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으아아아.”
힘껏 뻗어 보는 기지개.
힘찬 하루의 시작!
“아으, 좋다.”
오늘따라 상쾌한 기분에 한나는 기분 좋게 침대에서 바닥으로 폴짝 내려갔다. 오늘은 또 무슨 일정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물을 마시려고 창가의 테이블 쪽으로 이동했다.
“음?”
그러던 중, 테이블 위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물 주전자 옆에는 붉은 천으로 감싼 기다란 것이 있었다.
“뭐지?”
한나는 어젯밤 자신이 뭔가를 두었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렇게 큰 걸 두고 잊어버릴 리도 없는데.”
한나는 일단 컵에 물을 따랐다.
“흐음…….”
그러고는 물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천천히 목을 축이며 남은 손으로 붉은 천 위를 툭, 건드려 보았다. 부드러운 천 너머로 단단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진짜 뭐지?’
꼴깍, 꼴깍.
물을 모두 마신 한나는 컵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그것을 파헤치기로 했다.
“어…….”
슬쩍 천을 걷어내자 점점 기분이 찜찜해졌다.
“에이, 설마.”
이렇게 긴 물건이라면 꼭, 검 같은데.
“그런 게 내 방에 있을 리가 없잖아. 지팡이인가? 먼지떨이?”
별별 긴 물건을 다 상상해 보았지만, 딱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추리를 하는 사이에 천이 스르륵 풀리고 안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
물건을 보자마자 한나는 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왜 여기 있는데!”
그것은 지난 며칠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성물, 바로 그 검이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한나는 혹시 몰라 낮은 자세로 테이블 위 검에 얼굴을 가져가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나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 성물이 맞았다.
“……왜? 뭐지? 나 무슨 초능력 있나?”
원하는 물건이 자고 일어나니 눈앞에 있었습니다! 두둥! 뭐 이런 건가.
“설마 아직 보호 마법이 있는 건 아니겠지.”
하긴, 만약 보호 마법이 있었다면 이미 천을 걷어낼 때 감전사로 죽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니까, 이게 왜 여기 있는데?”
꿈을 꾸는 건가.
사람이 너무 간절히 원하면 막 꿈에도 나오고 그런다더니.
한나는 제 볼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아오!”
물론 화가 날 만큼 아팠다.
“살살 꼬집었어도 됐을걸……. 아, 아파.”
빨갛게 부어오른 제 볼을 문지르며 이게 꿈이 아님을 직시했다.
그렇다면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
한나는 조심스럽게 검을 손톱으로 톡 건드려 보았다.
가짜일까.
아니, 가짜라도 이상하지 않은가?
자기가 이걸 노리고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여기에 떡하니……!
“설마. 마샤인가.”
의심 가는 인물이라면 마샤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 검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걸 아는 사람도 마샤뿐이고 심지어 그 보호 마법을 해제할 만한 사람이 제국에 그리 많지 않을 테니.
“심부름꾼 노릇 좀 했다고 짠하고 선물을 준 건가?”
굉장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그럼 마샤가 도둑…… 질……?”
그건 범죄잖아!
한나는 놀란 마음에 퍼뜩 검 위로 붉은 천을 다시 덮었다.
당연히 혼자 있는 방이건만, 괜히 좌우를 슥슥 살피기까지. 심장이 두근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설마설마했지만, 진짜 이걸 훔쳤다고?
한나는 놀란 마음 반, 걱정 반으로 손톱을 이로 물었다.
테이블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정신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자. 생각하자.”
일단 그토록 원하던 게 제 손으로 뚝 떨어졌다.
이대로 가져가서 시골 어디 산에 가서 묻을까? 그런다면 레미아 마을 신전 뒷산이 좋으려나.
삽은 어디서 사야 하지. 혼자 제 키만큼 깊게 팔 수 있을까.
황궁에서 나가는 이유는 뭐라고 해야 하지.
“끄응.”
온갖 생각이 몰아쳤다.
“아니, 잠깐만.”
그런데 만약 마샤가 이걸 훔친 걸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 황궁 경비대에 잡혀갈 것이고, 쇠고랑을 차고…….
마샤가 전달한 사람으로 자신을 밝히면 공범으로 몰려서 같이 철창행…….
“아니! 이걸 왜 훔쳤냐고!”
방금까지 어떻게 파묻어야 할지 고민했던 건 없었던 일인 양, 한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심했다.
“이건 아니야. 절대 아니야.”
이 상황을 제자리에 바로 잡아야 했다. 그냥 슬쩍 가지고 궁 밖으로 나가려던 엄한 마음을 다스리자, 마샤를 찾아서 이걸 제자리에 놓아두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한나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얼른 검을 집어 들었다. 그 크기가 워낙 컸기에 양손으로 껴안듯 검을 안았다.
“진짜. 마샤……. 너 때문에 내 수명이 준다. 줄어.”
그러곤 마샤에게 가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섰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에는 새집이 쭈뼛쭈뼛 솟아 있었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얘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평소에는 아주 황궁에 제집 안방인 양 어디를 가도 보이던 마샤였는데, 오늘따라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커다란 검은 품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한나는 여전히 잠옷 차림으로 황궁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놈의 검은 왜 이리 무거워.”
주렁주렁 달린 보석들 때문인지 검은 아주 무거웠다. 한나는 마샤를 만나면 매타작을 하겠노라 다짐하며 그를 계속해서 찾았다.
그렇게 마샤를 찾아 삼만 리를 찍던 한나는 황궁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감지했다.
“무슨 일이지?”
웅성거리는 소리에 한나는 저도 모르게 발길이 창문가로 향했다. 혹시 무슨 소란이 있나 싶은 마음에 창밖을 보자, 그곳엔 병사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그들은 흡사 무언가 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사라진 그건 이 정도 길이라 어디 숨기기엔 쉽지 않을 거다. 기사들도 두 손으로 겨우 들 정도니까, 아마 하녀나 시종들이라면 품에 들고 낑낑거리며……. 그래, 저기 저 사람처럼.”
그 순간 구경을 하던 한나와, 밖에서 설명을 하던 남자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리고 설명을 듣고 있던 병사들의 시선도 한나에게 향했다.
하필 그때, 바람이 불었다. 검의 천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마치 꼭 저런 손잡이를 가진 검…….”
설명하던 사람은 황궁의 치안담당 경비대장이었다.
“…….”
“…….”
“…….”
그러니까 이건 한 마디로 망한 상황이었다. 한나는 놀란 마음에 검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 * *
“아. 인생.”
결론만 말하자면, 한나는 감옥에 갇혔다.
“하루아침에 범죄자 신세라니.”
감옥의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댄 한나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건만! 왜 범죄자가 됐냐고!
“황궁 물건 훔치면 얼마나 옥살이를 하더라…….”
눈물이 앞을 가리는 상황이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심지어 감옥에는 사람도 없었다. 저 멀리 입구에 보초를 제외하고는 아주 텅텅! 비어 있었다.
“무서운데.”
한나가 중얼거렸다. 등도 없이 깜깜하니 무서운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흉악한 범죄자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이게 나은가 싶기도 했다.
“저기요, 보초병님. 저 심문 같은 건 언제 받나요? 진술할 기회는 주셔야죠? 변호사 선임은 되나요? 저기요?”
사실 아까부터 보초병에게 꾸준히 말을 걸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보초병은 한마디 대답이 없었다.
기계인가.
아무래도 그들은 범죄자들과 말을 섞으면 안 된다는 규율이 있는 모양이었다.
“에휴.”
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지 몰라도 책임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나저나 뭐라고 하지. 마샤가 그랬다고 홀랑 일러 버려?’
솔직히 한나는 자신을 이렇게 옥살이를 하게 만든 장본인은 마샤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죄도 나눠 가지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아……. 아무리 그래도……. 으으.”
그렇다고 마샤를 제 입으로 고발하는 건 또 아니지.
이 정도면 마샤가 자신을 물 먹이려고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었다.
“마샤……. 가만 안 둬…….”
괜히 애꿎은 돌멩이를 바닥에 긁으며, 한나는 이를 바득 갈았다. 감옥으로 연행되어 온 지도 벌써 몇 시간이 흘렀다.
왜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 걸까.
“…….”
이대로 죄인 땅땅. 못 박고 가두는 건 너무하잖아!
변론의 기회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 진짜 너무해.”
한나는 서러운 마음에 쪼그려 앉은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뭐 울 정도로 슬픈 상황은 아니고, 그냥 억울하고 분개한 마음을 풀 수 없어서라고 할까.
“나 밥도 못 먹었다고!”
아무리 범죄자라도 밥은 줘야지!
하지만, 이것 역시 말해 봐야 저 로봇 같은 보초병들이 답을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혼자 분을 삭일 뿐이었다.
“배고파.”
어느새 기운이 뚝 떨어졌다. 한나는 이렇게 기운 빼면서 있다간 병나겠다는 생각과 함께 슬쩍 머리를 벽에 기댔다.
이런 상황에도 졸음이 오는 건, 절대 나사가 풀린 성격이라서가 아니다. 성수 만드느라 성력을 써서 졸음을 이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해 두는 걸로.
아침의 상쾌했던 컨디션은 이미 감옥 바닥 어딘가에 나뒹굴고 있었다.
* * *
한나는 썰렁하고 불편한 감옥에 불평을 토로했지만, 사실 그녀가 갇힌 감옥은 일반 감옥이 아니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이나 아주 위험한 이들을 가두는 특별 감옥이었다.
그녀가 신전의 신관이라는 점과 황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참작해 이동된 곳이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경비대장과 하얀 신관복을 입은 남자가 함께 감옥이 있는 궁의 북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잘 있습니다.”
경비대장은 조금 긴장한 듯, 딱딱하게 답했다. 그가 이렇듯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군요.”
자신과 함께 걸으며 답하는 이가 제국의 영웅이자 교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전으로 빠르게 연락 주셔서 감사하군요.”
“벼, 별말씀을! 대신관……. 아니, 교황 성하를 뵐 수 있어 제가 영광입니다!”
한나의 사건은 황궁에 바로 보고되는 동시에, 신전에도 빠르게 전달되었다. 신관을 문책하는 일은 황궁에서 독단적으로 해결하기엔 껄끄러운 점이 있었기에 이렇게 진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신관의 사소한(?) 문제 때문에 교황이 직접 황궁에 등장한 것은 황궁과 신전의 역사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평소 공식석상, 그것도 나라의 큰 행사가 아니라면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 교황이었다.
그중에서도 세기의 영웅이라 불리는 세자르가 직접 움직이다니.
경비대장은 평소 품고 있던 영웅에 대한 벅찬 존경심을 보상받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 것이었다.
“어서 가 보죠.”
세자르는 지금껏 서늘하다시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경비대장은 그런 것까지 살필 여유가 없었다.
“예, 예!”
그는 얼른 큰 걸음으로 앞장섰다. 안내라기보단, 그를 경호하는 마음으로.
세자르의 하얀 신관복이 발길에 따라 넘실거렸다.
* * *
“…….”
“…….”
두 사람은 철창을 사이에 두고 눈길을 주고받고 있었다.
한나는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번뜩 눈을 뜨고 철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거기에 세자르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문관이 왔나 싶어 반갑게 쳐다보기까지 했는데.
“잠자리가 시원찮아 보이는데.”
그중, 먼저 입을 뗀 것은 세자르였다. 그는 쪼그려 앉아 쪽잠을 자다 깬 한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죠.”
한나는 자신이 생각해도 여긴 잠자기엔 영 알맞은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딱딱한 바닥에 엉덩이가 아팠다.
“그렇게 세상을 구할 것처럼 신전을 나서더니.”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입이 턱 막혔다.
아, 진짜…….
그걸 또 이 상황에서 말하다니.
“…….”
한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호기롭게 손을 흔들며 떠나 놓고, 감옥에서 다시 보다니.
“아니, 황궁은 무슨 쪼르르 그걸 일러서 신전에…….”
이쯤 되면 그동안 한솥밥(?) 먹으며 정들었다고 생각한 황궁에 빈정이 상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뭘 훔쳤다고?”
덤덤한 세자르의 물음에 한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망했네.
그것도 아주 신나게.
이제 그 검이 성물이라고 온 천하에 소문만 내면 되겠구나.
“월급이 많이 부족했나?”
세자르의 물음에 한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아요. 진짜 돈이 탐난 건 아니라고요.”
진짜 딱 혀 깨물고 죽고 싶었다. 한나의 반응에 세자르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아! 진짜 이건 이유가 있거든요? 진짜 그 녀석이 사고만 안 쳤어도…….”
“황궁 생활이 심심하진 않았던 모양이군.”
“심심? 심심이라니. 제가 그동안…… 하, 말도 마세요.”
한나는 기운 없이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그래서, 저 여기서 꺼내 주실 수 있는 거예요?”
그러곤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세자르에게 물었다.
신전 힘 세다면서요.
아니면 벌금이라도 턱턱 내고 꺼내 줄 거죠? 네? 교황님.
자신을 구제해 달라는 한나의 SOS 신호에 세자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황궁의 일이니 딱히 내가 힘쓸 도리가…….”
“아, 약한 말씀 하지 마시고, 가서 잘 좀 말해 주세요.”
한나는 벌떡 일어나 창살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래서, 왜 훔친 거지?”
세자르는 팔짱을 끼며 한나에게 물었다.
“그게……. 하, 진짜 교황님이니까 말해 주는 거예요.”
“말해 봐.”
이어질 한나의 이야기가 기대가 되었는지 세자르의 입꼬리가 비뚜름 올라갔다.
“사실 그걸 제가 홀랑 훔친 게 아니에요. 생각을 해 보세요, 그 물건은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어요. 제가 무슨 수로 그걸 해제하고 가져오겠어요. 그럴 능력이 없거든요.”
“음. 사전 조사를 많이 한 모양이군.”
세자르는 한나가 그 검에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콕 집었다.
“아니. 그것도 다 이유가……. 하여튼 더 들어 보세요.”
“계속해.”
“솔직히 그걸 지켜보고 있긴 했어요. 전 정말 관찰만 하려고 했다니까요.”
물론 홀랑 훔쳐 달아나려고 생각은 많이 했었지만, 능력 부족이라 접은 거지만.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떡하니 내 방 테이블 위에 저 검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눈 뜨니 있었다?”
“네. 바로 그 말이에요. 저 정말 억울해요.”
“흐음.”
세자르의 눈매가 좁혀졌다.
“……설마 저 의심하시는 거 아니죠?”
“글쎄. 검에 발이 달려서 그곳으로 갔을 리는 없고.”
와! 의심하네!
한나는 믿었던 세자르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저 진짜 아니거든요. 그럴 능력도, 배포도 없어요. 알잖아요.”
스스로의 무능을 고백한다는 건, 참……. 씁쓸한 일이었다.
“그럼 누가 그걸 가져다 놨으려나.”
팔짱을 낀 세자르의 손가락이 톡톡, 움직였다.
“웬수……. 아니. 어떤 착한 친구가 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선물한 게 아닐까 싶은데.”
“누구?”
“추측이지만, 마샤……?”
“그가 왜?”
세자르는 이 황궁이 참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제가 그 검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들켰거든요.”
“그 아이가 그대를 곤란하게 했다는 건가.”
“마샤가 절 곤란하게 하려던 건 아닐 거예요. 저한테 나쁜 일 생기길 바라는 애가 아니니까. 절 도우려고 한 것 같은데……. 그 방식이 뭐, 결국 이런 결과를 낳은 게 아닐까요.”
세자르는 한나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거군.”
“네. 네! 그러니까 얼른 저 좀 빼내 주세요.”
한나는 정말 이럴 때 소속이 있다는 게 얼마나 믿음직스러운지 이제야 알았다.
‘정말 신관이길 잘했다.’
참고로 이런 생각이 든 건 신전에 취직한 6년 이래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이야 그댈 당장 꺼내 주고 싶지만…….”
그러나 세자르가 말을 이을수록 한나의 표정이 점차 안 좋아졌다.
아니, 말 흐리지 마세요. 왜 이래요.
“내 권한은 아닌지라.”
“……그럼 여긴 왜 오신 건데요.”
한나의 얼굴이 불퉁하게 변했다.
“궁금해서?”
“지금 설마 웃고 계신 거 아니죠?”
한나는 이상하게 무표정한 세자르의 표정이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는 거…… 아니죠?”
설마.
한나의 물음에 세자르가 슬쩍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아니……. 정말 저 감옥에 갇힌 거 구경 오신 거라고요?”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좋은 추억에 함께해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
“저기요. 교황님. 이게 좋은 추억으로 보여요?”
한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창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창살 너머로 저 하얀 교황복 멱살을 쥐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농담이었어.”
“재미없는 거 아시죠?”
“그러게, 누가 황궁 물건을 막 훔치고 그러라고 했나.”
“…….”
배신감이 찌르르, 심장을 울렸다.
“이참에 이 사건이 해결되면 신전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 여기 아주 무서운 곳 같은데.”
세자르는 감옥의 깊은 어둠과 서늘한 바닥을 보며 쯧, 혀를 찼다.
“마음에 안 들어.”
감옥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지, 자신이 갇혀 있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지, 한나는 그가 정확히 짚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놀리실 거면 얼른 돌아가요. 괜히 기대하느라 기운 더 빠졌어.”
한나의 어깨가 축 늘어지자 세자르는 낮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지금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나요. 내 편이어야 할 교황님이 제 꼴 보면서 재미있어 하고 있는데.”
“하하.”
세자르는 팽하니 삐쳐 버린 한나를 보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미안해. 놀리려던 건 아니었어.”
“이미 마음 상했어요. 돌아가요. 돌아가. 돌아가는 길에 좋은 변호인 있는지 수소문이나 해 주시던지요.”
“정말, 그렇게 속이 좁아서야.”
세자르가 창살을 잡고 있는 한나의 손을 스윽 바라보았다.
“걱정할 필요 없어. 그댄 꼭 지켜 줄 테니까.”
“역시 신전이 힘써 주는 거죠?”
역시! 믿고 있었다고!
한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순간 세자르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한나의 모습이 흡사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손이 창살 사이를 가로질렀다. 따뜻한 손이 한나의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긴 했지만,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신전이 아니라, 내가.”
세자르의 눈동자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 있었다.
“내가 그댈 지킬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
지킨다는 말이 뭐라고, 한나는 그의 말에 가슴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긴장감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만약 그게 엄청 중요한 거라서, 제가 막 10년형쯤 받아도요?”
“고작 장식 검이.”
그게, 장식 검이 아니거든요……. 성물인데.
애석하게도 씁쓸한 진실이었다.
“그게 그렇게 보여도 나름 성물인데.”
“그게 성물이든 황실 가보든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이야.”
뭘 또 이렇게까지 믿음직스럽게 말을 하고 난리야.
한나는 아까 자신을 놀리던 세자르의 모습을 아주 잊어버린 것처럼 뭉클한 심정이 되었다. 그렇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세자르에게 감동을 받던 중, 감옥의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한나와 세자르의 시선이 함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어…….”
한나는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폐하?”
이안이 감옥에 직접 발길 한 것이었다. 이안이라면 이런 먼지 가득한 곳에 발길 하는 일이 영원히 없을 줄 알았는데.
놀란 것은 한나뿐만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보초병들은 황제를 코앞에서 본다는 것에 잔뜩 긴장해 떨고 있었다.
“그럼, 저는 입구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이안을 따라온 보좌관 알렉스가 그에게 말했고,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나와 세자르가 있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또 뵙는군요.”
이안이 세자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이안의 시선이 창살 안의 한나에게 향했다.
“몰랐는데.”
한나는 저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이안에게도 쪽팔림을 당하는구나.
“여기는 무슨 다들 감옥을 좋아하는 사람들인가. 왜 다 여기로 모여.”
한나는 체념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선생님이 차디찬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을지 몰라 얼른 왔는데, 저보다 빠른 분이 있었네요.”
이안의 시선이 세자르에게 다시 향했다.
“거리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의 차이지.”
세자르가 한 대답에 이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미안해요. 제가 조금 늦었죠.”
이안은 웃었지만, 어째서인지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원하는 게 있으면 저한테 말하라니까. 왜 이런 깜찍한 일을 벌여요.”
웃음기 서린 타박이었지만 한나는 몹시 죄를 진 기분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
“꼭 우리 사이에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뭘 자꾸 몰래 해.”
한나는 갑자기 입술이 탔다.
이거 취조당하는 게 분명하다. 그것도 황제에게 직접.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그의 말을 받아친 건 세자르였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내 사람은 이만 풀어 줬으면 좋겠는데.”
그의 말에 아슬아슬하던 분위기에 쫘악, 금이 갔다. 짧은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을 걷어낸 것은 의외로 이안이었다.
“신전의 사람, 이라는 거겠죠.”
이안은 세자르의 말을 정정했다.
“뭐.”
세자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좋은 대로 생각하라는 듯.
이안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오늘 소식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웃음을 터트렸었다.
자신의 선생님이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고 고작 물건 하나 정말 훔쳤다고 한들 하등 상관이 없었다.
분명 기분 좋게 한나에게 향했던 그였는데.
지금, 그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나락으로 떨어져 있었다. 특히, ‘내 사람’이라는 말은 그의 언짢은 기분에 기름을 부었다.
“아무래도 교황께서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냉랭한 이안의 말에 세자르와 한나의 시선이 이안에게 못 박혔다.
“황궁에서 일어난 일은 저희 소관입니다만.”
“자, 잠깐만.”
한나는 지금 황상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럼, 이 사람을 이대로 가둬 둘 텐가? 차가운 이 감옥에?”
“그건 안 돼죠! 전 무고해요!”
세자르의 말에도 한나도 말을 덧붙였다.
“신전에선 우리의 처분을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
“이보세요, 황제 폐하. 저 무죄라니까요?”
하지만 두 사람은 한나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거의 혼자만 애타게 외치는 메아리나 다름이 없었다.
“화풀이하고 싶은 상대를 제대로 찾지 그래.”
세자르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이래서 어린 녀석들이란, 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잠깐만요. 교황님. 지금 상황을 악화시키고…….”
한나가 두 사람의 이 이상한 대치를 중재시키려 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메아리로 흩어질 뿐.
“그럼, 대신 들어가 주시기라도 할 기색이군요.”
이안의 말에서 화가 난 상대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밝혀졌다. 그럼 화의 원흉인 네가 들어갈 테냐, 라고 물어 오는 이안의 말에 세자르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우리 폐하께선 지금 딱, 심통난 열 살 아이 같군.”
이안은 항상 세자르의 이런 태도가 싫었다.
어린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자신을 풋내기로 깔보는 시선.
그리고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
황제가 되었음에도 변함없는 그의 태도는 결국, 나이나 자리에 상관없이 오롯이 인간 그대로의 자신에게 향하는 것임을 알기에 더 신경을 건드렸다.
“내가 좋은 충고 하나 하지.”
세자르가 한나의 머리를 만지느라 흐트러진 제 신관복 소매를 정리했다. 마치 자리를 떠나려는 사람처럼.
“어라, 어디 가요.”
한나가 세자르를 불렀지만 그는 한나에게 씩 웃은 뒤, 이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스치며 남들은 들을 수 없을 만큼 아주 작게 속삭였다.
“사납게 굴면, 귀여움조차도 받지 못한단다.”
세자르가 유유히 이안을 지나쳤다. 이안은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혀 있었다. 그의 내리깔린 속눈썹 밑으로 짙은 그늘이 졌다. 세자르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래서, 이 사건의 책임자는 누굽니까.”
그의 목소리가 감옥의 입구에서 들려왔다. 그는 아무래도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듯 책임자를 찾고 있었다.
이어서 이안의 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한나는 지금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음? 저기, 폐하?”
한나는 멍하게 있는 이안을 불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한나를 발견한 이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굳어 있던 표정을 풀어냈다.
늘 그렇듯, 따스한 미소를 짓는 이안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느긋한 목소리로 한나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이런 곳에 있어도 잘 어울리네요.”
그 말에 한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아니, 설마 너도 놀리러 온 거였니? 어떻게 제대로 된 아군이 없어!
흑역사 2부의 시작이었다.
* * *
결론적으로 한나는 감옥을 벗어났다. 무려 반나절만의 쾌거라고 할 수 있었다.
“감옥 경험한 기분은 어때요?”
이안은 나긋한 목소리로 한나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그 차갑던 감옥을 벗어나, 황제의 응접실에서 몸을 녹이는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있었다.
한나의 어깨에는 보송보송한 담요가 덮어져 있었다. 이안의 물음에 한나는 머쓱하게 눈길을 피하며 답했다.
“한마디로 쪽팔립니다만.”
한나의 대답에 이안은 조금 웃었다. 세자르를 만난 뒤 묘하게 굳어 있던 그였었다. 이안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한나의 빈 찻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왜 갖고 싶은 걸 말 안 해서, 절 서운하게 해요.”
애초에 자신에게 말했으면 되지 않았냐는 물음이었다. 졸졸 흐르는 주전자의 찻물을 멍하니 응시하던 한나가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매번 부탁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고…….”
네가 알게 되는 게 껄끄러워서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마음껏 내 마음을 이용하라니까.”
주전자를 따라 내리깔린 그의 눈 밑으로 그늘이 졌다.
“기꺼이 이용당해 주겠다는데.”
한나는 이안이 어딘지 서운해하고 있다는 기색을 읽어 냈다. 자신을 이용해 달라고 사정하는 건 도대체 무슨 마음인지.
이래저래 난감한 기분에 한나는 헛기침과 함께 분위기를 환기시키기로 했다.
“어쨌거나, 저를 그 무서운 감옥에서 무려 반나절 만에 꺼내 주신 것에 대해선 감사의 인사를 드려요.”
“칭찬인지 원망인지 모를 말이네요.”
“물론 감사의 말이죠.”
“그럼 이제 설명해 볼래요?”
이안의 눈길이 두 사람 사이의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검으로 향했다. 한나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물건이기도 했다. 이안은 자신에게 이 일의 전말에 대해 설명하기를 요구했다.
“아니 뭐, 사람이 물욕이 생길 수도 있고…….”
“선생님이 훔친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요.”
이안이 한나의 앞으로 적당히 식은 차를 밀어 주었다.
“어, 응. 그렇지. 참.”
“황궁 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것 같아 보기가 좋네요.”
이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이미 넋을 놓은 한나에게는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뭐든 즐겁게 생활하자는 주의라…….”
“어쨌거나 저 물건은 선생님이 가지고 가요. 직접 훔친 건 아니라지만, 가지고 싶어 했던 건 맞는 것 같으니.”
이안은 한 번 더 미소 짓고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뭐 그렇게 해 준다면 감사히 받겠다만…….”
이렇게 일이 잘 풀리자 한나는 불안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일이 잘 풀리는 건 물건너간 상태였다.
생각해 보라.
오늘의 소동으로 인해, 이제 황궁 내에는 자신이 저 성물을 가졌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나중에라도 누군가가 저 검을 찾는 일이 생긴다면, 표적은 자신이 된다는 아주 애석한 미래가 펼쳐진 것이었다.
심지어 광산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도 알면…….
악당들의 제거 1순위가 되겠지.
이쯤에서 한나는 자신이 이토록 허술한 사람이었나, 하는 고찰을 해야만 했다.
아주 서글프게도.
‘역시. 양이나 치면서 살았어야 했는데.’
이제 와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 이 검까지만 잘 묻어 버리고 어딘가로 잠적하든가 해야지.
“감사해요.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한나는 이내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혀(?)져 있던 검을 제 품으로 가져왔다. 검을 꼭 끌어안은 한나를 보며 이안은 하얀 장갑이 씌워진 손으로 제 턱을 쓸었다.
“선생님은 항상 종잡을 수가 없네요.”
“응?”
“보통 사람은 목적하는 바가 조금이라도 드러나기 마련인데, 선생님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그 순간 한나는 그나마 자신의 행동 이유가 잘 감추어지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솔직히 그런 마음을 폐하 혼자만 느끼는 건 아니랍니다.”
한나는 정말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이안도 그렇고, 마샤, 제레미까지도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아이들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전혀 모르겠으니, 피차일반 아니겠는가?
“저도 정말, 모두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라고요.”
순도 100프로 진심을 내비친 한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안이 미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누군가와 연관이 있는 일인가 보네요.”
이안의 예측에 한나는 뾰족한 눈으로 이안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알아내려고 하지 마세요. 추측도 금지.”
“무섭게 구는 걸 보니, 정말인가 보네.”
“전 눈치 빠른 사람을 안 좋아한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한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이안이 답했다.
“그래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양 굴고 있잖아요.”
그 미심쩍은 미소에 한나의 의심이 좀 더 짙어졌다.
혹시 다 알면서 모르는 척 구는 건 아닌지.
그런 한나를 못 본 척, 이안이 말을 이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이제 가 봐요.”
뒤돌아보니, 창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직도 웅성거리는 바깥의 소란으로 보아, 세자르가 황궁을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한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안에게 말했다.
“저 이번 휴일은 황궁 밖에 나갔다 올 것 같아요.”
검이 제 손에 들어온 이상, 확실하게 바빠질 예정이었다. 혹시나 자신을 찾을까 봐 미리 말을 했다.
“그래요.”
그리고 늘 그렇듯, 이안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세자르 님!”
한나는 검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세자르에게 달려오다시피 바삐 걸음 했다.
황궁 사람들의 시선이 그런 한나에게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아직 잠옷 차림에다가, 머리는 산발이었다.
잠옷 위로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담요를 망토처럼 묶고, 품에는 커다란 것을 안고 있으니, 눈길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다.
보통 황궁에서 이 정도로 엉망인 모습으로 배회하는 사람을 구경하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다.
“기운은 좀 돌아온 모양이야.”
감옥에서 울상을 짓던 한나를 떠올린 세자르가 말했다. 한나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휴, 뭐 일단 어떻게든 해결됐으니까요.”
“옥살이 끝낸 기념 축하라도 해야 하나.”
“괜히 사람 민망한 과거 들추지 말기로 하죠.”
세자르를 흘겨보며 한나가 말했다.
“진짜 더는 기운도 없어요. 이대로 방에 가서 뻗었으면 좋겠다.”
다시 생각해도 오늘은 아주 고단한 하루였다.
개운하게 눈을 뜬 것 치고는 엉망이었던 하루.
“오늘 느낀 건데, 죄짓고 살지는 말아야겠어요.”
“갑자기?”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한나의 뒤를 따르며 세자르가 물었다. 그러다가 마치 제집처럼 편안하게 이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묘한 기분도 들었다.
언제 이렇게 익숙해진 것일까.
“감옥이 생각보다 무섭더라고요. 아까 나오는 길에 목석같던 간수랑 얘기를 좀 했는데, 그나마 여긴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다른 곳은 재소자들끼리 싸우고 괴롭히고……. 어휴.”
“그사이에 간수랑 친해질 틈이 있었나?”
“뭐 반나절 같은 공간에 있었다고 조금 정이 들긴 하더라고요.”
어이없다는 세자르의 반응에 한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불러도 대답 없던 간수였건만, 이제 지나가다 보면 안부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저가 생각해도 참 웃긴 일이었다.
“제가 정이 많은 타입이라.”
“그건 알고 있지.”
한나의 말에 맞장구친 세자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무거워 보이는데, 이리 줘.”
그 말에 정원으로 향하던 한나의 걸음이 멈췄다.
그러곤 홱하고 고개를 돌려 세자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놀란 듯한 그녀의 모습에 의문이 든 세자르가 물었다.
“……아니…….”
사실 한나는 세자르의 이런 행동이 정말 이상했다. 일단 옛날의 그를 떠올려 보자면, 특히 그랬다.
레미아 마을에서 양동이 좀 같이 옮겨 달라고 사정을 해도 시큰둥하게 손이나 까딱이던 ‘그’ 세자르가 먼저 짐을 들어 주겠다고 하다니.
“역시 사람은 변하는 건가…….”
아니면 자신이 특별 취급을 받고 있는 건지, 어떻게 생각해도 어색한 상황임은 마찬가지였다.
“남 일에 관심 없는 세자르 님이 이렇게 호의를 베푸니 좀 어색하달까요.”
“난 그대 일에 관심이 많아.”
“어……. 음…….”
이것도 어색하고.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테고.”
이것도 적응이 안 되는데.
그때였다.
여전히 가만히 멈춰 서 있는 한나에게 세자르가 한 걸음 다가갔다. 언제부터였는지 한나의 목에 묶인 담요의 매듭이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무심한 듯, 세심하게 당겨 매듭을 조였다.
“이런 귀여운 사고는 재미있지만 앞으로는 예고라도 해 줬으면 좋겠어.”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거다.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라는 게 어떻게 예고가 가능하겠어요.”
“그런가.”
그렇게 대꾸하며 세자르의 손이 매듭에서 떨어져 나갔다. 여전히 세자르는 한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나의 소식을 접하고 놀라 황궁으로 달려올 때 굳어 있던 얼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손이 한나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거참, 오늘 여러 번 정수리를 만지시네. 머리도 안 감았는데.’
한나는 오늘 아침, 씻을 새도 없이 철창행이 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냄새라도 날까 싶어 머리를 털어 냈다.
“저 머리 안 감았어요.”
“알아.”
“헛, 어떻게요?”
이미 알고 있다는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깜짝 놀랐다.
그럼 여태 더러운 머리인 줄 알고도……!
“티가 많이 나거든.”
세자르의 대답에 한나는 숙연해졌다. 여태 이런 상태로 황궁을 활보했다니.
수치스럽다.
“그나마 해가 져서 다행이네요.”
고개를 푹 숙인 한나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담요만 둘둘 잘 말고 있으면, 엉망인 상태를 들키진 않겠지.
“그런데 우린 어디로 가는 거지?”
“아.”
그제야 한나는 자신이 말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여태 행선지도 모르고 따라오고 계셨어요?”
“어디 재미있는 곳을 데려가 주려나 싶어서.”
“재미……. 음. 재미는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디길래.”
고민하는 표정에 세자르는 정말로 흥미 있는 곳을 데려가는 건가 싶어 기대감이 생겼다. 잠시 후, 결연한 표정이 된 한나가 말했다.
“마샤 잡으러 갑니다.”
“……아.”
“멱살을 잡을 거예요. 이건 예고하는 거니까, 놀라지 마세요.”
* * *
“마샤!”
한나는 마샤에게 향하던 복도에서 붉은 머리를 발견했다. 때마침 마샤는 어디론가 나서고 있었다.
“이런.”
한나를 발견한 마샤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도망을 갈 게 분명한 그 모습에 한나는 다급해졌다. 하지만 마샤라고 쉽게 잡힐 생각은 없었다. 그 역시 속도를 높여 쌩하니 복도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너 당장 거기 안 서!”
한나가 다급하게 마샤를 불렀지만, 마샤는 모르는 척 서둘러 몸을 피했다. 자신의 말을 다 듣고 있으면서 대꾸도 없이 튀어 버리려는 마샤의 모습에 한나는 열불이 났다.
“내 말 들리는 거 알거든? 너 당장 이리 안 와?”
한나의 노성에 마샤는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 그럼 또 사랑의 매타작을 할 거면서.”
고놈, 아직 눈치는 있구나.
하지만 한나는 속마음과 달리 방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안 때려. 내가 사람을 왜 때려? 응? 어서 거기 멈춰 보겠니?”
“지금 표정 상당히 어색해 보여요. 선생님. 화 좀 삭이고 보면 안 될까요?”
“너 맞구나?”
마샤의 반응에 한나는 그가 이 사건의 원흉이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저렇게 도망가는 거겠지.
“진짜 화내기 전에 거기 딱 멈춰.”
한나는 그를 쫓던 것을 멈추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술래잡기할 기운도 없었다. 이대로 가면 영영 미워하리란 다짐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마샤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내 뛰던 것을 멈췄다.
“그럼 변명의 기회라도 줘요.”
마샤는 순순히 한나에게 향했지만, 여전히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이지. 어디, 마음껏 해 보렴. 변명.”
한나는 팔짱을 끼고 다가오는 마샤를 보며 미소 지었다. 변명이라면 백 번 들어 줄 용의가 있었다.
“그게 말이죠. 선생님…….”
마샤가 한나의 코앞까지 당도하자, 한나는 심호흡을 크게 들이쉬고 팔을 뻗었다.
덥석.
마샤의 옷깃이 한나의 손에 움켜쥐어졌다.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변명! 변명 들어 준다면서요!”
“응. 들어는 주지. 물론 용서는 안 할 거지만.”
탈탈탈.
한나는 마샤의 멱살을 힘껏 흔들었다.
그놈의 성물 때문에 감옥에 갇혔던 것만 생각하면, 이깟 멱살로 풀릴 울분이 아니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그 차가운 바닥에서 떨면서! 온갖 고생을 했는데! 어?”
“아, 그건 미안하게 됐어요. 면회 가서 사식이라도 넣어 줬어야 했는데. 제가 낮 동안은 외출을 다녀왔던지라…….”
“사식? 사시익? 지금 그거 말이라고……!”
마샤의 뻔뻔한 태도에 한나는 정말 기가 찼다.
“그러게 조용히 챙겼으면 됐을걸. 왜 들켰어요.”
다시 생각해도 애석하다는 듯, 마샤가 말했다.
“아니. 도대체 그걸 왜 홀랑 훔쳐서! 그리고 말도 없이 내 방에 두면 내가 어떻게 날름 숨겨!”
진짜 마샤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로 이렇게 막장일 줄이야.
당장이라도 한나는 고혈압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일단 미안해요. 선생님. 정말 좋은 마음에서 그런 거예요. 꽤 애먹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한나를 달래기 위해 마샤가 한나의 양 손목에 제 손을 감쌌다.
“가끔씩은 저지르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나빠. 완전 나빠. 내가 감옥살이라니, 내 인생에 빨간 줄이라니!”
빨간 줄이라는 말은 이해되지 않았지만, 마샤는 한나의 손목을 토닥이며 팔을 치워 주길 바라고 있었다.
“너는 정말……!”
“어. 교황님 아니세요?”
그리고 그 순간, 한나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마샤는 먼발치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세자르에게 인사를 했다.
꼼지락거리며 한나의 손을 풀어낸 마샤가 가벼운 걸음으로 세자르에게 이동했다. 더 이상 멱살을 잡고 흔들 힘도 없던 한나는 황망하게 텅 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보니, 감회가 남다른데요?”
마샤가 세자르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정말 여전하군.”
세자르 역시 옅은 미소로 답했다.
“저만큼 많이 변한 사람이 없지 않나요?”
“글쎄.”
제 외양에 대해 얘기한 마샤와 다르게 세자르는 다른 관점에서 판단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너희 선생님을 난감하게 하는 건, 네가 제일인 게 여전한데.”
과거 보육원에서도 마샤는 이상한 오컬트적인 취향으로 모두를 난감하게 한 적이 많았다. 특히, 중앙 신전의 감사라도 있으면 한나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는 세자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은 선생님 탓도 제법 크답니다.”
“이게 왜 내 탓이야!”
그때, 마샤의 말을 들을 한나가 발끈했다.
“그러게 그걸 왜 가지고 돌아다녔어요.”
“너한테 다시 주려고 했지!”
“기껏 안 들키게 가져다줬는데. 내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다니.”
과장되게 반응하는 마샤의 모습에 한나는 또 어이가 없었다.
“범죄니까!”
“선생님답지 않게 뭘 그런 걸.”
말이 안 통한다, 안 통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친 마샤를 한나가 벙찐 얼굴로 바라보았다.
“내가……. 내가 얼마나 준법정신이 투철한데.”
“북부에선 딱히 그렇지도 않…….”
“그만! 거기까지!”
마샤의 입에서 갈라티아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려 하자 한나는 황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그곳의 일은 신전에는 비밀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여기저기 허술한 모습만 보이고 다녔는데, 북부 일까지 세자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일이 잘 풀렸으니 이번만 넘어간다.”
“다행이에요. 미움받지 않아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한나의 화가 수그러든 걸 느낀 마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까딱하면 송장 치를 뻔.
“둘은 지금도 사이가 좋군.”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던 세자르가 끼어들었다. 황당한 얼굴로 한나가 새침하게 답했다.
“제가 웬수라고 한 말 잊으셨어요?”
“선생님, 절 그렇게 생각했어요?”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마샤의 모습에 한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가증스럽게 굴지 마.”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이 가증스러울 수 있나요?”
“너 진짜 이상한 소리 더하면 다시 멱살 잡는다.”
한나의 말에 마샤가 한 걸음 물러섰다.
“예엡. 그럼 저는 갑니다.”
한나의 이마에 주름이 한 줄 늘어난 것을 발견한 마샤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또 멱살 잡히지 않으려면 얼른 이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 이상 한나에게 밉보였다간 의절을 당할지도 몰랐다.
“선생님, 진짜 오늘 일 탓하기 없기에요.”
마샤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곤 한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마샤를 보는 한나의 마음은 여러모로 싱숭생숭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샤가 대형 사고를 쳤고, 상황이 난감해지긴 했지만 결국 원하던 것은 제 손으로 들어왔으니.
조금(?)의 위험 감수만 제외한다면, 썩 나쁘지 않은 상황이긴 했다. 물론 그 위험 감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뭐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일단 생각이라도 긍정적으로 하기로 했다.
“저, 저……. 가벼운 발걸음 좀 보라지.”
통통 튀듯 멀어지는 뒷모습에 한나가 고개를 저었고,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자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밝고, 활기가 넘치는군.”
세자르가 마샤를 보며 읊조리는 말에 한나가 답했다.
“그렇게 보이면 다행이네요.”
그 순간 한나는 북부에서 조금은 엇나가 있던 마샤의 모습이 생각났다. 남들에게는 마샤가 밝고 긍정적으로 보인다니, 그간의 고생이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 노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 가죠. 제가 배웅해 줄게요.”
한나는 웃으며 세자르에게 말했다. 자신을 위해 황궁까지 뛰어와 준 고마움을 배웅으로 소소하게 보답하고 싶었다.
“그것도 좋지만…….”
하지만 세자르는 궁의 입구 쪽으로 몸을 돌린 한나의 어깨를 잡아 몸을 반대로 돌렸다.
“오늘은 내가 그댈 데려다주는 걸로 하지.”
“네?”
깜짝 놀란 한나가 되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나에게 이건 조금 이상한 상황이었다. 황궁 지리라면 세자르보다는 자신이 훨씬 훤할 텐데, 누가 누굴 데려다준다는 건지.
“해 보고 싶었거든.”
“뭘요?”
“좋아하는 사람 데려다주기.”
“…….”
그리고 할 말을 잃었다.
몸에 조금 닭살이 돋는 것 같기도…….
마치 얼음조각처럼 굳어 버린 한나를 보며 세자르는 피식 웃었다.
“그냥 오늘은 그대가 더 고단한 하루를 보냈으니, 내가 배웅하는 걸로 하지.”
그래. 차라리 배웅이라고 치는 게 낫겠다.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아 참. 범인 찾는 일은 잘되어 가나요?”
한나는 세자르를 만나면 물어보려던 질문을 던졌다.
“열심히 알아보고는 있지.”
“의심 가는 사람은 없나요?”
“아직은.”
“그렇군요.”
그 짤막한 대답에 한나가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아직 신전에선 별다른 정보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성물이 정화 능력이 있었던 만큼, 그와 관련된 것들을 알아보고 있어.”
“정화라면 딱히 쓰일 만한 곳도 많지 않을 텐데요.”
“마기에 물든 광석을 정화하는 데엔 그만한 게 없겠지.”
오?
한나는 세자르의 접근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에 내심 감탄했다.
역시, 똑똑한 커티스의 능력인가.
물론 그녀가 인정하는 건 세자르가 아니었다.
“마물, 광석, 그런 걸로 크게 시끄러운 모양이더군. 특히 사막과 맞닿은 지역에선.”
“오…….”
한나가 다시 감탄했다. 지난날 다녀온 갈라티아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우리 신전이 구해 낸 곳에서 이득을 보려는 게 우습지.”
“……어……. 아……. 음. 그러네요.”
엄밀히 말하자면, 그 이득을 보려는 곳 주인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광산의 소유주를 알게 되면 세자르는 어떤 얼굴을 할까.
‘……이건 절대 들키지 않기로.’
그런 한나의 마음을 알지 못할 세자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모쪼록, 수사에 진전이 있길 바라요.”
응원하면서도, 응원하지 않게 되는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거참. 난감하네.’
한나의 방으로 향하는 긴 복도에 하얀 신관복과 털 담요가 사이좋게 휘날리고 있었다.
* * *
반질반질.
한나는 생전 해 본 적도 없던 일을 하고 있었다.
“음. 이러니까 꼭 기사가 된 기분인데.”
바로 어찌저찌 얻어진 선물 검을 닦는 것.
“오……. 그래도 보석이라고 빛이 나네.”
어차피 묻어 버릴 예정이라 이렇게까지 열심히 닦을 필요는 없었는데, 불쌍하게 땅속으로 파묻힐 처지의 검이 왠지 짠했다.
그래서 마지막 가는 길, 깨끗하게 닦아 주기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사실 오래된 검에서 쇳독이나 납독이 옮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했다.
“흐음. 완벽하게 숨길 곳이 어디려나.”
거의 다 닦아 낼 때까지도 한나는 여전히 검을 묻을 장소를 확정하지 못했다. 괜히 자기도 모르는 곳에 막 묻었다가는 나중에 묻은 곳을 잊어버리게 될 것 같아 쉬이 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재개발이 되기라도 해서 누가 홀랑 가져가 버리면 곤란한 일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아는 곳이라면, 신전이 고작인데 그건 또 영 내키지 않았다.
너무 근처에 있으면 또 무슨 불똥이 튈지 모르고.
하지만 어제의 그 소동으로 검의 주인이 누구인지 대대적으로 소문이 나 버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빨리 결정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한나가 두뇌를 풀가동했다.
“역시……. 그곳인가.”
자신의 휴일에 맞춰서 다녀올 수 있으며,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곳.
“레미아 마을…….”
그나마 한나가 지리를 훤히 꿰고 있는 곳이었다.
스륵― 탁.
성물이 탁자 위에 놓였다. 생각이 길어지는 바람에 조금 열심히 닦았다고 광이 반질반질 흘렀다.
“앞으로 너의 보금자리가 정해졌다.”
들을 리도 없는 검에게 마치 판결문이라도 읽듯, 한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연식도 오래됐는데,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잠자코 흙으로 돌아가렴.”
고작 물건이 수백 년을 수고했으면, 이제 쉴 때도 되지 않았는가?
이건 검이나 세계의 평화를 위한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좋아. 가자!”
장소를 정한 한나는 바로 몸을 일으키려다 어떤 생각이 들었다.
“흐음…….”
한나는 검의 보석을 유심히 살폈다. 이내, 그녀의 손이 검으로 움직였다.
* * *
다그닥, 다그닥, 탈탈탈.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 소리가 벌써 한 시간째 귀를 괴롭혔다.
한나는 레미아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엔 삶은 달걀…….”
가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요깃거리도 넉넉히 챙겼다. 한나는 호두와 아몬드에 이어 이번엔 삶은 달걀의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 그리고 섬세한 껍질 까기.
“어……. 어……!”
비교적 평탄한 평지를 달리던 마차가 급격히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한나는 껍질을 까던 손을 멈추고 창문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러곤 마부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산길로 들어서서 그렇습니다. 낮은 산이니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해요. 안전 운전 부탁드려요!”
“예. 예.”
마부의 대답을 들은 한나는 창문을 닫으려다 말고,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혹시 삶은 달걀 드실래요?”
“전 괜찮습니다.”
“생각나면 말씀해 주세요! 많이 가져왔거든요!”
“허허.”
마부는 이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취식을 하는 한나가 신기했던 터라 너털웃음을 지었다.
드륵― 탁.
망설임 없이 창문을 닫은 한나는 다시 껍질 까기에 집중했다.
아니, 이참에 아예 옆자리에 커다란 수건을 깔아 놓고 본격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으음……. 억!”
돌부리에 걸린 건지, 마차가 크게 요동쳤다. 덕분에 옆에 가지런히 세워 뒀던 성물도 앞으로 쓰러졌다.
“아이고!”
놀란 한나가 달걀을 손에서 놓고 검을 주섬주섬 주웠다.
“이 친구가 막 이런 취급 당할 친구가 아닌데.”
어차피 하얀 천으로 겹겹이 말려있어 상처 하나 날 리 없었지만, 한나는 괜히 잘못 충격을 받았다가 마법이라도 발동될까 싶어 조심스럽게 검을 토닥였다.
“미안해. 미안. 자, 다시 옆으로……. 으억!”
겨우 괜찮은가 했더니 다시 마차가 들썩거렸다.
쿵, 쿠궁.
“지금 이거 괜찮은 거야?”
아무리 산이 낮다지만 이렇게 심하게 덜컹거리다니.
아무래도 길이 아주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고고……. 이러다 엉덩이 멍들겠네.”
한나는 한 손으로는 검을 안고, 한 손으로는 마차 옆의 손잡이를 잡았다.
차라리 엉덩이를 의자에서 조금 떼는 게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것 같아서 팔 힘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절로 운동 되겠네.”
한나는 곡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았다. 반쯤 껍질이 벗겨진 달걀이 데굴데굴 마차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아까워라.”
안타까움에 젖은 시선으로 달걀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산을 내려갈 때까지 계속 이 상태라면 정말 끔찍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런데 그때,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요동치던 마차가 잠잠해졌다.
‘뭐지. 길이 좋아졌나?’
한나는 일단 다 죽어 가던 엉덩이를 살린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내가 그때 전용 방석을 마샤한테 주지만 않았어도…….”
지난날, 마샤에게 주었던 방석이 이토록 그리워질 줄이야.
그래도 이제 고른 길이 나오려나, 기대를 하며 한나는 자세를 조금 편히 했다.
끼긱! 쿠궁!
하지만 그 순간, 마차가 급정거를 하며 멈춰 섰고, 폭발음 같은 굉음이 울렸다.
“뭐, 뭐야?”
깜짝 놀란 한나는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이내 바깥 상황을 살펴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손을 가져갔다.
쾅―!
하지만 한나가 작은 창문을 열기 전에 더 큰 것이 열렸다.
“…….”
마차의 문짝이 날아간 것이었다. 휑하게 뚫린 문짝의 너머로 초록 풀과 나무, 심지어 하늘도 보였다.
“이게 무슨…….”
황망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
한나는 깜짝 놀랐다.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싼 장신의 괴한이 문을 막고 있었다.
“누구…….”
도대체 무슨 무례냐는 이야기를 하려던 한나는 괴한이 허리를 굽히고, 마차 문을 통과하자 입이 굳어 버렸다.
“……제레미?”
어째서 네가 여기에. 심지어 방금 그 폭발은 뭐란 말인가.
“너…….”
“이렇게 보네요. 선생님.”
검은 머리카락이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인연이 깊은 건가.”
조금 사나운 얼굴, 하지만 굵은 입술선에 미소가 걸렸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