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한 밤. 두 밤.
한나는 속이 꽉 막힌 상태였다.
“하……. 진짜, 코빼기도 안 보이네.”
제레미가 그렇게 떠난 이후, 다음 날이라도 다시 와 줄 거라는 기대를 했는데, 그건 헛된 기대였다.
심지어 직접 제레미를 찾아가려니, 자신은 제레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기사 학교에 불쑥 찾아간다고 해도 그는 없을 테니.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제레미에게 커다란 벽이 느껴졌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제레미는 잘 안다고 자부했던 과거가 창피할 지경이었다.
“후우.”
긴 한숨.
“그러다 땅 꺼지겠군.”
“아……. 세자르 님.”
하필 한나는 오늘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곧 죽을 사람처럼 낯빛이 어둡네.”
세자르는 팔짱을 낀 채, 짐을 들고 나오는 한나를 훑어보았다. 이틀 내내 기운이 없더니, 결국 오늘은 거의 유령 같은 상태였다.
“혹시, 저 없는 사이에 제레미 오거든 제가 황궁으로 갔다고 전해 주세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세자르가 물었다.
“그냥……. 제가 실수를 했어요.”
한나가 우울한 얼굴로 말하자 세자르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래서, 그 자식이 화를 내던가?”
“뭐……. 상처받았죠.”
“이래서 풋내기라는 거지.”
세자르의 말끝에 조금 비웃음이 섞여 나왔다.
“하여튼, 저는 황궁으로 떠나요.”
한나는 기운 없는 손을 들어 세자르에게 흔들었다. 그러자 세자르가 한나의 앞을 제 몸으로 막아섰다.
안 그래도 기운 없는데, 자꾸 왜 이래.
한나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려던 고개를 들어 세자르의 얼굴을 보았다.
“가지 마.”
“무슨 소리예요.”
이미 가기로 정해진 일을 이제 와서 무르고 자시고 할 것도 아니고.
“이렇게 기운 없는 그댈 보내고 싶지 않아서.”
“…….”
한나는 세자르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았다.
“저 그렇게 나약한 어른 아니에요.”
“내 눈엔 어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냥 걱정스러운데.”
“아주 강하고 튼튼한 사람이랍니다.”
한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어깨를 으쓱였다.
“보호하고 싶고.”
“세자르 님이야 국민을 보호하는 덴, 일가견이 있으시…….”
“말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난 그대를 아끼고, 지키고 싶은 거야.”
사뭇 진지해진 말투에 한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방금까지 흙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자괴감은 날아가고, 어느새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가고 싶지 않다고 해. 그렇다면 난 그댈 절대 보내지 않아.”
마치 황궁의 명이라 해도 방패막이가 되어 지켜 주겠다는 듯, 그가 말했다.
한나는 그런 세자르를 보고 있자니, 옅은 미소가 입에 걸렸다. 사실 황궁에 간다고 뭐 힘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정말 세자르 님은 따뜻한 분이에요. 꼭 날 지켜 주는 나무가 생긴 든든한 기분이네.”
한나의 목소리가 점차 밝아졌다. 한나는 그의 말을 이제는 자신이 신전의 수장이 되었으니 그 산하에 있는 신관을 지킨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지난날들의 행적으로 보자면, 세자르가 비단 그런 이유만으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나는 아직 그에게 어떤 답도 줄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가 할 일이 많아요. 매듭지어야 할 큰 사건도 있고.”
이렇게 신전에 머물기에는, 헤쳐 나가야 할 일이 있었다.
사막과 광산, 사라진 성물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사건.
한나는 어쨌거나 자신에게 들어온 광산의 권한을 상기했다.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변했다면 모르겠어. 하지만 아이들이 거의 원작 그대로 자라 버린 이상, 난 보다 적극적으로 미래를 막아야 해.’
이건, 자신이 풀어야 할 난제였다. 이 몸에 빙의하고 10년을 이루어 내지 못한 일.
원작을 완벽하게 벗어나는 것.
“점점 명확해지는 기분이에요.”
특히 어제의 제레미 사건으로.
“뭐가?”
세자르가 한나에게 무슨 말인지 반문했다.
“내가…….”
빙의자인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
“내가 해야 할 일요.”
신이나 아이들, 혹은 이 세계의 종말을 겪은 누군가.
분명 누군가는 미래를 막아 주길 바라는 거다.
서로 싸우다 결국 자멸하게 될 끔찍한 미래를 막기 위해 ‘한나’라는 인물에 원작을 아는 자신을 빙의시킨 거지.
특히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원작이라는 것이 훼방을 놓고 있지만,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확신.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다음 행선지는 어차피 황궁이었다.
한나는 교황의 죽음과 성물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떤 기억이 되살아났었다. 바로, 신전의 성물에는 짝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짝은 황궁에 있었다.
“세자르 님이 사막에 갔던 것처럼, 어쩌면 저도 처음부터 사명이 있었나 봐요.”
“사명?”
한나가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세자르는 뒷걸음질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 세계를 구하라는, 엄청난 사명?”
한나가 씩 웃으며 발걸음을 내딛자, 세자르는 저도 모르게 길을 터 주었다.
“세자르 님은 큰일 하셨으니 이제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켜나 보세요.”
괜히 악당들 잡겠다고 우리 애들 다 잡고 다니지 말고.
그녀는 여태까지 잘해 왔고, 앞으로도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저는 저를 응원할래요. 세자르 님도 절 응원해 준다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는 한나의 모습에 세자르는 더 이상 그녀를 가지 말라고 잡을 수 없었다. 그저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힘껏 응원할 테니, 얼른 돌아와.”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도 꽤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보면 전쟁터라도 나가는 줄 알겠다고 비웃겠어요.”
한나는 겨우 황궁 가는데 너무 그가 오버하는 모양새라 풉 하고 웃어 버렸다.
하지만 세자르는 한나의 앞, 뒤 다 자른 설명에도 진심으로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가 너무 영영 떠나는 듯이 말했나요?”
“그건 그래. 꼭 한동안 못 볼 것처럼 작별 인사를 하잖아. 난 앞으로 매일 황궁에 출근 도장을 찍을 예정인데 말이야.”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놀라 그를 뒤돌아보았다.
“예?”
그런 한나에게 세자르가 뭘 놀라냐는 듯이 대꾸했다.
“이게 내 방식의 응원이라. 열심히 해 볼 생각이야.”
“……어우……. 그러시구나.”
한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럼 굳이 민망하게 인사하고 가니, 마니 실랑이할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닌가?
“진짜 성격 이상해.”
한나는 툴툴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세자르는 감동이 5초 이상을 못 가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 * *
얼마 만의 황궁 공기인가, 한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어 보았다.
“음~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낯서네.”
원래부터 자신의 영역이 아니어서일까.
오랜만에 돌아온 황궁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던 날처럼 부담스러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매일 볼 때는 금도 돌처럼 보이더니.”
한나는 황궁 복도의 금 기둥을 손으로 쓸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천천히 금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는 뜯어 가고 싶다는 탐욕이 묻어 있었다.
“선생님.”
“어! 어?”
기둥을 훑으며 허튼 생각에 잠겨 있던 한나를 놀라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안이었다.
“와. 폐하.”
한나는 며칠이긴 하지만 나름 오랜만인 이안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얼굴이 반쪽이 됐네요.”
이안은 오늘도 하얗고 깔끔한 제복 위로 붉은 망토를 둘러맨 모습이었다. 망토에 달린 금장식이 오늘따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폐하는 오늘도 반짝이시네요.”
같은 하얀 옷을 입지만 금색이라곤 자수에 박힌 금색 실이 전부인 신관복과 비교가 되어서일까.
한나의 엉뚱한 말에 이안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신전에 조금 머문 뒤로 엉뚱해졌네요.”
“워낙 신전과 황궁의 차이가 크다 보니, 매번 이러네.”
슥슥.
여전히 한나는 금 기둥을 쓸고 있었다.
“그 기둥이 마음에 드는 거예요?”
이안은 자신과의 재회보다 금 기둥에 마음이 쏠려 있는 한나의 모습이 어이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하나 떼어 주면 잘 챙겨 갈게.”
한나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아예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자 이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뭐하러 어렵게 옮겨가요.”
“응?”
배달해 주겠다는 뜻인가.
“그냥 이 성을 가지면 쉬운 일인데.”
“…….”
순간 한나는 말문이 막혔다. 곰곰이 생각을 정리한 뒤, 조심스럽게 이안에게 물었다.
“이 성은…… 공시가가 얼마니?”
한나의 물음에 이안은 기가 막힌 듯 웃음을 터뜨렸다.
“황궁에 자신의 성을 얻는 데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알려드릴게요.”
이안이 한나에게 바짝 다가섰다.
마치 남들에겐 비밀이라는 듯이 주위를 쓱 훑은 이안은 한나의 귓가에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게 뭐라고, 비밀스러운 거래라도 하는 것처럼 한나의 심장이 뛰었다.
“황제와 결혼하는 거예요.”
이안의 말에 한나는 잠시 눈꺼풀을 깜박였다.
‘이 말은…….’
“너랑 결혼하란 말이잖아!”
꼭 누가 들으면 황제가 따로 있는 것처럼 말하고 난리야!
한나는 이안을 흘겨보았다.
“넌 무슨, 그런…….”
이안에게 이상한 농담 따위 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한나는 잠시 기억 저편에 접어 두고 있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누가 그래요. 한 철도 못 갈 거라고,’
황궁을 떠나기 전, 이안과 조금 어색했던 것이 말이다.
“음, 흠. 흠.”
괜히 지난 말들과 방금 그의 발언이 합쳐져 순식간에 분위기를 붉게 물들였다. 조금 껄끄러운 분위기에 한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바쁠 텐데, 뭐하러 나왔어.”
한창 바쁠 낮 시간.
이안이 굳이 집무실이 있는 궁도 아닌 신관들이 머무는 궁을 지나고 있다는 게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선생님에게 써야죠.”
“응?”
“저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게 시간이라면, 그걸 바쳐야 내 마음이 전해지지 않겠어요.”
이안이 말했다.
한나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누군가는 돈, 누군가는 권력, 누군가는 고작 돌이나 꽃일지도, 혹 누군가는 그것마저 없어 제 목숨으로 증명해야 하는 마음.
이안에겐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대의 가치는 시간일까.
황제의 삶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의 시간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과 그 가치가 달랐다.
그래서 그 잠깐 눈 붙이는 시간마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겠지.
그의 악몽에는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한나는 이안의 말이 마냥 달콤하게만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안쓰러움이 스민다는 건 정말 애달픈 일이었다.
“잠은, 좀 잤어?”
아무리 돌팔이 상담이라고는 하나 자신이 궁에 있을 땐 곧잘 숙면을 취했다던 이안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없는 사이 또 어떤 것들이 그의 잠을 방해하진 않았을까.
“어느 날은 죽은 듯 자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고.”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늘 그렇듯.”
한나는 그제야 이안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것 같아 보이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서려 있음이 이제야 보였다.
“얼마나 못 잔 거야.”
그가 죽은 듯이 잠들었다는 날은 아무래도 조금 많이 과거형인 것 같다.
“이럴 때만 눈썰미가 비상하지.”
이안은 예리한 한나의 관찰력을 칭찬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평소 눈치 없음을 은근히 질타했다.
“얼굴이 반쪽이 된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네.”
“원래도 날렵한 선 아니었나요?”
이안은 장난스레 한나의 걱정을 무마시키려 했다. 하지만 한나는 이런 너스레에 이미 면역이 되어 있었다.
특히, 마샤라든지, 마샤라든가, 마샤 같은……. 그냥 마샤가 자주 하는 너스레랄까.
“좀 쉬어. 너 하나 쉰다고 나라가 망하겠어?”
한나는 팔짱을 꼬며, 강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럴 때 보면, 옛날 버릇 어디 못 간다고 보육원 선생님 기질이 여실히 드러났다.
“음. 아마 망할 거예요.”
이안의 말에 한나는 조금 움찔했다.
이렇게 칼같이 긍정하다니.
“개판이거든요.”
이안의 이런 발언은 한나를 조금 놀라게 했다. 워낙 그가 단어 표현을 이렇게 직관적으로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 음, 그래. 많이 힘들구나.”
이 친구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한나는 그런 이안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이에요.”
마치 비밀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이안이 말했다.
한나는 여기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까부터 이안은 왜 ‘남들은 모르게,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라는 듯한 뉘앙스를 강조하는 걸까.
‘날 막 엄청 믿고 의지한다는 뜻?’
그렇지 않고서야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자신에게만 털어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특히 이안처럼 입 무거운 타입들을 더더욱.
“좀 쉬어.”
한나는 접혀 있는 이안의 망토를 손으로 바로 고쳐 주며 말했다. 그가 어떤 위치에 있건, 아무리 바쁜 사람이든 뭐든 너무 전력으로 달리는 건 걱정스러웠다.
“지친다는 거, 무섭고 위험한 거야. 달리기도 호흡 조절이 필요하잖아. 지금 전력을 다 쏟아 내면 언젠가 지쳐서 쓰러지고 말걸.”
지금 이 순간, 한나는 부드럽고 포근하게만 보였던 망토의 무게가 제법 무겁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안은 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두르고 다니는 것이 힘들지 않을까. 비단 보이기 좋으라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누가 보아도 자신이 황제라는 것을 한눈에 드러내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무겁겠네.”
“짐승의 털을 두른다는 건 그렇죠.”
이안은 제 망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죽을 도려내고, 탈을 쓰는 것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게, 짐승이든, 혹은 인간이든.
한나는 그의 옷매무새를 다듬은 다음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 너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이 황제복이라는 거에 내 전 재산도 걸 수 있으니까.”
“전 재산이 조금 소박하지 않으셨나요?”
아니. 이 녀석이? 이렇게 뼈를 때린다고?
이안의 장난스러운 말에 한나는 괜히 짠하던 마음이 와장창 깨질 뻔했다.
한나는 괜히 이안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가 이렇듯 장난을 친다고 해도 생각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안은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무방했다. 비록 그게 언젠가는 소설 속 내용이었다고 하나 한나는 실제로 그를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잘 알았다.
누가 만들어 낸 서사건 혹은 운명이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안만큼 황제에 어울리는 이는 그녀에게 또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황제 폐하.”
한나의 미소에 이안은 가슴 한편의 무거운 짐이 덜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에 꽉 막혀 있던 불순물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니 안 보고 싶을 수가 있나.”
이안은 그런 한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한나가 몸을 움찔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
마치 애정하는 동물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따스한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한나는 이안이 ‘버릇없게’ 머리를 쓰다듬는다고 타박할까 하다 그냥 배시시 웃어 버렸다. 방금까지 피곤에 그늘졌던 그의 눈가에 행복한 온기가 넘실거려서였다.
“산책이라도 하실래요? 바쁜 황제 폐하.”
“그러죠.”
한나가 공손히 손바닥을 들어 정원을 가리키자, 이안은 웃으며 선뜻 발걸음을 뗐다.
* * *
어둠이 짙은 밤이었다.
커티스는 등불 하나로 가득찬 기도실에서 세자르를 발견했다.
“여기 계셨습니까.”
커티스의 목소리가 넓은 기도실에 울렸다. 세자르는 그의 등장에 시선을 돌려 커티스에게 옅은 미소를 띠었다.
“참 재미있지 않나?”
“뭐가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세자르의 물음에 커티스는 의문을 표했다.
“자네는 선대 교황 성하께서 항상 이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던 거 기억하나?”
“……예. 그러셨죠.”
커티스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돌아가신 교황 성하가 기도실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는 것은 중앙 신전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땐 이해가 안 됐단 말이지. 이 답답한 곳에 하루 종일 머무는 게.”
“저도 그랬죠.”
세자르의 말에 커티스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답했다.
“어릴 땐 물어본 적도 있었지. 여기에 종일 있으면 숨 막히지 않느냐고.”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창을 열면 먼 곳까지 훤히 보인다더군.”
“창문 말입니까?”
커티스의 눈길이 벽의 창문으로 향했다. 창은 작고 신전 바깥의 나무들에 가려져 있기까지 했다. 커티스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에 세자르가 피식 웃음을 뱉어 냈다.
“그래. 나도 그런 표정을 했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뭐가 보이십니까?”
커티스가 창을 이리저리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혹시 다른 장치가 되어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그 작은 틀 안에 시선을 가두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어.”
“정말 뭔가가 보입니까?”
재차 이어진 커티스의 반문에 세자르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아.”
사실 세자르는 명석하기로는 신전에서 제일가는 커티스가 자신의 은유적인 표현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정말 교황이 되면 제3의 눈이라도 생기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이럴 때 보면 자넨 참, 신관이 아니라 학자가 됐어야 한다고 생각해.”
“과찬이십니다.”
커티스의 뻔뻔한 감사 인사에 세자르는 생각했다.
그거, 칭찬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구경은 잘하셨습니까?”
커티스는 그렇게 말하며 제 품에 품고 있던 서류를 세자르에게 내밀었다.
“놀리는 건가?”
“이 정도로 말하면 알아들으실 줄 알았는데.”
세자르는 놀리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커티스가 내민 서류를 받아든 세자르는 그대로 그것을 단상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말로 해. 말로.”
“눈도 좋으신 분이 직접 보시면…….”
세자르가 커티스를 따가운 눈길로 바라보자 그제야 커티스는 세자르를 놀리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전에 말씀하신 건으로 조사를 하다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을 발견했습니다.”
“간단히 설명해 봐.”
커티스가 근래 조사를 하고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날 그곳엔 외부 침입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성하껜 저항의 흔적조차 없었죠.”
“면식범이라는 거겠지.”
“교황 성하께선 규율에 엄격하셨으니, 자격이 없는 자를 성물이 있는 곳에 들이진 않았을 겁니다.”
성물이 보관된 곳에 특정한 허가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이는 대신관 이상만 가능했다.
만약 대신관이 아닌 사람이었다면 기록에 남아 있어야 했을 터.
“대신관 중에 범인이 있다는 건가.”
세자르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늘 무표정에 가까운 그였지만, 이렇게 냉기를 풍기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의심해 봐야겠죠.”
세자르는 그가 했던 말처럼, 착실하게 복수를 준비 중이었다. 적어도 이번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의주시해. 그 성물이 쓰일 곳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찾아봐.”
“일단 예상 가능한 범위를 정리해서 그 서류에 넣어 뒀습니다.”
커티스의 빠르고 똑 부러지는 일 처리는 언제나 세자르를 만족스럽게 했다.
“용의자를 추려도 신전에는 함구할 예정이십니까?”
커티스가 물었다. 세자르는 그런 커티스의 질문에 사람 좋은 미소로 답했다.
“당연한 질문을. 그 새끼는 내 손으로 심판해야 하는걸.”
여러 가지 이유로 세자르는 이번 일은 개인적인 복수로 예정하고 있었다. 신전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든, 혹은 확실하게 제 손으로 목을 비틀기 위해서든.
* * *
“여기 어디라고 했는데.”
한나는 현재 황궁 서쪽 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정확히 하자면 기웃거린다고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냥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무슨 보물찾기도 아니고. 아. 보물찾기가 맞는 건가?”
한나는 오늘 아주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황궁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성물 구경 한번 하기 힘드네.”
바로, 황궁에 존재하는 성물 중 하나를 찾으러 나선 것이었다.
“번티키.”
물건 주제에 이름까지 가진 그 성물은 이 세계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바로, 원작 속에서 해독 능력이 있는 신전의 ‘카라마튼페’ 성물과 더불어 악당들의 워너비 아이템이었다.
한마디로 그게 있어야 광석을 알차게 이용해 세계 정복을 할 수 있다는 말씀.
‘어쨌거나 결국 원작처럼 악당들이 성물을 노리고 있어.’
이것은 원작이 시작된다는 신호탄과 마찬가지였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서쪽의 궁은 보통 황궁 연회를 열기 위해 사용하는 곳이었다.
“찾았다!”
한나는 드디어 성물을 찾아냈다.
“아니, 이렇게 대놓고 있을 줄은 몰랐지!”
그것도 이미 자신이 지나쳐 갔던 입구의 가장 잘 보이는 벽에서.
“하……. 거참. 성물을 이렇게 대놓고 보관해도 되는 거야?”
성물이 떡하니 이렇게 누구의 손이든 닿을 수 있는 곳에 장식되어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물 번티키는 세간에 능력이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어떻게 해도 능력이 발현되지 않고, 성물에 대한 정보조차 존재하지 않으니 황궁에서는 이것이 과거 성물이었다는 것과 모양이 번지르르 하다는 점을 높이 사 이렇듯 서쪽 궁의 장식으로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번티키는 커다랗고 화려한 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나는 하필 모양이 무기라는 것에서 오는 반발감이 적지 않았다.
“저걸로 찌르고 베고 죽이고 하겠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한나는 성물이 걸려 있는 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황궁에선 이 성물을 정말 그저 보석이 치렁치렁 장식된 검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흔한 경비 한 명 없었다.
“확 훔쳐다가 산에 묻을까.”
그것도 꽤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
“꽤가 아니라 아주 좋은 생각인데?”
한나는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지금 살짝 훔쳐가면 아무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금슬금 발걸음이 벽에 가까워졌다.
좌를 봐도 아무도 없고, 우를 봐도 아무도 없다.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완벽한 상황 같지 않은가?
경비병도 없고, 성물은 덩그러니 벽에 걸려 있으며, 자신에겐 튼튼한 두 팔이 있다는 것이!
꼴깍.
한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이렇게 충동적으로 나쁜 짓(?)을 할 생각은 정말 없었다. 이곳으로 발길을 옮길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훔쳐가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놓았으니 사람이 어찌 혹하지 않는가?
“크흠.”
한나는 슬쩍 손을 뻗어 보았다. 누가 갑자기 자신을 발견하면 그냥 신기해서 만져 봤다고 해야겠다는 스토리까지 되뇌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계획이 술술 풀리지는 않았다.
“뭐해요?”
“아오! 깜짝이야!”
갑자기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한나는 놀라서 털이 쭈뼛 섰다. 그러고는 제 심장이 똑 떨어진 건 아닌지 놀란 마음에 손을 심장 위로 가져갔다.
“뭐하고 있어요?”
제 심장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한 한나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마샤……. 제발 인기척 좀……. 아니, 너 왜 여기 있어?”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오늘도 아름다운 얼굴을 빛내며 마샤가 서 있었다.
“흐응.”
마샤는 마치 한나가 팔짱 끼고 성물을 보던 그 자세 그대로 한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
심지어 눈에는 의심까지 서려 있었다. 그의 가늘게 늘어진 눈매를 발견한 한나는 몸이 움찔했다.
“왜 그리 놀라요?”
“내, 내가? 뭘? 전혀? 와, 완전 안 놀랐는데?”
한나는 괜히 식은땀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내며 태연한 척 말했다. 물론, 모든 동작의 부자연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안 놀란 사람치곤 말을 많이 더듬네요.”
“그냥 놀라서 그러지. 놀라서.”
호호, 어색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마샤는 성큼성큼 한나에게 다가갔다. 그때마다 한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을 본 마샤의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런데 왜 슬금슬금 물러나요?”
“어? 내가 뭘. 그냥 자리 비켜 준 거지.”
“여긴 사람이 백 명이 있어도 넉넉한 공간인데요.”
“그, 그런가?”
한나는 스스로도 자기가 왜 이렇게 긴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나쁜 짓을 하려다가 들킨 게 맞기도 하고, 마샤와 성물이 가까이 있는 상황 자체도 숨이 막히게 긴장됐다.
“뭘 보고 있었어요?”
마샤는 한나의 옆에 자리했다. 그의 시선이 한나가 손을 뻗던 벽으로 향했다.
“검?”
“아……. 이건, 음…….”
바른 대로 말하기엔 아주 찜찜했다.
“그냥 장식 검이 예쁘길래.”
“딱히 예뻐 보이는 디자인은 아닌데.”
마샤가 검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며 답했다. 갖가지 색을 가진 보석들이 빼곡하긴 했지만, 검 자체가 오래된 것이었다.
장식용 검으로 치자면 훨씬 나은 것들이 황궁 곳곳에 흔했다.
“내가 그…… 골동품! 그래. 오래된 물건 같은 걸 좋아해.”
“언제부터요?”
“며…… 칠 전?”
“흐음.”
마샤는 여전히 어색한 한나의 모습에 검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마검인가?”
정답은 아니지만, 얼핏 비슷한 추리.
마샤의 귀신같은 눈썰미에 한나는 속으로 내적 비명을 질렀다.
괜히 여길 와서 마샤에게 성물이나 들키게 생겼네!
“됐어. 됐어. 가자. 내가 가까이서 봤는데 네 말처럼 막 그렇게 예쁘지도 않더라고.”
한나는 마샤의 팔을 덥석 잡아 입구 쪽으로 발길을 이끌었다.
“잠시만요.”
“어허이, 가자니까 그러네.”
검을 관찰하던 마샤의 관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던 것인지 그는 검을 더 보고 싶어 했다.
‘관심 가지지 마! 그건 내 꺼라고!’
아무도 준다고 한 적이 없지만 이미 한나는 마음속으로 검을 자신의 것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아 물론 세상의 평화를 위해 고이 묻어 주겠다는 말이었다. 할 수 있다면 보석 몇 개쯤은 빼다 팔아도 좋을 것 같…….
“마법이 걸려 있네요.”
“응?”
마샤의 말에 한나는 그를 끌어당기던 행동을 잠시 멈췄다.
“무슨 마법?”
“보호 마법이오.”
마샤는 검 주위를 두르고 있는 마력의 정체를 눈치챘다.
“보호?”
“네. 이 검을 지키는 것 같네요. 아마 검을 집으면 몸에 전류가 흐를 거예요.”
“……전류?”
“네. 그것도 꽤……. 음……. 아주 많이?”
“얼마나 많이……?”
한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딱 사람 죽기 좋을 만큼?”
에라이, 망할. 그럼 그렇지.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었다.
한나는 자신이 황궁을 너무 쉽게 봤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뉘우쳤다.
‘이를 어쩐다. 보호 마법은 생각도 못 했는데.’
괜히 경비병이 따로 없는 게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게지.
한나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흐음.”
다시 팔짱이 꼬아졌다. 한나와 마샤는 나란히 벽의 검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검을 어찌 떼어 갈지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한나의 시선이 옆에 선 마샤에게 향했다.
“저기 마샤.”
“네.”
마샤는 아직도 저 검이 보호 마법까지 걸어 둘 정도로 값어치가 있는지, 혹은 선대 황제 중 누군가가 썼던 검인지 유추하며 한나의 부름에 답했다.
“너, 마법 잘하지.”
한나의 물음에 마샤는 무슨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하냐는 듯, 어이없는 눈으로 한나를 보았다.
“응?”
재차 물어 오는 한나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제가 마법을 잘하는 게 아니라면, 제국에 마법사는 다 사라지겠죠.”
그의 다소 건방진 말에도 한나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렇지? 너만 한 마법사를 제국에서 또 찾을 수는 없을 거야.”
어쩐 일로 한나가 순순히 인정하자 마샤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너, 혹시 두근거리는 일 해 보고 싶지 않니?”
그렇게 제안하는 한나의 얼굴이 조금 상기돼 있었다. 그에 마샤는 어떤 느낌이 왔다.
“설마, 저 보호 마법을 없애 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니죠?”
빙고.
한나는 처음으로 마샤의 귀신같은 눈치가 반가웠다.
“할 수 있어?”
“…….”
마샤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황궁 물건을 도둑질하겠다는 거예요?”
“잠깐만. 설마 너 지금 나한테 도덕적인 걸로 설교를 하려는 건 아니지?”
“…….”
한나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솔직히 도움이 필요한 입장에서 이런 걸 따져선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샤에게 도덕에 관해서 지적을 듣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3대가 억울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그런 소리 할 자격이 없지.”
한나가 다소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북부의 무법자로 살아왔던 마샤가 고작 낡은 검 하나 훔치는 걸로 자신을 질타하다니!
물론 낡은 검이라기엔 저것이 성물이고, 보석도 많이 박혀 있고, 무려 황궁의 것이긴 하다만…….
“진짜 훔치려는 거예요?”
마샤는 설마설마했던 추측이 사실이라는 것에 조금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나가 뭔가를 범법행위를 한다는 건 믿기지가 않았다.
“저게 많이 비싼 거예요?”
“많이 비싸다고 하면 해 줄 거니……?”
한나의 다소 진지한 얼굴에 마샤는 결국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푸핫, 선생님이 도둑질이라니.”
“…….”
한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마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출타했던 이성이 돌아왔다.
“얄밉게 웃어 줘서 고맙다.”
덕분에 정신을 챙겼어.
한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마샤에게 들킬 수는 없지. 괜히 아득바득 훔치려는 모습 보이면 의심할 거야.’
한나는 괜히 조금 흐트러졌던 머리카락과 옷을 만지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농담이었어.”
한나가 농담이었다고 했지만 마샤는 전혀 믿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의 말끔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갈 기미가 없었다.
“농담 아니잖아요.”
그 정도도 모를까 봐서, 마샤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한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냥, 네가 어떻게 나오는지 시험해 본 거야. 내가 뭐하러 저렇게 무겁고 치렁치렁해 보이는 검이 필요하겠어.”
“보석을 떼다 팔면 돈이 제법 될 것 같긴 하네요.”
“내가 뭐……. 돈이 궁한가.”
“하긴, 저대로 온전하게 골동품으로 파는 게 더 값이 나가려나요?”
“그건 그렇겠지.”
한나는 마샤의 말에 저도 모르게 수긍해 버렸다.
“저거, 갖고 싶어요?”
마샤는 홀린 듯 검을 바라보고 있는 한나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위에 사람도 없는데 마치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듯이 귓가에 속삭이는 모습이 마치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의 작당 모의 같았다.
한나는 ‘응!’이라고 답하고 싶어 달싹이는 제 입술을 이로 악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함정이다.’
여우 같은 마샤가 마냥 호의만으로 범행에 가담하겠다는 건 아닐 것이다.
갑자기 이성이 제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농담이었다니까. 그냥 심심해서 해 본 말이야. 가자, 마샤.”
한나는 쌩하니 몸을 돌렸다. 괜히 더 보고 있으면 미련만 남을 것 같아서 부러 서둘러 외면한 것이었다.
그러자 돌아선 한나의 팔을 마샤가 붙잡았다. 한나의 시선이 다시 돌아갔고, 마샤의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이유 물을까 봐 그러는 거면, 안 물어볼게요. 저거, 줘요?”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
“……전혀. 괜찮은데.”
전혀 괜찮다는 건 도대체 무슨 대답인지.
한나는 제 입에서 나가는 말이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그냥 마샤의 도움을 받아서 해치워 버리자는 욕망과, 성물에 대해 마샤가 눈치챌지 모르니 조심하자는 이성이 워낙 격렬히 충돌 중이라 말까지 매끄럽길 기대하는 건 힘들었다.
“비밀로 해 줄게요.”
어쩜 이렇게 달콤한 말만 줄줄 늘어놓는 건지.
“여차하면 내다 파는 것도 도와주고.”
마샤에게 잡힌 팔을 빼내는 건 어려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손아귀는 거의 힘을 주지 않은 상태였으니, 가볍게 팔을 흔들기만 해도 털려 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놈의 욕망이 왜 더 몸을 잘 통제하냐고!’
이성은 힘이 없다. 입만 살아 있지.
한나의 시선이 검으로 한 번, 마샤의 얼굴을 한 번.
갈등을 담은 채 오갔다.
……결심했다!
“농담이었다니까. 나 쇠고랑 차고 싶지 않아.”
“흐음.”
마샤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한나를 돕는다면 분명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언제든 갖고 싶으면 말해요.”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럼 나중에라도 마음이 생기면 말해요.”
한나는 의문이 들었다.
얘는 왜 도둑질을 장려하는 거야?
“이안 말고, 저한테 말해요. 꼭.”
“음?”
마샤의 말에 한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훔치는 걸 주인한테 말하는 바보가 어디 있어?
“그 녀석도 선생님이 원한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것 같지만.”
그것도 일리가 있었다.
광산도 주는 이안이 고작 장식용 검을 못 줄까.
하지만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란 걸, 한나는 알고 있었다.
이안은 지나치게 눈치가 빠르고 영리하다.
자신이 이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이것이 왜 필요할지에 대한 온갖 정보를 탈탈 털어 가겠지.
그러다 성물과 북부, 악당들까지…….
줄줄이 다 들켜서 터지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칫 잘못하면 이건 연쇄 폭발처럼 쾅쾅쾅 터져서, 결국엔 자신이 빙의자라는 것까지 탈탈 털릴지 모를 일이란 뜻이었다.
“그래도 나랑 해요.”
“어?”
잠시 이안에 대해 생각하던 한나를 상념에서 끌어낸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다소 진지해진 마샤의 목소리였다.
뜬금없이 뭘 해?
“난 뭐든 다른 사람들보다 스릴 있게 할 수 있으니까.”
스릴…… 이라니.
한나는 마샤의 말이 어이가 없었다.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빨리’ 하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재미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스릴’ 이라니.
이거 정말 남들보다 나은 구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지루한 건 질색이잖아요. 난 선생님이 하는 일이라면 다 재미있을 것 같아. 뭘 하든 나랑 같이해요. 응?”
마치 이렇게 생글생글 웃으며 물어 오니, 꼭 즐거운 나들이나 재미있는 운동이라도 함께 하자는 것처럼 들려왔다.
지금 마샤가 하자고 조르는 게 도둑질이라는 것만 빼면, 참 훈훈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너도 참……. 신기한 친구야.”
“선생님도 마찬가지인 건 알죠?”
마샤의 대답에 한나는 생각했다.
그 선생에 그 제자라더니.
딱 그 꼴이구나.
“하여튼 여기서 나눴던 대화는 다 농담이야.”
정말이라며 한나는 재차 마샤를 확인했다.
“그래서, 누구에게 입 닫으면 되는데요?”
마샤는 이미 한나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얄미운 모습에 한나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구든.”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샤의 능력을 이용해 편하게 가 볼까 욕심내서 그를 끌어들인 게 잘못이지.
그나마 마샤가 나타나서 통구이가 될 뻔한 걸 구해 줘서 망정이었지, 오늘 초상을 치를 뻔했었다.
일단 한 보 후퇴하기로.
한나가 성물에게서 등을 돌렸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 * *
그날 밤, 한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흐음. 이건가.”
그녀는 한 손으로는 꺼낼 수도 없을 만큼 무거운 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후우.”
사다리까지 타고 올라가서 꺼내 온 책은 바로,
[보호 마법의 기초1]
그건 바로 마법 이론 서적이었다.
“……하.”
책의 묵직한 무게에서부터 이미 진입장벽이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한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밖에 없었다. 번개인지 전류인지 때문에 검은 만질 수도 없다고 하지, 그렇다고 이안이나 마샤의 힘을 빌리기엔 너무 찜찜한 것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이걸 다 읽고 마법사가 될 수는 없잖아.”
심지어 자신은 보통 사람도 아니고 신관이었다. 신력이 들어차 있는 신관의 몸에는 마력이 깃들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이 이론서를 읽는 것은 그냥 마음의 위로를 위한 것이었다.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심정일지도.
“이거랑, 2편, 아…… 저것도.”
[도둑질도 한 걸음부터]
“세상에 이런 책을 실제로 파는구나.”
바늘 도둑질에서 소 도둑질까지 알차게도 설명해 둔 책이었다. 이것도 앞선 책과 마찬가지로 단지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빌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나는 고른 책들을 차곡차곡 쌓아 제 양 손바닥으로 한 번에 들어 올렸다.
“으쌰! 윽, 이거 왜 이리 무거워.”
무슨 책을 돌에 써서 만들었냐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나는 약 다섯, 여섯 권의 책, 그것도 아주 두꺼운 것들만!
들고서 도서관 사서에게 향했다. 황궁의 개방된 도서관의 경우엔 책 대여가 가능했다. 궁의 시종과 시녀들을 위한 복지의 일환이랄까.
한나는 그 시스템을 잘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책을 뒤뚱뒤뚱 들고 가고 있자니, 다 때려치워 버리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치밀었다.
“그냥 고무장갑이나 개발하는 게 빠르려나.”
밤새 생각한 여러 가지 후보들 중에 가장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전기 차단용 고무장갑 만들기.
물론 고무장갑을 개발하려고 해도 마법에 대한 지식은 필요했다.
한나는 어쩔 수 없이 꾹꾹 참으며 책을 가지고 계속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이 잘 풀리진 않았다.
“으아!”
한나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고요한 도서관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철푸덕.
차진 소리와 함께 한나는 바닥에 엎어졌다.
툭, 투둑.
한껏 쌓아 올렸던 책들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아으…….”
무릎이고 손이고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진짜 이게 뭐야.”
한나는 바닥에 덩그러니 펼쳐진 책들을 보며 황망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떨어진 책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진짜 안 풀리는 날…….”
“그런 날이 있죠.”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한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렇죠?”
예쁘게도 눈을 접어 보이는 이는 다름 아닌 마샤였다.
한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또 너냐.
이제는 마샤에게 자신을 찾는 레이더가 달린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너 또 왜 여기 있는데!”
“왜 이래요. 섭섭하게.”
마샤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한나가 줍고 있던 책의 끄트머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차르륵, 책의 속지가 넘어가며, 한나의 머리카락이 팔랑거렸다.
“보호 마법 기초, 보호 마법의 원리, 마법을 파훼하는 법…….”
마샤가 책을 드문드문 따라 읽자 한나는 번뜩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도둑질도 한 걸음부터!’
퍼뜩 눈을 굴려 그 책을 집어 신관복 밑으로 숨겼다. 다행히 마샤는 한나가 숨긴 책까지는 보지 못한 듯했다.
“선생님.”
“어, 응? 왜?”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마샤를 바라보는 한나는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마법에 관심이 생겼나?”
마샤는 얄밉게 책을 빙그르르 손으로 돌렸다.
“……많지. 관심. 좋은 거니까.”
“마력도 없으신 분이.”
“없다고 단정하기엔 내가 또 막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성력과 마력은 함께 있을 수가 없어요.”
역시.
한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마샤가 아니었다.
“우리 선생님이 이걸 왜 빌렸을까.”
마샤는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 걸린 느른한 미소는 답을 알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뭘 생각하든 그건 아냐.”
한나는 재빠르고 단호하게 잘라 냈다. 그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색한 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그냥 뭐, 황궁이 심심하니까 공부차…….”
“도둑질도 한 걸음부터.”
“아……. 어? 아!”
너무 당황한 탓일까, 생각 없이 일어서는 바람에 신관복 밑으로 숨겼던 책이 덩그러니 바닥에 드러나 버렸다.
한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재빨리 책을 집어 품속으로 감췄다.
아주 빠른 동작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이미 상황은 씁쓸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할 얘기가 많아질 것 같은데.”
마샤가 자신의 손에 있던 책을 한나에게 건네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런 건 필요 없어질 테니, 그냥 돌려놓고 와요.”
“그…….”
“어서요.”
재촉하는 듯한 그 행동에 한나는 결국 어깨를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맞기도 했고, 어차피 들켜 버렸다면 차라리 마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게 백번 나은 일이니까.
한나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책을 마저 주웠다. 손에 한가득 들린 책을 들고 다시 있던 자리에 꽂아 넣기 위해 왔던 길을 돌아갔다.
* * *
볕 좋은 도서관, 적막이 흐르는 그곳에 한나와 마샤는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마샤였다.
“얘기해 봐요.”
“뭘.”
우선 한나는 오리발 먼저 내밀기로 했다.
아니, 하필 들켜도 마샤라니.
황궁에 사람이 마샤밖에 없나?
이제는 아주 원통할 지경이었다.
“그 검이 왜 필요한 건데요.”
“팔아먹으려고.”
“농담 말고.”
마샤의 미소가 원을 그렸다.
한나는 모르겠지만, 그는 꽤 오래전부터 그녀를 애정이 담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들킨 것이 어지간히 분했던지 입이 조금 튀어나온 한나의 모습이 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 농담 아니야.”
“…….”
마샤가 한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가 도서관에 온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얀 신관복에 분홍 머리는 객관적으로 말해 황궁에서 제법 튀었다. 심지어 몰래 하는 일이라면 조용히 갔으면 됐을 텐데, 신나게 통통거리며 뛰어가니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그런 점을 콕 집어 지적해 줘야 하나, 고민하던 마샤는 그런 모습이야말로 한나다운 것이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기로 했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상황도 만들어졌으니.
“선생님이 많이 허술한 건 알고 있죠?”
겨우 웃음을 참고 마샤가 물었다.
“나 완전 치밀하고 꼼꼼한 사람인데.”
퍽이나.
“그러다간 저 말고 누구에게라도 다 들킬걸요?”
감추려 할수록 의심을 자아내는 한나의 신기한 능력은 마샤에게 참으로 신기한 인간상이었다.
제 선생님은 아무래도, 나쁜 짓 하며 살긴 글렀다는 생각과 함께 마샤는 미소를 띠었다.
“네가 여우처럼 눈치가 빠른 건 아니고?”
여전히 한나는 뾰족했다.
마샤의 잘못이 아닌 건 알지만 그냥 마음이 그랬다. 이 상황이 되고 보니 마샤가 북부에서 자신에게 시달렸을 때 꼭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조금만 괴롭힐걸.
“휴우.”
“어렵게 돌아가지 말고 저한테 말하라니까요.”
마샤의 제안에 한나는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의심을 살 거라면 이쯤에서 마샤의 도움을 받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그 검을 얻고 난 후, 남모르게 파묻어 버리면 어차피 검의 용도는 들키지 않을 것 아닌가?
그렇게 결론에 도달한 줄로만 알았던 한나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졌다. 하지만 역시 뭔가 찜찜했다.
“요즘 마탑은 어때.”
“갑자기 마탑이요?”
뜬금없는 물음에 마샤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아니……. 뭐, 그냥 잘 돌아가고 있나 싶어서 그러지.”
“그럴 때마다 거리감 느껴지는 거 알아요?”
“거리감이라니.”
한나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마탑이나 신전으로 구분 짓지 말아요.”
“구분…….”
한나가 말끝을 흐렸다. 순간 자신이 너무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샤는 정말 선의로 자신을 도와주려 한 것인데, 괜한 사람 의심이나 하고 있는 꼴이니.
마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행동들이 정 없게 느껴질 만했다.
“우리가 그런 걸로 나눠질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런 거.
한나의 머리가 멍해졌다.
마샤의 말이 맞다. 겨우 그런 걸로 나누어질 사이…….
절대 아니지.
스스로만 해도 북부의 소식에 신전이고 뭐고 눈이 뒤집혀서 쫓아가지 않았던가.
신전보다 중요한 게 아이들의 미래였다.
그건 마샤도 마찬가지일까.
“숨기고 싶으면 숨겨요.”
“그게 아니라…….”
한나는 순간 마샤가 조금 빈정 상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늘 웃고만 있던 마샤의 입꼬리가 일자로 닫혀 있는 건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상관없을 것 같으니까.”
“음?”
갑자기 쿨하게 포기하는 마샤의 모습에 한나가 눈을 끔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샤의 입꼬리가 진하게 올라갔다.
그에 한나는 뭔가 쎄한 느낌이 들었다.
“아. 어깨가 조금 아프네요.”
“어깨?”
“누가 좀 말랑한 손으로 두드려 주면 참 좋겠는데.”
‘누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마샤의 시선에 걸리는 이는 한나밖에 없었다.
“…….”
설마.
한나는 설마설마했다.
‘나한테 은근히 협박하려는 거 아니겠지?’
하지만 그런 한나의 불안한 마음에 기름을 붓듯 마샤가 말을 이었다.
“전 몸이 안 좋아지면 말이 많아지는데.”
“마……. 말?”
“뭐 이런저런 일들을 술술 말하고 다니고 그래요. 아, 내 친구 황제 폐하는 잘 계시려나.”
협박 맞네. 협박 맞아.
마샤가 제 어깨를 주먹으로 톡톡 두드리자, 한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이 녀석은 자신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안에게 일러 버리겠다고!
검에 대해서 제일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이안이라는 건 어떻게 귀신같이 안 건지.
이러니 여우 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있나.
한나는 고민했다.
어차피 이제와 변명은 글러 먹었고, 이대로 마샤에게 휘둘리지 않을 방법을.
“아무래도 선생님은 바쁜 것 같으니, 제가 먼저 자리를 비켜 줘야겠네요.”
마샤가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금방이라도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질 기세였다. 그에 한나는 재빨리 몸을 앞으로 기울여 마샤의 팔목을 잡았다.
“잠깐.”
그러자 마샤의 시선이 한나에게 향했다.
“저에게 볼일 없는 거 아니었어요?”
그의 물음에 한나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소리야. 안마는 내가 제일인데.”
“마음에 없는 소리 안 해도 돼요. 전 그냥 우리 황제 폐하나 보…….”
반쯤 일으켜진 마샤의 몸을 본 한나는 이번엔 남아 있던 손까지 들어 마샤의 팔을 잡았다.
“하고 싶어.”
“뭘요.”
“안마.”
“아닌 것 같은데.”
“아냐. 나 완전 안마 좋아해.”
단호한 한나의 태도에 마샤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 슬그머니 다시 앉았다. 그러자 한나가 재빠르게 그의 팔에서 손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통하고 원통하다.’
매사 허술한 자신이 잘못이지,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나는 냉큼 마샤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살폈다. 하얀 손이 붉은 제복 위를 더듬었다.
“어디가 결리니? 여기?”
“거긴 아닌가 봐요.”
마샤의 대답에 한나의 손이 조금 옆으로 이동했다.
“그럼 여기?”
“거기도 그다지.”
“목 쪽이 안 좋은가 보다. 그렇지?”
한나가 마샤의 머리와 목의 중간지점을 꾹 눌렀다.
“조금 시원한 것 같긴 하네요.”
만족스러워하는 마샤의 목소리에 한나는 조금 속이 부글거렸다.
“손에 힘이 없네요. 오늘 못 챙겨 먹었어요?”
이 자식이?
지금 누굴 놀리는 건가.
그 말에 한나는 있는 힘껏 마샤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방금, 감정이 실린 것 같은데.”
아차차.
마샤의 말에 한나는 급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감정이라니. 너와 나 사이의 따뜻한 감정을 말하는 거니?”
한나의 표정이 온화하게 바뀌었다.
“따뜻?”
그에 마샤는 픽, 웃어 버리고 말았다.
“잠깐만. 왜 거기서 웃지?”
마샤의 반응에 발끈하면서도 한나는 착실하게 마샤의 어깨와 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아니에요. 따뜻한 감정이라는 말이 웃겨서.”
“너 나한테 차가운 마음이었니……?”
한나의 질문에 마샤는 더 크게 웃었다. 넓은 어깨가 함께 움직이며, 옷 아래로 근육이 꿈틀거렸다.
‘마샤, 마법사라고 비리비리 할 줄 알았는데, 근육이 있구나.’
새삼 신기한 그 감촉에 한나가 놀라고 있을 때, 마샤의 뒤늦은 대답이 이어졌다.
“차가운 건 아니고…….”
‘음’ 소리와 함께 뜸을 들이던 마샤가 말을 매듭지었다.
“뜨겁다고 해 두죠.”
안마는 어렵지 않았다. 그냥 주물주물거리는 게 다였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였다.
“선생님. 그게 아니죠.”
“어? 이렇게 하는 게 아니야?”
마샤는 안마를 위해 벗어 두었던 망토를 다시 매는 것까지 한나에게 부탁했는데, 이게 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브로치를 꽂으면, 고정이 안 되잖아요?”
“아, 음……. 그렇구나. 잠깐만.”
아주 그냥 저를 부리는 것에 재미가 들린 것인지 마샤는 신나는 얼굴로 그녀를 부려먹고 있었다. 한나는 그에 발끈할 새도 없이 마샤의 불만에 대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인가?”
평소 너무 정갈하게 잘 매어져 있던 그의 망토가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하지만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한나는 드디어 평소 마샤가 하고 있던 모양 그대로 망토를 재연해 냈다.
“오. 그럴듯한데? 어때?”
한나가 뿌듯한 얼굴로 마샤에게 물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로 내려갔다.
“나쁘지 않네요.”
기다란 손가락이 한나가 한참 꼼지락거리던 브로치에 닿았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지. 완전 잘해서 빛이 나잖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마샤는 한나의 뿌듯함과 즐거움을 담은 얼굴에 미소도 답했다.
“말했지? 내가 뭐든 하면 잘한다고.”
“맞아요. 선생님은 뭐든 잘하지.”
“그럼, 그럼. 앞으로 나를 본받으렴.”
한나는 절로 으쓱해진 어깨를 굳이 감추지 않고 마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뭐든 잘하는 선생님이랑 일도 하면 되겠다.”
“일? 무슨 일? 네 일?”
“네.”
순간 한나는 마샤가 황궁에서 일을 하고는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황궁 보수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늦지 않게 떠올랐다.
그냥 보면 완전 놈팡이처럼 놀고 먹는 줄…….
“요즘 제가 일이 많아서,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참 좋겠다 싶었거든요.”
“난 마법도 못하는데?”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보통 마샤가 하는 일은 마법으로 진행된다.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곤…….
“그냥, 자잘한 심부름 정도?”
그래. 딱 저 정도 잔심부름 정도겠지.
“…….”
아니, 이 녀석 정말…….
“나를 심부름꾼으로 부리겠다는 거니?”
한나는 황당한 얼굴로 마샤에게 물었다.
고작 안마 정도로 술술 넘어갈 수 있으리라곤 기대는 안 했다만, 그래도 심부름꾼은 아니지! 종이잖아. 종!
“불만 있어요?”
마샤가 나긋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한나는 당장이라도 불만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장작도 차고 넘치게 있다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마샤의 얄미운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 생각을 꾹 눌렀다.
“설마. 널 돕는 일은 항상 즐겁지.”
“잘됐네요.”
마샤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한나는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바로 갈까요?”
다정한 그 물음에 한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빨리 져야 할 텐데.’
마샤에게 약점을 저당 잡힌 긴 하루의 서막이었다.
* * *
오물오물.
한나는 오늘 늦은 아침을 먹은 관계로 점심은 밥 대신 간단한 빵으로 선택했다.
그것도 공기 좋은 야외에서 먹기로 했다. 근 며칠간 마샤의 눈치를 보느라 자유의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그냥 사람을 종처럼 부리는 게 어쩜 그리 익숙한지.
너무 얄미워서 콱 쥐어 박고 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여우같이 강약 조절을 해 가며 괴롭히는 게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주무르는 기술이 대단했다.
오늘은 겨우 시들해진 마샤의 놀림 덕에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음……. 진짜 저건 어쩌지.”
빵을 먹고 있는 이곳은 꽤나 익숙한 장소였다. 바로 서쪽 궁의 창문 밖이었다.
한나는 창밖에서 열린 창문 너머의 검이 걸린 벽을 보며 빵을 오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기껏 좋은 경치를 보며 먹겠다던 점심의 구경거리는 성물이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 사람은 생각하는 것으로 발길이 닿고, 눈길이 가는 것 아니겠는가?
자꾸만 검이 눈에 아른거리니, 이리 빵을 싸 들고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마샤 종노릇을 했는데, 결국 보호 마법 풀어 달라고도 못 했지.”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됐을지도 모르는데. 이놈의 성질머리란.
참으로 비통한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냥 여기 두고 지키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어.”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고민해 본 결과, 어차피 자신이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보호 마법도 걸려 있겠다, 황궁 안이겠다, 가끔씩 자신도 경비를 서면 충분히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보류. 차라리 어디 가서 마법사 한 명 초빙해 오든지 해야지. 마샤만 한 마법사면 수고비가 비싸려나.”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한나였다.
“근데 이 빵에 들어간 거 뭐야? 건포도? 왜 이리 맛있어?”
늦은 아침으로 밥맛이 없다고 생각했던 건 그저 착각이었나.
“아몬드도 들어간 건가.”
한나는 고소하고 달콤한 맛의 정체를 찾아내기 위해 빵을 자세히 살폈다.
눈이 침침한 건지, 재료 식별이 잘되지 않았지만.
한나는 고개를 들어 눈을 비볐다.
그러던 그때, 서쪽 궁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고, 창문 너머에서 한 남자를 발견했다.
‘누구지?’
그동안 이 서쪽 궁에는 경비병을 제외하고는 달리 걸음 하는 이가 없었다.
아, 물론 마샤는 제외하고.
그런데 갑자기 사람이?
혹시 황궁에서 일하는 일손인가 싶어 그를 관찰했지만, 황궁의 시종이라기엔 차림새가 어딘지 남달랐다.
특히, 저 의심스러운 검은 로브 같은 거.
‘뭐지. 설마 도둑? 에이, 설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한나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훤한 대낮에 황궁에서 도둑질을 하…… 려던 자신의 지난날이 생각났다.
‘……그래, 사람 일은 또 모르지.’
한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일단 제 몸을 낮추고, 눈만 빼꼼 창 위로 내민 채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남자는 궁의 초입으로 들어선 상태였다.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두근두근.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설마 자신 말고도 검을 노리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지…….
그때,
“뭘 그리 열심히 봐요?”
“읍!”
한나는 깜짝 놀라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양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손으로 입을 막은 한나가 뒤를 돌아보았고, 그곳엔 이안이 있었다.
“……하.”
한나는 그나마 대상이 이안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적어도 자신에게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니.
“뭐야. 놀랐잖아.”
“뭘 그리 보고 있었어요?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아. 그게, 안에 누가 있어서.”
“사람?”
이안의 시선이 창문 안쪽으로 향했다.
“응. 저기…….”
한나가 뒤돌아 검은 옷의 사내를 가리키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어? 어…….”
어디 갔지?
분명히 있었는데.
한나는 창문틀을 양손으로 잡고 상체를 쭉 안으로 들이밀었다. 그러곤 목을 빼고 좌우를 살폈다.
“정말 없네.”
분명히 있었던 사람이 사라졌다.
“그냥 청소 시종 아닌가요?”
“아……. 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옷이 좀 특이했는데. 검은 로브 같은…….”
“뭐, 외부에서 들어온 일꾼들이나 상인들도 많이 오가니까요.”
“그런가.”
한나는 왠지 찜찜한 마음에 다시 안을 살폈다. 하지만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나.’
어쨌거나 이미 사라진 사람을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그런가 보다.”
괜히 이안이 왜 여기에 와서 밥을 먹었냐고 캐묻기 전에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화제를 돌릴 겸, 한나가 물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하릴없이 점심시간을 때우는 것보다 이안이 이곳까지 온 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제가 찾으러 왔죠.”
“보기가 힘든 건, 네가 바빠서가 아닐까?”
황궁을 뽈뽈거리며 유람하는 한나보다 집무실에만 콕 박혀 있는 이안이 황궁에서는 더 유니콘 같은 존재였다.
“말했잖아요. 선생님에게 낼 시간은 없어도 만들어 내겠다고.”
“어……. 음, 그랬나.”
할 말이 없어진 한나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는 뜻이었는데, 이리 발길을 안 하시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이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인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걸 이안에게 말했다간 또 눈치라곤 쥐뿔 없다는 비웃음을 살 것이 뻔했다.
모르는 척 하자.
“하하. 너 바쁠까 봐 그랬지.”
“선생님 거짓말엔 성의가 없네요.”
“그럼, 내가 바빴던 걸로……?”
“그건 그나마 성의가 있다고 해 두죠.”
이안이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아주, 감읍할 노릇이었다.
“그걸로 점심이 되겠어요?”
이안은 한나의 손에 들린 빵을 보며 물었다. 평소 한나가 ‘밥’을 소중히 여기던 것에 비하면 너무 빈약한 끼니였기 때문이었다.
“응. 이 정도면 충분하지. 완전 맛있어. 한입 먹어 볼래?”
한나는 방금 자신이 느꼈던 환상의 맛을 이안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먹고 있던 빵을 이안의 앞에 내밀었다.
“…….”
하지만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아차.’
앞에 있는 존재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안인데.
손이 닿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한테 먹던 음식을 내밀다니.
한나는 순간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건 교수형 엔딩을 생각할 수도 있을 만큼 아주 미친 행동이었다.
“아. 미안. 그게 아니라…….”
한나가 민망한 손을 황급히 거둬 내려 할 때, 멈춰 있던 이안이 움직였다. 살랑, 금빛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이안의 눈이 내리깔렸다.
손을 거두려던 한나는 이안의 크고 따뜻한 손에 팔목을 붙들렸다.
내 빵에 향해 있던 시선과 겹쳐진 이안의 동선.
한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무슨……!”
이안의 입이 닿았다.
자신이 먹던 빵에.
“…….”
“…….”
패닉 상태라고 하던가. 한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이안의 정수리가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입을 오물거리는 이안의 얼굴이 보였다.
‘말도 안 돼.’
분명 자신이 꿈을 꾸고 있거나,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한나는 이제 입까지 떡 벌리고 경악에 찬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맛있네요.”
“……허.”
그저 평범한 맛있다는 인사치레에 심장이 철렁거렸다.
“너……. 괜찮아?”
솔직히 한나는 이안이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안 그러던 사람이 변하면 신변의 걱정부터 되는 게 아닌가.
“문제가 있나요?”
“아니……. 그, 방금 네가 빵을…… 이 빵…….”
“빵에 독이라도 들었어요?”
그 말에 한나는 깜짝 놀라 반박했다.
“무슨!”
“그럼 뭐가 문제일까.”
태연하게 물어 오는 이안의 물음에 한나는 입을 뻐끔거리며 할 말을 골라냈다.
“그, 내가! 내가, 먹던 거잖아!”
혹시 이안의 시력에 문제가 있어서 먹던 빵인 걸 못 본 게 아닐까.
“그랬죠.”
그건 아닌가 보다.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남이 먹던…….”
이안이 말을 잇지 못하는 한나와 시선을 맞췄다. 한나가 얼마나 이 상황이 놀라워하고 있는지 이안은 모를 수가 없었다.
두 배는 커진 눈, 떡 벌어진 입, 입꼬리까지 씰룩이며 떨고 있었다.
“그럼 우리가 남은 아닌가 보네요.”
한나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
“남이거든? 완전 남인데?”
“그렇게 말하면 조금 슬픈데.”
한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말 이안이 맞는 건가. 이안의 탈을 쓰고 있는 다른 사람이 아닐까.
갑자기 드는 의구심에 한나가 물었다.
“너 누구야.”
“질문이 이상한데.”
“누군데 우리 이안 흉내를 내고 있어.”
정말 의심이 잔뜩 서린 한나의 표정에 이안은 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신기해요?”
“기절할 수준인데.”
“그건 곤란한 일이죠.”
이안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한나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기절하기 전에 편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건 어때요.”
“뭐?”
“여긴 바닥에 돌이 많아서.”
한나는 이안의 농담 같은 말에도 웃지 못했다.
“날이 쌀쌀해요. 안으로 들어가죠. 더 맛있는 빵도 실컷 늘어놓고 먹어도 좋고.”
이안은 한나의 빈약한 점심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빵의 맛은 좋긴 했다.
“어서요.”
“그, 그래…….”
한나는 어깨를 감싼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이안이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터벅터벅.
조금 걷다 보니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너 정말 괜찮아?”
“또, 같은 말 반복할 생각인가요.”
“……아니, 그냥 너무 신기해서.”
어릴 적에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 요즘 황궁에서의 이안은 예민함의 극치였다. 자신에겐 관대하지만 주위 사람에게까지 그렇지 않다는 건 황궁에서 조금만 있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의 결벽증세는 오히려 옛날보다 심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의 행동은 한나에겐 정말 파격 그 자체였다.
“앞으로 신기한 일이 많을 거예요. 많이 놀라도 절 멀리하진 말아요.”
“어…… 어?”
또 무슨 신기한 일이 있다는 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런 한나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 이안이 말했다.
“저도 궁금하네요. 선생님에 관한 일은 어디까지 내 선을 넘어서는지.”
그러면서 제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쓸었다. 실제로 한나 못지않게 이안 스스로도 오늘 일이 꽤나 놀라운 상태였다.
한나가 등장하면 견고하게 자신을 둘러싼 보호벽이 마치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다른 이가 먹는 음식을 먹는다는 상상은 살면서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겨우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는 일을 자처할 필요가 없었다.
“…….”
하지만 오늘, 그를 움직인 건 뭐였을까.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더니.”
한나는 오늘의 충격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신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두르고 있는 이안의 행동도 평소라면 놀랄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건 신경도 안 쓰일 만큼 충격에 얼떨떨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한참을 걷고서야 행선지가 궁금해진 한나가 이안에게 물었다.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요. 황제 전용 식당, 내 궁의 후원, 아니라면 배를 띄워도 좋고.”
“아니, 배라니?”
“배 위에서 먹는 한 끼?”
이건 놀리는 게 틀림없었다. 자신이 멀미로 추태를 보였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아니라면……. 내 방도 좋겠네요.”
이안은 마치, 배보다 나은 선택지를 툭 던지는 것처럼 말했지만 ‘내 방’이라는 말이 한나의 귀에 예리하게 걸러졌다.
“방이라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겨우 밥 먹는 장소인데.”
“아……. 어, 그렇지.”
괜히 놀라는 바람에 상황이 더 어색해졌다.
“일단 손을 좀 치워 볼래.”
“지금도 편한데요?”
“너의 편함과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라…….”
한나는 주위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신경 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불편했다.
“보는 눈이……. 많거든.”
한나의 쭈뼛거리는 말에 이안이 답했다.
“보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 무슨.
“많이들 봐 두라고.”
이안의 말처럼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 두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게 만천하에 한나와 자신의 사이를 다정히 보이게 하는 거라면, 정말로 성공한 셈이었다.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식당이었다.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간 것 치고는 아주 평범한 식사를 평범하게 이어 갔다.
한나는 이렇듯 자신을 난감하게 했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태도의 이안을 보며 정말 그의 속을 뜯어보고 싶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