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5. (16/23)

Chapter 15.

장례는 무사히 끝났지만, 여전히 한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찜찜한 마음이 들어차 있었다. 물론 아직 여러 가지 문제로 시끄러운 신전의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막시온 대신관님이 차기 교황 자리에 탐을 낸다던데…….”

“유피르 대신관님이 오히려 낫지 않나? 욕심을 안 내셔서 그렇지. 지지자는 많아.”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국민은 세자르 님을 원하고 있잖아. 거의 확신하던데.”

단연코 요즘 신전을 아우르는 가장 큰 화제는 차기 교황이었다.

“세자르 님은 아예 관심이 없다잖아.”

“아직 젊으니 다음 세대를 생각할지도.”

한나는 이젠 뭐 숨기지도 않고 떠들어 대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소한 호두를 아작, 아작 깨물어 먹고 있었다.

‘음. 정말 신전 어떻게 되는 거람. 아니 그보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면책권은 어떻게 되는 건지도 궁금했다.

교황의 권한으로 가지고 있던 면책권은 차기 교황에게 계승되는 건가?

하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해 한나는 꼼꼼하게 계약서를 작성해 놓았었다.

“역시, 사람 미래는 모르는 거야.”

백 년 만 년 살아 있을 것 같던 교황 성하의 죽음이라니.

교황의 죽음 이후, 한나도 할 일이 늘었다.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은 황망한 마음과, 정신없는 일정에 생각도 못 했던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교황 성하의 서거 이후에도 신전은 평소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신관들이 조금 바빠진 것을 제외하면 전과 다름을 느낄 틈도 없었다.

아드득, 아득.

그러니 자신이 이렇게 한가로이 앉아 호두나 까먹고 있는 거겠지.

요즘 드는 생각이라면, 여기 중앙신전의 신관들은 입을 조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어떻게 하는 말마다 다 내 귀로 들어오냐.’

이 정도면 세상 사람 다 들으라고 하는 소곤거림이 아닐까 싶은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대신관들과 장로들 사이에서 얘기가 오간 다음엔 우리에게도 투표권이 돌아오려나.’

나름 여유롭던 한나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민주주의적 사고로 생각하자면 투표를 할 것 같긴 한데.

이곳은 또 그렇지가 않으니.

어찌 됐든 한나는 막시온 대신관은 싫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가 신전 정치 생활을 꽤나 잘한 건지 그의 추종자들도 많다는 게 그저 씁쓸할 뿐이다.

아니면 교황 자리에 관심이 없는 세자르를 제외하면 유피르 대신관을 밀어야 하는 걸까.

한나의 손이 마지막 하나 남은 호두로 향했다.

휙.

하지만 헛손질이었다.

오도독.

호두가 들어간 입은 자신의 입이 아니었다.

“세자르 님?”

“머리가 안 돌아갈 땐 호두가 좋지.”

그는 오물오물, 한나의 소중한 마지막 호두알을 씹으며 답했다.

“……머리가 많이 굳으셨어요?”

이 말에는, 내 소중한 마지막 호두를 훔쳐 먹을 만큼? 이라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세자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세자르 님, 안 바쁘세요?”

“기껏 사막에서 돌아온 내가 계속 바빠야 하나?”

그 말에 한나가 서둘러 해명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여기저기 찾는 곳이 많을 텐데요.”

“누가 날 오라가라 해?”

어쩜, 이 인간은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그래. 사람이 막 변하고 그러면 탈나지.

“요즘 차기 교황 얘기로 온 신전이 시끌시끌하잖아요. 세자르 님도 그와 관련해서 많이 거론되고 있고.”

“여긴 뭐든 빨라.”

세자르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렇게 빠르지도 않을걸요. 보통은 차기 교황은 진즉에 정해 놓는 거라던데.”

하도 주워 듣다 보니 나름 교황의 승계에 대해 빠삭해졌다. 보통은 교황이 차기 교황을 지목하고, 그에 대해 승계를 준비하고 물러나는 게 정상적인 자리 물림이라고 했다.

“유피르 대신관님이랑 대화는 해 봤어요?”

한나는 문득, 유피르 대신관님이라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했다.

“했지.”

“뭐라던가요?”

“그 양반도 교황직에는 관심이 없던데.”

“세상에.”

아주 끔찍한 상황이었다.

이러다 꼼짝없이 막시온 대신관이 교황 되는 거 아니야?

“뭘 그리 놀라?”

“유피르 대신관님도, 세자르 님도 아니라면 정말 미래가 암담해서요.”

“그 정도로?”

세자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나의 생생한 반응이 재미있었다.

“생각해 봐요. 막시온 대신관님은 딱 봐도 악덕……. 아마 이제 난 성수 만드는 기계가 될 거예요. 그것도 아니라면 돈 많은 왕족 탈모 치료에나 팔려 가겠…….”

“응?”

“……그런 게 있어요. 참, 하여튼 미래가 어둡네요.”

세자르는 한나가 앉아 있는 높은 창틀이 있는 벽에 등을 기댔다.

참고로 한나는 복도의 안에서 창가에 앉아 있었고, 세자르는 반대편 흙을 밟고 있었다. 신전의 안과 밖에서 두 사람은 같은 벽에 의지해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여긴 사막보다 사람을 지치게 해.”

“설마 마물이 판을 치는 그곳만 할까요.”

“적어도 그곳에선 밤이면 숨죽여 쉬었고, 동료가 죽으면 오래 기억했지.”

“……여긴 아닌가요. 저도 교황 성하를 오래 기억할 거예요.”

꼭 함께 전투를 해야만 동료가 아니다. 함께 일상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동료라기엔 충분하니까.

우리가 사는 것이 마치 전투 같은 삶이라서일까.

“교황이 되지 않을 거라면, 앞으로 뭘 할 거예요?”

세자르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혹시 아직도 마음의 한 부분을 사막에 두고 온 것일까.

“글쎄. 먼저 간 영감은 돌아오면 마음껏 숨 좀 쉬고 살라던데.”

먼저 간 영감이라는 게 설마, 교황 성하를 말하는 건 아니…….

세자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맞구나.

성하를 저렇게 거침없는 호칭으로 말하는 이는 세자르뿐이겠지.

“뭔가 짠한 말이네요.”

“뭐가?”

“숨도 못 쉬고 살아왔다는 말 같아서요.”

생각해 보면 그렇다.

세자르는 자신의 힘이 세상 사람들을 지키고 있다는 걸 항상 신경 쓰면서, 자신을 온전히 유지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겠지.

그가 덤덤히 사막의 마물들을 쓸어버리겠다며 사막으로 향했던 그때, 어찌 두려움이 없었을까.

나는 현실과 이번 생을 두 번이나 살았지만, 아직도 이토록 미숙한 인간인데.

평소 초연해 보였던 그의 모습은 주위를 안심시키려는 마음씀씀이였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매일 밤, 혹은 어마어마하게 빠져나가는 성력 때문에 쪽잠을 자던 그 짧은 순간순간들마다 악몽에 시달렸을지도 모르지.

세자르가 내쉬는 숨은 내가 내뱉는 숨과 무게가 달랐을지도.

“딱히. 이 갑갑한 신전에 박혀 있는 것보다는 나았던 것 같은데.”

세자르는 별 우스운 소리를 한다는 듯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면서 사는 모두가 대단하지. 그런 의미에서 난 그대가 대견해.”

그래. 사람은 저마다 다른 책임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니까.

“맞아요.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죠.”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 같은 건 시시하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세자르는 그 반대의 사람이었다.

“세자르 님은 강한 사람 같아요.”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성력이나 마물 퇴치 같은 거 말고요. 여기, 마음이나 정신 같은 거요.”

손가락으로 가슴과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전 세자르 님이 교황이 됐으면 좋겠어요.”

“난 그 정도 그릇이 되지 못하는데.”

“권력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 가져야 바른길로 향하잖아요.”

이렇게 세자르를 추켜세워 주면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회유라니!

한나의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은근했지만, 너무 티나는 한나의 마음에 세자르는 웃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세자르의 은빛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내가 교황이 된다면…….”

된다면?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닌 건가.

“복수를 할 생각밖에 없을 거야.”

“보, 복수요?”

“난 딱 그 정도의 그릇이거든.”

교황의 복수를 말하는 건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잔잔한 얼굴 아래에로 그는 울분을 눌러 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 교황이 되지 않으면 복수에는 뜻이 없어지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

뭐야.

“그럼 그게 그거 아니에요?”

“일개 신관의 복수는 개인의 행동이지만, 교황이 드러내는 적의는 신전의 뜻이 돼 버리니까.”

그러니까, 한마디로…….

개인적인 복수를 홀가분하게 하기 위해 교황이 될 수 없다는 말……?

“누가 적이 될지 모르잖아.”

“뭔가 엄청난 내막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어쩌면.”

세자르는 누굴 의심하고 있을까.

“엄청난 내막이 있다면 더더욱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세자르의 고개가 돌아갔다. 왜냐는 물음을 눈동자에 담고 있었다.

“정말 필요한 순간에, 칼자루가 남의 손에 쥐어져 있다면 곤란하잖아요.”

예를 들면 막시온 대신관 같은.

한나는 폴짝, 창틀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선택은 세자르 님 몫이니까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요. 뭐 앞으로 저랑 같이 신전 월급이나 축내면서 지내는 것도 좋고요.”

한나가 찡긋하고 웃어 보이자, 세자르는 멍하니 한나를 보았다.

“월급을 축내고 있었나?”

아니, 이 사람은 무슨 농담을 못 해.

“그냥 하는 말이죠!”

펄쩍 뛰는 한나의 모습에 그제야 세자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응원은 잘 받아 두지.”

“예. 예. 저는 그럼 갑니다.”

그렇게 멀어지는 한나의 모습을 보며 세자르는 다시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 * *

“다음은 차기 교황에 대한 안건입니다.”

“늘 그렇듯 투표지.”

“후보는?”

교황의 후보가 정해지면, 74명의 대신관들이 투표를 통해 교황을 선출했다. 보통 후보는 추천제로 정해졌다.

“이미 앞선 후보 추천 기간에 정해진 세 분은 나왔습니다.”

“그럼 날을 잡아 투표를 진행하면 되는 거 아닌가.”

“후보의 의사 결정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재목이라 해도 스스로 관심이 없다면 억지로 성좌에 앉힐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의사 결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에 대신관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 세 명은 누구지?”

“막시온 대신관, 유피르 대신관, 세자르 대신관 입니다.”

“뭐, 뻔한 결과지.”

“이 자리에서 입후보에 대해 마침표를 찍읍시다.”

한 대신관이 말했다.

“막시온 대신관, 그대는 당연히 수락하겠지?”

“물론입니다.”

막시온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유피르 대신관은?”

“저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교황 성하께서 가장 가까이하던 대신관이 아닌가. 자격이라면 충분하지.”

“어차피 머릿수나 채우는 거지.”

한 대신관이 툭, 던진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그는 본디 막시온 대신관과 우호적인 자였다.

“내정된 후보라도 있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유피르는 예의 상냥한 미소와 함께 그에게 말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눈길을 피했다. 세자르의 시선도 그 대신관에게 향했다.

“누굽니까.”

세자르가 발언한 대신관에게 물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가 입을 열자, 대신관들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누가 신전의 개혁을 위해 힘썼는지. 이제 세상이 변했습니다. 황궁도 마탑도 개혁의 바람이 불었는데, 우리라고 보수적으로 신전을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몇몇 대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온 대신관은 그저 말없이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개혁, 개혁이라.”

“이번 일도 신전이 폐쇄적으로 외부와 담을 쌓고 있으니 생긴 사건 아니겠습니까.”

신전이 강경하게 외부의 협조 요청에 거절하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제 개혁적으로 신전의 성물을 다 팔아먹겠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대신관이 받아쳤다.

“꼭 우리끼리 그렇게 말을 해야 합니까? 신전의 앞날을 위해 하는 말입니다만.”

“이보시오. 여긴 정치하는 곳이 아니오.”

“신전은 지금 과도기에 놓여 있습니다. 변화가 필요해요.”

회의를 시작했다 하면, 언제나 그 끝은 이런 식이었다.

서로의 사상을 주장하며 갑론을박이 오갔다.

톡. 톡. 톡.

세자르는 그들의 점점 높아지는 음성을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말 필요한 순간에, 칼자루가 남의 손에 쥐어져 있다면 곤란하잖아요.’

개혁을 외치는 막시온 대신관이 교황이 된다면 과연 교황의 죽음에 대해 강경한 처벌을 할 수 있을까.

그는 황실이나 마탑, 혹은 다른 세력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일을 해 왔다. 힘의 균형을 수호하고 중립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신전이 이익을 좇아 중심을 잃을 여지도 많다는 뜻이었다.

“이미 막시온 대신관은 우리가 피땀으로 지킨 사막에 대한 권한을 황궁에 갖다 바치고 있지 않소.”

“갖다 바치다니요.”

대화가 점점 과열되고 있었다.

세자르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런 꼴을 보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들은 우리 형제들의 피가 뿌려진 곳에 벌써 길을 뚫고 있소!”

“어쩌면 교황 성하의 죽음은 우리의 관심을 돌리려는 더러운 술수일 수도 있소.”

“억측이 지나치군.”

“가장 의심스럽지 않소! 이건 우리 신전의 위세를 약화시키려는 수작이오!”

“황실과 신전의 분란을 조장하려는 다른 세력의 짓일 수도 있지.”

도르륵, 도르륵.

쳇바퀴처럼 이야기는 돌고 돌았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이곳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열변을 토하는 대신관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그에 세자르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김새는 웃음소리로 향했다. 그들은 이곳에 들어선 후 줄곧 세자르의 동작 하나, 숨소리 하나에도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었다.

세자르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들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 숨 좀 쉬고 삽시다. 다들.”

* * *

“네에?”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세, 세자르 님이 교황 후보요?”

관심 없다는 사람이 어째서 하루아침에 생각이 바뀐 걸까.

“말이 후보지, 이미 확정이나 다름없지.”

“그럼 애초에 투표니 뭐니는 왜 한다고 한 거예요.”

한나는 빨래를 널면서 대신관 중 한 명인 에밀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게 줄곧 내려오는 전통이니까. 사실 세자르 님의 입에서 하겠다는 말이 나온다면 누구도 막을 수가 없어. 그는 이미 제국민의 영웅이고, 그가 교황이 된다는 것만으로 신전은 엄청난 홍보 효과를 얻는 셈이니까.”

“교황은 지도자의 자리 아닌가요. 마스코트 뽑듯이 하네.”

“솔직히 말이야, 세자르 님만큼 대신관들을 긴장시키는 사람은 없어. 눈길, 행동, 작은 말소리에 다들 긴장하는걸. 그만한 힘이 있다는 자체로 얘기 끝이지. 끝.”

에밀리 대신관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막시온 대신관님은 많이 실망하셨겠네요.”

“어쩌겠어? 그는 편도 많지만, 적도 많아.”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애초에 세자르 님이 ‘저도 하죠. 그 후보.’, 라고 할 때 막시온 대신관도 넋 놓고 세자르 님만 보던데 뭐. 그도 알고 있는 거야. 진짜가 누구인지.”

에밀리의 성대모사가 곁들어진 설명은 그 장면을 본 것도 아닌데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흥미진진했다.

“그, 그럼 투표는 언제인데요?”

“내일.”

“교황 즉위식은요?”

“대신관 투표가 끝나면 바로 제국민 앞에서 치러져.”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끝나는구나, 한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근데 왜 그렇게 놀라? 세자르 님과 친하지 않았나?”

“아니……. 뭐, 그런 거에 관심 없다고도 하셨고……. 그리고 사실 응원은 했지만 세자르 님이 교황이 된다면 상당히 좀 신전이 바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한나는 마지막 남은 이불 빨래를 툭툭 털어내 널었다. 빨랫줄이 이불의 무게에 축 늘어졌다. 응원이야 했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돌아가니, 어리둥절했다.

“거참, 신전도 대충 돌아가는 느낌이에요.”

한나가 말했다.

“격변의 시기라고 하지 않니. 뭐든 빠르게 변하고, 빠르게 바뀌고.”

에밀리 역시 한나의 말에 동조했다. 황제도 마탑도, 신전도, 세대 갈이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모쪼록 순탄하게 지나갔으면 싶네요.”

한나의 말에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제 끝!”

바람에 하얀 이불이 펄럭거리자, 싱그러운 비누 향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속이 시원하네요.”

* * *

“아, 얼른 서두르라니까, 너 때문에 나까지 못 보게 생겼네!”

교황의 즉위식이 있는 날이었다.

“벌써 끝났대? 어우, 왜 이렇게 오늘따라 주렁주렁 달아야 하는 게 많아!”

평소에는 어디 던져 뒀는지도 모르고 지내던 액세서리들을 제 자리에 맞게 장착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게 일찍 좀 일어나서 준비했으면 됐잖아!”

핀체프는 오늘같이 중요한 날 늦잠을 잘 뻔했던 한나를 깨워 준 은인이었다. 하지만 저 잔소리가 귀에 아픈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만 좀 보채! 먼저 가던지!”

“나도 너 챙기고 싶지 않거든! 근데 성수를 찾으러 갔는데 사람이 없으니 걱정돼서 내가!”

“알겠어. 알겠다고. 다 했어. 가자!”

허겁지겁 방을 나서자, 핀체프는 한나의 꼴에 혀를 내둘렀다.

“머리는 가면서 빗을 거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꼴이 이래 보여도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한나와 핀체프는 정신없이 달렸다.

이미 시작됐을 교황 즉위식을 아예 놓쳐 버릴 수는 없었다.

“성수는 잘 전달했어?”

“당연하지. 마침 네 작업실에 새로 만들어 놓은 게 있길래 그걸로 전달했지.”

열심히 걸어가고 있던 한나는 핀체프의 한마디에 얼어붙었다.

“뭐, 뭐?”

“새로 만들어 놓은 걸로 전달했다고…….”

“야이! 그걸 주면 어떡해!”

“왜?”

갑작스레 멱살을 잡는 한나의 행동에 핀체프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건……. 그건……!”

북부에서 사용하던 무기용 성수였다.

“맙소사.”

즉위식 행사 중에는 교황이 성수에 손을 씻어 내는 의식이 있었다.

만약 세자르가 뭣 모르고 손을 담갔다가 고통에 펄쩍 뛴다면……?

“망했다.”

교황은커녕 마물 아니냐고 의심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나의 발걸음이 빨라지다 못해 거의 날아가고 있었다.

“야! 뭐가 그렇게 급해! 뭔데? 무슨 일인데?”

“넌 네가 얼마나 대형 사고를 쳤는지 모를 거야.”

“내가? 사고를?”

“성수 행사를 막지 못하면 너나 나나 신관복 벗는 거야!”

다다다다.

한나는 복도를 있는 힘껏 질주했고, 핀체프는 영문도 모른 채 함께 달렸다.

“헉……. 헉.”

겨우 도착했다.

“저……. 저기 성수!”

핀체프가 손가락으로 성수를 가리켰다. 그는 뭔지 몰라도 성수에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챈 상태였다.

한나는 엄숙한 분위기의 대성전을 최대한 티나지 않게 종종걸음으로 벽을 등지고 이동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벽 쪽에 서 있는 성기사들을 손으로 밀어내며 전진했다.

“잠시만요. 비상상황이라. 죄송해요. 좀 지나갑니다.”

차례차례 성기사들을 치워 내며 결국 한나는 가장 높은 단상까지 도달했다.

“자네, 뭐하는 건가.”

성수 그릇을 든 신관이 한나를 발견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성수, 버리셔야 합니다.”

한나가 흡사 복화술로 답했다.

“뭐라고?”

“성수에 문제가 있…….”

“방해하지 말고 비키게.”

신관은 식을 망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나에게 비켜서라고 했지만, 한나는 냉큼 신관의 옷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그거 그냥 들고 가면 큰일나요. 저뿐만 아니라 여기 전부 다.”

“놓으래도!”

아 진짜! 말이 안 통하네!

한나는 냉큼 신관의 손에 들린 성수 그릇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곤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차단막이 설치된 곳으로 냅다 달렸다.

“어……. 어!”

신관이 놀라 그녀를 쫓았다. 아무도 모르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한 한나와 달리,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눈은 많았다.

대신관들과 세자르도 그중 하나였다.

세자르는 식이 진행되는 절차에 따라 움직이며 눈으로는 작은 소란이 일어난 대성전 구석진 곳을 살피고 있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애당초 크게 긴장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한 톨 남아 있던 긴장마저 날아가 버렸다.

그는 이 중압감 가득한 의식에서 그저, 저 한구석에서 사고가 터지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한나는 냅다 창밖으로 성수를 부어 버렸다.

“무, 무슨……!”

쫓아온 신관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다 이유가 있어요.”

신관은 옆에 놓인 꽃병의 꽃을 빼내는 한나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콸콸콸.

꽃병의 물이 성수 그릇에 담겼다.

신관은 기절할 것 같았다.

“용서하세요. 신님.”

저도 이 의식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벌을 내리실 거라면, 핀체프부터요.

걔가 문제예요.

와중에도 한나는 착실히 신에게 빌었다.

* * *

성수 그릇은 결국 한나의 손에 들린 채 세자르의 앞에 도착했다.

‘그렇다고 이걸 나한테 맡기냐.’

신관은 정신이 혼미하다며 자신은 들고 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대신할 사람도 없으니, 결국 한나는 직접 성수 그릇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사람이 바뀌었군.”

세자르가 성수 그릇에 손을 담그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는 듣지도 못할 만큼 작게.

“사정이 있었어요.”

“사고는 아니고?”

“잘 진행되고 있는데, 뭘요.”

억지 미소가 뒤따랐다.

“성수가 아니군.”

진땀나는 한나의 상황은 모르고 세자르는 아주 느리게 손을 씻었다. 그는 이것이 성수가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어서 축성이나 외우러 가시죠.”

시선을 피하는 한나의 모습에 세자르는 피식 웃었다.

“이거, 부정이라도 타면 어쩌지.”

“물은 생명의 근원이랍니다. 한마디로 신의 성수가 아니겠어요?”

“말은.”

다행히 말빨로 위기를 넘겼다. 한시름 덜고 나니, 이제야 한나의 눈에 세자르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신관복이 아닌, 붉은 망토와 관을 쓰고 있었다.

“망토가 잘 어울리시네요.”

“알바, 달마티카, 카즈라, 파노네, 미트라……. 복잡하게도 걸치지.”

“매일 그렇게 입는 건 아니죠?”

너무 치렁치렁하다는 생각에 물어본 거였다.

“물론.”

세자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손을 빼냈다.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교황 즉위식에서 이 두 사람이 사사로이 패션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는 것을.

한나는 임무를 무사히 마친 후 조심스럽게 뒤로 걸어 자리를 떠났다.

“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고서야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우리 신관복 안 벗는 거야?”

언제 온 건지 모를 핀체프가 한나에게 물었다.

그런 핀체프를 보며 냅다 성수 그릇에 담긴 물을 창밖으로 뿌렸다.

“너 진짜, 나한테 고마워해라.”

“휴.”

‘휴’는 무슨 놈에 ‘휴’야!

저가 무슨 사고를 친 줄 알고!

“넌 정말 끝나고 보자.”

정신 교육을 단단히 시켜야지.

아찔한 즉위식의 위기를 넘기고, 세자르의 즉위 연설이 시작됐다.

그답지 않은 진지한 모습에 한나는 긴 시간이었지만, 세자르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언제나 한량 같았던 그였는데.

막상 교황이 되어 제대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세자르만큼 저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신전의 창 너머로 들어오는 빛마저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긴 즉위식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 * *

즉위식이 끝난 후 누군가를 요절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눈치 빠른 미꾸라지 핀체프는 튀어 버렸고, 이상하게도 세자르와 함께였다.

그것도 꽤 늦은 밤에.

한나는 유피르의 심부름으로 대성전의 청소 마무리를 확인하러 왔고, 세자르는 낮보단 편해진 복장으로 그곳에 먼저 와 기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재미있었나?”

“뭐가요?”

“내 즉위식에서 장난친 거.”

“자, 장난이라뇨! 큰일날 소리를 하시네!”

“그럼, 사고?”

“사고죠!”

“사고는 쳤나 보네.”

……이런, 걸려들었다.

세자르의 능구렁이 같은 화법에 말려들고 말았다. 한나는 민망한 미소와 함께 청소 확인을 하는 척, 딴청을 피웠다.

“이리 와서 앉지.”

세자르는 그런 한나를 향해 손가락으로 제 기도 의자 옆자리를 두드렸다.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어 한나는 쪼르르 옆으로 가 앉았다.

“해도 졌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자리에 앉으며 한나가 물었다. 가까이 와서 보니, 세자르는 막 씻고 나온 것인지 아직 머리카락에 물기가 촉촉했다.

“생각이 많아서.”

“음. 머리가 복잡하실 만하죠. 오늘 정신 없으셨죠?”

“누구의 사고 덕분에 더.”

핀잔하는 듯했지만, 세자르의 입꼬리는 기분 좋게 올라가 있었다.

“그렇게 큰 사고까지는 아니지 않았나요?”

한나가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 뻔뻔한 미소에 세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고개를 따라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세자르가 자세를 고쳐 양손을 앞 의자 위로 올렸다.

그 순간, 한나의 눈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하얀 편지 봉투가 들어왔다.

“그건 뭐예요?”

한나의 물음에 세자르는 편지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교황 성하의 편지.”

“편지요? 전에 보낸 건가요?”

“내게 붙이지 못한 편지가 서랍에 들어 있었다는군. 늦게 전해졌지만.”

“그럼 아직 열어 보지 못한 거예요?”

그의 말에 한나는 놀라며 답했다.

“그렇지.”

아마 세자르는 오늘 자신이 교황으로 임명된 곳에서, 전대 교황 성하의 마지막 편지를 열어 볼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앗, 그럼 제가 비켜드릴게요.”

한나는 혹시 자신 때문에 열어 보지 못할까 봐 얼른 자리를 피해 주려 했다.

“그냥 있어.”

“하지만…….”

“차라리 그대가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혼자서는 용기가 안 났거든.”

“아…….”

그의 말에 들썩이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하긴, 혼자 보다가 슬퍼지면 어떡해.’

이 상황은 조금 어색했지만, 혹시 세자르가 편지를 읽다가 울기라도 하면 자기라도 달래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바로 읽으실 거예요?”

한나의 질문에 세자르는 조금 망설이는 듯 편지를 손가락 끝으로 뱅글뱅글 돌렸다. 그러다 세자르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래야지.”

생각이 끝난 듯, 세자르는 편지 봉투를 툭 뜯었다. 종이가 스치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편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편지를 읽기 시작한 세자르의 얼굴을 관찰했다.

“…….”

혹시 울컥해서 눈물 콧물이라도 쏟으면 어쩌나 싶어 제 호주머니의 손수건을 손으로 꽉 쥐고서.

하지만 세자르는 처음의 무표정을 고수하며 꿋꿋하게 편지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좌에서 우로, 또 한 칸 밑으로, 느리게 움직였다.

보통 업무 서류는 30초 컷으로 호로록 읽어 내려가던 세자르의 성격으로 봤을 때, 지금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눈에 새기듯 담고 있음이었다.

‘어떤 기분이려나.’

아마 자신이라면 밥 잘 챙겨 먹으라는 흔한 말에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을 것 같았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던 세자르의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걸쳐졌다.

그 모습을 본 한나는 조금 놀랐다.

‘……웃는구나.’

세자르가 편지를 보고 웃는다는 게 조금 이상하기도, 또 안심이 되기도 했다.

“좋은 내용인가 봐요.”

“뭐, 늘 하던 잔소리 같은 거.”

편지 내용을 되짚고 있었는지 세자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세자르 님도 잔소리를 들어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저도 궁금해요.”

한나는 세자르가 어떤 잔소리를 들었을지 궁금했다.

교황 성하께선 잔소리도 경건하게 하시려나.

“자유를 찾거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 보라는군.”

“뭐야. 그게 왜 잔소리예요. 맞는 말 하셨구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한나는 마음이 조금 아려 왔다.

어쩌면 교황 성하는 어린 시절부터 사막에 성력이 묶여 평생 제약을 받으며 살았던 세자르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평범한 삶을 응원하는 거겠지.

보통 세자르 정도의 신관이라면 그 성력을 이용해 신전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을 텐데도 ‘평범하게’ 살라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성하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한나 역시 세자르의 순탄한 삶을 응원하는 입장이었으니.

“아무래도 내가 교황이 되는 걸 바라지 않은 건 확실한 것 같네.”

세자르는 그 부분이 우스웠던지 피식 웃었다. 취임식은 이미 진즉 끝난 뒤에 편지를 읽게 된 건,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유피르는 이 편지가 불러올 파장을 예상했을 테고, 그래서 모든 일이 끝난 후에야 이것을 전한 것일 거라고.

하지만 한나는 그의 말을 듣고 곧장 반박했다.

“왜요? 교황이라고 결혼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는 더더욱! 교황은 직업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나요?”

일은 일이고, 사생활은 별개지!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가.”

“여태 연애도 안 하고 뭐하셨어요. 다른 신관님들은 연애도 잘만 하던데.”

한나의 말에 세자르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눈에 조금 어이없다는 기색이 스쳤다.

“사막에서 누구랑? 마물이랑?”

“아……. 그건 그렇네요.”

황당하다는 눈빛에 한나의 표정이 멍해졌다. 사막에서 연애라니, 멍청해도 너무 멍청한 발언이었다.

“그럼 이제라도 해 봐요.”

민망함을 뒤로 숨기며, 한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럴까?”

나긋한 목소리.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핀잔을 줄줄 알았던 세자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그에 한나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의 결심을 응원하기로 했다.

“그럼요! 제도에 멋있는 여성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여기 중앙 신전에 기도하러 오는 신도님들 중에도 좋은 분들이 많아요.”

“신도들?”

세자르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럼요. 저도 잘생긴 신도님들 보면 남편 후보로 점찍어 두고 그러거든요. 아, 이건 너무 불경한 발언이었나?”

한나는 힐끗, 주위를 살피고 여신상도 보았다.

혹시 신님이 그런 불손한 마음으로 신도들을 대한다고 벌주는 건 아니겠지.

“신관도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 않나요?”

한나는 괜히 세자르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밀며 웃었다.

세자르는 자신의 어깨에 솜털처럼 닿았다 떨어지는 한나의 손을 시선으로 좇으며 답했다.

“그렇지. 그래서, 괜찮은 신랑감은 찾았고?”

그렇게 묻는 그의 목소리가 은근했다.

“흠. 요즘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소홀했더니, 다들 장가 가 버린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흡사 안타까운 기색이 한나의 얼굴에 스쳤다.

그러자 세자르가 웃으며 답했다.

“새로 찾으면 되겠네.”

“오. 그것도 나쁘지 않죠. 세자르 님 옆에서 같이 물색할까요?”

한나의 눈이 반달처럼 접혀 들었다. 그녀는 내심 세자르가 슬프거나 우울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의 정신력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새삼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대견스럽게 세자르를 생각하던 그때, 그가 한나의 장난 같은 물음에 답했다.

“멀리서 찾을 것 뭐 있어.”

세자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

한나는 순간 주위를 두리번거릴 뻔했다. 하지만 세자르의 다음 말이 그녀의 고개가 촐랑거리며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

“교황 애인은 어때?”

“예에?”

한나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자르는 웃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이나 표정에 장난기는 엿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인지라…….

‘농담인가?’

한나는 그가 썰렁한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자답했다.

그래도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농담치고는 낯간지러웠던지라 한나는 괜히 제 분홍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장난치시는 거죠.”

그런 한나의 반응에 세자르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웃고는 이내 다시 눈을 떴다. 마치, 예상했던 그대로의 답을 들은 듯, 한나의 대답을 우스워하고 있었다.

“내가 장난이나 하는 사람인가.”

“사막에서 이상한 농담만 배워 오셨네.”

“농담 아닌데.”

세자르의 몸이 한나에게 조금 가까워졌다. 원래도 가까운 거리였지만, 이제는 완전히 작게 속삭여도 충분히 들릴 만한 거리였다.

“사막에 있는 내내, 그대 생각을 했다고 내가 말했던가.”

“예?”

한나의 눈이 커졌다.

깜박이는 눈꺼풀 아래로 금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보고 싶었어. 대화하고 싶었고,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지.”

“……그, 많이 외로우셨나 봐요.”

“보육원에서의 작별 인사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

한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조금 얼떨떨해졌다.

“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이상하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한나의 대답에 세자르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대가 다른 후보를 들일까 봐 걱정돼서.”

“네?”

설마, 신도들 중에 남편감을 물색하느니 하는 우스갯소리를…….

“평범한 삶, 평범한 연애라면 난 그대와 하고 싶은데.”

세자르의 손이 움직였다.

그러곤 여전히 분홍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한나의 손을 가볍게 이끌었다.

“난, 이런 마음인데.”

그의 시선이 탐색하듯 한나에게 닿았다.

“……갑자기요?”

“애절한 나의 6년이 그대에겐 갑자기라는 건 조금 슬픈데.”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 한나는 자신의 손이 그의 손에 꽉 잡혀 있다는 것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살아 돌아온다면 고백하고 싶었어.”

살아 돌아온다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말이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짠한 건 짠한 거고, 일단 이 상황이 상당히 껄끄럽고 당황스러우며, 아주 놀랍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저는…….”

말문이 막혔다. 그도 그럴 게, 사실 한나는 그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교황 성하와 비슷한 의미로.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의 마음을 몰라준 것은 미안하지만 지금은 이런 대답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느끼는 애정과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있지만, 그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쪽으론 생각도 해 보지 않았으니!

“그대가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건 예상했고.”

세자르의 낮은 웃음소리에 그나마 불편했던 한나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러니 앞으로 천천히 생각해 봐.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대가 원하는 이상형에 맞는지, 마음껏 재고 따져도 기껍게 받아들이지.”

“재고 따지다뇨.”

“그댄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진지한 눈빛이었다.

세자르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조금씩 움찔거리는 그의 손끝에서 미약한 긴장감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바람도 불지 않는 실내이건만, 이상하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 그대에게 내가 담을 수 있는 애정을 다 보일 테고, 그댄 그런 나를 마음껏 시험해도 좋아.”

세자르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여전히 당혹감에 물든 한나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세자르.

세자르에게도 이 순간이 준비된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오늘 교황의 편지를 읽고 비로소 깨달았다.

평범한 삶을 떠올리는 순간, 그 미래의 그림 속에 한나가 있음을.

확신이라는 건, 이리도 불현듯 찾아온다.

사막에서 혼자 그녀를 그리던 때에는 몰랐던, 손에 잡힐 것처럼 명확한 감정의 실마리.

얼기설기 얽힌 감정의 실타래가 한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다.

톡 건드리는 작은 자극에도 전체가 휘청거릴 만큼.

하지만 세자르의 실은 뭇 사람들의 실과는 달랐다.

6년 동안을 견고하게 짜낸 실인 만큼, 더욱더 단단하고 질길 수밖에.

‘사랑이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렇듯 갑작스럽게 고백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문득, 한나와 함께한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떠나보낸 교황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번 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상황과 기회가 겹쳐져 지펴진 불씨였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감정은 한 번 감추면 두 번, 세 번은 쉬워진다.

드러내지 못한 감정이 제 속에서 무덤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였다.

이 갑작스러운 고백은.

온 마음을 내어 주고도 보상받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묻혀 버리는 감정의 무덤보다는 나으니.

“내가 그대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세자르의 입술이 한나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한나는 멍하니 자신의 손과 은빛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방금, 고백을 받은 것 같은데.

“…….”

누구나 갑작스러운 고백을 받는다면 그럴 것이다.

한나는 지금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도대체 왜?

어째서? 갑자기?

아니, 갑자기가 아닌가?

자신이 놓친 것이 있던가?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놀리는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납득이 될 만한 어떤 것도 그려지는 게 없었다.

‘이 양반이 무슨 약을 먹었나.’

오히려 한나는 쑥스러운 탓에 세자르를 이상하게만 몰아가고 있었다. 의심이 가는 것이라곤 교황 성하의 편지에 무슨 이상한 말이 적혀 있었을까, 정도였다.

세자르의 입술이 손등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의 푸른 시선과 한나의 시선이 얽혔다. 고요한 대성전에는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부담스러울 테지.”

세자르가 한나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그에 한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마음을 제대로 알고 계시군요.”

홍조가 진 뺨, 조금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고백받는 건 떨리는 일이었다.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둘째치고 부끄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나는 애써 태연한 척 ‘흠흠.’ 마른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부담, 좋지.”

세자르는 그녀의 그런 감정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편하기만 한 사이는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

서로에게 서린 조금 어색한 기류가 그의 심장박동을 빠르게 부추겼다.

“비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대의 연민, 동정심, 부채감, 혹은 부담감까지 어떤 식으로든 난 그대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어.”

“네?”

“신경 쓰이게 하고 싶고.”

세자르는 여전히 한나의 손을 쥔 채,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거슬리고 싶고.”

한나는 그가 어떤 말을 하려는 건지 조금씩 가닥이 잡히고 있었다.

“자꾸 생각나게 만들고 싶어.”

한나의 아랫입술이 꾹 다물렸다.

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많은 감정의 통로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호의로 시작할 수도, 혹은 싸우다 정이 들 수도, 연민이나 동정으로 시작되는 관계도 있겠지.

하지만 어떻게 그 사람의 안에 들어차든, 결국은 그 길로 통하는 물꼬를 어떻게든 터야 한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

“이런 날에는 적어도 잠들기 전까지 날 생각하겠지.”

“……그렇겠죠.”

한나는 쉬이 그의 말에 긍정했다. 아마 며칠은, 이 대성전의 기억이 머릿속에 맴돌 것이다.

“그런 날을 하나둘, 혹은 계속 만들다 보면 결국 온통 나로 채워질 테고.”

“어……. 음.”

한나가 말을 더듬었다. 답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이젠 그대의 모든 날을 나로 가득 채우고 싶어.”

흠흠, 이번에는 헛기침이 나왔다. 아마 얼굴은 귀까지 붉게 물들어 있을 터였다.

의외로 세자르는 이성에게 직진하는 타입이었구나.

“그러니 천천히 잘 생각해 봐. 교황 애인은 어떤지.”

세자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한나는 그런 그를 보다 괜히 시선을 돌렸다. 더 바라보고 있다간, 그가 제 눈을 통해 마음에 서린 온갖 감정들을 읽어 낼까 봐서였다.

이상하게 시각도, 청각도, 촉각도 예민해졌다.

작은 기침 소리, 손부채질 소리, 의자에 스치는 옷자락 소리까지, 모두 크게 느껴졌다.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리는 건 아닌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의 질감까지 기억될 것 같은 밤이었다.

‘정말, 갑자기 이렇게 사람을 어색하게 만들다니!’

한나는 괜히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세자르가 이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는 자신과 달리 숨기고 싶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그는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나가 했던 우려처럼 그는 눈동자를 통해 속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 같잖아.’

의심할 여지 없이 애정이 가득 담긴, 긴장감이 서린, 혹은 옅게 피어 있는 열망까지.

세자르의 이런 얼굴을 보는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새삼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던 사람의 민낯에 애정이 깃들면, 파급력이 크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이곳, 이 순간, 이 얼굴은 영영 잊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두리번, 두리번.

한나는 복도의 왼쪽, 오른쪽을 살피며 낮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고백도 받아 본 놈이 받는다고, 무슨 죄라도 진 것 같잖아.”

한나는 모처럼 열린 회의 때문에 아침부터 회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피하는 것처럼 한나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흐지부지 돌아갔다지만, 오늘은 또 무슨 얼굴로 본담.”

다시 생각하고, 곱씹을수록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어색한 존재는 피한다고 피해질 수가 없는 상대였다.

“좋은 아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순간 한나는 생각했다.

‘이래서 사내연애나 직장 내 썸은 안 된다는 거였어.’

회의실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인물은 바로 세자르였다.

“조, 좋은 아침이에요. 교황 성하.”

그것도 직장 상사!

이보다 껄끄러운 관계가 없었다.

역시, 세자르와의 연애는 빨리 단념하는 게 낫겠다.

혹여 어쩌다 연애로 발전한다고 해도, 헤어지면 그 후는 어찌한단 말인가.

“앉지.”

세자르는 가장 상석에 앉은 채로 한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여기서 다행인 것은, 한나는 대신관도 아닌 일반 신관이었기에 세자르와는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주섬주섬 멀리, 최대한 먼 곳에 떨어진 자리의 의자를 빼냈다.

끼긱―

아직 신관들이 오지 않아 고요한 회의실에 의자 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울렸다. 그와 함께 있자니,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다 신경이 쓰였다.

“…….”

고작 의자 꺼내는 것도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데, 앞으로 신전 생활이 까마득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겨우 어떻게 자리에 앉자, 이번엔 얼굴이 따가웠다.

‘기분 탓이다. 기분 탓.’

그렇게 스스로를 마인드컨트롤한 한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회의 준비에 집중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눈동자가 눈치 파악을 못 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

결국, 힐끔 세자르의 자리로 눈길이 향했다.

‘헉!’

정말 딱 1초만 보고 말자는 생각은 그의 푸른 눈과 마주하는 순간 와장창 깨져 버렸다.

“…….”

세자르는 한나가 회의실로 들어선 그 순간부터 쭉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에 한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며 말했다.

“흠, 부담스럽네요.”

그만 좀 쳐다보라는 말이었다.

“부담 가지라고 그러는 건데.”

아니, 이 사람이? 그걸 또 사실대로 말하다니.

한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세자르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긴장 풀어, 내가 그댈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도 늘, 나른한 목소리였건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가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겨우 사랑 고백 좀 한 건데.”

“왁!”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휙, 휙 둘러보았다.

혹시 누가 들어오다 들은 건 아닌지 심장이 쿵덕거렸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한나가 한숨을 내쉬며 세자르를 뾰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교황 성하, 말을 좀 조심하시는 게 어떨까요.”

“왜?”

세자르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기분 탓일까, 왜인지 그의 얼굴이 해맑아 보였다.

“그렇게 막, 공개적으로 티를 내시면 제 혼삿길이 막힐지도 모르지 않나요.”

그리고 그 모습이 묘하게 한나의 신경을 긁는 바람에 목소리도 뾰족하게 나갔다.

“그럼 나는 좋은 거 아닌가?”

“와. 그건 비겁한 거죠.”

“음, 내가 원래 막 그렇게 정정당당한 성격은 아니야.”

“하……?”

갑자기 어이가 없어진 한나는, 방금까지 그와 아주 어색했다는 것도 다 잊어버렸다.

“짝사랑의 미덕 모르세요?”

“그건 또 뭔데.”

“막, 응? 저기 기둥 뒤에서 몰래 보면서 가슴 졸이고, 몰래 흠모하고, 막 그런 거 책에서 못 보셨어요?”

이제는 평소처럼 그와 거침없이 대화하고 있었다.

“내가 성서가 아니면 보질 않아서.”

한나가 질색하는 얼굴로 답했다.

“와……. 독서 취향 편협한 것 좀 봐.”

“그대가 읽어 주면 들을 요량은 있는데.”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교황님, 제발 남들 앞에서도 이러진 마세요.”

“그대가 원한다면.”

세자르는 순순히 한나의 요구에 응했다. 사실 그도 남들 앞에서 한나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냥, 한나의 긴장을 덜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긴장하고, 눈치 보면 오히려 그대가 나보다 먼저 들킬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뒤따르자 한나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나로서는 그것도 좋지만, 그댄 아니잖아?”

세자르의 그 말을 끝으로 한나에게서 나오는 반박은 없었다. 얄밉게도 그의 말이 맞기 때문이었다.

순간 한나는 어제의 그 진지하고 아련하던 세자르의 모습이 다 연기였나 의심했던 감정이 스르륵 사라졌다.

어쩌면 세자르는 자신의 어색한 행동을 걱정해서 일부러 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새삼 그가 달리 보였다.

고백 후에도 쿨해 보이는 모습이 어딘지 어른스러운 기운을 풍기기까지.

하여튼 자신과는 다른 그릇을 가진 인간임은 틀림이 없었다.

‘신기한 사람.’

세자르가 의도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나는 회의실에 들어설 때보단 훨씬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침 다른 신관들이 속속들이 회의실에 도착했다.

“일찍 와 계셨군요. 교황 성하.”

대신관 한 명이 일찍이 자리하고 있는 세자르를 발견하고 물었다.

“설레서 잠이 오질 않아 일찍부터 움직였지.”

“하긴, 오늘이 교황으로서의 첫 회의지요?”

“뭐……. 그렇지.”

세자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말을 들은 신관들은 그가 순전히 취임한 후 첫 회의의 설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나는 여전히 자신에게 못 박힌 그의 시선 때문에 그의 발언을 조금 달리 받아들이게 되었다.

“얼른 보고 싶기도 하고.”

뭐가, 보고 싶었다는 걸까.

다시 한나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이것 봐. 사내 썸은 위험하다니까!’

마치 비밀스러운 암호를 전하는 것처럼,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자꾸 맞춰 오는 시선은 정말로 난감했다.

이윽고 얼굴까지 달아오르려 하자 한나는 얼른 손으로 뺨을 가렸다. 이러다 정말, 세자르보다 자신이 먼저 들킬 판이었다.

한나는 뭐든 숨기는 것은 형편없었다.

* * *

한나는 오랜만에 신전 정원의 평상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모처럼 열심히 성수를 만드느라 밤을 꼬박 새운 탓이었다.

요 근래 자주 실패하던 성수가 어쩐 일인지 잘 만들어진 탓에 무리를 해 버렸다.

“으음…….”

딱딱한 평상에 옆으로 오래 누워 있었더니 어깨가 아파 몸을 뒤척였다.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했다. 살짝 거슬리는 추위에 눈이 뜨일 랑 말 랑, 하던 와중에 갑자기 온기가 느껴졌다.

“음…….”

몸 위에 무언가 얹어져 추위가 물러갔다. 아늑한 느낌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한나는 계속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내 머리카락이 간질이는 느낌을 받았다. 한나는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웅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간지러워. 제레미…….”

그녀는 무의식중에 손길의 주인공이 제레미라고 생각을 했다. 자신이 이렇게 뻗어 있을 때 나타나 머리카락을 괴롭히던 사람은 제레미밖에 없었으니.

말을 뱉은 순간 이마에 스치던 손이 뚝 멈췄다.

순간 한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레미가 신전에 왔다고?’

갑자기 잠이 달아났다. 한나는 제레미를 만나면 요즘 뭐하고 다니는지 꼭 물어볼 생각이었다.

“제레미!”

번뜩 눈을 뜨고 제레미의 이름을 외쳤다.

“어……?”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그녀가 예상했던 제레미가 아니었다.

“그 녀석은 왜 찾아?”

세자르가 평상의 기둥에 몸을 기댄 채 한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자르 님이셨어요?”

어딘지 김빠진 한나의 목소리.

“평소에 그 녀석이 자주 머리를 만졌나 봐.”

세자르는 조금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가끔요. 신전에 제 머리 만질 사람이 달리 없어서 제레미인 줄 알았어요.”

“돈독한 사이인가 보네.”

“어디 돈독하기만 하겠어요. 아, 이 녀석 요즘 뭐하고 다니는지 궁금해서 눈 떴더니.”

그런 제레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흘러나오는 음성에 서운한 느낌이 역력했다. 한나의 말이 왠지 제레미가 아니라 자신이라서 김빠졌다는 이야기로 들려 세자르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내가 그대에게 고백한 사람이라는 거 벌써 잊은 건 아니지?”

“예?”

그가 갑자기 또 고백 이야기를 하는 통에 한나는 놀랐다. 잠기운이 가시자 그제야 어색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다른 남자 얘기라니. 그러면 내가 상처받잖아.”

말과 달리 세자르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표면적일 뿐이라 해도 일단은 말이다.

“다른 남자……. 아니, 참 나.”

황당하다는 듯한 그의 반응에 한나는 어이가 없었다.

일단 자신이 고백한 입장이라는 걸 저렇게 당당하게 떠드는 것부터, 제레미를 연적처럼 대하는 태도까지 하나하나 다 지적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레미를 그런 식으로 매도하면 안 되죠.”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매도라니.”

발끈한 한나의 태도에 세자르가 옅게 웃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세자르 님처럼 불순한 생각으로 살진 않는다고요.”

“내 생각을 다 아는 듯이 얘기하는군.”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왠지 서늘한 그의 얼굴에 조금 당황한 한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한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르가 말을 이었다.

“아냐. 그대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

“예?”

“불순한 생각, 많이 가지고 있지.”

세자르의 입꼬리가 진하게 올라갔다.

“궁금해?”

작은 목소리로 건네 오는 물음에 한나의 적색 레이더가 발동했다.

“아, 아뇨!”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제는 세자르가 무슨 말을 하는 자체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입 한번 열면, 고백에 놀림에 한나를 당황시키는 일투성이였다.

“아쉽네. 난 그대와 하고 싶은 불순한 것들이 많은데.”

“…….”

한나는 완전 넋이 나가 버렸다. 이 사람, 진짜로 자신이 알던 그 세자르가 맞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도대체 왜 얘기가 이렇게 튄 거죠. 당황스럽게 하시네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이름 하나 잘못 불렀다가 불순한 대화를 하고 있다니.

“그러니까 질투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세자르는 한나의 불만스러운 눈길마저 사랑스럽게 받아들이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살랑살랑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갔다.

“난 질투심이 많거든.”

일단 한나는 따뜻한 손이 머리를 간질이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여기서 명확하게 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저희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요. 질투도 자격이 있어야 하는 거죠.”

한나의 일침에 세자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세자르는 이런 한나의 반응이 그리 나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좋지 않은 흐름은, 한나가 자신의 고백을 회피하려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호조였다.

“그러니, 어서 그 자격 나한테 달라고 사정하려는 거야.”

“예?”

“오늘 시간 어때. 적어도 매력 어필 기회는 줘야지.”

한나는 그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데이트 요청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자르와 더 붙어 있는 건 심장 건강에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세자르를 마주했을 때부터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뭐, 여러 가지 이유에서 말이다.

“저는 오늘 그, 음……. 바쁜 일이 있어요.”

“뭔데?”

이것 참.

교황인 세자르에게 신전 일을 핑계로 댈 수도 없고, 난감했다.

“그……. 뭐, 좀 따러 가요.”

대충 둘러댄다는 게, 말이 이상하게 나와 버렸다.

‘따긴 뭘 따! 그냥 약속이나 있다고 했어야 했는데. 설마 뭘 따냐고 묻진 않겠지? 묻지 마라. 묻지 마.’

하지만 한나의 애타는 염원과는 달리, 세자르는 우려했던 질문을 했다.

“뭘 따러 가는데?”

세자르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나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자신이 뱉은 말을 수습하기 위해 핑곗거리를 찾았다.

따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사과, 복숭아, 배…….

“그……. 사과요.”

아무리 그래도 변명에는 성의가 있어야 했기에, 그나마 중앙 신전 근처에 있는 과일 나무를 떠올리고 세자르에게 답했다.

“그걸 왜?”

“먹으려고요.”

거짓말을 하다 보면 스스로도 속이게 되고 그러는 경우가 있다더니.

한나는 말을 하고 나니 정말 사과가 먹고 싶어졌다. 일단, 자느라 놓친 끼니 때문에 허기가 지기도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뭘 따러 간다는 말은, 사과가 먹고 싶은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게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정신승리, 그런 건가.

“잘됐군.”

“뭐가요?”

잘됐다는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도 꼭 한번 사과를 따 보고 싶었거든.”

“……거짓말.”

저건 분명 거짓말이라고 한나는 확신했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그 나무, 본 적은 있으세요?”

세자르가 사막으로 가기 전엔 없었던 나무일 텐데.

“음. 본 것 같은데.”

“며칠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사과나무 구경이나 했다고요?”

“꼭 그 사과나무라고는 안 했어.”

“아.”

아무 사과나무에서든 사과를 따 보고 싶으셨구나?

그것도 하필 지금 말이다.

한나는 더 말해 봐야 세자르를 말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지.’

실수했다. 이런 쌀쌀한 날씨에 굳이 힘들게 노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슬쩍 식당으로 가서 남이 따 놓은 사과나 먹으면 참 좋겠는데.

한나는 슬그머니 세자르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 와서 슬쩍 말을 바꾸면, 체면이 많이 상하려나.

일단 거짓말을 했다는 게 들켜서 망신당하는 건 그렇다 쳐도, 세자르가 상처받을지도 몰랐다.

‘역시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해.’

어쩔 수 없다.

자기가 벌인 일은 자기가 책임져야지.

“가죠.”

한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자르는 조금 놀라 한나를 올려다보았다. 한나가 정말로 사과를 따러 가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기색으로.

“사과, 따러 갑니다. 심심하면 따라오시든지요.”

결연한 눈빛으로 한나가 말했다.

세자르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야 했다. 한나가 자신을 따돌리려 아무 변명이나 한 것은, 한 마디 던질 때마다 흔들리던 한나의 눈동자를 통해 이미 진작에 눈치챘던 그였다.

한나는 꽤, 생각하는 바가 얼굴에 잘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잠시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결국 사과를 따러 가기로 결론이 난 모양이라고 세자르는 생각했다.

“따라가야지.”

하지만 그런 거짓말도 귀여우니, 정말 콩깍지가 제대로 쓰인 것이 분명했다. 세자르는 이리도 재미있는 한나와의 시간이 연장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옷 단단히 여미시고요.”

한나의 자신의 몸 위에 얹어져 있던 세자르의 신관복 망토를 착잡한 심정으로 돌려주었다.

“아주 추울 거예요. 저기, 사과나무가 있는 동산이 그렇게 춥거든요.”

가기 싫다고 지금이라도 말했으면.

“내가 또 추위에 강한 편이라.”

“…….”

한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괜히 세자르가 미웠다.

“사과를 많이 좋아하나 봐.”

“…….”

“이렇게 추운데 굳. 이. 그걸 직접 따러 가다니. 사과 사랑이 감동스러울 지경이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한나도 세자르가 자신을 놀리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이쯤 되자 오기가 생겼다.

“어차피 따라오실 거면, 바구니 큰 거나 하나 준비하시죠.”

“바구니?”

“네. 사람이 둘인데, 신전 사람들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따야죠.”

그러게 말하며 한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소중한 낮잠 시간을 포기하고 향하는 노동의 길.

이왕 가는 거 제대로 해야지.

“뭐해요? 서둘러요. 해지겠다.”

한나는 찌뿌둥한 팔을 휘휘 돌리며 사과나무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한나의 뒷모습을 보며 세자르 역시 몸을 일으켰다. 빠르게 나아가는 한나의 모습에 세자르는 즐겁게 걸음을 뗐다.

“귀엽다니까.”

어쩜 하는 행동이 다 귀엽게만 보이는지,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 *

고생은 사서 하는 거라더니.

“빨리빨리 움직이지.”

제 몸만 한 바구니를 옮기며 세자르가 한나를 재촉했다.

“아직도 반을 못 채웠어.”

벌써 몇 시간째, 두 사람은 정말로 사과를 수확하고 있었다.

세자르는 의욕적인 한나의 옆에서 그녀가 요구한 바구니를 들고 쫓아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거지.’

이제는 한나도 자신이 왜 농부의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변명이 거짓말을 부르고, 거짓말이 일을 키웠다.

원래라면 지금쯤 신나게 낮잠을 자고 있어야 했는데.

“아니, 근데 세자르 님은 도와주러 오셔서 왜 구경만 해요?”

한나는 바구니를 끌고 다니며 자신을 보채는 세자르가 얄미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이 사단이 일어난 원흉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높은 곳은 무서워서.”

그의 말에 한나는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개뻥치시네.

“읏…….”

한나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사과를 따고 있었는데,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사과 때문에 발꿈치를 들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아, 안 닿네. 의자 좀 단단히 잡아 봐요.”

어차피 사과 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면, 보조 역할이라도 톡톡히 하길 바라며 세자르에게 말했다.

세자르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의자를 잡았다.

“아, 저건 진짜 알이 굵고 잘 익었는데.”

간당간당, 손가락 끝이 자꾸 사과를 스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세자르는 어째 위험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오.”

오기가 발동한 한나가 의자에서 점프를 했다.

“오! 잡았……! 으악!”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세자르의 우려처럼 한나의 몸이 기울었다. 그녀의 몸이 쓰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사과를 놓치지 않긴 했지만, 대신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나뭇잎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한나도 함께 떨어졌다.

“윽.”

“아.”

인간의 생존 본능은 정말 위대했다. 한나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자신이 다치지 않을 자리를 귀신같이 골라냈다.

바로, 세자르를 인간 쿠션으로 만든 것이었다.

“아고고……. 괜찮아요?”

“……괜찮을 것 같아?”

의자를 잡고 있다가 화를 당한 세자르는 풀밭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심지어 쓰러진 그의 몸은 한나의 몸이 꽉 누르고 있었다.

“다친 거예요?”

한나가 놀라 물었다.

“갈비뼈가 나간 것 같은데.”

“헉! 그럼 어떡해요. 잠깐 기다려 봐요.”

여전히 세자르의 몸 위에 기대 있던 한나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로 자신 때문에 교황 성하 갈비뼈에 금이라도 갔다간, 무슨 징계를 당할지 몰랐다.

한나는 얼른 세자르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오히려 그 행동을 막은 것은 세자르였다. 그의 손이 한나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왜요? 제가 움직이니까 더 아파요?”

한나는 정말 뼈에 큰일이 생긴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걱정이 한가득 서렸다.

걱정스러운 한나와, 아예 풀밭에 벌러덩 누워 있던 세자르의 푸른 시선이 얽혀 들었다.

두근두근, 미약하게 심장이 뛰었다. 이게 걱정스러워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한나는 그것을 생각하다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

“넘어진 김에 조금 쉬지.”

세자르가 씩, 웃으며 곱게 눈을 접었다. 그제야 한나는 세자르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갈비, 멀쩡하세요?”

그래도 정말 아픈 게 아닌지 재차 확인을 해야 했다.

“아주 멀쩡해.”

그 말에 한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손은 좀 놔요. 무거우실 텐데.”

아직도 세자르의 배 위에 앉은 상태였기 때문에, 한나는 어색하게 기침을 하며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자르가 손을 풀었다.

“하, 진짜로 놀랐잖아요.”

여전히 누워 있는 세자르의 옆에 털썩 앉은 한나는 세자르가 자신을 놀린 것을 타박했다.

“나도 놀랐어.”

뭐, 따지고 보자면 넘어진 자신에게 습격(?)을 당한 세자르가 더 놀랄 상황은 맞았다.

한나의 시선이 반쯤 담긴 사과 바구니로 향했다.

“에휴, 저만큼 채웠으면 됐지. 그냥 좀 쉬죠.”

한나는 방금 목숨을 걸고 따낸 사과를 제 신관복에 슥슥 문질렀다. 그러곤 세자르에게 물었다.

“한입 드실래요?”

세자르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거절에 한나는 사과를 저가 베어 물었다. 아삭, 소리와 함께 달달한 과육이 입안에 가득 들어찼다.

“음. 맛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값진 노동 후의 새참은 참으로 꿀맛이었다.

“그래도 제법 많이 수확했네요.”

붉은 사과가 가득하던 나무가 조금 휑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이 들고 온 바구니가 워낙 커서 반만 채워도 사과나무를 어지간히 털 수 있었다.

“누구누구가 같이 좀 땄으면, 이미 가득 채웠겠지만.”

한나의 은근한 타박에 세자르가 조금 웃었다. 그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세자르는 여전히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한나는 세자르를 보며, 이상하게 풀밭에 누워 있는 게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싶었다.

“덕분에 신전 저녁 메뉴에 사과가 나오겠군.”

“네. 저처럼 신전에 헌신하는 신관도 없으니, 월급이나 올려 주세요.”

물론 그냥 하는 소리였다.

“직권남용인데.”

“엄한 데 남용할 거면 제 월급에 남용해요.”

아삭, 아삭.

한나는 여전히 사과를 야금야금 베어먹으며 답했다. 사실 이제 여기에서 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허기나 채우자는 심정이었다.

“안 그래도 황궁 출장이니 할 일도 많은데.”

“황궁?”

멍하니 하늘을 보던 세자르의 시선이 한나에게 닿았다. 쪼그리고 앉아 사과를 베어 먹는 귀여운 모습에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아. 네. 말 안 했던가요? 곧 다시 황궁으로 가야 해요.”

한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에 세자르는 언뜻 듣고 넘겼던 황궁에 파견된 신관들에 대한 얘기를 떠올렸다.

“다 복귀하지 않았나?”

“네. 전 아니에요. 뭐……. 조금 깊은 사연이 있기도 하고.”

그놈의 애물단지 광산이 생각나 한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를 보내지.”

세자르가 말했다.

“음? 네? 아뇨. 저 밖에 못 가요.”

“왜지.”

세자르의 물음에 한나는 ‘음…….’ 소리와 함께 잠시 고민했다.

황궁 일을 다 말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내 대상이 세자르라면 상관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안의 병이 6년간 심해진 모양이에요. 제가 아니면 황궁의도 몸에 손을 못 대니, 당분간이라도 제가 황궁에 있어야 해요.”

“이안…….”

세자르는 장례식에서 마주했던 이안을 떠올렸다.

여전히 찬 기운을 풍기던 꼬맹이.

이제는 꼬맹이라고 칭하기도 무안할 지경이었지만, 어쨌거나 세자르의 입장에선 보육원 아이들은 어릴 적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대에겐 괜찮은 모양이지?”

세자르의 질문에 한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행히도 제가 닿는 건 괜찮더라고요.”

한나는 거의 다 베어먹은 사과의 남은 부분이 없는지 살피며 답했다.

“그대가 그 녀석에게 특별한 존재인 모양이네.”

세자르가 몸을 일으켰다.

“특별? 음. 아무래도 어릴 적을 함께 보냈으니까요?”

한나가 세자르를 돌아보았고, 세자르는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로 한나를 빤히 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사과 과즙으로 인해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 같은데.”

그는 미약한 적대감이 서려 있던 이안의 눈빛을 기억했다.

“음?”

한나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세자르가 손을 뻗었다.

“어…….”

그의 손이 한나의 입술로 느릿하게 향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반들거리는 사과 과즙을 슥, 훑어 냈다.

한나는 여전히 손에 남은 사과를 든 채, 멍하니 지금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왜, 이 사람이 내 입술을 만지고 있는 거지.’

이건 누가 보나 이상한 기류였다.

세자르는 당황한 한나의 모습을 보면서도 개의치 않고 입술을 가로로 훑은 뒤, 손가락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뭐, 뭐……. 무슨.”

한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사람, 방금 뭐한 거야?

“사과가 맛있어 보여서.”

세자르가 싱긋 웃었고, 한나는 말문이 막혔다.

사과가 맛있어 보이면 저기 굴러다니는 사과 하나 집어 먹으면 될 것을! 왜 엄한 사람 입술을 훑는 건지!

머리끝까지 뜨거워진 느낌.

한나는 다 먹어 버린 사과의 씨앗을 풀밭으로 휙 하고 던진 뒤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했다.

“황궁엔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른한 목소리가 듣기 좋게 바람을 타고 흘러들었다.

“어떻게 매정하게 그러겠어요.”

“아무래도 그대 주위엔 어린 승냥이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람.”

아주, 제멋대로 고백하고, 놀리고, 남의 입술이나 만지는 세자르에게 단단히 뿔이 난 한나는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니, 저 꼬맹이가 나를 서슬 퍼런 눈으로 보고 있겠지.”

그제야 한나는 세자르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조금 비껴 있음을 눈치챘다. 한나의 고개가 그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제레미?”

언제 왔는지 모를 제레미가 그곳에 서서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나가 제레미를 본 순간 든 감정은 걱정이었다. 언제가 제레미가 말했던 것처럼, 그가 소식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날이면 심장이 철렁이며 걱정부터 들었다.

또 어딘가를 다친 건 아닐지.

한나는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리, 우두커니 서 있는 제레미에게 향했다. 그녀의 몸이 일으켜지고, 분홍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세자르의 입에서 낮은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것 보라니까. 괜한 질투가 아니라니까.”

시선으로 사람을 찌를 수 있다면, 꼭 저런 눈빛일까.

세자르는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제레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꼬맹이들은 저가 없는 사이, 어른이 됐음이 분명했다.

* * *

“제레미! 무슨 일이야? 어디 다쳤어?”

한나는 제레미에게 달려가 곧장 그에게 몸의 안위를 물었다.

여전히 세자르에게 꽂혀 있던 제레미의 날 선 시선이 조금 누그러지며, 한나에게 향했다.

“또 이상한 일 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한나는 괜히 제레미의 팔을 들추고, 몸을 좌우로 살피며 호들갑을 떨었다.

“대신관님과 사이가 돈독해 보이네요.”

제레미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한나에게 향했다. 그는 아직 세자르가 교황이 됐다는 것이 익숙지 않아 저도 모르게 대신관이라 칭했다.

“응? 아……. 어, 그게 아니라.”

한나는 방금 그 낯간지러워 보이는 상황을 제레미에게 들켰다는 것이 몹시 창피했다.

하필 와도 그때 올 건 뭐람!

“사과 먹다가 뭐가 좀 묻어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위 유무보다 한나는 자신이 왜 제레미에게 변명을 하고 있는지가 더 신경이 쓰였다.

왜 부끄럽고 난리냐고. 죄지은 사람도 아니고.

제레미는 이 말을 믿는 건지 아닌 건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무거운 입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래서, 넌 어떻게 온 거야?”

한나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가시방석에서 얼른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다.

“선생님이 잘 있는지, 궁금해서요.”

제레미의 말에 한나는 마음을 쓸어내렸다. 적어도 나쁜 소식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바람 분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

한나는 제레미의 팔을 잡고 신전으로 향하려다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반쯤 누워 있는 세자르와 눈이 마주쳤다.

이것참.

저 양반만 두고 갈 수도 없고.

한나는 이 불편한 상황에 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제레미.”

그래서 제레미를 불러 말했다.

“네.”

“가서 세자르 님이랑 사과 바구니 좀 같이 들고 와.”

한나의 말에 제레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물론, 사과 바구니 때문이 아니라 ‘세자르와’라는 부분이 몹시 거슬렸던 것이다.

한나는 불편한 건 불편한 거고, 기껏 애써서 딴 사과를 두고 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저 비리비리해 보이는 세자르에게 바구니를 다 맡길 수도 없지 않은가.

“가자. 출발.”

제레미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꽤나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흐음.”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 자리는 아주 숨 막히는 자리였다.

“두 사람, 싸웠어요?”

한나와 세자르, 제레미는 둥근 원형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하필 마주한 제레미와 세자르의 시선에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그건 눈치 꽝인 한나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나가는 신관들이 모두 이 식탁을 힐끗힐끗 곁눈질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싸움이 될 만한 레벨은 아니지.”

먼저 입을 연 것은 세자르였다.

그의 눈에 마치, 제레미를 하룻강아지 대하듯 가소롭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야.”

띠링. 세자르가 도발 스킬 lv1을 시전하였습니다.

그 시절, 두 사람은 꾸준히 투닥거렸었다.

그런데 지금도 딱 그 꼴이라니.

한나는 정말 변함없는 두 사람의 관계에 혀를 내둘렀다. 세자르의 말을 들은 제레미의 한쪽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사막에서 짐승들과 구르다 보니 감을 많이 잃으셨나 보네.”

띠링. 제레미가 도발 스킬 lv2를 시전하였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기 많이 힘들겠어요. 워낙 도태된 타입이라.”

제레미는 건방진 눈빛으로 그에게 답했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에요.”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말싸움에서 세자르가 제레미를 이긴 전적은 거의 없었다.

한나는 오늘도 이렇게 맥없이 끝나겠구나, 예상했다.

“짐승이라니, 말은 바로 해야지. 마물을 소탕한 거지. 목숨을 걸고. 너희 같은 풋내기들이 제도에서 안락하게 지낼 수 있도록.”

오!

한나는 조금 놀랐다.

세자르의 언변이 사막에서 일취월장해서 돌아온 게 아닌가?

“그래서, 기사 학교는 졸업이나 했나?”

세자르는 아직 기사 학교나 다니는 풋내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기사 학교 얘기를 꺼냈지만, 그와 동시에 한나는 깜짝 놀랐다.

“그, 세……. 아니, 교황님. 그 얘기는 다음에 하심이…….”

괜히 이러다 제레미가 암흑 길드 수장이라는 게 다 드러나게 생겼다.

제레미는 당황한 한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세자르를 피해 밀담을 나누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제레미의 이름을 불렀다.

“제레미!”

하필, 이 순간에 모이세이와 커티스가 식당에 등장한 것이 아닌가.

드디어, 제레미의 정체가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날이 온 것인가.

한나는 순간 아찔했다.

“몰라볼 거라던 말이 정말입니다.”

모이세이가 한나에게 말했다. 그는 교황의 장례식에 왔었던 제레미와 마주치지 못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날은 바쁘기도 했으니.

“……하하, 그렇죠?”

한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제레미, 잘 지낸 거야? 그새 나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은데?”

모이세이는 앉아 있어도 압도적으로 훤칠한 신장이 티가 나는 제레미를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

“몸도 좋은 게, 훈련을 성실하게 한 모양이네.”

모이세이가 뿌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고, 한나는 정말 눈물을 머금을 상황이었다.

그거, 기사 훈련으로 좋아진 몸 아니에요.

“오랜만입니다.”

한나가 상황을 회피하는 사이, 제레미가 웃으며 모이세이에게 답했다.

커티스에게도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기사 서임은 아직인가? 이미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무인들끼리 서로를 가늠하는 센서가 따로 있는 것일까, 모이세이는 단박에 제레미가 보통 실력의 검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듯 말했다.

“아마 기사가 되는 건 어렵지 싶은데요.”

제레미가 옅은 웃음과 함께 답했다.

“음? 왜지?”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준수한 얼굴이면 얼굴마담으로라도 차출해 갈 텐데.”

커티스가 거들었다.

그들은 식탁의 남은 자리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 순간 커티스의 식판에 담긴 사과가 보였다.

‘내 피와 땀…….’

한나가 사과에 잠시 정신이 팔린 동안 제레미는 모이세이와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기사는 제 적성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런…….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모이세이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서렸지만, 이내 그는 제레미의 팔을 팡팡 두드리며 긍정적으로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그 하고 싶은 일이 나쁜 짓이만요.

그 사이에서 한나만이 차마 대답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꾹꾹 삼켰다.

“식사들 하지.”

세자르가 커티스와 모이세이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식사를 시작했고, 모이세이는 제레미에게 언제 한번 대련이나 하자며 도란도란 대화를 이어 갔다.

덕분에 분위기가 좋아졌다.

“그 사과는 우리가 힘들게 수확해 온 거니, 맛있게들 먹으라고.”

세자르의 말에 커티스와 모이세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성하께서요?”

“왜 사과를 따셨습니까?”

그들은 세자르에게 질문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한나는 자신이 답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았다.

“사과를 아주 좋아하는 누구 덕에.”

세자르와 한나, 둘만의 시선이 오갔다. 순간 커티스와 모이세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물론, 이 상황이 아주 껄끄러운 이도 있었다.

“식사나 하시죠.”

제레미의 칼 같은 말에 식사는 재개되었다. 한나는 그제야 겨우 시름을 털어 내고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사과는 먹지 않았다.

* * *

식사가 끝나고, 한나는 제레미와 산책을 하기로 했다.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제레미의 물음은 사실, 너무도 답이 명확했다.

“우리가 원래도 친하긴 했지 않아?”

“6년이면 어색해질 수도 있는 시간이니까.”

제레미는 먼저 걷는 한나의 뒤를 천천히 뒤따르고 있었다.

“어색하긴 하지. 특히 요즘은…….”

고백 사건 이후로는 말이다.

“뭐, 그런 건 됐고.”

열심히 걷던 한나가 발걸음을 멈추고 제레미를 돌아보았다.

“나 너한테 물을 게 있었는데.”

사실 이 질문은 그동안 한나가 제레미의 소식을 내내 궁금해했던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에게 물을 것이 있었다.

“뭔가요.”

제레미는 자신에게 향하는 관심에 기꺼운 마음으로 답을 해 줄 생각이었다.

“요 근래, 뭐하고 있었어?”

묻는 한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게, 이 질문이 쉽게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바쁜 날들에도 아주 깊이 오래 생각하고 망설였던 질문이었다.

바로, 교황 성하의 죽음과 제레미의 상관관계가 일말도 없다는 확답을 얻어내고 싶어서였다.

‘미안하지만, 제레미, 난 누구라도 상관없지만, 그게 너희들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싶은 거야.’

자신의 이런 의심이 제레미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미 진즉 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안과 마샤, 제레미에게 티끌 같은 의심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듯 껄끄러울 수 있는 질문을 굳이 한 것이었다.

“무슨 뜻일까요.”

제레미의 목소리가 조금 낮게 울렸다.

한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지만, 손가락 끝은 신관복의 소매를 자꾸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 한나의 상태를 전반적으로 확인한 제레미의 올곧던 시선이 아래로…….

아래로, 이내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그러니까…….”

한나는 제레미의 그런 모습에 괜히 심장 한편이 찌르르 울렸다.

자기가 상처를 준 것 같아서.

“그냥 모두에게 물으려던 질문이야. 그냥 너 말고도…….”

“저에게 교황의 죽음과 연관이 있느냐고, 묻고 싶은 거예요?”

평소 자신에게 향하던 말의 온도보다 조금 냉랭한 목소리에 한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제레미의 검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 그의 눈을 가렸다. 한나는 제레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드러나지 않으니 더 답답해졌다.

‘내가 실수한 건가.’

한나는 자신의 발언을 되짚어 보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대뜸 의심하니, 그가 기분이 상할 수는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한나로서는 제레미의 정보를 따로 얻을 곳이 없었다. 저 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으니, 본인에게 묻는 것밖에는…….

갑자기 속이 꽉 막힌 듯 불편해졌다.

배려가 없어 보일 수 있으나, 단 한 번만.

정말 단 한 번이라도 그가 아니라고, 결백하다는 말을 한다면 한나는 어떤 의심이 들더라도 제레미를 믿어 줄 작정이었다.

자신을 속이고 암흑길드 수장이 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지 못할 정도로 그의 천성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았다.

“절 의심하는군요.”

순간 제레미가 고개를 다시 올렸다. 붉은 눈동자가 한나에게 박혔다.

“다른 일로 바빴다고 한마디만 하면 돼. 난 그냥, 안심이 되는 말을 네 입을 통해서 듣고 싶은 거야.”

“선생님은 절 믿나요.”

하지만 제레미의 입에선 대답 대신 질문이 나왔다.

“난 당연히…….”

널 믿는다고 한나는 답하려 했지만, 제레미의 상처받은 눈빛에 입이 멈춰 버렸다.

아니, 말이 멈춘 것은 어쩌면…….

그를 믿는다는 말이 진심이라는 확신이 없어서일지도.

‘나는, 정말 제레미가 아니라고 한다면, 믿을 수는 있는 걸까.’

이 상황에 상처받은 것은 제레미뿐만이 아니었다. 한나 역시, 스스로의 이런 갈등에 상처 받고 말았다.

언제부터 제레미를 믿지 못하게 된 걸까.

그가 자신을 속였을 때부터?

아니면, 애초에 자신은 원작의 숙명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이미 단정을 지었던 건 아닐까.

“……믿어.”

“거짓말.”

제레미는 처음으로 한나가 하는 말을 부정했다.

“믿을 거야.”

“적어도 그렇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감췄어야지.”

제레미는 덤덤하게 말을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나는 그가 툭 건드리면 눈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나가 제레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제레미.”

그의 팔목을 손으로 잡았다. 왠지 이대로 홀연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이 느껴져서였다.

“한 번도, 선생님은 한 번도 절 믿은 적이 없던 거예요.”

“아니야. 내가 널…….”

“항상 노심초사, 내가 불안했던 이유가 있겠죠.”

“그건…….”

“일전에 그랬죠. 선생님은 나에게 해를 가하지 못할 거라고.”

갈라티아 마을에서의 대화가 되새겨졌다.

그때 제레미는 자신과 한나의 사이에 칼을 겨누는 상황이 온다면, 두렵지 않겠냐고 물었었다.

“차라리 칼을 겨눴다면, 지금보다 덜 아팠을 거예요.”

제레미는 저버린 믿음이 칼보다 아프게 자신을 파고들 수 있음을 알게 됐다.

한나의 입이 얼어붙었다.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제레미는 한나에게 붙잡힌 팔의 반대 손을 한나의 손 위에 겹쳤다. 따스한 온기가 손등에 닿았지만, 한나의 마음은 여전히 시리기만 했다.

“어떤 식으로든 선생님의 관심을 받는다면, 그게 의심이든, 걱정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제레미…….”

“그런데 아니었나 봐요.”

툭.

제레미가 한나의 손을 치워 냈다. 손이 허공으로 떨어지고, 차가운 공기가 손끝을 스쳤다.

“난 아무래도, 남들 말처럼 욕심이 많나 봐요.”

제레미가 한 걸음 물러났다. 숨을 고른 그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고, 붉은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났다. 사정없이 흔들리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부터는 그렇게 머뭇거릴 필요 없을 거예요.”

“무슨 뜻이야?”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내 모든 걸 다 드러낼 테니, 선생님은 전력을 다해서 걱정해 봐요.”

한나의 동공이 커졌다. 그렇게 말하는 제레미는 흡사,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죽도록 미워하던지.”

분명, 상처받은 게 틀림없다.

“제레미……!”

그때 한나는 변명이라도, 혹은 의심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라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레미는 쌩하니 몸을 돌렸다. 그의 검은 옷이 복도의 그림자에 스며들듯, 제레미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제레미.”

대답해 주는 이 없는 공허한 울림이 신전 복도에 흩어졌다.

저벅저벅.

한나와 헤어진 제레미는 곧장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신전의 어떤 곳으로 거침없이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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