며 들어섰던 길을 도로 나섰다. 그렇게 집무실 문 앞에서 다시 한번 인사를 한 그가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힘과 동시에 서류에 머물러 있던 세자르의 시선이 문에 닿았다.

툭, 툭.

그의 손가락이 서류의 끄트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잠시 상념에 잠기려는 찰나, 다시 문이 열렸다.

“일거리가 또 늘어났나 봅니다.”

커티스가 양손 가득 무겁게 일거리를 들고 들어서고 있었다.

“커티스.”

세자르는 그런 커티스를 불렀다.

“무슨 사정이든 안 됩니다. 이건 무조건 아침까지는 끝내야 하니까요.”

마치 일을 미루겠다는 변명은 꺼내지도 말라는 단호한 어조.

커티스는 제 상관이자 이제는 교황이 된 세자르 덕에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또 골치를 썩고 있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곧 할 거라도 넣어 두세요.”

커티스의 말에 세자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이런 과민 반응이 영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황궁으로 말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커티스가 발을 동동 굴렀다는 건 신전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었다.

“어디 안 갈 테니 그렇게 가시 세울 것 없어.”

“그럼 왜 부르셨습니까?”

“방금 나간 신관, 아는 얼굴인가?”

세자르의 물음에 커티스는 집무실에서 나와 복도에서 스친 신관을 떠올렸다.

“본 적이 있긴 한 것 같은데…….”

커티스는 누구보다 빠르게 신전의 모든 부분에 적응하고 있었다.

중앙 신전의 대신관들을 비롯해 주요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이미 습득했고, 오다가다 만나는 신관들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커티스는 그에 대한 특별한 정보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알아볼까요.”

세자르는 특별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커티스였기에 곧바로 물어보았다.

“알아봐.”

자신이 얼마나 바쁜지 누구보다 잘 아는 세자르가 뭔가를 부탁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 또한 커티스는 짐작할 수 있었다.

“빠르게 알아보죠.”

게다가 유능한 커티스에게 신전 소속의 신관 하나 터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진짜 안 돌아가요?”

깜깜한 밤하늘, 그리고 으슥한 골목.

그곳엔 한나와 마샤가 있었다.

“차라리 빵집 잠복 쪽이 나았지. 이건 도대체…….”

그것도 몸을 숨긴다며 골목 판자 더미 뒤에 몸을 쭈그리고 있었다.

“우리가 거기서 잠복만 해선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싶어.”

“그냥 위치만 바뀐 것 아니에요? 그것도 더 안 좋은 쪽으로.”

마샤는 슬슬 다리가 저렸다.

“저기서 누가 나오면 바로 덮치자.”

“……그게 신박한 작전이었어요?”

한나가 의기양양하게 ‘신박한’ 작전이 있다며 마샤를 이곳으로 이끌었을 때, 그는 이런 무모한 계획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잠복은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속 터져. 아까도 한 명 놓쳤고. 그냥 여기 있다가 누가 나오면 제레미 어디 있냐고 불라고 하자.”

“열 살 어린이 정도의 계획 능력이네요.”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열 살이랑 비교하는 건 너무하잖아. 한나가 발끈했다.

“차라리 마법으로 날려 버리는 게 더 화끈했을 것 같은데.”

“그럼 넌 다섯 살이니?”

“수준이 비슷한가요?”

키득키득 웃는 마샤를 노려본 한나는 다시 아지트의 문을 바라보았다.

날도 어두워졌겠다, 나쁜 짓 하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지.

슬슬 누구라도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초조하게 시간은 흐르고, 다리도 저려왔다.

“아……. 마샤, 마샤!”

그때, 한나가 마샤의 팔을 덥썩 잡았다. 마샤는 누군가 나왔나 싶어 화들짝 놀라 아지트의 입구를 보았지만, 그곳은 고요했다.

“왜 그래요?”

“나…… 나……!”

“선생님이 뭐요?”

“쥐……, 쥐났어!”

한나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심지어 그녀는 손가락으로 빠르게 코에 침을 바르고 있었다.

“…….”

마샤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진짜. 엉망진창이야.”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휴. 진짜 너무 아팠어.”

겨우 다리가 진정됐다. 제 다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던 한나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웃고 있는 마샤를 불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넌 내가 물에 빠져도 그렇게 웃을 거지?”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요.”

서운하다는 마샤의 대꾸에도 한나의 눈매는 풀어질 줄을 몰랐다.

“다리가 아파 죽을 뻔했는데, 도왔어야지.”

“무슨 수로요?”

의사도 아닌데, 그리고 쥐가 난 걸 어떻게 도우라는 건지, 마샤가 물었다.

“하여튼 의리가 없어.”

한나는 혹시 또 쥐가 날까 싶어 다리를 폈다 접었다 혈액순환을 시키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마샤가 말했다.

“어, 누가 나오는데요.”

드디어!

한나는 얼른 고개를 올려 아지트 입구를 보았다. 정말로 그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잡자.”

한나는 홀린 듯 마샤에게 말했다.

“어떻게요?”

“뭘 어떻게야? 무력으로 잡아와야지.”

“어……. 우리가 무력으로는 조금, 불리하지 않을까요.”

“2대 1이야.”

당황한 듯한 마샤의 말에도 한나는 단호했다. 그건 또 맞는 말이라는 듯 마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보쌈하러 가죠.”

의기양양하게 걸음을 떼는 두 사람이었다.

* * *

“헉…….”

“하아…….”

결론만 말하자면 보쌈은 성공적이었다. 마침 표적이 골목 근처로 다가와 준 덕분에 마샤와 한나는 얼른 그의 입을 막고 골목으로 끌어들였다.

거센 저항이 있었지만 마샤는 마법을 이용해 간단하게 그를 제압했다. 길드원인 남자는 수적으로 불리한 데 이어 마법사가 있다는 것을 깨닫자 얼른 반항을 포기했다.

남자가 벽을 등지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들인 힘은 한나가 제일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제일 호흡이 거칠었다.

“시, 심장이 너무 뛰는데?”

납치라니! 납치! 이제 협박도 할 예정이라니!

심장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쁜 짓이 이렇게 콩닥거리고 쫄깃하니, 끊지를 못하는 건가!

“진정해요.”

“아니, 어떻게 진정을……. 후욱. 훅.”

심호흡을 하는 한나를 바라보던 마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래서야 무슨 심문을 제대로 하겠는가.

“용건 빨리하죠.”

“아, 응. 그래.”

한나는 여전히 심장이 있는 가슴 위로 양손을 곱게 포갠 상태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준비했던 질문을 했다.

“당신은 알란데 길드의 일원이죠?”

“읍!”

남자의 입에는 마샤가 급히 묶은 재갈이 물려 있었다. 의외로 마샤는 준비성이 철저한 편이었다.

“다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말해요!”

한나는 눈을 찌푸리며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읍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무력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

“선생님.”

마샤가 한껏 흥분한 한나의 팔을 잡았다.

“응?”

“……재갈을 풀어 줘야 말을 할 거 아니에요.”

“……아.”

너무 흥분한 게 문제였다. 한나는 머쓱하게 귀밑을 긁으며 남자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냈다.

“쉿……. 쉿.”

괜히 아지트 쪽을 힐끔 바라보며 남자의 입단속을 했다.

“쿨럭. 쿨럭.”

남자는 재갈이 치워지자 기침을 토했다.

“소란을 피운다면, 재미없어질 줄 알아요.”

“그런 대사는 어디서 배운 거야…….”

한나와 어울리지 않는 그 말들에 마샤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고정시키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진짜로 있더라고. 악당의 필수 대사집.”

마샤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한나가 대답했다. 물론 정말 그런 이름은 아니었지만, 황궁 도서관에서 비슷한 류의 책을 찾긴 했었다.

정말 이런 책이 있다니 놀라며 슬쩍 들춰보고 낄낄거렸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쓰게 되는 날이 오다니!

“하여튼, 저희가 묻는 말에 대답만 잘해 준다면 상처 하나 없이 돌려보내 줄게요.”

뭐, 대답을 잘 안 한다고 해서 폭력을 쓸 마음은 없었지만.

어쨌거나 공포심을 조금 심어 주는 건 나쁘지 않았다.

“무, 무슨 목적이오!”

“목소리 좀 낮춰요! 다 들리겠네!”

남자가 소리치자, 한나 역시 덩달아 소리쳤다.

“……선생님도 소리 좀 낮춰요.”

그런 그녀의 엉성한 모습이 창피했는지 한 걸음 물러나 있던 마샤가 마른세수를 했다.

“아. 그러니까, 서로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고요.”

한나의 변명을 알아들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는 저곳에 있나요?”

제레미라는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한나의 모습에 남자는 조금 긴장했다.

“고개만 끄덕여도 좋아요.”

남자는 잠시 고민하며 한나의 뒤에 서 있는 마샤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고 있는 마샤는 웃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공포심을 자아냈다.

“…….”

그는 갈등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마샤는 조용히 손으로 제 입을 톡톡 두드리며 눈썹을 올렸다. 얼른 입 여는 게 신상에 좋을 거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저기 없다는 뜻인가요?”

끄덕끄덕. 이번엔 상하로 흔들었다.

“어디에 있죠?”

“그, 그건…….”

“대충이라도 말해 봐요.”

다시 남자의 얼굴에 갈등이 스치는 순간, 마샤가 낮은 기침을 뱉어 냈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현이었다.

“그냥 정신 조작으로 뜯어보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마샤의 말에 남자는 깜짝 놀라 얼른 입을 열었다.

“부, 북부로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정신 조작이라면,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의 일환이었는데, 그것을 당한 사람들은 미치광이가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남자는 얼른 입을 열지 않으면 제 머릿속을 강제로 파헤치겠다는 협박을 단박에 알아듣고 얼른 답했다.

“북부? 갈라티아?”

“아, 아마도……. 오래 공을 들인 곳이라…….”

“아니……. 도대체.”

한나는 제레미가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제레미는 그곳을 꼬꼬가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하…….”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되면…….

‘또 거길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이제 좀 두 다리 쭉 펴고 눌어붙나 했더니, 또 북부로 머리채 잡으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겨서, 곧장 나서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은 제도에…….”

“문제?”

문제라는 말에 한나의 귀가 쫑긋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하여튼, 아지트에는 없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태라.”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문제가 있다라. 이 말은 호조였다.

“그럼 요즘은 어떤 나쁜 짓을 하고 있어요?”

한나의 물음에 남자는 말문이 막혔다. 그에 마샤가 대신 입을 열었다.

“질문이 너무 포괄적이잖아요. 하고 있는 나쁜 짓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그런가.”

“보통 그런 식으로 질문하진 않잖아요. 애들 장난도 아니고.”

마샤의 그럴듯한 말에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악당이라고 해도, 인권이 있는데 너무 무례한 질문인가 싶기도 하고…….

질문이 밑도 끝도 없이 포괄적이기도 하고.

“혹시 아지트에 드나들던 신관은 어떤 이유에서 왔는지 알고 있나요?”

한나가 다시 질문했고, 남자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그 왜, 초록색 눈동자에 키는 이만큼……. 음, 체격은 호리호리.”

한나는 손을 들어 허공에 키를 표시하며 말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 직업이야 다양한데…….”

“신관요. 신관! 신관이 흔하지는 않잖아요.”

“……딱히 신관이라고 보기 힘든 것도 아니라.”

“에?”

한나는 신관들이 이런 음지에 드나든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항상 청렴함을 강조했으면서! 몰래 나쁜 거 다 하고 다니다니.

“그래서,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저는 드나드는 사람들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남자의 말에 한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하시는 일이……?”

남자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힐끗 향했고, 동시에 한나의 시선도 그쪽으로 따라갔다.

“……주먹을 쓰시는 일 하시는구나.”

한나가 사뭇 공손하게 한발 물러섰다.

“그럼 좋은 정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깍듯한 인사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참 예의 바른 협박범이네.”

마샤의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얼른 보내드려. 바쁘신 분 오래 붙잡고 있는 거 아니야.”

한나의 말에 마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자를 구속하고 있던 마력을 거두었다. 남자는 아릿한 제 손목을 문지르며 힐끔 눈치를 보았다.

“얼른 가요. 변덕스러운 납치범 마음 변하기 전에.”

마샤의 말에 남자는 벌떡 일어나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한나는 말했다.

“거참 잘 뛰는구만.”

“우리도 이제 뛰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풀려났으니, 동료를 몰고 오지 않을까요.”

마샤의 말에 한나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아지트의 바로 앞이고, 자신들이 방금 한 짓은 납치 협박……!

“튀자.”

한나는 얼른 신관복을 움켜쥐고 뛰었다. 그와 동시에 하나로 묶인 머리가 통통 튀었다. 마샤 역시 얼른 한나의 뒤를 쫓아갔다.

“그런데 선생님.”

“응?”

도망치느라 바쁜 와중에 말을 걸어오는 마샤에게 한나가 답했다.

“도망은 도망인데, 애초에 얼굴이나 머리를 가렸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어?”

“선생님 외양은 조금 튀잖아요.”

열심히 뛰던 한나가 멈칫했다.

듣고 보니 또 그럴듯하네.

“그걸 왜 이제 말해?”

이미 얼굴이 다 까발려진 지금?

“그러게요. 이제 생각났네.”

마샤가 피식 웃었다. 한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나저나 외모가 튀는 것으로 치면 자신보다 마샤가 더하지 않나, 하는 생각과 이러다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잡혀가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럴 때 보면 마샤는 참 머리가 좋은 것 같긴 한데, 또 그 타이밍이 애매하게 한발 늦다.

…… 혹시 일부러?

“너 혹시 나 난감해하는 거 보면서 즐기는 건 아니지?”

이건 아주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한나는 열심히 뛰는 와중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설마요. 선생님 반응이 재미있긴 하지만 제가 선생님을 곤경에 빠뜨리면서 즐길 리가 없잖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생글생글 웃는 모양새가 더욱 의심스러웠다.

“하여튼, 믿을 사람이 없다니까.”

“저까지 매도하는 건가요.”

“이상한 소리 말고 얼른 뛰어.”

두 사람은 열심히 황궁까지 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나의 뒤를 쫓아가던 마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마샤는 이제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될지 몹시 기대가 되었다.

아마 제 선생님의 성격을 생각해 보자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냉큼 제레미를 잡으러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과연 제레미가 북부에서 어떻게 광물을 챙길지도 몹시 궁금해졌다. 자신과 함께 꼬꼬를 문지기로 세웠으니 그게 힘든 일이라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마샤에겐 이 일이 점점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혹시 북부로 갈 건 아니죠?”

마샤가 물었다.

“내가 뭐하러 또 고생을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제레미, 걱정하는 거 아니었어요?”

마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제레미는 어차피 나에게 오게 돼 있어.”

한나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이에요?”

“똑똑한 체 하는 그 녀석은 아직 나보다 한 수 아래라는 뜻이지.”

씨익.

그 말과 함께 한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북부로 향할 모든 준비를 끝마친 제레미에게 제동이 걸렸다. 제레미는 은밀하게 준비된 밀실에 앉아 한 신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손이 탁자 위에 놓인 검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지 그의 목소리에는 나른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게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이지.”

톡톡.

제레미의 손가락이 검을 두드렸다.

“예. 분명히 중요한 보석이 빠져 있습니다.”

제레미는 검을 만지던 손을 들어 제 이마를 긁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가 취하는 버릇이었다.

“하필 중요한 보석이 빠져 있다?”

“누군가 일부러 뺀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도 절묘하게 중요한 것만.”

성물에는 빼곡하게 많은 보석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비슷하게 생긴 보석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성물의 능력과 관련이 있는 보석 하나만 뺄 수 있는 사람이라니.

수백 년은 더 된 이 성물에 대한 기록조차 거의 소실된 상태인데.

“참 신기한 일이지.”

제레미는 어째서인지 그 범인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허술하게 굴면서, 꼭 하나씩 사람을 놀라게 해.”

분명 짜증이 나는 상황인데, 화를 낼 수는 없게 만드는 신기한 사람.

“그것만 있으면 되는 건가?”

“예. 그 보석이 있어야 온전하게 힘을 쓸 수가 있습니다. 검은 그 보석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죠.”

“그렇군.”

제레미는 탁자의 검 위로 원래 덮여 있던 천을 덮었다. 어차피 더 보고 있는다고 새로운 해답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럼 찾으러 가야지.”

늘 그렇듯, 필요한 건 손에 넣어야 한다.

“귀여운 훼방꾼이 재미있는 장난을 쳤어.”

제레미의 입꼬리가 진하게 올라갔다.

* * *

솔직히 말하자면 한나는 내심 자신의 선견지명에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제 손에 들린 보석을 뱅글뱅글 돌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내가 바보같이 성물을 통째로 숨기려고 할 줄 알았나.”

테이블 밑으로 한나의 다리가 달랑달랑 움직였다. 점점 좋아지는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하. 이렇게 천재적인 발상을 누가 했을까. 혹시 예지력이 있는 거 아니야?”

그런 한나에게서는 콧노래까지 흘러나왔다. 어제의 사건으로 한 가지 얻은 정보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제레미의 발목을 잡은 문제라는 것이 이 보석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

사실 이 보석을 처음 빼낼 때 깊게 생각을 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어디 영화에선 이렇게들 하길래 해 본 건데. 역시.”

어릴 때부터 첩보물을 꾸준히 봐 온 보람이라고 할까. 그 왜, 중요한 건 반을 똑 떼다가 보관하고 그러지 않던가?

지도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고.

처음엔 검집과 검을 따로 묻을까 하다가, 한 번이라도 이동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 보석만 쏙 빼낸 것이었다.

“가끔은 숲이 아니라 나무를 봐야 한다니까.”

한나는 들고 있던 보석을 연신 만지작거리다 제 품속에 쏙하고 넣었다. 이젠 정말 이것마저 잃어버리면 끝이다.

“그냥 가지고 다니는 게 낫겠어.”

자신을 지켜 줄 이들이라면 주위에 얼마든지 있었다. 황궁에서도 보호받고, 마샤도 가까이 있으며, 신전에는 세자르와 성기사들도 있지 않은가.

“괜히 어디 멀리 두고 마음 졸이느니, 이게 백번 낫다.”

적어도 상황 파악은 빠릿빠릿하게 할 수 있으니까.

한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활기찬 아침을 맑은 공기와 함께 즐겨볼까.”

그러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끼긱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창이 열렸다. 초록 풀이 있는 정원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나의 눈에 들어왔다.

“이안이 어쩐 일로……. 음, 대공?”

그곳엔 이안과 대공, 그리고 수많은 호위병들이 있었다.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모여 있지.”

다들 바쁜 하루를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한나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 * *

이안과 대공은 유유히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가족의 친목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대공은 은은한 미소를 띠우며 이안에게 말했다.

“사막의 길이 열렸으니 황궁도 제국의 발전을 위해 바빠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산책을 하면서도 국정을 논하는 참다운 신하의 모습일까.

“그곳엔 칼테라가 있고.”

이안의 답에 대공이 짧게 혀를 찼다.

“그냥 야만족이라 칭하시죠. 그들은 미개하고 위협적이니까요.”

대공의 숙원 중 하나라면, 그가 침략하지 못했던 칼테라의 대지를 얻는 것이었다.

물론 그 내면에는 전쟁을 원하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었다.

“나라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입니다. 그들이 사막의 길이 열렸다는 것을 알면 우리 제국의 국민을 위협할 여지가 있습니다.”

“조용히 잘 있는 그들을 들쑤셔서 얻을 이익이 있습니까.”

이안은 지금처럼 황궁이 혼란한 시기에 전쟁을 반기지 않았다.

“황권이 약해졌을 때야말로, 전쟁이 필요하지요. 귀족들의 군대를 압수하기에도 좋은 구실이 될 테고, 무엇보다 승전했을 때 얻을 이익이 많지 않습니까.”

이안의 눈매가 좁혀들었다. 물론 대공의 말만 듣자면 틀린 말이 없었다. 황권을 견고히 하는 데 전쟁만큼 좋은 구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궁에 남아 있는 잡음을 전쟁으로 덮어 버리는 것도 좋고요.”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요.”

“신전의 위상이 너무 높아졌어요. 지금 국민은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황제보다 교황을 떠받들고 있습니다.”

대공이 속살거리는 말은 이안의 가려운 곳을 박박 긁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예의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숙부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게 뭡니까.”

황권의 견고함 따위를 그가 걱정할 리 없다는 건 누구보다 이안이 잘 알았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제 형제마저 배신한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그는 그저 전쟁에 목마른 짐승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원하는 바는 투명했다.

원 없이 전쟁을 할 수 있는 판을 깔아 줄 허수아비 황제.

“전쟁이지요. 평화의 시대? 그런 것이 나라를 지켜 주지 않는다는 건, 황제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겁쟁이 황제의 말로도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대공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협박이 서려 있었다. 충분히 이안의 화를 돋울 만한 발언이었지만, 이안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숙부님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이토록 저를 위해 애써 주신다니, 저도 보답을 해야겠지요.”

이안의 대답에 대공의 미소가 진해졌다. 아마 자신의 뜻대로 일이 흘러갈 모양이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날이 참 좋습니다. 머리 아픈 이야기는 이쯤하고, 산책을 즐기시지요.”

이미 원하는 답을 얻은 대공은 더 이상 이안을 채근하지 않았다. 이안은 정원에 핀 아름다운 꽃들을 눈에 담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느지막한 오후, 한나는 이안을 만나러 갔다.

“괜찮아?”

“문제가 있어 보이나요.”

인사 대신 안부를 묻는 한나를 향해 이안이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게, 눈앞에 있는 이안은 평소보다도 더 수척해 보였다.

“힘들어 보이네.”

나날이 얼굴이 상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이 있어서요.”

이안은 정말 힘이 든 것인지, 앉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한나에게 앞자리를 손짓으로 권했다. 한나는 얼른 이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말썽이 많아?”

그럭저럭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황궁에 골치 아픈 일이 이렇게 많나 싶어 물은 것이었다.

“언제나 욕심이 문제죠.”

늘 단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이안이 팔걸이에 늘어지듯 기댄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는 손으로 얼굴을 받쳤다.

내리깔린 눈 위로 근심이 무겁게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이안이 한나에게 물었다.

“전쟁?”

치고받고 싸우면서 사람도 죽는 그런 게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특히 신관의 관점으로 보자면 최악의 일이었다.

“요즘 스트레스가 심하니?”

설마 화가 난다고 아무 나라나 부수고 싶다든가, 쳐들어가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한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에 이안은 작게 웃었다.

“선생님 기대와 달리 전 의미 없이 피 보는 걸 즐기지 않아요.”

“나 정말 그런 기대 안 했는데.”

순간 한나는 사람을 어찌 생각하는 거냐고 따져 물을까 하다가,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참기로 했다.

“전쟁에 흥미도 없고.”

“아……. 음, 그러면 안 하면 되지 않을까.”

내심 다행이라며 한나가 안도했다.

“하지만 이 전쟁을 막으면, 다른 전쟁을 해야 해요. 그건 오히려 더 머리 아픈 싸움이 될 테고.”

한나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이안의 눈썹이 찌푸려지는 걸 보면, 이안이 말하는 다른 전쟁이라는 게 그에겐 더 껄끄러운 모양이라고 예상이 됐다.

“내가 편한 길이 눈에 선한데, 자꾸만 고민이 되는 건 왜일까요.”

이안은 혼잣말 같은 질문을 던졌다.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정도를 걷는 게 아니라서 아닐까.”

한나는 단순하게 답했다.

자꾸 마음에 걸린다는 건 분명 찜찜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고, 심지어 쉬운 길을 마다한다는 건 분명 발목을 잡는 부분이 있다는 거겠지.

그중 가장 흔한 것은, 양심이려나.

한나가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옳은 길이 아니라는 걸, 본능이 알고 있는 거겠지.”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겠죠.”

“이것 봐. 시작부터 눈물겹잖아.”

“하지만 내가 얻는 건 분명 귀한 것일 테고.”

“사람 목숨보다 귀한 게 따로 있니.”

두 사람의 대화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 한나는 이안을 질타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의 선택에 작은 참고라도 될 수 있게끔 말을 얹어 주고 싶을 뿐이었다.

어차피 남이 말한다고 들을 성격도 아니니까.

“머리가 아프네요.”

이안의 말에 한나가 답했다.

“너는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그런 네가 선택할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의 몫까지 고민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사실 이안에게 자신이 조언하는 건 우스운 일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말 한마디에 전쟁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툭툭 던질 수가 있나.

“간단하게 나는 전쟁이 싫다는 거야.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무엇보다 지금 나라에 전쟁이 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마당인데.

생각해 보니 은근히 화도 났다.

누구는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막겠다고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는데, 누구는 전쟁이나 계획하고 있다니!

한나가 눈을 번뜩였다.

“다리몽둥이를 똑 분질러 버리고 싶네.”

“네?”

“아!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나와 버렸네.”

한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제 입술을 찰싹 때렸다.

“그렇게 막, 애써서 전쟁 찾지 않아도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아주 큰일이 일어날지도……. 흠흠!”

“큰일?”

“뭐, 그냥 그런 게 있어. 꿈자리가 사납네.”

한나는 괜히 어깨와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숨만 쉬고 있어도 살기 팍팍한데, 그냥 그냥 조용히들 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게 말이에요.”

그 의견에 적극 동의 하는지 이안이 수긍했다. 그리고 한나는 어째서인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웃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대공 저하가 그런 얘기를 꺼냈어?”

한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안에게 물었다. 여태 밝기만 했던 눈동자에는 미약한 걱정도 스며 있었다.

이안과 대공이 정원에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난 뒤로 이안의 상태가 나빠졌으니 대공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아닐까 의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저에게 관심이 많은가 봐요.”

“우연히 같이 있는 거 본 거거든.”

“맞아요. 예상하는 대로.”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이안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대공은 전쟁을 좋아하고, 그 판을 깔아 줄 사람을 찾은 거라고.

“그분도 참 어렵게 사시네. 고생을 사서 하는 변태 취향인가.”

“풋.”

한나의 말에 이안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그렇게 웃어.”

한나의 눈이 흔들렸다.

“보통 대공은 모두가 어려워하거든요. 선생님처럼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다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걸? 네 앞에서는 말 못 하는 거겠지.”

“선생님은 하잖아요.”

“적어도 네가 내 언사 때문에 날 감옥에 가둘 리는 없으니까.”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한나는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뿐이니까.”

“내가 뭐 한 게 있나…….”

그냥 주절주절 헛소리나 늘어놓은 것 같은데, 이안이 이렇게 반응해 주니 한나는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쪼록 선택에 도움이 되길 바라.”

괜히 더 떠들다가는 나라의 운명이 휘청거릴까 봐 겁나기까지 했다. 그런 한나의 두려움을 감지했는지 이안이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 일은 어때요.”

“응?”

“많이 바쁘잖아요.”

“어……. 그렇게 바쁜 일은…….”

한나의 말끝이 흐려졌다. 없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요즘 사방팔방 뛰어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아직은, 없을걸……?”

여전히 단도직입적인 이안의 모습이 적응되지 않는 한나였다. 괜히 또 이렇게 멍석 깔아 주니 선뜻 부탁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대화 상대가 필요해도 찾고.”

“고맙네.”

“자꾸 저만 모르게 일을 벌이니, 서운하잖아요.”

뭘 알고 하는 말일까, 이안의 말에 한나는 괜히 뜨끔해졌다. 요 근래에도 이안 모르게 벌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성물은 유용하게 잘 쓰고 있어요?”

이 질문도 상당히 난감했다.

“……어, 어……. 응. 그렇지. 잘 보관해 뒀어.”

하지만 홀랑 잃어버렸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이안이 알기 전에 얼른 제레미의 손에서 찾아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각나네.”

한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름 아닌, 이런 껄끄러운 대화에서 냅다 튀고 보자는 계획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모습에 이안은 한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갑자기?”

“응. 갑자기!”

한나는 주섬주섬 신관복을 정리하며 빠르게 소파를 벗어났다.

“지금 상당히 의심스러운 거 알아요?”

아. 진짜……. 눈치만 빨라서는.

하지만 여기서 더 대화하다가 자신의 형편없는 연기력 때문에 이것저것 다 들키느니, 조금 의심 사고 얼른 내빼는 게 천 번 만 번 낫다.

한나는 얼른 뒷걸음질로 물러나 문을 열었다. 그러곤 복도로 나가 문을 닫으며, 얼굴만 빼꼼 들이밀고 말했다.

“사람 막 의심하고 그러는 거 아니다. 내가 해 봐서 알아. 그거 아주 안 좋아.”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하고 가도 되지 않나요.”

“안녕히 계세요. 폐하.”

문틈 사이로도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한나는 냉큼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이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를 갉아먹는 것 같던 고민도 한나의 정신없는 퇴장과 함께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는 상태가 마음이 편한 법이었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다시금 문에 시선을 주며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걱정스러운 관계인 두 사람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